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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20)

자치통감강목(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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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강목(20)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梁中大通元年이요 魏永安二年이라
魏主 尊彭城武宣王하여 爲文穆皇帝하고 廟號 肅祖라하다
將遷神主於太廟而以高祖爲伯考어늘 臨淮王彧 諫曰 漢光武 於元帝 屬疎服絶호되 猶身奉子道하고 入繼大宗하여 别祀南頓君於舂陵注+① 服至袒免則無服, 謂之服絶.이어늘
況肅祖於髙祖 親北面爲臣乎 二后 皆將配享이니 此爲君臣竝筵이요 嫂叔同室이라 臣切以爲不可라하노이다 不聽注+② 筵, 席也.하다
請去帝著皇호되 亦不聽注+③ 著, 則略切. 請去帝著皇, 亦引漢悼皇共皇爲據.하니라 尋復尊無上王劭帝號어늘 又諫亦不聽하다
魏元天穆 將擊邢杲할새 以顥北上이라하여 乃集文武議之하니 皆曰 杲衆 彊盛하니 以爲先이니라
尙書薛琡曰 邢杲 鼠竊狗偷 非有遠志 帝室近親이라 來稱義擧하니 其勢難測이니 宜先去之注+① 顥, 北海王詳之子, 於魏主從兄弟也. 天穆不聽引兵東出이어늘
顥與陳慶之 乘虛하여 進拔滎城하니 有衆七萬이어늘 遂卽帝位於睢陽城南注+② 水經注 “春秋沙隨之地. 杜預注以爲‘卽梁國寧陵縣北之沙陽亭.’ 俗謂之堂城.” 滎․堂字相近, 意卽此地而字訛也.하니 攻魏行臺濟陰王暉業於考城하여 擒之注+③ 暉業, 景穆子, 小新成之曾孫也. 前漢梁國有甾縣, 後漢章帝更名考城, 屬陳留郡, 晉省, 宋屬濟陽郡.하다
魏元天穆 討邢杲平之하다
◑ 五月 魏王顥 取梁國滎陽虎牢注+① 提要王作主.하다
克梁國하니 魏都督楊昱 據滎陽이어늘 慶之 攻之未拔이러니 元天穆等하니
梁士卒皆恐이어늘 慶之解鞍秣馬하여 諭將士曰 君等 殺人父兄하며 掠人子女 多矣 天穆之衆 皆仇讐也
然我衆纔七千이요 虜三十餘萬이니 今日 唯有必死라야 乃可得生이니 當及其未盡至 急取其城而據之耳라하고 乃鼓之하니 將士 蟻附而入하여 執楊昱하니
諸將 請殺之注+① 蟻附, 言將士緣城而登, 若蟻之附木石墻壁而登高然.어늘 顥曰 我聞梁主 數稱袁昻之忠이라하니 今奈何殺昱乎注+② 言楊昱之不降魏, 猶袁昂之不降梁也. 袁昂事見齊和帝中興元年.리오
俄而天穆等 引兵圍城이어늘 慶之力戰破之하고 進拔虎牢하다
魏主子攸 奔河内어늘 入洛陽하여 以陳慶之爲車騎大將軍하다
魏主子攸 將出 未知所之어늘 勸之長安한대
中書舎人髙道穆 曰 關中 荒殘하니 何可復往이리오 顥兵 不多하고 乘虛深入하니 陛下 若親帥宿衛하여 背城一戰하시고 臣等 竭其死力하면 破顥必矣니이다
或恐勝負難期 則車駕 不若渡河하여 徵天穆及榮하여 引兵進討 萬全之策也니이다 子攸 遂走河内하다
臨淮王彧安豐王延明 帥百僚迎魏主顥어늘 入洛陽하여 以慶之 爲車騎大將軍하다 楊椿 時在洛陽하니 意忌之호되 以其人望으로 未敢誅也러니
勸椿出亡한대 椿曰 吾何所逃리오 正當坐待天命耳라하다
元天穆 拔大梁이어늘 使慶之 擊之注+① 大梁, 卽陳留浚儀縣.하다
天穆 將北走러니 郎中温子昇 曰 顥 新入하여 人情 未安하니 擊之必克이라 平定京邑하여 奉迎大駕 桓文之擧也어늘 捨此北渡하니 竊爲大王惜之하노이다 天穆 不能用注+② 上年魏以天穆爲太尉賜爵上黨王.이러라
費穆 攻虎牢將拔이러니 聞天穆하고 遂降이어늘 慶之 進擊大梁下之하다 慶之 以數千之衆으로 自發銍縣至洛陽 凡取三十二城하고 四十七戰 所向皆克注+③ 銍, 作乙切. 銍縣, 漢屬沛郡, 魏晉屬譙郡. 上年元顥襲魏銍城而據之.이러라
命黃門郎祖瑩하여 作書遺子攸曰 朕 泣請梁朝 誓在復恥하니 正欲問罪於爾朱 出卿於虎口耳라하더라 河南州郡 多附於顥하니
齊州刺史沛郡王欣 集文武議所從注+④ 欣, 羽之子也.이어늘
軍司崔光韶 抗言曰注+⑤ 光韶, 亮之從父弟也. 元顥 受制於梁하여 引寇讐之兵하여 以覆宗國하니 魏之賊臣亂子也 豈唯大王家事所宜切齒리오
下官等 皆荷朝眷하니 未敢仰從이라한대 衆皆是之어늘 乃斬顥使注+⑥ 朝眷, 謂朝廷恩眷也.하다
至洛陽하니 魏主顥 責以河陰之事而殺之注+① 穆勸爾朱榮殺王公.하다
魏湖陽 叛降于梁注+① 五代志, 舂陵郡湖陽縣, 後魏置西淮安郡及南襄州.하다
魏主子攸之出也 單騎而去하니 侍衛後宮 按堵如故 一旦得之하여 號令己出하니 四方 想其風政이라
而顥遽驕怠하여 近習 干政하고 日夜縱酒하여 不恤軍國하다 所從南兵 陵暴市里하니 朝野失望이러라
髙子儒 自洛陽出從子攸注+① 子儒, 道穆兄也.러니 子攸 問之한대 子儒曰 顥 敗在旦夕하리니 不足憂也니이다
爾朱榮 馳見子攸於長子한대 子攸 卽日南還할새 爲前驅하니 旬日之間 兵衆 大集注+② 爾朱榮旣至, 魏主有所倚以攻顥, 故卽日南還.이러라
既得志 與臨淮王彧安豐王延明으로 謀叛梁호되 以事難未平이라하여 藉陳慶之兵力이라 故外同内異하여 言多猜忌注+③ 難, 乃旦切.하다
慶之亦密爲之備하여 説顥曰 今遠來至此하여 未服者 尙多하니 彼若知吾虛實하여 連兵四合하면 將何以禦之리오 宜更請兵於梁이니이다
顥欲從之러니 延明 曰 慶之兵已難制어늘 今更增其衆이면 寧肯復爲人用乎 大權 一去 動息 由人이니 魏之宗廟 於斯墜矣리라
乃不用慶之言한대 軍副馬佛念 謂慶之曰注+④ 凡一軍有主有副. 將軍 功髙勢重하여 爲魏所疑하고 一旦變生不測이면 可無慮乎
不若乘其無備하여 殺顥據洛이니 此千載一時也라한대 慶之不從하다
先以慶之爲徐州刺史하니 慶之固求之鎭이어늘 心憚之하여 不遣이러라
爾朱榮兵至 慶之 守北中城하고 據南岸注+① 河橋南岸也.하다 慶之三日十一戰 殺傷 甚衆이러라 有夏州義士 爲顥守河中渚라가 與榮通謀하여 求破橋立效注+② 水經注曰 “河中渚上有河平侯祠, 河之南岸有一碑, 題曰‘洛陽北界.’” 意此中渚, 卽唐時河陽之中潬城也.러니
及橋破而榮兵 不至 顥悉屠之하니 榮既失望이요 又以無船으로 議還北하여 圖後擧어늘
黃門郎楊侃 曰 大王 發并州之日 已知夏州義士之謀指來應之邪 爲欲廣施經略하여 匡復帝室也 夫用兵者 何嘗不散而更合하며 瘡愈更戰이리오
況今未有所損하니 豈可以一事不諧而衆謀頓廢乎 今四方顒顒하여 視公此擧注+③ 顒顒, 仰望也. 義與喁喁同.하니
若未有所成하여 遽復引歸 民情失望하여 各懷去就하리니 勝負所在 未可知也
不若多爲桴筏하고 間以舟楫하여 數百里中 皆爲渡勢하여 使顥不知所防이라가 一旦得渡하면 必立大功注+④ 小曰桴, 大曰筏. 二者, 皆編竹木以浮江河而運物者.하리라
髙道穆 曰 今若北歸하여 使顥復得徵兵完聚 養虺成蛇하여 悔無及矣注+⑤ 逸書曰 “爲虺不摧, 爲蛇柰何.” 以文義觀之, 蓋以虺爲小蛇. 乃使爾朱兆 與賀拔勝縛筏夜渡注+⑥ 兆, 榮之從子也.하니
軍潰失據하여 帥麾下南走어늘 慶之收衆하여 結陳而還이러니 追之하니 慶之軍士 死散略盡이라 乃削須髪爲沙門하여 間行還建康하다
中軍大都督楊津 入宿殿中하여 洒掃宮庭하고 封閉府庫하고 出迎魏主子攸於北邙하여 流涕謝罪하니 子攸 遂入洛陽하여 加榮天柱大將軍注+⑦ 天柱, 前無此號, 魏主以爾朱榮功高, 特置以寵之.하다
至臨潁하여 爲人所殺注+⑧ 臨潁縣, 自漢以來屬潁川郡.하니 復自歸於魏主하고 延明 奔梁하다
慶之自魏還 特重北人이어늘 朱异問之注+⑨ 异, 音異.한대 曰 吾 始以爲大江以北 皆戎狄之鄕이어늘 比至洛陽 乃知衣冠人物 非江東所及也 奈何輕之리오


梁나라 高祖 武帝 蕭衍 中大通 원년이고 北魏 敬宗 孝莊帝 元子攸 永安 2년이다.
【綱】 봄 정월에 魏主(元子攸)가 그의 아버지 元勰을 追尊하여 皇帝로 삼았다.
【目】 魏主가 彭城武宣王(元勰)을 추존하여 文穆皇帝로 삼고 廟號를 肅祖라고 하였다.
장차 神主를 太廟로 옮기고 高祖(孝文帝)를 伯考로 삼고자 하였는데, 臨淮王 元彧이 간언하기를 “東漢 光武帝는 西漢 元帝에 대해서 종족 관계가 소원하여 상복이 끊어졌는데도 도리어 자진해서 아들의 도리로 받들고 들어와 大宗을 계승하여, 〈生父〉 별도로 제사하였습니다.注+① 服이 에 이르게 되면 服이 없어지니 이것을 ‘服絶’이라고 말한다.
하물며 肅祖는 髙祖에게 친히 北面하여 신하가 된 것에 있어서겠습니까. 두 분 황후가 모두 配享될 것이니 이는 임금(元宏)과 신하(元勰)가 자리를 나란히 하는 것이고 형수(元宏皇后)와 媤叔(元勰)이 사당의 한 방에 있는 것입니다. 신은 매우 불가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다. 魏主가 따르지 않았다.注+② 筵은 자리라는 뜻이다.
〈元彧이〉 ‘帝’를 버리고 ‘皇’으로 기록하자고 청했는데 또한 따르지 않았다.注+③ 著(기록하다)는 則略의 切이다. ‘帝’를 버리고 ‘皇’으로 기록하자고 청한 것은 또한 漢나라 을 근거로 삼은 것이다. 이윽고 다시 〈魏主의 형인〉 無上王 元劭를 높여 ‘帝’로 호칭하자 원욱이 다시 간언하였으나 또한 따르지 않았다.
【綱】 여름 4월에 魏王 元顥가 滎城을 함락시키고 皇帝라 칭하였다.
【目】 北魏 元天穆이 군사를 거느리고 邢杲를 공격하려 할 때에 元顥의 군대가 北上한다고 하여 이에 文武 신하들을 모아놓고 의론하니 모두 말하기를 “형고의 무리가 强盛하니 마땅히 먼저 공격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尙書 薛琡이 말하기를 “형고는 쥐나 개처럼 물건을 훔치는 좀도둑과 같기 때문에 원대한 뜻을 가지고 있지 않고, 원호는 황실의 근친으로 와서 義擧라고 칭합니다. 그의 세력을 헤아리기 어려우니니 마땅히 먼저 그를 제거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注+① 元顥는 北海王 元詳의 아들이며 魏主(元子攸)에게는 從兄弟이다. 원천목이 따르지 않고 병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나갔다.
원호가 陳慶之와 함께 빈틈을 타서 진군하여 滎城을 함락하니, 병사 7만 명을 소유하였다. 이에 〈원호가〉 마침내 睢陽城 남쪽에서 황제로 즉위하였다.注+② 〈滎城은〉 ≪水經註≫에 “≪春秋≫의 沙隨의 땅인데, 杜預 注에 말하기를 ‘곧 梁國 寧陵縣 북쪽의 沙陽亭이다.’ 하였다. 민간에서 堂城이라고 말한다.”라고 하였다. 滎과 堂은 글자가 서로 비슷하니, 생각건대 이 땅(榮城)에 따라 〈‘堂’으로〉 글자가 잘못된 것이다. 〈진경지가〉 北魏의 行臺 濟陰王 元暉業을 考城에서 공격하여 사로잡았다.注+③ 元暉業은 元景穆의 아들이며 拓跋小新成의 曾孫이다. 前漢 때에는 梁國에 甾縣에 있었고 後漢 章帝 때에 考城이라고 이름을 고쳤으며, 陳留郡에 소속하였고, 晉나라 때에는 〈考城을〉 없앴고, 宋나라(劉宋) 때에는 濟陽郡에 소속하였다.
【綱】 北魏 元天穆이 邢杲를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綱】 5월에 魏王 元顥가 梁國과 滎陽과 虎牢를 점령하였다.注+에는 王이 主로 되어 있다.
【目】 元顥가 梁國을 함락하니, 北魏 都督 楊昱이 滎陽을 점거하거늘 陳慶之가 그를 공격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였는데, 元天穆 등이 형양에 이르렀다.
梁나라 士卒이 모두 두려워하였는데, 진경지가 안장을 풀고 말을 먹이며 將士들을 깨우치기를 “諸君들이 북위 사람들의 父兄을 죽이며 그들의 子女를 노략질한 것이 많으니, 원천목의 병사들은 모두 원수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우리 병사는 겨우 7천이고 오랑캐는 병사는 30여만 명이나 되니 오늘 오직 반드시 죽을 각오로 싸워야만 마침내 살아날 수 있다. 마땅히 아직 군대가 다 도착하지 않았을 때에 빨리 성을 빼앗아 점거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고, 마침내 북을 치니 將士들이 개미 떼처럼 성벽에 붙어서 침입하여 양욱을 잡았다.
諸將들이 그를 죽이기를 청하였는데,注+① ‘蟻附’는 將士들이 城에 붙어서 올라가는 것이 마치 개미가 나무와 돌로 된 장벽에 붙어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과 같다고 말한 것이다. 원호가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梁主(蕭衍)가 袁昻의 충성을 자주 말하였다고 하니, 지금 어찌 〈북위의 충신인〉 양욱을 죽일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注+② 楊昱이 北魏에 항복하지 않은 것은 袁昂이 梁나라에 항복하지 않은 것과 같음을 말한다. 袁昂의 일은 齊 和帝(蕭寶融) 中興 원년(501)에 보인다.
조금 뒤에 원천목 등이 병사를 이끌고 형양성을 포위하였는데, 진경지가 힘써 싸워서 원천목을 격파하고 진군하여 虎牢를 함락하였다.
【綱】 魏主 元子攸가 河内로 달아났는데 元顥가 洛陽에 들어가서 陳慶之를 車騎大將軍으로 삼았다.
【目】 魏主 元子攸가 낙양을 떠나려고 할 적에 가야할 곳을 알지 못하였는데 혹자가 長安으로 갈 것을 권하자
中書舎人 髙道穆이 말하기를 “關中이 황폐해졌으니 어찌 다시 갈수 있겠습니까. 元顥의 병사들이 많지 않고 빈틈을 타서 깊이 들어왔으니 폐하께서 만약 친히 宿衛兵을 이끌고서 성을 등지고 한 차례 전쟁을 하시고 신들이 死力을 다하면 원호를 반드시 격파할 것입니다.
혹은 승부를 기약하기 어렵다고 우려되시면 車駕가 황하를 건너서 元天穆과 爾朱榮을 불러 병사를 이끌고 나가 토벌하게 하는 것만 못하니, 이것이 萬全의 계책입니다.” 하였다. 元子攸가 마침내 河内로 달아났다.
【目】 臨淮王 元彧과 安豐王 元延明이 백관을 거느리고 魏主 元顥를 맞이하였다. 원호가 洛陽에 들어가서 陳慶之를 車騎大將軍으로 삼았다. 楊椿이 당시에 낙양에 있었는데, 원호가 마음에 그를 꺼렸으나 인망이 있었기 때문에 감히 죽이지는 못하였다.
혹자가 양춘에게 도망칠 것을 권하였으나 양춘이 말하기를 “내가 어디로 도망치겠는가. 바로 앉아서 天命을 기다릴 뿐이다.”라고 하였다.
元天穆이 大梁城을 빼앗았는데, 원호가 진경지에게 공격하게 하였다.注+① 大梁은 곧 陳留 浚儀縣이다.
원천목이 장차 북쪽으로 달아나려고 하니, 郎中 温子昇이 말하기를 “원호가 막 낙양에 들어와서 人情이 편안하지 못하니 그를 공격하면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京邑(낙양)을 평정하여 大駕를 받들어 맞이하는 것은 이 거행한 일입니다. 이곳을 버리고 북쪽으로 황하를 건너가려고 하니 저으기 大王을 위하여 이를 애석하게 여깁니다.”라고 하였는데, 원천목이 그 계책을 쓰지 않았다.注+② 지난해에 北魏가 元天穆을 太尉로 삼고 上黨王의 爵位를 하사하였다.
〈北魏의〉 費穆이 虎牢關을 공격하여 함락시킬 지경에 이르렀을 때 원천목이 달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진경지에게〉 항복하였다. 진경지는 大梁城으로 진격하여 함락시켰다. 진경지는 수천 군사를 데리고 銍縣에서 출발하여 낙양에 이르기까지 모두 32개의 성을 빼앗고 47번을 싸웠는데 향하는 곳마다 모두 이겼다.注+③ 銍은 作乙의 切이다. 銍縣은 漢나라 때에는 沛郡에 소속하였고, 魏나라(曹魏)와 晉나라 때에는 譙郡에 소속하였다. 지난해에 元顥가 北魏 銍城을 습격하여 점거하였다.
원호가 黃門郎 祖瑩에게 명하여 편지를 써서 원자유에게 보내기를 “朕이 울면서 梁朝에 병사를 출동해줄 것을 청했던 것은 맹세코 치욕을 갚는 데에 있소. 바로 爾朱榮에게 죄를 묻고 卿을 호랑이 아가리에서 꺼내려고 했을 뿐이오.”라고 하였다. 황하 남쪽의 州郡이 대부분 원호에게 귀부하였다.
齊州刺史 沛郡王 元欣이 문무 관리들을 모아서 어디를 따를지 의론하였는데,注+④ 元欣은 元羽의 아들이다.
軍司 崔光韶가 큰 소리로 말하기를注+⑤ 崔光韶는 崔亮의 사촌 아우이다. “원호가 梁나라에게 지휘를 받고 怨讐의 병사를 이끌고서 宗國(북위)을 전복하려고 하였으니 이것은 북위의 賊臣亂子입니다. 어찌 大王의 집안일로만 이를 갈아 원망할 뿐이겠습니까.
저 下官 등은 모두 조정의 돌봄을 받았으니 감히 우러러 〈대왕께서 원호에게 투항한다는 말을〉 따르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자, 무리들이 모두 옳다고 하였다. 원흔이 마침내 원호가 보낸 사자의 목을 베었다.注+⑥ ‘朝眷’은 조정의 은혜와 돌봄을 받은 것을 말한다.
【綱】 6월에 北魏 都督 費穆이 伏誅되었다.
【目】 費穆이 洛陽에 이르니 魏主 元顥가 河陰의 일을 문책하여 費穆을 죽였다.注+① 費穆이 爾朱榮에게 권하여 王公들을 죽이게 했었다.
【綱】 北魏의 湖陽이 반란하여 梁나라에 항복하였다.注+① ≪五代志≫에 보면 舂陵郡 湖陽縣은 北魏 때에 西淮安郡과 南襄州에 설치하였다.
【綱】 윤6월에 北魏의 爾朱榮이 黃河를 건너니, 魏王 元顥가 달아나다가 죽었고 陳慶之가 달아나서 梁나라로 돌아갔다. 魏主 元子攸가 洛陽으로 돌아오니 이주영이 스스로 天柱大將軍이 되었다.注+① ≪資治通鑑綱目提要≫에는 王이 主로 되어 있다.
【目】 魏主 元子攸가 洛陽을 떠날 때에 單騎로 가니 侍衛와 後宮은 예전처럼 편안하게 있었다. 원호가 하루아침에 낙양을 얻고 號令이 자기에게서 나오자 사방의 백성들은 美風의 정치를 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원호는 갑자기 교만하고 나태해져서 윈호를 가까이 모시는 소인들이 정치에 관여하였고 밤낮으로 술을 방종히 마시며 軍國의 사무를 걱정하지 않았다. 따라온 南兵(梁나라 군사)들이 市街와 마을 사람들을 능멸하며 포악하게 구니 朝野가 실망하였다.
髙子儒는 낙양에서부터 원자유를 따랐다.注+① 髙子儒는 髙道穆의 형이다. 원자유가 묻자 고자유가 말하기를 “원호의 패배가 아침저녁 사이에 있을 것이니 걱정거리가 못 됩니다.”라고 하였다.
爾朱榮이 말을 달려 長子에서 원자유를 알현하였다. 원자유가 그날로 남쪽으로 돌아갈 적에 이주영이 선봉이 되니, 열흘 사이에 병사들이 크게 모였다.注+② 爾朱榮이 이르고 나자 魏主(元子攸)는 의지하는 곳이 있어 元顥를 공격하였으므로 그날 남쪽으로 돌아간 것이다.
원호가 뜻을 이루고 나자 臨淮王 元彧과 安豐王 元延明과 함께 梁나라를 배반할 것을 도모했는데, 병란이 아직 평정되지 못하였다 하여 陳慶之의 兵力에 의지하였다. 그러므로 겉으론 함께 하였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여 猜忌하는 말이 많았다.注+③ 難(난리)은 乃旦의 切이다.
진경지 역시 은밀하게 그들을 방비하며 원호를 설득하기를 “지금 〈梁나라에서부터〉 멀리 와서 이곳 낙양에 이르렀기 때문에 승복하지 않는 자가 여전히 많습니다. 저들이 만약 우리의 虛實을 알아 병사들을 연합하여 사방에서 모여들면 장차 어떻게 막을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다시 양나라에 병사를 청구해야 합니다.”라고 하니,
원호가 그의 말을 따르려고 하였는데, 원연명이 말하기를 “진경지의 병사들을 이미 제압하기 어려운데 지금 다시 병사를 더해주면 어찌 다시 남에게 부림을 받으려고 하겠습니까. 大權이 한 번 떠나면 일거일동이 남에게서 결정되니, 北魏의 宗廟가 여기에서 무너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원호가 결국 진경지의 말을 듣지 않자, 軍副將 馬佛念이 진경지에게 말하기를注+④ 무릇 1軍에는 主將이 있고 副將이 있다. “장군께서 공이 높고 세력이 중하여 魏나라(원호)에게 의심을 받고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예측할 수 없는 변고가 생기면 근심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방비가 없는 틈을 타서 원호를 죽이고 낙양을 점거하는 것만 못하니, 이것은 천 년에 한 번 오는 기회입니다.”라고 하였으나 진경지가 따르지 않았다.
원호가 이전에 진경지를 徐州刺史로 삼았는데, 진경지가 서주로 가서 鎭守할 것을 굳게 요구하였다. 원호가 마음속으로 그를 꺼려서 서주로 보내지 않았다.
【目】 爾朱榮의 병사가 도착할 때에 陳慶之는 北中城을 지키고 元顥는 南岸을 점거하였다.注+① 〈南岸은〉 河橋의 남쪽 언덕이다. 진경지가 3일에 11번을 싸워서 자기의 군사들 중에 죽거나 상한 자가 매우 많았다. 夏州 義士들이 원호를 위하여 河中渚를 지키고 있다가 이주영과 내통하여 河橋를 파괴하여 공을 세울 것을 이주영에게 청하였다.注+② ≪水經注≫에 “河中渚 위에 河平侯祠가 있고, 황하의 남쪽 연안에 하나의 비석이 있는데 쓰기를 ‘洛陽의 북쪽 경계이다.’ 하였다.” 하였다. 생각하건대 이 中渚는 바로 唐나라 시대에 河陽의 中潬城인 듯하다.
그러나 河橋을 파괴할 때에 미쳐 이주영의 병사가 도착하지 못하니, 원호는 하교를 파괴한 자들을 모두 죽였다. 이에 이주영은 이미 失望을 하였고 또 배가 없었기 때문에 북쪽으로 돌아갈 것을 의논하고 후일에 병사를 일으킬 것을 도모하였는데,
黃門郎 楊侃이 말하기를 “大王께서 并州를 출발하는 날에 이미 夏州 義士들이 밀모하여 와서 내응할 것을 알았단 말입니까. 經略을 널리 펴서 帝室을 바르게 회복하고자 한 것입니다. 병사를 쓸 적에 어찌 〈병사들이〉 흩어지면 다시 결집하고서 상처가 나으면 다시 싸우게 한 적이 없단 말입니까.
더구나 지금은 손실된 것이 없는데, 어찌 한 가지 일이 순조롭지 않다고 해서 여러 모책을 갑자기 폐기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사방의 백성들이 우러러보며 公의 이러한 거사를 주목하고 있습니다.注+③ ‘顒顒’은 우러러 바라보는 것이다. 뜻은 喁喁과 같다.
만약 아직 공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군사를 이끌고 다시 돌아가면 민심이 실망하여 제각기 떠날 뜻을 품을 것이니, 승부의 소재를 알 수 없습니다.
뗏목을 많이 만들고 그 사이에 배를 써서 수백 리 안에 모두 〈황하를〉 건너갈 형세를 만드는 것만 못하니, 원호에게 막을 곳을 알지 못하게 하다가 하루아침에 건너가면 반드시 큰 공을 세우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注+④ 작은 뗏목을 桴라고 하고, 큰 뗏목을 筏이라고 한다. 두 가지는 모두 대나무와 나무를 엮어서 만들어 江河에 띄워 물건을 운반하는 것이다.
髙道穆이 말하기를 “지금 만약 북쪽으로 돌아가서 원호에게 다시 병사들을 불러들여 완전하게 모이게 한다면 새끼 뱀을 길러 뱀을 만들게 되어 後悔莫及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注+⑤ 逸書에 “새끼 뱀 때 죽이지 않으면, 큰 뱀이 되었을 때는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하였으니, 글의 뜻으로 본다면 ‘虺’를 작은 뱀으로 여긴 것이다. 이주영이 마침내 爾朱兆에게 賀拔勝과 함께 뗏목을 묶어 타고 밤에 황하를 건너가게 하였다.注+⑥ 爾朱兆는 爾朱榮의 조카이다.
원호는 군대가 무너져 근거지를 잃어 휘하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달아났다. 진경지가 무리를 거두어 軍陣을 결성하여 돌아갔다. 이주영이 그를 추격하니 진경지의 군사가 죽고 흩어져 거의 전멸하였다. 이에 〈진경지는〉 머리와 수염을 깎고 沙門이 되어 샛길을 통해 建康으로 돌아갔다.
中軍大都督 楊津이 殿中에 들어가 숙직하여 宮庭을 청소하고 府庫를 봉쇄하고, 魏主 元子攸를 北邙으로 나가 맞이하고서 謝罪하며 눈물을 흘렸다. 원자유가 마침내 洛陽에 들어와서 이주영에게 天柱大將軍을 더해주었다.注+⑦ 天柱는 이전에 이런 호칭이 없었는데, 魏主가 爾朱榮의 공이 높은 것으로 해서 특별히 이 관직을 설치하여 총애한 것이다.
원호가 臨潁縣에 도착하여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였다.注+⑧ 臨潁縣은 漢나라 이래로 潁川郡에 속하였다. 元彧이 다시 스스로 魏主(원자유)에게 돌아갔고, 元延明이 梁나라로 달아났다.
진경지가 북위에서 양나라로 돌아왔을 적에 특별히 北人을 중시하였는데 朱异가 그 이유를 묻자注+⑨ 异는 음이 異이다. 〈진경지가〉 말하기를 “내가 처음에는 大江 이북이 모두 戎狄의 고을이라고 생각했는데 洛陽에 이르고 나서 마침내 衣冠과 人物이 江東에서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어찌 그들을 경시하겠는가.”라고 하였다.
筏


역주
역주1 魏主追尊其父勰爲皇帝 : “哀帝가 그 아버지를 추존하였는데 예절의 합당한지 여부를 논하지도 않았다. 이에 곧바로 文穆皇帝라고 일컬었으니 심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에서는 文穆을 기록하지 않았으니 나무란 것은 皇帝라는 말에 있는 것이지 文穆이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다.[哀帝追尊其父 未論禮之當否 於是直稱文穆皇帝 甚矣 綱目不書文穆 譏在於皇帝 不在於文穆也]” ≪書法≫
“魏主가 그 아버지를 추존하였는데 예법에 합당한지 여부를 논하지도 않았다. 이때에 국운이 매우 위태로워 깃대에 매단 술이 흔들리듯 하고[綴旒] 전쟁이 교외에서 일어나고 강포한 신하들이 명령을 마음대로 내며 도적들이 가득하였다. 魏主는 두려운 처지에 있으면서 몸도 보전하지 못하니 영광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데 자기 아버지를 추존하여 영광스럽게 하였으니 자기 분수를 모름을 많이 내보인 것이다. 또 帝는 天下를 소유한 자를 일컫는데 元勰은 종신토록 北面(신하 노릇 함)하다가 온당한 죽음을 얻지 못했거늘 祖宗의 昭穆에 어찌 入廟할 수 있겠는가. 魏主는 모두 이를 생각하지 않았거늘 더구나 爾朱榮은 한창 옹립한 것으로 공로를 내보이고 바로 공로를 미루어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았으니, 오히려 재앙을 면하지 못할까 두려워해야 하는데 어찌 지위로 즐거움을 삼아서 禮가 아닌 禮를 거행하여 위로 자기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려고 할 것이 있겠는가. 곧바로 册에 기록하였으니 잘못임을 알 수 있다.[魏主追尊其父 未論禮之當否 是時國祚 危甚綴旒 戎馬在郊 强臣擅命 寇盗充斥 魏主居可畏之地 身之不保 榮於何有 乃欲追榮其父 多見其不知量也 且帝者 有天下之稱 勰終身北面 不得其死 祖宗昭穆 若何入廟 魏主皆不此之思 況爾朱方以扶立示功 正使推而弗居 猶懼不免 烏在以位爲樂 而欲擧非禮之禮 上榮其考哉 直書于册 繆可知矣]” ≪發明≫ ‘綴旒’는 군주가 신하에게 실권을 잃거나 나라가 위태로운 것을 말한다. ‘旒’는 旗에 매달린 술로 아래에서 마음대로 흔들 수 있음을 뜻한다.
역주2 南頓君을 舂陵에다 : 南頓君은 光武帝의 아버지로 劉欽이고, 舂陵은 縣名이다.
역주3 袒免 : 斬衰ㆍ齊衰ㆍ大功ㆍ小功ㆍ緦麻 등 五服 이외의 친척에 해당하는 喪服 제도이다. 免(문)은 冠을 벗고서 머리를 묶는 것이고, 袒은 윗옷의 왼쪽 소매를 벗어 초상의 격식을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역주4 悼皇과 共皇 : 漢 武帝의 맏아들 戾太子가 巫蠱를 당하여 자결하였는데 宣帝 때 悼皇으로 追封하고, 漢 哀帝가 生父를 共皇으로 추존한 일을 말한다.
역주5 魏王顥拔滎城 稱皇帝 : “‘스스로 즉위했다[自立]’라고 기록하지 않고 ‘일컬었다[稱]’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元顥가 스스로 일컬은 것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社稷에 주인이 있는데 원수의 국가(梁나라)에 의지하여 그 종족을 쳤으니 이것은 다툼이다. 그러므로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원호의 일신을 ‘魏王’이라고 일컬은 것이다.[不書自立 書稱 何 不予顥之自稱也 社稷有主 而仗讐國 以伐其宗 是爭也 故綱目終顥之身稱魏王]” ≪書法≫
역주6 (官)[宜] : 저본에는 ‘官’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宜’로 바로잡았다.
역주7 資治通鑑綱目提要 : 朱子가 ≪資治通鑑綱目≫을 편찬할 때 사전에 만든 59권의 책을 가리키는데, 현재 전하지 않는다.
역주8 魏主子攸奔河内……以陳慶之爲車騎大將軍 : “子攸라고 이름을 쓴 것은 어째서인가. 國都를 잃었기 때문이다.[名子攸 何 失國也]” ≪書法≫“子攸라고 어째서 이름을 썼는가. 국토를 잃은 임금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이때에 元顥는 이미 ‘帝’를 일컬었는데 만약 곧바로 ‘魏主’라고 기록하면 누가 元顥이고 누가 元子攸인지 알지 못하므로 이름으로 구별했을 뿐이다. 이와 같이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資治通鑑綱目≫이 되겠는가.[子攸何以名 失地之君也 況是時顥既稱帝 若直書魏主 則不知其孰爲顥 孰爲子攸 故名以别之爾 不如是 何以爲綱目]” ≪發明≫
역주9 齊 桓公과 晉 文公 : 두 나라 군주는 春秋時代에 霸業을 이룩하였다.
역주10 魏都督費穆伏誅 : “費穆을 주살한 것은 元顥이다. 원호는 帝가 된 것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誅’라고 기록하였는가. 河陰의 일은 비목이 爾朱榮을 도와서 학살을 하였으니 이 또한 역적일 뿐이다. 역적은 사람마다 주살할 수 있는 것이다.[誅穆者 顥也 不成顥之爲帝 則曷爲以誅書 河陰之役 穆助榮爲虐 是亦賊而已矣 逆賊 人得而誅之]” ≪書法≫
역주11 魏爾朱榮……榮自爲天柱大將軍 : “元顥는 임금이 되지 못해서 또한 魏王으로 기록하였으니, 元顥는 진실로 元子攸의 부류이다. 만일 원호가 성공한다면 한 명의 원자유이고, 원자유가 성공하지 못한다면 또한 한 명의 원호일 뿐이다. 대등하게 기록하였으니 어찌 지나친 것이겠는가.[顥未成乎君 而亦以魏王書之 顥固子攸之類也 使顥有成 則一子攸 子攸無成 亦一顥爾 等而書之 夫豈過哉]” ≪發明≫

자치통감강목(20) 책은 2022.11.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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