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會功曹向雄이 收葬會尸이어늘 昭召而責之曰 往者王經之死에 卿哭於東市而我不問이러니
今會爲叛逆이어늘 又輒收葬하니 若復相容이면 其如王法何오
雄曰 昔에 先王掩骼埋胔하여 仁流朽骨하니 當時에 豈卜其功罪而後收葬哉리오
今에 王誅旣加하니 於法已備요 雄感義收葬하니 敎亦無闕이라
法立於上하고 敎弘於下하니 以此訓物이 不亦可乎아 昭悅하여 與宴談而遣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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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鄧艾가 成都에 있으면서 스스로 정벌한 일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여 晉公 司馬昭에게 편지를 써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용병에는 소문을 먼저 퍼뜨리고 뒤에 실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금 蜀漢을 평정한 형세를 이용하여 吳나라를 공격하면 吳나라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게 될 것이니, 석권하여 그들을 평정할 때입니다. 그러나 크게 거병을 하고 난 뒤라 장병들이 피로하니, 바로 전쟁에 동원할 수 없습니다.
隴右의 병사와
蜀의 병사를 남겨두어 소금을 생산하고 쇠를 주조하는 일을 일으키고 아울러 배를 만들어 미리
長江을 따라 내려갈 준비를 하게 하십시오.
注+蜀에는 鹽井이 있고 에서는 銀을 생산했고 와 邛都에서는 銅을 생산했으며, 武陽‧南安‧臨邛‧沔陽에서는 모두 鐵을 생산했다. 漢나라는 鹽官과 鐵官을 설치했었는데, 등애가 그 이익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또 劉禪을 왕으로 봉하여 귀순하여 받는 은총을 드러내셔야 합니다. 이처럼 하시면 吳나라 사람들이 위엄을 두려워하고 은덕을 생각하여 멀리서 우리의 위세를 보고서 순종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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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司馬昭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내가 어찌 이를 모르겠는가. 蜀漢이 자주 변방을 침입하여 군사들은 지치고 백성들은 피로하니, 내가 지금 그들을 정벌하는 것은 마치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처럼 쉬운데 많은 사람들이 蜀漢을 정벌할 수 없다고 말을 한다.
사람의 마음은 미리 겁을 먹으면 지혜와 용기가 나란히 고갈되니 억지로 출병하게 하면 다만 적에게 사로잡히게 된다. 오직 鍾會만이 나와 의견과 같으니, 지금 종회를 파견하여 蜀漢을 정벌하면 蜀漢을 반드시 멸망시킬 수 있을 것이다.
蜀漢을 멸망시킨 다음에는 만일 경이 염려한 대로 사건이 생기더라도 蜀漢이 이미 격파되어 망하고 나서 그 遺民들이 두려워하므로 종회와 더불어 일을 도모하지 못할 것이고,
中原(
魏나라) 출신 장병들은 각기 스스로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생각하므로 종회가 만약에 악독한 일을 저지른다면 다만 자신이 멸족될 뿐이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注+“作惡”은 叛亂을 일으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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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鍾會가 成都에 도착하여 鄧艾를 호송하여 京師로 보냈다. 종회가 꺼리는 사람은 오직 등애뿐이었는데, 등애가 이미 붙잡히자, 마침내 모반을 결의하였다.
〈鍾會는〉 姜維를 선봉으로 삼아 나아가게 하고 자신은 병사를 거느리고 그 뒤를 쫓아가서, 長安에 도착한 뒤에는 騎兵들을 육로로 가게 하고 步兵들을 물길로 가게 하여
渭水에 배를 띄워 黃河로 들어간다면 5일 만에 孟津에 도착할 것이니, 騎兵과 洛陽에서 만나면 하루아침에 천하를 평정할 수 있다고 여겼다.
종회가 司馬昭의 편지를 받았는데 이르기를 “등애가 혹 소환에 나아오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 내가 직접 병사를 거느리고 長安에 주둔하고자 하니 가까운 시일 안에 서로 만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종회가 놀라 말하기를 “단지 등애만을 잡는 것이라면
相國(사마소)은 내가 단독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을 알 텐데, 지금 오는 것이 매우 엄중하니, 반드시 내가 변심한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注+異는 다른 마음을 품는다는 뜻이다.
마땅히 속히 군사를 출동시켜야 하니, 일이 성공하면 천하를 얻을 수 있고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물러나서
蜀郡과
漢中郡을 보존하면
劉備만큼 되는 것을 그르치지 않을 것이다.”
注+“蜀漢”은 漢나라 때 蜀郡과 漢中郡의 땅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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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뒷날 〈司馬昭가〉 劉禪에게 묻기를 “蜀 땅이 꽤 그립지 않는가?”라고 하니, 유선이 말하기를 “이곳이 즐거우니 蜀이 그립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郤正이 이 말을 듣고 유선에게 말하기를 “만약에 晉王이 다시 묻거든 눈물을 흘리면서 대답하시기를 ‘돌아가신 조상의 무덤이 멀리 岷山과 蜀에 있으니,
마침내 마음이 서쪽을 향해 서글퍼져서 생각하지 않을 때가 없습니다.’라고 하시고, 이어서 눈을 감으소서.”라고 하였다. 마침 사마소가 다시 묻자, 유선이 이전에 극정이 말해준 대로 대답하였다.
사마소가 말하기를 “어찌하여 극정이 한 말과 같은가?”라고 하니, 유선이 놀라서 쳐다보며 말하기를 “진실로 대왕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라고 하자, 좌우의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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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나라 사람들은
蜀漢이 막 멸망한 것으로 인해 두려워하여 나이가 든 군주를 모시려고 하였다.
注+長(어른)은 知兩의 切이다. 左典軍 萬彧이 일찍이
烏程 縣令을 지내면서
烏程侯 孫皓와 서로 사이가 좋았는데,
注+吳나라 제도에는 中營에 左典軍과 右典軍을 두었다.
그를 칭찬하기를 “손호는 재주와 식견, 그리고 명석한 판단력이 있어 長沙桓王(孫策)과 비슷합니다. 게다가 학문을 좋아하고 법도를 받들어 따릅니다.”라고 하고, 누차 濮陽興과 左將軍 張布에게 말하였다.
복양흥과 장포가
朱太后를 설득하여 손호를 세우고자 하니,
注+朱太后는 吳主 孫休의 夫人으로 손휴가 죽자 여러 신하들이 높여 皇太后로 삼았다. 주태후가 말하기를 “나는 과부이니 어찌 사직에 관한 우려를 알겠는가. 진실로
吳나라가 실추됨이 없고 종묘가 의뢰할 만하면 좋다.”
注+賴는 믿고 이롭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손호를 맞이하여 황제로 세우니, 吳主 손호가 주태후를 강등하여 景皇后로 삼고, 그의 아버지 孫和를 追諡하여 文皇帝라 하고, 그 어머니 何氏를 추존하여 太后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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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司馬炎은 서 있을 때 머리카락이 땅에 닿았고 손을 내리면 무릎을 지나갔다. 또 羊琇는 時政에 있어 마땅히 가감할 것을 살펴서 사마염에게 미리 기억하게 하여 〈晉王의〉 방문에 대비할 수 있도록 가르쳤다.
진왕 司馬昭가 司馬攸를 세자로 삼고자 하였는데, 山濤가 말하기를 “큰아들을 폐출하고 작은아들을 세우는 것은 예법에 어긋나서 성서롭지 못합니다.”라고 하고,
賈充‧何曾‧裴秀가 말하기를 “中撫軍(사마염의 관직)은 총명하고 신묘한 무용으로 세상에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으니 사람들의 명망이 이미 큽니다.
타고난 모습이 이와 같으니 진실로 신하의 관상이 아닙니다.”라고 하니 마침내 사마염을 세자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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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吳主가 처음 즉위하여 우대하는 조서를 내려서 士民들을 불쌍히 여기고 창고를 열어서 가난하며 궁핍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궁녀들을 헤아려서 내보내어 처가 없는 사람에게 짝을 만들어주었고,
황제의 동산에 있는 짐승들을 모두 놓아주니, 당시 사람들이 흡족해하여 明君이라고 칭송하였다.
이미 뜻을 얻고 나서는 거칠고 포악하며 교만한데다 자만하고 꺼리는 일도 많았으며 주색을 좋아하니, 위아래 사람들이 모두 실망했다. 濮陽興과 張布가 이를 후회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이를 吳主에게 참소하였다.
11월 초하루에 복양흥과 장포가
入朝하자,
吳主는 그들을 잡아서
廣州로 귀양 보냈다가 도중에 그들을 살해하고 삼족을 멸하였다.
注+吳나라는 交州를 나누어 廣州를 설치했는데 광주는 番禺에 治所를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