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흉노匈奴의 군신선우軍臣單于가 죽자, 아우인 이치사선우伊稚斜單于(흉노의 제5대 선우)가 즉위하였다.注+사斜는 사차士嗟와 직아直牙의 두 가지 절切이다.
綱
[綱] 공손홍公孫弘을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삼고, 봄에 창해군蒼海郡을 폐지하였다.
目
[目] 당시에 서남이西南夷와 왕래하고 동쪽으로 창해군蒼海郡을 설치하고 북쪽으로 삭방군朔方郡을 축조하니, 공손홍公孫弘이 자주 간하기를 “중국을 피폐하게 하여 쓸모없는 땅을 받들고 있습니다.” 하고, 이것을 폐지할 것을 청하였다.注+피폐罷敝의 파罷는 피疲로 읽는다.
그러자 천자가 주매신朱買臣 등으로 하여금 삭방군을 설치하는 것이 편리한 점을 논란하게 하여注+난難(논란하다)은 거성去聲이다. 10가지 조목을 말하게 하였는데, 공손홍이 하나도 대답하지 못하였다.注+〈“홍弘부득일不得一”은〉 그 10가지의 이해利害에 대해 공손홍公孫弘이 응답하지 못했음을 말한 것이다. 공손홍의 재주로 하나도 대답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감히 상上을 거역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에 사죄하여 말하기를 “산동山東에 사는 시골 사람이 그 편리함을 알지 못함이 이와 같으니, 원컨대 서남이와 왕래를 끊고 창해군은 폐지하고 오로지 삭방군만을 받들고자 합니다.” 하니, 상上이 이에 허락하였다.
目
[目] 공손홍公孫弘이 삼베로 만든 이불을 덮고, 음식을 먹을 적에 맛있는 고기를 두 가지 이상 먹지 않았다.注+중重은 직룡直龍의 절切이니, 맛있는 고기를 두 가지 이상 먹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급암汲黯이 말하기를 “공손홍은 지위가 삼공三公이어서 봉록이 매우 많은데 이와 같이 행동하는 것은 거짓된 행동입니다.” 하자, 상上이 공송홍에게 물었다.
공손홍이 사죄하며 말하기를 “그런 점이 있습니다.
구경九卿 가운데 신과 친한 사람으로 급암보다 더한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급암이 조정에서 신을 힐문하여, 진실로 신의 병통을 정확히 지적하였습니다.注+중中(맞추다)은 거성去聲이다.
신이 진정 거짓으로 꾸며서 명예를 구하고자 하였으나,注+조釣는 취한다는 뜻이니, 물고기를 낚는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급암의 충언이 없었다면 폐하께서 어떻게 이런 말을 들으실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上은 공손홍公孫弘이 겸손하다고 여기고 더욱 후대하였다.
綱
[綱] 사면赦免하였다.
綱
[綱] 장건張騫을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삼았다.
目
[目] 이전에 흉노匈奴 중에 항복한 자들이 말하기를 “월지月氏가 옛날에 돈황敦煌(돈황燉煌)과 기련산맥祁連山脈 사이에 살면서 강대국이 되었습니다.注+돈황敦煌은 장안長安 서쪽으로 2,800여 리 떨어진 곳에 있다. 기련祁連은 산의 이름이니, 바로 천산天山이다. 흉노는 하늘을 기련祁連이라 부른다. 일명은 설산雪山이고 일명은 태백산太白山이니 사시四時에 눈이 덮여 있는데, 장액張掖 서북쪽에 있다.
을 격파하고 그 땅을 나누어 점령하였는데,注+하夏는 상성上聲이니, 대하국大夏國은 대완大宛에서 서남쪽으로 2,000여 리 떨어진 곳에 있다. 땅이 비옥하고 침입하는 자가 적어서 흉노에게 복수하려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
장건이 1년 넘게 머무르다가 돌아오는 도중에 다시 흉노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다.
마침 흉노가 혼란해지자 장건이 도망하여 귀국하니, 처음 출발했을 적에는 100여 명이었는데 13년이 지나서는 2명만 돌아올 수 있었다.
綱
[綱] 흉노匈奴가 대군代郡과 안문雁門을 침입하였다.
綱
[綱] 여름 6월에 황태후(왕지王娡)가 붕崩하였다.
綱
[綱] 가을에 서남이西南夷와 왕래를 끊었다.
綱
[綱] 장탕張湯을 정위廷尉로 삼았다.
目
[目] 장탕張湯은 사람됨이 속임수가 많아서 잔꾀를 부려 사람들을 제어하였다.注+〈“무지이어인舞智以御人”은〉 그 지모를 부려 타인을 제어함을 이른다.
당시에 상上의 마음이 막 문학文學에 향하여 있었는데,注+향鄕(향하다)은 향嚮으로 읽는다. 장탕은 동중서董仲舒와 공손홍公孫弘 등을 겉으로만 섬기는 척하고,注+양陽(겉)은 양佯과 통용되고 부浮는 헛되다는 뜻이다. 겉으로 도의道義로써 교제하는 척하는데 진심이 아니다. 그러므로 부浮라 한 것이다.아관兒寬(예관)을 주얼연奏讞掾(옥사를 아뢰는 아전)으로 삼아서注+아兒는 오해五奚의 절切이니, 예倪와 통용된다. 아관兒寬은 사람의 성명姓名이다. 주얼奏讞은 상에게 주청奏請하여 죄를 판정하는 것이다. 연掾은 관속官屬이다.
옥사를 다스림에 있어, 상上이 벌을 주고자 하는 자이면 법대로 엄격하게 처리하는 감監과 사史에게 죄인을 넘겼고, 상上이 풀어주고자 하는 자이면 느슨하고 가볍게 처리하는 감監과 사史에게 죄인을 넘기니, 상上이 이 때문에 좋아하였다.注+“소치所治”는 모든 옥사를 다스림을 이른다. 감사監史는 감監과 사史이다. 《한서漢書》 〈백관표百官表〉에 “정위廷尉에는 좌우감左右監이 있으니, 봉록이 일천석一千石이다.” 하였다. 《한관漢官》에 “정위廷尉의 옥사獄史는 27명이다.” 하였다. “심화深禍”는 법조문을 가지고 매우 각박하게 적용하여 사람을 화에 빠뜨리려고 하는 것이다. 〈“즉상의소욕죄卽上意所欲罪여감사심화자與監史深禍者”는〉 상上이 죄를 주고자 생각하는 사람은 장탕이 가혹한 옥리에게 회부하여 살피게 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장탕은 친구의 자제를 돕고 대우하는 일에 매우 후하였고,注+조調는 도와주어서 그 알맞은 바를 얻게 하는 것이요, 호護은 보호하는 것이다.공公들에게 가서 문안하는데 추위와 더위를 피하지 않으니, 이 때문에 명성을 얻었다.注+조造(가다)는 칠도七到의 절切이다. 지至는 이름이다. 청請은 부탁함이다.
目
[目] 급암汲黯은 자주 상上의 앞에서 장탕張湯을 다음과 같이 질책하였다.注+삭數(자주)은 음이 삭朔이다. 지質은 상대함이니, 〈“질책質責”은〉 대면하여 질책하는 것이다. 혹자는 “질정함이니, 정의正義로써 꾸짖는 것이다.” 하였다.
“그대는 정경正卿이 되어서注+한漢나라 관직에는 구경九卿 외에 다시 구경九卿의 반열에 있는 자가 있었다. 그러므로 구경九卿을 일러 정경正卿이라 한 것이다. 위로는 선제先帝의 공업功業을 기리지 못하고 아래로는 천하의 사악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해서 나라를 편안히 하고 백성을 부유하게 하여 감옥을 텅 비게 하지도 못하면서, 어찌 쓸데없이 고황제高皇帝 때의 법령을 가져다가 어지럽게 고치는 것이오?注+〈“분경지위紛更之爲”는〉 어찌 분란을 일으켜 고치느냐고 말한 것이다.
그대는 이 때문에 자손이 없게 될 것이오.”注+〈“이공이차무종의而公以此無種矣”는〉 주벌을 당하는 것이 자손에 미침을 말한 것이다.
급암이 당시 장탕과 논의할 적에 장탕의 논변이 늘 법조문을 각박하게 적용하고 작은 일에도 가혹하니,
역주6옛 법령 :
《史記》 〈酷吏列傳〉에는 “張湯이 중대한 사건을 결정할 때에 古義에 부합하고자 博士의 제자 중 《尙書》와 《春秋》에 밝은 자들을 廷尉의 史로 삼아서 법령에 의심스러운 부분을 해결하였다.” 하였다. 兒寬 역시 歐陽生에게 《상서》를 배우고 孔安國의 제자가 되었다.
역주7中行說(중항열)이……것이다 :
中行說은 漢 文帝가 匈奴 老上單于에게 종실의 딸을 시집보낼 때 수행하게 한 환관이다. 중항열이 강제로 흉노에 간 것을 원망하고 흉노에 귀순하여 노상선우의 측근이 되었다. “必我也 爲漢患者”는 《漢書》 〈匈奴傳〉에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