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綱] 봄에 조趙나라(후조後趙)가 〈진晉나라(동진東晉)에〉 사신을 보내와서 우호를 맺기를 청하였는데, 조령詔令을 내려서 그 폐백幣帛을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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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3월에 영주寧州가 배반하여 성成나라(성한成漢)에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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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여름 5월에 요동공遼東公모용외慕容廆가 졸卒하니, 세자世子모용황慕容皝이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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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가을 7월에 조주趙主석륵石勒이 졸卒하니, 태자太子석홍石弘이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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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조주趙主석륵石勒이 병이 위독해지자, 중산왕中山王석호石虎가 들어와 모시다가 조령詔令을 사칭하여 여러 신하와 친척들에게 모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 진왕秦王석굉石宏과 팽성왕彭城王석감石堪이 병력을 거느리고 밖에 있었는데, 석호가 이들을 모두 불러 돌아오게 하였다.注+① 石勒이 石宏을 都督中外諸軍事로 삼은 것은, 그로 하여금 鄴에 진주하게 하려 한 것이다. 石堪은 河南에 있었던 듯하다. 석감은 본래 田氏의 아들인데, 여러 번 功을 세우자 趙主 石勒이 양자로 삼았다.
석륵이 병이 조금 나아지자, 석굉을 보고 놀라 말하기를 “내가 왕王으로 하여금 번진藩鎮에 진주하게 한 것은 바로 오늘날을 대비한 것인데, 왕을 불러들인 자가 있는가? 마땅히 법에 따라 그를 주살하겠다.” 하였다. 석호가 두려워하여 이르기를 “진왕秦王이 폐하를 사모하여 잠시 돌아왔을 뿐이니, 이제 곧 보내겠습니다.” 하고는, 석굉을 그대로 머물게 하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이때에 석륵의 병이 위독하여 유명遺命을 내리기를 “대아大雅(석홍石弘) 형제兄弟는 마땅히 서로 잘 보호해야 할 것이니, 사마씨司馬氏는 너희들의
이다.注+② 〈“汝曹之前車也”는〉 앞 수레가 전복된 것은 뒷 수레의 경계가 되니, 〈司馬氏의 형제가 자기들끼리 서로 해친 것처럼〉 석홍의 형제가 骨肉相殘할까 경계한 것이다. 중산왕은 마땅히 주공周公과 곽광霍光을 깊이 생각하여 장래에 사람들의 얘깃거리가 될 일을 하지 말라.”注+③ 〈“中山王 宜深思周霍”은〉 마땅히 周公과 霍光처럼 어린 군주를 잘 보필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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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석륵石勒이 졸卒하자, 석호石虎가 태자 석홍石弘을 겁박하여 하여금 정하程遐와 서광徐光을 체포해서 정위廷尉에 회부하게 하고, 자기 아들 석수石邃을 불러 군대를 거느리고 들어와 숙위宿衛하게 하였다.注+① 石邃는 이때 冀州刺史로 있었다.
석홍이 크게 두려워하여 임금의 지위를 석호에게 사양하자, 석호가 말하기를 “만약 그대가 중임重任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천하에 저절로 대의大義가 있을 것이니, 어찌 굳이 미리 논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석홍이 마침내 즉위하여 정하와 서광을 죽이고, 밤에 석륵의 시신을 몰래 산골짝에 묻고 마침내 의위儀衛를 구비하여 고평릉髙平陵에
[강綱] 8월에 조趙나라(후조後趙)의 석호石虎가 스스로 승상丞相위왕魏王이 되고, 9월에 태후太后유씨劉氏를 시해하였다.
겨울 10월에 조趙나라의 하동왕河東王석생石生 등이 군대를 일으켜 석호를 토벌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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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조趙나라의 석호石虎가 스스로 승상丞相위왕魏王대선우大單于가 되어서 구석九錫을 가하고, 석륵石勒의 옛 신하들을 모두 한직閑職에 보임補任하고 석호의 친당親黨 등을 모두 요직에 앉혔다.
유태후劉太后가 팽성왕彭城王석감石堪에게 이르기를 “선제先帝가 승하하자마자 승상丞相이 대번에 이와 같이 능멸하고 짓밟으니,注+① 陵은 능멸함이고, 억누름이다. 藉는 慈夜의 切이니, 짓밟음이다. 장차 어찌해야 하는가?” 하자,
석감이 대답하기를 “궁성宫省의 안에는 함께 일을 도모할 만한 자가 없으니,注+② 〈“宫省之内 無可爲者”는〉 宿衛와 臺省의 요직이 모두 石虎의 幕僚들과 親屬이어서 함께 모의하여 바로잡을 만한 자가 없음을 말한 것이다. 청컨대 제가 연주兗州로 달려가서 군대를 일으켜 그를 주벌하겠습니다.” 하고는, 마침내 미복微服 차림으로 경무장한 말을 타고 연주를 기습하다가 승리하지 못하고 남쪽 초국譙國으로 달아났다.
석호가 장수를 보내어 그를 뒤따라가 사로잡아 양국襄國으로 보내고는 〈태후太后〉 유씨劉氏와 함께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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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유씨劉氏는 평소 담력과 지략이 있어서 석륵石勒을 보좌하여 공업功業을 세우니,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비妃인 여후吕后의 풍모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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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이때에 석생石生은 관중關中에 진주하고 석랑石朗은 낙양洛陽에 진주하고 있었는데,注+① 〈前趙의〉 劉胤이 서쪽으로 달아날 적에 石生이 洛陽에서 長安으로 가서 진주하자, 石朗이 석생을 대신하여 낙양에 진주하였다. 변고가 났다는 말을 듣고 모두 석호石虎를 토벌하려고 군대를 일으켰다.
석생이 사자를 보내어 진晉나라(동진東晉)에 항복하였으나, 포홍蒲洪은 서쪽으로 장준張駿에게 귀의하였다. 석호가 석랑을 공격하여 참수하고 장안長安을 향하여 진격하니, 석생의 휘하가 석생을 참수하고서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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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석호石虎가 마추麻秋에게注+① 麻는 姓이다. 명하여 포홍蒲洪을 토벌하게 하니, 포홍이 석호에게 항복하고서 석호에게 관중關中의 호걸豪傑과 저족氐族, 강족羌族을 옮겨서 동방東方에 채우도록 설득하자, 석호는 그의 말을 따라서 10여만 호를 관동關東으로 옮겼다.
포홍을 용양장군龍驤將軍유민도독流民都督으로 삼아서 방두枋頭에注+② 枋(말뚝)은 音이 方이다. ≪水經≫에 “淇水는 黎陽에 이르러 황하로 들어가니, 遮害亭 서쪽 18리 지점에 있다. 漢나라 建安 9년(204)에 魏 武帝가 水口 아래에 큰 나무 말뚝으로 제방을 만들어 淇水를 막아서 동쪽으로 白溝로 들어가게 해서 漕運을 통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당시 사람들이 이곳을 가리켜 枋頭라고 불렀다.” 하였다. 주둔하게 하고, 요익중姚弋仲을 분무장군奮武將軍서강대도독西羌大都督으로 삼아서 섭두灄頭(섭두)에注+③ 灄은 日涉의 切이니, 灄頭는 淸河에 있다. ≪水經註≫에 “淸河는 廣川縣 동쪽을 지나가는데 물가에 羌族의 보루가 있으니, 姚氏가 옛날에 살던 곳이다.” 하였다. 주둔하게 하였다.
[강綱] 모용황慕容皝의 형 모용한慕容翰이 단씨段氏에게로 달아나고, 아우 모용인慕容仁은 요동遼東를 점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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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모용황慕容皝이 처음 즉위하여 법을 준엄하게 적용하니, 나라 사람들이 불안해하였다. 주부主簿황보진皇甫真이 굳이 간諫하였으나 모용황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모용황의 서형庶兄모용한慕容翰과 동모제同母弟인 모용인慕容仁이 모두 용맹과 지략이 있고 여러 번 전공戰功을 세우고 군사軍士들의 마음을 얻어 모용외慕容廆에게 총애를 받으니, 모용황은 이들을 시기하였다.
모용한이 이에 자기 아들과 함께 단씨段氏에게로 달아났는데, 단료段遼는 평소 그의 재능을 들어서 알고 있었으므로 몹시 애지중지하였다.
모용인이 평곽平郭을注+① ≪漢書≫ 〈地理志〉에 의하면 平郭縣은 遼東郡에 속하였는데, 晉나라 때에 없앴다. 晉나라 東夷校尉가 襄平을 치소로 하였는데, 崔毖가 패하자 慕容廆가 慕容仁으로 요동에 진주하게 하니, 平郭을 치소로 하였다. 점거하고 있었는데, 모용황이 군대를 보내어 토벌하다가 대패하였다. 이에 모용인이 요동遼東 지역을 모두 소유하니, 단료段遼와 선비鮮卑의 여러 부족이 모두 그에게 호응하였다.
[목目] 장준張駿이 성成나라(성한成漢)에서 길을 빌려 건강建康에 표문을 전하고자 하였는데, 성주成主이웅李雄이 허락하지 않았다.
장준이 마침내 치중종사治中從事인 장순張淳을 보내어 성成나라에 번신藩臣을 칭해서 길을 빌리려 하니, 이웅이 거짓으로 허락하고는 장차 도적을 보내 장순의 배를 전복시켜 동협東峽에 빠뜨려서 죽이려 하였다.注+① 覆은 芳目의 切이니, 전복함이다. 三峽은 成都의 동쪽에 있으므로 東峽이라 한 것이다. 혹자가 이 사실을 장순에게 고告하자, 장순이 이웅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과군寡君(장준張駿)이 소신小臣을 그동안 행적이 없던 지역으로 보내서 건강에 정성을 통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폐하께서 우리의 충의忠義를 가상히 여겨서 남의 아름다움을 잘 이루어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注+② 蜀나라가 涼州 사람들에게 길을 빌려주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그렇다면 蜀 지역에는 이전에 涼州 사람의 발자취가 없었던 것이다.
만약 신臣을 죽이려 하신다면 마땅히 도시에서 참수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크게 보이고서 말씀하기를 ‘양주涼州가 옛날 은덕을 잊지 못하여
에게注+③ 江左(東晉)는 琅邪王(司馬睿)으로부터 중흥하였으므로 琅邪라고 칭한 것이다. 사신을 통하였는데, 양주의 군주가 성스럽고 신하가 밝지만 이 일이 우리에게 발각되어 이자를 죽였다.’ 하소서.
이와 같이 하면 의로운 명성이 멀리 퍼져서 천하가 폐하의 위엄을 두려워하겠지만, 지금 도적을 보내서 강 가운데서 신臣을 죽이게 하신다면 위엄과 형벌이 드러나지 못할 것이니, 어떻게 천하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겠습니까.”
이웅이 크게 놀라며 말하기를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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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사예교위司隷校尉注+① 蜀(成漢)은 司隷校尉를 成都에 설치하였다.경건景騫이 이웅李雄에게 말하기를 “장순張淳은 장사壯士이니, 그를 이곳에 머물게 하소서.” 하자, 이웅이 말하기를 “장사가 어찌 기꺼이 이곳에 머물겠는가. 우선 경卿의 뜻으로 한번 시험해보라.” 하였다.
경건이 장순에게 이르기를 “경卿은 몸집이 비대한데 날씨가 더우니, 우선 낮은 관리를 보내고 잠시 머물면서 날씨가 시원해지기를 기다리라.”注+② 須는 기다림이다. 하자, 장순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아직 돌아오지 못하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는데도 떨쳐 구제할 수 없기 때문에, 신을 보내어 상도上都(건강建康)에注+③ 上都는 建康을 이른다. 정성을 통하게 하신 것입니다.
논해야 하는 일이 중대해서 낮은 관리가 능히 전달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낮은 관리가 해낼 수 있는 것이라면 나 또한 이곳에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비록 불타는 산과 끓는 바다라도 장차 달려가야 하는데, 어찌 추위와 더위를 꺼리겠습니까.”
이웅이 장순에게 이르기를 “귀주貴主(장준)의 영준英俊한 이름이 온 세상을 뒤덮고 또 지역이 험고하고 군대가 강한데, 어찌하여 황제를 칭해 한 지역에서 스스로 안락함을 즐기지 않는가.” 하자,
장순이 말하기를 “과군寡君은 조고祖考(장궤張軌) 이래로 대대로 충정忠貞을 돈독히 하여 원수의 치욕을 갚지 못했다 해서 창을 베고 날이 밝기를 기다리시니, 어찌 스스로 안락함을 즐길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웅이 매우 부끄러워하여 장순을 후하게 예우해서 보내니, 장순은 끝내 건강建康에 가서 사명使命을 완수하였다.
역주
역주1趙遣使來修好 詔焚其幣 :
“江東(東晉)의 政事 중에 다소 사람의 뜻을 흡족하게 하는 것은 이 한 번의 조처일 뿐이다. 그러므로 기뻐하여 쓴 것이다.[江東之政 差强人意 此一舉而已 故喜書之]” ≪書法≫ “晉나라가 江左에 나라를 세울 적에 몹시 쇠약하여 진작하는 기운이 조금도 없었다. 유독 石勒만이 사자를 보냈는데, 詔令을 내려서 그 폐백을 불태웠으니, 이 조처는 다소 사람의 뜻을 흡족하게 한다. 〈≪資治通鑑綱目≫에서〉 크게 써서 게시한 것은 이를 다행으로 여긴 것이다.[晉氏立國江左 奄奄略無振起之氣 獨至石勒遣使 乃能詔焚其幣 是舉差强人意 大書掲之 蓋幸之也]” ≪發明≫
역주2앞 수레 :
원문의 ‘前車’는 ‘前車之鑑’과 같은 말로, 지나간 실패를 훗날의 교훈으로 삼아야 함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역주3虚塟 :
죽은 장소와 시기를 알지 못하여 시신이 없이 빈 관으로 장사 지내는 것을 이른다.
역주4魏나라……세웠다 :
後漢 獻帝 建安 15년(210)에 曹操가 鄴城의 서북쪽에 銅雀臺를 지은 일을 가리킨 것으로 보이나, 확실하지 않다.
역주6張駿遣張淳 来上表 :
“‘遣使上表(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렸다.)’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의리를 인정한 것이다. 張氏(張寔)가 〈사자를 보내 표문을 올린〉 경우에는 일찍이 ‘遣使’라고만 쓰고 그 사람의 이름은 쓰지 않았는데, 여기서는 어찌하여 ‘張淳’이라고 썼는가. 장순을 인정한 것이다. 이때 장순이 蜀(成漢)을 거쳐서 〈東晉과〉 정성을 통하기를 구하여 험한 곳을 이리저리 다니며 반드시 군주의 명령을 전달하였으니, 어질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이름을 써서 인정하였고, 또 張駿에게도 ‘趙나라의 涼州牧’이라고 쓰지 않은 것이다.[書遣使上表 何 予義也 張氏嘗書遣使矣 不書其人 此則曷爲書張淳 予淳也 於是 淳自蜀求通 間關險阻 必達君命 可謂賢矣 故書予之 而駿不書趙涼州牧]” ≪書法≫
역주7琅邪(東晉) :
晉 元帝 司馬睿가 東晉을 세우기 전에 琅邪王이었다. 이에 東晉을 琅邪라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