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속이 마침내 단필제와 함께 단말배를 추격하여 대파하니, 단필제가 이에 아우 단문앙段文鴦과 함께 계薊 지역으로 진공하였다.注+② 段匹磾가 邵續에게 달아나니, 薊 지역이 石氏에게 점령당하였다.
후조왕後趙王석륵石勒은 소속의 형세가 외롭다는 것을 알고, 석호石虎를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공격하게 하였다. 소속이 직접 나와 석호를 공격하자, 석호가 기병騎兵을 매복하여 소속의 후방을 차단하여 마침내 소속을 사로잡고는, 그를 보내어 염차성厭次城을 항복시키게 하였다.注+③ 〈“遂執續 使降其城”은〉 邵續을 보내 厭次城을 항복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소속은 조카 소축邵竺(소축) 등을 불러 당부하기를 “나는 평소 국가에 보답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이렇게 되어버렸다. 너희들은 부디 노력하여 단필제를 받들어 주인으로 삼고 딴마음을 품지 말라.” 하였다.
단필제가 돌아가서 소속의 아들 소집邵緝 등과 함께 굳게 수비하였다. 석호가 소속을 양국襄國으로 압송하니, 석륵은 그가 충성스럽다 하고 석방하여 예우하고는, 인하여 명령을 내리기를 “지금부터 적을 이겼을 때에 선비를 사로잡으면 반드시 살려서 데리고 오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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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이부랑吏部郎유윤劉胤은注+① 劉胤은 邵續이 晉나라에 보낸 사람이다.소속邵續이 석호石虎에게 공격당한 소식을 듣고서 황제(진晉원제元帝)에게 아뢰기를 “북방의 번진藩鎮 중에 오직 소속만 남았는데, 만일 소속이 석호에게 멸망을 당한다면, 이는 의사義士들의 마음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마땅히 군대를 출동하여 구원하여야 합니다.” 하였으나, 황제가 따르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소속이 이미 패하여 사로잡혔다는 말을 듣고는, 조령詔令을 내려서 소속의 지위와 임무를 아들 소집邵緝에게 주었다.
가 낙양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사주자사司州刺史이구李矩에게 항복하자, 이구가 영천태수潁川太守곽묵郭黙으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낙양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후조後趙의 석생石生이 송시宋始의 군대를 사로잡고 북쪽으로 황하를 건너갔는데, 이때 하남河南의 백성들이 모두 서로 거느리고 이구에게 귀의하니, 낙양이 마침내 텅 비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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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3월에 〈진晉나라(동진東晉)가〉 모용외慕容廆를 평주자사平州刺史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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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배억裴嶷이 건강建康에 이르러, 모용외慕容廆가 위엄과 덕이 있어서 현자와 준걸들이 모두 그를 위해 쓰이고자 한다고 크게 칭찬하니, 조정에서 비로소 모용외를 중시하였다.注+① 조정에서 처음에는 慕容廆를 먼 변방의 오랑캐로 대하였는데, 이제 裴嶷의 말 때문에 비로소 그를 소중히 여긴 것이다. 황제(진晉원제元帝)가 배억을 조정에 머물러 두려고 하자, 배억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은 어려서부터 국가의 은혜를 입어 궁궐에 출입하였으니,注+② 裴嶷이 西晉의 조정에서 벼슬하여 中書侍郞과 給事黃門郞을 역임하였기 때문에 궁궐에 출입했다고 말한 것이다. 만약 다시 연곡輦轂(도성)에서 황제를 받들 수 있다면 신의 지극한 영광일 것입니다. 다만 옛 서울(낙양)이 함락되고 능침陵寢이 훼손되었는데, 이름난 신하와 원로 장군들 중에 아무도 이 치욕을 깨끗이 씻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유독 용양장군龍驤將軍 모용외가注+③ 太興 원년(318) 봄에,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慕容廆에게 龍驤將軍을 제수하였다. 왕실에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臣을 보내서 만 리 멀리 정성을 바치게 하였으니, 지금 신이 돌아가지 않으면 그는 반드시 조정에서 자신이 궁벽하고 누추하여 버린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리하여 의義를 향하는 마음을 저버려서 역적을 토벌하는 데 게으르게 될 것이니, 이는 신臣이 매우 애석히 여기는 바입니다.”
황제가 그의 말을 옳게 여겨서 배억을 따라 사신을 딸려 보내어 모용외를 안북장군安北將軍, 평주자사平州刺史로 임명하였다.
綱
[강綱] 여름 5월에 상규上邽의 여러 장수들이 진왕晉王사마보司馬保를 죽이니, 사마보의 옛 장수 진안陳安이 한漢나라(전조前趙)에 항복해서 역적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상규의 여러 장수들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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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사마보司馬保는 체중이 8백 근이요, 잠자기를 좋아하고 독서를 좋아하였으나, 사리에 밝지 못하고 유약柔弱하여 매사에 과감하게 결단하지 못하였으므로 난難을 만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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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양감羊鑒이 죄를 지어 제명除名하고, 서주자사徐州刺史채표蔡豹로 그를 대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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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양감羊鑒이 서감徐龕을 토벌할 적에 군대를 하비下邳에 주둔하고 감히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채표蔡豹가 서감을 단구檀丘에서注+① 檀丘는 魯國 卞縣 동남쪽에 있다. 물리쳤다.
서감이 후조後趙에 구원을 청하자 석륵石勒이 장수 왕복도王伏都를 보내어 서감을 구원하였는데, 왕복도가 지나치게 포악하니 서감은 왕복도가 자신을 기습할까 의심해서 그를 참수하고 다시 진晉나라(동진東晉)에 와서 항복을 청하였다.
그러나 진晉나라 조정에서는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고 양감에게 진격하도록 명하였는데, 양감은 여전히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전진하지 못하였다. 조협刁協이 양감을 탄핵하니, 죽음을 면해주되 관적官籍에서 제명除名시키고는,注+② “除名”은 관원에게는 그 품직을 면제하고 아전에게는 役職을 면제하여, 일반 평민과 똑같이 되게 함을 말한다.채표蔡豹에게 대신 그 군대를 거느리게 하였다.
왕도王導는 자신이 서감을 잘못 천거했다 하여 스스로 폄출貶黜되기를 청하였으나, 황제(진晉원제元帝)는 허락하지 않았다.
[목目] 조趙나라(전조前趙) 장수 해호解虎와 윤거尹車가 반역을 도모하여 파족巴族의 추장인 구서句徐와 사팽厙彭(사팽) 등과注+① 句는 古侯의 切이고, 厙는 音이 舍이니, 모두 姓이다. 서로 결탁하였는데, 이 일이 발각되어 해호와 윤거가 죽임을 당하였다.
조주趙主유요劉曜가 구서와 사팽 등 50여 명을 가두고 죽이려 하였는데, 광록대부光祿大夫유자원游子遠이 간諫하기를 “성왕聖王이 형벌을 사용할 때에는 오직 원흉元兇만을 주벌하니, 많은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유요가 노하여 유자원을 가두고 구서와 사팽 등을 죽이니, 이에 파족巴族의 무리가 모두 배반하여, 사방의 산중에 있는 저족氐族과 강족羌族과 파족巴族과 지역의 갈족羯族 중에 이에 호응한 자가 30여만 명이 되었다. 관중關中이 크게 혼란하여 낮에도 성문을 닫았다.
目
[목目] 유자원游子遠이 또다시 옥중에서 표문을 올려 간쟁하자, 유요劉曜가 손수 그 표문을 찢고 좌우 사람을 꾸짖으면서 속히 그를 죽이라고 명하였다. 호연안呼延晏 등이 다음과 같이 간하였다.
“유자원이 감옥에 갇혀서도 간쟁하기를 잊지 않으니, 지극한 충성입니다. 어찌하여 그를 죽인단 말입니까. 유자원이 아침에 죽임을 당하면 신들도 또한 마땅히 저녁에 죽어서 폐하의 잘못을 드러내겠습니다. 천하가 폐하를 버리고 떠나갈 것이니, 폐하가 누구와 함께 거처하겠습니까.” 유요가 마침내 명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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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유요劉曜가 또다시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구서句徐 등을 토벌하려 하자, 유자원游子遠이 또다시 간하였다.
“저들은 큰 뜻이 있어서 바라서는 안 될 〈제왕帝王의〉 일을 도모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요,注+① 〈“彼非有大志 欲圖非望”은〉 帝王의 일은 보통 사람이 바랄 바가 아님을 이른다. 다만 위엄과 형벌을 두려워해서 죽음을 피하고자 할 뿐이니, 크게 사면을 해서 저들에게 새 출발을 하게 해주는 것만 못합니다.
그동안 적몰籍沒되어 노예로 편입된 자들을 모두 풀어 보내어 그들로 하여금 서로 불러들여 그들의 생업을 회복하도록 허락한다면 저들은 살 길을 얻을 것이니, 어찌하여 항복하지 않겠습니까.
저들 가운데 스스로 죄가 무거운 줄을 알고서 〈반란을 일으켜〉 한곳에 모여 흩어지지 않는 자들은, 신에게 약한 병력 5천을 빌려주시면 반드시 폐하를 위하여 〈그들의 머리를〉 효시하겠습니다.”
유요가 크게 기뻐하여 당일로 대사령大赦令을 내리고 유자원을 거기대장군車騎大将軍으로 삼아서 나아가 안정安定에 주둔하게 하니, 배반했던 자들이 모두 항복하였다.
오직 구씨句氏의 종당宗黨이 은밀隱密을注+② 陰密縣은 安定郡에 속하였다. 지키고 있었는데, 진격하여 그들을 멸망시키고 저족氐族과 강족羌族 20여만 명을 장안으로 옮기니, 유요가 유자원을 대사도大司徒녹상서사錄尙書事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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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조趙나라(전조前趙)가 태학太學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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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조趙나라(전조前趙)가 태학太學을 세우고는, 백성 중에 가르칠 만한 자 1,500명을 선발하고서 유신儒臣을 가려 이들을 가르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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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조趙나라(전조前趙)가 교예喬豫와 화포和苞를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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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조주趙主유요劉曜가 풍명관酆明觀과注+① 觀(누각)은 音이 貫이니, 아래도 같다.서궁西宫, 능소대陵霄臺를 짓고 또
“지난번 풍명관을 지을 적에 시장과 도로의 백성들이 모두 말하기를 ‘풍명관 하나를 짓는 공력功力을 들이면, 충분히 양주涼州를 평정할 수 있다.’ 하였는데, 지금 또다시 아방궁阿房宮을 모방하여 서궁西宫을 세우고 경대瓊臺를 본받아 능소대陵霄臺를 짓고자 하시니, 그로 인해 소요되는 인력人力과 재력財力이 풍명관보다 억만 배나 됩니다.
만약 〈이 물자와 노력을〉 군대에 지급하면, 오吳와 촉蜀을 겸병兼倂하고 제齊와 위魏를 통일할 수 있을 것입니다.注+② 吳는 晉을 이르고, 蜀은 李特을 이르고, 齊는 曹嶷을 이르고, 魏는 石勒을 이른다. 그리고 또 수릉壽陵을 경영하는데 둘레가 4리里이고, 동銅으로 곽椁(외관外棺)을 만들어 황금으로 꾸미며, 그 깊이가 35장丈이니,注+③ ≪資治通鑑≫에 “둘레가 4里이고 깊이가 35丈인데, 銅으로 槨(椁)을 만들고 황금으로 꾸몄다.” 하였다. 거의 국내의 힘으로 마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로부터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고 도굴당하지 않은 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이 검소하게 장례한 것은 바로 깊고 원대한 생각에서입니다.”
이에 유요가 조령을 내리기를 “두 시중侍中이 간곡하고 간곡하여 고인古人의 풍모가 있으니, 사직社稷의 신하라고 이를 만하다. 그 여러 역사役事를 모두 파하고, 수릉壽陵의 제도制度는 한결같이
교예와 화포에게 간의대부諫議大夫를 겸하게 하고 또 풍수酆水의 동산을注+④ 酆水는 京兆의 南山에서 발원하여 동북쪽으로 渭水로 흘러 들어가는데, 劉曜가 酆水의 좌우에 동산을 세웠다. 줄여서 가난한 백성들에게 주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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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가을 7월에 후조後趙의 군대가 후퇴하여 달아나자, 조적祖逖이 나아가 옹구雍丘에 주둔하니, 조령詔令을 내려서 진서장군鎮西將軍의 칭호를 가하였다.
目
晉祖逖威震河南
[목目] 조적祖逖의 장수 한잠韓潜이 후조後趙의 장수 도표桃豹와 진천陳川의 옛 성을 나누어 점거하고서 서로 40여 일 동안 대치하고 있었는데, 조적이 포대 속에 흙을 담아서 천여 명으로 하여금 이것을 운반하여 한잠에게 공급하고 〈군량軍糧이 많은 것처럼 위장하게 하였다.〉
또 몇 사람에게 쌀을 짊어지고 가게 하였는데, 길에서 쉬던 중에 도표의 군대가 추격하자 이들은 즉시 쌀을 버리고 달아났다.
도표의 병사들이 오랫동안 굶주렸는데, 〈버리고 간 쌀을 보고〉 조적의 병사들은 의식衣食이 풍부할 것이라고 여겨서 크게 두려워하였다. 후조後趙에서 양식을 운반하여 도표에게 공급하자, 조적이 또다시 한잠을 보내 이들을 요격하여 양식을 빼앗으니, 도표가 밤을 틈타 달아났다.
이에 조적은 한잠으로 하여금 나아가 봉구封丘에 주둔해서 도표를 압박하게 하였다. 조적이 옹구雍丘에 진주하니, 후조後趙의 진영에서 수자리를 살던 자들 중에 조적에게 귀의한 자가 매우 많았다.注+① 封丘와 雍丘 두 縣은 모두 陳留郡에 속하였다.
目
[목目] 이보다 앞서 이구李矩와 곽묵郭黙 등이 서로 공격하였는데, 조적祖逖이 급히 사자使者를 보내어 화해시키고 화복禍福의 이치를 깨우쳐주니, 마침내 두 사람 모두 조적의 조정調整을 받아들였다. 이에 조령詔令을 내려서 조적에게 진서장군鎮西將軍을 가하였다.
조적은 장병들과 고락苦樂을 함께하고 자기의 몸가짐을 단속하고 사람들에게 베풀기를注+① 施(베풀다)는 去聲이다. 힘쓰며, 농업과 잠업을 권장하고 새로 귀의하여 따르는 자들을 어루만지고 받아들여서, 비록 관계가 소원하고 지위가 미천한 자라도 모두 은혜와 예로써 교분을 맺었다.
중에 이보다 앞서 후조後趙에 인질을 보낸 경우에는 두 나라 모두에 속할 것을 허락하고는,注+② 晉나라와 後趙 두 나라의 경계에 거주하는 자들에게 양쪽 모두에 속할 것을 허락하고는 그들을 간첩으로 삼은 것이다. 때로 유격대를 보내어 거짓으로 노략질해서 그들이 자기에게 귀의하지 않았다는 것을 〈후조後趙에〉 보여주니, 오주塢主들이 모두 은혜에 감격하여 후조後趙에 특별한 계책(침공)이 있을 때마다 번번이 조적에게 밀고하였다.
이 때문에 〈조적이 후조後趙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노획한 바가 많으니, 황하黃河 이남 지역에서 후조後趙를 배반하고 진晉나라(동진東晉)에 귀의하는 자들이 많았다.
目
[목目] 조적祖逖이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곡식을 비축하여 황하黃河 이북 지역을 점령할 계책을 세우니, 후조왕後趙王석륵石勒이 이를 염려하여 마침내 유주幽州에 명하여 조적을 위해 조적의 조고祖考와 아버지 묘를 수축修築하고 그 묘를 지키는 두 집을 배치하고는, 조적에게 편지를 보내어 사신을 통하고 시장에서 물건을 교역할 것을 요구하였다.注+① 祖逖은 范陽 사람이니, 그 祖考와 부친의 묘소가 범양에 있었다.
조적이 답장을 보내지 않고 시장에서 물건을 교역할 것을 허락하니, 이로 인해 얻은 이익이 10배나 되었다.
조적의 아문牙門동건童建이注+② 童建은 사람의 姓名이다.후조後趙에 항복하자, 석륵이 그를 참수하고 그의 머리를 조적에게 보내며 말하기를 “배반한 신하와 도망한 관리는 내가 매우 원수로 여기는 자이니, 장군이 미워하는注+③ 惡(미워하다)는 烏路의 切이다. 것이 내가 미워하는 것과 같다.” 하였다.
이후로 후조後趙 사람이 배반하여 진晉나라에 귀의하는 자가 있으면 조적이 이들을 모두 받아주지 않고 또 여러 장수들에게 금령을 내려 후조後趙의 백성들을 침해하거나 포악하게 대하지 못하게 하니, 변경의 사이가 다소 평화로워졌다.
綱
[강綱] 8월에 양주자사梁州刺史주방周訪이 졸卒하니, 조령詔令을 내려서 감탁甘卓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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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주방周訪이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받아들이기를 잘하니, 병사들이 모두 그를 위하여注+① 爲(위하다)는 去聲이다.사력死力을 다하였다. 주방은 왕돈王敦이 신하 노릇 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항상 절치부심切齒腐心하니, 왕돈이 이 때문에 주방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감히 반역을 하지 못하였다.
주방이 졸卒하자, 왕돈이 곽서郭舒를 보내어서 주방의 군대를 감독하게 하였다. 황제(진晉원제元帝)가 감탁甘卓을 양양襄陽에 진주시키고 곽서를 불러 우승右丞으로 삼았는데, 왕돈이 〈곽서를 자신이 있는 곳에〉 붙들어두고 보내지 않았다.
綱
[강綱] 채표蔡豹가 서감徐龕과 싸우다가 패하여 죽임을 당하니, 서감이 마침내 후조後趙에 항복하였다.
[목目] 후조왕後趙王석륵石勒은 법法을 적용함이 준엄峻嚴하였다. 장빈張賓으로 하여금 인재를 선발하는 것을 관장하게 하여 구품九品을 정하고, 공경公卿과 주군州郡의 장長에게 명하여 해마다 수재秀才, 지효至孝, 염청廉清, 현량賢良, 직언直言, 무용武勇 여섯 분야의 선비를 각각 한 명씩 천거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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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겨울 12월에 초왕譙王사마승司馬氶(사마승)을 상주자사湘州刺史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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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황제(진晉원제元帝)가 처음 강동江東에 진주하였을 적에 왕돈王敦이 종제從弟왕도王導와 마음을 함께하여 황제를 보좌하니, 황제 또한 마음을 미루어 그들을 신임해서, 왕돈은 정토征討하는 일을 총괄하고 왕도는 기무機務의 정사를 전담하였으며, 여러 종형제從兄弟와 자제子弟들이 현달하고 중요한 직책에 포진하였다.注+① 懷帝 永嘉 5년(311)에 황제가 王敦을 揚州刺史로 삼고 都督征討諸軍事를 가하였으니, 왕돈이 華軼과 杜弢(두도), 王機와 杜曾을 토벌한 것은 모두 그의 功이다. 尙書는 萬機의 근본인데 王導가 錄尙書事가 되었으니, 나라의 중요한 정사를 그가 전적으로 담당한 것이다.
王敦設謀亂政
당시 사람들이 이 때문에 말하기를 “왕씨王氏와 사마씨司馬氏가 천하를 공유共有하고 있다.” 하였다. 뒤에 왕돈이 공功을 믿고 교만 방자하니, 황제가 그를 두려워하고 미워하여 마침내 유외劉隗와 조협刁協 등을 불러들여 심복으로 삼고서 차츰 왕씨의 권세를 억눌러 약화시키니, 왕도 또한 점점 소외를 당하였다.
이 있으니 마땅히 더욱 신임해야 한다고 아뢰자, 황제는 공유를 내보내어 장사長史로 삼았다.
왕도는 진솔한 성품을 순히 따르고 자신의 분수에 자족自足하여 담담하였으나,注+② 分(분수)은 扶問의 切이다. 황제가 王氏의 권세를 억눌러 약화시켜서 王導가 점점 소외를 당했으나, 왕도는 자신의 진솔한 성품을 순히 따르고 자신의 분수에 自足하여 마음에 개의함이 없으니, 이는 왕도가 실정을 속여서 억지로 꾸민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분수를 편안히 여긴 것임을 말한 것이다. 왕돈은 더욱 불평하는 마음을 품었다.
왕돈의 참군參軍심충沈充과 전봉錢鳳은 모두 간교하고 아첨을 잘하며 흉악하고 교활하였는데, 왕돈이 딴마음을 품고 있는 것을 알고는 암암리에 계책을 세웠다. 그리하여 왕돈은 이들을 총애하고 신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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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왕돈王敦이 상소上疏하여 왕도王導를 위해 억울함을 하소연하였는데, 글에 원망하는 마음을 드러내었다. 좌장군左將軍인 초왕譙王사마승司馬氶이 충성스럽고 후덕하고 뜻과 행실이 높으니, 황제가 평소 그를 친애하고 신임하였다.
황제가 밤중에 사마승을 불러 왕돈의 상소를 보여주었고, 유외劉隗 또한 황제를 위하여 도모해서 심복을 내보내어 각
에 진주하게 하였는데, 이때 마침 왕돈이 표문을 올려 심충沈充을 상주자사湘州刺史로 삼을 것을 청하였다.
황제가 사마승에게 이르기를 “왕돈의 간악하고 반역하려는 뜻이 이미 드러났으니, 짐朕이 혜제惠帝처럼 되는 것이 그 형세가 멀지 않다.注+① 〈“朕爲恵皇 其勢不遠”은〉 황제 자신도 마땅히 惠帝처럼 강한 신하에게 제재를 받게 될 것임을 말한 것이다.상주湘州 지역은 상류上流에 위치하고 있어서 세 주州가 만나는 입구를 제압할 수 있으니, 숙부叔父에게 이 지역을 맡기려고 하는데, 어떠한가?”注+② 3州는 荊州, 交州, 廣州를 이른다. 옛날에 同姓의 諸侯를 天子가 伯父와 叔父라고 칭하였다. 司馬氶은 宣帝의 從孫이고, 황제는 선제의 曾孫이니, 〈사마승은 황제에게〉 친족에 있어서도 숙부가 된다. 하였다.
사마승이 대답하기를 “신은 조명詔命을 받들어 오직 힘을 다할 뿐이니, 어찌 감히 사양하겠습니까. 그러나 상주湘州는 촉蜀 지역 도적들의 난리를注+③ 蜀 지역 도적들의 난리는
을 이른다. 겪은 뒤라서 백성과 재물이 모두 피폐하니, 만약 3년이 되면 그때에야 비로소 전쟁에 동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3년이 되지 않으면 비록 제가 분골쇄신粉骨碎身하더라도 일에 유익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조령詔令을 내려서 사마승을 상주자사湘州刺史로 삼았다.
目
[목目] 사마승司馬氶이 길을 떠나 무창武昌에 이르자, 왕돈王敦이 그에게 잔치를 베풀고 사마승에게 이르기를 “대왕大王은 평소注+① “雅素”는 平常(평소)이라는 말과 같다. 아름다운 선비이니, 장수의 재주가 아닐 듯합니다.” 하였다.
사마승이 말하기를 “공公이 제대로 알아주지 않는 것이니, 납으로 만든 칼이라고 해서 어찌 한 번 벨 쓰임새가 없겠습니까.”注+② 〈“鉛刀豈無一割之用”은〉 後漢 班超의 말이다. 鉛(납)은 音이 緣이니, 朱錫과 비슷하나 칼을 만들 수는 없다. 하였다.
왕돈이 전봉錢鳳에게 이르기를 “저자는 두려워할 줄을 모르고 그저 호언장담하는 말을 흉내 낼 뿐이니, 무슨 일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진鎮으로 가도록 허락하였다.
이때 상주湘州 지역이 곤궁하고 피폐하였는데, 사마승이 몸소 검약을 행하고 마음을 기울여 백성들을 편안히 하고 어루만져서 자못 유능하다는 명성이 있었다.
역주
역주1그대가……않는다면 :
≪思政殿訓義 資治通鑑綱目≫ 晉 愍帝 建興 2년(317) 3월 조에 보면 樂陵太守 邵續이 石勒에게 귀의하자, 석륵이 그의 아들 邵乂를 督護로 삼았는데, 勃海太守 劉胤이 소속에게 의지하여 와서 석륵을 따르지 말라 하고 또 段匹磾가 소속을 설득하여 東晉에 귀의하게 하니, 석륵이 소예를 죽였다. 이후 소속이 유윤을 동진에 보냈다. 여기서 ‘옛날의 약속’이란 바로 이때의 사건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역주2네 군대 :
≪資治通鑑≫에 보면 나머지 두 군대는 宋恕와 趙愼의 군대이다. 이 아래 원문의 ‘宋始一軍’은 네 군대의 하나인 宋始의 군대를 말한 것이다.
역주3保故將陳安 降漢以討賊殺之 :
“‘殺(죽였다)’이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司馬保가 晉王이 된 것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마보에게 ‘殺’이라고 썼는데, 사마보를 죽인 자에게 어찌하여 ‘賊’이라고 썼는가. 陳安에게 역적을 토벌한 의리를 인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故將(옛 장수)’이라고 썼으니, 무릇 ‘故將’이라고 쓴 것은 모두 義를 인정한 것이다. 이때 漢나라가 국호를 趙나라로 바꿨으나 ‘趙’라고 쓰지 않고 ‘漢’이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漢나라는 晉나라와 함께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이기 때문이다. 〈진안이〉 역적은 토벌할 수 있었으나 漢나라에 항복함을 면치 못했으니, 특별히 ‘漢’이라고 쓴 것은 원수 나라임을 표시하여 진안을 애석히 여긴 것이다. 그러다가 진안이 배반하게 되어서야 ‘叛趙(趙나라를 배반했다.)’라고 썼다. ≪資治通鑑綱目≫에 ‘故將’이라고 쓴 것이 7번인데, 利幾에게 ‘反’이라고 쓰고 公師藩에게 ‘寇’라고 쓴 것은 그들을 인정한 말이 아니요, 진안에게 ‘降漢(漢나라에 항복했다)’이라고 쓴 것은 또한 인정을 하기는 하였으나 온전히 인정하지는 않은 것이다.[書殺 何 不成保之爲晉王也 保書殺矣 殺保者 曷爲書賊 予安以討賊之義也 故特書故將 凡書故將 皆予義也 於是漢改號趙 不書趙 書漢 何 漢不共戴天之讐也 賊可討也 而不免降漢焉 特書漢 所以志讐國而爲安惜也 及其叛也 則書叛趙矣 綱目書故將七 唯利幾書反 公師藩書寇 非予辭 若安書降漢 則亦予之而不盡予也]” ≪書法≫
역주4涼州(前涼)가……즉위하였다 :
오호십육국의 하나인 前涼에 대한 기사이다. 前涼은 晉나라․前趙․後趙에 겉으로는 臣屬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독자적 세력을 구축하였다. 東晉과는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前趙와 後趙와는 영토를 다투면서도 때에 따라 신속하였다. 張寔은 前涼의 2대 군주이고 張茂는 3대 군주로 장무 때부터 보다 독립적인 정권으로 보고 있다.
역주5巴族 :
이 당시 종족의 명칭으로 今川 동쪽, 鄂 서쪽에서 활동하였다.(張大可 等 注釋, ≪新譯資治通鑑≫, 三民書局, 2017)
역주6趙以喬豫和苞爲諫議大夫 :
“晉나라 초기에 ‘傅玄과 皇甫陶 등을 諫官으로 삼았다.’라고 쓰고부터(乙酉年(265)) 이후 54년 동안 〈諫官을 쓴 것이〉 알려진 것이 없었는데, 이때 다시 쓴 것은 〈晉나라가 아니고〉 趙나라였다. ≪資治通鑑綱目≫에서는 작은 善도 기록하였으니, 비록 僭國의 선한 행실이라도 반드시 썼다.[自晉初書以傅玄皇甫陶爲諫官(乙酉年) 是後五十四年 無聞焉 於是復書 則趙也 綱目錄小善 雖僭國必書之]” ≪書法≫
역주8霸陵 :
漢나라 文帝의 陵이다. ≪史記≫ 〈孝文本紀〉에 “패릉은 모두 瓦器를 사용하여 만들었는데, 제도를 간략히 하여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으려고 金銀 등으로 장식하지 않고 봉분을 크게 만들지 않았다.” 하였다.
역주9여러 塢 :
‘塢’는 작은 성채나 보루를 뜻한다. 後漢 시기 羌族의 침략으로 변방에 塢侯를 설치한 것에서 그 연원을 찾으며, 西晉 말엽에 들어서면서 백성들이 自衛를 위하여 직접 설치하였다. 특히 유민들에 의해서 많이 만들어졌는데, 이 塢를 지배하는 자들을 塢主라 하였다.
역주10九品 :
魏晉南北朝時代의 관리 임용제도로 九品中正制 또는 九品官人法이라고도 한다. 郡마다 中正官을 두고 이들이 郡 안의 인재를 조사하여 재능과 덕행에 따라 1품에서 9품으로 나누었는데 이를 鄕品이라 한다. 이 제도는 처음에 漢나라 관료를 평가하여 魏나라 관료로 재편입하는 데 목적을 두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現任者들에 대한 평가가 아닌 新任官을 주 대상으로 하였다. 초임관을 起家官이라 하는데, 기가관은 향품보다 4등급을 낮추어 그에 해당하는 관품의 관직을 받았다. 魏나라 말기 司馬懿의 건의에 따라 州에 中正을 두게 되어 향품의 결정권이 점차 중앙으로 집중되었다.(宮崎市定, ≪九品官人法の硏究≫, 岩波書店)
역주12方面 :
하나의 큰 區域의 軍政을 담당하는 大權을 의미한다.(≪新譯資治通鑑≫13, 三民書局)
역주13杜弢의 亂 :
晉나라 懷帝 永嘉 5년(311)에 巴, 蜀의 流民들이 荆州와 湘州 사이에 흩어져 살면서 원래부터 거주하던 백성들에게 고통을 당하였다. 湘州刺史 苟眺가 유민들을 다 죽이고자 하니, 유민들이 크게 두려워하여 4, 5만 가호가 일시에 모두 배반하고 醴陵令 杜弢를 추대하여 湘州刺史로 삼았다. 두도의 세력이 강성하여 王敦이 두도를 토벌하기 위해 陶侃 등을 보내어 수십 번을 싸웠으나 난을 진압하지 못하였고 晉나라 愍帝 建興 3년(315)에 와서 周訪이 평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