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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主鑑이 使樂平王苞로 夜攻石閔, 李農이러니 不克하니 鑑이 懼하여 偽若不知者하여 夜殺苞하다
將軍孫伏都, 劉銖等
이 結羯士三千
하고 欲誅閔, 農
이러니 鑑曰 卿
은 好爲官陳力
하고 勿慮無報也
注+爲, 去聲. 魏․晉以下, 率謂天子爲官, 天子亦時自言之.하라
於是에 伏都等이 攻閔, 農하여 又不克하니 閔, 農이 攻斬伏都等하다 以兵守鑑於御龍觀하여 懸食給之하고 下令城中曰
孫, 劉搆逆에 支黨伏誅하니 良善은 一無預也라 今日已後로 與官同心者는 留하고 不同者는 各任所之라하고 敕城門不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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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조야朝野에서는 모두 가까운 시일 안에 중원을 회복할 수 있다고 하였으나, 채모蔡謨는 홀로 친한 사람에게 이르기를 “오랑캐가 멸망하는 것이 진실로 큰 경사이나, 다시 조정에 우환을 끼칠까 두렵다.” 하였다.
그 사람이 묻기를 “어째서인가?” 하자, 채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천도天道에 순응하고 천시天時를 틈타서 어려움에 처한 여러 백성을 구제하는 것은 지성至聖과 영웅英雄이 아니면 하지 못한다.
그 나머지 사람들은 자신의 덕과 힘을 헤아려 대처하는 것만 못하니, 오늘날의
사세事勢를 살펴보건대 아마도 지금의
현자賢者들이 미칠 바가 아닌 듯하다. 반드시 장차 병력을 분산하여 제각기 전쟁을 해서 백성들을 피곤하게 하여
注+① 〈“必將經營分表”는〉 반드시 승승장구하여 중원을 평정하지 못하고, 형편상 모름지기 점령한 땅에 병력을 나누어 주둔시켜 국경을 전부 지키게 하여 백성들을 피폐하게 해서 자기의 뜻을 펴려고 함을 말한 것이다. 일설에 “分(분량)은 扶問의 切이니, 사람의 재주는 각기 분량이 있어서 중원을 수복함은 당시 인재가 능히 감당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자신의 분량을 초과하여 경영하면 성공하지 못하여 장정들은 전쟁에 괴로워하고 노약자들은 군량수송에 곤궁해할 것이다. 그리하여 백성을 피로하게 해서 자신의 뜻을 펴려고 하면 공을 이룰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자기의 뜻을 펴려고 할 것이다.
이윽고 재주와 지략이 소략하고 부족해서 자기의 뜻에 부응하지 못하고, 재물과 힘이 고갈되어 지혜와 용맹이 모두 곤궁하게 되면 어찌 우환이 조정에 미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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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노군魯郡의 백성 5백여 가호가 군대를 일으켜 진晉나라(동진東晉)에 붙어서 저부褚裒에게 구원을 청하자, 저부가 부장部將 왕감王龕(왕감)을 보내어 정예병을 거느리고 가서 맞이하게 하였는데, 조趙나라 장수 이농李農과 대피代陂에서 싸우다가 패하여 전몰하고 돌아오지 못하였다.
저부는 후퇴하여 광릉廣陵에 주둔하였고 진규陳逵도 수춘壽春에 쌓아놓은 곡식과 물자를 불태우고 성을 허물고 도망하여 돌아왔다. 저부가 돌아와 경구京口에 진주하자, 정토도독征討都督을 해임하였다.
이때 하북河北 지방이 크게 혼란하여 유민 20여만 명이 황하를 건너 진晉나라로 와서 귀부歸附하고자 하였다. 마침 저부가 이미 돌아오니, 위세威勢가 이어지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모두 스스로 구제하지 못하는 지경에 빠져 거의 다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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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장중화張重華가 여러 번 돈과 비단을 좌우의 가까운 사람들에게 하사하고 또 장기 두고 바둑 두기를 좋아하여 정사를 거의 폐하였다. 삭진索振(삭진)이 간諫하기를
“선왕先王이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부고府庫를 채움은 바로 원수의 치욕을 설욕하지 못해서 해내海內를 평정하려는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축이 이미 고갈되었는데 원수가 그대로 살아 있으니, 어찌 가볍게 소모하고 흩어서 공功이 없는 사람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는 몸소 만기萬機를 다스려서 신하들의 장주章奏가 대궐로 들어오면 하루가 지나기 전에 답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능히 중흥中興의 업적을 이루었는데,
지금 장주가 정체되어서 아랫사람들의 마음이 위로 통하지 못하고, 침체된 억울한 자들이 곤궁한 감옥살이를 하고 있으니, 참으로 명주明主의 일이 아닐 듯합니다. 이에 장중화가 삭진에게 사례謝禮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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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조趙나라 낙평왕樂平王 석포石苞가 관서關西의 무리를 거느리고서 업성鄴城을 공격할 것을 모의하였다. 석포는 탐욕스럽고 지모가 없으니, 옹주雍州의 호걸들이 그가 성공하지 못할 줄을 알고 모두 사자를 보내어 진晉나라(동진東晉)에 고하였다.
양주자사梁州刺史 사마훈司馬勲이
注+① 司馬勳은 宣帝의 아우의 아들인 濟南王 司馬遂의 증손이다. 병력을 이끌고 달려가서
낙구駱口로 진출하여 조나라의 수비하는 군대를 격파하고
현구懸鉤에
注+② 懸鉤는 城의 이름이다. 京兆에 속하였으니, 長安縣 서쪽 200리 지점에 있었다. 성벽城壁을 쌓으니,
장안長安과의 거리가 200리였다.
삼보三輔 지방의 많은 호걸들이 수령을 죽이고 사마훈에게 호응하였다.
조주趙主 석준石遵은 왕낭王朗을 보내어 정예 기병 2만을 거느려 사마훈을 막는다는 것으로 명분을 삼고는 이로 인하여 석포를 겁박하여 업성으로 보내니, 사마훈은 병력이 적어서 감히 전진하지 못하여 완성宛城을 함락하고 조趙나라 남양태수南陽太守를 죽이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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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조주趙主 석감石鑑이 낙평왕樂平王 석포石苞로 하여금 밤에 석민石閔과 이농李農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이기지 못하자, 석감이 두려워하여 거짓으로 모르는 체하고 밤에 석포를 죽였다.
장군將軍 손복도孫伏都와
유수劉銖 등이
갈족羯族의 병사 3천 명과 결탁하고 석민과 이농을 죽이고자 하였는데, 석감이 말하기를 “경은
관官을
注+① 爲(위하다)는 去聲이다. 魏․晉 이하는 대체로 천자를 일러 官이라 하고, 천자도 때로 자기를 官이라 하였다. 위하여 기꺼이 힘을 다하고 보답이 없음을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이에 손복도 등이 석민과 이농을 공격하였으나 또다시 이기지 못하니, 석민과 이농이 손복도 등을 공격하여 참수하였다. 이에 병사들로 어룡관御龍觀에서 석감을 지키게 하고는 음식을 매달아 공급하고, 성안에 명령을 내리기를
“손복도와 유수가 역모를 하였기 때문에 관련된 당여黨與들이 죄를 받아 죽임을 당했는데, 선량한 사람은 한 사람도 관여하지 않았다. 금일 이후로는 관官과 마음을 함께하는 자는 남아 있고 함께하지 않는 자는 각각 자기가 가고 싶은 데로 가라.” 하고는 성문城門에 명하여 나가는 것을 금하지 않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