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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7)

자치통감강목(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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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강목(17)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宋元嘉七年이요 魏神䴥三年이라
宋主有恢復河南之志하여 詔簡甲卒五萬하여 給右將軍到彦之하고 統將軍王仲徳竺靈秀舟師入河하고 又使將軍段宏으로 將精騎直指虎牢하고 劉徳武 將兵繼進하고 長沙王義欣으로 監征討諸軍事하여 出鎭彭城하여 爲衆軍聲援注+義欣, 道憐之子也.이러니
先遣將軍田奇하여 告魏主曰 河南舊是宋土 中爲彼所侵하니 今當修復舊境이라 不關河北이니라
魏主大怒曰 我生髪未燥 已聞河南 是我地注+燥, 乾也. 必若進軍이면 當權斂戍相避라가 冬寒氷合 自更取之리라
魏勅勒叛이어늘 擊滅之하다
魏有新徒勅勒千餘家 苦將吏侵漁하여 出怨言하고 期以草生으로 亡歸漠北注+新唐書曰 “勅勒, 其先匈奴也. 元魏時號髙車部, 其後訛爲鐵勒, 唐之鐵勒十五種是也.”이어늘
劉絜安原 請徙之河西한대 魏主曰 此曹習俗 放散日久하니 如囿中之鹿 急則奔突하고 緩之自定이라 吾區處自有道하니 不煩徙也니라
絜等固請한대 乃聽之하니 勅勒皆驚曰 圏我於河西하니 欲殺我也로다 遂叛走注+圈, 其卷․其權二切, 防閑也.어늘 絜追討之하니 皆餓而死하다
夏六月 宋以楊難當爲武都王하다
魏南邊諸將 表稱宋將入寇하니 請兵三萬하여 先其未發 逆擊之하여 以挫其鋭라하고 因請悉誅河北流民在境上者하여 以絶其郷導한대 魏主使公卿議之하니 皆以爲然이어늘
崔浩曰 不可하다 南方下濕하여 入夏水潦 草木蒙密하고 地氣鬱蒸하니 易生疾癘 不可行師
且彼既嚴備하니 城守必固 留屯久攻하면 則糧運不繼 分軍四掠이면 則衆力單寡하니 以今擊之 未見其利
彼若果能北來인댄 宜待其勞倦하여 秋涼馬肥어든 因敵取食하여 徐往擊之 此萬全之策也
西北守將 從陛下征伐하여 多獲美女珍寳하여 牛馬成群하니
南邊諸將 聞而慕之하여 亦欲南鈔以取資財하니 皆營私計하여 爲國生事 不可從也注+爲, 去聲.니이다 魏主乃止하다
諸將復表하여 乞簡幽州以南勁兵하여 助己戍守하고 及就漳水造船이어늘 公卿皆以爲宜如所請이라하고 仍署司馬楚之魯軌韓延之等爲將帥하여 使招誘南人하니
浩曰 楚之等 皆彼所畏忌 今聞國家悉發精兵하고 大造舟艦이면 謂國家欲存立司馬氏하고 誅除劉宗이라하여 必擧國震駭하여 悉發精銳하여 以死爭之하리니
則我南邊諸將 無以禦之 欲以却敵而反速之 張虛聲而召實害 此之謂矣니라
且楚之等 皆纎利小才 止能招合輕薄無賴하여 而不能成大功하니 徒使國家兵連禍結而已니이다 魏主未以爲然이어늘
浩乃復陳天時하여 以爲南方擧兵必不利曰 今玆害氣在揚州 一也注+揚州於辰在丑, 而是歲在午. 丑爲金庫, 午爲火旺, 以火害金, 故害氣在揚州. 庚午自刑하여 先發者傷 二也注+歲在庚午. 庚, 金也. 午, 火也. 以火剋金, 故爲自刑.
日食畫晦하고 宿値斗牛 三也注+去年十一月朔, 日食於星紀之分, 宿値斗․牛. 宿, 音秀. 熒惑伏於翼軫하여 主亂及喪 四也注+熒惑, 罰星也, 所居之宿, 國受殃, 爲死喪寇亂. 翼․軫, 楚之分野, 屬荊州. 太白未出하여 進兵者敗 五也注+太白, 兵象也. 太白未出, 不利進兵.
夫興國之君 先修人事하며 次盡地利하고 後觀天時 故萬擧萬全하나니
今劉義隆新造之國 人事未洽하고 災變屢見하니 天時不協하고 舟行水涸하니 地利不盡이라
三者無一可로되 而義隆行之하니 必敗無疑리이다
魏主不能違衆하여 乃詔造船三千艘하고 簡幽州以南戍兵集河上하여 以司馬楚之爲安南大將軍하고 封琅邪王하여 屯潁川이러니
到彦之自淮入泗할새 泗水滲하여 日行纔十里注+滲, 所禁切. 水下漉爲滲.
七月 始至須昌하여 乃泝河西上注+須昌縣, 前漢屬東部, 後漢․晉屬東平郡.이어늘 魏主以河南四鎭兵少 命悉衆北渡注+四鎭, 金墉․虎牢․滑臺․碻磝.하니
彦之留朱脩之守滑臺하고 尹沖守虎牢하고 杜驥守金墉注+驥, 預之玄孫也.하고 諸軍進屯靈昌津하여 列守南岸하여 至于潼關하다
於是 司兗既平이라 諸軍皆喜어늘 王仲徳獨有憂色曰
諸賢不諳北土情偽하니 必堕其計로다 胡虜雖仁義不足이나 而凶狡有餘하니 今斂戍北歸 必并力完聚 若河氷既合이면 將復南來 豈可不以爲憂乎
八月 魏遣將軍安頡하여 擊宋師하다
魏主遣安頡督護諸軍하여 擊到彦之하니 彦之遣姚聳夫渡河하여한대 與頡戰하여 聳夫兵敗하니 死者甚衆注+魏土地記云 “阪城, 舊名漢祖渡. 城險固, 南臨孟津, 在洛陽西北四十二里.”이러라
林邑 入貢于宋하다
◑九月 燕王 馮跋殂하니 弟弘殺其太子翼하고 自立하다
燕太祖寢疾病하여 輦而臨軒하여 命太子翼攝國事하여 勒兵聽政하여 以備非常이러니 宋夫人欲立其子受居하여 謂翼曰 上疾將瘳 奈何遽欲代父乎
翼性仁弱이라 遂還東宫하여 日三往省疾이러니 宋夫人矯詔絶内外하고 遣閽寺傳問而已注+閽人, 司晨昏以啓閉者. 寺之言, 侍也. 翼及大臣 竝不得見이요 唯中給事胡福 獨得出入하여 專掌禁衛러라
福慮宋夫人遂成其謀하여 乃言於中山公弘한대 弘與壯士數十人 被甲入禁中하니 宿衛皆不戰而散이어늘
夫人命閉東閤하니 弘家僮 踰閤而入하여 射殺女御한대 太祖驚懼而殂注+女御, 所謂御妻. 御, 猶進也, 侍也.하니 弘遂即天王位어늘
太子翼 帥東宫兵하여 出戰而敗하니 兵皆潰去 弘遂殺翼及太祖諸子百餘人하다
魏主如統萬하다
夏主遣使求和於宋하고 約合兵滅魏하고 遥分河北하여 自恒山以東 屬宋하고 以西 屬夏러니
魏主聞之하고 治兵將伐夏한대 群臣咸曰 劉義隆兵 猶在河中注+言在河之中流.이어늘 捨之西行하면 前冦未可必克하고 而義隆乘虛濟河 則失山東矣注+此山東, 謂太行․恒山以東, 卽河北之地.리라
崔浩曰 義隆 與赫連定으로 遥相招引하여 以虛聲唱和언정 莫敢先入하니 譬如連雞하여 不得俱飛 無能爲害리이다
臣始謂義隆軍來 當屯止河中이라가 兩道北上하여 東道向冀하고 西道衝鄴하리니 如此 則陛下當自討之하사대 不得徐行이니이다
今則不然하여 東西列兵 徑二千里하여 一處不過數千이라 形分勢弱하니 此不過欲固河自守 無北度意也니이다
赫連定 殘根易摧하니 擬之必仆이라 克定之後 東出潼關하여 席卷而前하면 則威震南極하여 江淮以北 無立草矣리이다
魏主從之하여 遂如統萬하여 謀襲平涼하다
◑冬十月 하다
◑宋到彦之保東平이어늘 魏攻宋金墉虎牢하여 取之하다
宋到彦之王仲德 沿河置守하고 還保東平이어늘 魏安頡 自委粟津濟河하여 攻金墉注+委粟津在洛陽北. 又有委粟山在洛陽南.하니 杜驥欲棄城走호되 恐獲罪러니
高祖滅秦하고 遷其鐘簴於江南할새 有大鐘 没於洛水 帝使姚聳夫 往取之하니
驥紿之曰 金墉修完하고 糧食亦足호되 所乏者 人耳 今虜騎南渡하니 相與并力禦之하여 大功既立이어든 牽鐘未晚하니이다하니 聳夫從之하다
既至 見城不可守하고 乃引去한대 驥南遁하니 安頡拔洛陽하다
驥歸言於帝曰 本欲以死固守러니 姚聳夫及城遽走하니 人情沮敗하여 不可復禁이러니이다 上大怒하여 誅聳夫於壽陽하다
聳夫勇徤하니 諸偏裨莫及也러라 頡與將軍陸俟 進攻虎牢하여 拔之하다
秦遷保南安하다
秦王暮末 爲北涼所逼하여 請迎於魏한대 魏許以平涼安定封之하니 暮末乃焚城邑하고 毁寳器하고 帥户萬五千하여 東如上邽러니
夏主發兵拒之한대 暮末留保南安하니 其故地 皆入於吐谷渾注+自苑川至西平․抱罕, 皆乞伏氏故地. 晉孝武帝太元八年, 乞伏國仁據隴西, 南安亦其地也.하다
十一月 魏主襲平涼하니 夏主與戰敗績하다
魏主至平涼하여 使將軍古弼等으로 將兵趣安定하니 夏主自安定으로 北救平涼할새 與弼遇하니 弼偽退以誘之한대 夏主追之어늘
魏主使高車 馳擊之하니 夏兵大敗하여 走鶉觚原이어늘 魏兵圍之注+鶉觚縣, 前漢屬北地, 後漢․晉屬安定, 有鶉觚原.하다
宋加檀道濟都督征討諸軍事하여 帥衆伐魏하니 魏叔孫建長孫道生 濟河而南하다 到彦之聞洛陽虎牢不守하고 欲引兵還이어늘
將軍垣護之以書諫之注+護之, 苗之子也.하여 以爲宜使竺靈秀 助朱脩之하여 守滑臺하고 帥大軍進擬河北이라하고
且曰 昔人有連年攻戰 失衆乏糧하여도 猶張膽爭前하여 莫肯輕退어늘 況今青州豐穰하고 濟漕流通하여 士馬飽逸하고 威力無損이어늘
若空棄滑臺하여 坐喪成業이면 豈朝廷任之旨邪注+受, 當作授.아하니 彦之不從하고 欲焚舟歩走러라
王仲德曰 洛陽既陷 虎牢不守 自然之勢也 虜去我猶千里 滑臺尚有彊兵하니 若遽捨舟南走 士卒必散하리이다
彦之乃引兵하여 自清入濟注+郭緣生述征記曰 “淸河首受洪水, 北流濟, 或謂淸卽濟也.”하고 南至歷城하여 焚舟棄甲하고 歩趨彭城하니 時青兗大擾
長沙王義欣 在彭城하니 將佐皆勸委鎭還都호되 義欣不從하다
魏攻濟南이어늘 太守蕭承之帥數百人拒之注+濟南郡治歷城.러니 魏衆大集이어늘 承之使偃兵開門한대
衆曰 賊衆我寡하니 奈何輕之 承之曰 今懸守窮城하여 事已危急하니 若復示弱이면 必爲所屠 唯當見彊以待之耳注+見, 賢遍切.라하니
魏人疑有伏兵하여 遂引去하다
夏主及魏人戰이라가 敗走上邽하니 魏取安定隴西하다
魏軍圍夏主數日 斷其水草하여 人馬饑渴하니 夏主引衆下鶉觚原이어늘 魏軍擊之하니
夏衆大潰하여 夏主中重創하고 單騎走하여 收餘衆하여 西保上邽注+中, 去聲. 重, 直用切. 重創, 厚傷也.하니 魏兵遂取安定하다 魏主還臨平涼하여 掘塹圍之하고
安慰初附하며 赦秦雍之民하여 賜復七年하니 夏隴西守將降魏하다
魏攻宋滑臺하다
◑涼遣使入貢于魏하다
北涼王蒙遜 遣宗舒入貢于魏한대 魏主與之宴할새 執崔浩之手하여 以示舒等曰
汝所聞崔公 此則是也 才略之美 於今無比하니 朕動止咨之하노니 預陳成敗 若合符契니라
壽陽土荒民散하고 城郭頽敗하여 盗賊公行注+豫州刺史, 鎭壽陽.이어늘 義欣隨宜經理하니 境内安業하여 道不拾遺하고 城府完實하여 遂爲盛藩이라
芍陂久廢어늘 義欣修治隄防하여 引渒水入陂하여 溉田萬餘頃하니 無復旱災注+渒. 音卑. 地理志 “汝南郡陽國渒水出焉.”러라
魏人克平涼하고 復取長安하다
魏克平涼 豆代田 得奚斤娥清等以獻하니 關中悉入於魏어늘 魏主以將軍王斤鎭長安而還注+斤, 建之子也.하여 以奚斤爲宰士하여 使負酒食以從注+宰士掌膳飮. 以斤敗軍失身, 辱之也.하다
王斤驕矜不法하니 民不堪命하여 南奔漢川者數千家어늘 魏主斬斤以徇하다
宋以垣護之 爲髙平太守하다
到彦之王仲德 下獄免官하고 上見垣護之書而善之하여 以爲北高平太守注+南高平郡, 僑郡也, 屬南兗州. 北高平郡, 古郡也, 屬兗州, 治湖陸.하다
彦之之北伐也 甲兵資實甚盛이러니 及敗還 委棄盪盡하니 府藏武庫 爲之空虛러라


宋나라 太祖 文帝 劉義隆 元嘉 7년이고, 北魏 世祖 太武帝 拓跋燾 神䴥 3년이다.
[綱] 봄 3월에 宋나라는 將軍 到彦之 등을 보내어 北魏를 정벌하였다.
[目] 宋主는 河南의 땅을 회복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어서 조서를 내려 갑졸 5만 명을 선발하여 右將軍 到彦之에게 주고, 將軍 王仲德․竺靈秀의 水軍을 통솔하여 黃河로 들어가게 하고, 또 장군 段宏에게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곧장 虎牢로 향하도록 하고, 劉德武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이어서 진군하도록 하고, 長沙王 劉義欣을注+① 劉義欣은 劉道憐의 아들이다. 監征討諸軍事로 삼아서 출동하여 彭城을 鎭守하면서 여러 군대를 성원하도록 하였다.
먼저 장군 田奇를 北魏에 파견하여 魏主에게 고하기를 “河南은 옛날에 우리 宋나라의 영토였다. 중간에 저들의 침략을 받았으니 지금 마땅히 옛 국경선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지, 河北 지역에는 관심이 없다.”라고 하니,
魏主가 크게 분노하여 말하기를 “내가 태어나 머리가 아직 마르지注+② 燥는 마르다는 뜻이다. 않았을 때에도 이미 河南은 우리의 땅이라고 들었다. 만일 기필코 군사를 일으켜 진격해온다면 당장은 임시로 수비를 철수시켜 피하겠지만, 겨울 추위에 얼음이 얼어붙을 때에 직접 다시 그곳을 빼앗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綱] 北魏의 勅勒이 반란을 일으키자 北魏가 이들을 공격하여 섬멸하였다.
[目] 北魏에서 새로이 이주시킨 勅勒注+① ≪新唐書≫ 〈回鶻列傳〉에 말하기를 “勅勒은 그 조상이 匈奴이다. 北魏 때에 髙車部라고 부르다가 그 뒤에 와전되어 鐵勒이라고 하였으니 唐나라 때 鐵勒 15種이 그것이다.”라고 하였다. 1천여 家口가 장수와 관리들의 착취에 고통을 받아 원망하는 말을 하고 풀이 자랄 때에 漠北으로 도망가기를 기약하였다.
劉絜과 安原이 그들을 河西로 이주시키자고 청하였는데, 魏主가 말하기를 “이들의 습속은 방목하면서 흩어져 산 시일이 오래되었으니, 예컨대 우리 안에 있는 사슴을 핍박하면 광분하여 돌진하고, 느슨하게 하면 저절로 안정되는 것과 같다. 내가 처리하는 데에 나름 방도가 있으니, 번거롭게 이주시킬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유혈 등이 굳게 청하자 마침내 이주시키는 것을 허락하니, 칙륵이 모두 놀라서 말하기를 “우리들을 河西에 가두니注+② 圈(가두다)은 其卷과 其權의 두 가지 切이니, 우리에 가둠이다., 우리들을 죽이려는 것이다.”라고 하고 마침내 반란을 일으켜 달아나자 유혈이 그들을 추격하여 토벌하니, 모두 굶어 죽었다.
[綱] 여름 6월에 宋나라가 楊難當을 武都王으로 삼았다.
[綱] 가을 7월에 北魏의 河南의 여러 군대가 후퇴하여 河北에 주둔하니 宋나라 到彦之 등이 河南을 빼앗았다.
[目] 北魏의 남쪽 변경에 있는 여러 장군들이 표문을 올려서 말하기를 “宋나라 사람들이 침입해 들어오려고 하니, 군사 3만을 청하여 그들이 아직 출동하지 않았을 때 먼저 그들을 공격하여 그 銳氣를 꺾어버려야 합니다.”라고 하고, 이어서 국경에 있는 河北의 유민들을 다 죽여서 그들이 송나라 군대를 鄕導하는 것을 단절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魏主가 공경들에게 이를 논의하도록 하니 모두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崔浩가 말하기를 “안 됩니다. 남방은 땅이 낮고 습하여 여름에 접어들어 장맛비가 내리면 초목이 무성하며 빽빽하고 땅의 기운은 찌는 듯이 더워서 질병에 걸리기 쉬우니, 출병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저들은 이미 엄중히 방비하고 있으니, 성을 지키는 것도 반드시 견고할 것입니다. 머물러 주둔하며 오랫동안 공격하면 군량의 운송이 이어지지 못하고, 군사를 나누어 사방을 약탈하면 군사의 힘이 분산되어 약해질 것이니, 지금 그들을 공격하면 승리를 거두지 못할 것입니다.
저들이 만약 과감히 북쪽으로 침입해올 경우에 마땅히 저들이 피로하고 지치기를 기다려 가을이 되어 날이 서늘하고 말이 살찌면 이를 이용하여 적에게 식량을 탈취하여 서서히 가서 그들을 공격하면 되니, 이것이 萬全의 계책입니다.
서북을 지키는 장수들이 폐하를 따라서 정벌하여 많은 미녀와 진귀한 보물을 획득하여 소와 말도 무리를 이루었습니다.
남쪽 변경의 여러 장수들이 이를 듣고서 부러워하여 또한 남쪽을 공략하여 재물을 취하려 하는 것이니, 이는 모두 사사로운 계획을 써서 그 때문에注+① 爲(때문에)는 去聲이다. 나라에 사건이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들어주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니, 魏主가 마침내 그만두었다.
[目] 여러 장군들이 다시 표문을 올려 幽州 이남의 강한 병사를 선발하여 자신들의 수비를 원조하고, 그리고 漳水에서 선박을 제조할 것을 청하였는데, 공경들은 모두 마땅히 요청한 대로 해야 한다고 하였고, 이어서 司馬楚之․魯軌․韓延之 등을 임명하여 장수로 삼아 남쪽 사람을 불러 끌어들이게 하였다.
崔浩가 말하기를 “사마초지 등은 모두 저들이 두려워하고 꺼리는 대상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정예 병사를 다 징발하고 대대적으로 선박을 제조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宋나라는〉 우리나라가 司馬氏를 존립시키고 劉氏 종실을 주멸하려 한다고 하여, 반드시 온 나라가 놀라서 정예 병사를 모두 징발하여 죽기로 싸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남쪽 변경의 여러 장군들이 그들을 제어할 수 없을 것이니, 적을 물리치려고 하면서 도리어 그들을 부르는 격입니다. 허장성세를 펼치다가 실제 피해를 부른다는 것은 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마초지 등은 모두 작은 이익을 탐내는 소인배이므로, 단지 경박하고 무뢰한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데 그쳐서 큰 공을 세우지 못할 것이니, 한갓 우리나라에 전쟁이 이어지고 재앙이 얽히도록 할 뿐입니다.”라고 하였으나, 魏主가 옳게 여기지 않았다.
[目] 崔浩가 마침내 다시 天時를 들어 남방에서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반드시 불리하다 하여 말하기를 “올해는 해로운 기운이 揚州에 있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注+① 揚州는 12방위의 丑方에 있고 이번 歲次(庚午年)가 午에 있다. 丑은 金庫(金 창고)가 되고 午는 火旺(火氣의 旺盛)이 되는데, 火는 金을 해치므로 해로운 기운이 양주에 있는 것이다. 庚과 午는 스스로를 刑殺하는 형상이므로 먼저 발동하는 사람이 상해를 당할 것이 두 번째입니다.注+② 歲次가 庚午에 있으니, 庚은 金이고 午는 火이다. 화는 금을 이기므로 스스로를 刑殺하는 형상이 된다.
일식으로 대낮에도 어두웠는데 그 분야가 斗宿와 牛宿에 해당한 것이 세 번째입니다.注+③ 지난해 11월 초하루에 星紀(별자리 이름)의 分野에서 일식이 일어났는데 斗宿와 牛宿에 해당한다. 宿(별)는 음이 秀이다. 熒惑星(火星)이 翼宿와 軫宿에 있으면서 어지러움과 죽음을 주관하는 것이 네 번째입니다.注+④ 熒惑은 罰星이니, 머무는 별자리[宿]에는 〈그 분야에 해당하는〉 나라가 재앙을 받아서 죽거나 난리가 난다. 翼宿와 軫宿는 楚의 분야이니, 荊州에 속한다. 太白星(金星)이 아직 나오지 않아서 진군하는 자가 패하는 것이 다섯 번째입니다.注+⑤ 太白은 군대의 상징이니, 태백이 아직 나오지 않아서 진군하는 것이 불리한 것이다.
나라를 흥성하게 하는 군주는 먼저 人事를 정비하며 그 다음으로 지형의 이점을 다한 후에 天時를 살피므로, 만 가지를 거행하여 만 가지가 다 완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劉義隆의 막 건국한 나라는 人事가 흡족하지 않고, 災異가 자주 나타나니 天時가 돕지 않고, 배가 가려해도 물이 말랐으니 地利도 다하지 못합니다.
이 人事․天時․地利 세 가지 중에 하나도 가능한 것이 없는데도 유의륭이 이를 행하려 하니, 반드시 패배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目] 魏主가 많은 사람들의 말을 저버릴 수가 없어서 마침내 조서를 내려 선박 3천 척을 건조하고, 幽州 이남의 수비병을 선발하여 黃河 가에 집결시켰다. 司馬楚之를 安南大將軍으로 삼고 琅邪王에 책봉하여, 潁川에 주둔하게 하였다.
到彦之가 淮水에서 泗水로 들어갈 적에, 사수가 말라注+① 滲(마르다)은 所禁의 切이니, 물이 마르는 것이 滲이다. 하루에 가는 길이 겨우 10리였다.
7월에 비로소 須昌에注+② 須昌縣은 前漢 때에 東部에 속했고, 後漢과 晉나라 때에 東平郡에 속했다. 도착하여 마침내 황하를 역류하여 서쪽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魏主가 河南 4鎭의注+③ “四鎭”은 金墉․虎牢․滑臺․碻磝이다. 군사가 적다고 하여 명을 내려 모든 군사에게 북쪽으로 건너가게 하였다.
도언지는 朱脩之를 남겨서 滑臺를 지키게 하고, 尹沖에게 虎牢를 지키게 하고, 杜驥에게注+④ 杜驥는 杜預의 현손이다. 金鏞을 지키게 하고, 여러 군대가 靈昌津으로 나아가 주둔하여 남쪽 연안을 줄지어 지켜서 潼關까지 닿았다.
이에 司州와 兗州가 평정되고 나자 여러 군대가 모두 기뻐하였는데, 王仲徳만은 홀로 걱정하는 기색을 하여 말하였다.
“그대들은 북방 사람들의 眞僞를 알지 못하니 반드시 그 계략에 빠질 것이다. 오랑캐는 비록 仁義는 부족하지만 흉악과 교활함이 넘치니 지금 수비하는 병사를 거두어 북쪽으로 돌아갔는데 반드시 힘을 합쳐 집결할 것이다. 만약 황하가 얼어붙고 나면 장차 다시 남쪽으로 올 것이니, 어찌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綱] 8월에 北魏는 將軍 安頡을 보내어 宋나라 군사를 격파하였다.
[目] 魏主가 安頡을 보내어 여러 군대를 감독하여 到彦之를 공격하게 하였다. 도언지가 姚聳夫를 보내어 황하를 건너 冶坂을注+① ≪魏土地記≫에 이르기를 “冶阪城은 옛 명칭이 漢祖渡이다. 성곽이 험준하고 견고하며, 남쪽으로 孟津에 임하는데, 洛陽에서 서북쪽으로 42리 떨어진 거리에 있다.”라고 하였다. 공격하게 하였는데 안힐과 싸워서 요용부의 군대가 패하니,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綱] 林邑이 貢物을 宋나라로 들여보냈다.
[綱] 9월에 北燕王 馮跋이 殂하니, 그의 아우 馮弘이 太子 馮翼을 죽이고 스스로 즉위하였다.
[目] 北燕의 太祖 馮跋이 병이 위독해지자 수레를 타고 前殿에 나아가서 태자 馮翼에게 국사를 섭정하여 군대를 정비하고 정사를 다스려 비상사태에 대비할 것을 명하였다. 宋夫人이 자기의 아들 馮受居를 세우고자 하여 풍익에게 말하기를 “황상의 병이 곧 완쾌될 것인데, 어찌 급하게 아버지를 대신하려고 하는가.”라고 하였다.
풍익의 성품이 어질고 연약하여 결국 東宮으로 돌아가 매일 세 차례씩 가서 병을 살폈다. 송부인이 조서를 위조해서 안팎을 단절시키고 환관을注+① 閽人은 아침과 저녁으로 문을 여닫는 일을 맡은 사람이다. 寺는 모신다는 뜻이다. 시켜 태조의 문안을 전달할 뿐이어서 풍익과 대신들은 모두 알현할 수가 없었고, 오직 中給事 胡福만이 홀로 출입할 수가 있어서 禁衛를 독단하여 관장하였다.
[目] 胡福은 宋夫人이 마침내 그 음모를 성공시킬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에 中山公 馮弘에게 말하였는데, 풍홍이 장병 수십 명과 함께 갑옷을 입고 禁中으로 진입하니 宿衛들은 모두 싸우지 않고 흩어졌다.
송부인이 동쪽 閤門을 닫으라고 명하니, 풍홍의 하인이 합문을 넘어서 들어가 注+① 女御는 이다. 御는 進(進獻)과 같으니 시중을 든다는 말이다. 활로 쏘아 죽였다. 太祖가 놀라고 두려워하다가 殂하니 풍홍이 마침내 天王에 즉위하였는데,
태자 풍익이 동궁의 병사를 거느리고 나가서 싸웠으나 패배하니 병사들이 모두 무너져 도망갔다. 풍홍이 마침내 풍익과 태조의 여러 아들 1백여 명을 죽였다.
[綱] 魏主가 統萬으로 갔다.
[目] 夏主(赫連定)가 사절을 보내 宋나라와 강화를 요청하고, 군사를 연합하여 北魏를 멸망시키고 멀리 河北을 나누어 恒山에서 동쪽은 宋나라에 소속시키고 서쪽은 夏나라에 소속시키기로 약정하였다.
魏主가 이 소식을 듣고 군사를 정비하여 장차 夏나라를 정벌하고자 하자,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劉義隆의 군사가 아직도 황하 중류에 머물러 있는데注+① 〈“猶在河中”은〉 황하 중류에 있음을 말한다. 이를 버려두고 서쪽으로 간다면 앞에 있는 적을 반드시 이길 수는 없을 것이고, 劉義隆이 빈틈을 타고 황하를 건너게 되면 山東을注+② 여기의 山東은 太行山․恒山의 동쪽으로, 바로 河北 지역을 말한다. 상실하게 됩니다.”라고 하였다.
崔浩가 말하기를 “유의륭이 혁련정과 멀리서 서로 호응하여 虛張聲勢로 맞장구나 치고 있을 뿐이지, 감히 먼저 〈우리나라에〉 침입하지 않을 것입니다. 비유하면 한 쌍 닭을 얽어매어 함께 날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으므로 해가 될 수 없습니다.
신이 애초에 말하였듯이, 유의륭의 군대가 침입해올 적에는 마땅히 황하 중류에 주둔했다가 두 갈래 길로 북상하여 동쪽 길로는 冀州로 향하고, 서쪽 길로는 鄴城으로 돌진할 것이니, 이와 같다면 폐하께서는 마땅히 스스로 그들을 토벌하시되 천천히 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아 동서로 늘어선 군사의 길이가 2천 리에 걸쳐서, 한 곳을 지키는 군사가 수천 명에 지나지 않으므로 형세가 분산되고 세력이 약합니다. 이는 견고히 황하를 지키고자 하는 것에 불과하며 북쪽으로 건너오려는 의도가 없는 것입니다.
혁련정은 夏나라의 잔존한 무리로 꺾기 쉬우니 그를 치면 반드시 쓰러질 것입니다. 혁련정을 평정한 후에 동쪽으로 潼關으로 나가 멍석을 말 듯이 전진하면 위세가 남쪽 끝까지 진동하여 長江과 淮水 이북에는 풀 한 포기도 제대로 서 있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魏主는 이를 따라서 마침내 統萬에 가서 平涼을 습격할 것을 모의하였다.
[綱] 西秦이 정월부터 비가 내리지 않더니 이달까지 이어졌다.
四銖錢四銖錢
[綱] 겨울 10月에 宋나라가 四銖錢을 주조하였다.
[綱] 宋나라 到彦之가 東平을 수호하였는데, 北魏가 宋나라 金墉과 虎牢를 공격하여 빼앗았다.
[目] 宋나라의 到彦之와 王仲德이 黃河의 연안에 수비대를 설치하고 돌아가서 東平을 지켰다. 北魏의 安頡이 委粟津에서注+① 委粟津은 洛陽 북쪽에 있고, 또 〈같은 이름을 가진〉 委粟山이 洛陽 남쪽에 있다. 황하를 건너 金埇城을 공격하였다. 〈宋나라의〉 杜驥가 성을 버리고 달아나고자 하였으나 죄를 받을까 두려워하였다.
애초에 宋 高祖(劉裕)가 後秦을 멸망시키고 그 종과 종틀을 江南으로 옮길 적에 大鐘을 洛水에 빠뜨렸는데, 宋 文帝가 姚聳夫에게 가서 그것을 가져오게 하였다.
두기가 요응부를 속여서 말하기를 “금용성은 이미 수리가 다 끝나고 양식도 풍족한데, 부족한 것은 사람뿐입니다. 지금 北魏의 기병이 남쪽으로 건너오니 마땅히 서로 힘을 합하여 그들을 막아야 합니다. 큰 공을 세우고 나거든 종을 끌어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요용부가 이를 따랐다.
요응부는 도착하고 나서 성을 지킬 수 없음을 보고는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떠나자 두기도 남쪽으로 달아나니, 안힐이 洛陽을 탈취하였다.
두기가 돌아와서 황제(劉義隆)에게 말하기를 “본래 죽음으로 견고히 지키고자 하였는데, 요용부가 성에 이르자마자 황급히 달아나 군인들의 사기가 꺾여서 다시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하니, 上이 크게 노하여 요용부를 壽陽에서 주살하였다.
요용부는 용감하고 건장하여 여러 偏將들 중에 따라갈 자가 없었다. 안힐이 장군 陸侯와 진군하여 虎牢를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綱] 西秦이 옮겨가서 南安을 수호하였다.
[目] 西秦王 乞伏暮末이 北涼에게 압박을 받아 北魏에다 항복을 받아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北魏에서는 平涼․安定 지역을 서진왕에게 책봉해줄 것을 허락하였다. 걸복모말은 마침내 성읍을 불태우고 보물을 파괴하고 1만 5천 戶를 인솔하고서 동쪽으로 上邽로 갔다.
夏主(赫連定)는 군사를 동원하여 걸복모말을 막았다. 걸복모말이 南安에 남아서 지키자 西秦 옛 영토가 모두 吐谷渾으로 들어갔다.注+① 苑川으로부터 西平과 抱罕까지는 모두 乞伏氏의 옛 땅이다. 晉 孝武帝 太元 8년(383)에 乞伏國仁이 隴西를 점거하였으니, 南安은 역시 그 땅이다.
[綱] 11월에 魏主가 平涼을 습격하니 夏主가 太武帝와 싸웠으나 대패하였다.
[目] 魏主가 平涼에 이르러 장군 古弼 등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安定으로 나아가도록 하였다. 夏主가 안정으로부터 북쪽으로 가서 평량을 구원하려고 할 적에 고필과 마주쳤다. 고필이 거짓으로 퇴각하며 유인하였는데, 夏主가 고필을 추격하였다.
魏主가 高車를 시켜서 말을 달려 夏나라 군사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夏나라의 군사가 대패하여 鶉觚原으로注+① 鶉觚縣은 前漢 때에 北地郡에 속하였고, 後漢과 晉나라 때에 安定郡에 속하였는데, 鶉觚原이 있다. 도주하거늘 北魏의 군사가 夏나라 군사를 포위하였다.
[綱] 宋나라가 將軍 檀道濟를 보내어 北魏를 토벌하니, 〈宋나라〉 到彦之가 군사를 버리고 도주하였다.
[目] 宋나라는 檀道濟에게 都督征討諸軍事를 보태주어 군사들을 거느리고 北魏를 정벌하게 하였다. 北魏의 叔孫建과 長孫道生이 황하를 건너서 남쪽으로 갔다. 到彦之는 洛陽과 虎牢를 지키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려고 하였다.
장군 垣護之가注+① 垣護之는 垣苗의 아들이다. 편지로 도언지에게 간언하기를 “마땅히 竺靈秀에게 朱脩之를 도와 滑臺를 지키도록 하고, 〈장군께서는 직접〉 대군을 인솔하여 河北으로 진격하는 척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예전에 사람들이 여러 해 동안 공격하며 싸울 적에 무리를 잃고 식량이 부족하여도 오히려 대담하게 전진하여 경솔히 물러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지금 青州는 풍년이 들고 濟水의 조운이 유통하여 군사와 군마는 배부르며 편안하고 위력이 손상됨이 없습니다.
만약 공연히 滑臺를 버리고서 앉아서 이룩한 업적을 잃으면 어찌 조정에서 임무를 준注+② 受는 마땅히 授(준다)로 써야 한다. 뜻이겠습니까.”라고 하였으나, 도언지는 따르지 않고 배를 불사르고 걸어서 달아나려고 하였다.
[目] 王仲德이 말하기를 “洛陽이 이미 함락되자 虎牢가 지켜지지 못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형세입니다. 오랑캐들은 여전히 우리와 천 리나 떨어져 있고, 滑臺에는 아직도 강한 병사가 있는데, 만약 황급히 배를 버리고 남쪽으로 도망가면 사졸들은 반드시 흩어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到彥之는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淸水에서 濟水로注+① 郭緣生의 ≪述征記≫에 말하기를 “淸河가 먼저 洪水를 받아서 북쪽으로 가서 濟水로 흘러간다. 혹자는 淸河가 바로 濟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들어갔고, 남쪽으로 가서 歷城에 이르러 배에 불을 지르고 갑옷을 버리고 걸어서 彭城으로 향하였다. 이때 靑州와 兗州가 크게 어지러웠다.
長沙王 劉義欣이 팽성에 있었는데 장수와 보좌관들은 모두 수비를 포기하고 도읍지로 돌아갈 것을 권하였으나 유의흔이 따르지 않았다.
北魏의 군사가 濟南을注+② 濟南郡은 歷城에 治所를 두었다. 공격하자, 濟南太守 蕭承之가 수백 명을 거느리고 이들을 막았다. 北魏의 무리가 대거 모여들자 소승지는 군사들을 숨기고 성문을 열게 하였는데,
무리들이 말하기를 “적들은 많고 우리들은 적은데 어찌 적들을 가볍게 여기십니까.”라고 하니, 소승지가 말하기를 “지금 궁벽한 성을 〈원조 없이〉 외로이 지키면서 사태가 이미 위급한데, 만약 다시 연약함을 보인다면 반드시 도륙당할 것이니, 오직 강함을 보이면서注+③ 見(보이다)은 賢遍의 切이다. 그들을 대처해야 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北魏의 군사들은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퇴각하였다.
[綱] 夏主가 北魏 군사들과 싸우다가 패배하여 上邽로 달아나니, 북위에서 安定과 隴西를 차지하였다.
[目] 北魏 군대가 夏主를 포위한 지 며칠 만에 물과 건초를 끊어버려서 사람과 말이 굶주리고 목이 말랐다. 夏主가 무리를 거느리고 鶉觚原으로 내려가자 북위의 군대가 그를 공격하였는데,
夏나라 군대가 크게 무너져서 夏主가 중상을 입고서注+① 中(맞다)은 去聲이다. 重(중하다)은 直用의 切이니, “重創”은 심한 상처이다. 말 한 필로 달아나 남은 무리들을 수습하여 서쪽으로 가서 上邽를 지키니, 北魏의 군사는 마침내 安定을 탈취하였다. 魏主가 돌아와 平涼으로 가서 해자를 파고 그곳을 포위하였다.
막 귀의한 사람들을 위안하고 秦州․雍州의 백성들을 용서하여 7년간의 부역 면제를 내리니, 夏나라의 隴西를 수비하는 장수들이 北魏에 항복하였다.
[綱] 北魏가 宋나라 滑臺를 공격하였다.
[綱] 北涼이 사신을 보내 北魏에 공물을 바쳤다.
[目] 北涼王 沮渠蒙遜이 宗舒를 파견하여 北魏에 공물을 바쳤다. 魏主가 그에게 연회를 베풀어줄 적에 崔浩의 손을 잡고서 종서 등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그대들이 소문에 들어본 崔公이 바로 이 사람이다. 재주와 계략의 뛰어남은 현재에 견줄 사람이 없다. 짐이 움직일지 머무를지에 대해 그에게 자문하니, 미리 성공과 패배를 진술하는데 마치 부절이 합치되듯 맞았다.”라고 하였다.
[綱] 12월에 宋나라가 長沙王 劉義欣을 豫州刺史로 삼았다.
[目] 壽陽은注+① 豫州刺史는 壽陽에 진수한다. 토지가 황폐하고 백성이 흩어졌으며 성곽은 무너져 파괴되어 도적들이 공공연히 돌아다녔다. 劉義欣이 마땅함에 따라서 다스리니, 경내에서는 생업에 안주하여 길거리에서 떨어진 것도 줍지 않고, 성곽이 완전하고 창고가 충실해져 마침내 강성한 藩鎭이 되었다.
芍陂(제방 이름)는 오랫동안 폐기되었는데, 유의흔이 제방을 수리하여 渒水의注+② 渒(물 이름)는 음이 卑이다. 에는 “汝南郡 戈陽國에 渒水가 발원한다.”라고 하였다. 물을 작피로 끌어들여 토지 1만여 頃을 관개하니, 다시는 가뭄의 재해가 없었다.
[綱] 北魏 사람들이 平涼에서 승리하고, 다시 長安을 차지하였다.
[目] 북위가 平涼에서 승리하자 豆代田이 奚斤․娥淸 등을 구출시켜 魏主에게 바쳤다. 關中 지역이 모두 北魏로 편입되자, 魏主가 장군 王斤에게注+① 王斤은 王建의 아들이다. 長安을 수비하도록 하고 〈자신은 동쪽으로〉 돌아가서 해근을 宰士로 삼아 술과 음식을 지고 따라다니게 하였다.注+② 宰士는 음식과 음료를 담당하니. 奚斤이 군대를 패배시키고 자신을 그르쳤기 때문에 모욕을 준 것이다.
왕근이 교만하고 자랑하며 법을 지키지 않으니, 백성들이 명령을 견디지 못하고 남쪽으로 달아나 漢川으로 간 사람이 수천 家였다. 魏主는 왕근의 참수하여 조리돌렸다.
[綱] 宋나라가 垣護之를 髙平太守로 삼았다.
[目] 到彦之와 王仲德이 모두 하옥되어 파면을 당했고, 上은 垣護之의 서신을 보고 훌륭하다고 여겨서 그를 北高平太守로注+① 南高平郡은 이니, 南兗州에 속한다. 北高平郡은 옛 郡이니, 兗州에 속하고 湖陸에 治所를 두었다. 삼았다.
도언지가 북벌할 적에 甲兵과 군수물자가 매우 넘쳐났는데, 실패하고 돌아올 때에는 버리고 탕진하니 이에 창고와 무기고가 텅 비게 되었다.


역주
역주1 宋遣將軍到彦之等 伐魏 : “北魏의 奚斤이 여러 장군들을 감독하여 宋나라를 공격할 적에 ‘擊’이라고 기록하였는데(壬戌年(422)) 여기에서 ‘伐’이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河南은 이전의 宋나라 땅이므로 曲直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北魏가 金墉․武牢․滑臺를 빼앗을 적에 모두 ‘宋’자를 달아놓았다.[魏奚斤督諸將伐宋書擊(壬戌年) 此其書伐 何 河南故宋土 曲直之辭也 故魏取金墉武牢滑臺 皆繫之宋]” ≪書法≫ 北魏가 金墉을 점령했을 때 “魏取宋金墉”이라 하였다. 武牢는 虎牢인데, 唐나라 때 高祖 李淵의 祖父 李虎의 이름인 ‘虎’를 피휘한 것이다.
역주2 魏河南諸軍……取河南 : “위에서 ‘魏河南諸軍 退屯河北’이라고 기록하고, 아래에 ‘宋到彦之等 取河南’이라고 기록하였으니, 이는 到彦之 등이 北魏 군대가 스스로 후퇴한 것을 틈타서 차지한 것이지 싸움에 이겨서 얻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書法은 이와 같은 것이니, 그 사실을 기록했을 뿐이다.[上書魏河南諸軍 退屯河北 下書宋到彦之等 取河南 則是彥之等 因魏軍之自退而取之 非以戰勝而得之也 書法若此 紀其實爾]” ≪發明≫
역주3 (治)[冶] : 저본에는 ‘治’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冶’로 바로잡았다.
역주4 (治)[冶] : 저본에는 ‘治’로 되어 있으나, ≪水經注≫ 〈河水〉에 의거하여 ‘冶’로 바로잡았다.
역주5 女御 : 궁녀의 관명이다.
역주6 御妻 : 궁녀의 관명이다.
역주7 西秦……至于是月 : “≪資治通鑑綱目≫에서 몇 월부터 비가 내리지 않더니 몇 월까지 이어졌다고 기록한 것이 6번이니(秦나라 초기 丙寅年(B.C.235)에 자세하다.), 이때보다 오래된 것은 없었다. 지난해(429)에 地震이 있었는데 들판의 풀들이 모두 뒤집혔고, 이때에는 〈비가 내리지 않고〉 항상 볕이 나서 모두 9개월이 지났으니, 西秦의 亡兆이다.[綱目書自某月不雨至于某月者六(詳秦初丙寅年) 未有久於此者也 去年地震 野草皆反 於是恒暘 凡九閲月 秦之亡兆也]” ≪書法≫
역주8 宋鑄四銖錢 : “宋나라는 이로부터 37년 동안 錢弊(화폐의 폐단)로 모두 7번의 바꾸었다(이해(430)에 四銖錢을 주조하고, 丁亥年(447)에 大錢을 주조하고, 戊子年(448)에 중지하고, 甲午年(454)에 孝建四銖를 주조하고, 乙巳年(465)에 二銖를 주조하고, 11月에 중지하고, 丙午年(466)에 新錢(새 돈)을 중단하여 오로지 古錢(옛 돈)을 사용하였다.). ≪資治通鑑綱目≫에 錢弊로 王莾 이외에 자주 화폐를 바꾼 것은 宋나라만 한 나라가 없었고, 나쁜 폐단의 극치도 역시 宋나라만 한 나라가 없었다.[宋自是三十七年 錢弊凡七變(是年鑄四銖 丁亥年鑄大錢 戊子年罷 甲午年鑄孝建四銖 乙巳年鑄二銖 十一月罷 丙午年斷新錢 專用古錢) 綱目錢弊 自王莾外 更變之亟 無如宋者矣 而敝惡之極 亦無如宋者矣]” ≪書法≫四銖錢은 漢 文帝 5년(B.C.175)에 주조했던 화폐 이름이다. 四銖半兩은 半兩 또는 漢半兩이라고도 일컫는데,무게가 4銖이다. 24수가 1兩이므로, 4수로 반량(12수)의 가치, 즉 3배의 가치를 지니게 한 돈이다. 이 폐단으로 물가가 폭등하게 되었다.(≪漢書≫ 4권 〈文帝紀〉) 이때(430)에 와서 과거에 폐단이 있었던 ‘四銖錢’이라는 명칭의 돈을 또 주조했던 것이다. 孝建四銖는 전면에 ‘孝建’이라 쓰고 후면에 ‘四铢’라고 쓴 銅錢이다. ‘孝建’은 劉宋 孝武帝 劉駿의 연호이다.
역주9 宋遣將軍檀道濟……到彦之棄軍走 : “到彦之는 자신이 督將이니 실제 北伐의 책임을 지고 있다. 비록 河南을 취하기는 하였으나 다만 北魏의 군대가 스스로 물러났기 때문이지 전승한 공로가 없다. 지금 북쪽 군사들이 이미 모였으니 바로 힘써 싸워 물리쳐야 할 때인데 도리어 풍문만 듣고도 도주하였으니, 과연 무엇을 말할 것이 있는가. 그러므로 ≪資治通鑑綱目≫에서는 여기에서 특별히 ‘棄軍走’라고 기록하여 죄준 것이다. 뒷날 하옥되어 관직이 파면되는 데에 이르러서는 삭제하고 기록하지 않았으니, 또 이로써 宋나라 사람들이 군대를 궤멸시킨 주벌을 공정하게 처리하지 못한 것을 나무란 것이다.[彦之身爲督將 實任北伐之責 雖取河南 特因魏軍自退 非有克捷之功也 今北兵既集 正宜力戰以却之 乃望風逃遁 果何謂耶 故綱目於此 特書棄軍走以罪之 至他日下獄免官 則削而不書 又以譏宋人不能正僨軍之誅也]” ≪發明≫
역주10 (受)[授] : 저본에는 ‘受’로 되어 있으나, 訓義에 의거하여 ‘授’로 바로잡았다.
역주11 宋以長沙王義欣 爲豫州刺史 : “刺史의 임무는 晉나라 이래로 한 지방을 전담하고 병권을 장악하는 것이니, 漢나라 시대의 檢察하는 직무를 회복시킨 것이 아니다. 宋나라 시대에 이를 맡은 자들은 대부분 군주의 子弟들이었으니, 晉나라와 또다시 크게 달랐다.[刺史之任 自晉以來 專方面 本兵柄 非復漢世刺擧之職也 宋世所任 率多子弟 與晉世又大異矣]” ≪書法≫
역주12 地理志 : 정확한 출처는 미상이다.
역주13 (戈)[弋] : 저본에는 ‘戈’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綱目集覽≫에 의거하여 ‘弋’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4 僑置한 郡 : 僑置란 地名을 다른 곳에 그대로 옮겨서 설치한 것이다. 東晉과 南朝 시대에 북방 민족들이 침범하자 중원의 백성들이 남방으로 전란을 피해왔는데, 남방의 지역을 택하여 郡縣을 설치하고 북쪽에서 부르던 지명을 그대로 쓰게 하여 그들을 안주시켰다.

자치통감강목(17) 책은 2021.11.0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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