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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8)

자치통감강목(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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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巳年(69)
十二年이라 哀牢内附하다
哀牢王柳貌 率其民五萬餘戶하여 内附어늘 以其地 置哀牢, 博南二縣注+哀牢, 南夷九隆種也. 居牢山, 絶域荒外, 山川阻深, 未嘗通中國. 其人身皆刻畫象龍文, 衣皆著尾, 西南去雒陽七千里.하다
夏四月 修汴渠隄注+隄, 或作堤.하다
平帝時 河, 汴 決壊하여 久而不修注+汴, 音卞, 水出陳留浚儀陰溝, 至蒙爲雝水, 東入于泗.
建武十年 光武 欲修之러니 浚儀令樂俊 上言注+浚儀, 縣名.호되 新被兵革하니 未宜興役이라한대 乃止하다
其後 汴渠東侵하여 日月彌廣하여 兗, 豫百姓 怨歎이러니 有薦樂浪王景 能治水者
夏四月 詔發卒數十萬하여 遣景하여 與將作謁者王吳 修汴渠堤하니 自滎陽으로 東至千乗海口千餘里注+謁者, 屬光祿勳. 吳以謁者而將作, 故謂之將作謁者. 汴渠, 卽莨蕩渠也, 亦號金堤.
十里 立一水門하여 令更相洄注하여 無復潰漏之患注+洄, 戶恢切, 逆流而上也. 注, 謂灌浸也.하니 雖簡省役費 然猶以百億計焉이러라
秋七月 司空恭하니 以牟融爲司空하다


기사년己巳年(69)
나라 현종 효명황제顯宗 孝明皇帝 영평永平 12년이다. 봄에 애뢰哀牢내부内附하였다.
애뢰왕 유모哀牢王 柳貌(유모)가 자신의 백성 5만여 를 거느리고 와서 내부内附하자, 이 지역에 애뢰哀牢박남博南을 설치하였다.注+애뢰哀牢남이南夷구륭九隆의 종족이다. 뇌산牢山에 거주하였는데 지역이 매우 멀고 산천이 험하고 깊어서 일찍이 중국中國과 통하지 못하였다. 이 지역 사람들은 몸에 모두 의 무늬를 새기고 옷에 모두 꼬리를 달았으니, 서남쪽으로 낙양雒陽과 7천 리 떨어져 있었다.
】 여름 4월에 변수汴水의 제방을 수리하였다.注+는 혹 로도 쓴다.
】 처음 평제平帝 때에 하수河水변수汴水가 터져서 오래도록 수리하지 못하였다.注+은 음이 이니, 물이 진류군 준의현陳留郡 浚儀縣 음구陰溝에서 발원하여 몽현蒙縣에 이르러 옹수雝水(옹수)가 되어 동쪽으로 사수泗水에 들어간다.
건무建武 10년(34)에 광무제光武帝가 수리하고자 하였는데, 준의령 악준浚儀令 樂俊(악준)이 “백성들이 막 병란을 겪었으니, 부역을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라고 상언上言하자注+준의浚儀의 이름이다., 마침내 중지하였다.
그 뒤에 변수汴水가 동쪽으로 침식하여 날로 달로 더욱 넓어져서 연주兗州(연주)와 예주豫州의 백성들이 원망하고 탄식하였는데, 마침 낙랑樂浪 사람 왕경王景치수治水를 잘한다고 천거한 자가 있었다.
여름 4월에 조령詔令을 내려 수십만의 병졸을 동원해서 왕경을 보내 장작알자 왕오將作謁者 王吳와 함께 변수汴水의 제방을 수리하게 하니, 형양滎陽으로부터 동쪽으로 천승千乗의 바다 입구에 이르기까지 천여 리가 되었다.注+알자謁者광록훈光祿勳에 속하였다. 왕오王吳알자謁者로서 장작將作의 벼슬을 하였으므로 장작알자將作謁者라 한 것이다. 변거汴渠는 바로 랑탕거莨蕩渠(낭탕거)이니, 금제金堤라고도 한다.
10리에 수문 하나를 설치해서 물을 번갈아 주입하여 다시는 무너지고 새는 근심이 없게 하니注+호회戶恢이니, 역류하여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는 물을 댐을 이른다., 비록 부역과 비용을 크게 줄였으나 그래도 비용이 백억 으로 헤아려졌다.
】 가을 7월에 사공 복공司空 伏恭이 면직되니, 모융牟融사공司空으로 삼았다.



자치통감강목(8) 책은 2019.09.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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