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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5)

자치통감강목(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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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元元年이라
秦建元十二年이라 ◑ 是歲 涼代皆亡하니 僭國一이라
◑ 秦 遣侍臣하여 分巡郡縣하다
秦王堅 下詔曰 往得丞相 常謂帝王易爲注+① 丞相, 謂王猛. 易, 以豉切.러니 自丞相違世 鬚髮半白이라 今天下旣無丞相하니 或政教淪替注+② 替, 廢也. 可遣侍臣分巡郡縣하여 問民疾苦하라
秋七月 遣兵擊涼州하여 八月 敗其兵한대 涼將掌據 死之하니 張天錫하다
天錫 荒于酒色하여 不親庶務하고 黜世子大懐하고 而立嬖妾之子大豫하니 人情 憤怨이러라
秦王堅 以天錫臣道未純이라하여 遣將軍苟萇梁熙等하여 將兵臨西河하고 尙書郞閻負梁殊 奉詔徴之하되 若有違命이어든 卽進師撲討注+① 河水, 過敦煌․酒泉․張掖郡南, 武威郡東北, 爲西河.하라
負殊至姑臧 天錫 會官屬謀之하니 皆怒曰 吾世事晉朝하여 忠節 著於海内하니 今一旦 委身賊庭이면 醜莫大焉이요
且河西天險이니 若悉境内精兵하여 右招西域하고 北引匈奴以拒之 何遽知其不捷也리잇고
天錫 攘袂大言曰 孤計決矣 言降者하리라하고 使謂負殊曰 君欲生歸乎 死歸乎 殊等 辭氣不屈이어늘
天錫하여 射殺之하니 其母嚴氏泣曰 秦主横制天下하여 兵不留行注+① 橫, 胡盲切, 以威勢相脅曰橫. 不留行, 言無所礙也.하니 汝若降之 猶可延數年之命이어늘 今旣抗衡하고 又殺其使者하니 亡無日矣리라
天錫 使將軍馬建으로 帥衆二萬拒秦하다
八月 秦師濟河어늘 天錫 又遣掌據하여 帥衆三萬하여 軍于洪池注+① 掌據, 晉書作常據, 當從之. 洪池, 嶺名, 在姑臧南.러니 苟萇 使姚萇爲前驅한대 馬建 迎降하고 據兵敗하여 就帳免胄하고 西向稽首하고 伏劍而死하다
秦兵 遂至姑臧이어늘 天錫 面縛出降하니 涼州郡縣 悉下
秦以梁熙爲涼州刺史하여 鎭姑臧하고 封天錫歸義侯하다
秦兵之出也 先爲天錫하여 築第於長安이러니 至則居之注+① 爲, 去聲.러라 熙淸儉愛民하니 河右安之
桓沖 聞秦攻涼州하고 遣兵分道撓秦하여 以救涼이러니 不克而罷하다
詔除度田收租之制하다
哀帝減田租하여 畝收二升이러니 至是除之하고 王公以下 口稅米三斛하고 蠲在役之身하다
冬十一月朔 日食하다
劉衛辰 爲代所逼하여 求救於秦注+① 寧康二年, 代王什翼犍擊劉衛辰, 衛辰南走.이어늘 秦王堅 遣行唐公洛, 鄧羌, 朱肜等하여 將兵擊之할새 以衛辰爲鄉導注+② 行唐, 戰國時趙邑, 秦以爲縣, 卽漢之南行唐縣也. 屬常山郡, 魏․晉因之. 洛, 菁之弟也.하다 代王什翼犍 使南部大人劉庫仁으로 將兵拒戰이러니 大敗注+③ 庫仁者, 衛辰之族, 什翼犍之甥也.
什翼犍하여 不能自將하여 乃奔陰山之北이러니 聞秦兵稍退하고 復還雲中하다
什翼犍世子寔 早卒하니 寔子珪尙幼하고 慕容妃諸子皆長이라 繼嗣未定注+① 慕容妃, 燕女也.이러니
庶長子寔君 遂殺諸弟하고 倂弑什翼犍이어늘 秦兵 趨雲中하니 部衆 逃潰하여 國中 大亂이라
珪母賀氏 以珪走하여 依賀訥注+② 訥, 野干之子也.이러라
秦王堅 召代長史燕鳳하여 問代亂故한대 具以對어늘 堅曰 天下之惡 一也라하고 乃執寔君至長安하여 車裂之하다
欲遷珪於長安한대 固請曰
代王遺孫 沖幼하여 莫相統攝하고 庫仁 勇而有智하고 衛辰 狡猾多變하니 皆不可獨任이라
宜分諸部爲二하여 令此兩人統之 兩人 素有深讐 而勢莫敢先發이라
俟其孫稍長하여 立之하면 是陛下有存亡繼絶之德於代하여 使其子孫으로 永爲不侵不叛之臣이니 此安邊之良策也니이다
從之하여 分代爲二部하여 自河以東 屬庫仁하고 自河以西 屬衛辰하여 使統其衆하다
賀氏以珪依庫仁한대 庫仁 招撫離散하여 恩信甚著하고 奉事拓跋珪하여 恩勤周備하여 不以廢興易意러라
常謂諸子曰 此兒有高天下之志하니 必能恢隆祖業이니 汝曹當謹遇之하라
慕容紹私謂其兄楷曰 秦恃其彊大하고 務勝不休하여 北戍雲中하고 南守蜀漢하고 轉運萬里 道殣相望하여 兵疲民困하니 危亡 近矣注+① 殣, 音覲, 路冢也. 又餓殍爲殣.라하니라


【綱】 晉나라(東晉) 烈宗 孝武皇帝 太元 元年이다.
【目】 秦나라(前秦) 符堅 建元 12년이다. 이해에 涼나라(前涼)와 代나라가 모두 망하니, 僭國이 하나이다.
【綱】 봄 정월 초하루에 황제(晉 孝武帝)가 冠禮를 하니, 太后(褚氏)가 정사를 돌려주고 謝安을 中書監 錄尙書事로 삼았다.
【綱】 秦나라(前秦)가 近臣을 보내어 郡縣을 나누어 순행하게 하였다.
【目】 秦王 符堅이 조령을 내리기를 “지난번에 丞相(王猛)을 얻었을 적에는 내 항상 帝王이 되기가 쉽다고 여겼는데,注+① 丞相은 王猛을 이른다. 易(쉽다)는 以豉의 切이다. 승상이 세상을 떠난 뒤부터는 짐의 수염과 머리털이 반은 세었다. 이제 천하에 승상이 없으니, 아마 政教가 침체할 것이다.注+② 替는 폐함이다. 近臣을 보내어 郡縣을 나누어 순행하여 백성들의 疾苦를 探問하도록 하라.” 하였다.
【綱】 가을 7월에 秦나라(前秦)가 군대를 보내어 涼州(前涼)를 공격하여 8월에 양주의 군대를 패퇴시키자, 양주의 장수 掌據가 전사하니, 張天錫이 항복하였다.
【目】 張天錫이 술과 여색에 빠져 여러 정사를 직접 다스리지 않았으며 世子 張大懐를 내치고 총애하는 妾의 아들 張大豫를 세우니, 人心이 분노하고 원망하였다.
【目】 秦王 符堅은 張天錫의 신하된 도리가 순수하지 못하다 하여 將軍 苟萇과 梁熙 등을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西河에 임하게 하고, 尙書郞 閻負와 梁殊로 하여금 조서를 받들고 장천석을 부르게 하되 “만약 명령을 어기거든 즉시 진군하여 토벌하라.” 하였다.注+① 河水는 敦煌, 酒泉, 張掖郡의 남쪽과 武威郡의 동북쪽을 지나 西河가 된다.
【目】 閻負와 梁殊가 姑臧에 이르자, 張天錫이 여러 관원을 모아놓고 의논하니, 모두 노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대대로 晉나라 조정을 섬겨서 忠節이 海内에 드러났는데, 지금 하루아침에 賊의 조정(前秦)에 몸을 맡기면 수치가 이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또 우리 河西는 천연적인 험지이니, 만약 境內에 있는 정예병을 모두 동원하여 오른쪽으로 西域을 부르고 북쪽으로 匈奴를 끌어와 적을 막으면 어찌 승리하지 못할 것을 대번에 알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目】 張天錫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큰소리치기를 “나의 계책이 결정되었으니, 항복하겠다고 말하는 자는 참수하겠다.” 하고는 使者를 보내어 閻負와 梁殊에게 “그대들은 살아서 돌아가고자 하는가, 죽어서 돌아가고자 하는가.” 하였는데, 양수 등의 말소리와 기색에 전혀 굴복함이 없었다.
장천석이 노하여 이들을 활로 쏘아 죽이니, 그의 어머니 嚴氏가 울며 말하기를 “秦나라 군주는 위엄과 세력으로 천하를 제압하여 군대가 〈가는 곳마다 석권하여〉 지체함이 없다.注+① 橫은 胡盲의 切이니, 위엄과 세력으로 상대를 위협함을 橫이라 한다. ‘不留行’은 군대가 지체하는 바가 없음을 말한다. 네가 만약 그에게 항복하면 그래도 몇 년의 목숨을 연장할 수 있을 터인데, 이제 대항을 하는 데다가 그의 사자까지 죽였으니, 머지않아 망할 것이다.” 하였다.
장천석은 장군 馬建으로 하여금 2만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진나라 군대를 막게 하였다.
【目】 8월에 秦나라(前秦) 군대가 河水를 건너가자, 張天錫은 또다시 掌據를 보내어 3만의 병력을 거느려 洪池에 주둔하게 하였다.注+① ‘掌據’는 ≪晉書≫에 ‘常據’로 되어 있으니, 마땅히 이를 따라야 한다. 洪池는 고개의 이름이니, 姑臧의 남쪽에 있다. 진나라의 苟萇이 姚萇을 선봉으로 삼자, 馬建은 이들을 맞이하여 항복하였고, 장거는 군대가 패하여 장막에 나아가 투구를 벗고 서쪽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리고서 칼로 자살하였다.
【目】 秦나라(前秦) 군대가 마침내 姑臧에 이르자, 張天錫이 얼굴을 내놓고 두 손을 등 뒤로 포박하여 나와 항복하니, 涼州의 郡縣이 모두 항복하였다.
진나라는 梁熙를 涼州刺史로 삼아 고장에 진주시키고 장천석을 歸義侯에 봉하였다.
처음 진나라 군대가 출동할 적에 먼저 장천석을 위하여 長安에 집을 건축해두었는데, 장천석이 이곳으로 와서 여기에 거처하였다.注+① 爲(위하다)는 去聲이다. 양희는 청렴하고 검소하고 백성을 사랑하니, 河西 지방이 편안하였다.
〈晉나라(東晉)〉 桓沖은 진나라가 양주를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파견해서 길을 나누어 진나라를 교란하여 양주를 구원하게 하였는데, 이기지 못하고 해산하였다.
【綱】 〈晉나라(東晉)가〉 조령을 내려 田地를 헤아려 조세를 거두는 제도를 없앴다.
【目】 당초 哀帝가 田租를 減하여 1畝에 2升을 거두었는데, 이때 이것을 없애고 王公 이하는 식구마다 稅米 3斛을 거두고 兵役이나 勞役 중인 사람은 賦稅를 면제하였다.
【綱】 겨울 11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綱】 秦나라(前秦)가 군대를 보내어 代나라를 공격하여 패주시켰는데, 12월에 대나라 拓跋寔君이 그의 군주 拓跋什翼犍을 시해하자, 진나라가 그를 토벌하여 죽이고 마침내 대나라를 나누어 두 部로 만들었다.
【目】 〈匈奴의〉 劉衛辰이 代나라에 핍박을 받고는 秦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자,注+① 寧康 2년(374) 代王 拓跋什翼犍이 劉衛辰을 공격하니, 유위신이 남쪽으로 달아났다. 秦王 符堅이 行唐公 符洛과 鄧羌, 朱肜 등을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대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이때 유위신을 鄉導로 삼았다.注+② 行唐은 전국시대 趙나라의 邑인데, 秦나라가 縣으로 삼은 곳이니, 바로 漢나라 남쪽의 行唐縣이다. 이곳을 常山郡에 소속시켰는데, 魏나라와 晉나라가 이를 인습하였다. 符洛은 符菁의 아우이다. 代王 拓跋什翼犍이 南部大人 劉庫仁으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진나라 군대를 막고 싸우게 하였는데 대패하였다.注+③ 劉庫仁은 劉衛辰의 집안이니, 拓跋什翼犍의 생질이다.
탁발십익건은 병이 들어 군대를 거느리고 출정하지 못하고 마침내 陰山의 북쪽으로 달아났는데, 진나라 군대가 차츰 후퇴한다는 말을 듣고는 다시 雲中으로 돌아왔다.
【目】 당초에 拓跋什翼犍의 세자인 拓跋寔이 일찍 죽었는데, 탁발식의 아들 拓跋珪는 아직 어리고 慕容妃가 낳은 여러 아들은 모두 나이가 많아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였다.注+① 慕容妃는 燕나라 여자(慕容皝의 여동생)이다.
庶長子인 拓跋寔君이 마침내 여러 아우를 죽이고 아울러 탁발십익건을 시해하자, 秦나라 군대가 雲中으로 달려가니, 부락의 무리들이 흩어져 도망하여 代나라 안이 크게 혼란하였다.
탁발규의 어머니 賀氏는 탁발규를 데리고 달아나 賀訥에게 의지하였다.注+② 賀訥은 賀野干의 아들이다.
【目】 秦王 符堅은 代나라 長史 燕鳳을 불러 대나라에 난리가 난 이유를 묻자, 연봉은 자세히 대답하였다. 부견은 “천하의 惡은 똑같다.” 하고는 마침내 拓跋寔君을 잡아 長安에 도착하여 그를 車裂刑으로 죽였다.
【目】 符堅이 拓跋珪를 長安으로 옮기려고 하자, 燕鳳이 다음과 같이 굳이 청하였다.
“代王의 남은 손자가 나이가 어려서 전체를 도맡아 다스리지 못합니다. 劉庫仁은 용맹하고 지혜가 있고, 劉衛辰은 교활하여 변고가 많으니, 두 사람 모두 代나라를 단독으로 맡길 수가 없습니다.
마땅히 여러 部를 나누어 둘로 만들어서 이 두 사람으로 하여금 한 部씩 다스리게 하여야 합니다. 두 사람은 평소 깊은 원한이 있으나, 형세상 감히 먼저 난을 일으키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손자가 자랄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를 왕으로 세우면 폐하는 代나라에 멸망한 나라를 보존하고 끊어진 대를 이어주는 은덕이 있게 되어 그 자손을 영원히 침략하지 않고 배반하지 않는 신하로 만들 수 있으니, 이는 변경을 편안히 하는 좋은 계책입니다.”
부견은 그의 말을 따라 대나라를 나누어 두 부로 만들어서 河水 동쪽 지방은 유고인에게 소속시키고 河水 서쪽 지방은 유위신에게 소속시켜 그들에게 각각의 백성을 통솔하게 하였다.
【目】 賀氏가 拓跋珪를 데리고 劉庫仁에게 의지하자, 유고인이 離散한 자들을 불러 어루만져 은혜와 신의가 크게 드러났고 慈愛와 勞苦를 두루 다하여 탁발규를 받들어 섬겼는데, 拓跋氏의 興廢를 가지고 태도나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유고인은 일찍이 여러 아들에게 이르기를 “탁발규 이 아이가 천하에 우뚝한 뜻이 있어서 반드시 할아버지의 基業을 크게 높일 것이니, 너희들은 마땅히 삼가 대우하라.” 하였다.
慕容紹가 은밀히 형 慕容楷에게 이르기를 “秦나라(前秦)가 강대함을 믿고서 끊임없이 이기기를 힘쓰므로 북쪽으로 雲中을 지키고 남쪽으로 蜀漢을 지키고 만 리 먼 길로 군량을 운반하느라 도로에서 굶어 죽는 자가 서로 이어지고 군사들이 피로하고 백성들이 곤궁하니, 위태롭고 멸망할 날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하였다.注+① 殣은 음이 覲이니, 길가의 무덤이다. 또 굶어 죽은 시체를 殣이라 한다.


역주
역주1 帝冠……錄尙書事 : “褚太后가 세 번 조정에 임했을 적에 정사를 돌려주었다고 쓴 것이 두 번이나, 모두 황제가 冠禮한 것을 앞에 놓았으니, 태후는 절제할 줄을 알았다고 이를 만하다. 위에서는 정사를 돌려주었다고 쓰고 아래에서는 태후가 죽었다고 쓴 것,(이는 漢나라 桓帝 梁太后이다.) 그리고 위에서는 정사를 돌려주었다고 쓰고 아래에서는 다시 制를 칭했다고 쓴 것(이는 唐나라 高宗 武氏이다.)과는 크게 다르다. ≪資治通鑑綱目≫에서 태후가 정사를 돌려주었다고 쓴 것이 네 번인데, 오직 褚氏에게만은 비난하는 말이 없다.[褚太后三臨朝 凡再書歸政矣 皆以帝冠首之 后可謂知節者也 與上書歸政 下書太后喪(漢桓帝梁太后) 上書歸政 下書復稱制者(唐高宗武氏) 大異矣 綱目書太后歸政四 惟褚氏無譏焉]” ≪書法≫
역주2 秦遣兵擊代……分代爲二部 : “代나라에서 시해한 사건이 발생하자 秦나라가 ‘討’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군주를 시해한 역적은 누구나 토벌할 수 있기 때문이니, ≪資治通鑑綱目≫에서 악한 자를 주벌함이 엄격하다. 이 때문에 祖約이 晉나라에서 배반하자 趙나라(後趙)가 〈토벌한 것을〉 ‘誅’라 썼고,(成帝 咸和 5년(330)이다.) 拓跋寔君이 대나라에서 시해하자 진나라가 〈토벌한 것을〉 ‘討’라 쓴 것이다.(이해(376)이다.)[代弑也 秦書討, 何 弑逆之賊 夫人得而討之 綱目之誅惡 嚴矣 是故祖約反於晉 而趙書誅(成帝咸和五年) 寔君弑於代 而秦書討(是年)]” ≪書法≫

자치통감강목(15) 책은 2022.12.07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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