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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9)

자치통감강목(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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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강목(19)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梁天監三年이요 魏正始元年이라
春正月 梁襲魏壽陽不克하다
梁將軍姜慶眞 乘魏任城王在外하여 襲壽陽하여 據其外郭注+① 去年魏遣任城王澄伐梁, 宿師於外.한대 任城太妃孟氏 勒兵登陴하여 激厲文武하고 安慰新舊하여 勸以賞罰하니 將士咸有奮志注+② 新者, 壽陽兵民. 舊者, 北來將士. 或曰 “新者, 新附, 舊者, 舊民.”러라
太妃親巡城守하여 不避矢石하고 蕭寶寅 引兵至하여 合擊之하니 慶眞 敗走하다
魏攻梁鍾離어늘 梁遣兵救之大敗하다
魏任城王澄 攻梁鍾離어늘 梁主遣將軍張惠紹等하여 將兵送糧이러니
澄遣將軍劉思祖하여 邀之戰于卲陽하여 大敗梁兵하고 俘惠紹等十將하고 殺虜士卒殆盡注+① 思祖, 芳之從子也. 邵陽, 即邵陽洲也.하다
尙書論思祖功 應封千户侯러니 侍中元暉 求二婢於思祖不得하여 事遂寢注+② 暉, 素之孫也.하다
詔澄以四月 淮水將漲하니 南軍得時 勿昧利以取後悔하라한대
會大雨하여 淮水暴漲이어늘 澄引還壽陽하니 軍還狼狽하여 失亡四千餘人이라
軍司賈思伯爲殿이러니 澄曰 仁者必有勇이라하니 於軍司 見之矣라하니
思伯 託以失道하고 不伐其功하더라
夏五月 魏司徒北海王詳 有罪幽死하다
驕奢好聲色하고 貪冒無厭하여 請託公行하니 中外嗟怨이러라 將軍茹皓 以巧思 有寵於魏主하여 弄權納賄하니 詳亦附焉이러라
高肇 本出高麗하여 時望輕之 魏主專委以事하니 肇以詳位居其上이라하여 欲去之하여 乃譖之云 詳皓謀逆이라한대
四月 魏主 召中尉崔亮하여 使彈詳皓하여 詔賜皓死하고 宥詳免爲庶人하여 徙太府寺하여 圍禁之하니 遂暴卒注+① 亮, 道固之兄孫也.하다
今之雞狀 雖與漢不同이나 而其應頗相類하니 誠可畏也 翼足衆多 亦群下相扇助之象이요 雛而未大하여 足羽差小 其勢尙微하니 易制御也
臣聞災異之見 所以示吉凶하니 明君 覩之而懼하여 乃能致福하고 闇主 覩之而慢하여 所以致禍
或者今亦有自賤而貴하여 關預政事 如前世石顯之比者邪 願陛下 進賢黜佞이면 則妖弭慶集矣리이다
後數日 皓等伏誅하니 魏主由此愈重光하더라 高肇 說魏主하여 使羽林虎賁으로 守諸王第하니 殆同幽禁이라
彭城王勰 切諫不聽하다 志尙高邁하여 避事家居하고 而出無山水之適하고 處無知己之遊 獨對妻子하여 常鬱鬱不樂이러라
梁司州刺史蔡道恭卒하다
魏人 圍梁義陽하니 城中 兵不滿五千人이요 食纔支半歲
魏軍攻之晝夜不息하니 道恭 隨方抗禦하여 應手摧却하여 相持百餘日 斬獲不可勝計
魏軍 憚之將退러니 會道恭疾篤하여 呼從弟靈恩兄子僧勰 及諸將佐하여 謂曰 汝等 當以死固節하여 無令吾没有遺恨하라하니 衆皆流涕러라
道恭卒이어늘 靈恩 攝行州事하여 代之城守하다
魏大旱하다
魏大旱하니 邢巒奏注+① 巒, 潁之孫也.호되 昔者 明王 重粟帛하고 輕金玉하니 何則 粟帛 養民而安國하고 金玉 無用而敗德故也
先帝深鑑奢泰하시고 務崇節儉하사 至以紙絹爲帳扆하며 銅鐵爲轡勒하고 府藏之金 裁給而已注+② 扆, 於豈切. 扆, 在後所以依倚也. 三禮圖 “扆縱廣八尺, 畵斧, 今之屛風, 則其遺象也.” 裁, 與纔同.러니
逮景明之初하여 貢篚相繼하고 商估交入하여 金玉 常有餘로되 國用 常不足注+③ 貢篚, 謂貴細之物, 盛之以筐篚而入貢也. 估, 音古, 市稅也.하니
苟非爲之分限이면 但恐歲計不充하니 自今으로 請非要須者 一切不受하니이다하니 魏主納之하다
秋七月 梁角城降魏하다
◯ 八月 梁義陽 降魏하니 魏立元英爲中山王하다
魏人 聞蔡道恭卒하고 攻義陽益急이어늘 梁遣將軍馬仙琕救之하여 轉戰而前하니 兵勢甚銳
元英 結壘士雅山하고 分命諸將伏於四山하여 示之以弱注+① 士雅山, 當作士稚山. 據水經注, 義陽之東, 有大木山, 即晉祖逖將家避難所居也. 逖字士稚, 後人因以名山.하니 仙琕乗勝하여 直掩英營이어늘 英僞北以誘之至平地하여 縱兵擊之러니
統軍傅永 擐甲執槊하고 突陳横過어늘 梁兵 射永하여 洞其左股한대 永拔箭復入이라
仙琕敗走어늘 永復與諸軍으로 追之하여 盡夜而返하니 時年 七十餘矣 軍中 莫不壯之하더라
仙琕盡銳決戰하여 一日三交하여 皆大敗而返하니
蔡靈恩 勢窮하여 遂降於魏하고 三關戍將 亦棄城走注+② 集覽 “三關皆在信陽軍. 左傳定四年 ‘蔡侯與吳子唐侯伐楚, 還塞大隧․直轅․冥阨.’ 注 ‘三者, 漢東之隘道也.’ 案所謂大隧卽廣峴關, 直轅冥․阨, 卽武陽․平靖也. 廣峴, 今名九里關, 在軍南百里, 武陽關, 在大塞嶺, 軍東南九十里, 平靖關, 今名行者坡, 在軍南七十五里.”하다
英使司馬陸希道 爲露板이러니 嫌其不精하여 命傅永改之한대 永不增文彩하고 直爲之陳列軍事하여 處置形要而已
英深賞之曰 觀此經筭하니 雖有金城湯池 不能守矣로다 魏立英爲中山王하다
梁衛尉鄭紹叔 忠於事上하여 所知無隠하여 善則推功於上하고 不善則引咎歸己하니 梁主以是親之
詔於南義陽 置司州하여 移鎭關南하고 以紹叔으로 爲刺史注+① 南義陽, 治鹿城關.하니 紹叔 立城隍繕器械廣田積穀하여 招集流散하니 百姓安之러라
魏置郢州於義陽하고 以司馬悅 爲刺史하다
九月 魏築九城于北邊하다
柔然 侵魏어늘 魏詔車騎大將軍源懷하여 行北邊하여 指授規略하여 以便宜從事
懷至雲中 柔然 遁去하니 懷以爲周夏制夷 莫如城郭이라하여 還至恒代하여 案視要害之地하고 欲東西爲九城하여 及儲糧積仗之宜 犬牙相救之勢하여
凡五十八條 表上之曰 今定鼎成周하니 去北遙遠이라 代表諸國 頗或外叛하고 仍遭旱飢하여 戎馬甲兵 十分闕八注+① 定鼎, 謂遷都也. 書曰 “周公遷九鼎于洛邑.” 今魏遷都洛陽, 故云定鼎成周. 代表, 謂魏代都之塞外也. 諸國, 謂高車諸部.하니
宜準舊鎭東西相望하여 令形勢相接하여 築城置戍하고 分兵要害하여 勸農積粟이라가 警急之日 隨便剪討하면 彼遊騎之寇 終不敢攻城이요 亦不敢越城南出하니
如此 北方 無憂矣리이다하니 魏主從之하다
魏詔群臣議樂하다
高祖詔高閭公孫崇하여 考定雅樂하여 久之未就러니 會高祖殂하고 高閭卒이라
景明中 上所調金石及書러니 至是하여 魏主始命八座以下하여 議之하다
冬十一月 魏營國學하다
魏學業大盛하여 燕齊趙魏間 教授者 不可勝數 弟子著錄多者 千餘人이라
州擧茂異하고 郡貢孝廉하여 每年逾衆注+① 擧茂才異等, 歲貢孝廉, 皆漢制.이러라
梁除贖刑法하다
◑ 十二月 하다
詔殿中郎等하여 議定律令하고 彭城王勰等으로 監之하다


梁나라 高祖 武帝 蕭衍 天監 3년이고, 北魏 世宗 宣武帝 元恪 正始 원년이다.
【綱】 봄 정월에 梁나라가 北魏의 壽陽을 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目】 梁나라 장군 姜慶眞이 北魏의 任城王(元澄)이 외부에 있는 틈을 타서 壽陽을 습격하여 그 외곽을 점거하였는데,注+① 지난해에 北魏가 任城王 元澄을 보내어 梁나라를 공격하게 하고 군대를 외곽에 주둔하게 하게 하였다. 가 병사를 거느리고 성벽 위에 올라 文武의 관원을 격려하고 새로운 臣民과 오랜 신민을 편안히 위로하여 상벌로 권면하니,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분발하는 뜻이 있었다.注+ 어떤 사람은 “새로운 사람은 새로 귀의한 사람들이고, 오랜 사람은 〈북위의〉 오랜 백성이다.”라고 하였다.
太妃는 친히 성을 순행하며 수비하면서 돌과 화살을 피하지 않았고, 蕭寶寅이 군사를 이끌고 도착하여 합세하여 공격하니, 姜慶眞이 패하여 달아났다.
【綱】 北魏가 梁나라의 鍾離를 공격하자, 양나라가 병사를 보내어 구원하였으나 크게 패하였다.
【目】 北魏의 任城王 元澄이 梁나라 鍾離를 공격하니, 梁主(蕭衍)가 장군 張惠紹 등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군량을 운송하게 하였다.
원징이 장군 劉思祖를 파견하여 卲陽에서 맞이하여 싸우게 하여 양나라의 군대를 대패시키고 張惠紹 등 10명의 장수를 포로로 잡았으며, 대부분의 사졸들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注+① 劉思祖는 劉芳의 조카이다. 邵陽은 바로 邵陽洲이다.
尙書가 유사조의 공적은 응당 1천 戶의 侯爵에 봉해야 한다고 논하였는데, 侍中 元暉가 유사조에게 두 명의 여종을 요구하였으나 얻지 못하여 일이 결국 중지되었다.注+② 元暉는 元素의 손자이다.
〈북위에서〉 원징에게 조서를 내리기를 “4월에는 淮水가 불어나서 남방의 군대가 天時를 얻을 것이니, 이익에 눈이 어두워서 후회할 일을 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마침 큰 비가 내려 회수의 물이 갑자기 불어나자, 원징이 군사를 이끌고 壽陽으로 돌아왔는데, 군대가 돌아오는 길에 낭패를 당하여 4천여 명을 잃었다.
軍司 賈思伯이 후군이 되어 〈행렬의 후미를 지켰다.〉 원징이 고 하니, 軍司에게서 이러한 점을 보았네.”라고 하였다.
가사백은 길을 잃었다는 말로 핑계를 대고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지 않았다.
【綱】 여름 5월에 北魏의 司徒 北海王 元詳이 죄를 지어 갇혔다가 죽었다.
【目】 元詳은 교만하고 사치를 부리며 음악과 여색을 좋아하고 재물을 탐내어 만족함이 없어 청탁이 공공연하게 행해지니, 안팎에서 탄식하고 원망하였다. 장군 茹皓가 교묘한 꾀를 가지고 魏主(元恪)에게 총애를 받아 권력을 농단하고 뇌물을 받았는데 원상도 그에게 붙었다.
高肇는 본래 高句麗 출신이어서 당시의 명망이 있는 사람들은 그를 경시하였다. 魏主가 정사를 고조에게 전적으로 맡기니, 고조는 원상이 자신보다 윗자리에 있다고 여겨 그를 제거하려고 마음먹고 마침내 참소하기를 “원상과 여호가 반란을 모의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4월에 魏主가 中尉 崔亮을 불러들여 원상과 여호를 탄핵하게 하여 조서를 내려 여호에게 죽음을 내리고, 원상은 용서하여 사형을 면하게 해주어 庶人으로 삼아 太府寺로 옮겨 가두게 하였는데, 원상이 갑자기 卒하였다.注+① 崔亮은 崔道固의 형의 손자이다.
【目】 이에 앞서 네 개의 날개와 네 개의 발을 가진 병아리를 진상한 일이 있었는데, 조서를 내려 侍中 崔光에게 묻도록 하니, 최광이 다음과 같이 표문을 올렸다. “漢나라 元帝 때에 암탉이 알을 품다가 점차 수탉으로 변하여 볏과 며느리발톱이 생기고 울면서 무리를 거느리고, 또 수탉에게 뿔이 났습니다. 그러자 劉向이 말하기를 ‘小臣이 정권을 잡는 형상이니, 이 그 증험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注+① 伏(부화하다)은 房富의 切이다. 距는 닭의 발 부분에 붙어 있는 뼈로, 싸울 때 찌르는 용도로 쓰인다. 將(거느리다)은 본음대로 읽으니, 무리들을 거느린다는 뜻이다. 암탉이 처음에는 오히려 병아리를 품었다가 뒤에 점차 수탉으로 변하여 볏과 며느리발톱이 생겨나고 울고 무리를 거느려 외형이 모두 갖추어져 수탉과 다름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靈帝 때에 南宮寺에 있는 암탉이 수탉으로 바뀌려고 하였는데, 머리의 볏만 바뀌지 않으니, 蔡邕이 말하기를 ‘닭의 몸이 이미 변하였으나 아직 머리까지는 변하지 않았고 황제께서 그 일을 알고 계시니,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성공하지 못하는 형상입니다. 만약 정밀하게 대응하지 못하여 政事를 고치지 않아 머리에 볏이 생긴다면 우환이 더욱 커지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이후에 黃巾賊이 사방을 파괴하고 천하는 마침내 크게 어지러워졌습니다.
【目】 지금 닭의 형상이 비록 漢나라 때와 같지는 않지만 그 감응이 몹시 유사하니 진실로 두려워할 만합니다. 날개와 다리가 많은 것은 역시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선동하고 돕는 형상이고, 병아리가 아직 크지 않고 다리와 날개가 작은 것은 그 세력이 아직 미약한 것이니, 제어하기가 쉽습니다.
신이 듣건대 재앙과 이변이 나타나는 것은 모두 길흉을 보이기 위해서이니, 현명한 군주는 그것을 보고 두려워하여 마침내 복을 불러오고, 우매한 군주는 그것을 보고도 태만하여 화를 불러들인다고 합니다.
아마도 지금 천한 신분에서 귀하게 되어 정사에 관여하기를 이전 시대의 석현과 견줄 만한 사람이 있는 것입니까.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어진 사람을 등용하시고 아첨하는 사람을 내치시면 재앙이 그치고 경사스러운 일이 많이 생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며칠 후에 茹皓 등을 처형하니, 魏主(元恪)가 이로 말미암아 최광을 더욱 중시하였다. 高肇가 魏主를 설득하여 羽林軍과 虎賁軍을 시켜 諸王의 저택을 지키도록 하니, 거의 幽閉와 같았다.
彭城王 元勰이 간절히 간언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원협은 뜻이 고상하고 원대하여 일을 피하여 집에 머물렀고, 나가서도 산수가 좋은 곳을 유람하는 일이 없었으며, 거처할 때에는 친한 벗과 교유하는 일이 없이 유독 처자식과 지내며 늘 울적해하며 즐거워하지 않았다.
【綱】 梁나라 司州刺史 蔡道恭이 卒하다.
【目】 北魏의 군대가 梁나라 義陽을 포위하였는데, 성안에 있는 군사는 5천 명이 되지 못하였고, 식량은 겨우 반년을 버틸 정도였다.
北魏의 군대가 밤낮으로 쉬지 않고 공격하자, 蔡道恭이 방향에 따라 방어하면서 응수하여 적을 물리치며 백여 일 동안 버텼는데, 목을 베고 사로잡은 적의 수를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북위의 군대가 꺼려서 후퇴하려고 하였는데, 마침 채도공의 병이 위독하여 사촌동생 蔡靈恩과 조카 蔡僧勰과 여러 장수와 보좌관을 불러서 말하기를 “그대들은 마땅히 죽음으로 절개를 지켜 내가 죽은 뒤에 遺恨을 있게 하지 말라.”라고 하니, 무리가 모두 눈물을 흘렸다.
채도공이 卒하자, 채령은이 州의 일을 대리하여 그를 대신해 성을 지켰다.
【綱】 北魏에 큰 가뭄이 들었다.
【目】 北魏에 큰 가뭄이 들자, 邢巒이 상주하기를注+① 邢巒은 邢潁의 손자이다. “옛날에 현명한 제왕은 곡식과 비단을 중하게 여기고 금과 옥을 경시하였으니, 어째서입니까. 곡식과 비단은 백성을 양육하고 나라를 편안하게 하며, 금과 옥은 쓸모가 없고 덕을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先帝께서는 사치와 교만을 깊이 거울삼고 절약과 검소함을 힘써 숭상하여, 심지어 종이와 비단으로 장막과 병풍을 만들고 청동과 철로 고삐와 재갈을 만들었으며, 창고에 저장된 금은 겨우 공급할 뿐이었습니다.注+② 扆(병풍)는 於豈의 切이니, 扆는 뒤에다 두고 기대는 것이다. ≪三禮圖≫에 “扆는 가로 세로가 8척이며, 도끼 문양을 그린 것이니, 지금의 병풍에 그 모습이 남아 있다.” 하였다. 裁(겨우)는 纔와 같다.
초기에는 백성들이 바치는 공물이 서로 이어지고 장사치들이 서로 세금을 납부하여 금과 옥은 항상 여분이 있었지만, 나라의 재용은 늘 부족했습니다.注+③ 貢篚는 진기하고 정교한 물건을 광주리에 담아서 바치는 것을 말한다. 估(세금)는 음이 古이니, 시장에서 부과하는 세금이다.
만약 그것을 제한하지 않는다면 다만 한 해 동안의 비용도 충분하지 않을까 염려되니, 지금부터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닌 것을 일절 받지 않으시길 청합니다.”라고 하니, 魏主(元恪)가 그 의견을 받아들였다.
【綱】 가을 7월에 梁나라 角城이 北魏에 항복하였다.
【綱】 8월에 梁나라 義陽이 北魏에 항복하니, 북위가 元英을 세워 中山王으로 삼았다.
【目】 北魏 사람들이 蔡道恭이 卒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더욱 급박하게 義陽을 공격하자, 梁나라에서 장군 馬仙琕(마선변)을 파견하여 의양을 구원하도록 하여 옮겨 다니면서 전투를 벌이며 전진하니, 병력의 위세가 아주 대단하였다.
元英이 士雅山에 보루를 쌓고는 여러 장수들에게 사방의 산에 매복하도록 명을 내려 거짓으로 약하게 보이도록 하였다.注+① ‘士雅山’은 ‘士稚山’이 되어야 한다. ≪水經注≫에 근거하면 義陽의 동쪽에 大木山이 있는데, 바로 晉나라의 祖逖이 가족들을 데리고 난리를 피했던 곳이다. 조적의 字가 士稚이므로, 후대 사람들이 이로 인해 士稚山이라고 한 것이다. 마선변이 승세를 타고 곧장 원영의 군영을 들이치자, 원영이 거짓으로 패배하여 그들을 유인하여 평지에 이르러 병력을 풀어서 그들을 공격하였다.
統軍 傅永이 갑옷을 입고 창을 잡고서 진영을 뚫고 들어가자, 양나라 군사들이 부영에게 화살을 쏘아 왼쪽다리를 관통하였으나 부영은 화살을 뽑고 다시 들어갔다.
마선변이 패배하여 달아나자, 원영은 다시 군사들과 함께 추격을 하여 밤이 다 지나서야 돌아왔다. 이때 원영의 나이가 70세가 넘어 군중에서는 모두 그를 장하게 여겼다.
마선변은 정예의 병사들을 모아 결전을 하여 하루에 세 번 교전하였는데, 모두 크게 패배하여 돌아왔다.
蔡靈恩은 형세가 궁해지자 마침내 북위에 항복하였고, 三關을 지키던 장수는 그 소식을 듣고 역시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注+② ≪資治通鑑綱目集覽≫에 “三關은 모두 信陽軍에 있었다. ≪春秋左氏傳≫ 定公 4년에 ‘蔡侯와 吳子와 唐侯가 楚나라를 토벌할 때에, 〈楚나라 左司馬 戌(술)이〉 돌아와 大隧와 直轅과 冥阨을 막겠다.’ 하였는데, 그 注에 ‘세 곳은 漢水 동쪽의 좁은 길이다.’ 하였다. 살펴보니, 소위 ‘大隧’는 廣峴關이고, ‘直轅’과 ‘冥阨’은 武陽關과 平靖關이다. 廣峴은 지금은 ‘九里關’으로 불리는데, 信陽軍 남쪽 100리에 있다. 武陽關은 大塞嶺에 있으니, 信陽軍 동남쪽 90리이며, 平靖關은 지금 ‘行者坡’로 불리는데, 信陽軍 남쪽 75리에 있다.” 하였다.
【目】 元英이 司馬 陸希道에게 을 만들게 하였는데, 정밀하지 못한 것을 싫어하여 傅永에게 명을 내려 수정하도록 하자, 부영은 문장을 더 꾸미지 않고 곧바로 군사 배치 현황과 요해처의 형세만을 기술하였다.
원영이 몹시 칭찬하며 말하기를 “여기에 기록된 전략을 보니, 비록 〈梁나라에〉 金城湯池가 있다고 하더라도 지킬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北魏에서는 원영을 세워 中山王으로 삼았다.
양나라의 衛尉 鄭紹叔이 군주를 섬기는데 충심을 다하여 아는 일에 대해서는 숨김이 없어 일이 잘되면 공을 군주에게 돌리고, 일이 잘못되면 자신에게 허물을 돌리니, 梁主(蕭衍)가 이로 인해 그를 친애하였다.
南義陽에 조서를 내려 司州를 설치하여 鎭을 三關의 남쪽으로 옮기게 하고, 정소숙을 자사로 삼으니,注+① 南義陽은 鹿城關에 治所를 두었다. 정소숙이 성곽과 해자를 만들고, 기계를 수리하며, 경작지를 넓히고, 곡식을 비축하여 흩어져 떠돌아다니는 사람을 불러 모으니, 백성들이 편안히 여겼다.
북위가 의양에 郢州를 설치하고 司馬悅을 자사로 삼았다.
【綱】 9월에 北魏가 북쪽 변방에 9개의 성을 쌓았다.
【目】 柔然이 北魏를 침략하자, 북위가 車騎大將軍 源懷에게 조서를 내려 북쪽 변방으로 나가게 하여 방략을 지시하고 편의대로 일을 처리하도록 하였다.
원회가 雲中에 이르자 유연이 달아나니, 원회가 中華가 오랑캐를 제압하는 방법은 성곽만 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돌아와서 恒과 代에 이르러 요해처를 시찰하고는, 東西로 아홉 개의 성을 만들어 양식을 저장하고 병장기를 비축하기에 알맞은 곳과 개의 이빨이 서로 맞물리는 것처럼 서로 구원할 수 있는 형세를 이루려고 하여
모두 58개 조목을 表文으로 올리기를 “지금 成周로 도읍을 옮겼으니, 북쪽과의 거리가 아득히 멀어져 代 지역 너머에 있는 여러 나라가 밖에서 자주 반란을 일으키고, 이어 가뭄과 굶주림을 만나 兵馬와 軍士가 열에 여덟이 줄게 되었습니다.注+① “定鼎”은 도읍을 옮긴다는 뜻이다. ≪書經≫ 〈周書 召誥〉 孔安國傳에 “周公이 九鼎을 洛邑으로 옮겼다.” 하였는데, 지금 北魏가 洛陽으로 도읍을 옮겼기 때문에 成周로 九鼎을 정하였다고 말한 것이다. “代表”는 北魏 代都의 변방 바깥 지역을 말한다. “諸國”은 高車의 여러 부족을 말한다.
마땅히 옛날의 鎭을 따라 동서로 서로 바라보아 형세가 서로 인접하게 만들어 성을 쌓고 수자리를 설치하며 요해처에 군사들을 배치하여 농업을 권하고 군량을 축적하였다가 급한 변고가 생기는 날에 편의에 따라 토벌하면 저 말을 타고 다니는 도적들은 끝내 감히 성을 공격하지 못할 것이고, 역시 감히 성을 넘어 남쪽으로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북쪽 변방은 근심이 사라질 것입니다.”라고 하니, 魏主(元恪)가 그의 말을 따랐다.
【綱】 北魏에서 조서를 내려 여러 신하들에게 음악을 의논하게 하였다.
【目】 高祖(元宏)가 高閭와 公孫崇에게 조서를 내려 雅樂을 조사하고 정리하도록 하였다. 오랜 시일이 지나도 완성하지 못하였는데, 마침 고조가 殂하고, 고려도 卒하였다.
景明 연간에 공손숭이 〈이전에〉 조율했던 악기와 정리한 서적을 바치니, 이때에 이르러 魏主(元恪)가 비로소 이하 관리들에게 명을 내려 의논하게 하였다.
【綱】 겨울 11월에 北魏에서 國學을 건립하였다.
【目】 당시에 北魏에서는 학업이 크게 번성하여 의 지역에 학문을 가르치는 사람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고, 제자로 기록된 사람은 많은 경우 천 명을 넘었다.
州에서는 茂異를 천거하였고 郡에서는 孝廉을 추천하여 해마다 더욱 많아졌다.注+ 해마다 을 추천하는 것은 모두 漢나라의 제도이다.
【綱】 梁나라에서 贖罪하는 刑法을 폐지하였다.
【綱】 11월에 北魏에서 律令을 다시 제정하였다.
【目】 〈北魏에서〉 殿中郎 등에게 조서를 내려 율령을 논의하여 확립하게 하고 彭城王 元勰 등에게 감독하도록 하였다.


역주
역주1 任城太妃 孟氏 : 任城王 元澄의 어머니를 말한다.
역주2 새로운……군사이다 : 景明 원년(500)에 齊나라 裵叔業이 壽陽을 가지고 北魏에 투항하였다. 그러므로 북위의 입장에서 기존 수양에 있던 백성과 제나라 군대는 新民이 되고 수양에 진주한 북위의 장수와 군사는 舊民인 것이다.
역주3 어진……있다 : ≪論語≫ 〈憲問〉에 나오는 말이다.
역주4 石顯이……것 : 석현은 前漢 元帝 때의 환관이자 간신으로, 蕭望之를 핍박하여 자살하게 하고, 周堪 등을 파직하였으나, 成帝가 즉위한 이후에 탄핵되어 귀향하다가 중도에 죽었다.
역주5 漢元帝時……石顯伏誅之效也 : ≪漢書≫ 〈五行志〉에서 抄錄한 것이다.
역주6 靈帝時……天下遂大亂 : ≪後漢書≫ 〈五行志〉에서 抄錄한 것이다.
역주7 景明 연간 : 北魏 宣武帝의 연호로, 500년에서 503년까지를 말한다.
역주8 露板 : 봉함을 하지 않고 노출된 채로 선포하는 포고문인데, 주로 戰勝을 급히 알리는 데에 사용되었다.
역주9 八座 : 六曹의 尙書와 左․右僕射를 말한다.
역주10 燕․齊․趙․魏 : 戰國時代 때에 燕ㆍ齊ㆍ趙ㆍ魏의 지역을 말한다.
역주11 보통……뽑고 : 茂才異等科를 말한다. 茂才는 원래 秀才였는데, 東漢 때 와서 光武帝의 이름인 秀자를 피하여 茂자로 고친 것이다.
역주12 孝廉 : 漢 武帝 때에 만들어진 인재를 선발하던 두 가지 과목으로, 효성이 지극하고 청렴한 자를 천거 받아 관직에 제수하던 제도이다.
역주13 魏更定律令 : “北魏는 신미년(491)부터 崔浩를 시켜서 律令을 정하게 하였는데 지금에 이르도록 모두 5번 바꾸었고, 북위도 이로부터 쇠퇴하였다.[魏自辛未 使崔浩定律令 至是凡五更 而魏亦自是衰矣]” ≪書法≫

자치통감강목(19) 책은 2022.11.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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