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 지키고 있었는데, 북위北魏 사람들이 그곳을 포위한 지 3년이 지났는데도 외부에서 구원해줄 병력이 없었다. 사졸들이 밤낮으로 대항하여 전투를 치르느라 갑옷과 투구에 이가 생겨났는데도 떠나거나 배반하려는 마음이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북위北魏 사람들이 동양東陽을 함락하자 심문수가 갑옷을 벗고는 의관을 바르게 하고서 부절符節을 지니고 재실齋室에 앉아 있었는데, 북위北魏 사람들이 그를 사로잡아서注+① ≪資治通鑑≫에는 “執之” 아래에 “去其衣(그의 옷을 벗기다.)” 세 글자가 더 있다. 결박하여 모용백요慕容白曜에게 보내어 절을 하게 하였다.
심문수가 말하기를 “각자 두 나라의 대신大臣인데 어찌 절을 할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니, 모용백요가 그의 의복을 돌려주고 음식을 차려주고는 쇠사슬을 채워서
위주魏主가 그를 풀어주고는 하객下客으로 대우하여 변변치 못한 옷과 거친 음식을 주었는데, 얼마 뒤에 굽히지 않는 그의 행동을 중하게 여겨 외도하대부外都下大夫에注+② 外都下大夫는 外都大官의 屬僚로, 拓跋氏가 설치한 것이다. 임명하였다. 이에 청주靑州와 기주冀州의 땅이 모두 북위北魏 소속이 되었다.
綱
[강綱] 2월에 북위北魏가 모용백요慕容白曜를 청주자사靑州刺史로 삼았다.
目
[목目] 모용백요慕容白曜가 백성들을 위무하고 다스리는 데 방편이 있었기에 동인東人(청주靑州․서주徐州 등 회북淮北의 사람들)들이 편안히 여겼다.
유의가 원망을 품어 드디어 유흔위柳欣慰와 내통하여 모반을 꾀하려고 하다가 일이 발각되었다.
조서를 내려 유의를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강등하고 경사京師에서 나가서 선성宣城에 진수鎭守하게 하고 심복인 양운장楊運長을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방어하도록 하였으며, 유흔위 등은 죽임을 당하였다.
綱
[강綱] 여름 5월에 북위北魏가 승기호僧祇戶와 불도호彿圖戶를 설치하였다.
目
[목目] 북위北魏가 청주靑州와 제주齊州의 백성들을 평성平城의 상건桑乾으로 옮기고, 평제군平齊郡을 세워 그들을 거주하도록 하였는데, 사문통沙門統담요曇曜가 평제군의 호구와 백성 중에서 해마다 60곡을 승조僧曹에 바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바로 승기호僧祇戶로 삼고, 곡식은 송기속僧祇粟으로 삼아서 흉년을 만나면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라고 아뢰고注+① 胡三省이 말하기를 “沙門統은 지금의 僧錄과 같다.”라고 하였다. 素軒이 말하기를 “祇는 음이 神祇의 祇(기)와 같으니, 祇園이다. 佛書에 阿僧祇라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다., 또 백성들 중에서 중한 죄를 지은 사람과 관노官奴를 불도호佛圖戶로注+② 佛圖는 바로 浮屠이다.
에 살고 있는 만족蠻族과 요족獠族이 노략질을 하고 포학한 짓을 하였기에 형주荊州와 익주益州의 4군郡을 분할하여 백제白帝에 부府를 세워 지켰다.注+① 荊州와 益州의 4郡은 荊州의 巴東과 建平, 益州의 巴西와 梓潼郡을 말한다. 府는 三巴校尉府를 말한다. 또 손겸孫謙을 파동巴東과 건평建平의 태수太守로 임명하여 조서를 내려 천 명을 모집하여 데려가게 하니,
손겸이 말하기를 “오랑캐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 제대로 대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찌 번거롭게 군대를 파견하여 국가의 경비를 낭비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드디어 받지 않고는 군郡에 이르러 은혜와 신의를 보이자, 만족蠻族과 요족獠族이 모두 마음을 열고 다투어 금은보화를 바쳤는데, 손겸이 그들을 모두 위로하여 깨우치고 받지 않았다.
綱
[강綱] 송宋나라 임해臨海에서 도적이 일어났다.
目
[목目] 임해臨海의 전류田流가 지신을 동해왕東海王이라 칭하고 해염海鹽을 노략질하고 은현鄞縣의注+① 鄞(지명)은 음이 銀이다. 鄞縣은 漢나라 이후로 會稽郡에 소속되었다. 현령을 죽이니, 동쪽 지역에 크게 소요가 일어났다.
역주
역주1魏拔宋靑州 執其刺史沈文秀 :
“宋나라가 元嘉 末年(452)에 北魏를 침략한 뒤로부터 두 나라가 각각 스스로 지키기에 힘써서 다시 전쟁이 없었다. 薛安都 등이 반란을 일으켜 北魏에 항복하자 北魏 사람들이 이를 틈타 宋나라를 침략하여 淮北․淮西와 下邳郡 등의 지역을 차지하였다. 지금 또 靑州를 함락시키고 그 刺史를 잡아가니 宋나라는 内難에 압박을 받아 외방을 경략할 겨를이 없었고 또 아랫사람들도 다시 함께 힘써 싸우지 않았다. 그러나 北魏는 宋나라에서 반란을 일으킨 신하를 받아들여서 宋나라의 토지를 빼앗고 宋나라의 성읍을 도륙하였다. 비록 한때에 뜻을 얻은 것 같지만 어찌 仁義의 일이겠는가. ≪資治通鑑綱目≫에는 일에 따라 기록을 하여 是非와 曲直이 명료하게 눈앞에 있으니 진실로 숨길 수가 없다.[宋自元嘉末年侵魏之後 兩國各務自保 無復兵爭 至薛安都等叛降于魏 於是魏人乗釁侵宋 取淮北淮西及下邳諸郡之地 今又拔靑州而執其刺史 宋惟迫於内難 未遑外略 亦不復與之力爭 然魏氏納其叛臣 奪其土地 屠其城邑 雖若得志一時 夫豈仁義之擧 綱目随事書之 是非曲直 瞭然在目 固自不可得而掩也]” ≪發明≫
역주4天安 :
献文帝 拓跋弘의 연호로 宋나라 明帝 泰始 2년(466) 한 해 동안만 사용하였다.
역주5宋以太尉廬江王禕 爲南豫州刺史 :
“이때에 柳欣慰가 謀反을 하고 劉禕가 그와 내통하여 일이 발각되자 그들을 내쳤는데 ‘謀反’이라고 기록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宋主(劉彧)에게 죄를 돌린 것이다. 유의는 宋主의 형인데 경멸하며 추하게 헐뜯어 그 마음을 그르쳤다. ≪資治通鑑綱目≫에서는 그 마음을 깊이 추적하였으므로 유의의 謀反을 기록하지 않고, 유의가 죽었을 때 ‘宋主’라고 배척하여 기록했던 것이다.[於是柳欣慰謀反 禕與之通 事覺出之 其不書謀反 何 罪宋主也 禕其兄也 而輕侮醜詆 以失其心 綱目深探其本 故禕之謀反不書 而其殺也斥書宋主]” ≪書法≫
역주6劉禕는……봉하니 :
景和 원년(465) 廢帝 劉子業이 東海王 劉禕가 성품이 용렬하다고 하여 驢王(노새 왕)이라고 하고 말구유에서 음식을 먹게 하였다. 뒤에 劉彧이 황제가 되고서 그를 中書監․太尉로 삼았다. 그런데 이때에 유욱이 그를 廬江王으로 삼아 놀린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 87쪽과 93쪽에 보인다. 여기서 孝武帝라고 한 것은 아래 訓義처럼 유자업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역주7僧曹에……청하니 :
僧曹는 北魏 내의 寺院을 관리하던 국가 기구를 말하다. 僧祇戶는 사원에 속한 戶로 보이나 개별 寺院이 관할한 것이 아니라 僧曹에서 관할한 것으로 보인다. 佛圖戶는 사원에 소속된 戶로 승기호보다는 지위가 낮았다.(≪資治通鑑新注≫, 陝西人民出版社, 1998)
역주9魏遣使如宋脩好 :
“北魏가 이미 宋나라에 품은 뜻을 달성하고 지금 사신을 파견하여 우호를 맺자, 宋나라 역시 자신을 지키기에 겨를이 없어 옛 惡緣을 생각하지 않았다. ≪資治通鑑綱目≫에서는 일에 의거하여 기록하여 또한 전쟁이 그치게 된 것을 다행스럽게 여긴 것이다.[魏既得志於宋 今乃遣使修好 宋亦自守不暇 不念舊惡 綱目據事書之 亦幸其兵禍之息也]” ≪發明≫
역주10景和……벗어났다 :
景和(465)는 前廢帝 劉子業이 사용한 연호로, 이때 유자업이 劉彧을 죽이려 하였는데 劉休仁의 재치로 살아남았다.
역주11泰始 ……세웠다 :
泰始는 明帝 劉彧이 사용한 연호로, 그 기간은 7년(465~471)이다. 이때의 일은 泰始 원년과 2년에 해당한다.
역주12三峽 :
揚子江 상류의 험난하기로 유명한 세 협곡으로, 瞿塘峽, 巫峽, 西陵峽의 합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