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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之雞狀이 雖與漢不同이나 而其應頗相類하니 誠可畏也라 翼足衆多는 亦群下相扇助之象이요 雛而未大하여 足羽差小는 其勢尙微하니 易制御也라
臣聞災異之見은 所以示吉凶하니 明君은 覩之而懼하여 乃能致福하고 闇主는 覩之而慢하여 所以致禍라
或者今亦有自賤而貴하여 關預政事를 如前世石顯之比者邪아 願陛下는 進賢黜佞이면 則妖弭慶集矣리이다
後數日에 皓等伏誅하니 魏主由此愈重光하더라 高肇가 說魏主하여 使羽林虎賁으로 守諸王第하니 殆同幽禁이라
彭城王勰이 切諫不聽하다 勰이 志尙高邁하여 避事家居하고 而出無山水之適하고 處無知己之遊라 獨對妻子하여 常鬱鬱不樂이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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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北魏의 任城王 元澄이 梁나라 鍾離를 공격하니, 梁主(蕭衍)가 장군 張惠紹 등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군량을 운송하게 하였다.
원징이 장군 劉思祖를 파견하여 卲陽에서 맞이하여 싸우게 하여 양나라의 군대를 대패시키고 張惠紹 등 10명의 장수를 포로로 잡았으며, 대부분의 사졸들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注+① 劉思祖는 劉芳의 조카이다. 邵陽은 바로 邵陽洲이다.
尙書가 유사조의 공적은 응당 1천 戶의 侯爵에 봉해야 한다고 논하였는데, 侍中 元暉가 유사조에게 두 명의 여종을 요구하였으나 얻지 못하여 일이 결국 중지되었다.
注+② 元暉는 元素의 손자이다.
〈북위에서〉 원징에게 조서를 내리기를 “4월에는 淮水가 불어나서 남방의 군대가 天時를 얻을 것이니, 이익에 눈이 어두워서 후회할 일을 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마침 큰 비가 내려 회수의 물이 갑자기 불어나자, 원징이 군사를 이끌고 壽陽으로 돌아왔는데, 군대가 돌아오는 길에 낭패를 당하여 4천여 명을 잃었다.
軍司 賈思伯이 후군이 되어 〈행렬의 후미를 지켰다.〉 원징이
고 하니, 軍司에게서 이러한 점을 보았네.”라고 하였다.
가사백은 길을 잃었다는 말로 핑계를 대고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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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지금 닭의 형상이 비록 漢나라 때와 같지는 않지만 그 감응이 몹시 유사하니 진실로 두려워할 만합니다. 날개와 다리가 많은 것은 역시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선동하고 돕는 형상이고, 병아리가 아직 크지 않고 다리와 날개가 작은 것은 그 세력이 아직 미약한 것이니, 제어하기가 쉽습니다.
신이 듣건대 재앙과 이변이 나타나는 것은 모두 길흉을 보이기 위해서이니, 현명한 군주는 그것을 보고 두려워하여 마침내 복을 불러오고, 우매한 군주는 그것을 보고도 태만하여 화를 불러들인다고 합니다.
아마도 지금 천한 신분에서 귀하게 되어 정사에 관여하기를 이전 시대의 석현과 견줄 만한 사람이 있는 것입니까.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어진 사람을 등용하시고 아첨하는 사람을 내치시면 재앙이 그치고 경사스러운 일이 많이 생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며칠 후에 茹皓 등을 처형하니, 魏主(元恪)가 이로 말미암아 최광을 더욱 중시하였다. 高肇가 魏主를 설득하여 羽林軍과 虎賁軍을 시켜 諸王의 저택을 지키도록 하니, 거의 幽閉와 같았다.
彭城王 元勰이 간절히 간언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원협은 뜻이 고상하고 원대하여 일을 피하여 집에 머물렀고, 나가서도 산수가 좋은 곳을 유람하는 일이 없었으며, 거처할 때에는 친한 벗과 교유하는 일이 없이 유독 처자식과 지내며 늘 울적해하며 즐거워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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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北魏의 군대가 梁나라 義陽을 포위하였는데, 성안에 있는 군사는 5천 명이 되지 못하였고, 식량은 겨우 반년을 버틸 정도였다.
北魏의 군대가 밤낮으로 쉬지 않고 공격하자, 蔡道恭이 방향에 따라 방어하면서 응수하여 적을 물리치며 백여 일 동안 버텼는데, 목을 베고 사로잡은 적의 수를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북위의 군대가 꺼려서 후퇴하려고 하였는데, 마침 채도공의 병이 위독하여 사촌동생 蔡靈恩과 조카 蔡僧勰과 여러 장수와 보좌관을 불러서 말하기를 “그대들은 마땅히 죽음으로 절개를 지켜 내가 죽은 뒤에 遺恨을 있게 하지 말라.”라고 하니, 무리가 모두 눈물을 흘렸다.
채도공이 卒하자, 채령은이 州의 일을 대리하여 그를 대신해 성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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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北魏 사람들이 蔡道恭이 卒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더욱 급박하게 義陽을 공격하자, 梁나라에서 장군 馬仙琕(마선변)을 파견하여 의양을 구원하도록 하여 옮겨 다니면서 전투를 벌이며 전진하니, 병력의 위세가 아주 대단하였다.
元英이 士雅山에 보루를 쌓고는 여러 장수들에게 사방의 산에 매복하도록 명을 내려 거짓으로 약하게 보이도록 하였다.
注+① ‘士雅山’은 ‘士稚山’이 되어야 한다. ≪水經注≫에 근거하면 義陽의 동쪽에 大木山이 있는데, 바로 晉나라의 祖逖이 가족들을 데리고 난리를 피했던 곳이다. 조적의 字가 士稚이므로, 후대 사람들이 이로 인해 士稚山이라고 한 것이다. 마선변이 승세를 타고 곧장 원영의 군영을 들이치자, 원영이 거짓으로 패배하여 그들을 유인하여 평지에 이르러 병력을 풀어서 그들을 공격하였다.
統軍 傅永이 갑옷을 입고 창을 잡고서 진영을 뚫고 들어가자, 양나라 군사들이 부영에게 화살을 쏘아 왼쪽다리를 관통하였으나 부영은 화살을 뽑고 다시 들어갔다.
마선변이 패배하여 달아나자, 원영은 다시 군사들과 함께 추격을 하여 밤이 다 지나서야 돌아왔다. 이때 원영의 나이가 70세가 넘어 군중에서는 모두 그를 장하게 여겼다.
마선변은 정예의 병사들을 모아 결전을 하여 하루에 세 번 교전하였는데, 모두 크게 패배하여 돌아왔다.
蔡靈恩은 형세가 궁해지자 마침내 북위에 항복하였고, 三關을 지키던 장수는 그 소식을 듣고 역시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注+② ≪資治通鑑綱目集覽≫에 “三關은 모두 信陽軍에 있었다. ≪春秋左氏傳≫ 定公 4년에 ‘蔡侯와 吳子와 唐侯가 楚나라를 토벌할 때에, 〈楚나라 左司馬 戌(술)이〉 돌아와 大隧와 直轅과 冥阨을 막겠다.’ 하였는데, 그 注에 ‘세 곳은 漢水 동쪽의 좁은 길이다.’ 하였다. 살펴보니, 소위 ‘大隧’는 廣峴關이고, ‘直轅’과 ‘冥阨’은 武陽關과 平靖關이다. 廣峴은 지금은 ‘九里關’으로 불리는데, 信陽軍 남쪽 100리에 있다. 武陽關은 大塞嶺에 있으니, 信陽軍 동남쪽 90리이며, 平靖關은 지금 ‘行者坡’로 불리는데, 信陽軍 남쪽 75리에 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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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元英이 司馬 陸希道에게
을 만들게 하였는데, 정밀하지 못한 것을 싫어하여 傅永에게 명을 내려 수정하도록 하자, 부영은 문장을 더 꾸미지 않고 곧바로 군사 배치 현황과 요해처의 형세만을 기술하였다.
원영이 몹시 칭찬하며 말하기를 “여기에 기록된 전략을 보니, 비록 〈梁나라에〉 金城湯池가 있다고 하더라도 지킬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北魏에서는 원영을 세워 中山王으로 삼았다.
양나라의 衛尉 鄭紹叔이 군주를 섬기는데 충심을 다하여 아는 일에 대해서는 숨김이 없어 일이 잘되면 공을 군주에게 돌리고, 일이 잘못되면 자신에게 허물을 돌리니, 梁主(蕭衍)가 이로 인해 그를 친애하였다.
南義陽에 조서를 내려 司州를 설치하여 鎭을 三關의 남쪽으로 옮기게 하고, 정소숙을 자사로 삼으니,
注+① 南義陽은 鹿城關에 治所를 두었다. 정소숙이 성곽과 해자를 만들고, 기계를 수리하며, 경작지를 넓히고, 곡식을 비축하여 흩어져 떠돌아다니는 사람을 불러 모으니, 백성들이 편안히 여겼다.
북위가 의양에 郢州를 설치하고 司馬悅을 자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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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柔然이 北魏를 침략하자, 북위가 車騎大將軍 源懷에게 조서를 내려 북쪽 변방으로 나가게 하여 방략을 지시하고 편의대로 일을 처리하도록 하였다.
원회가 雲中에 이르자 유연이 달아나니, 원회가 中華가 오랑캐를 제압하는 방법은 성곽만 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돌아와서 恒과 代에 이르러 요해처를 시찰하고는, 東西로 아홉 개의 성을 만들어 양식을 저장하고 병장기를 비축하기에 알맞은 곳과 개의 이빨이 서로 맞물리는 것처럼 서로 구원할 수 있는 형세를 이루려고 하여
모두 58개 조목을 表文으로 올리기를 “지금 成周로 도읍을 옮겼으니, 북쪽과의 거리가 아득히 멀어져 代 지역 너머에 있는 여러 나라가 밖에서 자주 반란을 일으키고, 이어 가뭄과 굶주림을 만나 兵馬와 軍士가 열에 여덟이 줄게 되었습니다.
注+① “定鼎”은 도읍을 옮긴다는 뜻이다. ≪書經≫ 〈周書 召誥〉 孔安國傳에 “周公이 九鼎을 洛邑으로 옮겼다.” 하였는데, 지금 北魏가 洛陽으로 도읍을 옮겼기 때문에 成周로 九鼎을 정하였다고 말한 것이다. “代表”는 北魏 代都의 변방 바깥 지역을 말한다. “諸國”은 高車의 여러 부족을 말한다.
마땅히 옛날의 鎭을 따라 동서로 서로 바라보아 형세가 서로 인접하게 만들어 성을 쌓고 수자리를 설치하며 요해처에 군사들을 배치하여 농업을 권하고 군량을 축적하였다가 급한 변고가 생기는 날에 편의에 따라 토벌하면 저 말을 타고 다니는 도적들은 끝내 감히 성을 공격하지 못할 것이고, 역시 감히 성을 넘어 남쪽으로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북쪽 변방은 근심이 사라질 것입니다.”라고 하니, 魏主(元恪)가 그의 말을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