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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3)

자치통감강목(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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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申年(312)
이라
漢嘉平二年이라
漢主聰 將納太保劉殷女할새 太弟义固諫한대 聰以問太宰延年 太傅景하니
皆曰 太保自云劉康公之後라하여 與陛下殊源하니 納之何害注+劉康公, 周之卿士, 食采於劉, 其後因以爲氏. 聰, 匈奴之後, 以漢之甥, 冒姓劉氏, 故云殊源.니잇고
하여 拜殷二女英, 娥하여 爲左右貴嬪하니 位在昭儀上하고 又納殷女孫四人하여 皆爲貴人하니 位次貴妃하다
於是 六劉之寵 傾後宮이라 希復出外하고 事皆中黃門奏決이러라
胡亢 起兵竟陵하다
故新野王牙門將注+亢, 音剛.이라 聚衆竟陵하여 寇掠荊土러니 以杜曾爲竟陵守하니 勇冠三軍하여 能被甲遊於水中이러라
二月朔 日食하다
◑琅邪王睿 遣將軍紀瞻하여 討石勒於葛陂하니 引兵退하다
石勒 築壘於葛陂하고 課農造舟하여 將攻建業이어늘
睿大集江南之衆於壽春하고 以紀瞻爲揚威將軍하여 討之러니
大雨하여 三月不止하니 勒軍中 飢疫하여 死者太半이라
集將佐議之하니 刁膺 請送款於睿하여 求掃平河朔以自贖하고 俟其軍退하여 徐圖之한대 愀然長嘯러라
孔萇等 請分道하여 夜攻壽春하여 據城食粟하고 要以今年 定江南한대
笑曰 是勇將之計也注+言其不逆計勝敗, 但勇於赴敵耳.라하고 顧謂張賓曰 於君意 何如
賓曰 將軍 攻陷京師하여 囚執天子하고 殺害王公하고 妻略妃主하니
擢將軍之髮이라도 不足以數將軍之罪 奈何復相臣奉乎注+擢, 拔也.잇가
今天 降霖雨於數百里中하니 示將軍不應留此也니이다
鄴有三臺之固하고 西接平陽하고 山河四塞하니 宜北據之하여 以營河北이니 河北旣定이면 天下無處將軍之右者矣注+水經注 “鄴城西北, 有三臺, 皆因城爲之基, 漢建安十五年, 魏武所起. 中曰銅臺, 高十丈. 其後石虎更增二丈. 南則金雀臺, 高八丈. 北則冰井臺, 亦高八丈.” 西接平陽, 謂近漢都, 可以壯聲援. 處, 昌呂切.리이다
宜使輜重으로 從北道先發하고 將軍 引大兵하여 向壽春이니
輜重旣遠하고 大兵徐還이면 何憂進退無地乎잇가 攘袂鼓髯曰 張君計是也注+攘袂, 揎袖出臂也. 揎, 息全切. 手發衣也. 皷髯, 謂皷頰須也.라하다
於是 黜膺하고 擢賓爲右長史하여 號曰右侯라하다
引兵發葛陂할새 遣石虎하여 向壽春이러니
遇晉運船하여 虎將士爭取之라가 爲紀瞻所敗하여 追奔百里하여 前及勒軍이러니 結陳待之하니 不敢擊이러라
封帝爲會稽郡公하다
漢主聰 謂帝曰 卿 昔爲豫章王 與王武子 造卿하니 贈朕柘弓, 銀硏이러니 卿頗記否注+武子, 濟字. 柘, 之夜切, 柘木抽條, 勁直而長, 葉小而厚, 可爲弓材. 硏, 與硯同.
帝曰 臣 安敢忘之리오 但恨爾日不早識龍顔이니이다
聰曰 卿家骨肉 何相殘如此 帝曰 大漢 將應天受命이라 故爲陛下自相驅除 此殆天意 非人事也니이다
且臣家若能奉武皇帝之業하여 九族敦睦이면 陛下何由得之리잇고
하여 以小劉貴人妻帝하고 曰 此名公之孫也 善遇之하라
涼州主簿馬魴 說軌하여 宜命將出師하여 翼戴帝室이라한대
軌從之하여 馳檄關中하여 共尊輔秦王하고
且言今遣前鋒宋配하여 帥步騎二萬하고 徑趨長安하니 諸軍 絡繹繼發注+絡繹, 相繼不絶之意.하라하니라
封王彰爲定襄郡公하다
漢主聰 以魚蟹不供이라하여 斬左都水使者하고
作溫明, 徽光二殿 未成이라하여 斬將作大匠하고 觀漁於汾水하여 昏夜不歸注+晉志 “都水使者, 漢水衡之職也.”하다
諫曰 今愚民 歸漢之志未專하고 思晉之心猶盛이어늘
劉琨咫尺 刺客縱橫注+謂平陽去晉陽不遠也.하니 帝王輕出이면 一夫敵耳니이다
大怒하여 命斬之러니 彰女爲夫人하여 叩頭乞哀한대 乃囚之하다
太后張氏 以聰刑罰過差라하여 三日不食注+張氏, 淵之側室, 生聰, 尊爲太后.하고 太弟义 單于粲 輿櫬切諫하니
怒曰 吾豈桀紂완대 而汝輩生來哭人고하다
太保殷等百餘人 皆免冠涕泣而諫한대 慨然曰 朕昨大醉 非其本心이니 微公等言之 朕不聞過라하고
各賜帛百匹하고 使侍中持節赦彰하고 進封定襄郡公하다
雍州刺史賈疋等 進圍長安하니 漢劉曜敗走어늘 秦王業 入長安하다
不爲犯顔忤旨 然因事進規하여 補益甚多 漢主聰 每與群臣議政事 無所是非라가
群臣出이면 獨留하여 敷暢條理하여 商搉事宜하니 未嘗不從之注+商, 度也. 搉者, 擧其略也.러라
常戒子孫曰 事君 當務幾諫이니 凡人 尙不可面斥其過어든 況萬乘乎
夫幾諫之功 無異犯顔이로되 但不彰君之過하니 所以爲優耳니라
在公卿間 常恂恂有卑讓之色注+恂恂, 信實之貌.이라 故能處驕暴之國하여 保其富貴하여 不失令名하여 以壽考終하니라
石勒 引兵據襄國하다
劉琨 以兄子演으로 鎭鄴이러니 石勒 濟河하니 保三臺以自固
勒諸將 欲攻之한대 張賓曰 攻之 未易猝拔이요 捨之 彼將自潰리이다
方今 王彭祖, 劉越石 公之大敵也 宜先取之 不足顧也注+彭祖, 浚字. 越石, 琨字.니이다
且天下飢亂이어늘 明公 擁兵羇旅하여 人無定志하니 非所以保萬全制四方也
不若擇便地而據之하여 廣聚糧儲하여 西稟平陽하여 以圖幽, 幷이니 霸王之業也注+上三年, 漢徙平陽. 幽, 謂王浚. 幷, 謂劉琨.니이다
遂進據襄國하고 分命諸將하여 攻冀州郡縣하고 運穀以輸襄國하니 漢以勒爲冀州牧注+襄國縣, 秦爲信都, 項羽改曰襄國, 漢屬趙國, 晉屬廣平, 而信都別爲縣.하다
漢劉曜襲晉陽하여 陷之하니 劉琨 奔常山하다
劉琨 移檄州郡하여 期十月會平陽하여 擊漢이러니 素奢豪하고 喜聲色이라
徐潤 以音律得幸하고 驕恣하여 于預政事어늘 護軍令狐盛 數以爲言하니 收盛殺之하다
琨母曰 汝不能駕御豪傑하여 以恢遠略하고 而專除勝己하니 禍必及我라하더니
盛子泥奔漢하여 具言虛實하니 漢主聰 大喜하고 遣粲, 曜하여 將兵寇幷州할새 以泥爲鄕導하다
聞之하고 東出하여 收兵於常山하고 且遣使求救於代러니 粲, 曜乘虛襲晉陽하니
還救不及하여 帥數十騎하고 奔常山하니 泥殺琨父母하다
秋九月 賈疋等 奉秦王業하여 爲皇太子하고 建行臺하다
疋等 奉業爲皇太子하여 建行臺하고 登壇告類하고 建宗廟, 社稷하다
冬十月 代公猗盧攻晉陽하니 劉曜敗走어늘 猗盧追擊하여 大敗之하다
猗盧遣其子六脩하여 帥衆數萬하여 爲前鋒하고 自帥二十萬繼之하니 劉琨 收散卒爲鄕導러니
六脩與劉曜戰於汾東하여 曜兵敗하여 墜馬하고 中七創하고 夜踰蒙山而歸注+五代志 “太原郡石艾縣有蒙山.” 魏收志曰 “石艾縣, 卽漢‧晉之上艾縣也.” 晉志 “上艾縣, 屬樂平郡.” 又據五代志, 晉陽縣有蒙山, 此蓋蒙山跨晉陽‧石艾二縣界也.하다
猗盧追之하여 戰於藍谷하니 漢兵 大敗하여 伏尸數百里注+藍谷, 在蒙山西南.러라
猗盧因大獵壽陽山하여 陳閱皮肉하니 山爲之赤注+壽陽山, 在樂平壽陽縣.이러라
自營門으로 步入拜謝하고 固請進軍한대 猗盧曰 吾遠來하여 士馬疲弊하니 且待後擧
劉聰 未可滅也라하고 留其將箕澹等하여 戍晉陽하니 徙居陽曲하여 招集亡散注+陽谷縣, 屬太原國, 在晉陽北.하다
十二月 하니 麴允 領雍州刺史하다
賈疋入關하여 殺漢梁州刺史彭仲蕩이러니 至是하여 其子天護 帥群胡攻疋하여 殺之하니 推麴允領雍州하다
이라가 大敗而還하다
王浚 遣督護王昌하여 帥諸軍하고 及段疾陸眷與弟匹磾, 文鴦 從弟末柸 攻勒於襄國이러니 勒兵出戰 皆敗하다
召將佐하여 曰 吾欲悉衆決戰하노니 何如 諸將 皆曰 不如堅守하여 俟其退而擊之니이다
張賓, 孔萇曰 鮮卑段氏最爲勇悍而末柸尤甚하고 其銳卒 皆屬焉이라
今刻日來攻北城하니 必謂我孤弱하여 不敢出戰이라하여 意必懈惰
宜且勿出하여 示之以怯하고 鑿北城하여 爲突門二十餘道라가
俟其來至하여 列守未定 出其不意하여 直衝末柸帳하면
彼必震駭하여 不暇爲計리니 破之必矣 末柸敗 則其餘 不攻而潰矣注+墨子備突篇曰 “城, 百步一突門. 突門, 用車兩輪, 以木束之, 塗其上, 維置突門內. 度門廣狹之. 令人入門四尺中, 置窐突. 門旁爲橐, 充竈 又置艾. 寇卽入, 下輪而塞之, 鼓橐薰之也.” 杜佑曰 “突門, 鑿城內爲闇門, 多少臨事, 令五六寸勿穿. 或於中夜, 於敵初來, 營列未定, 精騎從突門躍出, 擊其無備, 襲其不意.”리이다
從之하여 密爲突門이러니 旣而 疾陸眷 攻北城이어늘
登城望之라가 見其將士或釋仗而寢하고 乃命孔萇하여 督銳卒하고 從突門出擊之라가 不克而退하다
末柸逐之하여 入其軍門이라가 爲勒衆所獲하니 疾陸眷等軍 皆退走어늘 乘勝追擊하니 枕尸三十餘里
疾陸眷 以鎧馬, 金銀賂勒하고 且以末柸三弟爲質而請末柸어늘
諸將 皆勸勒殺之한대 勒曰 遼西鮮卑 健國也 與我素無仇讐 爲王浚所使耳注+疾陸眷, 時爲遼西公.
今殺一人而結一國之怨 非計也 歸之하면 必深德我하여 不復爲浚用矣라하고
乃遣石虎하여 與疾陸眷으로 盟于渚陽하여 結爲兄弟注+水經註 “絳瀆, 北逕信都城東, 散入澤渚, 西至信都城, 東連于廣川縣張甲故瀆, 同歸于海.” 疾陸眷蓋屯是渚之陽也.하다 疾陸眷等 引歸하고 王昌亦還薊어늘
召末柸하여 與之燕飮하고 誓爲父子하여 遣還한대 由是 段氏專心附勒하니 浚勢遂衰하니라
大疫하다
少與兄衍으로 名冠海內 劉琨 謂澄曰 卿 形雖散朗이나 而內實動俠하니 以此處世 難得其死注+散朗, 謂散誕也. 動俠, 言其心輕易動, 又豪俠自喜也.리라
及在荊州 屢爲杜弢所敗하니 望實 俱損이로되 猶傲然自得하여 與內史王機 日夜縱酒博奕하니 上下離心이러라
故山簡參軍王沖 擁衆하고 自稱刺史하니하여 徙治沓中注+此沓中, 非姜維種麥之沓中. 蓋在孱陵之東.이어늘
琅邪王 聞之하고 召爲軍諮祭酒하고 以周顗代之하다
王敦 方討杜弢하여 進屯豫章이러니 過之할새 自以名聲 素出敦右라하여 猶以舊意侮敦하니
하여 誣其與杜弢通信이라하여 殺之하다 機將奴客, 門生千餘人하고 入廣州하니 機父嘗刺廣州하여 將士皆其部曲注+機父毅爲廣州刺史, 甚得南越之情.이라
刺史郭訥 遣拒機로되 皆迎降하니 乃避位하고 以州授之하다
王如詣王敦降하다
瓘之孫也 美風神하고 善淸談이러니 常以爲人有不及이어든可以情恕
非意相干이어든 可以理遣이라하니 故終身不見喜慍之色注+見, 賢遍切.이러라
羌酋姚弋仲 自稱扶風公하다
弋仲 南安赤亭羌也 東徙楡眉하니 戎,夏襁負隨之者數萬注+水經注 “漢靈帝分獂道爲南安郡. 赤亭水, 出郡之東山赤谷, 西流逕城北, 南入渭水.” 謂之赤亭川. 楡眉, 卽漢扶風之楡麋縣, 晉省.이러라


壬申年(312)
[] 나라 孝懷皇帝 永嘉 6년이다.
[] 나라(前趙) 烈宗 劉聰 嘉平 2년이다.
[] 봄 정월에 漢主 劉聰劉殷의 두 딸을 들여 貴嬪으로 삼았다.
[] 漢主 劉聰太保 劉殷의 딸을 貴嬪으로 들이려 할 적에 太弟 劉义가 굳이 하자, 유총이 太宰劉延年太傅劉景에게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太保가 스스로 자신은 劉康公의 후손이라고 해서 폐하와 근원이 다르니, 그의 딸을 귀빈으로 들이는 것이 어찌 문제될 것이 있겠습니까.”注+劉康公나라의 卿士로서 땅에 식읍을 갖고 있었는데 그 뒤에 인하여 로 삼았다. 劉聰匈奴의 후손인데 나라 황실의 생질이라 하여 劉氏 을 사칭한 것이다. 그러므로 근원이 다르다고 한 것이다. 하였다.
유총이 기뻐하여 유은의 두 딸인 劉英劉娥左右貴嬪으로 삼으니 그들의 지위가 昭儀보다 높았고, 또 유은의 손녀 네 명을 들여서 모두 貴人으로 삼으니 지위가 貴妃의 다음이었다.
이에 여섯 劉氏에 대한 총애가 後宮을 진동하였다. 유총이 다시는 궁 밖에 나가는 일이 드물었고 정사도 모두 환관인 中黃門이 아뢰어 결정하였다.
[] 胡亢(호강)이 竟陵에서 군대를 일으켰다.
[] 胡亢 新野王(司馬歆)의 牙門將이었다.注+이다. 竟陵에서 병력을 모아 荊州 지역을 침략하였는데, 杜曾竟陵太守로 삼았다. 두증은 용맹이 三軍의 으뜸이어서 무거운 갑옷을 입고서도 물속에서 헤엄칠 수 있었다.
[] 2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 琅邪王 司馬睿將軍 紀瞻을 보내어 葛陂에서 石勒을 토벌하니, 석륵이 군대를 이끌고 퇴각하였다.
[] 石勒葛陂에 보루를 축조하고 백성들에게 농사일을 독촉하고 배를 건조하게 하여 장차 建業을 공격하려 하였다.
司馬睿壽春江南의 병력을 크게 집결시키고 紀瞻揚威將軍으로 삼아 이들을 토벌하게 하였는데,
마침 큰 비가 내려서 3개월 동안 그치지 않으니, 석륵의 軍中은 굶주리고 역병이 유행하여 죽은 자가 태반이었다.
석륵이 장수와 보좌관들을 모아 대책을 의논하니, 刁膺이 우선 사마예에게 투항하고서 河朔 지역을 깨끗이 평정하여 속죄하기를 청하고 사마예의 군대가 후퇴하기를 기다려서 서서히 도모하자고 청하자, 석륵이 표정을 엄숙히 하고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孔萇 등이 길을 나누어 밤중에 壽春을 공격하여 을 점거하고 성안에 있는 곡식을 먹으면서 기어이 금년에 江南 지역을 평정할 것을 청하자,
석륵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는 용맹한 장수의 계책이다.”注+〈“勇將之計”는〉 미리 승패를 계산하지 않고, 다만 적에게 용감하게 달려갈 뿐임을 말한 것이다. 하고는 張賓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그대의 뜻은 어떠한가.” 하였다.
[] 張賓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장군이 京師를 공격하여 함락시켜 天子를 잡아 가두고 王公들을 살해하고 와 공주들을 겁탈하였으니,
장군의 머리털을 뽑아 세더라도 장군의 죄를 일일이 다 열거할 수가 없습니다. 어찌 다시 나라의 신하가 되어 받들 수 있겠습니까.注+은 뽑음이다.
이제 하늘이 수백 리 지역에 장맛비를 내리니, 이는 하늘이 장군에게 이곳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뜻을 보이는 것입니다.
鄴城三臺의 견고함이 있고 서쪽으로 平陽과 인접하였으며, 산과 강하가 사방으로 둘러 있는 요새이니, 마땅히 북쪽으로 업성을 점거하여 河北 지방을 경영해야 합니다. 하북 지방이 평정되면 천하에 장군의 위에 있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注+水經註≫에 “鄴城의 서북쪽에 三臺가 있는데 모두 을 따라 세웠으니, 나라 建安 15년(210)에 나라 武帝(曹操)가 세운 것이다. 가운데를 銅臺라 하니 높이가 10인데, 그 뒤에 石虎가 다시 2을 증축하였다. 남쪽은 金雀臺이니 높이가 8이고, 북쪽은 冰井臺이니 이 또한 높이가 8이다.” 하였다. “西接平陽”은 나라(前趙) 도성과 가까워서 크게 성원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자리하다)는 昌呂이다.
마땅히 輜重隊로 하여금 북쪽 길을 따라 먼저 출발하게 하고, 장군은 대군을 인솔하고서 壽春으로 향해야 합니다.
치중대가 이미 멀리 떠나가고 대군이 서서히 철수하여 돌아간다면, 전진하고 후퇴함에 근거할 땅이 없음을 어찌 근심하겠습니까.” 석륵이 소매를 걷고 수염을 실룩거리며 말하기를 “張君의 계책이 옳다.”注+攘袂”는 소매를 걷어 팔뚝을 드러내는 것이다. 息全이니, 손으로 옷을 걷어 올리는 것이다. “皷髯”은 뺨에 난 수염을 실룩거리는 것을 이른다. 하였다.
이에 刁膺을 내치고 장빈을 右長史로 발탁하여 ‘右侯’라고 칭하였다.
석륵이 군대를 이끌고 葛陂를 출발할 적에 石虎를 보내어 수춘으로 향하게 하였는데,
나라의 운반선을 만나 석호의 장병들이 다투어 곡식을 취하다가 紀瞻에게 패하여 백 리를 쫓겨 달려가서 앞에 있는 석륵의 군대와 만났다. 석륵이 진영을 설치하고 대비하니, 기첨이 감히 공격하지 못하였다.
紀瞻이 石虎의 무리를 크게 격파하다紀瞻이 石虎의 무리를 크게 격파하다
[] 나라(前趙)가 황제( 懷帝)를 봉하여 會稽郡公으로 삼았다.
[] 漢主 劉聰이 황제에게 이르기를 “이 옛날 豫章王으로 있을 적에 王武子와 함께 을 찾아가니, 에게 산뽕나무로 만든 활과 은으로 만든 벼루를 주었는데, 은 그 일을 모두 기억하는가?”注+武子王濟이다. (산뽕나무)는 之夜이니, 산뽕나무는 가지가 길게 뻗어 올라가는데 단단하고 곧고 길며 잎이 작고 두터워서 활의 재료가 될 수 있다. (벼루)은 과 같다. 하니,
황제가 말하기를 “이 어찌 감히 그것을 잊겠습니까. 다만 그날 진즉에 龍顔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하였다.
劉聰이 말하기를 “의 집안은 骨肉 간에 어찌 이와 같이 서로 해쳤는가?” 하니, 황제가 말하기를 “大漢이 장차 하늘의 뜻에 응하여 天命을 받게 될 것이므로 폐하를 위하여 자기들끼리 서로 몰아낸 것이니, 이는 아마도 하늘의 뜻이요 사람의 일이 아닌 듯합니다.
의 집안이 만약 武皇帝(司馬炎)의 大業을 받들어서 九族이 화목하였으면, 폐하가 어떻게 천하를 얻을 수 있었겠습니까.” 하니,
유총은 기뻐하여 작은 劉貴人을 황제에게 주어 를 삼게 하고는, 말하기를 “이는 名公의 손녀이니, 은 잘 대우하라.” 하였다.
[] 張軌가 군대를 보내어 長安으로 달려가게 하였다.
[] 涼州主簿 馬魴張軌를 설득하기를 “장수에게 명하여 군대를 출동해서 황실을 보좌하고 추대하여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장궤가 그 말을 따라서 급히 關中 지역에 격문을 돌려 함께 秦王(司馬業)을 높이고 보필하기로 하고,
또 말하기를 “이제 선봉 宋配를 보내어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곧바로 長安으로 향하게 하니, 나머지 군대들도 계속 뒤를 이어 출발하라.”注+絡繹”은 서로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뜻이다. 하였다.
[] 여름에 나라(前趙)가 王彰을 봉하여 定襄郡公으로 삼았다.
[] 漢主 劉聰은 물고기와 게를 제대로 공급하지 못했다 하여 左都水使者를 참수하고,
溫明殿徽光殿 두 궁전을 지을 적에 완성하지 못했다 하여 將作大匠을 참수하였으며, 汾水에서 물고기 잡는 것을 구경하느라 밤이 늦도록 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注+晉書≫ 〈百官志〉에 “都水使者나라 水衡의 직책이다.” 하였다.
이에 王彰하기를 “지금 어리석은 백성들이 나라(前趙)로 귀의하는 뜻은 견고하지 못하고, 나라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아직도 지극합니다.
게다가 劉琨이 지척에 있어 刺客이 도처에서 횡행하니,注+〈“劉琨咫尺”은〉 나라(前趙)의 도성인 平陽劉琨이 있는 晉陽과 거리가 멀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帝王이 함부로 출행하면 한 지아비의 상대가 될 뿐입니다.” 하니,
유총이 크게 노하여 그를 참수하라고 명하였다. 왕창의 딸이 유총의 夫人이었는데 머리를 조아리며 자기 친정아버지의 생명을 애걸하자, 마침내 왕창을 가두었다.
[] 太后 張氏劉聰의 형벌이 지나치다 하여 3일 동안 밥을 먹지 않았고,注+張氏劉淵側室인데, 劉聰을 낳아 태후로 높여졌다.太弟 劉义單于 劉粲을 수레에 싣고 가서 간절히 간하니,
유총이 노여워하며 말하기를 “내가 어찌 와 같은 폭군이겠는가. 너희들은 내가 살아 있는데도 와서 곡하는가.” 하였다.
太保 劉殷 등 백여 명이 모두 을 벗고 눈물을 흘리며 간하자, 유총이 서글퍼하며 말하기를 “이 어제 크게 취하여 그리하였을 뿐, 나의 본심이 아니다. 등이 말해주지 않았으면 이 잘못을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고는,
그들에게 각각 비단 백 필을 하사하고, 侍中으로 하여금 을 잡고 가서 왕창을 사면하게 하고 관직을 더하고 定襄郡公으로 봉하였다.
[] 雍州刺史 賈疋(가아) 등이 전진하여 長安을 호위하자, 나라(前趙) 劉曜가 패주하니, 秦王 司馬業이 장안으로 들어갔다.
[] 나라(前趙) 太保 劉殷하였다.
[] 劉殷漢主 劉聰의 얼굴을 범하거나 뜻을 거스르지 않았으나, 일에 따라 간언을 올려서 유총을 보익하는 바가 매우 컸다. 한주 유총이 여러 신하들과 政事를 의논할 적에, 유은은 내내 옳다거나 그르다고 말하지 않다가,
여러 신하들이 나가면 홀로 남아서 조리 있게 설명하면서 일에 마땅함을 헤아리고 요점을 드니, 유총이 일찍이 그의 말을 따르지 않은 적이 없었다.注+은 헤아림이다. 은 그 대략을 드는 것이다.
유은이 항시 자기 자손들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君主를 섬길 적에는 마땅히 은미하게 간할 것을 힘써야 하니, 보통 사람들에게도 대면하여 잘못을 지적해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萬乘의 군주에 있어서이겠는가.
은미하게 간하는 것은, 그 효과가 군주의 얼굴을 범하여 直諫하는 것과 다름이 없으면서도 군주의 잘못을 드러내지 않으니, 이 때문에 훌륭한 방도가 되는 것이다.” 하였다.
유은은 公卿들 사이에 있으면서 항상 信實하여 자신을 낮추고 사양하는 기색이 있었다.注+恂恂”은 信實한 모양이다. 그러므로 교만하고 포악한 군주가 다스리는 나라에 있으면서도 부귀를 보존하고 훌륭한 명성을 잃지 않아서 天壽를 누릴 수 있었다.
[] 石勒이 군대를 이끌고 襄國을 점거하였다.
[] 劉琨이 형의 아들 劉演鄴城에 진주하게 하였는데, 石勒이 황하를 건너가니, 유연이 三臺를 지켜 스스로를 견고히 하였다.
석륵의 여러 장수들이 유연을 공격하려고 하자, 張賓이 다음과 같이 만류하였다. “공격하면 대번에 함락하기가 쉽지 않고, 공격하지 않고 그대로 두면 저들이 장차 스스로 궤멸할 것입니다.
지금 王彭祖(王浚)와 劉越石(劉琨)은 의 큰 적입니다. 마땅히 먼저 이들을 공격해야 하니, 유연은 굳이 돌아볼 상대가 못 됩니다.注+彭祖王浚이고, 越石劉琨의 자이다.
또 천하가 기근이 들고 혼란한데, 明公이 병력을 보유한 채 타향에 기거하고 있어서 사람들에게 안정된 뜻이 없으니, 공격하는 것은 萬全을 기하여 사방을 제어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편리한 지역을 가려 점거해서 식량과 물자를 널리 모아 서쪽으로 平陽에 보내서 幽州幷州를 도모하는 것만 못하니, 이것이 霸王基業입니다.”注+위의 永嘉 3년(309)에, 나라가 도읍을 平陽으로 옮겼다. 幽州王浚을 이르고, 幷州劉琨을 이른다.
석륵이 마침내 전진하여 襄國을 점거하고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명해서 冀州郡縣을 공격하고 곡식을 운반하여 양국으로 수송하게 하니, 나라(前趙)가 석륵을 冀州牧으로 삼았다.注+襄國縣나라 때에는 信都라고 하였고, 項羽襄國으로 고쳤으며 나라 때에는 趙國에 속하였고, 나라 때에는 廣平에 속하였으며 信都는 따로 이 되었다.
[] 나라(前趙) 劉曜晉陽을 습격하여 함락시키니, 劉琨常山으로 달아났다.
[] 劉琨州郡에 격문을 보내어 10월에 平陽에서 크게 모여 나라(前趙)를 공격하기로 기약하였는데, 유곤은 평소 사치스럽고 호방하였으며 음악과 여색을 좋아하였다.
徐潤音律로 유곤의 총애를 얻고는 교만하고 방자하여 政事에 간여하자, 護軍 令狐盛이 여러 번 이에 대해 말하니, 유곤이 영호성을 체포하여 죽였다.
유곤의 어머니가 말하기를 “네가 豪傑들을 제대로 통솔하여 원대한 方略을 넓히지 못하고, 오로지 너보다 나은 자를 제거하려 하니, 가 반드시 나에게 미칠 것이다.” 하였다.
영호성의 아들 令狐泥나라로 달아나서 유곤의 虛實을 자세히 말하니, 漢主 劉聰이 크게 기뻐하고 劉粲劉曜를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幷州를 침략하게 하였는데, 이때 영호니를 鄕導로 삼았다.
유곤은 이 말을 듣고 동쪽으로 출발하여 常山에서 병력을 규합하고 또 사자를 보내어 나라에 구원을 청하였다. 유찬과 유요가 빈틈을 타고 晉陽을 기습하니,
유곤이 미처 제때에 돌아와 구원하지 못하여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常山으로 달아났다. 이에 영호니가 유곤의 부모를 죽였다.
[] 가을 9월에 賈疋(가아) 등이 秦王 司馬業을 받들어 皇太子로 삼고 行臺를 세웠다.
[] 賈疋 등이 司馬業을 받들어 황태자로 삼고는 行臺를 세우고 단에 올라 告類하고 종묘와 사직을 세웠다.
[] 겨울 10월에 代公 拓跋猗盧晉陽을 공격하니 劉曜가 패주하였는데, 탁발의로가 추격하여 대파하였다.
[] 拓跋猗盧가 자기 아들 拓跋六脩를 보내어 수만의 병력을 거느려 선봉이 되게 하고, 자신은 직접 20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뒤를 이었는데, 劉琨이 흩어진 병졸을 수합하여 鄕導가 되었다.
탁발륙수가 汾水 동쪽에서 劉曜와 싸웠는데, 유요의 군대가 패해서 유요는 말에서 떨어지고 몸에 일곱 군데의 상처를 입고는, 밤에 蒙山을 넘어 도망하여 돌아갔다.注+五代史≫ 〈地理志〉에 “太原郡 石艾縣蒙山이 있다.” 하였고, 魏收의 ≪魏書≫ 〈地形志〉에 “석애현은 바로 나라와 나라의 上艾縣이다.” 하였으며, ≪晉書≫ 〈地理志〉에 “상애현은 樂平郡에 속하였다.” 하였다. 또 ≪오대사≫ 〈지리지〉를 근거해보면 晉陽縣에 몽산이 있으니, 이는 아마도 몽산이 晉陽石艾의 경계에 걸쳐 있는 듯하다.
탁발의로가 그를 추격하여 藍谷에서 싸웠는데, 나라(前趙) 군대가 크게 패해서 시신이 수백 리에 널려 있었다.注+藍谷蒙山의 서남쪽에 있다.
탁발의로가 승세를 타고 壽陽山에서 크게 사냥하고서 짐승의 가죽과 고기를 진열하니, 산이 이 때문에 붉게 물들었다.注+壽陽山樂平壽陽縣에 있다.
유곤이 〈자신을 낮추어〉 營門에서 걸어 들어가 절하여 사례하고 굳이 進軍할 것을 청하자, 탁발의로가 말하기를 “내 멀리 와서 병사와 말이 피로하니, 우선 훗날을 기다렸다가 다시 군대를 출동시키겠다.
劉聰은 쉽게 멸망시킬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하고는 그의 장수 箕澹 등을 남겨두어 晉陽을 지키게 하였다. 유곤이 陽曲으로 거처를 옮겨서, 도망해 흩어진 병사들을 불러 모았다.注+陽谷縣太原國에 속하였으니, 晉陽의 북쪽에 있다.
[] 12월에 盜賊(刺客)이 賈疋(가아)를 죽이니, 麴允雍州刺史를 겸하였다.
[] 처음에 賈疋關中에 들어가서 나라(前趙)의 梁州刺史 彭仲蕩을 죽였다. 이때에 그의 아들 彭天護가 여러 오랑캐들을 거느리고 가아를 공격하여 죽이니, 여러 사람들이 麴允을 추대하여 雍州刺史를 겸하게 하였다.
[] 王浚襄國에서 石勒을 공격하다가 대패하고 돌아갔다.
[] 王浚督護 王昌을 보내어 여러 군대를 거느리고 段疾陸眷과 그의 아우 段匹磾, 段文鴦從弟 段末柸와 함께 襄國에서 石勒을 공격하게 하니, 석륵의 군대가 출전할 때마다 모두 패하였다.
석륵이 장수와 보좌들을 불러 말하기를 “내가 병력을 총동원하여 결전을 하고자 하니, 어떠한가?” 하자, 여러 장수들은 모두 말하기를 “견고히 지키면서 저들이 후퇴하기를 기다렸다가 공격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그러나 張賓孔萇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鮮卑 중에 段氏가 가장 용맹하고 사나운데, 그중에도 단말배가 특히 더 심하고 또 정예병이 모두 다 그에게 소속되어 있습니다.
이제 저들이 날짜를 정하고 와서 우리의 北城을 공격하니, 저들은 우리가 고단하고 약하여 감히 출전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해서 반드시 마음이 해이해질 것입니다.
우선 출격하지 말고 두려워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북성에 지하도를 파서 突門(성문 이외의 비밀 출구) 20여 개를 만들었다가,
저들이 쳐들어올 때를 기다려 적진이 아직 정해지기 전에 저들이 뜻하지 않은 때에 출동해서 곧바로 단말배의 막하를 충돌하면,
저들이 반드시 진동하고 놀라서 계책을 세울 겨를이 없을 것이니, 이렇게 하면 틀림없이 격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단말배가 패하면 그 나머지는 공격하지 않아도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다.”注+墨子≫ 〈備突篇〉에 “마다 突門 하나를 설치한다. 돌문에는 수레바퀴 두 개를 사용하는데 수레바퀴에 나무를 묶고 그 위에 진흙을 발라서 돌문 안에 매어둔다. 문의 너비에 따라 수레바퀴의 크기를 조절한다. 사람을 문 안의 4 정도 되는 곳에 들여보내 아궁이와 굴뚝을 설치하게 한다. 문 옆에 불을 일으키는 풀무를 만들며 아궁이에는 나무와 쑥을 가득히 채워 넣는다. 적이 쳐들어오면 수레바퀴를 떨어뜨려 문을 막고 풀무질을 하여 연기를 피운다.” 하였다. 杜佑가 말하기를 “突門 밑을 파서 비밀 문을 만들되 많고 적음은 때에 따라 알맞게 하며 5, 6은 파지 말고 그대로 둔다. 혹 한밤중이나 적이 처음 쳐들어와서 대오와 진영이 정해지기 전에, 정예 기병이 돌문을 통하여 뛰쳐나가 적이 대비함이 없을 때 공격하고 적이 뜻하지 않을 때 기습한다.” 하였다.
[] 石勒이 그의 말을 따라 은밀히 突門을 만들었는데, 얼마 후 段疾陸眷北城을 공격하였다.
석륵이 에 올라가 바라보다가 단질륙권의 장병들이 혹 병기를 놓고 잠을 자는 것을 보고는, 마침내 孔萇에게 명하여 정예병을 이끌고 돌문을 따라 나가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후퇴하게 하였다.
段末柸가 추격하여 공장의 軍門으로 들어갔다가 석륵의 병사들에게 사로잡히니, 단질륙권 등의 군대가 모두 후퇴하여 달아났다. 공장이 승세를 타고 추격하니, 시신이 30여 리에 이어졌다.
단질륙권이 석륵에게 갑옷을 입혀 무장한 말과 金銀을 뇌물로 보내고, 또 단말배의 세 아우를 인질로 보내고 단말배와 교환할 것을 청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석륵에게 단말배를 죽이기를 권하였으나, 석륵이 말하기를 “遼西鮮卑強健한 나라이다. 평소 우리와 원한이 없고 다만 王浚에게 사주를 받았을 뿐이니,注+段疾陸眷이 이때 遼西公으로 있었다.
이제 단말배 한 사람을 죽여서 한 나라와 원한을 맺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다. 그를 돌려보내면 반드시 우리를 매우 고맙게 여겨서 다시는 왕준에게 이용되지 않을 것이다.” 하고는,
石虎를 보내어 단질륙권과 渚陽에서 맹약하고서 형제가 되기로 결의하였다.注+水經註≫에 “絳瀆은 북쪽으로 信都城 동쪽을 지나 흩어져 澤渚로 들어가는데, 서쪽으로 신도성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廣川縣張甲 옛 냇물과 이어져서 함께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으니, 段疾陸眷이 아마도 渚水의 북쪽에 주둔한 듯하다. 이에 단질륙권 등이 병력을 이끌고 돌아가고, 王昌 또한 薊縣으로 돌아갔다.
석륵이 단말배를 불러 연회를 베풀어 함께 술을 마시고 父子가 되기로 맹세하고서 그를 돌려보내자, 이로부터 段氏가 오로지 한마음으로 석륵에게 귀의하니, 왕준의 형세가 마침내 쇠약해졌다.
[] 역병이 크게 유행하였다.
[] 王敦이 그의 형인 荊州都督 王澄을 죽였다.
[] 王澄은 어린 시절 형 王衍과 함께 명성이 海內에서 으뜸이었다. 劉琨王澄에게 이르기를 “은 겉으로는 소탈하고 자유분방한 듯하나 마음은 쉽게 동요하고 협기가 있으니, 이런 방식으로 세상 사람들을 대하면, 제대로 된 죽음을 맞기가 어려울 것이다.”注+散朗”은 소탈하고 자유분방함을 이른다. “動俠”은 마음이 가벼워 쉽게 동요하고, 또 호방하고 의협심이 있어서 스스로 잘난 체함을 말한다. 하였다.
왕징이 荊州刺史로 있을 적에, 杜弢(두도)에게 여러 번 패하여 명망과 실제가 모두 훼손되었으나, 여전히 거만하고 스스로 만족하여 우쭐대면서 內史 王機와 함께 밤낮으로 술에 취해 장기와 바둑을 두니, 상하의 마음이 모두 떠나갔다.
山簡參軍王沖이 병력을 보유하고 스스로 刺史를 칭하니, 왕징은 두려워하여 治所沓中으로 옮겼다.注+여기의 沓中姜維가 보리를 심었던 沓中이 아니니, 아마도 孱陵의 동쪽에 있었던 듯하다.
琅邪王(司馬睿)은 이 말을 듣고 왕징을 불러 軍諮祭酒로 삼고, 周顗로 그를 대신하였다.
[] 王敦杜弢를 토벌하고자 나아가 豫章에 주둔하였는데, 왕징이 이곳에 들렀을 적에 자신의 명성이 평소 왕돈보다 높다 하여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왕돈을 업신여기니,
왕돈이 노여워하여 그가 두도와 서신을 왕래하였다고 모함하여 죽였다. 왕징의 內史王機家奴門生 천여 명을 거느리고 廣州로 들어갔는데, 왕기의 아버지 王毅가 일찍이 廣州刺史로 있었기 때문에 그곳의 장병들이 모두 왕의의 부하였다.注+王機의 아버지 王毅廣州刺史로 있으면서 南越 지역의 인심을 크게 얻었다.
광주자사 郭訥이 병력을 보내어 왕기를 막게 하였으나 그들이 모두 왕기를 맞이하고 그에게 항복하였다. 곽눌은 이에 자신의 지위를 양보하고 광주를 왕기에게 주었다.
[] 王如王敦에게 가서 항복하였다.
[] 太子洗馬 衛玠하였다.
[] 衛玠衛瓘의 손자이다. 풍채가 아름답고 淸談을 잘하였는데, 항상 말하기를 “남이 나보다 못한 점이 있으면 으로 용서하여야 하고,
남이 고의로 나를 범하지 않으면 이치로 풀어야 한다.” 하였다. 그러므로 종신토록 기뻐하고 노여워하는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다.注+(나타내다)은 賢遍이다.
[] 羌族의 추장인 姚弋仲이 스스로 扶風公이라 칭하였다.
[] 姚弋仲南安郡 赤亭羌族인데, 동쪽 楡眉로 옮기니, 戎族漢族이 포대기에 자식을 업고 따라오는 자가 수만 명이었다.注+水經註≫에 “ 靈帝獂道를 나누어 南安郡을 만들었는데, 赤亭水南安郡東山 赤谷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 의 북쪽을 지나 남쪽으로 渭水에 들어간다.” 하였는데, 이곳을 赤亭川이라 이른다. 楡眉는 바로 나라 扶風楡麋縣인데, 나라 때에 없앴다.


역주
역주1 六年 : “이때에 황제가 平陽으로 옮겨간 지 1년이 넘었는데, ‘永嘉 6년’이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正統을 보존하려 한 것이다. 이때 황제가 아직 살해를 당하지 않았고 秦王(司馬業)이 雍洲에 있었으니, 그렇다면 정통이 실제로 황제에게 있는 것이다.[於是帝遷平陽 踰年矣 書六年 何 存正統也 帝未遇害 秦王在雍 則正統固在矣]” ≪書法≫
역주2 漢主聰……爲貴嬪 : “妃妾은 쓰지 않는데, 여기에서는 어찌하여 썼는가. 同姓임을 비난한 것이다. 동성임을 비난하려 했으면 劉氏를 貴嬪으로 삼았다고 쓰면 될 터인데, 어찌하여 굳이 ‘劉殷’을 썼는가. 유은 또한 함께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명하여 妃妾을 들였다.’고 쓴 것이 10번인데(漢나라 獻帝 建安 18년(213)에 자세히 보인다.), 나머지 9번은 비난한 것이고, 오직 〈唐나라 太宗 貞觀 8년(634)〉 鄭氏를 맞이하여 充華로 삼은 것은 찬미한 말이다.[妃妾不書 此何以書 譏同姓也 譏同姓 則書以劉氏爲貴嬪 可矣 曷爲必書劉殷 殷亦與有責焉耳 終綱目 書命納妃妾 十(詳漢獻帝建安十八年) 其九 譏也 惟聘鄭氏爲充華 爲美辭]” ≪書法≫
“아내를 취할 적에 同姓을 취하지 않는 것은 嫌疑를 멀리하는 것이니, 어찌 근원이 같은지의 여부를 논하겠는가. 劉聰이 劉殷의 딸을 貴嬪으로 들이면 똑같이 姓이 劉氏이니, 吳孟子와 가깝다. 그러나 저들은 본래 오랑캐여서 여러 어미를 아내로 삼는 것도 어려워하지 않으니, 또 어찌 동성의 여부를 따지겠는가. 우선 이것을 써서 개, 돼지와 같은 오랑캐의 잡됨을 드러낸 것이다.[娶妻不取同姓者 爲遠嫌也 豈論同源與否哉 聰納殷女 均之姓劉 則幾於吳孟子矣 然彼本夷狄 尙不難於妻群母 又何有於同姓哉 書之 姑以著犬羊之雜糅耳]” ≪發明≫
역주3 張軌遣兵詣長安 : “‘遣兵(군대를 보냈다)’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張軌의 忠義를 인정한 것이다. 懷帝 때에 ‘北宮純을 보내어 들어가 호위하게 했다.’라고 썼었는데, 이때 다시 ‘군대를 보내어 長安으로 달려가게 하였다.’라고 썼으니, 장궤와 같은 자는 신하된 도리를 알았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므로 이것을 써서 인정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군대를 보내어 아무 곳으로 달려가게 했다.’라고 쓴 것이 5번인데, 장궤가 군대를 보내어 장안으로 달려가게 하였고(이해(312)), 殷孝祖가 군대를 거느리고 建康으로 달려갔고(宋나라 丙午年(466)), 北魏 趙剛이 東荊州의 군대를 거느리고 장안으로 달려갔고(梁나라 甲寅年(534)), 河西와 安西 지역에서 모두 군대를 보내어 行在로 달려가게 하였고(唐나라 玄宗 天寶 15년(756)), 李懷光이 병력을 인솔하고 장안으로 달려갔으니(唐나라 德宗 建中 4년(783)), 모두 그 의리를 인정한 것이다.[書遣兵 何 予義也 懷帝之世 書遣北宮純入衛矣 於是復書遣兵詣長安 若軌者 可謂知爲人臣矣 故書予之 終綱目 書遣兵詣某所者五 張軌遣兵詣長安(是年) 殷孝祖帥兵赴建康(宋丙午年) 魏趙剛以東荊兵赴長安(梁甲寅年) 河西安西皆遣兵詣行在(唐玄宗天寶十五載) 李懷光帥衆赴長安(唐德宗建中四年) 皆予之也]” ≪書法≫
역주4 漢太保劉殷卒 : “僭國의 신하에게 ‘卒’이라고 쓴 것은 그의 어짊을 기록한 것이다.[卒僭國臣 錄賢也]” ≪書法≫
역주5 (郡)[都] : 저본에는 ‘郡’으로 되어 있으나, 본서 永嘉 3년 조 綱에 의거하여 ‘都’로 바로잡았다.
역주6 盜殺賈疋 : “‘盜’는 누구인가. 彭天護이다. 譙登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자, ≪資治通鑑綱目≫에서 ‘死之’라고 썼으니, 이는 초등을 의롭게 여긴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팽천호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는데 ‘盜’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팽천호는 漢나라(前趙)의 신하이니, 逆과 順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郭循이 魏나라 신하로서 漢나라(蜀漢) 費褘를 죽였을 때 ‘盜’라고 썼고, 팽천호가 漢나라 신하로서 晉나라의 賈疋를 죽였을 적에 ‘盜’라고 썼으니, ≪資治通鑑綱目≫에서 사람들에게 따를 바를 보여준 뜻이 매우 간절하다. 가아의 관직을 쓰지 않은 것은 위 글에 보이기 때문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盜殺(자객이 죽였다.)’이라고 쓴 것이 11번이다.[盜者 何 彭天護也 譙登復父讐 綱目書死之 義之也 此亦復父讐也 其書盜 何 天護臣漢者也 逆順異矣 是故郭循魏臣也 殺漢費褘 則書盜 天護漢臣也 殺晉賈疋則書盜 綱目示人所從之意深切矣 賈疋不書官 以上文見也 終綱目 書盜殺十一]” ≪書法≫
“‘以麴允’이라고 쓰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황제가 平陽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스스로 겸했다고 쓰지 않았는가. 황제가 평양에 있기 때문이다. ≪資治通鑑綱目≫은 한 글자의 筆削도 신중하게 하였다.[◯不書以 何 帝在平陽也 然則曷爲不書自領 帝在平陽也 綱目一字之筆削 審矣哉]” ≪書法≫
역주7 王浚 攻石勒於襄國 : “石勒에게 일찍이 ‘寇’라고 썼는데, 어찌하여 王浚에게 ‘討’라고 쓰지 않았는가.(紀瞻에게 ‘討’라고 쓴 것에 의거한 것이다.) 王浚은 晉나라에 마음을 둔 자가 아니므로 자기들끼리 서로 공격한 것으로 여겨 〈‘攻’이라고〉 쓴 것이다.[石勒嘗書寇矣 曷爲不書討(據紀瞻書討) 浚非心晉者也 故以自相攻擊書之]” ≪發明≫
역주8 (狀又置艾)[伏柴艾] : 저본에는 ‘狀又置艾’로 되어 있으나, ≪墨子閒詁≫에 의거하여 ‘伏柴艾’로 바로잡았다.
역주9 王敦殺其兄荊州都督澄 : “‘兄’이라고 쓰고 관직을 썼으니, 王敦이 아우 노릇 하지 않고 신하 노릇 하지 않은 죄가 구비되었다.[書兄 書官 敦不弟不臣之罪具矣]” ≪書法≫
“사람들이 늘 하는 말에 모두 父兄이라 하니, 형을 섬기기를 엄격히 하는 것은 바로 아버지 섬기기를 엄격히 하는 것으로, 이는 그 조짐을 삼가는 것이다. 王處中(王敦)이 자기 형을 죽이는 것을 어렵게 여기지 않았으니, 그렇다면 또한 자기 아버지가 있음을 알지 못한 것이다. 더구나 王澄은 方伯의 지위에 있었으니, 만일 그에게 죄가 있더라도 마땅히 조정에 청해야 할 터인데, 왕처중이 제멋대로 그를 죽였으니, 군주를 무시하는 마음이 또 이미 이때에 나타났다. 그러므로 왕징에게 ‘그 형’이라고 쓰고 또 ‘荊州都督’이라고 특별히 관직을 쓰면서도, 왕처중에게는 그 관직을 쓰지 않은 것이다.[人有常言 皆曰父兄 蓋嚴於事兄 乃所以嚴於事父 正所以謹其漸也 王處仲不難於殺其兄 則亦不知有其父矣 況澄身爲方伯 正使有罪 合請于朝 而處仲專輒行戮 則其無君之心 又已見於此時矣 故澄旣書其兄 又特以荊州都督書之 而處仲則去其官]” ≪發明≫
역주10 前太子洗馬衛玠卒 : “卒할 적에 예전의 관직을 쓴 것은 어짊을 기록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卒했을 때에 예전의 관직을 쓴 것은 6번뿐이다(漢나라 安帝 元初 2년(115)에 자세히 보인다.).[卒前官 錄賢也 終綱目 卒前官者六而已(詳漢安帝元初二年)]” ≪書法≫

자치통감강목(13) 책은 2020.12.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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