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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1)

자치통감강목(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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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卯年(235)
十三年이라
魏靑龍三年이요 吳嘉禾四年이라
春正月 하다
魏主叡數問甄后死狀於太后하니 由是 太后以憂卒하다
中軍師楊儀有罪어늘 廢徙漢嘉하니 自殺하다
楊儀旣殺魏延 自以爲宜代諸葛亮秉政이로되 而亮平生密指 以儀狷狹이라하여 意在蔣琬注+密指, 蓋亮密以語諸僚佐, 特儀不知耳. 狷, 褊急也. 狹, 隘狹也.이라
儀至成都 拜中軍師하여 無所統領하니 儀自以年宦先琬하고 才能踰之라하여 由是怨憤하여 形于聲色注+先, 悉薦切.이러라
後軍師費褘 往慰省之한대 儀語曰 往者丞相初亡 吾若擧軍就魏 處世寧當落度如此邪注+度, 音鐸. 落度, 猶落魄也, 不得志貌.아하니
褘密表其言한대 詔廢爲民하여 徙漢嘉郡하니 自殺注+漢嘉 故靑衣也. 漢順帝陽嘉二年, 改爲漢嘉, 屬蜀郡屬國都尉. 蜀郡屬國, 安帝延光元年所置, 蜀分爲漢嘉郡.하다
夏四月 以蔣琬爲大將軍, 錄尙書事하고 費褘爲尙書令하다
魏主叡好土功하여 旣作許昌宮 又治洛陽宮하고 起昭陽, 太極殿하고 築總章觀하니 高十餘丈이라
力役不已하니 農桑失業注+魏主叡, 上法太極, 於洛陽南宮, 起太極殿, 卽漢崇德殿之故處. 舜有總章之訪, 相傳以爲總章卽明堂也. 觀, 闕也, 總章觀, 蓋在太極殿前.이러라 陳群 諫曰 昔 禹承唐虞之盛호되 猶卑宮室而惡衣服이어든
況今喪亂之後 人民至少하고 邊境有事乎잇가 劉備多作傳舍하여 興費人役이어늘 太祖知其疲民也注+典略曰 “備鎭成都, 拔魏延, 督漢中, 於是起館舍, 築亭障, 從成都至白水關四百餘區.”하시니
今中國勞力 亦吳蜀之所願이라 此安危之機也 惟陛下 慮之하소서
叡答曰 王業宮室 亦宜竝立이라 滅賊之後 豈可復興役邪 此君之職이니 蕭何之大略也注+此指蕭何治未央宮事爲言. 君, 指陳群.니라
群曰 昔 漢祖已滅項羽 宮室焚燒 是以 蕭何建武庫, 太倉하니 皆是要急이로되 然高祖猶非其壯麗하니이다
今二虜未平하니 誠不宜與古同也니이다 且人之所欲 莫不有辭 況乃王者 莫之敢違하니
若必欲作之인댄 固非臣下言辭所屈이요 若卓然回意 亦非臣下所及也니이다
漢明帝欲起德陽前殿이어늘 鍾離意諫而止러니 後復作之할새 謂群臣曰 鍾離尙書在 不得成此殿也라하니이다
夫王者 豈憚一臣이리오 蓋爲百姓也니이다 叡爲之少省하다
◑叡耽于內寵하여 自貴人以下 至掖庭灑掃 凡數千人이라 廷尉高柔諫曰 周禮 天子后妃以下 百二十人이니 旣已盛矣注+王立后, 三夫人, 九嬪, 二十七世婦, 八十一御妻, 是爲百二十人.니이다
竊聞後庭之數 今復過之라하니 聖嗣不昌 殆或由此 臣愚以爲可妙簡淑媛하여 以備內官之數注+淑, 善也. 媛, 音院. 美女也. 其餘 盡遣還家하고
且以育精養神하여 專靜爲寳 則螽斯之徵 可庶而致矣리이다 叡報之曰 輒克昌言하노니 它復以聞注+輒以昌言自克也. 揚子曰 “勝己之私之謂克.”하라
是時 獵法嚴峻하여 殺禁地鹿者 身死하고 財産沒官이러니
柔復上疏曰 百姓供役 田者旣減이어늘 復有鹿暴하여 所傷不貲注+通鑑 “百姓供給衆役, 親田者旣減, 加頃復有獵禁, 群鹿犯暴, 殘食生苗, 處處爲害, 所傷不貲.” 親田, 謂躬親田畒者. 不貲, 言不可計量也. 至如滎陽左右하여는 周數百里 略無所入이니이다
方今天下生財者少하고 而麋鹿之損者多하니 請除其禁하노이다
◑叡又欲平北芒하여 作臺觀하여 以望孟津注+北芒, 洛陽北山名.이러니
衛尉辛毗諫曰 天地之性 高高下下注+國語 “周太子晉曰 ‘天地成而聚於高, 歸物於下. 四岳佐禹, 高高下下, 封崇九山, 決汩九川.’”어늘 今欲反之하시니 旣非其理 加以損費人功하니 民不堪役이니이다 叡乃止하다
少府楊阜上疏曰 堯尙茅茨而萬國安其居하고 禹卑宮室而天下樂其業注+以茅覆屋曰茨. 堯土階三尺, 茅茨不翦.하고
及至殷, 周하여는 或堂崇三尺하고 度以九筵耳注+周禮考工記 “殷人重屋, 堂修七尋, 堂崇三尺. 周人明堂, 度九尺之筵, 東西九筵, 南北七筵, 堂崇一筵.” 度, 大各切, 下同. 筵, 席也, 鋪陳曰筵, 藉之曰席. 每筵長九尺, 謂東西之廣爲八丈一尺, 南北之廣爲六丈三尺.러니 桀作璇室象廊하고 紂蔿傾宮鹿臺하여 以喪其國注+璇, 美石似玉. 新序曰 “鹿臺其大三里, 高千仞.” 臣瓚曰 “今在朝歌城中.”하고
楚靈 築章華而身受禍하고 秦皇 作阿房하여 二世而滅注+楚靈王爲章華之臺. 民不堪命. 從亂如歸. 王走而死于羋尹氏.하니이다
夫不度萬民之力하여 以從耳目之欲이면 未有不亡者也니이다
陛下當以堯, 舜, 殷, 周爲法이요 桀, 紂, 秦, 楚爲戒어늘 而乃自暇自逸하여 惟宮室是飾하시니 必有危亡之禍矣리이다
君作元首하고 臣爲股肱이라 存亡一體 得失同之하니 臣雖駑怯이나 敢忘斯義리잇고
言不切至하면 不足以感寤陛下 謹叩棺沐浴하고 伏俟重誅注+叩, 擊也. 一曰 “近也.”하노이다 叡感其忠하여 手筆詔答하니라
叡常著帽하고 被縹綾半袖注+著, 陟略切. 帽, 音冒, 小兒及蠻夷頭衣也. 被, 去聲. 縹, 普沼切, 靑白色. 綾, 紋帛, 或謂之綺, 或謂之紋繪. 半袖, 半臂也.어늘 阜問曰 此於禮 何法服也잇고 叡黙然이러니
自是 不法服하여는 不見阜러라 阜又上疏하여 欲省宮人하여 乃召御府吏하여 問後宮人數注+少府屬官, 有御府令, 典官婢, 員吏七十人, 吏從官三十人.한대 吏對曰 禁密 不得宣露니이다
阜怒하여 杖而數之曰 國家不與九卿爲密이요 反與小吏爲密乎아하니 叡愈嚴憚之注+國家, 天子之稱也.하니라
◑散騎常侍蔣濟 上疏曰 昔 句踐 養胎以待用注+國語 “越王句踐困於會稽, 旣反國, 命壯者無娶老婦, 老者無娶壯妻, 女子十七不嫁, 丈夫二十不娶, 其父母有罪, 將免乳者以告公, 令醫守之, 生丈夫, 二壺酒‧一犬, 生女子, 二壺酒‧一豚, 生三人, 公與之母, 生二人, 公與之餼.”하고 昭王 恤病以雪仇注+燕昭王, 於破燕之後, 弔死問疾, 欲以報齊, 雪先王之恥.하니이다
今二敵彊盛하니 當身不除 百世之責也注+謂當帝之身, 不能滅吳‧蜀, 後世之責, 必歸於帝. 以陛下神武 舍其緩者하시고 專心討賊이면 臣以爲無難矣注+舍, 讀曰捨.라하노이다
中書侍郞王基上疏曰注+按此, 則魏已改通事郞, 爲中書侍郞矣. 古人 以水喩民하여 曰 水 所以載舟 亦所以覆舟注+孔子曰 “君者舟也, 庶人者水也, 水則載舟, 水則覆舟, 君以此思危, 則危將焉而不至矣.”라하고
顔淵曰 東野子之御 馬力盡矣어늘 而求進不已하니 殆將敗矣注+家語 “魯定公問於顔回曰 ‘子亦聞東野畢之善御乎.’ 對曰 ‘善則善矣. 雖然其馬將必佚.’ 公曰 ‘奚以知之.’ 顔回對曰 ‘以政知之, 昔者帝舜巧於使民, 造父巧於使馬, 舜不窮其民力, 造父不窮其馬力. 是以舜無佚民, 造父無佚馬. 今東野畢之御也, 升馬執轡, 御體正矣, 步驟馳騁, 朝禮畢矣, 歷險致遠, 馬力盡矣. 然而猶求進不已, 臣以此知之.’ 公曰 ‘吾子之言, 其義大矣, 願少進乎.’ 顔回曰 ‘臣聞之 「鳥窮則啄, 獸窮則攫, 人窮則詐, 馬窮則佚.」 自古及今, 未有窮其下而能無危者也.’”라하니이다
今事役勞苦하여 男女離曠하니 願陛下 深察東野之敝하고 留意舟水之喩하소서
漢文之時 唯有同姓諸侯로되 賈誼憂之하여 以爲置火積薪之下而寢其上이라하니
今寇賊未殄하여 猛將擁兵하니 檢之則無以應敵이요 久之則難以遺後注+謂五大在邊, 尾大不掉, 非善計以詒後人也. 遺, 于季切.하니 使賈誼復起 必深切於曩時矣注+言不特痛哭流涕長太息而已.리이다
◑殿中監 督役 擅收蘭臺令史注+此殿中監, 以其時營造宮室, 使監作殿中耳, 非唐殿中監之官也. 觀後所謂校事, 可知矣. 又據晉書輿服志 “大駕鹵簿, 左殿中御史, 右殿中監.” 則魏時殿中監已有定官. 蘭臺令史, 屬御史臺, 會要曰 “漢謂御史臺爲蘭臺.”하니 僕射衛臻 奏案之한대 詔曰 殿舍不成하여 吾所留心이어늘 卿推之 何也注+推, 考鞫也.
臻曰 古制 侵官之法 非惡其勤事也 誠以所益者小하고 所墮者大也注+古者, 百官不相踰越. 左傳, 欒鍼曰 “侵官, 冒也.” 墮, 讀曰隳.일새니이다
每察校事 類皆如此注+魏武建國, 置校事, 使察群下.하니 若又縱之하면 懼群司遂將越職하여 以至陵夷矣로소이다
尙書孫禮 固請罷役한대 詔曰 欽納讜言하노라하고 促遣民作하다
監者復奏留一月이어늘 禮徑至作所하여 稱詔罷之하니 叡雖不能盡用直言이나 然皆優容之러라
秋七月 하다
魏主叡以殿災 問太史令高堂隆曰 此何咎也注+太史令, 屬太常. 高堂, 複姓. 對曰 易傳曰 上不儉하고 下不節이면 孽火燒其室이라하고
又曰 君高其臺하면 天火爲災注+京房易傳之辭. 孽, 妖孽也.라하니이다 人君 務飾宮室하여 不知百姓空竭故 天應以旱하여 火從高殿起也니이다
又詔問隆漢柏梁災 而大起宮殿以厭之하니 其義云何注+厭, 益涉切.오하니
對曰 此越巫所爲 非聖賢之訓也注+漢武帝太初元年, 柏梁臺災, 越人勇之曰 “越俗有火災, 復起屋, 必以大, 用勝服之.” 於是作建章宮.니이다 今宜罷遣民役하고 淸掃所災之處하여 不敢有所立作이면 則萐莆, 嘉禾必生其地矣注+萐, 山輒‧色洽二切. 莆, 音甫. 萐莆, 瑞草也. 堯時生於庖廚, 扇暑而涼.리이다
八月 魏立子芳爲齊王하고 詢爲秦王하다
魏主叡無子 養二王爲己子하니 宮省事秘하여 莫知其所由來者 或云 芳 任城王楷之子也注+楷, 文帝弟任城王彰之子.라하니라
魏主叡復立崇華殿하여 更名九龍注+時郡國有九龍見, 因以名殿.하고 通引穀水過殿前호되 爲玉井綺欄하여 蟾蜍含受하고 神龍吐出注+水經注 “穀渠東歷故金市南, 直千秋門, 枝流入石逗, 伏流注靈芝九龍池.” 綺欄, 謂鏤爲綺文. 蜍, 署魚切. 蟾蜍, 蝦蟇也. 含受, 受其水也.하다
使博士馬鈞으로 作司南車 水轉百戱하니 作者三四萬人注+司南車, 卽指南車也. 黃帝與蚩尤戰于涿鹿, 蚩尤起大霧, 將士不知所之, 帝遂作指南車. 周成王時, 越裳氏重譯來獻, 使者迷失歸路, 周公錫騈車以指南. 晉志云 “刻木爲仙人, 衣以羽衣, 立車上, 車雖回轉, 而手常指南, 大駕出, 爲先導之乘, 以正四方.” 水轉百戱, 以大木彫構, 使其形若輪, 平地施之, 潛以水發焉, 設爲女樂舞象, 至令木人擊鼓吹簫, 作山嶽, 使木人跳絙擲劍, 緣絙倒立, 出入自在, 百官行署, 舂磨闘鷄, 變巧百端.이러라
陵霄闕 始構 有鵲 巢其上하니 魏主以問高堂隆한대 對曰 詩曰 惟鵲有巢 惟鳩居之라하니이다
今始構闕而鵲巢之하니 天意若曰 宮室未成 身不得居하여 將有他姓制御之耳
天道無親하여 惟與善人하나니 今宜休罷百役하고 增崇德政하시면 則可以轉禍爲福矣리이다
叡性嚴急하여 督修宮室 有稽限者하면 親召問之하여 言猶在口 身首已分注+立爲期限, 以必其成, 及期而不成, 爲稽限.이라
散騎常侍王肅 諫曰 陛下臨時所刑 皆有罪之吏也이나 衆庶不知하여 謂爲倉卒이라하니
願下之吏하여 暴其罪而誅之하여 無使汚宮掖而爲遠近所疑하소서
且人命至重하니 難生易殺이라 是以 聖賢重之하시니이다 漢文帝欲殺犯蹕者어늘
張釋之曰 方其時 上使誅之則已어니와 今下廷尉하시니 廷尉 天下之平이라 不可傾也라하니 臣以爲大失其義라하노이다
廷尉 天子之吏也로되 猶不可以失平이어든 而天子之身 反可以惑謬乎잇가
斯重於爲己而輕於爲君하니 不忠之甚也 不可不察注+爲, 去聲.이니이다
冬十月 魏中山王袞하다
疾病 令官屬曰 男子 不死於婦人之手注+禮喪大記之言.하나니 亟以時成東堂하라 堂成 輿疾往居之하다
又令世子曰 汝幼爲人君하여 知樂不知苦하니 必將以驕奢爲失者也 兄弟有不良之行이어든 當造䣛諫之注+造䣛, 詣䣛前也.
諫之不從이어든 流涕喩之 喩之不改어든 乃白其母하고 猶不改어든 當以奏聞하고 幷辭國土
與其守寵罹禍 不若貧賤全身也 此亦謂大罪惡耳 其微過細故 當掩覆之니라 遂卒하다
魏殺鮮卑軻比能하다
先是 軻比能 誘保塞鮮卑步度根以叛하여 殺魏將軍蘇尙, 董弼二人하고 遂走幕北하여 復殺步度根注+步度根, 檀石槐之孫也.이러니
至是하여 幽州刺史王雄 使人刺殺之하니 種落離散하여 邊陲遂安하다
張掖柳谷口水溢湧하여 寳石負圖호되 狀象靈龜하여 立于川西하고
有石馬七及鳯凰, 麒麟, 白虎, 犧牛, 璜玦, 八卦, 列宿, 孛彗之象하고 又有文曰大討曹注+魏氏春秋曰 “是歲張掖郡刪丹縣金山, 玄川溢湧, 寶石負圖, 狀象靈龜. 廣一丈六尺, 長一丈七尺一寸, 圍五丈八寸, 立于川西. 有石馬七, 其一仙人騎之, 其一羈絆, 其五有形而不善成. 有玉匣關蓋於前, 上有玉字, 玉玦二, 璜一. 麒麟在東, 鳳鳥在南, 白虎在西, 犧牛在北, 馬自中布列四面, 色皆蒼白. 其南有五字, 曰 ‘上上三天王.’ 又曰 ‘述大金, 大討曹, 金但取之, 金立中, 大金馬一匹在中, 大(告)[吉]開壽, 此馬甲寅述水.’ 凡中字六, 金字十, 又有若八卦及列宿孛彗之象焉.” 漢晉春秋曰 “氐池縣大柳谷口, 夜激波湧溢, 其聲如雷. 曉而有蒼石立水中, 長一丈六尺, 高八尺, 白石畫之, 爲十三馬‧一牛‧一鳥‧八卦‧玉玦之象, 皆隆起. 其文曰 ‘大討曹, 適水中甲寅.’ 帝惡其討也, 使鑿去爲計, 以蒼石(室)[窒]之, 宿昔而白石(蒲)[滿]焉. 至晉初, 其文愈明, 馬象皆煥徹如玉焉.” 璜玦, 音黃決. 璜, 半璧, 佩下之飾也, 玦, 亦玉佩, 如環而有缺.
詔書班天下하여 以爲嘉瑞라하니 任令于綽 以問鉅鹿張臶注+任縣, 前漢屬廣平國, 後漢屬鉅鹿郡, 魏復屬廣平郡. 臶, 在甸‧祖悶二切, 臶兼內外學, 故以問之.한대
臶曰 夫神以知來 不追已往이라 祥兆先見而後 廢興從之하나니
今漢久亡하고 魏已得之하니 何所追興祥兆乎리오 此石 當今之變異 而將來之符瑞也注+後人以此爲晉繼魏之徵. 牛繼馬, 又以爲元帝本牛氏, 繼司馬之徵.니라
魏主叡使人以馬易珠璣, 翡翠, 玳瑁於吳注+珠不圓者, 爲璣.하니 吳主權曰 此皆孤所不用이어늘 而可以得馬하니 孤何愛焉이리오하고 與之하다


乙卯年(235)
나라(蜀漢) 後主 建興 13년이다.
나라 明帝 曹叡 靑龍 3년이고, 나라 大帝 孫權 嘉禾 4년이다
】 봄 정월에 나라 太后 郭氏하였다.
中軍師 楊儀가 죄가 있으므로 하여 漢嘉로 귀양 보내니, 자살하였다.
楊儀魏延을 죽이고 나서 자신이 마땅히 諸葛亮을 대신하여 정권을 잡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제갈량이 평소 은밀하게 지시한 것은, 양의가 고집스럽고 편협하다 하여 뜻이 蔣琬에게 있었다.注+密指”는 諸葛亮이 은밀히 여러 관료와 보좌관들에게 말한 것인데 楊儀만 알지 못한 것이다. 은 성질이 편협하고 급한 것이고, 은 좁은 것이다.
양의가 成都에 이르렀는데 中軍師에 제수되어 통솔하는 바가 없으니, 양의는 자신의 나이와 벼슬이 장완보다 앞서고 재능이 그보다 낫다고 생각하여, 이 때문에 원망과 분노가 말소리와 얼굴빛에 나타났다.注+(앞서다)은 悉薦이다.
後軍師 費褘가 가서 위로하고 살피자, 양의가 말하기를 “지난번 丞相이 막 사망했을 적에 내가 만약 군대를 모두 데리고 나라로 갔으면, 내 처지가 어찌 이처럼 실의에 빠져 처량했겠는가.”注+은 음이 이다. “落度”은 落魄과 같으니, 뜻을 얻지 못한 모양이다. 하였다.
비위가 그의 말을 은밀히 表文을 올려 아뢰자, 詔令을 내려 양의를 폐하여 平民으로 삼아서 漢嘉郡으로 귀양 보내니, 양의가 자살하였다.注+漢嘉郡은 옛날 靑衣縣이다. 順帝 陽嘉 2년(133)에 漢嘉로 이름을 고쳐서 蜀郡屬國都尉에 소속되었다. 蜀郡屬國安帝 延光 원년(122)에 설치하였는데, 蜀漢이 나누어 漢嘉郡으로 만들었다.
】 여름 4월에 蔣琬大將軍 錄尙書事로 삼고 費褘尙書令으로 삼았다.
나라가 洛陽宮을 지었다.
魏主 曹叡가 토목공사를 좋아하여 許昌宮을 지은 뒤에 또 洛陽宮을 수리하였으며, 昭陽殿太極殿을 일으키고 總章觀을 지었는데 의 높이가 10여 이었다.
그리하여 부역하는 일이 그치지 않으니, 농사짓는 자와 누에 치는 자가 생업을 잃었다.注+魏主 曹叡는 위로 太極을 본받아서 洛陽南宮太極殿을 일으키니, 바로 나라 崇德殿의 옛터이다. 임금은 總章에 대한 물음이 있었으니, 하는 말에 “總章은 바로 明堂이다.”라 하였다. 은 궁궐이니, 總章觀太極殿 앞에 있었다. 이에 陳群이 다음과 같이 하였다. “
더구나 지금 喪亂을 겪은 뒤에 인민이 지극히 적고 변경에 일(전쟁)이 있는 우리 국가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옛날 劉備傳舍(驛站의 관사)를 많이 짓느라 부역을 일으켜 인력을 소모하자, 太祖(曹操)는 그가 백성들을 피폐하게 함을 아셨으니,注+에 “劉備成都에 진주해 있을 적에 魏延을 발탁하여 漢中을 감독하게 하였는데, 이때 館舍를 일으키고 亭障을 쌓아 成都로부터 白水關에 이르기까지 4백여 구역이 있었다.” 하였다.
지금 中國(나라)이 백성들의 힘을 수고롭게 하는 것은 바로 나라와 蜀漢에서 원하는 바입니다. 이는 나라의 安危의 관건이니, 부디 폐하께서는 염려하소서.”
조예가 답하기를 “王業宮室은 또한 아울러 세워야 한다. 을 멸한 뒤에 어찌 다시 부역을 일으키겠는가. 이는 그대의 직분이니, 蕭何의 큰 경륜을 본받아 시행하라.”注+蕭何之大略”은 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陳群을 가리킨 것이다. 하였다.
陳群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옛날 高祖項羽를 멸망시키고 나자, 궁실이 모두 불탔으므로 이에 蕭何武庫太倉을 건립하였으니, 이는 모두 중요하고 시급한 일인데도 오히려 高祖는 그 웅장하고 화려함을 비난하였습니다.
지금 蜀漢 두 오랑캐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으니, 진실로 옛날과 똑같이 해서는 안 됩니다. 또 사람이 욕망하는 일에는 모두 구실이 있게 마련인데, 하물며 王者에게는 감히 어길 자가 없으니,
군주가 만약 기어이 호화로운 궁궐을 만들고자 한다면 진실로 신하들이 말하여 굴복시킬 수 있는 바가 아니요, 만약 우뚝하게 마음을 돌리신다면 이 또한 신하들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
王者가 어찌 한 신하를 꺼리겠습니까. 이는 百姓을 위해서입니다.” 曹叡는 이 때문에 궁궐의 규모와 꾸밈을 다소 줄였다.
曹叡內寵(안에 총애하는 여인들)에게 빠져서 貴人으로부터 掖庭에서 물을 뿌리고 청소하는 여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수천 명이었다. 廷尉 高柔가 다음과 같이 하였다. “≪周禮≫에 天子后妃 이하가 120명이니 이미 너무 많습니다.注+은 1명의 , 3명의 夫人, 9명의 , 27명의 世婦와 81명의 御妻를 세우니, 120명이다.
그런데 듣건대 後庭의 궁녀 수가 이제 이보다 많다 하니, 聖上의 후사가 번창하지 않음은 아마도 이 때문인 듯합니다. 어리석은 은 생각건대 貞淑한 미녀를 잘 선발하여 의 수를 구비하고注+함이요, 은 음이 이니 〈“淑媛”은〉 美女이다. 그 나머지는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며,
또 정력을 기르고 정신을 수양해서 專一하고 고요함을 보배로 삼으시면, 을 거의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조예가 답하기를 “내 번번이 昌言(善言)으로 스스로 잘 극복하니, 다시 다른 것도 자세히 아뢰라.”注+〈“輒克昌言”은〉 번번이 昌言으로써 스스로 극복하는 것이다. ≪揚子法言≫에 이르기를 “자기 사욕을 이겨냄을 이라 한다.” 하였다. 하였다.
】 이때에 사냥하는 법이 준엄하여 禁地에 있는 사슴을 죽인 자는 몸이 죽고 재산이 관청에 몰수되었는데,
高柔가 다시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百姓들이 부역에 동원되어 농사짓는 자가 이미 줄어들었는데 또다시 사슴의 포악함으로 인해 손상된 곡식이 적지 않고,注+資治通鑑≫에는 “백성들이 여러 부역에 동원되어 직접 농사짓는 자가 줄어들었고 게다가 또 사냥을 금지하여 사슴 떼가 농지를 침범하여 자라는 곡식을 마구 갉아 먹어서 곳곳마다 피해를 일으켜 곡식을 손상하는 것이 적지 않다.” 하였다. “親田”은 몸소 밭두둑을 경작하는 것을 이른다. “不貲”는 숫자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음을 말한 것이다. 滎陽(형양)의 좌우 부근으로 말하면 주위 수백 리에 사람들이 전혀 들어가지 못합니다.
지금 天下가 생산하는 재물은 적고 고라니와 사슴이 손상시키는 곡식은 많으니, 그 禁令을 제거해주시기를 청합니다.”
曹叡는 또 北芒山을 평평하게 해서 臺觀을 만들어 孟津을 바라보고자 하였는데,注+北芒洛陽에 있는 北山의 이름이다.
衛尉 辛毗가 다음과 같이 하였다. “하늘과 땅의 이치는 높은 곳을 높게 하고 낮은 곳을 낮게 하는데注+國語≫ 〈周語〉에 말하였다. “나라 太子 이 말하기를 ‘天地가 이루어짐에 높은 곳으로 모이고 물건은 낮은 곳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四岳禹王을 보좌하여 높은 것은 높게 하고 낮은 것은 낮게 하여 九州의 산을 높이 봉하고 九州의 냇물을 깊이 팠다.’ 하였다.” 지금 이것을 반대로 하고자 하시니 이미 옳은 이치가 아니요, 게다가 사람의 功力을 허비하니 백성들이 부역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조예는 마침내 이것을 중지하였다.
少府 楊阜가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임금이 띠풀로 만든 초가집을 숭상하자 萬國이 거처를 편안히 여겼고, 임금이 궁실을 낮게 하자 천하가 그 생업을 즐거워하였으며,注+띠풀로 지붕을 덮는 것을 라 한다. 임금은 흙으로 만든 계단이 3이었고, 띠풀로 이엉을 만들어서 지붕을 덮되 그 끝을 가지런하게 자르지 않았다.
나라와 나라에 이르러서는 혹 의 높이가 3이었고 너비는 9으로 헤아릴 뿐이었습니다.注+周禮≫ 〈考工記〉에 “나라 사람은 지붕을 이중으로 하고 의 길이를 7(8척), 의 높이를 3으로 하였다. 나라 사람의 明堂은 9으로 펼 수 있도록 너비를 헤아려서 동서로 9이고 남북으로 7이며, 의 높이가 1이다.” 하였다. (헤아리다)은 大各이니, 아래도 같다. 은 자리이니, 아래에 깐 것을 이라 하고 위에 깐 것을 이라 한다. 그런데 桀王璇室(옥으로 만든 방)과 象廊(상아로 만든 행랑)을 만들고 紂王傾宮鹿臺를 만들어서 나라를 잃었고,注+은 아름다운 옥돌로 과 비슷한 것이다. ≪新序≫에 “鹿臺는 그 크기가 3리이고 높이가 천 길이다.” 하였다. 臣瓚이 말하였다. “鹿臺는 지금의 朝歌城 안에 있다.”
나라 靈王章華臺를 쌓고서 자신이 를 받았으며, 나라 始皇阿房宮을 짓고서 二世皇帝 때에 멸망하였습니다.注+나라 靈王章華臺를 만들자 백성들이 명령을 감당하지 못해서 을 따르기를 마치 나그네가 집에 돌아가는 듯이 하니, 이 달아나 羋尹氏(미윤씨)에게서 죽었다.
萬民의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서 군주 자신의 귀와 눈의 욕망을 따르면 망하지 않은 자가 있지 않습니다.
폐하께서는 마땅히 , , 를 법으로 삼고, 걸왕과 주왕, 나라와 나라를 경계로 삼으셔야 하는데, 도리어 스스로 한가롭고 편안하여 오직 궁실을 꾸미시니, 반드시 국가가 위태롭고 멸망하는 가 있을 것입니다.
君主元首가 되고 신하는 股肱이 되어 存亡을 같이하고 득실을 함께하니, 이 비록 노둔하고 겁이 많으나 감히 이 의리를 잊겠습니까.
말이 간절하고 지극하지 못하면 폐하를 감동시키고 깨닫게 하지 못하니, 삼가 을 다듬어 만들고 목욕하고서 무거운 誅罰이 내리기를 엎드려 기다립니다.”注+는 침(다듬음)이다. 일설에 “가까이함이다.”라고 한다. 曹叡는 그의 忠誠에 감동하여 손수 우대하는 詔書를 써서 하였다.
曹叡가 일찍이 작은 모자를 쓰고 옅은 청색의 무늬 있는 비단으로 만든 반소매의 옷을 입자,注+(착용하다)은 陟略이다. 는 음이 이니, 小兒와 또는 오랑캐들이 머리에 쓰는 것이다. (입다)는 去聲이다. 普沼이니, 靑白色이다. 비단에 무늬가 있는 것을 혹 라 하고 혹 紋繪라 한다. “半袖”는 반소매이다. 楊阜가 묻기를 “이는 에 있어 무슨 法服(예법에 맞는 옷)에 해당됩니까?” 하니 조예가 묵묵히 있었다.
이후로 조예는 예법에 맞는 법복을 입지 않고서는 양부를 만나보지 않았다. 양부가 또다시 상소하여 宮人을 줄이고자 해서 御府의 아전을 불러 後宮의 인원수를 묻자,注+少府屬官御府令이 있으니 官婢를 주장하는바, 관리가 70명이고 여기에 딸린 관원이 30명이다. 아전이 대답하기를 “禁中의 비밀은 드러내어 노출시킬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양부가 노하여 곤장을 치며 질책하기를 “國家(皇帝)는 九卿과 비밀을 나누지 않고 도리어 작은 관리와 비밀을 나눈단 말인가.” 하니, 조예가 더욱 양부를 두려워하고 공경하였다.注+國家天子한 것이다.
散騎常侍 蔣濟가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옛날에 越王 句踐은 백성의 生育을 권장하여 전쟁에 쓰기를 기다렸고,注+國語≫ 〈越語〉에 “越王 句踐會稽山에서 나라에 패하여 곤궁함을 겪다가 본국으로 돌아가자, 하여 장성한 자는 늙은 부인에게 장가들지 못하고 늙은 자는 젊은 아내에게 장가들지 못하게 하였으며, 女子가 17세가 되었는데도 시집가지 않고 丈夫가 20세가 되었는데도 장가가지 않으면 그 父母에게 을 내렸으며, 장차 아이의 젖을 뗄 자는 나라에 申告하여 의원으로 하여금 지켜 다시 출산하게 하되, 丈夫(男子)를 낳으면 술 두 병에 개 한 마리를 주었고 女子를 낳으면 술 두 병에 돼지 한 마리를 주었으며, 자녀 세 명을 낳으면 나라에서 유모를 주고 두 명을 낳으면 나라에서 곡식을 주게 하였다.” 하였다. 나라의 昭王은 병든 자를 구휼하여 원수를 설욕하였습니다.注+ 昭王나라가 나라에게 격파된 뒤에 〈즉위하여〉 죽은 이를 위로하고 병든 자를 위문하여 나라에 복수전을 전개해서 先王의 수치를 설욕하고자 하였다.
지금 두 彊盛하니 폐하께서 當代에 제거하지 못하면 百代의 책임이 됩니다.注+〈“二敵彊盛……百世之責”은〉 임금의 當代蜀漢을 멸망시키지 못하면 후세의 책임이 반드시 임금에게 돌아올 것임을 말한 것이다. 폐하의 神武함으로써 급하지 아니하여 느슨히 해도 되는 것을 버려두고 을 토벌함에 마음을 專一히 하시면, 은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注+(버리다)는 로 읽는다.
中書侍郞 王基가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注+이것을 살펴보면, 나라가 이미 通事郞을 고쳐 中書侍郞이라 한 것이다. “옛사람이 물로써 백성을 비유하여 말하기를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고 또한 배를 뒤엎기도 한다.’注+ 하였다. 하였고,
顔淵이 말하기를 ‘東野子가 말을 몰 적에 말의 힘이 다하였는데도 쉬지 않고 더 달려가려고 하였으니, 아마도 장차 실패할 것이다.’注+孔子家語≫ 〈顔回篇〉에 다음과 같이 보인다.
나라 定公顔回(顔淵)에게 묻기를 ‘그대 또한 東野畢이 말을 잘 몬다는 이야기를 들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잘 몰기는 하나, 장차 그 말이 반드시 도망갈 것입니다.’ 하였다. 〈말이 도망가고 난 뒤에〉 ‘말이 도망갈 줄을 어찌 알았는가?’ 하자, 안회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政事로써 압니다. 옛날 임금은 백성을 부리기를 잘하였고 造父(조보)는 말을 잘 부려서, 순임금은 그 백성의 힘을 다하게 하지 않았고 조보는 그 말의 힘을 다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순임금에게는 노는 백성이 없었고 조보에게는 도망간 말이 없었습니다. 지금 동야필이 말을 모는 것은, 말에 올라타고 고삐를 잡음에 말 모는 법도가 반듯하고, 걷고 달려감에 훈련이 잘되어 있고, 험한 곳을 지나가고 먼 곳을 달려감에 말의 힘이 다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쉬지 않고 달려가기를 바라니, 은 이 때문에 실패할 줄을 안 것입니다.’ 공이 말하였다. ‘그대의 말이 의의가 크니, 원컨대 조금 더 깊이 있게 말해줄 수 있는가?’ 하니, 안회가 대답하기를 ‘이 들으니 「새가 곤궁하면 부리로 사람을 쪼고, 짐승이 곤궁하면 발톱으로 할퀴고, 사람이 곤궁하면 속이고, 말이 곤궁하면 도망한다.」 하였으니, 예로부터 지금까지 아랫사람의 힘을 다하게 하고서 능히 위태로움이 없었던 자는 있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하였습니다.
지금 백성들이 부역에 동원되어 고생스러워서 남녀가 헤어져 소원하니, 원컨대 폐하께서는 동야자의 폐해를 깊이 살피고 배와 물의 비유에 유념하소서.
文帝 때에는 오직 同姓 諸侯만 있었는데도 賈誼가 이를 근심하여 말하기를 ‘섶나무를 쌓아놓은 아래에 불을 지펴놓고 그 위에서 잠을 자는 격이다.’ 하였습니다.
이 변방에 있어서 꼬리가 커 흔들지 못하니, 계책을 잘하여 後人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물려주다)는 于季이다. 만일 가의가 다시 나온다면 반드시 그때보다 더 깊고 간절하게 걱정할 것입니다.”注+〈“使賈誼復起 必深切於曩時”는〉 다만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고 길게 탄식할 뿐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나라의 殿中監이 궁전을 짓는 부역을 감독할 적에 멋대로 蘭臺令史를 체포하니,注+ 뒤에 이른바 校事를 보면 알 수 있다. ≪晉書≫ 〈輿服志〉에 의하면 “大駕鹵簿(호종하는 儀仗隊)에 왼쪽에는 殿中御史가 있고 오른쪽에는 殿中監이 있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나라 때 殿中監에는 이미 정해진 관원이 있었던 것이다. 蘭臺令史御史臺에 속하였으니, ≪會要≫에 이르기를 “나라에서는 御史臺를 일러 蘭臺라 했다.” 하였다. 僕射 衛臻이 이 일을 조사할 것을 奏請하였다. 曹叡詔令을 내리기를 “궁전이 아직 이루어지지 못하여 내가 유념하고 있는데, 이 그를 推考하는 것은 어째서인가?”注+는 추고하여 국문함이다. 하니,
위진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옛날 제도에 남의 직책을 침해하는 죄를 무겁게 다스린 것은 일을 부지런히 하는 것을 싫어해서가 아니요, 진실로 유익한 것이 적고 훼손되는 것이 크기 때문입니다.注+옛날 백관은 서로 직책을 뛰어넘어 越權하지 않았다. ≪春秋左氏傳≫ 〈成公 16년 조〉에 欒鍼(난함)이 말하기를 “侵官은 남의 관직(직책)을 침범하는 것이다.” 하였다. (훼손하다)는 로 읽는다.
이 매번 를 살펴봄에 대체로 모두 이와 같았으니,注+ 武帝建國할 적에 校事를 두어 아랫사람들을 살피게 하였다. 만약 또다시 그를 풀어주면 여러 官司에서 마침내 장차 직책을 뛰어넘어서 국가를 침체하게 할까 두렵습니다.”
尙書 孫禮가 굳이 부역을 중지할 것을 청하자, 曹叡詔令을 내리기를 “내 바른말을 공경히 받아들인다.” 하고 부역하는 백성들을 속히 되돌려 보내게 하였다.
監者가 다시 한 달만 더 머물게 할 것을 주청하자, 손례가 곧바로 일하는 곳에 가서 詔令이라고 하여 부역을 중지시키니, 조예는 비록 直言을 다 따르지는 못했으나 모두 우대하여 포용하였다.
】 가을 7월에 나라 崇華殿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魏主 曹叡가 궁전에 화재가 발생한 일로 太史令 高堂隆에게 묻기를 “이것은 무슨 나쁜 조짐인가?”注+太史令太常에 속하였다. 高堂複姓이다. 하자, 대답하기를 “≪易傳≫에 이르기를 ‘윗사람이 검소하지 않고 아랫사람이 절제하지 않으면 나쁜 불이 그 집을 태운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군주가 그 를 높게 지으면 하늘의 불이 재앙이 된다.’注+〈“易傳曰”은〉 의 ≪易傳≫의 글이다. 은 요망한 재앙이다. 하였습니다. 人君宮室을 꾸미는 데 힘써 백성들의 재물과 힘이 고갈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늘이 가뭄으로써 하여 불이 높은 궁전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였다.
曹叡가 또다시 詔令을 내려 高堂隆에게 “나라의 柏梁臺에 화재가 났을 때 크게 궁전을 일으켜 눌렀으니, 그 意義가 어떠한가?”注+(누르다)은 益涉이다. 하고 묻자,
고당륭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이는 나라 무당이 한 말이니, 聖賢의 가르침이 아닙니다.注+나라 武帝 太初 원년(B.C.104)에 柏梁臺에 화재가 발생하였는데, 나라 사람 勇之가 말하기를 “나라 풍속에 화재가 나면 다시 집을 일으키되 반드시 더 크게 해서 눌러 이겨 복종시킨다.” 하니, 이에 建章宮을 지었다. 이제 마땅히 부역에 동원된 백성들을 해산하여 보내고 화재가 난 곳을 깨끗이 청소하고서 감히 이곳에 다시 궁전을 세우거나 짓는 일이 있지 않으면 萐莆(첩포)와 嘉禾(아름다운 벼)가 반드시 그 자리에서 자랄 것입니다.”注+山輒色洽의 두 가지 이고 는 음이 이다. “萐莆”는 상서로운 풀이다. 임금 때 푸줏간에서 자랐는데, 〈그 잎이 흔들리며 바람을 일으켜서〉 더위를 물리쳐 시원하게 하였다.
】 8월에 나라에서 아들 曹芳을 세워 齊王으로 삼고 曹詢秦王으로 삼았다.
魏主 曹叡에게 아들이 없어서 두 왕(曹芳曹詢)을 양자로 삼았는데, 宮省의 일이 비밀스러워서 아무도 그들의 내력을 알지 못하였다. 혹자는 이르기를 “曹芳任城王 曹楷의 아들이다.”注+曹楷文帝의 아우 任城王 曹彰의 아들이다. 하였다.
나라에서 다시 崇華殿을 세웠다.
魏主 曹叡가 다시 崇華殿을 세우고서 이름을 九龍殿이라고 바꾸었다.注+이때 郡國에 아홉 마리의 이 나타났으므로 인하여 宮殿의 이름을 九龍殿이라 한 것이다. 穀水를 끌어다가 숭화전 앞을 지나게 하였는데, 으로 우물을 만들고 우물의 난간을 비단 무늬로 조각하고서, 두꺼비가 곡수의 물을 받아들이고 神龍이 토해내게 하였다.注+水經注≫에 “穀渠는 동쪽으로 옛 金市의 남쪽을 지나 千秋門과 만나면 支流가 돌로 된 동굴로 들어가 땅속으로 흘러 靈芝 九龍池注入한다.” 하였다. “綺欄(기란)”은 조각하여 비단 무늬를 만듦을 이른다. 署魚이니, “蟾蜍”는 蝦蟇(두꺼비)이다. “含受”는 그 물을 받는 것이다.”
博士 馬鈞으로 하여금 司南車水轉百戱(물로 돌리는 놀이판)를 만들게 하니, 여기에 노역한 자가 3, 4만 명이었다.注+司南車는 바로 指南車이다. 黃帝蚩尤涿鹿에서 싸울 적에 치우가 큰 안개를 일으키자, 장병들이 갈 곳을 알지 못하였는데, 黃帝가 마침내 지남거를 만들었다. 나라 成王越裳氏가 거듭 통역하여 와서 공물을 바쳤는데, 使者가 돌아갈 적에 길을 잃자 周公騈車를 하사하여 남쪽을 가리키게 하였다. ≪晉書≫ 〈輿服志〉에 “나무를 조각하여 신선 사람을 만들어서 깃털로 만든 옷을 입히고 수레 위에 세웠는데, 수레바퀴가 돌아가더라도 손은 항상 남쪽을 가리켰는바, 大駕가 출행하게 되면 先導의 수레가 되어 사방의 방향을 바로잡았다.” 하였다. “水轉百戱”는 큰 나무를 깎아 만들어서 그 형체를 바퀴와 같게 하였는데, 平地에 세워놓고서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은밀히 물로 돌렸는바, 여자 樂工을 만들어 이라는 樂章에 맞춰 춤추게 하였고, 심지어는 나무로 만든 사람[木人]이 북을 치고 퉁소를 불게 하였으며, 山嶽을 만들어서 나무로 만든 사람으로 하여금 줄을 뛰어넘고 을 던지고 줄을 타고 거꾸로 서서 출입을 자유자재로 하게 하였으며, 百官行署(府署)에서는 맷돌로 방아를 찧고 닭싸움을 하는 등 변화가 多端하여 기기묘묘한 것이 백 가지이다.
陵霄闕을 처음 지을 적에 까치가 그 위에 둥지를 틀었다. 魏主가 이 일을 高堂隆에게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詩經≫ 〈召南 鵲巢〉에 이르기를 ‘까치가 둥지를 지음에 비둘기가 거기에서 산다.’ 하였습니다.
이제 막 궁궐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까치가 그 위에 둥지를 틀었으니, 하늘의 뜻은 대략 ‘宮室이 이루어지기 전에 황제의 몸이 그곳에 거처하지 못하여 장차 다른 성씨가 소유한다.’는 것입니다.
天道는 특별히 친애하는 사람이 없어서 오직 善人을 친애하니, 이제 마땅히 온갖 부역을 중지하고 스러운 정사를 더 높이면 轉禍爲福이 될 것입니다.”
曹叡는 성품이 엄하고 급해서 宮室을 수리하는 것을 감독할 적에 기한을 지체하는 자가 있으면 직접 불러 심문하였는데, 말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몸과 머리가 이미 잘리어 나눠졌다.注+期限을 세워서 완성하기를 期必하였는데 시기가 되어도 완성하지 못한 것을 “稽限”이라 한다.
散騎常侍 王肅이 다음과 같이 하였다. “폐하께서 그때그때 형벌한 자들은 모두 가 있는 관리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실정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 창졸간에 형벌했다고 말하니,
원컨대 죄가 있는 자들을 법을 다스리는 관리에게 회부하여 그 죄를 드러내어 誅殺해서, 그들로 하여금 궁정을 더럽혀 遠近에서 의심받는 일이 없게 하소서.
또 사람의 목숨은 지극히 소중하니, 살리기는 어렵고 죽이기는 쉽기 때문에 聖賢이 사람의 목숨을 중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옛날 文帝辟除한 자를 죽이려고 하자,
정위는 天子의 관리인데도 공평함을 잃어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천자의 몸이 도리어 미혹되어 잘못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자기 몸을 위하는 데에 중하게 하고 군주를 위하는 데에 가볍게 한 것이니, 불충함이 심한 것입니다. 살피지 않으면 안 됩니다.”注+(위하다)는 去聲이다.
】 겨울 10월에 나라 中山王 曹袞하였다.
曹袞은 병이 위독해지자, 官屬들에게 명하기를 “남자는 부인의 손에서 죽지 않으니,注+〈“男子 不死於婦人之手”는〉 ≪禮記≫ 〈喪大記〉의 글이다. 빨리 제때에 東堂을 이루라.” 하였다. 동당이 이루어지자, 조곤은 병든 몸을 수레에 태워 동당에 가서 거주하였다.
世子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하였다. “네가 어려서 人君이 되어 즐거움만 알고 고생을 알지 못하니, 반드시 장차 교만과 사치로 실수할 것이다. 형제간에 선량하지 못한 행실이 있으면 마땅히 무릎 가까이 다가가서 할 것이요,注+造䣛”는 무릎 앞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하여 따르지 않으면 눈물을 흘리며 타이를 것이요, 타일러도 고치지 않으면 마침내 그 어미에게 아뢰고, 그래도 고치지 않으면 마땅히 황제에게 아뢰고 아울러 나라의 토지(封地)를 사양하여야 하니,
은총을 지키다가 에 걸리기보다는 貧賤하면서 몸을 온전히 하는 것이 낫다. 그러나 이는 또한 큰 罪惡을 말했을 뿐이니, 작은 과실과 하찮은 연고는 마땅히 덮어주어야 한다.” 그는 마침내 하였다.
나라가 鮮卑軻比能을 죽였다.
】 이보다 앞서 軻比能이 변방을 보호하는 鮮卑步度根을 유인하여 함께 배반해서 나라 將軍 蘇尙董弼 두 사람을 죽이고, 마침내 幕北(고비사막 북쪽)으로 달아나서 다시 보도근마저 죽였다.注+步度根檀石槐의 손자이다.
이때에 이르러 幽州刺史 王雄이 사람을 시켜 그를 찔러 죽이니, 선비의 부락이 흩어져서 邊境이 마침내 편안하였다.
나라 張掖郡에 그림이 그려진 돌이 솟아 나왔다.
張掖郡柳谷 입구에 물이 넘쳐서 그림이 그려진 寶石이 솟아 나왔다. 신령스러운 거북 모양으로 냇물 서쪽에 서 있었는데,
石馬 7필과 鳯凰麒麟, 白虎犧牛, 璜玦八卦, 列宿(28수)와 孛彗(별)의 이 있고, 또 ‘大討曹(曹氏를 크게 토벌함)’注+
魏氏春秋≫에 말하였다. “이해에 張掖郡 刪丹縣 金山玄川이 넘쳐서 그림이 그려진 보석이 솟아 나오니, 모양이 신령스러운 거북과 같았는바 너비가 1 6, 길이가 1 7 1, 둘레가 5 8인데, 현천 서쪽에 서 있었다. 石馬 7필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신선이 탔고 하나는 고삐로 매여 있고 나머지 다섯 필은 형체는 있으나 선명하지 못하였다. 앞에 뚜껑을 덮은 玉匣이 있는데, 위에 으로 쓴 글자가 있고 玉玦 2개와 璜玉 하나가 있었다. 麒麟은 동쪽에 있고 봉황새는 남쪽에 있고 白虎는 서쪽에 있고 犧牛(제물로 삼는 純色의 소)는 북쪽에 있으며, 말은 중앙에서 四面으로 분포되어 되어 있는데 모두 蒼白色이었다. 그 남쪽에는 ‘上上三天王’이라는 다섯 글자가 있었다.
또 ‘述大金 大討曹 金但取之 金立中 大金馬一匹在中 大吉開壽 此馬甲寅述水’라는 글이 쓰여 있는데 모두 ‘’자가 여섯 개이고 ‘’자가 열 개이며, 또 八卦列宿孛彗와 같은 도 있었다.”
漢晉春秋≫에 말하였다. “氐池縣 大柳谷 어귀에 밤에 파도가 쳐서 물이 넘치니, 그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새벽에 보니 푸른 돌이 물 가운데 서 있었는데, 길이가 1 6이고 높이가 8이었다. 흰 돌에 13필의 말과 한 필의 소와 한 마리의 새와 八卦玉玦이 그려져 있었는데, 모두 높이 솟아 나와 있었다. ‘大討曹 適水中甲寅’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明帝(曹叡)는 ‘大討曹’라고 한 것을 싫어하여 ‘’자를 다시 파서 ‘’자로 만들고 푸른 돌로 메웠으나, 하룻밤을 자고 나니 흰 돌이 가득히 채워져 원래와 같았다. 나라 초기까지도 그 글이 더욱 선명하고 말의 형상이 모두 분명하게 보여 옥과 같았다.”

璜玦은 음이 黃決이니, 璧玉의 절반으로 아래에 차는 장식이고, 또한 佩玉이니 고리와 같이 생겼는데 이지러진 부분이 있다.
라고 쓰여 있었다.
이에 天下詔書를 반포하여 아름다운 祥瑞라고 하였다. 任縣令 于綽이 이 일을 鉅鹿 사람 張臶에게 묻자,注+任縣前漢 때에는 廣平國에 속하였고 後漢 때에는 鉅鹿郡에 속하였는데, 나라 때에는 다시 廣平郡에 속하였다. 在甸祖悶의 두 가지 이니, 張臶內學(圖讖書)과 外學(經學)을 겸하여 통달하였으므로 그에게 물은 것이다.
장천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으로는 미래를 알고 이미 지나간 것을 뒤쫓지는 않으니, 상서와 조짐이 먼저 나타난 뒤에 나라의 興廢가 뒤따르는 법이다.
이제 나라가 오래전에 멸망하고 나라가 이미 천하를 얻었으니, 어찌 추후에 상서로운 조짐이 일어나겠는가. 이 돌은 當今의 이변이고, 장래의 符瑞(상서로운 조짐)이다.”注+〈“將來之符瑞”는〉 후세 사람들은 이것을 나라가 나라를 이을 징조라 하였고, 또
나라가 말을 가지고 나라의 진귀한 물건과 교역하였다.
魏主 曹叡가 사람을 보내 말을 가지고 나라에서 珠璣翡翠(비취), 玳瑁(대모)를 교역하려 하니,注+구슬이 둥글지 않은 것을 라 한다. 吳主 孫權이 말하기를 “이는 모두 내가 쓰지 않는 것들인데 말을 얻을 수 있으니, 내 어찌 아끼겠는가.” 하고는 주었다.


역주
역주1 魏太后郭氏卒 : “‘以憂卒(근심하여 卒하였다.)’이라고 쓰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죄가 魏主에게 있지 않기 때문이다.[不書以憂卒 何 罪不在魏主也]” ≪書法≫
역주2 甄后의……卒하였다 : 甄后는 曹叡의 生母이다. 章武 원년(221) 魏主 曹丕는 즉위하자, 부인 견씨를 멀리하고 郭貴嬪을 총애하였다. 견씨가 鄴城에 남아 있으면서 실의에 빠져 원망하는 말을 하자, 곽귀빈이 모함하여 그녀를 죽게 하였다. 다음 해 조비는 마침내 곽귀빈을 后로 삼으니, 이가 바로 郭太后이다. 견씨는 曹叡가 즉위한 뒤에 太后로 추존되었는데, 곽태후는 자신이 그녀를 죽게 하였으므로 근심하여 죽은 것이다.
역주3 (縣)[郡] : 저본에는 ‘縣’으로 되어 있으나, 본문의 원문에 따라 ‘郡’으로 바로잡았다.
역주4 魏作洛陽宮 : “魏主 曹叡가 즉위한 지 9년에 ‘크게 宮室을 경영하고 聽訟觀을 세우고 許昌宮을 다스렸다.’라고 썼으니, 백성을 부역에 동원한 것이 많은 것이다. 지난해에 ‘崇華殿에 화재가 발생했다.’라고 썼으니 하늘의 뜻을 또한 알 수 있는데, 이때 또다시 洛陽宮을 지었으니, 그가 하늘의 경계를 거스른 것 또한 심하다. 뒤이어 崇華殿에 화재가 발생한 것을 쓴 것이 당연하다.[魏主叡卽位九年 書大營宮室 立聽訟觀 治許昌宮 用民多矣 去年書崇華殿災 天意亦可知也 於是又作洛陽宮焉 其逆天戒亦甚矣 繼有崇華殿災之書 宜哉]” ≪書法≫
역주5 옛날……하였는데 : 唐은 堯임금의 나라이고 虞는 舜임금의 나라인바, 禹임금은 순임금의 禪讓을 받아 즉위하였다. ≪論語≫ 〈泰伯〉에 “우임금은 내 흠잡을 데가 없도다. 음식은 박하게 하면서도 조상의 귀신에게는 효성을 지극히 하였으며, 의복은 나쁘게 하면서도 祭服인 슬갑과 면류관에는 아름다움을 지극히 하였으며, 궁실은 낮게 하면서도 도랑을 준설하는 治水에는 힘을 다하였으니, 우임금은 내 흠잡을 데가 없다.[禹 吾無閒然矣 菲飮食而致孝乎鬼神 惡衣服而致美乎黻冕 卑宮室而盡力乎溝洫 禹 吾無閒然矣]”라고 한 孔子의 말씀이 보인다.
역주6 典略 : 三國時代 魏나라의 郞中을 지낸 魚豢(어환)이 지은 책이다. 여러 史書의 典故를 抄錄하였으나, 이미 失傳된 중국 古代의 夜事이다. 내용은 周‧秦 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인데 記事가 자못 광범위하나 체재가 잡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역주7 蕭何가……것 : 漢 高祖 7년(B.C.200) 蕭何가 關中에 있으면서 未央宮을 화려하게 다스리자, 高祖는 이 궁궐이 매우 웅장하고 화려한 것을 보고 소하에게 이르기를 “천하가 흉흉하여 몇 년 동안 勞苦해서 成敗를 아직 알 수 없는데, 어찌하여 이처럼 궁실을 度에 지나치게 다스렸는가?” 하고 질책하자, 소하가 대답하기를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으므로 이 기회를 인하여 궁실을 이룰 수 있습니다. 또 君子는 四海를 집안으로 여기니,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위엄을 보일 수가 없으며, 또 후세로 하여금 이보다 더함이 있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니, 고조가 기뻐하였다. 이 내용은 思政殿訓義 ≪資治通鑑綱目≫ 제3권 상 漢 高祖 7년 조에 보인다. 미앙궁은 長安縣 서북쪽 10리 지점인 옛 성터에 있었던 正殿으로 ‘未央’은 ≪詩經≫ 〈小雅 庭燎〉의 “밤이 얼마나 되었는가. 밤이 아직 다하지 않았다.[夜如何其 夜未央]”에서 유래한 것으로, 勤政의 뜻을 취한 것이다.
역주8 漢나라……하였습니다 : 漢 明帝 永平 3년(60)에 가물었는데도 명제가 궁궐을 크게 일으키자 鍾離意가 上疏하여 그치게 하였는바, 綱에 “北宮을 크게 일으켰으나 얼마 후 중지하였다.[大起北宮 旣而罷之]”라고 보이며 ≪書法≫에 “‘위에서는 크게 일으켰다.’라고 쓰고 아래에는 ‘얼마 후 중지하였다.’라고 썼으니, 명제가 諫言을 잘 따른 용맹함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乙丑年(66) 다시 궁궐을 지어 이루어졌으나 쓰지 않았다.” 하였다. 위에 보이는 명제의 말은 이때에 한 것이다.
역주9 內官 : 宮中에 있는 女官의 등속으로, 后妃는 天子에, 3명의 夫人은 三相에, 9명의 嬪은 九卿에 비유하였다.
역주10 螽斯(종사)의 징험 : 螽斯는 메뚜기로, 메뚜기는 多産을 한다 하여 아들을 많이 낳을 징험을 이른다. ≪詩經≫ 〈周南 螽斯〉에 “메뚜기의 깃이 和하여 모였으니, 너의 자손이 번성함이 당연하도다.[螽斯羽 詵詵兮 宜爾子孫 振振兮]”라고 보이는데, 朱子는 ≪集傳≫에서 “메뚜기는 한 번에 99개의 새끼를 낳는다. ‘너[爾]’는 메뚜기를 가리킨 것이다. 이때 后妃가 질투하지 않아서 자손이 많았다. 그러므로 여러 妾들이 메뚜기가 여럿이 모여 사이좋게 지내며 새끼가 많은 것을 들어서, 后妃가 이러한 德이 있으니 마땅히 이러한 福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라고 풀이하였다.
역주11 筵마다……이른다 : 筵은 건축물 양끝의 거리를 재는 단위로 1筵은 9尺이다. 9筵이므로 9☓9=81이어서 8丈 1尺이 되고, 남북으로는 7筵이므로 7☓9=63이어서 6丈 3尺이 되는 것이다.
역주12 孔子가……것이다 : 이 내용은 ≪荀子≫ 〈哀公篇〉에 보인다.
역주13 公이 묻기를 : ≪孔子家語≫에는 본래 이 위에 “3일 뒤에 말을 먹이는 사람이 와서 하소연하기를 ‘東野畢의 말이 도망갔습니다.’ 하였다. 公이 顔回를 불러 묻기를 ‘그대가 그 말이 장차 도망갈 것이다.’라고 말하였는데, 어떻게 도망갈 줄을 알았는가?’ 하였다.”라고 되어 있어 더욱 분명하다.
역주14 漢 文帝……것입니다. : 賈誼는 文帝 때의 名臣으로, 이때 漢나라는 無事太平하였으나, 북쪽에는 匈奴가 강성하여 자주 변경을 침입하였고, 제후왕들이 封地가 넓은 것을 믿고 跋扈하였다. 문제 6년(B.C.174) 梁王의 太傅로 있던 가의는 다음과 같은 上疏文을 올렸다.
“臣이 지금의 事勢를 생각건대, 통곡할 만한 것이 한 가지이고 눈물을 흘릴 만한 것이 두 가지이고 장탄식을 할 만한 것이 여섯 가지이니, 기타 도리에 위배되는 것은 일일이 들기가 어렵습니다. 말을 올리는 자들은 모두 ‘천하가 이미 편안하고 다스려졌다.’라고 말하나, 臣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불을 안아다가 쌓아놓은 섶나무의 아래에 지펴두고 그 위에서 잠을 자면서 불이 미처 타오르지 않으면 인하여 편안하다고 말하니, 지금의 형세가 어찌 이와 다르겠습니까.”
長篇의 이 상소문은 名文으로 알려져 있어 상소문의 典範이 되었다.
역주15 다섯……것 : 太子와 太子의 同母弟, 신분이 귀하고 총애받는 公子와 公孫, 여러 代에 걸쳐 正卿이 된 자를 이른다. ≪春秋左氏傳≫ 昭公 11년 조에 “다섯 가지 큰 것이 변경에 있어서는 안 된다.[五大不在邊]”라고 보이는바, 장수들이 병력을 보유하고 변경에 있을 경우, 이들을 단속하면 적을 맞아 싸울 수가 없고 이들을 오랫동안 풀어놓으면 뒤에 반드시 반란을 일으켜 후손에게 물려줄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꼬리가 커서 흔들지 못한다.’는 것은, 머리는 황제가 있는 도성을, 꼬리는 제후나 변경에 있는 장수들을 비유하여, 중앙정부에서 제후나 장수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역주16 여기의……아니다 : 殿中監은 三國時代 魏나라에 설치된 7品 관직으로 황제의 服食, 車馬, 器用과 관련된 일을 담당한 관리이다. 그러나 北齊에 와서는 門下省 아래에 殿中監을 두었으며, 唐나라 때는 殿中省을 두었으며, 그 장관이 殿中監이었다. 여기에서는 魏나라 때는 殿中監이고, 唐나라 때는 殿中監(殿中省)의 관원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역주17 校事 : 三國時代 魏나라와 吳나라에서 설치했던 官名으로, 황제와 執政大臣을 위해 관리와 백성들의 정보를 수집하는 임무를 맡았다.
역주18 魏崇華殿災 : “하나의 崇華殿에 두 해에 두 번 화재가 났으니, 하늘의 경계가 두려울 만하다. ≪資治通鑑綱目≫에서 이것을 모두 쓴 것은 土木工事를 경계한 것이다.[一崇華也 兩年兩災 天戒凜凜矣 綱目悉書之 所以戒土木也]” ≪書法≫
역주19 京房 : 前漢 말기 사람으로 字는 君明이며 본래 李氏였으나 스스로 姓을 바꾸었다. 焦延壽에게 ≪周易≫을 배웠는데 災變의 이치에 밝아 災異를 말하다가 權臣인 石顯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著書로는 ≪京氏易傳≫이 있다.
역주20 魏復立崇華殿 : “앞에서 ‘崇華殿에 화재가 발생했다.’고 2번 썼었는데 이때 또다시 세웠으니, 하늘의 경계를 거스르는 것이 무엇이 이보다 심하겠는가. 그러므로 ‘復(다시)’라고 쓴 것이다. 唐나라 玄宗이 集僊殿을 고쳐 集賢殿이라고 하자 집현전이라고 썼는데(唐나라 開元 13년(725)), 이때 九龍殿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는데도 어찌하여 구룡전이라고 쓰지 않았는가. 九龍이라고 쓰지 않고 崇華라고 쓴 것은 하늘의 경계를 거스른 것을 드러낸 것이다. 이 때문에 秦나라에서 백성들의 원망을 돌아보지 않고 阿房宮을 짓자 ‘復’라고 썼고(秦 二世皇帝 원년(B.C.210)), 魏나라에서 하늘의 경계를 두려워하지 않고 崇華殿을 세우자 ‘復’라고 썼으니(이해),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宮殿을 지을 적에 ‘復’라고 쓴 것이 2번뿐이다.[前再書崇華殿災矣 於是再立 逆天戒 孰甚焉 故書復 玄宗更集僊爲集賢 則書集賢(唐開元十三年) 於是更名九龍殿 則曷爲不書 不書九龍 書崇華 所以著其逆天戒也 是故秦不恤人怨而作阿房則書復(秦二世元年) 魏不畏天戒而立崇華則書復(是年) 終綱目作宮殿書復者 二而已]” ≪書法≫
역주21 漢 文帝가……하였는데 : 辟除는 帝王이 출행할 때에 行人들을 물리치는 것을 이른다. 文帝 즉위 3년(B.C.177), 황제가 행차하여 中渭橋를 지나갈 적에 어떤 사람이 다리 밑에서 갑자기 도망하여 乘輿의 말이 놀랐다. 그를 체포해서 당시 刑獄을 맡고 있던 廷尉 張釋之에게 죄를 다스리게 하자, 장석지는 벌금형에 해당한다고 아뢰었다. 황제가 이에 노하자, 장석지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법이란 天子가 천하 사람들과 함께 公共하게 쓰는 것입니다. 지금 법조문이 이와 같은데, 더 무겁게 처벌한다면 이는 백성들로 하여금 법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당시에 聖上께서 使者를 시켜 그를 주살하셨다면 모르지만 지금 이미 廷尉에게 회부하여 죄를 다스리게 하셨으니, 정위는 비유하면 천하의 공평한 저울대입니다. 저울대가 한 번 기울면 천하에서 법을 적용하는 것이 모두 이로 인해 輕重을 잃게 됩니다.” 이에 문제는 한동안 있다가 “정위의 말이 옳다.” 하고 장석지의 말대로 처벌하게 하였다.
역주22 魏張掖湧石負圖 : “‘隕石’을 쓴 경우가 있고 ‘돌이 섰다.’라고 쓴 경우가 있으나, ‘돌이 솟아 나왔다.’라고 쓴 적은 있지 않았다. 솟아 나온 돌에 그림이 그려 있고 ‘大討曹’라고 쓰여 있었으니, 하늘이 曹氏를 버린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天下에 詔書를 반포하여 아름다운 祥瑞라 하였으니, 이 또한 어리석은 짓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隕石’을 쓴 것이 12번이고 ‘돌이 섰다.’라고 쓴 것이 2번인데, ‘돌이 솟아 나왔다.’라고 쓴 것은 1번뿐이다.[有書隕石者矣 有書立石者矣 未有書湧石者 湧石負圖而文曰大討曹 天之棄曹氏也決矣 而詔頒天下 以爲嘉瑞 亦愚矣哉 終綱目 書隕石十二 石立二 書湧石一而已]” ≪書法≫
역주23 ≪魏氏春秋≫에……같았다. : 위의 내용은 ≪三國志≫ 〈魏書 明帝紀〉 註에 보이고 ≪宋書≫ 〈天文志 符瑞〉에도 보이는데, 내용이 서로 다르다. 돌에 쓰여 있는 내용은 ‘大討曹’ 이외에는 뜻이 자세하지 않은바, ≪宋書≫의 註에는 “大는 盛함이 지극한 것이고 金은 晉나라의 行(五行의 하나)이며 中은 물건의 쓰임이고 吉은 福의 시초이다. 이는 司馬氏가 앞으로 천하에 왕(황제) 노릇 하려고 德에 감응하여 나와서 正吉에 응하여 왕 노릇 할 符瑞임을 말한 것이다.[夫大者盛之極也 金者晉之行也 中者物之會也 吉者福之始也 此言司馬氏之王天下 感德而生 應正吉而王之符也]”라고 한 太尉屬 程猗의 해설이 실려 있다. 여기서는 ≪三國志≫의 註에 의거하여 誤字를 바로잡았음을 밝혀둔다.
역주24 소가……하였다 : 元帝는 司馬睿이다. 魏나라는 司馬懿와 司馬昭, 司馬炎이 3대에 걸쳐 국정을 전횡하다가 사마염이 魏나라를 찬탈하고 晉나라를 세우니, 이를 西晉이라 하였다. 사마염은 황제가 된 다음 사마의를 宣帝로 추존하였는바 사마예는 사마의의 손자인 琅邪恭王 司馬覲의 아들이다. 西晉이 五胡의 침략으로 망하자, 사마예는 지금의 南京에 나라를 세우니, 이를 東晉이라 하였다. 그러나 전설에 사마근의 妃인 夏侯氏가 낮은 관리인 牛禁과 사통하여 사마예를 낳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司馬氏는 말이고 牛氏는 소라 하여 소가 말을 잇는다고 한 것이다.
역주25 魏以馬易珍物於吳 : “앞에서 ‘진귀한 물건을 요구했다.’라고 쓴 것은 물건을 玩好함을 비난한 것이고, 쓸모 있는 것을 가지고 쓸모없는 것과 교역함에 이르러는 ‘말을 가지고 교역했다.’라고 썼으니, 심히 비난한 것이다.[前書徵珍物 譏玩物也 至以有用易無用 書曰以馬易 甚譏之]” ≪書法≫

자치통감강목(11) 책은 2020.12.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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