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時에 豫州刺史蕭懿가 將兵在小峴이라 齊主가 遣密使告之하다 懿가 方食이라가 投箸而起하여 自采石濟江하다
恭祖
가 先勸慧景
하여 遣二千人斷西岸兵令不得度
한대 不從
注+① 西岸兵, 謂蕭懿兵入援自江西來也.하다
至是
에 請擊懿軍
호되 又不許
하고 獨遣崔覺
하여 將數千人渡南岸
이라가 戰敗
注+② 覺, 慧景之子也. 南岸, 秦淮南岸也.하다
恭祖가 掠得東宮女伎러니 覺이 逼奪之하다 恭祖가 積忿恨하여 詣城降하니 衆心離壊라
慧景이 將腹心數人하고 潜去러니 從者於道稍散이라 爲人所殺하다
寶玄이 逃亡數日이라가 乃出하니 齊主가 殺之하다
初에 慧景이 欲交處士何點한대 點이 不顧러니 及圍建康에 逼召點한대 點이 往赴之하여 日談佛義하고 不及軍事러니
慧景
이 敗
에 齊主
가 欲殺點
이어늘 蕭暢
이 曰 點若不誘賊共講
이면 未易可量
注+③ 言點若不與慧景講義, 則慧景日以攻城爲事, 安危未可量也.이니 以此言之
한대 乃應得封
이니이다 齊主
가 乃止
하니 點
은 胤之兄也
러라
目
【目】 裵叔業은 齊主(蕭寶卷)가 자주 大臣을 죽인다는 소문을 듣고 마음이 스스로 편안하지 않아서
사람을 보내 襄陽에 이르러서 蕭衍에게 묻기를 “天下의 大勢를 알 만하니, 다시 자신을 보존할 도리가 없을 듯합니다. 北魏에 전향하여 귀순하는 것만 못하니, 河南公이 되는 것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注+① 만약 북위에 항복하더라도 관작과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소연이 회답하기를 “〈현재 조정에〉 소인배들이 권력을 휘두르니 어찌 오래갈 수 있겠습니까. 오직 家屬들을 서울로 돌려보내서 그들을 안심시켜야 합니다.
만약 뜻밖에 핍박을 받게 되면 응당 기병과 보병을 거느려서 곧장 横江으로 나가서 그들 부대의 후미를 끊으면 천하의 일을 일거에 평정할 수 있습니다.
注+② 壽陽 남쪽에서부터 歷陽에 이르러 橫江으로 나간다.
만약 북위에 전향하고자 한다면 저들이 반드시 다른 사람을 보내 당신의 직무를 대체하고 河北의 한 州에 머물게 할 것이니 河南公을 어찌 다시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배숙업이 머뭇거리며 의심하여 결정을 못하고
注+③ “沈疑”는 머뭇거리며 의심함이다. 마침내 아들 裵芬之를 파견하여 建康에 인질로 들여보내고 또한 편지를 북위 豫州刺史 薛眞度에게 보내서 북위에 투항하는 것이 응당 옳은지 아닌지를 묻자
注+④ 北魏의 豫州는 懸瓠城에 治所를 두고, 汝南郡ㆍ新蔡郡ㆍ弋陽郡 등을 통솔하였다. 不는 否로 읽는다. 설진도가 일찍 항복하기를 권하였다. 배숙업은 마침내 사신을 보내 표문을 받들어 보내 북위에 항복을 하였다.
북위가 驃騎大將軍 彭城王 元勰과 將軍 王肅을 보내서 步兵과 騎兵 10만 명을 거느리고 달려가게 하였다.
다시 팽성왕 원협을 司徒 領揚州刺史를 삼아서 壽陽에 鎭守하게 하였는데, 배숙업이 얼마 뒤에 卒하였다.
注+⑤ 壽陽은 東漢부터 이래로 揚州의 治所가 되었고, 宋나라 때에는 처음으로 豫州의 治所가 되었으니, 지금 그 옛날을 회복한 것이다.
目
【目】 이때에 豫州刺史 蕭懿가 군사를 거느리고 小峴에 있었기 때문에 齊主(蕭寶卷)가 몰래 사람을 보내 이 사실을 고해주었다. 소의가 막 밥을 먹다가 젓가락을 던지고 일어나 〈군사를 거느리고〉 采石에서 長江을 건너갔다.
崔恭祖가 먼저 崔慧景에게 권하여 2천 명을 보내 西岸의 군사들을 차단하여 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자고 하였으나 최혜경은 따르지 않았다.
注+① “西岸兵”은 蕭懿의 병사들이 들어와 구원하고자 江의 서쪽에서 오는 것을 말한다.
이때에 이르러 소의의 군대를 공격할 것을 최혜경에게 요청하였으나 또 허락하지 않고, 다만 崔覺을 보내 수천 명을 거느리고 南岸으로 건너가게 하였다가 전투에 패하였다.
注+② 崔覺은 崔慧景의 아들이다. 南岸은 秦淮河 南岸이다.
최공조가 東宮의 女伎를 사로잡았는데 최각이 핍박하여 빼앗아 가니, 최공조가 분노와 원한이 쌓여서 宮城에 가서 항복하니 최혜경의 軍心이 이반되어 무너졌다.
최혜경이 심복 몇 사람을 데리고 몰래 떠나갔는데, 따르는 사람들이 도중에 차츰 흩어졌다. 최혜경은 어떤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蕭寶玄이 며칠 동안 도망갔다가 마침내 나타나니, 齊主가 그를 죽였다.
예전에 최혜경이 處士 何點과 교류하려 하였는데, 하점이 돌아보지 않았다. 建康을 포위하였을 때 하점을 핍박하여 불렀는데 하점이 최혜경에게 달려가서 날마다 佛經의 義理를 담론하고 군대의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최혜경이 패망한 후에 齊主가 하점을 죽이려고 하였는데 蕭暢이 말하기를 “하점이 만약 역적(최혜경)을 유인하여 함께 불경을 강론하지 않았다면 조정의 안위를 헤아리기 쉽지 않습니다.
注+③ 〈“點若不誘賊共講 未易可量”은〉 何點이 만약 崔慧景에게 佛經의 의리를 강론해주지 않았다면 최혜경이 날마다 城을 공격하는 것을 일삼았을 것이니, 〈조정의〉 安危를 헤아릴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말하자면 응당 봉작을 받아야 합니다.”라고 하니, 齊主가 마침내 그만두었다. 하점은 何胤의 형이다.
目
【目】 이보다 앞서 崔慧景이 평정된 후에 齊主(蕭寶卷)가 조서를 내려 그의 黨與들을 사면하였다. 그러나 嬖倖이 권세를 휘둘러 부유한 집안을 誣陷해서 賊黨이라 하여 죽여서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였다.
혹자가 中書舍人 王咺之에게 말하기를 “사면 조서를 믿을 수 없으니, 인심이 크게 나빠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注+① 惡(나쁘다)은 본음대로 읽는다. 왕훤지가 말하기를 “바로 다시 사면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두 번째 사면을 하였는데 嬖倖들이 貪虐하기가 처음과 같았다.
이때에 齊主가 총애하는 측근은 모두 31명이었는데 그중 黄門이 10명이었다. 直閣 徐世檦가 평소에 齊主에게 委任을 받았는데, 그의 黨羽 茹法珍과 梅蟲兒 등이 그와 함께 권력을 다투다가 서세표를 참소하여 죽였다.
이로부터 두 사람이 정권을 잡아 아울러 外監이 되고 口頭로 詔令과 敕命을 칭하였다. 왕훤지가 文翰을 전담하여 서로 함께 입술과 이의 관계가 되었다.
目
【目】 당시에 南康王 蕭寶融이 荆州刺史가 되었고 長史 蕭頴冑가 行府州事가 되었다.
注+① 蕭寶融은 齊主의 동생이다. 長史는 ≪資治通鑑≫에 “西中郞長史”라고 되어 있다. 南康王이 西中郞將으로 荊州를 진무하였고, 蕭穎冑를 長史行事로 삼았다.
齊主(蕭寶卷)가 장군 劉山陽을 보내어 소영주의 군사를 진군시켜 襄陽을 습격하게 하였는데, 蕭衍이 그 도모를 알아차리고 將軍 王天虎를 보내 江陵에 가서 州와 府에 두루 편지를 보냈는데,
注+② 州는 荊州의 官屬을 말하고, 府는 西中郞府의 官屬을 말한다.
그 말에 이르기를 “유산양이 서쪽으로 올라가서 荆州와 雍州를 아울러 습격할 것이다.”라고 하자, 소영주는 의심하여 결정하지 못하였다.
유산양이 巴陵에 이르자
注+③ 晉 武帝가 太康 원년(280)에 巴陵縣을 설립하고, 長沙郡에 소속시켰다. 宋 武帝가 元嘉 16년(441)에 나누어 巴陵郡을 설립하고, 당시에 郢州에 소속시켰다. 소연이 다시 왕천호를 시켜서 소영주와 그의 동생 蕭頴達에게 편지를 가지고 가게 하고, 장홍책에게 말하기를
“用兵의 방법은 마음을 공격하는 것이 상책이니, 최근에 왕천호가 강릉에 갈 때에 사람들마다 모두 편지를 받았다.
지금 단계에서는 파발마로 편지를 보낼 적에 다만 두 통의 편지를 만들어서 行事(소영주) 형제에게 주도록 하고, 편지에 쓰기를 ‘왕천호가 口頭로 말할 것이다.’라고 하면,
注+④ “今段”은 지금 한 단계의 일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行事兄弟”는 蕭穎冑와 蕭穎達을 말한다. 편지 속에서 일을 말하지 않고 다만 “王天虎가 구두로 말한다.”고 하니, 그 때문에 의심하는 것이었다. 저쪽(형주) 사람들이 왕천호에게 물은 것이지만 그도 답할 말이 없기 때문에
注+⑤ 王天虎가 갈 때 蕭衍은 또한 한마디 말도 그에게 부탁한 적이 없었다.
〈저쪽 사람들이〉 반드시 行事가 왕천호와 함께 일을 은밀히 의논한다고 의심할 것이니, 行事가 자신의 進退를 명백히 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나의 계략 안으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이는 두 통의 空函(빈 편지)을 보내서 한 州를 평정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目
【目】 劉山陽이 과연 머뭇거리며 올라가지 않으니, 蕭頴冑가 크게 두려워하여 밤에 參軍 席闡文과 柳忱을 불러서 서재 문을 닫고 의논을 정하였는데,
注+① 柳忱은 柳世隆의 아들이다.
석천문이 말하기를 “雍州刺史 蕭衍이 군사를 양성하고 말을 기른 것이 하루가 아니니, 반드시 그를 제압할 수 없고 그를 제압한다 하더라도 終極에는 다시 조정에 용납되지 못할 것입니다.
注+② 四時가 운행하여 해를 이루니, 해가 지극히 추운 때에 이르면 끝마치는 것이다. “歲寒”은 세상일이 극단의 지점에 이른 것을 비유한다. 朝廷은 천자를 가리킨다.
지금 만약 유산양을 죽이고 雍州와 함께 擧事하여 天子를 세워서 諸侯를 호령하면 霸業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유산양이 이미 우리를 믿지 않으니, 지금 王天虎를 참수해 보내면 유산양의 의심이 풀릴 것입니다. 유산양이 도착할 때에 도모하면 성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유침이 말하기를 “朝廷(황제)이 횡포함이 날로 심해지니, 옹주를 토벌하는 일은 또 이를 구실로 삼아 우리 두 州를 서로 죽게 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注+③ 藉는 慈夜의 切이니, 빌림이다. 다만 蕭令君(蕭懿)의 일을 보지 못하였습니까. 이전의 일을 잊지 않는 것은 뒷일의 스승이 되는 것입니다.”라고 하고,
注+④ 蕭懿가 尙書令이 되었으므로 令君이라고 부른 것이다.
蕭頴達이 또한 소영주에게 석천문 등의 계책을 따르도록 권하였다.
다음 날 아침에 소영주가 왕천호에게 말하기를 “卿이 劉輔國(유산양)과 서로 잘 알고 있으니, 지금 卿의 머리를 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目
【目】 蕭頴冑가 劉山陽의 머리를 蕭衍에게 보내고, 소연에게 또한 시일이 이롭지 않으니, 명년 2월까지 기다렸다가 출병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소연이 말하기를 “병사를 일으킨 초기에 의지할 것은 한때의 용맹스러운 마음이다.
모든 일이 계속 연속되더라도 오히려 의심과 태만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만약 병력을 100일 동안 주둔시키면 양식이 다 떨어질 것이고, 만약
가 다른 의논을 세우면 大事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 하물며 處分이 이미 정해졌으니, 어찌 중도에 폐할 수 있겠는가.
옛날에 周나라 武王이 商나라 紂王을 토벌할 적에 출병하는 때가 太歲星(木星)과 어긋났으니, 어찌 다시 시일을 기다리겠는가.”라고 하였다.
〈소연이〉 表文을 올려 마침내 蕭寶融에게 尊號를 칭하기를 권하였는데, 허락하지 않았다.
12월에 소영주와 司馬 夏侯詳이 建康의 각 州郡에 격문을 보내서 齊主(蕭寶卷)와 梅蟲兒ㆍ茹法珍의 罪惡을 열거하여 성토하였다. 將軍 楊公則을 파견하여 湘州로 향하게 하고,
注+① 〈“遣將軍楊公則 向湘州”는〉 張寶積을 공격하게 한 것이다. 장보적은 당시에 湘州行事였다. 參軍 鄧元起는 夏口로 향하게 하였다.
注+② 〈“參軍鄧元起 向夏口”는〉 蕭衍을 도와 張沖을 공격하게 하였다.
夏侯詳의 아들 夏侯亶이 殿中主帥로 있었는데, 建康에서 도망하여 돌아와 宣德太后의 詔令을 받들어 稱하기를 “南康王(소보융)이 皇位를 계승할 것이니,
바로 황제 칭호를 쓰지 못하니, 10郡을 봉해주어 宣城王 相國 荆州牧으로 삼아 百官을 선임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注+③ 당시에 宣城ㆍ南琅邪ㆍ南東海ㆍ東陽ㆍ臨海ㆍ新安ㆍ尋陽ㆍ南郡ㆍ竟陵ㆍ宜都 10郡을 宣城王國으로 삼았다. 明帝(蕭鸞)는 宣城王으로서 들어와 大統을 계승하게 하였기 때문에 宣德太后의 명령을 빌려서 이로써 비로소 봉한 것이다.
太后는 海陵王(蕭昭文)의 어머니이다. 폐함을 당하여 宣德宮에 살았으므로 夏侯亶이 그녀를 의탁하여 稱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