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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4)

자치통감강목(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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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강목(1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起己卯晉元帝太興二年하여 盡丁酉晉成帝咸康三年하니 凡十九年이라
二年이라
漢改號趙하니 光初二年이라 ◑後趙高祖石勒元年注+漢主曜改國號曰趙, 石勒稱趙王, 同在此年, 而勒倂曜, 始得中原, 故以後趙別之.이라
◑舊大國一이요 成, 涼小國二이요 新大國一이니 凡四僭國이라
春二月 劉遐, 徐龕 撃周撫하여 斬之하다
掖人蘇峻 帥鄉里하여 結壘以自保하니 遠近多附注+掖音亦, 掖縣, 屬東萊郡. 蘇峻傳云 “長廣掖人.” 據志, 長廣郡有縣, 無掖縣.
曹嶷 惡其疆하여 將攻之하니 帥衆浮海來奔이어늘 以爲鷹揚將軍하다
助遐討撫有功하니 以爲淮陵内史注+惠帝元康七年, 分臨淮置淮陵郡.하다
石勒 獻捷於漢이어늘 斬其使하다
遣左長史王脩하여 獻捷於漢하니 漢主曜遣使하여 授勒太宰하고 進爵趙王하고 加殊禮하여 稱警蹕하다
脩舎人曹平樂 留仕漢注+樂, 音洛.이러니 言於曜曰 勒 遣脩來 實覘疆弱이니 俟其復命하여 將襲乘輿리이다
漢兵 疲弊 曜乃追所遣使하고 斬脩於市하니
大怒曰 孤事劉氏 於人臣之職 有加矣 彼之基業 皆孤所爲어늘 今既得志 還欲相圖하니 趙王, 趙帝 孤自爲之 何待於彼邪리오
三月 合祭天地於南郊하다
帝令群臣議郊祀하니 刁協等 以爲宜須還洛이니이다
司徒荀組等曰 漢獻帝都許 即行郊祀하니 何必洛邑이니잇고
從之하여 立郊丘於建康城之巳地하여 親祀之하고 以未有北郊라하여 并地衹하여 合祭之하다
詔琅邪恭王 宜稱皇考라하니 賀循曰 禮 子不敢以己爵加於父라한대 乃止하다
夏四月 將軍陳川 以浚儀叛하여 降石勒注+浚儀縣, 屬陳留郡.하다
蓬陂塢主陳川 自稱陳留太守注+蓬陂, 卽左傳之蓬澤, 在浚儀縣. 城之小者曰塢. 天下兵爭, 聚衆築塢以自守, 未有朝命, 故自爲塢主.러니 祖逖之攻樊雅也 遣其將李頭助之하니 頭力戰有功이라
厚遇之하니 頭每嘆曰 得此人爲主하니 吾死無恨이라하다 聞而殺之하고 大掠豫州諸郡이어늘
遣兵撃破之하니 遂叛하여 降石勒하다
徐龕 以泰山叛하여 降石勒하다
周撫之敗走也 龕部將 追斬之러니 及朝廷論功 而劉遐先之하니하여 以郡降石勒注+先, 悉薦切.하다
徙都長安하고 하다
羊氏 即恵帝后也 曜嘗問之曰 吾何如司馬家兒
羊氏曰 陛下 開基之聖主 亡國之暗夫 何可竝言이리오 彼貴爲帝王하여 有一婦, 一子及身三耳로되 曽不能庇하니
妾於爾時 實不欲生이라 意謂世間男子皆然이러니 自奉巾櫛以來 始知天下自有丈夫耳니이다 曜甚寵之하여 頗預國事러라
保既稱王 改元建康하고 置百官이러니 陳安하여 降於成하다
上邽大饑하고 又爲安所逼이라
張寔 遣韓璞救之하니 乃退하다
江東 大饑하니 詔百官言事하다
益州刺史應詹 上疏曰注+詹, 自益州刺史還建康.
元康以來 賤經尙道하여 以玄虚宏放爲夷達하고 以儒術清儉爲鄙俗注+夷, 曠也.하니
宜崇奨儒官하여 以新俗化니이다
祖逖 討陳川하니 石勒 遣兵救之어늘 退屯淮南하고 勒兵守蓬關하다
攻陳川於蓬關注+蓬關, 在陳留浚儀縣.이러니 石勒 遣石虎, 桃豹救之하니 兵敗하여 退屯淮南注+此淮南郡, 治壽春.하다
虎徙川部衆於襄國하고 留豹하여 守川故城하다
石勒 寇幽州陷之하니 段匹磾 犇樂陵注+樂陵郡, 治厭次, 邵續保之, 以奉晉.하다
◑梁州刺史周訪 撃杜曽하여 斬之하다
王敦 患曽難制하여 謂周訪曰 若擒曾이면 當相論爲荆州注+論, 盧昆切, 論薦也.호리라 至是하여 破斬曽이로되 而敦不用하다
王廙在荆州하여 多殺陶侃將佐하니 士民怨怒 帝徵爲散騎常侍하고 而以訪代之하니 忌訪威名하여 難之러라
從事郭舒説敦曰 荆州雖荒弊 乃用武之國이니 不可以假人이라 宜自領之 訪爲梁州足矣니이다 從之하여 乃加訪安南將軍하고 餘如故하다
大怒한대 手書譬解하고 并玉環, 玉椀遺之하니 抵之於地曰注+抵, 擲也. 吾豈賈豎可以寳悦邪注+賈, 坐販者. 豎, 童僕未冠者. 言賤劣無智, 若童豎然.아하다
在襄陽 務農訓兵하여 陰有圖敦之志하여 守宰有缺 輒補然後言上하니 不能制注+上, 時掌切.러라
改號趙하다
漢主曜立宗廟, 社稷, 南北郊於長安하고 改國號爲趙하고 以冒頓配天하고 光文配上帝注+冒頓, 漢高時, 匈奴頭曼單于之子也, 今曜以爲祖. 光文, 劉淵謚.하다
徐龕 寇濟, 岱어늘 以羊鑒爲都督하여 討之하다
徐龕 寇掠濟, 岱注+濟․岱, 濟河․海岱之地, 在兗․靑․徐間.어늘 王導以太子左衛率羊鑒 龕之州里冠族이니 必能制之注+冠, 古玩切.라하다
深辭才非將帥라하고 郗鑒 亦表鑒不可使라호되 導不從하니 以鑒爲征討都督하여 督徐州刺史蔡豹及劉遐 鮮卑段文鴦等하여 討之注+豹, 質之玄孫也, 質, 邕之叔父. 文鴦時從其兄匹磾, 在厭次.하다
冬十一月 石勒 稱趙王하다
即趙王位하고 稱元年하니 是爲後趙
以將軍支雄等으로 主胡人辭訟하고 禁胡人하여 不得凌侮華族하고 號胡爲國人注+華族, 中華之族也.하다
遣使하여 循行州郡하여 勸課農桑하고 朝會 始用天子禮樂하며
加張賓大執法하여 専總朝政注+執法, 御史之官也.하고 以石虎爲驃騎將軍하여 督諸軍하고 賜爵中山公하다
任遇優顯하여 群臣莫及이로되 而謙虚敬慎하여 開懐下士하고 屏絶阿私하여 以身帥物하며
入則盡規하고 出則歸美하니 甚重之하여 每朝 常爲之正容貌하고 簡辭令하고 呼曰右侯而不敢名이러라
十二月 宇文氏攻慕容廆어늘 하다
平州刺史崔毖 以士民多歸慕容廆라하여 心不平하여 陰説髙句麗, 段氏, 宇文氏하여 使共攻之注+毖, 琰之曾孫也.하니 毖所親髙瞻 力諫호되 不從하다
三國 合兵伐廆어늘 諸將 請擊之한대 廆曰 彼爲毖所誘하여 欲邀一切之利 軍勢初合하여 其鋒甚鋭하여 不可與戰이니 當固守以挫之
彼烏合而來하여 莫相歸服하니 久必攜貳리니 然後撃之하면 破之必矣리라
三國 進攻棘城이어늘 廆閉門自守하고 獨以牛酒 犒宇文氏하니 二國 疑宇文與廆有謀하여 各引兵歸하다
宇文士卒數十萬 連營四十里 其大人悉獨官曰 二國 雖歸 吾當獨取之注+悉獨官, 宇文氏大人之名號.호리라
廆使召其子翰於徒河注+翰, 自愍帝建興元年, 鎭徒河.한대 翰曰 彼衆我寡하니 難以力勝이라 請爲奇兵於外하여 伺其間而撃之注+間, 古莧切, 下同.
若并兵爲一이면 彼得專意攻城이니 非策之得也니이다 廆從之하다
悉獨官 聞之하고 曰 翰不入城하니 或能爲患이라 當先取之라하고 分遣數千騎하여 襲翰이어늘 翰爲段氏使者하여 逆於道할새 而設伏以待하여 奮撃하여 盡獲之하고
乘勝徑進하고 遣間使語廆하여 出兵大戰하다 前鋒始交 将千騎하고 從旁直入其營하여 縱火焚之하니 衆遂大敗
悉獨官 僅以身免하니 廆俘其衆하고 獲皇帝玉璽三紐注+玉璽, 卽宇文大人普回出獵所得者. 紐, 女九切, 系也.하다
毖聞之하고하여 奔髙句麗어늘 廆以其子仁으로 鎮遼東하니 官府市里 按堵如故러라
以髙瞻爲將軍한대 稱疾不就어늘 廆數臨候之하고 撫其心曰
君之疾 在此 不在他也 今晉室喪亂하니 孤欲與諸君으로 共清世難하고 翼戴帝室하노니
奈何以華夷之異 介然疎之哉注+介然, 堅正不移之貌. 夫立功立事 惟問志略如何耳니라 猶不起하니 廆頗不平이라 瞻以憂卒하다
廆使裴嶷奉表并所得璽하여 詣建康獻之하다
蒲洪 降趙하다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제19권은 기묘년己卯年 나라 원제元帝 태흥太興 2년(319)부터 정유년丁酉年 나라 성제成帝 함강咸康 3년(337)까지이니, 모두 19년이다.
[] 나라(동진東晉) 중종中宗 원황제元皇帝 태흥太興 2년이다.
[] 나라(전조前趙)가 국호를 로 개칭하니, 유요劉曜 광초光初 2년이다. 후조後趙 고조高祖 석륵石勒 원년이다.注+① 漢主 劉曜가 국호를 ‘趙’라 고친 것과 石勒이 趙王을 칭한 것이 똑같이 이해에 있었는데, 석륵이 유요를 합병하여 처음으로 中原을 점령하였으므로 後趙라고 하여 〈유요의 趙(前趙)와〉 구별하였다.
옛날의 큰 나라(전조前趙)가 하나이고, 작은 나라가 나라(성한成漢)와 나라(전량前涼) 둘이고, 새로 생긴 큰 나라(후조後趙)가 하나이니, 합하여 참국僭國이 넷이다.
[] 봄 2월에 공격하여 참수하였다.
[] 처음에 액현掖縣 사람 소준蘇峻注+① 掖은 音이 亦이니, 掖縣은 東萊郡에 속하였다. ≪晉書≫ 〈蘇峻列傳〉에 “蘇峻은 長廣郡 掖縣 사람이다.” 하였는데, 〈地理志〉를 근거해보면 장광군에는 挻縣(연현)만 있고 액현이 없다. 향리鄉里의 자제들을 거느리고 보루를 구축하여 스스로 지키니, 원근에서 그에게 귀의하는 자가 많았다.
조억曹嶷(조억)이 그의 세력이 강성한 것을 미워하여 공격하려 하자, 소준이 병력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나라로〉 도망해 오니, 그를 응양장군鷹揚將軍으로 삼았다.
소준이 유하劉遐를 도와 주무周撫를 토벌해서 공을 세우니, 그를 회릉내사淮陵内史注+② 惠帝 元康 7년(297)에 臨淮郡을 나누어 淮陵郡을 설치하였다. 삼았다.
[] 석륵石勒이 전리품을 나라(전조前趙)에 바치자, 나라가 석륵의 사자를 참수하였다.
[] 석륵石勒좌장사左長史 왕수王脩를 보내어 나라(전조前趙)에 전리품을 바치니, 한주漢主 유요劉曜을 보내어 석륵에게 태재太宰를 제수하고 작위를 조왕趙王으로 높이고 그를 특별히 예우하여 을 하게 하였다.
왕수의 사인舎人조평락曹平樂注+① 樂은 音이 洛이다. 나라에 남아서 벼슬하였는데, 유요에게 말하기를 “석륵이 왕수를 보내온 것은 실로 우리 나라의 강약强弱을 엿보기 위한 것이니, 그가 복명復命하기를 기다려서 장차 임금님을 습격하려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 나라 군대가 지치고 궁핍하였다. 유요는 마침내 석륵에게 보낸 사신을 쫓아가 〈다시 돌아오게 하고〉 왕수를 시장에서 참수하였다.
석륵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내가 신하의 직분에 넘치도록 유씨劉氏를 섬겼다. 저들의 기업基業은 모두 내가 이루어주었는데 이제 뜻을 얻자 도리어 나를 도모하고자 하니, 조왕趙王이든 조제趙帝이든 내 스스로 할 것이다. 내 어찌 저들의 허락을 필요로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 3월에 남교南郊에서 하늘과 땅에 합제合祭하였다.
[] 황제( 원제元帝)가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교사郊祀를 의논하게 하니, 조협刁協(조협) 등이 아뢰기를 “마땅히 낙읍洛邑으로 돌아가기를 기다려 교사郊祀를 행해야 합니다.” 하였다.
사도司徒 순조荀組 등은 말하기를 “나라 헌제獻帝에 도읍할 적에 즉시 교사郊祀를 행하였으니, 어찌 굳이 낙읍洛邑에서 할 필요가 있단 말입니까.” 하였다.
[] 조령詔令을 내려서 황고皇考라고 했는데, 얼마 후 이를 하였다.
[]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낭야공왕琅邪恭王을 마땅히 황고皇考라 칭해야 한다.”라고 하니, 하순賀循이 말하기를 “에 의하면, 자식은 감히 자기의 작위를 아버지의 칭호稱號에 가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자, 마침내 중지하였다.
[] 여름 4월에 〈나라(동진東晉)〉 장군 진천陳川준의현浚儀縣注+① 浚儀縣은 陳留郡에 속하였다. 가지고 배반하여 석륵石勒에게 항복하였다.
[] 처음에 봉피蓬陂(봉피)의 注+① 蓬陂는 바로 ≪春秋左氏傳≫에 보이는 蓬澤이니, 浚儀縣에 있다. 작은 城을 塢라 한다. 이때 천하에 전쟁이 벌어지자 무리를 모아 塢를 축조하여 스스로 지켰는데, 조정의 임명이 있기 전이므로 스스로 塢主라 한 것이다. 진천陳川이 스스로 진류태수陳留太守라고 칭하였다. 조적祖逖번아樊雅를 공격할 적에 진천이 자신의 장수 이두李頭를 보내어 돕게 하였는데, 이두가 힘껏 싸워서 공을 세웠다.
조적이 그를 후대하니, 이두가 매번 탄식하기를 “이러한 분을 만나 주인으로 삼았으니, 내 죽어도 여한이 없다.” 하였다. 진천은 이 말을 듣고 〈그를 미워하여〉 죽이고 예주豫州의 여러 을 크게 노략질하였다.
조적이 군대를 보내어 진천을 격파하니, 진천이 마침내 배반하여 석륵에게 항복하였다.
[] 〈나라(동진東晉)〉 서감徐龕태산군泰山郡을 가지고 배반하여 석륵石勒에게 항복하였다.
[] 주무周撫가 패하여 달아나자 서감徐龕부장部將이 추격하여 그를 참수하였다. 조정에서 을 논할 적에 유하劉遐를 서감보다 위에 놓으니,注+① 先(앞세우다)은 悉薦의 이다. 서감이 노하여 태산군泰山郡을 가지고 석륵石勒에게 항복하였다.
[] 나라(전조前趙)가 장안長安으로 도읍을 옮기고는, 〈나라 혜제恵帝의〉 후비后妃양씨羊氏로 세우고 아들 유희劉熙태자太子로 삼았다.
[] 양씨羊氏는 바로 혜제恵帝후비后妃이다. 유요劉曜가 일찍이 그녀에게 묻기를 “내가 사마씨司馬氏의 아이(혜제惠帝)와 비교하여 어떠한가?” 하자,
양씨가 대답하기를 “폐하는 기업基業을 창건한 성스러운 군주이고, 저 사마씨는 나라를 망하게 한 어리석은 지아비이니, 어찌 폐하와 나란히 놓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 사마씨는 제왕帝王의 귀한 신분으로 한 부인, 한 자식, 자기 한 몸까지 셋뿐인데도 끝내 보호할 수 없었습니다.
첩은 그때 실로 살고 싶지 않았으나, 세상의 남자들은 모두 다 그러하리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수건과 빗을 받들고 〈폐하를 모신〉 이래로 비로소 천하에 따로 대장부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였다. 유요는 그녀를 매우 총애하여 자못 국사國事에 간여하게 하였다.
[] 남양왕南陽王 사마보司馬保가 스스로 진왕晉王을 칭하였다.
[] 사마보司馬保진왕晉王을 칭하고는 건강建康으로 개원改元하고 백관百官을 설치하였는데, 진안陳安이 배반하여 나라(성한成漢)에 항복하였다.
상규上邽 지역이 크게 기근이 들고 또 진안에게 핍박을 받았다.
전량前涼의〉 장식張寔한박韓璞을 보내어 구원하니, 진안이 마침내 후퇴하였다.
[] 강동江東 지역에 크게 기근이 드니, 〈황제( 원제元帝)가〉 조령詔令을 내려 백관百官에게 정사政事를 말하게 하였다.
[] 익주자사益州刺史 응첨應詹이 다음과 같이 상소上疏하였다.注+① 應詹이 益州刺史로 있다가 建康으로 돌아왔다.
이래로 유교儒敎의 경전을 천시하고 도교道敎의 경전을 숭상해서 현묘하고 허무하며 활달하고 구애받지 않는 것을 탁注+② 夷는 광대함이다. 트였다고 여기고, 유학의 청렴하고 검소한 것을 비루하고 속되다고 여겨왔습니다.
마땅히 유학을 하는 관원을 높이고 장려해서 습속習俗교화敎化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 조적祖逖진천陳川을 토벌하니, 석륵石勒이 군대를 보내어 진천을 구원하였다. 이에 조적이 후퇴하여 회남淮南에 주둔하였고, 석륵의 군대가 봉관蓬關을 지켰다.
[] 조적祖逖진천陳川봉관蓬關에서注+① 蓬關은 陳留郡의 浚儀縣에 있다. 공격하였는데 석륵石勒석호石虎도표桃豹를 보내어 진천을 구원하니, 조적의 군대가 패하여 후퇴하여 회남淮南注+② 여기의 淮南郡은 壽春에 治所를 두었다. 주둔하였다.
석호가 진천의 무리를 양국襄國으로 옮기고 도표를 남겨두어서 진천의 옛 성을 지키게 하였다.
[] 석륵石勒유주幽州를 침략하여 함락시키니, 단필제段匹磾(단필제)가 낙릉樂陵(악릉)으로注+① 樂陵郡은 厭次에 치소를 두었는데, 邵續이 이곳을 지키면서 晉나라를 받들었다. 달아났다.
[] 〈나라(동진東晉)〉 양주자사梁州刺史 주방周訪두증杜曽을 공격하여 참수하였다.
[] 처음에, 왕돈王敦은 제재하기 어려운 두증杜曽을 근심하여 주방周訪에게 이르기를 “만약 두증을 사로잡으면 마땅히 의논하여注+① 論은 盧昆의 切이니, 의논하여 천거하는 것이다. 그대를 형주자사荊州刺史로 천거하겠다.” 하였다. 이때에 주방이 두증을 격파하여 참수하였으나, 왕돈은 그를 등용하지 않았다.
왕이王廙(왕이)가 형주자사荊州刺史로 있으면서 도간陶侃의 장수와 보좌관들을 많이 죽이니, 선비와 백성들이 원망하고 노여워하였다. 황제( 원제元帝)가 왕이를 불러들여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삼고 그를 대신하여 주방을 형주자사로 삼으니, 왕돈이 주방의 위엄과 명성을 꺼려서 그를 어렵게 여겼다.
[] 종사從事 곽서郭舒왕돈王敦을 설득하기를 “형주荆州가 비록 멀고 피폐하나 전쟁을 하기에 좋은 지역입니다. 남에게 맡겨두어서는 안 되니, 마땅히 직접 거느려야 합니다. 하였다. 왕돈은 그의 말을 따라 마침내 주방에게 안남장군安南將軍을 더해주고 그 외 직무는 예전과 같게 하였다.
[] 주방周訪이 크게 노여워하자, 왕돈王敦이 직접 편지를 써서 해명하고 옥환玉環옥완玉椀도 함께 보냈다. 주방이 이것들을 땅에 던지며注+① 抵는 던짐이다. 말하기를 “내 어찌 보물로 기쁘게 할 수 있는 장사꾼과 어린아이란 말인가.”注+② 賈는 앉아서 물건을 파는 자요, 豎는 어린 종으로 아직 冠을 쓰지 않은 자이니, 〈“賈豎”는〉 천하고 용렬하여 지혜가 없어서 어린 종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주방이 양양襄陽에 있을 적에 농사를 힘쓰고 병사들을 훈련하면서 은밀히 왕돈을 도모할 뜻을 품고서 수재守宰(양주梁州의 지방관) 중에 결원이 있으면 번번이 보임補任시킨 뒤에야 보고하니,注+③ 上(올리다)은 時掌의 切이다. 왕돈이 그를 제재하지 못하였다.
[] 나라가 국호를 나라(전조前趙)로 바꿨다.
[] 한주漢主 유요劉曜종묘宗廟사직社稷남교南郊북교北郊장안長安에 세우고 국호를 로 바꾸고는, 묵돌冒頓(묵특)을 하늘에 배향하고 광문제光文帝상제上帝에 배향하였다.注+① 冒頓은 漢나라 高祖 때 匈奴 頭曼單于의 아들인데, 이제 劉曜가 그를 始祖로 삼은 것이다. 光文는 劉淵의 시호이다.
[] 서감徐龕을 침략하자, 양감羊鑒도독都督으로 삼아서 그를 토벌하게 하였다.
[] 서감徐龕제하濟河해대海岱의 지역을注+① 濟와 岱는 濟河와 海岱의 지역이니, 兗州와 靑州, 徐州 사이에 있다. 침략하자, 왕도王導는 “태자太子좌위솔左衛率양감羊鑒은 서감의 동향同鄕 사람으로 명문名門 출신이니,注+② 冠(높다)은 古玩의 切이다. 반드시 서감을 제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양감은 자신이 장수의 재주가 아니라고 극구 사양하였고, 치감郗鑒 또한 표문을 올려서 양감을 장수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나, 왕도가 따르지 않고 양감을 정토도독征討都督으로 삼아서 서주자사徐州刺史 채표蔡豹유하劉遐, 선비鮮卑단문앙段文鴦 등을 독려하여 서감을 토벌하게 하였다.注+③ 蔡豹는 蔡質의 玄孫이니, 채질은 蔡邕의 숙부이다. 段文鴦이 이때 그 형 段匹磾를 따라 厭次에 있었다.
[] 겨울 11월에 석륵石勒조왕趙王을 칭하였다.
[] 석륵石勒조왕趙王의 지위에 오르고 원년을 칭하니, 이를 후조後趙라 한다.
장군 지웅支雄 등에게 호인胡人송사訟事를 맡기고 호인胡人들을 금하여 화족華族(한족漢族)을注+① 華族은 中華의 종족이다.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호인胡人들을 이름하여 국인國人이라 하였다.
사자使者를 보내어 주군州郡을 순행하면서 농업과 잠업을 권장하게 하고, 조회朝會할 때에 처음으로 천자天子예악禮樂을 사용하였다.
장빈張賓에게 대집법大執法注+② 執法은 御史의 職責이다. 더하여 조정의 정사를 전적으로 총괄하게 하고, 석호石虎표기장군驃騎將軍으로 삼아서 여러 군대를 독려하게 하고 중산공中山公의 봉작을 하사하였다.
[] 장빈張賓이, 석륵石勒에게 현달한 지위를 받고 매우 우대를 받아서 여러 신하들이 미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겸허하고 공경하여 마음을 터놓고 선비들에게 자신을 낮추었으며, 불공정하고 사사로운 것을 물리쳐서 몸소 남에게 솔선수범이 되었다.
조정에 들어가서는 극진히 규간規諫하고 나와서는 임금에게 을 돌리니, 석륵이 매우 소중히 여겨서 조회朝會할 때마다 항상 그를 위하여 용모를 바로하고 자기의 말[사령辭令]을 간략히 하였으며, 감히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우후右侯’라고 불렀다.
[] 12월에 우문씨宇文氏모용외慕容廆를 공격하였는데, 모용외가 그를 대파하고 마침내 요동遼東을 점령하고는 〈나라(동진東晉)에〉 장사長史 배억裴嶷(배억)을 보내와서 전리품을 바쳤다.
[] 평주자사平州刺史 최비崔毖注+① 崔毖는 崔琰의 증손이다. 선비와 백성들 중에 모용외慕容廆에게 귀의하는 자들이 많다 하여 불만스러운 마음을 품고서, 은밀히 고구려髙句麗, 를 설득해서 그들로 하여금 함께 모용외를 공격하게 하였다. 최비와 친한 고첨髙瞻이 강력히 하였으나 최비는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宇文氏攻慕容廆宇文氏攻慕容廆
세 나라가 병력을 연합하여 모용외를 공격하자, 모용외의 여러 장수들이 이들을 공격할 것을 청하였으나, 모용외가 말하기를 “저들은 최비의 꾐에 속아서 똑같이 이익을 얻기를 바란다. 군세軍勢가 처음 모여서 그 예봉銳鋒이 매우 날카로워 더불어 싸워서는 안 되니, 마땅히 굳게 지키면서 저들의 기세를 꺾어야 한다.
저들은 오합지졸이 모인 것이어서 아무도 상대를 복종시키지 못하고 있으니, 오래되면 반드시 각자 딴마음을 품고 배반할 것이다. 그런 뒤에 그들을 공격하면 틀림없이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세 나라가 극성棘城으로 진공進攻하자, 모용외가 성문을 닫고 스스로 지키면서 유독 우문씨에게만 쇠고기와 술을 보내어 위로하니, 〈고구려와 단씨〉 두 나라는 우문씨와 모용외 사이에 무슨 음모가 있는가 의심하여 각각 병력을 거느리고 돌아갔다.
[] 우문씨宇文氏사졸士卒 수십만이 40리에 걸쳐 병영이 길게 이어졌다. 그 대인大人실독관悉獨官注+① 悉獨官은 宇文氏 大人의 칭호이다. 말하기를 “두 나라가 비록 돌아갔으나 내 마땅히 홀로 모용외慕容廆를 사로잡겠다.” 하였다.
모용외가 사자를 보내어 아들 모용한慕容翰도하徒河에서 불러오자,注+② 慕容翰은 晉나라 愍帝 建興 원년(313)부터 徒河에 진주하고 있었다. 모용한이 말하기를 “저들은 병력이 많고 우리는 적으니, 힘으로 이기기는 어렵습니다. 밖에서 기병奇兵을 만들어서 저들의 틈을注+③ 間(틈)은 古莧의 切이니, 아래도 같다. 엿보아 공격하기를 청합니다.
만약 우리의 병력을 합하여 하나로 만들면, 저들이 을 공격하는 데 전념하게 될 것이니, 이는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하니, 모용외가 그의 말을 따랐다.
[] 실독관悉獨官이 이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모용한慕容翰이 성으로 들어가지 않으니, 어쩌면 〈뒤에서 우리의〉 근심이 될 수도 있다. 내 마땅히 먼저 그를 사로잡겠다.” 하고는, 수천 명의 기병騎兵을 나누어 보내 모용한을 기습하게 하였다. 모용한은 단씨段氏의 사자로 위장시켜 길에서 그들을 맞게 하고는 매복을 설치하고 기다렸다가 분격奮撃해서 모두 사로잡았다.
이에 승세를 틈타 곧바로 전진하면서 사잇길로 사신을 보내어 모용외慕容廆에게 말해서 군대를 출동하여 크게 싸우게 하였다. 선봉 부대가 처음 교전할 적에 모용한이 천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옆에서 곧바로 실독관의 진영으로 쳐들어가서 불을 놓아 태우니, 우문씨宇文氏의 무리가 마침내 크게 패하였다.
실독관이 겨우 몸만 빠져나가 죽음을 면하니, 모용외가 그 무리를 사로잡고 황제의 옥새와 세 인끈을注+① 옥새는 바로 宇文氏의 大人 普回가 사냥 나갔다가 얻은 것이다. 紐는 女九의 切이니, 옥새의 끈이다. 노획하였다.
[] 최비崔毖가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고구려髙句麗로 달아나자, 모용외慕容廆는 그 아들 모용인慕容仁으로 요동遼東에 진주하게 하니, 관청과 시장과 마을이 이전처럼 편안하였다.
모용외가 고첨髙瞻을 장군으로 삼았는데 고첨이 병을 칭탁하고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모용외가 여러 번 가서 문안하고 그의 마음속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그대의 병은 이 마음속에 있고 다른 데 있지 않다. 지금 나라 황실이 혼란하니, 나는 제군諸君들과 함께 세상의 난리를 깨끗이 소탕하고 황실을 보좌하고자 한다.
〈그런데 그대는〉 어찌하여 중화와 오랑캐가 다르다 하여 개연介然注+① “介然”은 견고하고 정직하여 태도를 바꾸지 않는 모양이다. 나를 소원하게 대하는가. 공업功業을 세우려 할 때에는 오직 뜻과 경략經略이 어떠한가를 따질 뿐이다.” 하였으나, 고첨은 여전히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모용외가 자못 언짢아하자, 고첨이 근심하다가 하였다.
모용외가 배억裴嶷을 보내서 표문과 함께 우문씨宇文氏에게서 얻은 옥새를 받들고 건강建康에 나아가 바치게 하였다.
[] 포홍蒲洪나라(전조前趙)에 항복하였다.


역주
역주1 劉遐와……周撫를 : 劉遐는 東晉의 下邳內史이고 徐龕은 泰山太守이다. 周撫는 彭城內史이다. 주무가 반란을 일으켜 石勒에게 항복하자 東晉에서 유하에게 조서를 내려 서감과 함께 주무를 토벌하게 시킨 것이다. 內史는 漢나라 때 제후국에 둔 관직으로 民政을 담당하였다. 西晉 때에 제후국에 두어 민정을 담당하게 하였다. 그 품계가 太守와 같았다. 이후 東晉과 南北朝에 설치되었다.
역주2 (梴)[挻] : 저본에는 ‘梴’으로 되어 있으나, ≪晉書≫ 〈地理志〉에 의거하여 ‘挻’으로 바로잡았다.
역주3 사신 : ≪資治通鑑≫에 보면 司徒 郭汜를 보낸 것이다. 아래의 ‘보낸 사신’도 바로 곽사를 가리킨 것이다.
역주4 警蹕 : 제왕이 출입할 때 행인의 통행을 막고 길을 깨끗이 청소하는 것을 이른다.
역주5 巳方 : 24방위의 하나로, 正南(午)에서 동쪽으로 2번째에 위치한 방향을 가리킨다. 동서남북을 24개로 나누고 12개의 地支와 8개의 天干(甲․乙․丙․丁․庚․辛․壬․癸), 그리고 4개의 卦(乾․坤․艮․巽)를 하나씩 배열하였다.
역주6 郊丘를……하였다 : 郊丘는 제왕이 하늘과 땅의 신에 제사하기 위해 지은 壇이다. 고대에서는 冬至에 南郊에서 天神에게 제사 지내고 夏至에 北郊에서 地祇에 제사 지낸다.
역주7 琅邪恭王 : 晉나라 元帝 司馬睿의 生父인 司馬覲을 이른다.
역주8 詔琅邪恭王爲皇考 既而罷之 : “≪資治通鑑綱目≫에 그 私親을 皇이라고 쓴 것이 많은데, 漢나라 宣帝 이래로 이것을 고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때 詔令을 내린 지 얼마 되지 아니하여 곧바로 뒤이어 罷하였으니, 元帝가 이때 諫言을 잘 따랐다고 이를 만하다. ‘既而罷之’라고 쓴 것은 허물을 고친 것을 아름답게 여긴 것이다.[書皇其私親 多矣 自漢宣帝以來 未之有改也 下詔未幾 尋繼以罷 元帝於是可謂能從諫矣 書曰既而罷之 美改過也]” ≪書法≫
역주9 塢主 : ‘塢’는 작은 성채나 보루를 뜻한다. 後漢 시기 羌族의 침략으로 변방에 塢侯를 설치한 것에서 그 연원을 찾으며, 西晉 말엽에 들어서면서 백성들이 自衛를 위하여 직접 설치하였다. 특히 유민들에 의해서 많이 만들어졌는데, 이 塢를 지배하는 자들을 塢主라 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譯註 思政殿訓義 資治通鑑綱目 13≫ 165쪽 참조.
역주10 : 反切音을 표시한 것이다. ‘反(번)’은 뒤집는다(되치다)는 뜻으로 번역을 의미하고, ‘切’은 자른다는 의미이다. 앞 글자의 初聲을 따고 뒷글자의 中聲과 終聲을 따서 읽는다.
역주11 立妃羊氏爲后 子熙爲太子 : “羊氏는 누구인가. 晉나라 惠帝의 后妃이다. ≪資治通鑑綱目≫에 이를 기록한 것은 중국을 위하여 몹시 슬퍼한 것이다. 양씨가 혜제의 후비가 된 뒤로 3번 폐출되었다가 3번 회복되었는데, 이때 또다시 아래로 같은 종족이 아닌 오랑캐의 배필이 되었으니, 前秦 〈苻登의 后妃인〉 毛氏에 비하면(孝武帝 太元 14년(389)) 부끄러워 죽을 만한 일이다.[羊氏 何 惠后也 綱目書之 其爲中國悲甚矣 羊氏自爲恵后 三廢三復 於是又下匹非類 視秦毛氏(孝武 太元十四年) 可以愧死矣]” ≪書法≫
역주12 南陽王保自稱晉王 : “‘自稱’이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비난한 것이다. 江東에서 황제의 지위를 바로잡아서 晉나라의 사직을 받들고 있는데 또 굳이 晉王을 칭했으니, 이는 다투는 것이다. ‘自’라고 써서 비난한 것이다.[書自稱 何 譏也 江東正位 晉之社稷有奉矣 而又必稱晉王 是争也 書自譏之]” ≪書法≫
역주13 元康 : 晉나라 惠帝 때의 연호로, 291년부터 299년까지 사용되었다.
역주14 周訪은……충분합니다 : 이 당시 주방은 양주지사로 있었다.
역주15 濟河와……지역 : 濟河는 兗州에 있는 濟水와 黃河로, ≪書經≫ 〈夏書 禹貢〉에 “제수와 황하에 연주가 있다.[濟河 惟兗州]”라고 보인다. 海岱는 渤海와 泰山 사이의 지역이다.
역주16 廆大敗之……來獻捷 : “‘來獻捷(와서 전리품을 바쳤다.)’이라고 쓴 것은 義를 인정한 것이니, ≪資治通鑑綱目≫은 慕容氏에 대하여 인정하여 취한 점이 있다.[書來獻捷 予義也 綱目於慕容氏有取焉]” ≪書法≫
역주17 段氏 : 鮮卑族의 일파이다. 西晉 때에 수령 段務目塵이 遼西公에 봉해졌는데, 그가 거느리던 3만 여의 가호가 遼西 일대에 흩어져 살았기 때문에 요서 선비라고도 한다. 石虎에게 격파를 당한 뒤에 대부분 漢人에게 同化되었다.
역주18 宇文氏 : 鮮卑族의 일파이다. 檀石槐 때에 선비족이 東․中․西의 三部로 나뉘었는데, 우문씨는 東部大人이었다. 뒤에 宇文覺이 西魏를 대신하여 北周를 건립하였다.

자치통감강목(14) 책은 2021.11.1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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