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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2)

자치통감강목(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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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申年(264)
魏咸熙元年이요 吳主孫皓元興元年이라 ◑凡二國이라
鄧艾在成都 頗自矜伐하여 以書言於晉公昭曰 兵有先聲而後實者하니
今因平蜀之勢以乘吳 吳必震恐이니 席卷之時也 然大擧之後 將士疲勞하니 不可便用이라
宜留隴右及蜀兵하여 煮鹽興冶하고 竝作舟船하여 豫爲順流之事注+蜀有鹽井, 朱提出銀, 嚴道‧邛都出銅, 武陽‧南安‧臨邛‧沔陽皆出鐵. 漢置鹽官鐵官, 欲復其利.하고
且王劉禪하여 以顯歸命之寵이니 如此則吳人 畏威懐德하여 望風而從矣리라
昭使衛瓘喩艾호되 事當須報 不宜輒行이니라 艾曰 元惡 旣服하니 承制拜假하여 以安初附 謂合權宜注+除官曰拜. 假者, 權攝之義, 謂弗常置也.
若待命往復 延引日月이리니 春秋之義 大夫出疆하여 有可以安社稷利國家者 專之可也注+春秋公羊傳之言.라하니
今吳人未賓하여 勢與蜀連하니 不可拘常以失事機
兵法 進不求名이요 退不避罪注+孫子曰 “將之至任, 不可不察也. 進不求名, 退不避罪, 唯人是保, 而利於主, 國之寶也.”라하니 艾雖無古人之節이나 終不自嫌以損國家計也리라
鍾會有異志하여 姜維知之하고 欲構成擾亂한대 乃說會曰 君自淮南已來 筭無遺策注+謂平諸葛誕也.이러니 今復定蜀하니 威德振世
欲以此安歸乎 何不法陶朱公泛舟絶迹全功保身邪注+陶, 邑名也. 越大夫范蠡, 旣與越王句踐滅吳, 以雪會稽之恥, 乃扁舟五湖, 汎海而止於陶, 欲絶其跡, 乃號曰陶朱公.
會曰 君言遠矣 我不能行이로다 維曰 其他則君智力之所能이니 無煩於老夫矣注+言爲亂也.니라 由是 情好歡甚이러니
因艾承制專事하여 乃與瓘으로 密白艾有反狀하고 會善效人書한대 於劍閣 要艾章表하여 皆易其言하여 令悖傲注+要, 一遙切.러니
至是하여 詔以檻車徴艾할새 昭恐艾不從命하여 勅會進軍成都하고 又遣賈充將兵入斜谷하고
昭自將大軍하여 從魏主幸長安하고 令山濤爲行軍司馬鎭鄴注+以諸王公皆在鄴也. 行軍司馬之號始此.하다
初會以才能見任이러니 昭夫人王氏 言於昭曰 會見利忘義하고 好爲事端하니 寵過必亂이니 不可大任이니라
及將伐漢 西曹屬邵悌曰注+自漢以來, 丞相有西曹掾屬.會單身無任하니 不若使餘人行也注+魏制, 凡遣將帥, 皆留其家以爲質任. 會單身無子弟, 故曰單身無任.라하다
昭笑曰 我寧不知此邪 蜀數爲邊寇하여 師老民疲하니 我今伐之 如指掌耳어늘 而衆言蜀不可伐이라하니
夫人心預怯하면 則智勇竝竭하나니 強使之 適所以爲敵禽耳 惟會意與人同하니 今遣伐蜀이면 蜀必可滅이니
滅蜀之後 就如卿慮라도 蜀已破亡하고 遺民震恐하니 不足與圖事
中國將士 各自思歸하니 會若作惡이면 祗自滅族耳 不須憂也注+作惡, 作亂也.니라
及昭將之長安 悌復曰 會所統兵 五六倍於艾하니 但可勅會取艾 不須自行이니이다
昭曰 卿忘前言邪注+忘, 巫放切. 雖然이나 所言 不可宣也 我要自當以信意待人이니 但人不當負我耳
近日賈護軍 問我호되 頗疑鍾會不注+賈護軍, 賈充也, 時爲中護軍. 不, 讀曰否.아하거늘 我答言호되 如遣卿行이면 寧可復疑卿邪 我到長安하면 則自了矣注+了, 辦也, 決也.리라
會遣瓘先至成都하여 收艾하니 會以瓘兵少 欲令艾殺瓘하여 因以爲艾罪러니 瓘知其意 然不可得距注+距, 違也. 瓘監艾‧會軍, 遣之收艾, 是以職分使之, 故不可得而距.
乃夜 至成都하여 檄艾所統諸將하여호되 奉詔收艾 其餘一無所問하리라
若來赴官軍이면 爵賞如先이요 敢有不出者 誅及三族注+爵賞如先, 謂復加爵賞, 如先平蜀時也.호리라
比至鷄鳴 悉來赴瓘하니 唯艾帳內在焉이러니 平旦開門이어늘 瓘乘使者車徑入注+續漢志 “有大使車‧小使車‧諸使車.”하니 艾臥未起어늘
遂執艾父子하여 置之於檻車하니 諸將 圖欲劫艾하여 整仗趣瓘營이어늘
瓘輕出迎之하여 僞出表草하여 將申明艾事注+詭言將明艾無反心.하니 諸將 信之而止하다
會至成都하여 送艾赴京師하니 會所憚 惟艾 艾旣就擒 遂決意謀反하여
欲使姜維 爲前驅하고 自將隨其後하여 旣至長安 令騎士從陸道하고 步兵從水道하여
浮渭入河 五日可到孟津이니 與騎兵會洛陽이면 一旦 天下可定也라하더라
會得昭書하니 云 恐艾或不就徴이라 吾自將屯長安하니 相見在近이라하니
會驚曰 但取艾인댄 相國知我獨辦之어늘 今來太重하니 必覺我異矣注+異, 變也.로다
便當速發이니 事成이면 可得天下 不成이라도 退保蜀漢이면 不失作劉備也注+蜀‧漢, 謂漢蜀郡‧漢中郡之地.
會郭太后卒어늘 會乃悉召諸將하여 爲太后發哀하고 稱遺詔하여 使起兵廢司馬昭라하고 更使所親信으로 代領諸軍하고
所請群官 悉閉諸曹屋中이어늘 瓘詐稱疾篤하여 出就外廨注+廨, 舍也.하니 會信之하여 無所復憚이러라
維欲使會盡殺北來諸將하고 己因殺會하고 復立故漢帝하여 密書與帝曰 願陛下 忍數日之辱하소서
臣欲使社稷危而復安하고 日月幽而復明하노이다 會欲從維言하여 誅諸將호되 猶豫未決이러니
會帳下督丘建本屬胡烈한대 會信愛之注+丘建, 姓名.러니 建愍烈獨坐하여 啓會하여 使聽內一親兵出取飮食注+啓, 白. 鍾會使聽從胡烈內入親兵一人, 使出外取飮食. 內, 讀納. 下同.하니라
紿語親兵하고 及疏與其子淵曰注+紿, 誑詐也. 語, 去聲. 疏, 猶書記也. 會已作大坑하고 白棓數千하여 欲悉呼外兵하여 棓殺內坑中注+棓, 步項切, 通作棒, 木杖也.이라하니
一夜 轉相告皆徧이러라 淵遂率其父兵出門한대 諸軍鼓譟하여 爭先赴城하니
所閉諸人 各緣屋出하여 與其軍士相得하여 斬會及維어늘 死喪狼籍하니 瓘分部諸將하여 數日乃定하다
艾本營將士 追出艾於檻車하여 迎還이어늘 瓘自以與會共陷艾 恐其爲變하여
乃遣護軍田續하여 襲艾父子於綿竹西斬之하다 艾之入江油也 續不進이어늘 艾欲斬續이라가 旣而捨之러니
及是하여 瓘謂曰可以報江油之辱矣로다 鎭西長史杜預 言於衆曰注+預, 恕之子也. 瓘行鎭西軍司, 而預爲鎭西長史, 則爲同僚, 而軍事則瓘任之也. 伯玉其不免乎인저 身爲名士하여 位望已高이어늘
旣無德音하고 又不御下以正하니 將何以堪其責乎注+伯玉, 瓘字. 不御下以正, 謂激田續使報鄧艾而行其私也.리오 瓘聞之하고 不候駕而謝預하다 艾餘子在洛陽者 悉被誅하니라
會功曹向雄 收葬會尸이어늘 昭召而責之曰 往者王經之死 卿哭於東市而我不問이러니
今會爲叛逆이어늘 又輒收葬하니 若復相容이면 其如王法何
雄曰 昔 先王掩骼埋胔하여 仁流朽骨하니 當時 豈卜其功罪而後收葬哉리오
王誅旣加하니 於法已備 雄感義收葬하니 敎亦無闕이라
法立於上하고 敎弘於下하니 以此訓物 不亦可乎 昭悅하여 與宴談而遣之하다
會之伐漢也 辛憲英 謂其夫之從子羊祜曰注+憲英, 爲羊耽妻. 會在事縱恣하니 非持久處下之道이라 吾畏其有他志也注+在事者, 在官任事也.하노라
會請其子琇하여 爲參軍注+琇, 息敎切.한대 憲英憂曰 他日 吾爲國憂이러니 今日 難至吾家矣注+爲, 去聲. 難, 乃旦切.로다
琇固辭不聽이어늘 憲英謂曰 行矣戒之하라 軍旅之間 可以濟者 其惟仁恕乎인저
琇竟以全歸하니 詔以琇嘗諫會反으로 賜爵關內侯注+琇, 司馬師夫人之從父弟, 故以諫會爲功而得封.하다
魏詔晉公昭進爵爲王하고 追命其父懿爲宣王하고 兄師爲景王하다
太尉王祥司徒何曾司空荀顗共詣晉王할새 顗謂祥曰 相王尊重하니 何侯與朝臣皆已盡敬이라 今日 便當相率而拜 無疑也注+何侯, 謂何曾.니라
祥曰 王公 相去一階而已 安有天子三公 可輒拜人者리오 하나니 我不爲也리라
及入 顗拜而祥獨長揖하니 昭謂祥曰 今日然後 知君見顧之重也와라
魏封故漢帝禪爲安樂公하다
禪擧家遷洛陽 大臣 無從行者注+姜維旣死, 張翼‧廖化‧董厥必亦死於亂兵矣. 惟秘書令郤正及殿中督張通捨妻子하고 單身從行이러니
正相導宜適하여 擧動無闕注+宜, 當也. 適, 亦當也. 禪初入洛, 見魏君臣, 其禮各有所當.하니 禪乃慨然歎息하여 恨知正之晩이러라
漢建寧太守霍弋 聞成都不守하고 素服大臨三日注+建寧, 漢益州郡也. 蜀後主建興元年, 改建寧郡, 治味縣. 臨, 力鴆切.이어늘
諸將勸弋速降한대 弋曰 道路隔塞하여 未詳主之安危하니 去就大故 不可苟也
若魏以禮遇主上이면 則保境而降 不晩也 萬一危辱이면 吾將以死拒之 何論遲速耶
及得禪東遷之聞 始率六郡將守하여 上表曰注+南中七郡, 而此言六郡者, 蓋越巂已降魏也. 臣聞人生於三하니 事之如一이라 惟難所在 則致其命하나니
今臣 國敗主附하니 守死無所 是以委質하여 不敢有貳하노이다 晉王昭善之하여 委以本任하다
封禪爲安樂公注+樂, 音洛, 下同. 晉志 “安樂, 屬燕國.”이러니 他日 與宴할새 爲之作蜀技注+技, 與伎同. 蜀技. 蜀樂也. 如巴渝舞之類也.하니 旁人皆感愴이로되 而禪喜笑自若이어늘
昭謂賈充曰 人之無情 乃至於是하니 雖使諸葛亮在라도 不能輔之久全이어늘 況姜維邪
他日 問禪曰 頗思蜀否 禪曰 此間樂하니 不思蜀也로이다
正聞之하고 謂曰 若王復問이어든 宜泣而答曰 先人墳墓 遠在岷蜀하니
하여 無日不思라하고 因閉其目하소서 會昭復問이어늘 禪對如前한대
昭曰 何乃似郤正語邪아하니 禪驚視曰 誠如尊命이라하니 左右皆笑之하더라
夏五月 魏復五等爵하다
晉王昭奏復五等爵하고 封騎督以上六百餘人注+賞平蜀之功也. 漢獻帝建安二十年, 魏王操置名號侯, 以賞軍功, 虛封自此始矣. 今雖復五等爵, 亦虛封也.하다
秋七月 魏以羅憲爲陵江將軍注+ 言欲陵駕江流, 以蕩平吳會也.하다
漢使羅憲으로 守永安이러니 及漢敗 憲得其主手勅하고 乃帥所統하여 臨于都亭三日注+帥, 讀曰率. 臨, 力鴆切. 都亭, 永安之都亭也.이러니
吳聞蜀敗하고 起兵西上하여 外託救援하고 內欲襲憲이어늘 憲曰 吳不恤我難하고 而背盟徼利하니 不義甚矣라하다
乃繕甲誓衆하여 厲以節義하고 遣使告急於魏러니 吳人來攻이어늘 與戰大破之하니
吳主怒하여 復遣陸抗等하여 帥衆三萬增其圍注+時, 吳以抗爲鎭軍將軍都督西陵.하니 憲被攻凡六月 救援不到러니 或說憲棄城走한대
憲曰 吾爲城主하니 百姓所仰이라 危不能安하고 急而棄之 君子不爲也 畢命於此矣리라
魏遣荊州刺史胡烈하여 攻西陵以救之하니 吳師遂退注+西陵, 卽夷陵. 吳主權黃武元年, 改夷陵曰西陵, 宜都郡治焉.어늘 晉王昭 使仍舊任하고 加號將軍하고 封亭侯하다
魏使荀顗定禮儀하고 하고 裴秀議官制하다
從晉王昭之請也
注+壽, 三十. 天子奄有四海者書崩, 分治者書殂.하니 烏程侯皓立하다
吳主寢疾하여 口不能言하여 手書呼濮陽興入하여 令子𩅦出拜하고 把興臂하고 指𩅦託之而卒하니 諡曰景帝
吳人 以蜀初亡으로 恐懼하여 欲得長君注+長, 知兩切.이러니 左典軍萬彧 嘗爲烏程令하여 與烏程侯皓 相善注+吳制, 中營置左右典軍.이러니
호되 皓才識明斷 長沙桓王之疇也 加之好學奉遵法度라하고 屢言於興及左將軍張布하니
興布說朱太后하여 欲立皓注+朱太后, 吳主休夫人, 休卒, 群臣尊爲皇太后.한대 后曰 我寡婦人이니 安知社稷之慮리오 苟吳國無隕하고 宗廟有頼 可矣注+賴, 恃也, 利也.
遂迎立之하니 吳主貶朱太后爲景皇后하고 追諡父和曰文皇帝라하고 尊母何氏爲太后하다
八月 이러니 冬十月 立爲晉世子하다
晉王昭 娶王肅之女하여 生炎及攸하여 以攸繼景王後
攸性孝友多材藝하고 淸和平允하여 名過於炎이라 昭愛之하여 常曰 天下者 景王之天下也 吾百年後 大業宜歸攸리라
立髮委地하고 手垂過膝하고 羊琇又敎以宜察時政所宜損益하여 豫記以備訪問이러라
昭欲以攸爲世子한대 山濤曰 廢長立少 違禮不祥이라하고
賈充何曾裴秀曰 中撫軍 聰明神武有超世之才하니 人望旣茂하고
天表如此하니 固非人臣之相也라한대 乃立炎爲世子하다
吳主初立하여 發優詔하여 恤士民하고 開倉廩하여 振貧乏하고 料出宮女하여 以配無妻者하고
苑中禽獸 皆放之하니 當時翕然하여 稱爲明主러니
及旣得志 麤暴驕盈하고 多忌諱하고 好酒色하니 大小失望이라 濮陽興張布 竊悔之러니 或譖諸吳主하니
十一月朔 興布入朝어늘 執之하여 徙於廣州라가 道殺之하고 夷三族注+吳, 分交州置廣州, 廣州治番禺.하다
魏罷屯田官하다


[] 봄 정월에 나라가 鄧艾檻車에 실어 소환하고, 鍾會가 모반하여 伏誅되고, 監軍 衛瓘이 등애를 기습하여 죽였다.
[] 鄧艾成都에 있으면서 스스로 정벌한 일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여 晉公 司馬昭에게 편지를 써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용병에는 소문을 먼저 퍼뜨리고 뒤에 실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금 蜀漢을 평정한 형세를 이용하여 나라를 공격하면 나라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게 될 것이니, 석권하여 그들을 평정할 때입니다. 그러나 크게 거병을 하고 난 뒤라 장병들이 피로하니, 바로 전쟁에 동원할 수 없습니다.
隴右의 병사와 의 병사를 남겨두어 소금을 생산하고 쇠를 주조하는 일을 일으키고 아울러 배를 만들어 미리 長江을 따라 내려갈 준비를 하게 하십시오.注+에는 鹽井이 있고 에서는 을 생산했고 邛都에서는 을 생산했으며, 武陽南安臨邛沔陽에서는 모두 을 생산했다. 나라는 鹽官鐵官을 설치했었는데, 등애가 그 이익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劉禪을 왕으로 봉하여 귀순하여 받는 은총을 드러내셔야 합니다. 이처럼 하시면 나라 사람들이 위엄을 두려워하고 은덕을 생각하여 멀리서 우리의 위세를 보고서 순종할 것입니다.”
[] 司馬昭衛瓘을 보내서 鄧艾에게 유시하기를 “이 일은 마땅히 회보를 기다려야 할 것이니 갑자기 시행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니, 등애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元兇(劉禪)이 이미 항복하였으니 承制하여 임시로 관직을 제수하여 막 귀부한 사람들을 안정시키는 것이 임시변통에 알맞다고 생각합니다.注+官職을 제수하는 것을 라고 한다. 는 임시로 대신하는 뜻이니 평상시 조치가 아님을 말한다.
만약 나라의 명령을 기다려서 〈사신이〉 오가게 되면 시간을 지연할 것입니다. ≪春秋≫의 의리에 ‘大夫가 국경을 나가서 사직을 편안하게 하고 국가를 이롭게 할 수 있으면, 독단해도 좋다.’注+〈“大夫出疆……專之可也”는〉 ≪春秋公羊傳莊公 18년의 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나라가 복종하지 아니하여 지세가 과 연결되어 쳐들어올 것이니 常規에 구애되어 일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兵法≫에 ‘나아감에는 명성을 구하지 아니하고 물러남에는 죄를 피하지 않는다.’注+孫子≫ 〈地形〉에 “將帥의 지극한 임무이니, 살피지 않아서는 안 된다. 나아감에는 명성을 구하지 않고 물러남에는 죄를 피하지 않으며, 오직 백성을 보호하고 군주를 이롭게 하면 이것이 나라의 보배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하니, 제가 비록 옛사람과 같은 절조는 없으나 끝내 스스로 혐의하여 국가 계획에 손해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 鍾會는 반란을 일으킬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姜維가 이것을 알고 혼란을 조성하고자 하여 마침내 종회를 설득하기를 “그대는 淮南에서 온 이후로 책략을 낸 것 중에 버려진 것이 없고注+〈“君自淮南已來 筭無遺策”은〉 諸葛誕의 반란을 평정한 것을 말한다. 이제 다시 蜀漢을 평정하였으니 위엄과 덕이 세상에 떨쳤다.
이것으로 편안히 돌아가려 하는가. 어찌 陶朱公이 배를 타고 가서 종적을 끊어서 공로를 온전히 하고 몸을 보존했던 것을 본받으려고 하지 않는가?”注+는 고을 이름이다. 나라 大夫 范蠡越王 句踐과 함께 나라를 멸망시키고, 을 씻고는 마침내 五湖에서 扁舟를 타고 넓은 바다로 나가 에 머물며 그의 종적을 단절하고자 하여 마침내 호칭을 陶朱公이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 鍾會가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원대하므로 내가 실행할 수 없다.”라고 하니 姜維가 대답하기를 “그 이외는 그대의 지혜와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니, 이 늙은이에게 번거롭게 말할 것이 없다.”注+〈“其他則君智力之所能 無煩於老夫矣”는〉 반란을 일으킴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서로 감정이 매우 좋아졌다.
종회는 鄧艾承制하여 일을 전횡하는 것을 이용하여 바로 衛瓘과 함께 등애가 반란을 일으킬 형세가 있다고 몰래 고하였다. 종회는 다른 사람의 글씨를 잘 모방했는데, 劍閣에서 등애의 상주문과 表文을 가로채서 그 말을 모두 바꾸어 패역하고 오만하게 하였다.注+(가로막다)는 一遙이다.
이에 이르러 조서를 내려 鄧艾檻車에 실어 소환할 적에 司馬昭는 등애가 명령을 따르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종회에게 명령을 내려 成都로 진군하게 하고 또한 賈充을 파견하여 병사를 거느리고 斜谷(야곡)으로 들어가게 하였다.注+여러 王公들이 모두 鄴城에 있었다. 行軍司馬의 칭호는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사마소는 자신이 대군을 거느리고서 魏主를 호종하여 長安에 행차하고 山濤
[] 예전에 鍾會는 재능으로 임용이 되었는데 가 사마소에게 말하기를 “종회는 이익을 보면 의리를 잊는 사람이고 사건을 일으키기를 좋아합니다. 총애함이 지나치면 반드시 난리를 일으킬 것이니 대임을 맡기시면 아니 됩니다.”라고 하였다.
蜀漢을 정벌하려 할 때에 이르러 西曹 邵悌가 말하기를注+나라 때부터 丞相府東曹西曹掾屬이 있었다. “종회는 홀몸으로 人質이 없으니 다른 사람이 가게 하는 것만 못합니다.”注+나라 제도에 의하면 將帥를 파견할 때에는 모두 그 가족을 남겨서 인질로 삼았다. 鍾會는 홀몸이고 子弟가 없으므로 “單身無任”이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 司馬昭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내가 어찌 이를 모르겠는가. 蜀漢이 자주 변방을 침입하여 군사들은 지치고 백성들은 피로하니, 내가 지금 그들을 정벌하는 것은 마치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처럼 쉬운데 많은 사람들이 蜀漢을 정벌할 수 없다고 말을 한다.
사람의 마음은 미리 겁을 먹으면 지혜와 용기가 나란히 고갈되니 억지로 출병하게 하면 다만 적에게 사로잡히게 된다. 오직 鍾會만이 나와 의견과 같으니, 지금 종회를 파견하여 蜀漢을 정벌하면 蜀漢을 반드시 멸망시킬 수 있을 것이다.
蜀漢을 멸망시킨 다음에는 만일 경이 염려한 대로 사건이 생기더라도 蜀漢이 이미 격파되어 망하고 나서 그 遺民들이 두려워하므로 종회와 더불어 일을 도모하지 못할 것이고,
中原(나라) 출신 장병들은 각기 스스로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생각하므로 종회가 만약에 악독한 일을 저지른다면 다만 자신이 멸족될 뿐이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注+作惡”은 叛亂을 일으키는 것이다.
[] 司馬昭가 장차 長安으로 갈 적에 邵悌가 다시 말하기를 “鍾會가 거느리는 병사는 鄧艾 군사의 5, 6배나 되니 다만 종회에게 명하여 등애를 잡아오게 할 것이지, 스스로 가실 필요는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司馬昭가 말하기를 “은 전에 한 말을 잊었는가.注+(잊다)은 巫放이다. 그러나 말한 것을 퍼뜨리지는 말라. 내가 응당 스스로는 진실한 뜻으로 남을 대해야 하지만 다만 남이 나를 저버리지 않게 할 뿐이다.
근래에 護軍 賈充이 나에게 묻기를, ‘종회가 꽤 의심스럽지 않습니까?’注+賈護軍賈充을 말하니, 당시에 中護軍이 되었다. 로 읽는다.라고 하니 내가 답하기를 ‘만약 경을 파견하여 보냈다면 어찌 다시 을 의심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長安에 도착하면 자연히 처리될 것이다.”注+는 처리하고 결정한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鍾會衛瓘을 파견하여 먼저 成都에 가서 鄧艾를 체포하게 하였는데, 종회는 위관의 군사가 적기 때문에 등애에게 위관을 죽이게 해서 이를 이용하여 등애의 죄로 삼고자 하였다. 위관은 그 의도를 알았으나 거역할 수가 없었다.注+는 위반한다는 뜻이다. 衛瓘鄧艾鍾會의 군대를 감독하므로 위관을 보내서 등애를 체포하게 하였다. 이는 職分으로 시킨 것이므로 거절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밤에 成都에 도착하여 등애가 통솔하고 있는 諸將들에게 檄文을 보내 이르기를 “조서를 받들어 등애를 체포하려는 것이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하나도 推問하는 것이 없을 것이다.
만약 관군에게 나아오면 먼젓번과 같은 爵位을 줄 것이고, 감히 나오지 않는 자가 있으면 誅罰三族에 미칠 것이다.”注+爵賞如先”은 다시 爵位을 주는 것이 이전에 蜀漢을 평정할 때와 같이 함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 닭이 울 때쯤에 모두가 衛瓘에게로 달려왔고, 鄧艾만이 軍幕 안에 있었다. 날이 밝아 군영의 문이 열렸는데 위관이 사자의 수레를 타고 곧바로 들어가니注+續漢志≫에 의하면 “가 있다.”라고 하였다. 등애는 누워서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마침내 등애 부자를 잡아서 檻車에 가두니, 諸將들이 등애를 탈취하려고 무기를 정비하여 위관의 진영으로 갔다.
위관이 가벼운 복장으로 나가서 그들을 영접하고 거짓으로 表章을 지어서 장차 등애의 일을 해명하려 한다고 하니,注+거짓으로 등애에게 반란할 마음이 없음을 밝히려 한다고 말하였다. 제장들이 이를 믿고 중지하였다.
[] 鍾會成都에 도착하여 鄧艾를 호송하여 京師로 보냈다. 종회가 꺼리는 사람은 오직 등애뿐이었는데, 등애가 이미 붙잡히자, 마침내 모반을 결의하였다.
鍾會는〉 姜維를 선봉으로 삼아 나아가게 하고 자신은 병사를 거느리고 그 뒤를 쫓아가서, 長安에 도착한 뒤에는 騎兵들을 육로로 가게 하고 步兵들을 물길로 가게 하여
渭水에 배를 띄워 黃河로 들어간다면 5일 만에 孟津에 도착할 것이니, 騎兵洛陽에서 만나면 하루아침에 천하를 평정할 수 있다고 여겼다.
종회가 司馬昭의 편지를 받았는데 이르기를 “등애가 혹 소환에 나아오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 내가 직접 병사를 거느리고 長安에 주둔하고자 하니 가까운 시일 안에 서로 만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종회가 놀라 말하기를 “단지 등애만을 잡는 것이라면 相國(사마소)은 내가 단독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을 알 텐데, 지금 오는 것이 매우 엄중하니, 반드시 내가 변심한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注+는 다른 마음을 품는다는 뜻이다.
마땅히 속히 군사를 출동시켜야 하니, 일이 성공하면 천하를 얻을 수 있고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물러나서 蜀郡漢中郡을 보존하면 劉備만큼 되는 것을 그르치지 않을 것이다.”注+蜀漢”은 나라 때 蜀郡漢中郡의 땅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 마침 郭太后하자 鍾會는 곧바로 諸將들을 다 불러 모아서 太后를 위해 發喪을 하고 遺詔詐稱하여 자기에게 병사를 일으켜 司馬昭를 폐출하게 하였다고 하고, 다시 친히 믿는 사람을 시켜서 여러 부대를 대신 거느리게 하였다.
불려온 여러 관리들을 〈益州의〉 여러 官署에 가두었는데 衛瓘은 병이 심하다고 사칭하여 나가서 밖의 관사로 가니注+官舍이다. 종회는 그것을 믿고서 다시 그를 꺼리지 않았다.
[] 姜維鍾會에게 북쪽에서 온 나라 장수들을 모두 죽이도록 하고, 자기는 그 틈을 이용하여 종회를 죽이고, 다시 나라 황제(劉禪)를 세우려고 하여 황제에게 몰래 편지를 쓰기를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며칠 동안의 치욕을 참으십시오.
社稷이 위태로워진 것을 다시 안정시키고 해와 달이 어두워진 것을 다시 밝히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종회는 강유의 말을 따라서 장수들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우물쭈물하며 결정을 못하였다.
종회의 丘建이 본래 胡烈에게 소속되었는데, 종회가 그를 신뢰하고 총애하였다.注+丘建姓名이다. 구건은 호렬이 홀로 관사에 유폐되어 있는 것을 근심해서 종회에게 아뢰어 친병 한 명을 들여서 밖에 나가 음식을 가져올 수 있게 하였다.注+는 아뢴다는 뜻이다. 鍾會丘建으로 하여금 胡烈에게 親兵 한 명을 들여서 친병에게 밖에 나가 음식을 가져오도록 하는 것을 허락해주었다. (들여 넣다)은 으로 읽으니, 아래도 같다.
[] 胡烈親兵에게 거짓말을 하여 쪽지를 그의 아들 胡淵에게 전해주게 하였는데, 쪽지에 이르기를注+紿는 속인다는 뜻이다. (말해주다)는 去聲이다. 書記(편지)라는 말과 같다.鍾會가 이미 큰 구덩이를 파고 흰 나무 방망이 수천 개를 만들어놓고서 밖에 있는 병사들을 불러들여서 방망이로 때려죽여 구덩이에 집어넣으려고 한다.”注+(몽둥이)은 步項이며 과 통용하여 쓰니, 나무 몽둥이이다.라고 하니,
하룻밤 사이에 돌아가며 서로 알려주어 전부 알게 되었다. 호연은 마침내 부친의 병사들을 인솔하여 軍營門을 나갔는데 여러 군사들이 북을 치고 함성 지르면서 앞을 다투어 성으로 달려갔다.
갇혀 있던 사람들이 각각 지붕으로 올라가 탈출하여 자기 군사들과 서로 회합하여 종회와 姜維를 참수하자 사상자가 널려 있게 되었다. 衛瓘은 장수들을 나누어 배치하여 수일 만에 비로소 안정되었다.
[] 鄧艾 본영의 장병들이 쫓아가서 檻車에서 등애를 꺼내어 영접하여 돌아오자, 衛瓘은 자신이 鍾會와 함께 등애를 모함하였으므로 그가 변란을 일으킬까 두려웠다.
마침내 護軍 田續을 파견하여 등애 부자를 綿竹 서쪽에서 습격하여 참수하였다. 에 전속이 전진하지 아니하자 등애는 전속을 참수하려고 하다 얼마 뒤에 그를 놓아주었다.
이때에 와서 위관이 전속에게 말하기를 “강유에서 받은 모욕을 보복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鎭西長史 杜預가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注+杜預杜恕의 아들이다. 衛瓘鎭西軍司를 겸직하고 두예는 鎭西長史가 되었으니 동료가 되었는데 軍事衛瓘이 책임졌다.伯玉(위관)은 그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이 명사가 되어 지위와 명망도 이미 높은데,
이미 덕이 있는 말을 하지 않고 또다시 아랫사람을 올바름으로 통솔하지 아니하니, 장차 어떻게 그 책임을 감당하겠는가.”注+伯玉衛瓘의 자이다. “不御下以正”은 田續을 격동시켜 鄧艾에게 보복하여 그의 사사로운 일을 행하게 한 것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위관은 이 말을 듣고 수레를 기다릴 것이 없이 빨리 가서 두예에게 사과하였다. 낙양에 있던 등애의 남은 아들들도 모두 주살되었다.
[] 鍾會功曹向雄(상웅)이 종회의 시체를 거두어 장사 지내자 司馬昭가 그를 불러 꾸짖기를
지금 종회는 반역을 하였는데 또다시 거두어 장사를 지내주었으니 만약 다시 용서하면 王法은 어찌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상웅이 말하기를 당시에 어찌 죽은 자의 공과 죄를 헤아리고 난 뒤에 시체를 거두어 장사 지낸 것이겠습니까.
지금 王者의 주벌이 이미 시행되었으니 법에는 이미 갖추어진 것입니다. 저는 의로움을 느끼고 거두어 장사 지냈으니 교화에도 역시 결함이 없습니다.
법이 위에서 확립되고 교화가 아래에서 널리 퍼지는 것이니, 이것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이 역시 옳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사마소는 기뻐하여 그와 더불어 연회를 열어 담소를 하고 보냈다.
[] 鍾會蜀漢을 정벌할 때 辛憲英이 그 남편의 조카 羊祜에게 말하기를注+辛憲英羊耽의 아내이다. “종회는 일에 있어서 방종하니 오래도록 아랫자리에 처할 도리가 아니다. 나는 그가 다른 마음을 갖고 있을까 두렵다.”注+在事”는 관직에 있으면서 일을 맡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종회가 신헌영의 아들 羊琇를 청하여 參軍으로 삼았는데注+息敎이다. 신헌영이 걱정하여 말하기를 “지난날에 내가 나라를 위하여 걱정하였는데 오늘에는 환난이 우리 집에 닥쳤구나.”注+(위하다)는 去聲이다. (환난)은 乃旦이다.라고 하였다.
[] 羊琇가 굳이 사양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자 辛憲英이 〈양수에게〉 말하기를 “가서 조심하거라. 군대 안에서 자신을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인자하고 관대한 마음뿐일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양수가 결국 온전하게 돌아왔다. 조서를 내려서 양수가 일찍이 종회가 반란하는 것에 간언하였기 때문에 關內侯의 작위를 내렸다.注+羊琇司馬師 夫人從父弟이기 때문에 鍾會에게 諫言한 것을 으로 삼아서 封爵을 얻은 것이다.
[] 3월에 나라 晉公 司馬昭가 작위를 올려 이 되었다.
[] 나라는 晉公 司馬昭에게 조서를 내려 작위를 높여 왕으로 삼고, 사마소의 형 司馬師景王으로 삼았다.
太尉 王祥, 司徒 何曾, 司空 荀顗가 함께 晉王에게 찾아갈 적에 순의가 왕상에게 말하기를 “은 매우 높으니 何侯와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이미 극진하게 공경을 표하였다. 오늘 마땅히 우리가 함께 절을 하고 뵙는 것이 의심할 것이 없다.”注+何侯何曾을 말한다.라고 하니,
왕상이 말하기를 “王爵公爵은 서로 한 계급 차이일 뿐이니, 어찌 천자의 三公이 갑자기 다른 사람에게 절할 수 있겠는가. 군자는 예로써 사람을 아끼니 나는 절하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들어가고 나서 순의는 절을 하고 왕상은 홀로 길게 읍만 하니, 사마소가 왕상에게 말하기를 “오늘에서야 그대가 살피고 돌아보는 것이 신중하다는 것을 알겠다.”라고 하였다.
[] 나라가 나라(蜀漢)의 皇帝 劉禪安樂公에 봉하였다.
[] 劉禪의 온 가족이 洛陽으로 옮겨갈 적에 대신 중에 따라가는 사람이 없었고注+姜維는 이미 죽었고, 張翼廖化董厥도 필시 어지러운 군사들 사이에서 죽었을 것이다. 오직 秘書令 郤正殿中督 張通이 처자를 버리고 단신으로 따라갔다.
극정이 인도하기를 적절하게 하여 거동에 결함이 없으니注+는 합당하다는 뜻이다. 도 합당하다는 뜻이다. 劉禪이 처음 洛陽에 들어가서 나라의 임금과 신하들을 만날 적에 그 예의가 각각 도리에 합당함이 있었다. 유선은 마침내 개탄하면서 극정을 늦게 안 것을 한스러워하였다.
蜀漢建寧太守 霍弋成都를 지키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상복을 입고 3일 동안 크게 곡을 하였다.注+建寧蜀漢益州郡이다. 蜀漢 後主 建興 원년(223) 때 建寧郡으로 고쳤으며 治所味縣이다. (곡하다)은 力鴆이다.
장수들이 곽익에게 빨리 항복하자고 권하였는데 곽익이 말하기를 “지금 도로가 막혀서 군주의 안위도 모르는데 거취(항복)의 큰일을 편의대로 할 수는 없다.
만약 나라에서 우리 주군을 예로 대해준다면 경내를 보존하였다가 항복하는 것이 늦지 않을 것이요, 만에 하나 위태롭거나 욕을 당하면 나는 장차 죽음으로 그들에게 항거할 것이니, 어찌 거취가 느리고 빠른 것을 논하겠는가.”라고 하였다.
[] 〈霍弋은〉 劉禪이 동쪽으로 옮겨갔다는 소식을 듣고서 비로소 여섯 의 장수와 太守를 거느리고 표문을 올려 말하였다.注+ 여기서 6군이라고 말한 것은 越巂가 이미 나라에 항복했기 때문이다. “신이 듣건대 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신은 나라가 패망하고 군주가 귀의하여 죽음으로 지킬 대상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몸을 바쳐서 감히 두마음을 품지 않겠습니다.” 晉王 司馬昭는 훌륭하게 여겨서 본래의 임무를 맡겼다.
劉禪安樂公으로 봉하였는데注+이며 아래에도 동일하다. ≪晉書≫ 〈地理志〉에 “安樂나라에 속하였다.”라고 하였다. 뒷날 함께 연회를 열 때에 그를 위해 蜀漢의 음악을 연주하니,注+(舞樂)는 와 같으니, “蜀技”는 音樂으로, 巴渝舞(파투 지역의 민간 춤)와 같은 부류이다. 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처량한 마음을 가졌으나 유선은 기쁘게 웃으며 태연자약하였다.
사마소가 賈充에게 이르기를 “사람의 무감각함이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비록 諸葛亮이 살아 있더라도 그를 오랫동안 온전하게 보필할 수 없을 터인데, 하물며 姜維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 뒷날 〈司馬昭가〉 劉禪에게 묻기를 “ 땅이 꽤 그립지 않는가?”라고 하니, 유선이 말하기를 “이곳이 즐거우니 이 그립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郤正이 이 말을 듣고 유선에게 말하기를 “만약에 晉王이 다시 묻거든 눈물을 흘리면서 대답하시기를 ‘돌아가신 조상의 무덤이 멀리 岷山에 있으니,
마침내 마음이 서쪽을 향해 서글퍼져서 생각하지 않을 때가 없습니다.’라고 하시고, 이어서 눈을 감으소서.”라고 하였다. 마침 사마소가 다시 묻자, 유선이 이전에 극정이 말해준 대로 대답하였다.
사마소가 말하기를 “어찌하여 극정이 한 말과 같은가?”라고 하니, 유선이 놀라서 쳐다보며 말하기를 “진실로 대왕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라고 하자, 좌우의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 여름 5월에 나라가 제도를 부활하였다.
[] 晉王 司馬昭가 상주하여 五等爵 제도를 회복시키고 이상 600여 명에게 작위를 봉해주었다.注+蜀漢平定시킨 공에 을 준 것이다. 後漢 獻帝 建安 20년(215)에 魏王 曹操를 두어 軍功을 주었는데 虛封(식읍이 없는 封爵)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지금 비록 五等爵을 회복시켰지만 역시 虛封이다.
[] 가을 7월에 나라가 羅憲陵江將軍으로 삼았다.注+나라가 陵江將軍을 설치하고 40(장군의 호칭)의 수장으로 삼았으니, 長江의 물길을 건너서 會稽 지역을 평정하고자 함을 말한 것이다.
[] 예전에 蜀漢羅憲을 보내어 永安을 지키게 하였는데 蜀漢이 패하고 나서 나헌이 劉禪의 손수 쓴 칙서를 받고는 마침내 통솔하는 부대를 거느리고 都亭에서 3일 동안 곡하였다.注+(거느리다)은 로 읽는다. (곡하다)은 力鴆이다. 都亭永安都亭이다.
나라는 蜀漢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병사를 일으켜 서쪽으로 올라가서 겉으로는 구원한다고 핑계 대고 속으로는 나헌을 습격하고자 하였다. 나헌이 말하기를 “나라가 우리의 환난을 救恤하지 않고 맹약을 배반하여 이익을 추구하려 하니, 매우 의롭지 못하다.”라고 하였다.
[] 마침내 무기를 정비하고 병사들과 맹세하여 절개와 의리를 지킬 것을 격려하고 사신을 보내 나라에 급한 상황을 알렸다. 나라 사람이 와서 공격하자, 그들과 싸워 크게 격파하니,
吳主(孫休)가 성내어 다시 陸抗 등을 파견하여 군사 3만 명을 통솔하고 와서 그 포위를 가중시켰다.注+당시 나라는 陸抗鎭軍將軍으로 삼아 西陵都督하게 하였다. 羅憲이 공격을 받은 지 6개월이 되었는데 구원병이 이르지 않으니 어떤 이가 나헌에게 성을 버리고 도주하라고 말하였다.
나헌이 말하기를 “나는 성주이니 백성들이 우러러보고 있는 바이다. 백성들의 위태로움을 안정시키지 못하고 급박할 때에 그들을 버리는 것은 君子는 하지 않으니, 이곳에서 목숨을 마칠 것이다.”라고 하였다.
[] 나라에서 荊州刺史 胡烈을 파견하여 西陵을 공격해 구원하자, 나라 군사가 마침내 퇴각하니,注+西陵은 곧 夷陵이다. 吳主 孫權 黃武 원년(222)에 夷陵을 고쳐 西陵이라 하였는데 宜都郡治所로 하였다. 晉王 司馬昭羅憲에게 옛 임무를 계속하여 맡도록 하고 장군 칭호를 더하고 亭侯에 책봉하였다.
[] 나라가 荀顗에게 禮儀를 정하게 하고, 賈充에게 법률을 바로잡게 하고, 裴秀에게 관직제도를 논의하게 하였다.
[] 晉王 司馬昭의 요청을 따른 것이다.
[] 吳主 孫休하니注+향년이 30세였다. 천자가 천하를 다 소유한 경우에는 죽음을 ‘’이라 기록하고, 한 지역만을 나누어 다스린 경우에는 죽음을 ‘’라고 기록하였다. 烏程侯 가 즉위하였다.
[] 吳主가 병이 나서 입으로 말할 수 없어서 손으로 글씨를 써서 濮陽興을 불러 들어오게 하여 아들 𩅦에게 나와서 절하게 하고, 孫休가 복양흥의 팔을 잡고 손완을 가리키면서 부탁하고 죽으니, 시호를 景帝라 하였다.
[] 나라 사람들은 蜀漢이 막 멸망한 것으로 인해 두려워하여 나이가 든 군주를 모시려고 하였다.注+(어른)은 知兩이다. 左典軍 萬彧이 일찍이 烏程 縣令을 지내면서 烏程侯 孫皓와 서로 사이가 좋았는데,注+나라 제도에는 中營左典軍右典軍을 두었다.
그를 칭찬하기를 “손호는 재주와 식견, 그리고 명석한 판단력이 있어 長沙桓王(孫策)과 비슷합니다. 게다가 학문을 좋아하고 법도를 받들어 따릅니다.”라고 하고, 누차 濮陽興左將軍 張布에게 말하였다.
복양흥과 장포가 朱太后를 설득하여 손호를 세우고자 하니,注+朱太后吳主 孫休夫人으로 손휴가 죽자 여러 신하들이 높여 皇太后로 삼았다. 주태후가 말하기를 “나는 과부이니 어찌 사직에 관한 우려를 알겠는가. 진실로 나라가 실추됨이 없고 종묘가 의뢰할 만하면 좋다.”注+는 믿고 이롭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손호를 맞이하여 황제로 세우니, 吳主 손호가 주태후를 강등하여 景皇后로 삼고, 그의 아버지 孫和追諡하여 文皇帝라 하고, 그 어머니 何氏를 추존하여 太后라 하였다.
[] 8월에 나라 晉王 司馬昭가 그의 아들 中撫軍 司馬炎副相國으로 삼았는데, 겨울 10월에 나라 世子로 세웠다.
[] 예전에 晉王 司馬昭王肅의 딸과 혼인하여 司馬炎司馬攸를 낳았는데 사마유로 景王(司馬師)의 뒤를 잇게 하였다.
晉 武帝 司馬炎晉 武帝 司馬炎
사마유는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으며 재주가 많고 맑고 온화하며 공평하고 진실하여 명성이 사마염보다 뛰어났다. 사마소가 사마유를 아껴서 항상 말하기를 “천하는 景王의 천하이니, 나의 백년 뒤 大業이 마땅히 사마유에게 돌아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 司馬炎은 서 있을 때 머리카락이 땅에 닿았고 손을 내리면 무릎을 지나갔다. 또 羊琇時政에 있어 마땅히 가감할 것을 살펴서 사마염에게 미리 기억하게 하여 〈晉王의〉 방문에 대비할 수 있도록 가르쳤다.
진왕 司馬昭司馬攸를 세자로 삼고자 하였는데, 山濤가 말하기를 “큰아들을 폐출하고 작은아들을 세우는 것은 예법에 어긋나서 성서롭지 못합니다.”라고 하고,
賈充何曾裴秀가 말하기를 “中撫軍(사마염의 관직)은 총명하고 신묘한 무용으로 세상에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으니 사람들의 명망이 이미 큽니다.
타고난 모습이 이와 같으니 진실로 신하의 관상이 아닙니다.”라고 하니 마침내 사마염을 세자로 세웠다.
[] 11월에 나라가 丞相 濮陽興左將軍 張布를 죽였다.
[] 吳主가 처음 즉위하여 우대하는 조서를 내려서 士民들을 불쌍히 여기고 창고를 열어서 가난하며 궁핍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궁녀들을 헤아려서 내보내어 처가 없는 사람에게 짝을 만들어주었고,
황제의 동산에 있는 짐승들을 모두 놓아주니, 당시 사람들이 흡족해하여 明君이라고 칭송하였다.
이미 뜻을 얻고 나서는 거칠고 포악하며 교만한데다 자만하고 꺼리는 일도 많았으며 주색을 좋아하니, 위아래 사람들이 모두 실망했다. 濮陽興張布가 이를 후회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이를 吳主에게 참소하였다.
11월 초하루에 복양흥과 장포가 入朝하자, 吳主는 그들을 잡아서 廣州로 귀양 보냈다가 도중에 그들을 살해하고 삼족을 멸하였다.注+나라는 交州를 나누어 廣州를 설치했는데 광주는 番禺治所를 두었다.
[] 나라가 을 철폐하였다.


역주
역주1 魏나라……원년이다 : 魏나라 元帝 咸熙 원년(264)부터 晉나라 武帝 咸寧 5년(278)까지 無統이다. 朱熹의 〈綱目凡例〉에 國號, 諡號, 姓名, 年號, 年度의 경우 正統은 大字로 쓰고 無統은 小字로 쓴다고 하였는데, 이를 따라 歲年을 小字로 표기하였다.
역주2 魏以檻車徵鄧艾……襲艾殺之 : “‘襲艾殺之’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鄧艾에게 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장병들이 등애를 뒤따라가서 맞이해 돌아온 것은 기록하지 않고, 뒤에 등애의 손자 鄧朗이 郞中이 된 것은 기록하였다.[書襲艾殺之 何 艾無罪也 故將士追艾迎還不書 後以鄧艾孫朗爲郞中則書]” ≪書法≫ 鄧朗이 郞中이 된 것은 본서 278쪽에 보인다.
“≪春秋≫에 나라를 멸망시킨 것이 비록 한 차례가 아니지만, 모두 허여해준 적이 없다. ≪춘추≫ 莊公 10년에 ‘齊나라 군사가 譚나라를 멸망시키자 譚子가 莒나라로 도주했다.’라고 하였는데, ‘滅譚’이라고 기록한 것은 齊나라 사람들이 強暴하여 옳지 못한 죄를 미워했기 때문이고 ‘奔莒’라고 기록한 것은 譚子가 군주의 지위에서 죽지 않은 잘못을 꾸짖었기 때문이다. 齊나라 사람들이 遂나라를 멸망시키고 楚나라 사람들이 黃나라를 멸망시키고 江나라를 멸망시킨 부류에 있어서는 모두 다만 나라를 멸망시킨 사람의 죄만을 기록하고, 멸망을 당한 사람의 연유를 기록하지 않았다. 先儒가 말하기를 ‘滅’은 멸망한 나라에 대한 좋은 말이라고 하니,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노력을 함께 한 것이다.
강함을 믿고 약한 자를 능멸하여 남의 土地를 빼앗아 그 臣民을 소유할 수 없게 하고, 남의 宗廟를 훼손하여 그 제사를 받들 수 없게 하는 것은 지극히 인자하지 않은 자가 아니면 차마 하지 못하는 것이다.
劉禪의 우매함은 나라를 위해 죽지 못하고 살기를 탐하며 구차하게 죽음을 면하였으니, 진실로 크게 꾸짖을 만하다.
종회와 등애는 弑害를 저지른 반역자인 司馬昭를 신하로서 섬기면서 蜀漢을 멸망시켜서 晉나라의 찬탈을 이루게 하여 사마소에게 공을 세운 것이 컸으나 漢나라 제사에는 어떠했는가. 생각건대 옛날에 昭烈帝와 신하들이 隴右와 西蜀에서 고생하면서 의리를 잡아 역적을 토벌하였으나 불행하게도 하늘이 漢나라에 복을 주지 않아 逆賊들이 하늘의 주벌을 피할 수 있었으니, 소열제의 아들이 한 지방을 계승하여 赤帝子(劉邦)의 제사를 조금 연장할 수 있었다. 종회와 등애는 계책을 쓰고 군대를 동원하여 백성들을 칼날 아래에 죽게 했으면서도 스스로 세상에 없는 공로를 세웠다고 생각하였으나 상을 받기도 전에 자신들의 종족을 멸하게 하였다. ≪資治通鑑綱目≫에서 일에 의거하여 그대로 기록하여 이치가 절로 드러나니, 종회는 반역으로 주살되어 진실로 말할 것이 없고, 등애는 본래 죄가 없는데도 또한 화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런 뒤에 天道가 환하게 밝아서 특히 남의 손을 빌어 멸족하여 漢나라를 멸망시킨 죄를 갚게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論語≫ 〈堯曰〉에 ‘멸망한 나라를 일으켜 주고, 끊어진 세대를 계승해주니, 천하의 민심이 귀의하였다.’라고 하였으니 뒷날 남의 국가를 멸망시키려고 도모하는 자가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春秋滅國 雖不一 然皆未嘗予之 齊師滅譚 譚子奔莒 書滅譚 以惡齊人強暴不義之罪 書奔莒 以責譚子不死于位之失 至於齊人滅遂 楚人滅黃滅江之類 皆止書滅國者之罪 而不書見滅者之由 先儒謂滅者 亡國之善詞 上下之同力者也 夫恃強凌弱 奪人土地 使不得有其臣民 毁人宗廟 使不得奉其祭祀 非至不仁者 莫之忍爲 劉禪庸愚 不能死國 貪生苟免 固可深責 鍾鄧臣事弑逆之人 呑滅蜀漢 以成晉簒 有功於昭大矣 其如漢祀 何哉 思昔昭烈君臣 間關隴蜀 仗義討賊 不幸天不祚漢 逆賊逋誅 其子 承襲一方 少延赤帝子之祀 鍾鄧設謀動衆 戕民鋒鏑之下 自謂不世之功 未及受賞 皆赤其族 綱目據事直書而理自見 會以反誅 固無可言 艾本無罪而亦不免 然後知天道昭昭 特假手誅夷 以償滅漢之罪爾 語曰 興滅國 繼絶世 天下之民歸心焉 後之謀欲滅人家國者 可以觀矣]” ≪發明≫
역주3 朱提 : 산 이름으로, 현재의 雲南省 昭通縣이다.
역주4 嚴道 : 縣名으로 현 四川省 榮經縣이다. 고대 남부 실크로드의 중요 驛站이다.
역주5 (丈)[艾] : 저본에는 ‘丈’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艾’로 바로잡았다.
역주6 백성이……두려워하니 : ≪資治通鑑≫에는 “威德振世” 뒤에 “民高其功 主畏其謀”라고 되어 있다.
역주7 會稽에서……치욕 : 春秋時代 때 越王 句踐이 會稽山에서 吳王 夫差에게 대패한 치욕을 말한다. 구천은 吳나라의 속국이 된 越나라로 돌아와서 은밀히 군사를 길러 결국 회계의 치욕을 씻고 부차를 대신하여 천하의 霸者가 되었다. 이때 臥薪嘗膽하며 회계에서의 치욕을 상기했다 한다.(≪史記≫ 〈越王句踐世家〉)
역주8 行軍司馬로……하였다 : 行軍司馬는 主將의 막료로 전쟁 시에 임시로 설치하였다. 行軍司馬는 西魏와 北周 시대에 등장하여 그 이후에 많이 사용되었다. 여기서 胡三省은 行軍司馬의 시작으로 보았으나 ≪晉書≫ 〈山濤傳〉에 “본관으로 軍司馬를 대행하게 하고 친위병 500명을 주어서 鄴에 진수하게 하였다.[以本官行軍司馬 給親兵五百人 鎭鄴]”로 되어 있다. 西魏까지 行軍司馬가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호삼성의 논의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楚王 曹彪가 죽었을 때 여러 王公을 조사하여 鄴城에 두었는데, 이번에는 山濤를 두어 왕공들을 감시시킨 것이다. 왕공을 업성에 안치한 것은 본서 76쪽에 보인다.
역주9 昭夫人王氏 : 王肅의 딸로 司馬炎과 司馬攸를 낳았으며 후에 文明皇后가 된 사람이다.
역주10 掾屬 : 漢나라 때 三公府와 將軍府의 屬僚, 郡縣의 屬僚를 가리키는 말이다.
역주11 (來)[東] : 저본에는 ‘來’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東’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2 大使車……諸使車 : 大使車는 서서 타고, 네 마리 말로 멍에 메우고, 赤色 수레 휘장을 쓴다. 小使車는 서서 타지 않고, 騑馬(駟馬의 곁말)가 있으며, 적색 병풍에 기름을 칠하고, 겹친 絳色 수레 휘장을 쓴다. 諸使車는 모두 朱色 무늬 수레바퀴이고, 네 개의 輻(伏兔와 굴대를 매는 끈)이 있고, 붉은 멍에이다.(≪後漢書≫ 〈輿服志〉)
역주13 (中)[申] : 저본에는 ‘中’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申’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4 帳下督 : 軍中의 보좌관의 일종으로 행군 중 帳中에 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렇게 이른 것이다. 帳下督은 魏나라 왕공 중에 군대를 통솔하는 자, 한 방면에 임명된 자, 장군 등에 1인을 두는데 帳下의 병사(親兵)를 통솔하며 7품관이다. 이후 晉나라에서도 두었다.
역주15 등애가……적에 : 등애가 蜀漢을 공격할 적에 험한 산지를 넘어 江油로 들어와서 城都로 나아갔다.
역주16 옛날에……않았다 : 이 일은 본서 164쪽에 보인다.
역주17 옛날에……하였으니 : ≪禮記≫ 〈月令〉에 “맹춘의 달에는……사람의 시체와 해골을 거두어 장사 지내준다.[孟春之月……掩骼埋胔]”라고 하였다.
역주18 魏詔晉公昭 進爵爲王 : “‘進爵爲王’이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자신이 올린 것이다. 魏公 曹操에게 일찍이 이렇게 기록하였는데, 이때에 ‘晉公昭’라고 기록하였으니 司馬氏의 찬탈은 曹氏가 가르친 것이다. 反復되는 이치가 두려워할 만하다. ≪資治通鑑綱目≫에서 조씨와 사마씨에 대해 기록한 말이 대부분 동일한 것은 만대에 경계를 드리우기 위한 것이다.[進爵爲王 何 自進也 魏公操嘗書之矣 於是書晉公昭 司馬氏之簒 曹氏敎之也 反復之理 可畏哉 綱目於曹馬書辭多同 所以垂萬世戒也]” ≪書法≫ 思政殿訓義 ≪資治通鑑綱目≫ 제14권 상 漢 獻帝 建安 21년(216)에 “魏公操進爵爲王(魏公 曹操가 작위를 올려 王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어찌하여 司馬昭 자신이 작위를 올려 王이 되었다고 기록하지 않았는가. 사마소는 몸소 주군을 시해하는 반역을 저질렀으니, 무릇 관직에 있는 자라면 그를 가차없이 죽여야 하니 누구나 주살할 수 있다. 魏나라 조정의 여러 신하들 중에 王祥, 何曾과 같은 무리들은 손을 공손히 잡고 역적을 섬긴데다 또다시 따라서 王爵을 더해주면서도 편안히 여기며 부끄러워할 줄을 몰랐다. 그러므로 書法을 이와 같이 하여 사마소가 시해하는 반역을 저지른 뒤에도 爵位에 편안해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비록 찬탈할 형세가 이미 이루어졌으나 또한 평상시 일이 없을 때에 大臣을 포상해 진급시키는 것처럼 하였으니, 魏나라 조정의 신하들이 역적에게 편당한 죄를 드러낸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資治通鑑綱目≫에서 어찌 이를 허여하였겠는가.[此何不書昭自進爵爲王 昭躬行弑逆 凡在官者 殺無赦 人得而誅之 魏朝諸臣 如王祥何曾輩 拱手事賊 又從而加以王爵 恬不知恥 故書法如此 以見昭弑逆之後 雍容爵位 雖簒勢已成 亦如平居無事 褒進大臣然者 所以著魏朝臣子黨賊之罪爾 不然 綱目豈予之哉]” ≪發明≫
역주19 追命하여……삼고 : 司馬懿의 작위가 舞陽侯였는데 죽은 다음에 시호를 文宣侯로 하였다. 이제 그 아들 司馬昭가 왕이 되자 다시 추존하여 왕으로 삼은 것이다.
역주20 相王 : 司馬昭의 직책은 相國이고 작위는 王이 되었으므로 相王이라고 말한 것이다.
역주21 君子愛人以禮 : ≪資治通鑑≫에는 이 앞에 “損魏朝之望 虧晉王之德(魏나라 조정의 위망을 손상시키고 晉王의 덕을 손상시키는 것이다.)”이라고 하였다.
역주22 南中은 7郡인데 : 越巂郡‧朱提郡‧牂柯郡‧雲南郡‧興古郡‧建寧郡‧永昌郡이다.
역주23 人生於三 事之如一 : ≪國語≫ 〈晉語〉에 “欒共子가 대답하기를 ‘사람은 세 분의 은혜로 살게 마련이니, 그분들을 똑같이 섬겨야 한다고 들었다. 어버이는 나를 낳아주셨고, 선생님은 나를 가르쳐주셨고, 임금님은 나를 먹여주셨다. 어버이가 아니면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고, 먹지 않았으면 자라지 못했을 것이고, 가르침이 아니면 깨우치지 못했을 것이니, 나를 살아가게 해준 분들이다. 그러므로 한결같이 섬겨야 할 것이니, 오직 이분들이 있는 곳에서는 목숨을 바쳐야 한다.[成聞之 民生於三 事之如一 父生之 師敎之 君食之 非父不生 非食不長 非敎不知 生之族也 故壹事之 唯其所在 則致死焉]’라고 하였다.”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資治通鑑≫ 註에는 “父‧母가 없으면 어찌 살며, 임금이 없으면 어찌 살아가겠는가. 이른바 사람이 살아감이 세 분에 있다는 것이다.[無父母烏生 無君烏以爲生 所謂人生在三也]”라고 하여, 세 분을 父‧母‧君으로 설명하였다.
역주24 乃心西悲 : ≪詩經≫ 〈豳風 東山〉의 “마음이 서쪽을 향해 서글퍼지네[我心西悲]”에서 유래한 것이다.
역주25 五等爵 : 周나라 시대에는 爵位는 公爵, 侯爵, 伯爵, 子爵, 男爵으로 나누었는데, 이를 五等爵라고 한다. 이들에게 주는 食邑은 작위에 따라서 토지의 차등을 두었다. 秦나라에서는 商鞅의 논의에 따라 軍功에 따른 二十等爵制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것이 漢代에 들어서 일반 백성을 대상으로 하는 民爵制로 성격이 변화하였다. 20등작은 公士 上造 簪裊 不更 大夫 國大夫‧官大夫 七大夫‧公大夫 公乘 五大夫 左庶長 右庶長 左更 中更 右更 少上造 大良造‧大上造 駟車庶長 大庶長 關內侯 徹侯‧通侯‧列侯인데, 列侯가 가장 높고 공사가 가장 낮다. 백성에게 작위를 내린 것은 1급인 공사에서 8급인 공승까지로 보인다. 通侯는 본래 徹侯로 漢 武帝의 이름인 徹을 휘하여 通侯로 개칭하였고 이후 보통 列侯로 불려졌다. 列侯는 본래 郡縣에 무관하게 설치되었다. 그러나 前漢 때 吳楚七國의 亂과 武帝 시기를 거치면서 郡縣制가 강화되면서 列侯의 封地를 거의 縣 단위로 부여하였는데, 後漢 때 列侯가 분화되어 縣侯, 鄕侯, 亭侯로 명칭과 지위가 나뉘어졌으며 後漢末에는 縣侯, 鄕侯, 都鄕侯, 都亭侯, 亭侯로 분화하였다.
역주26 騎督 : 騎兵을 督率하는 軍官으로 晉나라 때는 雜號將軍의 아래에 있었으며 지위가 5品이었다.
역주27 名號侯 : 封號만 있고 食邑이 없는 諸侯이다.
역주28 魏置陵江將軍 爲四十號之首 : ‘陵江’은 ‘凌江’으로도 쓰였다. 40號는 ≪宋書≫ 권39 〈百官志〉에 “凌江將軍은 魏나라에 설치했는데, 凌江으로부터 이하는 宣威, 明威, 驤威, 厲威, 威厲, 威寇, 威虜, 威戎, 威武, 武烈, 武毅, 武奮, 綏遠, 綏邊, 綏戎, 討宼, 討虜, 討難, 討夷, 蕩寇, 蕩虜, 蕩難, 蕩逆, 殄寇, 殄虜, 殄難, 掃夷, 掃寇, 掃虜, 掃難, 掃逆, 厲武, 厲鋒, 虎威, 虎牙, 廣野, 橫野, 偏將軍, 裨將軍으로 모두 40號가 있다.”라고 하였다.
역주29 賈充正法律 : “賈充은 자신이 시해를 저지른 역적인데, 그를 시켜서 법률을 바로잡게 하였으니, 3천 가지 죄에서 과연 이것보다 큰 것이 있는가.[充自弑逆之賊 而使之正法律 三千之罪 果有大於此者乎]” ≪發明≫
역주30 孫皓 : 字가 元宗이며, 태자였다가 쫓겨난 孫和의 아들이다.
역주31 吳主休殂 : “이전에 ‘吳主 孫權이 卒하였다.’고 기록한 것은 蜀漢을 높인 것이고, 이때에 蜀漢이 멸망했기 때문에 孫休에게 ‘殂’라고 기록한 것이다.[前書吳主權卒 尊漢也 於是漢亡矣 故休得書殂]” ≪書法≫
역주32 魏晉王昭……副相國 : “曹操에게는 ‘그 아들 曹丕를 丞相副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여기에서는 ‘그 아들 사마염을 副相國으로 삼았다.’고 기록하였으니, 기록한 말이 한결같다. 사람들에게 反復된 이치를 보여주는 것이 매우 절실하다.[操書以其子丕爲丞相副 此書以其子炎副相國 書辭若一 其示人反復之理 深切矣]” ≪書法≫
역주33 吳殺其丞相濮陽興左將軍張布 : “濮陽興과 張布는 小人이다. 작위를 기록하고 ‘殺’이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그 죄로 죽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資治通鑑綱目≫의 書法은 비록 죄가 있어서 죽이더라도 그 죄로 죽이지 않으면 한결같이 ‘殺’이라고 기록하였으니, 잘못된 것을 징계하고 刑罰을 바로잡은 것이다.[興布小人也 書爵書殺 何 殺不以其罪也 綱目之法 雖有罪而殺之 不以其罪 一以殺書之 懲枉濫 正刑罰也]” ≪書法≫
역주34 屯田官 : 後漢 獻帝 建安 원년(196)에 설치하여 69년이 흐른 뒤, 이해에 철폐하였다.

자치통감강목(12) 책은 2021.01.0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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