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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4)

자치통감강목(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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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강목(1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五年이라
趙太寧元年이라
春正月 趙王虎稱皇帝하다
◑趙謫戍梁犢이어늘 虎遣兵擊斬之하다
趙主虎以卽位라하여 大赦호되 故東宮高力等萬餘人 謫戍涼州하여 行逹雍城하여 不在赦例注+石宣簡多力之士, 以衛東宮, 號曰高力, 置督將以領之. 雍城, 扶風雍縣城也.러라
高力督梁犢 因衆怨作亂하여 攻拔下辨하고 掠民斧하여 施一丈柯하여 攻戰若神하니 所向崩潰 長驅而東하니 比至長安 衆已十萬이러라
樂平王苞 盡鋭拒之러니 一戰而敗注+苞, 虎之子也.하다 遂趣洛陽이어늘 虎遣李農하여 統歩騎十萬討之러니 大敗하니
虎大懼하여 以燕王斌으로 爲大都督하여 統姚弋仲, 蒲洪等하여 討之하다
弋仲 將其衆八千餘人하고 至鄴하여 求見虎注+自灄頭至鄴.한대 虎病하여 未之見하고 引入賜食하니
弋仲 怒曰 主上 召我來擊賊하시니 當面授方略이니 我豈爲食來邪 且主上 不見我하시니 我何以知其存亡이리오 虎力疾見之한대 弋仲 讓虎曰
兒死하여 愁邪 何爲而病 兒幼時 不擇善人交之하여 使至於爲逆이러니 旣誅之하니 又何愁焉 且汝久病하고 所立兒幼하니 汝若不愈 天下必亂하리니
當先憂此 勿憂賊也하라 犢等 窮困思歸하여 相聚爲盗하니 何所能至리오 老羌 爲汝하여 一舉了之注+弋仲, 南安赤亭羌人也, 故自稱老羌. 了, 决也.하리라
弋仲 性狷直하여 人無貴賤 皆汝之하니 虎亦不之責하고 賜以鎧馬한대 弋仲曰 汝看老羌 堪破賊否아하고 乃被鎧하고 跨馬于庭中하고
因策馬南馳하여 不辭而出하다 遂與斌等으로 擊犢于滎陽하여 大破斬之注+武帝泰始二年, 分河南, 置滎陽郡.하니
虎命弋仲하여 劍履上殿하고 入朝不趨하며 進封平西郡公하고 以蒲洪爲雍州刺史都督秦雍하고 封略陽郡公하다
趙主虎病甚하니 以彭城王遵鎮關右하고 燕王斌爲丞相하고 張豺爲鎭衞大將軍하고 竝受遺詔輔政注+劉聦, 置十六大將軍, 鎭衛其一也. 石虎置鎭衛將軍, 在車騎將軍上, 今以張豺爲鎭衛大將軍, 崇其號也.하다
劉后恐斌不利於太子하여 矯詔免歸第하니 自幽州 至鄴이어늘 敕朝堂受拜하고 遣之하니 涕泣而去러라
虎臨西閤하니 龍騰中郎三百餘人 列拜於前하여 曰 聖體不安하시니 宜令燕王入宿衞하여 典兵馬注+西閤, 太武殿之西閤也.니이다
虎曰 燕王 不在內邪 召以來하라 左右言王酒病하여 不能入이니이다
虎曰 促持輦逆之하라 當付璽綬라하되 亦竟無行者注+左右皆爲劉后母子, 故竟無行者.러니
尋惛眩而入하니 豺遂矯詔殺斌注+惛, 迷忘也. 眩, 目視亂也.하다 虎卒 世卽位하고 劉氏臨朝稱制하다
至河內하여 聞喪하다 姚弋仲, 蒲洪及征虜將軍石閔等 討梁犢還이라가 遇遵於李城注+續漢志 “河內平縣, 有李城.”하여 共説遵曰
殿下長且賢하고 先帝亦有意以爲嗣注+謂虎欲從張擧之言也.러니 末年惛惑하여 爲張豺所誤하니
今若聲豺之罪하고 鼓行而討之하시면 其誰不開門倒戈하여 以迎殿下者注+鼓行, 謂擊鼓而行, 無所畏懼也.리오하니 從之하여 遂還趣鄴한대 耆舊羯士 皆出迎之注+耆, 長也, 老也. 羯士, 石氏之種類也.하다
豺惶怖하여 亦出迎이어늘 命執之하고 擐甲曜兵하여 入升前殿하여 擗踊盡哀注+前殿, 太武前殿也.하다 斬豺于市하고 夷其三族하고
假劉氏令하여 以遵嗣位하고 封世爲譙王이러니 廢劉氏爲太妃라가 尋皆殺之하고 以石閔爲都督中外諸軍事하다
於是 鄴中 暴風拔樹하고 震雷하고 雨雹 大如盂升注+如盂及升也.이러라
太武, 暉華殿하여 及諸門觀閣 蕩然無餘하고 金石皆盡하니 火月餘乃滅하다
沛王沖 鎭薊러니 起兵討遵注+沖, 蓋代遵鎭薊.하니 使閔等討之한대 沖兵 大敗 獲沖殺之하고 阬其士卒三萬하다
蒲洪 遣使來降하다
石閔 言於趙主遵曰 蒲洪 人傑也 今鎭關中이면 恐秦, 雍之地非復國家之有 宜改圖之니이다
從之하여 罷洪都督하니하여 歸枋頭하고 遣使來降하다
燕以慕容恪爲輔國將軍하다
慕容霸上書於燕王儁曰 石虎窮凶極暴하니 天之所棄 餘燼 僅存하여 自相魚肉하니이다
今中國倒懸하여 企望仁恤注+企, 音起, 謂擧足而竦身.하니 若大軍一振이면 勢必投戈하리이다
儁以新遭大喪이라하여 弗許注+以去年皝薨也.한대 霸曰 難得而易失者 時也
萬一石氏復興이어나 或有英豪據其成資注+謂中原或有英雄乘亂而取趙, 據有其已成之資也.하면 豈惟失此大利리오 亦恐更爲後患이니이다
猶豫未决이러니 將軍封奕, 慕輿根曰 用兵之道 敵强則用智하고 敵弱則用勢니이다
今中國之民 困於石氏之亂하여 咸思易主하여 以救湯火之急하니 此千載一時 不可失也니이다
自武宣王以來 招賢養民하고 務農訓兵 正俟今日注+武宣王, 儁祖廆也.이니 若復顧慮 豈天意未欲使海內平定邪잇가 將大王不欲取天下也잇가
從之하여 以慕容恪, 慕容評, 陽騖 爲三輔將軍하고 霸爲前鋒都督注+評, 廆之子. 騖, 耽之子也. 恪爲輔國將軍, 評爲輔弼將軍, 騖爲輔義將軍, 謂之三輔. 輔弼․輔義二將軍號, 皆一時創置.하고 選精兵二十餘萬하여 講武戒嚴하여 爲進取之計러라
桓溫 聞趙亂하고 出屯安陸하고 遣諸將하여 經營北方이러니 趙揚州刺史王浹 舉壽春降이어늘 西中郎將陳逵 進據壽春하다
征北大將軍褚裒 上表請伐趙注+裒時鎭京口.하고 即日戒嚴하여 直指泗口하니
朝議以裒事任貴重하여 不宜深入하니 宜先遣偏師注+裒, 太后之父, 又當方面, 故云事任貴重.라한대
裒奏言호되 前已遣前鋒王頥之等하여 徑造彭城하고 後遣督護麋嶷하여 進據下邳注+麋, 武悲切, 姓也.하니 今宜速發하여 以成聲勢니이다
乃加裒征討大都督하다 裒帥衆三萬하고 徑赴彭城하니 北方士民降附者 日以千計러라
朝野皆以中原 指期可復이라하되 蔡謨獨謂所親曰 胡滅 誠爲大慶이나 然恐更貽朝廷之憂로라
其人曰 何謂也 謨曰 夫能順天乗時하여 濟群生於艱難者 非上聖與英雄이면 不能爲也
其餘則莫若度德量力이니 觀今日之事컨대 殆非時賢所及이니 必將經營分表하여 疲民以逞注+言必不能長驅以定中原, 勢須隨所得之地, 分列屯戍, 盡境而守, 疲民以逞其志也. 一說 “分, 扶問切, 言人之才具, 各有分量, 收復中原, 非當時人才所能辦也. 經之營之, 過於其分量之外, 則不能成功, 丁壯苦征戰, 老弱困轉輸, 疲民以逞而不能濟也.”하리니
既而材略疎短하여 不能副心하고 財殫力竭하여 智勇俱困이면 安得不憂及朝廷乎
魯郡民五百餘家 起兵附晉하여 求援於裒어늘 裒遣部將王龕하여 將鋭卒迎之러니 與趙將李農으로 戰於代陂하여 敗没不還하다
裒退屯廣陵하고 陳逵亦焚壽春積聚하고 毁城遁還하다 裒還鎭京口어늘 解征討都督하다
河北 大亂하여 遺民二十餘萬口 渡河하여 欲來歸附러니 裒已還하니 威勢不接이라 皆不能自拔하여 死亡略盡이러라
九月 張重華自稱涼王하다
重華屢以錢帛賜左右하고 又喜博奕하여 頗廢政事 索振 諫曰
先王 勤儉以實府庫 正以讐恥未雪하여 志平海內故也니이다 今畜積已虚로되 而宼讐尙在하니 豈可輕有耗散以與無功之人乎잇가
漢光武躬親萬機하여 章奏詣闕 報不終日이라 能隆中興之業이러니
今章奏停滯하여 下情 不得上通하고 沈寃 困於囹圄하니 殆非明主之事也니이다 重華謝之하다
趙樂平王苞 謀帥關右之衆하여 攻鄴이러니 苞貪而無謀하니 雍州豪傑 知其無成하고 竝遣使告晉한대
梁州刺史司馬勲 帥衆赴之注+勳, 宣帝弟子濟南王遂之曾孫.하여 出駱口하여 破趙戍하고 壁于懸鉤하니 去長安二百里注+懸鉤, 城名, 屬京兆, 在長安縣西二百里.
三輔豪傑 多殺守令以應之러라
趙主遵 遣王朗하여 帥精騎二萬하여 以拒勲爲名하고 因劫苞送鄴하니 兵少하여 不敢進하여 拔宛城하고 殺趙南陽太守而還하다
趙主遵之發李城也 謂閔曰 努力하라 事成이면 以爾爲太子호리라하더니 既而 立太子衍注+衍, 故燕王斌子.하다
素驍勇하여 屢立戰功이라 既摠內外兵權 乃撫循殿中將士하니 中書令孟準 勸遵誅之하다
十一月 召義陽王鑑等하여 入議於鄭太后前注+鑑, 虎之子也.하니 太后不可
出告閔한대 遂劫李農하여 使將軍蘇彦, 周成으로 帥甲士하고 執遵及太子衍하여 殺之하고 推鑑即位하니
以閔爲大將軍하고 李農爲大司馬하여 并録尙書事하다
秦, 雍流民 立蒲洪爲主하다
秦, 雍流民 相帥西歸할새 路由枋頭하니 共推蒲洪爲主하여 衆至十餘萬注+成帝咸和四年, 石虎破殺劉胤, 徙氐․羌十五萬落于司․冀州. 八年, 破石生, 徙秦․雍民及氐․羌十餘萬戶于關東, 今因趙亂, 故相帥西歸.이라 懼其逼하여 欲以計遣之하여 乃以洪爲雍州牧하다
會官屬하여 議應受與不注+不, 讀曰否.하니 主簿程朴 請且與趙連和하여 分境而治한대 怒曰 吾不堪爲天子耶아하고 引朴斬之하다
十二月 徐兗都督褚裒卒하니 以荀羨監徐兗軍事하다
裒還至京口하여 聞哭聲甚多하고 以問左右한대 對曰 皆代陂死者之家也니이다 裒慙憤發疾하여커늘 以羨代之注+羨, 蕤之弟也.하다
羨年二十八이니 中興方伯 未有如羨之少者러라
趙主鑑 使樂平王苞 夜攻石閔, 李農이러니 不克하니하여 偽若不知者하여 夜殺苞하다
將軍孫伏都, 劉銖等 結羯士三千하고 欲誅閔, 農이러니 鑑曰 卿 好爲官陳力하고 勿慮無報也注+爲, 去聲. 魏․晉以下, 率謂天子爲官, 天子亦時自言之.하라
於是 伏都等 攻閔, 農하여 又不克하니 閔, 農 攻斬伏都等하다 以兵守鑑於御龍觀하여 懸食給之하고 下令城中曰
孫, 劉搆逆 支黨伏誅하니 良善 一無預也 今日已後 與官同心者하고 不同者 各任所之라하고 敕城門不禁하다
於是 趙人 百里內悉入城하고 胡, 羯 去者填門注+趙人, 謂中國人也.이러라
知胡之不爲己用하고 遂帥趙人하여 誅胡, 羯하여 無貴賤, 男女, 少長 皆斬之하니 死者二十餘萬이라
其屯戍四方者 皆命趙人爲將帥者하여 誅之하니 或高鼻多鬚하여 濫死者半注+高鼻多鬚, 其狀似羯․胡, 故亦見殺.이러라
遣使如涼州하다
約張重華하여 共擊趙하다


[] 나라(동진東晉) 효종孝宗 목황제穆皇帝 영화永和 5년이다.
[] 나라(후조後趙) 태조太祖 석호石虎 태령太寧 원년이다.
[] 봄 정월에 조왕趙王 석호石虎가 황제를 칭하였다.
[] 나라(후조後趙)에서 양주涼州로 귀양 보내 자리 살게 한 양독梁犢이 배반하자, 석호石虎가 군대를 보내어 공격하여 참수하였다.
[] 조주趙主 석호石虎는 자신이 황제에 즉위하였다고 하여 대사면령大赦免令을 내렸다. 예전 동궁東宮에 있던 고력高力 등 만여 명이 양주涼州로 귀양 가서 자리를 살러 가다가 옹성雍城에 도착하여 〈그 소식을 들었는데〉 사면의 범위에 들지 못하였다.注+① 石宣이 勇力이 뛰어난 군사를 선발하여 東宮을 호위하게 하고 高力이라 이름하고는 여기에 을 두어 감독하게 하였다. 雍城은 扶風 雍縣의 城이다.
고력독高力督양독梁犢이 여러 무리의 원한을 이용하여 난을 일으켜 하변下辨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민가民家의 도끼를 탈취하여 한 길이의 자루를 달아 무기를 만들어서 귀신처럼 공격하고 싸우니, 향하는 곳마다 붕궤崩潰하였다. 승승장구하여 동쪽으로 진출하니, 장안長安에 이르렀을 때 병력이 이미 10만이었다.
낙평왕樂平王 석포石苞注+② 石苞는 石虎의 아들이다. 정예병을 모두 인솔하고 양독을 막았는데, 단 한 번 싸워 패전하였다. 양독이 마침내 낙양으로 달려가자, 석호는 이농李農을 보내어 보병과 기병 10만을 거느리고 양독을 토벌하게 하였는데, 대패하였다.
석호가 크게 두려워하여 연왕燕王 석빈石斌대도독大都督으로 삼아 요익중姚弋仲포홍蒲洪 등을 거느리고 가서 양독을 토벌하게 하였다.
[] 요익중姚弋仲이 자신의 병력 8천여 명을 거느리고 업성鄴城에 이르러注+① 〈“弋仲……至鄴”은〉 姚弋仲이 灄頭에서 鄴城에 이른 것이다. 석호石虎를 만나보려 하였다. 석호가 병이 들어 그를 만나보지 못하고 인도하여 들어오게 하여 음식을 하사하니,
요익중이 노하여 말하기를 “주상主上이 나를 불러 와서 적을 공격하게 하셨으니, 대면하여 방략方略을 지시해주어야 마땅하다. 내가 어찌 음식을 먹으려고 왔겠는가. 또 주상이 나를 만나보지 않으시니, 내가 어떻게 주상의 생존 여부를 알겠는가.” 하였다. 석호가 병을 무릅쓰고 만나보자, 요익중이 석호를 꾸짖어 말하였다.
“자식(석선石宣)이 죽어서 근심해서인가. 어찌하여 병이 들었는가. 이미 주벌하였으니, 또 무엇을 근심하는가. 또 네가 오랫동안 병들어 있고 태자로 세운 자식(석세石世)이 어리니, 네가 만약 병이 낫지 않으면 천하가 반드시 혼란해질 것이다.
응당 먼저 이것을 근심할 것이요 적을 근심하지 말라. 양독梁犢 등이 곤궁하여 고향으로 돌아올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서로 모여 도적질을 하는 것이니, 능히 무슨 일을 하겠는가. 이 늙은 강인羌人이 너를 위해 일거一擧에 해결하겠다.”注+② 姚弋仲은 南安 赤亭 羌人이므로 스스로 ‘老羌’이라 칭한 것이다. 了는 해결함이다.
[] 요익중姚弋仲은 성질이 고집스럽고 정직하여 귀천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너라고 불렀다. 석호石虎 또한 그를 책망하지 못하고 투구와 말을 하사하자, 요익중이 말하기를 “너는 이 늙은 강인羌人이 적을 깨트릴 수 있는지를 보겠느냐.” 하고는 마침내 갑옷을 입고 뜰 안에서 말을 탔다.
그런 다음 말을 채찍질하여 남쪽으로 달려갔는데, 하직인사를 하지 않고 출동하였다. 마침내 석빈石斌 등과 연합하여 양독梁犢형양滎陽에서注+① 晉 武帝 泰始 2년(266)에 河南을 나누어 滎陽郡을 설치하였다. 공격하여 대파하고 참수하였다.
석호는 요익중에게 명하여 검을 차고 신을 신고 궁전으로 올라오게 하였고, 조회하러 들어올 때 종종걸음을 걷지 않게 하였으며, 승진시켜 평서군공平西郡公에 봉하였다. 포홍蒲洪옹주자사雍州刺史 도독진주都督秦州옹주제군사雍州諸軍事로 삼고 약양군공略陽郡公에 봉하였다.
[] 여름 4월에 조주趙主 석호石虎하자, 태자 석세石世가 즉위하였는데, 그의 형 석준石遵이 석세와 태후太后 유씨劉氏를 시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였다.
[] 조주趙主 석호石虎가 병이 심하니, 팽성왕彭城王 석준石遵관서關西에 진주시키고 연왕燕王 석빈石斌승상丞相으로 삼고 장시張豺진위대장군鎭衞大將軍으로 삼아 함께 유조遺詔를 받아 정사를 보필하게 하였다.注+① 劉聦은 을 두었으니, 鎭衞大將軍이 그중 하나이다. 石虎는 鎭衛將軍을 두었는데 車騎將軍 위에 있었다. 지금 張豺를 鎭衛大將軍으로 삼은 것은 그의 칭호를 높인 것이다.
[] 유후劉后석빈石斌이 태자에게 불리할까 염려하여 조령을 사칭하여 석빈을 파면해서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석준石遵유주幽州에서 업성鄴城에 이르자, 칙령勅令을 내려 조당朝堂에서 을 받게 하고 그대로 돌려보내니, 석준이 눈물을 흘리고 떠나갔다.
석호石虎서합西閤注+① 西閤은 太武殿의 西閤이다. 임하니, 용등중랑龍騰中郎 300여 명이 앞에 나열하여 절하며 말하기를 “성상의 체후가 평안하지 못하시니, 마땅히 연왕燕王으로 하여금 들어와 숙위宿衛해서 군사와 말을 주관하게 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석호가 말하기를 “연왕이 궁내宮內에 있지 않은가. 빨리 불러서 오게 하라.” 하니, 좌우에서 말하기를 “연왕이 술병이 나서 들어오지 못합니다.” 하였다.
석호가 말하기를 “빨리 을 가지고 가서 그를 맞이해오라. 내가 마땅히 그에게 옥새와 인끈을 맡기겠다.” 하였으나, 또한 끝내 가는 자가 없었다.注+② 좌우가 모두 劉后 母子를 위했기 때문에 끝내 〈石斌을 맞이하러〉 간 자가 없었다.
얼마 뒤에 석호가 정신이 혼몽하여注+③ 惛은 혼미함이다. 眩은 봄이 眩亂한 것이다. 내실로 들어가니, 장시張豺가 마침내 조령을 사칭詐稱하여 석빈을 죽였다. 석호가 하자, 석세石世가 즉위하고 유씨劉氏가 조정에 임하여 칭제稱制하였다.
[] 석준石遵하내河內에 이르러 이 났다는 말을 들었다. 요익중姚弋仲포홍蒲洪정로장군征虜將軍 석민石閔 등이 양독梁犢을 토벌하고 돌아오다가 석준을 이성李城에서注+① ≪後漢書≫ 〈郡國志〉에 “河內 平睾縣(평고현)에 李城이 있다.” 하였다. 만나 함께 석준을 설득하기를
전하殿下는 나이가 많은 데다 또 어질어서 선제先帝(석호石虎)께서도 또한 후사로 삼을 의향이 있으셨는데注+② 〈“先帝亦有意以爲嗣”는〉 石虎가 을 따르고자 했음을 이른다. 말년에 정신이 혼란하고 미혹되어서 장시張豺에게 오도誤導되었습니다.
이제 만약 장시의 죄를 성토하고 북을 치며 출동하여注+③ “鼓行”은 북을 치며 행진하여 두려워하는 바가 없음을 이른다. 토벌하시면 그 누가 성문을 열고 창을 되돌려서 전하를 맞이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석준이 그들의 말을 따라 마침내 돌아와 업성鄴城으로 달려가니, 나이 많은 갈족羯族의 군사들이注+④ 耆는 나이가 많음이고 늙음이다. 羯族의 군사는 石氏의 種類이다. 모두 나와 환영하였다.
장시가 두려워하여 또한 나와 맞이하자, 석준이 명하여 그를 포박하게 하고는 갑옷을 입고 병장기를 번뜩이면서 성으로 들어가 전전前殿注+⑤ 前殿은 太武殿의 前殿이다. 올라서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며 애통함을 표하였다. 장시를 시장에서 참수하고 그의 삼족을 멸하였다.
그리고 유씨劉氏의 명령을 빌려서 자신으로 지위를 잇게 하고 석세石世초왕譙王으로 봉하였는데, 유씨를 폐하여 태비太妃로 삼았다가 얼마 후 석세와 함께 모두 죽이고 석민石閔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諸軍事로 삼았다.
[] 이때 업성鄴城 안에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히고 우레가 치며 사발과 되만큼 큰注+① 〈“大如盂升”은〉 크기가 사발과 되와 같은 것이다. 우박이 떨어졌다.
태무전太武殿휘화전暉華殿에 화재가 나서 여러 관각觀閣이 남김없이 다 불타고 금과 돌도 모두 불타 없어졌는데, 불은 한 달이 지난 뒤에야 꺼졌다.
이때 패왕沛王 석충石沖 땅에 진주하였는데 군대를 일으켜 석준石遵을 토벌하였다.注+② 石沖은 이때 石遵을 대신해서 薊 땅에 진주한 듯하다. 석준이 석민石閔 등으로 하여금 토벌하게 하자, 석충의 군대가 대패하였다. 석충을 사로잡아 죽이고 그의 사졸士卒 3만 명을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 포홍蒲洪이 사신을 보내어 〈동진東晉에〉 와서 항복하였다.
[] 석민石閔조주趙主 석준石遵에게 말하기를 “포홍蒲洪인걸人傑입니다. 지금 관중關中에 진주해 있으면 진주秦州옹주雍州의 땅이 더 이상 국가의 소유가 아닐까 염려되니, 마땅히 다른 방법을 세워 대처해야 합니다.” 하였다.
석준이 그의 말을 따라 포홍의 도독직都督職을 파하니, 포홍이 노하여 방두枋頭로 돌아간 뒤에 사신을 나라(동진東晉)로 보내와 항복하였다.
[] 나라(전연前燕)가 모용각慕容恪보국장군輔國將軍으로 삼았다.
[] 모용패慕容霸연왕燕王 모용준慕容儁에게 상서上書하여 “석호石虎가 지극히 흉악하고 포악하니, 하늘이 버린 바입니다. 남은 불씨가 아직 있어서 골육骨肉끼리 서로 해치고 있습니다.
지금 중국의 백성들이 몹시 곤궁하여 인자하게 구휼해주기를 바라고 있으니,注+① 企는 음이 起이니, 발을 들고 몸을 솟구침을 이른다. 만약 대군이 한 번 떨치고 일어나 출동하면 형편상 적이 틀림없이 창을 버리고 투항할 것입니다.” 하였다.
모용준이 막 큰 을 만났다 하여注+② 〈“新遭大喪”은〉 지난해에 慕容皝이 薨하였으므로 말한 것이다. 허락하지 않자, 모용패가 말하기를 “얻기는 어려워도 잃기는 쉬운 것이 시기입니다.
만일 석씨石氏부흥復興하거나 또 다른 영웅호걸이 그들이 이루어놓은 기반을 점거한다면注+③ 〈“或有英豪據其成資”는〉 中原에 혹 영웅이 난을 틈타 趙나라를 점령해서 趙나라가 이미 이루어놓은 기반을 占有함을 이른다. 어찌 다만 큰 이로움을 잃을 뿐이겠습니까. 또한 다시 후환이 될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慕容霸上書伐趙慕容霸上書伐趙
[] 모용준慕容儁이 유예하고 결정하지 못하였는데, 장군 봉혁封奕모여근慕輿根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용병하는 방도는 적이 강하면 지혜를 쓰고 적이 약하면 형세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지금 중국의 백성이 석씨石氏의 난리에 곤궁하여 모두 군주가 바뀌어 끓는 물속과 타는 불속의 위급함에서 구제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것은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이니 놓쳐서는 안 됩니다.
무선왕武宣王注+① 武宣王은 慕容儁의 할아버지인 慕容廆이다. 이래로 현자賢者를 초빙하고 백성을 기르며 농사를 힘쓰고 군사를 훈련시킨 것은 바로 오늘을 기다린 것입니다. 만일 다시 앞뒤를 재고 염려한다면, 이것은 어찌 하늘의 뜻이 해내海內를 평정하고자 하지 않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니면 대왕이 천하를 취하시고자 하지 않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모용준이 그의 말을 따라 모용각慕容恪, 모용평慕容評, 양무陽騖삼보장군三輔將軍으로 삼고注+② 慕容評은 慕容廆의 아들이다. 陽騖는 陽耽의 아들이다. 慕容恪은 輔國將軍이 되고 모용평은 輔弼將軍이 되고 양무는 輔義將軍이 되니, 이들을 일러 三輔라 하였다. 輔弼과 輔義 두 장군의 칭호는 모두 일시적으로 새로이 만든 것이다. 모용패慕容霸전봉도독前鋒都督으로 삼고 정예병 20여만 명을 선발하여 무예를 익히고 경계警戒를 삼엄히 하여 진취進取할 계책으로 삼았다.
[] 가을 7월에 정토도독征討都督 저부褚裒(저부)가 군대를 거느리고 나라(후조後趙)를 정벌하였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 환온桓溫나라가 혼란하다는 말을 듣고 나가 안륙安陸에 주둔하고 여러 장수들을 보내어 북방을 경영하였는데, 나라 양주자사揚州刺史 왕협王浹수춘壽春을 들어 항복하자, 서중랑장西中郎將 진규陳逵가 전진하여 수춘을 점령하였다.
정북대장군征北大將軍 저부褚裒가 표문을 올려 나라를 공격할 것을 청하고注+① 褚裒가 이때 京口에 주둔하고 있었다. 당일에 곧바로 계엄하여 사수泗水 어귀를 향하여 출동하였다.
조정의 의논은 저부가 맡은 직임이 귀중하여注+② 褚裒는 태후의 아버지이고, 또 한 方面을 담당하였으므로 맡은 직무가 귀중하다 한 것이다. 적국에 깊이 쳐들어가서는 안 되니 마땅히 먼저 한 군대를 보내야 한다고 하였으나,
저부가 상주上奏하여 말하기를 “예전에 이미 전봉前鋒 왕이지王頥之 등을 보내어 곧바로 팽성彭城으로 나아가게 하고 뒤에 독호督護 미억麋嶷(미억)을注+③ 麋는 武悲의 切이니, 姓이다. 보내어 나가 하비下邳를 점거하게 하였으니, 이제 마땅히 빨리 출발해서 성세聲勢를 이루어야 합니다.” 하였다.
이에 저부에게 정토대도독征討大都督의 직위를 더해주었다. 저부가 3만의 병력을 인솔하여 곧바로 팽성彭城으로 달려가니, 북방의 선비와 백성들 중에 항복하고 따르는 자가 하루에도 천 명에 이르렀다.
[] 조야朝野에서는 모두 가까운 시일 안에 중원을 회복할 수 있다고 하였으나, 채모蔡謨는 홀로 친한 사람에게 이르기를 “오랑캐가 멸망하는 것이 진실로 큰 경사이나, 다시 조정에 우환을 끼칠까 두렵다.” 하였다.
그 사람이 묻기를 “어째서인가?” 하자, 채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천도天道에 순응하고 천시天時를 틈타서 어려움에 처한 여러 백성을 구제하는 것은 지성至聖영웅英雄이 아니면 하지 못한다.
그 나머지 사람들은 자신의 덕과 힘을 헤아려 대처하는 것만 못하니, 오늘날의 사세事勢를 살펴보건대 아마도 지금의 현자賢者들이 미칠 바가 아닌 듯하다. 반드시 장차 병력을 분산하여 제각기 전쟁을 해서 백성들을 피곤하게 하여注+① 〈“必將經營分表”는〉 반드시 승승장구하여 중원을 평정하지 못하고, 형편상 모름지기 점령한 땅에 병력을 나누어 주둔시켜 국경을 전부 지키게 하여 백성들을 피폐하게 해서 자기의 뜻을 펴려고 함을 말한 것이다. 일설에 “分(분량)은 扶問의 切이니, 사람의 재주는 각기 분량이 있어서 중원을 수복함은 당시 인재가 능히 감당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자신의 분량을 초과하여 경영하면 성공하지 못하여 장정들은 전쟁에 괴로워하고 노약자들은 군량수송에 곤궁해할 것이다. 그리하여 백성을 피로하게 해서 자신의 뜻을 펴려고 하면 공을 이룰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자기의 뜻을 펴려고 할 것이다.
이윽고 재주와 지략이 소략하고 부족해서 자기의 뜻에 부응하지 못하고, 재물과 힘이 고갈되어 지혜와 용맹이 모두 곤궁하게 되면 어찌 우환이 조정에 미치지 않겠는가.
[] 노군魯郡의 백성 5백여 가호가 군대를 일으켜 나라(동진東晉)에 붙어서 저부褚裒에게 구원을 청하자, 저부가 부장部將 왕감王龕(왕감)을 보내어 정예병을 거느리고 가서 맞이하게 하였는데, 나라 장수 이농李農대피代陂에서 싸우다가 패하여 전몰하고 돌아오지 못하였다.
저부는 후퇴하여 광릉廣陵에 주둔하였고 진규陳逵수춘壽春에 쌓아놓은 곡식과 물자를 불태우고 성을 허물고 도망하여 돌아왔다. 저부가 돌아와 경구京口에 진주하자, 정토도독征討都督을 해임하였다.
이때 하북河北 지방이 크게 혼란하여 유민 20여만 명이 황하를 건너 나라로 와서 귀부歸附하고자 하였다. 마침 저부가 이미 돌아오니, 위세威勢가 이어지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모두 스스로 구제하지 못하는 지경에 빠져 거의 다 사망하였다.
[] 9월에 장중화張重華가 스스로 양왕涼王을 칭하였다.
[] 장중화張重華가 여러 번 돈과 비단을 좌우의 가까운 사람들에게 하사하고 또 장기 두고 바둑 두기를 좋아하여 정사를 거의 폐하였다. 삭진索振(삭진)이 하기를
선왕先王이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부고府庫를 채움은 바로 원수의 치욕을 설욕하지 못해서 해내海內를 평정하려는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축이 이미 고갈되었는데 원수가 그대로 살아 있으니, 어찌 가볍게 소모하고 흩어서 이 없는 사람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
나라 광무제光武帝는 몸소 만기萬機를 다스려서 신하들의 장주章奏가 대궐로 들어오면 하루가 지나기 전에 답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능히 중흥中興의 업적을 이루었는데,
지금 장주가 정체되어서 아랫사람들의 마음이 위로 통하지 못하고, 침체된 억울한 자들이 곤궁한 감옥살이를 하고 있으니, 참으로 명주明主의 일이 아닐 듯합니다. 이에 장중화가 삭진에게 사례謝禮하였다.
[] 양주자사梁州刺史 사마훈司馬勲나라(후조後趙)를 정벌하여 완성宛城을 함락하였다.
[] 나라 낙평왕樂平王 석포石苞관서關西의 무리를 거느리고서 업성鄴城을 공격할 것을 모의하였다. 석포는 탐욕스럽고 지모가 없으니, 옹주雍州의 호걸들이 그가 성공하지 못할 줄을 알고 모두 사자를 보내어 나라(동진東晉)에 고하였다.
양주자사梁州刺史 사마훈司馬勲注+① 司馬勳은 宣帝의 아우의 아들인 濟南王 司馬遂의 증손이다. 병력을 이끌고 달려가서 낙구駱口로 진출하여 조나라의 수비하는 군대를 격파하고 현구懸鉤注+② 懸鉤는 城의 이름이다. 京兆에 속하였으니, 長安縣 서쪽 200리 지점에 있었다. 성벽城壁을 쌓으니, 장안長安과의 거리가 200리였다.
삼보三輔 지방의 많은 호걸들이 수령을 죽이고 사마훈에게 호응하였다.
조주趙主 석준石遵왕낭王朗을 보내어 정예 기병 2만을 거느려 사마훈을 막는다는 것으로 명분을 삼고는 이로 인하여 석포를 겁박하여 업성으로 보내니, 사마훈은 병력이 적어서 감히 전진하지 못하여 완성宛城을 함락하고 나라 남양태수南陽太守를 죽이고 돌아왔다.
[] 겨울 11월에 나라(후조後趙) 석감石鑑이 그 군주 석준石遵을 시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였다.
[] 처음에 조주趙主 석준石遵이성李城으로 출발할 적에 석민石閔에게 이르기를 “그대는 노력하라. 일이 성공하면 그대를 태자太子로 삼겠다.” 하였는데, 이윽고 석준은 태자 석연石衍注+① 石衍은 故 燕王 石斌의 아들이다. 세웠다.
석민은 평소 날래고 용감하여 여러 번 전공을 세웠다. 이미 내외의 병권을 장악하자, 이에 궁전 안에 있는 장병들을 어루만지니, 중서령中書令 맹준孟準이 석준에게 석민을 죽일 것을 권하였다.
[] 11월에 석준石遵의양왕義陽王 석감石鑑注+① 石鑑은 石虎의 아들이다. 등을 불러 들어와 정태후鄭太后 앞에서 의논하게 하니, 태후가 허락하지 않았다.
석감이 나가서 석민石閔에게 이 사실을 통고하자, 석민이 마침내 이농李農을 협박하여 장군 소언蘇彦주성周成으로 하여금 갑사甲士를 인솔하고 석준石遵과 태자 석연石衍을 사로잡아 죽이고 석감을 추대하여 즉위하게 하니,
석감이 석민을 대장군大將軍으로 삼고 이농을 대사마大司馬로 삼아 녹상서사録尙書事를 겸하게 하였다.
[] 진주秦州옹주雍州 지방의 유민들이 포홍蒲洪을 세워 군주로 삼았다.
[] 진주秦州옹주雍州의 유민들이 서로 거느리고 서쪽으로 돌아갈 적에 그 길이 방두枋頭를 경유하니, 포홍蒲洪을 함께 추대하여 군주로 삼아서 병력이 10여만에 이르렀다.注+① 晉 成帝 咸和 4년(329)에 石虎가 劉胤을 격파하여 죽이고 氐族과 羌族 15만 부락을 司州와 冀州로 옮겼으며, 8년(333)에 石生을 격파하고 秦州와 雍州의 백성과 저족, 강족 10여만 호를 關東으로 옮겼는데, 지금 趙나라의 난리로 인하여 서로 거느리고 서쪽으로 돌아온 것이다. 석감石鑑은 포홍의 핍박을 두려워하여 계책을 써서 그를 〈먼 곳으로〉 보내려고 하여 마침내 포홍을 옹주목雍州牧으로 삼았다.
포홍이 관속들을 모아놓고서 옹주목을 받아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를注+② 不는 否로 읽는다. 의논하니, 주부主簿 정박程朴이 우선 나라(후조後趙)와 화친和親하여 국경을 나누어 다스릴 것을 청하자, 포홍이 노하여 “나는 천자가 될 수 없단 말인가.” 하고는 정박을 끌어내어 참수하였다.
[] 12월에 서주徐州연주도독兗州都督 저부褚裒하니, 순선荀羨으로 서주와 연주의 군사軍事를 감독하게 하였다.
[] 저부褚裒가 돌아와 경구京口에 이르러서 통곡하는 소리가 매우 많음을 듣고서 좌우 측근들에게 묻자, 대답하기를 “모두 대피代陂에서 죽은 자들의 가족들입니다.” 하였다. 저부는 부끄럽고 분노하여 병이 나서 하니, 순선荀羨으로注+① 荀羨은 荀蕤의 아우이다.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이때 순선의 나이가 28세이니, 중흥中興 시기(동진東晉)의 방백方伯 중에 순선처럼 젊은 자는 아직 있지 않았다.
[] 나라(후조後趙) 석민石閔이 그 군주 석감石鑑유폐幽閉하고 호족胡族갈족羯族 20만 명을 죽였다.
[] 조주趙主 석감石鑑낙평왕樂平王 석포石苞로 하여금 밤에 석민石閔이농李農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이기지 못하자, 석감이 두려워하여 거짓으로 모르는 체하고 밤에 석포를 죽였다.
장군將軍 손복도孫伏都유수劉銖 등이 갈족羯族의 병사 3천 명과 결탁하고 석민과 이농을 죽이고자 하였는데, 석감이 말하기를 “경은 注+① 爲(위하다)는 去聲이다. 魏․晉 이하는 대체로 천자를 일러 官이라 하고, 천자도 때로 자기를 官이라 하였다. 위하여 기꺼이 힘을 다하고 보답이 없음을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이에 손복도 등이 석민과 이농을 공격하였으나 또다시 이기지 못하니, 석민과 이농이 손복도 등을 공격하여 참수하였다. 이에 병사들로 어룡관御龍觀에서 석감을 지키게 하고는 음식을 매달아 공급하고, 성안에 명령을 내리기를
“손복도와 유수가 역모를 하였기 때문에 관련된 당여黨與들이 죄를 받아 죽임을 당했는데, 선량한 사람은 한 사람도 관여하지 않았다. 금일 이후로는 과 마음을 함께하는 자는 남아 있고 함께하지 않는 자는 각각 자기가 가고 싶은 데로 가라.” 하고는 성문城門에 명하여 나가는 것을 금하지 않게 하였다.
[] 이에 조인趙人(한족漢族)注+① 趙人은 중국 사람을 이른다. 중에 100리 안의 사람들이 모두 성안으로 들어왔고 호족胡族갈족羯族은 떠나가는 자가 성문을 메웠다.
석민石閔은 호족이 자기의 쓰임이 되지 않을 줄을 알고 마침내 조인趙人을 거느리고서 호족과 갈족을 주살하였는데 귀천貴賤, 남녀男女, 소장少長을 따지지 않고 모두 참수하니, 죽은 자가 20여만 명이었다.
사방에 주둔하여 지키는 자들 가운데 모든 호족과 갈족을 조인趙人으로서 장수가 된 자에게 명해서 죽이게 하니, 혹 코가 오똑하고 수염이 많아서 잘못 죽은 자가 그중에 절반이었다.注+② 코가 높고 수염이 많은 자는 그 모습이 羯族과 胡族 같으므로 또한 죽임을 당하였다.
[] 나라(전연前燕)가 사신을 양주涼州(전량前涼)로 보냈다.
[] 〈나라가〉 장중화張重華와 약속하여 함께 나라(후조後趙)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역주
역주1 督將 : 督은 後漢 末 三國 初에 많이 보이기 시작하였는데,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지방의 군단을 통솔하는 都督이나 都督諸軍事이고 다른 하나는 병사를 통솔하는 무관으로 ‘○○督’의 형태로 보이는데 그 예로 騎督, 帳下督, 無難督 등이 있다.
역주2 자식(石宣)이……하였는데 : 永和 4년(348) 8월에 태자 石宣이 자기가 총애하는 楊杯 등을 시켜 아우 石韜를 죽였는데, 이 일이 발각되어 石虎가 석선을 죽였다.
역주3 太子世立……而自立 : “楚나라 負芻가 郝(석)의 庶兄으로서 그를 죽인 것을 殺이라고 썼는데(秦王 政 19년(B.C.228)) 여기에서는 어찌해서 弑라고 썼는가. 태후까지 죽였으니, 弑라고 쓸 수 있는 것이다.[負芻以庶兄書殺(秦王政十九年) 此則曷爲以弑書 及其太后 則可以書弑矣]” ≪書法≫
“石虎가 포악함을 자행하였는데, 군대를 믿고 잔인한 짓을 편안히 여겼다. 그가 막 臺에 올라 두 아들이 군대를 과시할 때에 이를 보고는 웃으며 ‘우리 집안의 父子가 이와 같으니, 만일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경우가 아니면 마땅히 다시 무엇을 근심하겠는가.’ 하였으나, 얼마 후에 한 집안의 骨肉들이 자기들끼리 서로 도륙하여 그 참혹함이 지극하였고, 나라도 또한 얼마 후에 멸망하여 더 이상 남은 종자가 없었다. 하늘과 땅이 진실로 무너지고 꺼진 적이 없는데 羯賊의 부자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資治通鑑綱目≫에 앞에서는 태자 石宣이 아우 石韜를 죽였다가 伏誅하였다고 쓰고, 여기에서는 석호가 졸하고 石世가 즉위하자 형 石遵이 그를 시해했다고 썼다. 이는 악을 쌓은 應報가 이와 같이 분명함을 보인 것이니, 세상에서 자신의 지위를 强暴함으로 견고히 하고자 하는 자는 이것을 거울삼아야 할 것이다.[石虎縱暴 阻兵安忍 方其登臺 觀二子耀兵之時 笑謂我家父子如此 自非天崩地陷 當復何愁 然未幾 一家骨肉 自相屠割 窮極慘毒 國亦尋滅 無復遺育 天地固未嘗崩陷也 而羯賊父子 果安在哉 綱目 前書太子宣殺弟韜 伏誅 此書虎卒 世立 兄遵弑之 所以見積惡之報 曉然如此 世之欲以强暴自固者 可以觀矣]” ≪發明≫
역주4 十六大將軍 : ≪資治通鑑≫ 권89 〈晉紀11〉 胡三省 註에 “輔漢, 都護, 中軍, 上軍, 撫軍, 鎭, 衛, 京, 前․後․左․右․上․下軍, 輔國, 冠軍, 龍驤, 虎牙 등의 大將軍이다.”라고 하였다.
역주5 張擧의 말 : 永和 4년(348)에 石虎가 태자를 세울 것을 의논할 적에 太尉 張擧가 “燕公 石斌은 무략이 있고 彭城公 石遵은 문덕이 있으니, 오직 폐하께서 선택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역주6 (澤)[睾] : 저본에는 ‘澤’으로 되어 있으나, ≪後漢書≫에 의거하여 ‘睾’로 바로잡았다.
역주7 征討都督褚裒……不克而還 : “褚裒 또한 표문을 올려 청하였는데 표문을 올려 청했다고 쓰지 않고, 征討都督이라고 씀은 어째서인가. 조정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조정의 명령이라고 쓰면 비록 표문을 올려 청했다고 쓰지 않더라도 괜찮은 것이다. 〈庾翼의 경우〉 먼저 襄陽으로 진영을 옮겼다고 쓰고 뒤에 조령을 내려 都討로 삼았다고 쓴 것과는 다르다(이 일은 建元 원년(343)에 보인다.).[裒亦表請矣 不書表請 書征討都督 何 朝命也 書朝命 則雖不書表請 可也 與先書移鎮襄陽 後書詔以爲都討者 異矣(建元元年)]” ≪書法≫
“恢復과 兼并은 차이가 있다. 겸병을 일러 탐하는 군대라 하고 회복을 일러 의로운 군대라 한다. 晉나라가 중원을 잃었는데 자손 중에 능히 회복하는 계책을 쓰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모두 인정해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앞에서는 桓宣이 趙나라와 丹水에서 싸우다가 크게 패함을 썼고, 여기서는 褚裒가 군대를 거느리고 趙나라를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옴을 썼는데, 모두 폄하하는 말이 없다. 이로써 첫 번째는 중국의 체통을 보존하고 두 번째는 義士의 기개를 펴고 세 번째는 원수를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잊지 않음을 보였으니, ≪春秋≫에 乾時의 싸움을 쓴 이유는 비록 패했더라도 또한 영광스럽게 여겼기 때문인 것과 뜻이 같다. 이는 진실로 그 군대를 끝까지 동원하여 무력을 행사함을 인정한 것이 아니니, 군자가 ≪資治通鑑綱目≫에서 쓴 내용을 자세히 보면 깨달음이 반을 넘을 것이다.[恢復與兼并異 兼并謂之貪兵 恢復謂之義兵 晉失中原 子孫有能爲恢復之計者 皆當予之 故前書桓宣及趙戰于丹水 敗績 此書褚裒帥師伐趙 不克而還 皆無貶詞 一以存中國之體 二以伸義士之氣 三以示不忘讐恥之心 其與春秋書乾時之戰 雖敗亦榮者 同意 固非予其窮兵黷武也 君子詳觀綱目所書之旨 思過半矣]” ≪發明≫ ‘乾時의 싸움’은 魯나라 莊公 9년 8월에 魯나라가 齊나라 군대와 乾時에서 전투하다가 大敗한 것을 이른다.
역주8 梁州刺史……拔宛城 : “이때 趙나라 雍州의 호걸들이 그 장수를 좋아하지 아니하여 사자를 보내어 晉나라에 통고하자, 司馬勲이 병력을 이끌고 달려갔다. 이윽고 병력이 적어서 감히 전진하지 못하고 宛城을 함락하고 돌아왔으니, 그렇다면 작은 승리이다. 그런데 趙나라를 정벌했다고 크게 쓴 것은 어째서인가. 義를 인정한 것이고 또 趙나라를 미워한 것이다.[於是 趙雍州豪傑 不樂其帥 遣使告晉 勲帥衆赴之 既而以兵少不敢進 拔宛城而還 則小勝也 大書伐趙 何 予義 且惡趙也]” ≪書法≫
역주9 趙石鑑 弑其主遵而自立 : “石遵을 시해한 자는 石閔인데, 石鑑이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이때 석준이 장차 석민을 살해하려고 하여 석감과 모의하였는데, 석감이 석준의 계책을 석민에게 고하고 또 그가 옹립하는 것을 받아들였으니, 그렇다면 석감은 첫 번째로 악한 자이다. 석감이 시해했다고 쓰고 스스로 즉위했다고 썼으니, ≪資治通鑑綱目≫에서 惡을 주벌함이 엄격하다. 그렇다면 李期는 어찌해서 시해했다고 쓰지 않았는가. 주모자가 형 李越이었다. ‘그 아우 이기를 세웠다.’고 썼으면, 이기 또한 시해를 참여하여 들은 것이니, 석감에 비할 바가 아니다.[弑遵者 石閔也 其書鑑 何 於是 遵將殺閔 與鑑謀之 鑑以遵謀告閔 又受其立 則首惡也 書鑑弑 書自立 綱目之誅惡 嚴矣 然則李期何以不書弑 主謀者兄越也 書曰立其弟期 則期亦與聞乎弑而已 非鑑比也]” ≪書法≫
“分注(目)를 상고해보면 石遵이 죽은 것은 바로 石閔이 죽인 것인데, 지금 ≪資治通鑑綱目≫에서 마침내 獄事를 石鑑에게 돌린 것은 어째서인가. 살펴보건대 ≪春秋≫ 昭公 13년에 楚나라 公子 比가 晉나라에서 楚나라로 돌아가 그 군주 虔을 乾谿에게 시해했다고 썼다. 그런데 ≪春秋左氏傳≫을 상고해보면 바로 公子 棄疾이 比를 불러서 협박하여 세우자, 楚子 虔이 마침내 건계에서 목매어 죽었다. 그러나 ≪춘추≫에서는 기질이 군주를 시해했다고 쓰지 않고 公子 比라고 쓴 것은 比가 기질이 세워준 것을 받아들여서 이익을 탐하고 그 의리를 잊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大惡’이라는 이름을 입어도 사양할 수 없는 것이니, 이 일은 석감과 마치 한 수레바퀴 자국에서 나온 것과 같다. ≪자치통감강목≫은 ≪춘추≫를 법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이렇게 석민을 쓰지 않고 석감을 쓴 것이다. 夷狄의 무리로서 자기들끼리 서로 魚肉이 되었는데, ≪자치통감강목≫에서는 맨 먼저 악을 저지른 자를 추궁하여 명분을 바로잡고 죄를 정하여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으니, 그렇다면 중국에 대해서도 따라서 알 수 있다. 아! 이것이 ≪자치통감강목≫이 군자가 아니면 편찬할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考之分注 石遵之死 乃石閔殺之 今綱目 乃歸獄於鑑 何哉 按春秋昭十三年 書楚公子比 自晉歸于楚 弑其君虔于乾谿 考之左氏 乃公子棄疾召比 脅而立之 楚子虔遂縊于乾谿 然春秋 不書棄疾弑君 而書公子比者 比受其所立 怵於利而忘其義 故被以大惡而不可辭 其事正與石鑑 如出一轍 綱目 取法春秋 故不書閔而書鑑者此也 夫以夷狄醜類 自相魚肉 而綱目推原首惡 正名定罪 略不少忽 則其於中國 從可知矣 噫 此綱目所以非君子莫能修也歟]” ≪發明≫
역주10 趙石閔……羯二十萬人 : “天道는 살려주는 것을 좋아하고 죽이는 것을 미워하며, 너에게서 나온 것은 반드시 너에게로 돌아가게 한다. 羯賊이 제멋대로 포악하여 晉나라 백성들을 죽이기를 풀과 왕골을 베는 것보다도 더 심하게 하였는데, 이제 元惡이 죽은 뒤에 石閔의 손을 빌려 그 種子를 살해하였다. 비록 晉나라 사람들이 받은 禍의 참혹함을 보상할 수는 없으나, 여기에서 또한 천도가 돌아오기를 좋아하는 뜻을 볼 수 있다. 胡族과 羯族 20만 명을 죽였다고 썼으니, 비록 이것을 통쾌하게 여긴 것이나, 또한 애처롭게 여긴 것이다.[天道好生而惡殺 出乎爾者 必反乎爾 羯賊縱暴 戕刈晉民 不啻草菅 今焉元惡既斃 假手石閔 殘戮其種 雖未足以償晉人受禍之慘 然亦足見天道好還之意矣 書殺胡羯二十萬人 雖快之也 亦哀之也]” ≪發明≫ ‘천도가 돌아오기를 좋아하는 뜻’은 ≪道德經≫에 보이는 말로, 因果應報의 天理가 어긋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치통감강목(14) 책은 2021.11.1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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