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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2)

자치통감강목(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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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亥年(255)
十八年이라
魏正元二年이요 吳五鳳二年이라
欽以驍果見愛於曹爽하고 而儉素與夏侯玄李豐으로이라
至是 皆不自安하여 儉乃以計厚待欽하니 儉子甸謂儉曰 大人居方嶽重任하여 國家傾覆而晏然自守하니 將受四海之責矣리이다
於是 儉矯太后詔하여 起兵壽春하고 移檄州郡하여 以討司馬師하고 又遣使邀鎭南將軍諸葛誕하니 誕斬其使注+時誕都督豫州.하다
儉將五六萬衆渡淮하여 至項堅守하고 使欽在外爲遊兵注+集覽 “項, 今陳州項城.”이어늘 師問計於河南尹王肅한대
肅曰 昔 關羽有北向爭天下之志러니 孫權襲取其將士家屬하니 羽衆 瓦解
今淮南將士 家在內州하니 但急往禦衛하여 使不得前이면 必有土崩之勢矣注+魏制, 諸將出征及鎭守方面, 皆留質任. 時淮南士皆自內州出戍, 故家屬皆留內. 禦衛, 謂禦儉欽之衆, 使不得進, 又衛其家屬.리이다
師新割目瘤創甚注+瘤, 音留, 肬也. 肉起疾腫曰瘤.이라 或謂不宜自行이라하고 肅又與尙書傅嘏 中書侍郞鍾會 勸師自行한대 師疑未決이어늘
嘏曰 淮楚兵勁하니 其鋒 未易當注+壽春, 故楚都, 時爲淮南重鎭以南備吳, 勁兵聚焉.이라 若諸將戰有利鈍하면 則公事敗矣리이다
師蹶然起曰注+蹶然, 急遽而起之貌. 我請輿疾而東하리라 以弟昭 兼中領軍하여 留鎭洛陽하고
師又問計於光祿勳鄭袤注+袤, 泰之子也.한대 袤曰 儉好謀而不達事情하고 欽勇而無算하니
今大軍 出其不意 江淮之卒 銳而不能固 宜深溝高壘하여 以挫其氣 此亞夫之長策也
荊州刺史王基 言於師曰 淮南之逆 非吏民思亂也 畏儉等迫脇하여 是以屯聚하니 若大兵一臨이면 瓦解必矣리이다
帥從之하여 以基爲前軍하고 旣復勅基停駐한대 基曰 儉等詐謀已露하고 衆心疑沮하니
今不張示威形以副民望하고 而停軍高壘하여 有似畏懦 非用兵之勢也
若儉欽略民以自益하고 而州郡兵家爲賊所得者 更懐離心注+言州郡兵其家有爲賊所得者, 必懷反顧, 而有離散之心也.이면 此爲錯兵無用之地而成姦宄之源注+錯, 食故切, 置也. 停軍不進, 是置之於無用之地.이니
吳寇因之 則淮南 非國家之有矣 軍宜速據南頓이니 南頓 有大邸閣하니 計足四十日糧이라
保堅城하고 因積穀하여 先人有奪人之心이니 此平賊之要也니이다
師聽之하고 進據㶏水하여 閏月次㶏橋注+㶏, 於謹切, 又音殷. 水經註 “汝水東南過定陵縣, 又東南逕奇雒城, 枝分別出, 世謂之大㶏水. 㶏水東流至南頓縣北, 入于러니 基復曰 兵聞拙速이요 未覩巧久注+孫子之言.
議者 多言將軍持重하니 持重 非不行之謂也 進而不可犯耳 今以積實資虜而遠運軍糧이면 甚非計也니이다
師猶未許어늘 基曰 將在軍 君令有所不受 彼得則利 我得亦利 是謂爭地 南頓是也注+孫子之言, 所謂九地, 爭地其一也.
遂輒進據之러니 儉等亦往爭이라가 聞基先到하고 乃還하다
吳孫峻 率兵襲壽春이어늘 師命諸軍深壁하여 以待東軍之集注+東軍, 靑‧徐‧兗之軍也.한대 諸將請進攻項이어늘
師曰 淮南將士 本無反志 儉欽欺誘하여 與之擧事하니 小與持久 詐情自露 將不戰而克矣라하고
乃遣諸葛誕自安風向壽春하고 胡遵出譙宋絶其歸路注+安風縣, 前漢屬六安國, 後漢倂屬廬江郡, 魏分安風等五縣置安豐郡, 屬豫州. 宋, 謂梁國之地, 梁國都睢陽, 故宋都也.하니
儉欽進不得鬪하고 退恐壽春見襲하여 計窮不知所爲하고 將士家皆在北이라 降者相屬이러라
兗州刺史鄧艾 將萬餘人趨樂嘉城注+水經註 “潁水過汝陽縣北, 又東南過南頓縣, 㶏水注之, 又南逕博陽故城東. 城在南頓縣北四十里, 漢宣帝封丙吉爲侯國, 王莽更名樂嘉.”이어늘 儉使欽襲之하니 師自汝陽潛兵就艾러니 欽猝遇之하여 未知所爲어늘
其子鴦年十八 勇力絶人이라 謂之曰 及其未定하여 擊之 可破也라하여
於是 分爲二隊하여 夜夾攻之할새 鴦率壯士先至鼓譟하니 軍中震擾
師驚駭하여 病目突出하니 恐衆知之하여 囓被皆破注+囓被以忍疼. 晉書帝紀 “蒙之以被, 痛甚, 囓被敗而左右莫知焉.”호되 欽失期不應하니
會明 鴦見兵盛하고 乃還하다 欽引而東할새 鴦以匹馬 拒追騎數千하니 所向披靡하여 人莫敢逼이러라
殿中人尹大目 故曹氏家奴注+大目時爲殿中校尉. 從師行이러니 知師目出하고 啓云 欽本明公腹心이요 素與大目相信하니 乞爲公追解之注+謂追欽而爲師自解釋言之也.하리이다
乃乘馬追欽하여 謂曰 君侯何苦不可復忍數日中也注+蓋謂欽何不堅忍數日, 與師相持, 師病已篤, 必當有變也. 大目心實欲爲曹氏. 欽殊不悟하고 乃更怒罵하여 欲射之하니
大目涕泣曰 世事敗矣 善自努力하라 儉聞欽退하고 恐懼夜走하니 壽春亦潰
孫峻 進至槖皐注+橐, 音託, 又讀爲柘. 皐, 讀 橐皐, 地名, 杜預曰 “在九江逡遒縣東南.”하니 欽以孤軍無繼 不能自立이라하여 遂詣峻降하고 走愼縣注+句.이어늘 人就殺之하여 傳首京師注+愼縣, 漢屬汝南郡, 魏分屬汝陰郡.하니
詔夷儉三族하고 以諸葛誕爲鎭東大將軍都督揚州諸軍事하니 吳軍 亦還하다
儉孫女 適劉氏當死로되 以孕繫廷尉러니 司隷主簿程咸 議曰注+魏‧晉之制, 列卿各置丞‧功曹‧主簿‧五官等員. 女適人者 已産育則成他家之母
殺之不足懲亂源而傷孝子之恩이요 且男不遇罪於他族而女嬰戮於二門하니 非所以矜女弱均法制也注+嬰戮, 猶言被誅也. 二門, 謂父母之家及夫家也. 女, 陰類, 稟氣柔弱, 在室從父母, 旣嫁從夫, 故曰女弱.
臣以爲在室之女 可從父母之刑이요 旣醮之婦 使從夫家之戮이라한대 魏朝從之하여 遂著爲令하다注+醮, 子肖切, 冠娶祭名, 酌而無酬酢曰醮. 旣醮, 已嫁也.
魏大將軍司馬師하니 二月 師弟昭 自爲大將軍錄尙書事하다
師疾篤하여 還許昌하니 昭自洛陽往省之한대 師令總統諸軍而卒하다 中書侍郞鍾會 從師典知密事러니
魏主髦 詔勅尙書傅嘏하여 以東南新定으로 權留昭屯許昌하여 爲內外之援하고 令嘏率諸軍還하니
會與嘏謀하여 使嘏表上하고 輒與昭俱發하여 還屯洛水南하니 詔以昭爲大將軍綠尙書事하니
會由是 常有自矜之色이어늘 嘏戒之曰 子志大其量하여 而勳業難爲也 可不愼哉
秋七月 하다
吳將軍孫儀等 謀殺孫峻이라가 不克하니 死者數千人이라 全公主 譛朱公主云 與同謀라한대 峻遂殺之注+朱公主, 吳主權之女, 適朱據者也. 初孫和爲太子時, 全主欲廢太子, 立魯王, 朱主不聽, 由是有隙.하다
八月 姜維 伐魏하여 敗其兵於洮西하고 遂圍狄道하여 不克而還하다
姜維 復議出軍이어늘 征西大將軍張翼 廷爭以爲國小民勞하니 不宜黷武라하되 不聽하다
維遂將數萬人하여 至枹罕注+枹罕縣, 前漢屬金城郡, 後漢屬隴西郡, 魏時廢省.하니 魏雍州刺史王經 與戰於洮西하여 大敗하니 死者萬計
還保狄道城注+洮西, 洮水之西也.이러니 翼謂維曰 可以止矣 進或毁此大功이면 爲蛇畫足注+戰國策 “昭陽爲楚伐魏, 覆軍殺將, 移師攻齊. 陳軫爲齊王使, 見昭陽曰 ‘楚有祠者, 賜其舍人酒一卮, 舍人相謂曰 「數人飮之不足, 一人飮之有餘, 請各畫地爲蛇, 先成者飮酒.」 一人先成, 引酒飮之, 乃左手持卮, 右手畫蛇曰,「吾能爲之足.」 爲足未成, 一人之蛇後成, 奪其卮曰,「蛇固無足, 子安能爲之足.」 遂飮酒. 今君攻魏旣勝, 復移師攻齊, 是爲蛇足者也.’ 昭陽悟, 乃還軍.”이리라 維大怒하여 遂圍狄道하니
魏詔鄧艾行安西將軍하여 與征西將軍陳泰 幷力拒維하다
泰進軍隴西할새 諸將皆曰 王經 新敗하고 蜀衆 大盛하니 今以烏合之卒 當之 殆必不可
不如據險自保하여 觀釁待敝 此計之得也 泰曰 維輕兵深入하니 正欲與我爭鋒原野하여 求一戰之利
當高壁深壘하여 挫其銳氣어늘 今乃與戰하여 使賊得計하니
經旣破走 維若以戰克之威 進兵東向하여 據櫟陽積穀之實하고 招納羌胡하여 東爭關隴하고 傳檄四郡이면 此我之所惡也注+櫟陽縣, 前漢屬左馮翊, 後漢魏省. 胡三省曰 “余謂櫟陽在長安東北, 維兵方至狄道, 安得便可東據櫟陽. 泰蓋言略陽耳. 櫟, 音藥. 藥‧略聲相近, 因語訛而致傳寫字訛耳. 四郡, 謂隴西‧南安‧天水‧略陽. 略陽時爲廣魏郡, 及晉乃更名略陽.러니
今乃以乘勝之兵으로 挫峻城之下하니 攻守勢殊하고 客主不同이라 吾乘高據勢하여 臨其項領하면 不戰必走矣리라
遂進軍潛行하여 夜至狄道하여 東南高山上 多擧烽火하고 鳴鼓角하니 維不意救兵卒至 急攻不克하여 乃遁而還注+卒, 讀曰猝.하다
泰每以一方有事 輒以虛聲擾動天下 故希簡上事하고 驛書不過六百里注+希罕簡省也. 恐封上之事繁而擾動天下. 狄道東至洛陽二千二百餘里, 而驛書不過六百里, 蓋傳入近裏郡縣, 使如常郵筒以達洛陽也.하니
大將軍昭曰 陳征西沈勇能斷하여 救將陷之城而不求益兵하니 大將不當爾邪
하다注+初, 吳大帝不立太廟, 以武烈嘗爲長沙太守, 立廟於臨湘, 使太守奉祠而已. 冬十月, 始作太廟於建業, 尊大帝爲太祖.


乙亥年(255)
[] 나라(蜀漢) 後主 延熙 18년이다.
[] 魏主 曹髦 正元 2년이고, 吳主 孫亮 五鳳 2년이다.
[] 봄 정월에 나라 揚州都督 毌丘儉刺史 文欽이 군사를 일으켜 司馬師를 토벌하였다. 사마사가 그들을 공격하여 패퇴시키자, 문흠은 나라로 도주하고 관구검은 도망치다가 죽었다.
[] 예전에 文欽이 용감한 것으로 曹爽에게 총애를 받았고 毌丘儉은 평소 夏侯玄, 李豐과 잘 지냈다.
이때에 와서 모두 불안해하여 관구검이 마침내 계책을 세워서 문흠을 후대하였다. 관구검의 아들 毌丘甸이 관구검에게 말하기를 “大人께서 重任을 맡고 있으면서 국가가 전복되는데도 편안히 자신만을 지키고 계시니 천하 사람들의 꾸짖음을 받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관구검이 太后의 조칙을 사칭하여 壽春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격문을 州郡에 보내어 司馬師를 토벌하자고 하고, 또 사신을 보내 鎭南將軍 諸葛誕에게 요청하니, 제갈탄이 그 사신을 참수하였다.注+이때 諸葛誕豫州都督이었다.
관구검이 5, 6만 명을 거느리고 淮水를 건너 項縣에 이르러 굳게 지키고 문흠에게 외부에 있으면서 유격병이 되게 하였다.注+資治通鑑綱目集覽≫에 “은 지금의 陳州 項城이다.” 하였다. 사마사가 계책을 河南尹 王肅에게 묻자,
왕숙이 말하였다. “과거에 關羽가 북쪽을 향하여 천하를 쟁취할 뜻이 있었는데, 孫權이 그의 將士들의 가솔들을 습격해 탈취하니, 관우의 군사들이 와해되었습니다.
지금 淮南將士들의 집이 內州(內地州郡)에 있으니, 다만 우리가 급히 가서 가솔들을 보호하고 〈관구검과 문흠의 군대를〉 막아서 나아오지 못하게 하면 저들은 반드시 땅이 무너지는 듯한 형세가 있게 될 것입니다.”注+나라 제도에는 장군들이 출정하거나 한 방면을 鎭守하면 인질을 머물러 두게 하였다. 이때 淮南鎭守하는 장사들은 모두 內州에서 나가 수자리 섰으므로 그 가솔들이 모두 內州에 머물러 있었다. “禦衛”는 毌丘儉文欽의 군사들을 막아서 나아오지 못하게 하고 또 그 가솔들을 보호하는 것을 말한다.
[] 이때에 司馬師는 막 눈의 종기를 잘라내어 상처가 심하였다.注+는 음이 이니, 종기이다. 살이 부풀어 오른 종기를 라고 한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사마사가 직접 가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하고, 王肅은 또 尙書 傅嘏, 中書侍郞 鍾會와 함께 사마사에게 직접 가도록 권하였는데 사마사가 머뭇거리면서 결정하지 못하였다.
부하가 말하기를 “淮楚(淮南) 지역의 군사들이 강성하니, 그 銳氣를 당해내기가 쉽지 않습니다.注+壽春은 옛날 나라의 도읍인데, 이때 淮南重鎭이 되어 남쪽으로 나라에 대비하였으므로 강한 군사들이 모여 있었다. 만약 장군들이 전쟁에 불리하게 되면 의 일은 실패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사마사가 벌떡 일어나 말하기를注+蹶然”은 급하게 일어나는 모양이다. “내가 병든 몸을 수레에 싣고서 동쪽으로 가겠다.”라고 하였다. 사마사는 아우 司馬昭中領軍을 겸임하여 洛陽留守하게 하고,
光祿勳 鄭袤에게 계책을 물었는데注+鄭袤鄭泰의 아들이다. 정무가 말하기를 “毌丘儉은 꾀하기를 좋아하지만 사리에 밝지 못하고 文欽은 용맹하지만 꾀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 大軍이 생각하지 못한 틈에 나아가면 江淮의 병사들이 銳氣가 있지만 굳게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해자를 깊이 파고 성루를 높이 쌓아서 그들의 기세를 꺾어야 하니, 이는 라고 하였다.
荊州刺史 王基가 사마사에게 말하기를 “淮南 지역의 반역은 관리와 백성들이 난리를 일으키려고 뜻한 것이 아닙니다. 관구검 등의 협박에 겁이 나서 이 때문에 집결한 것이니, 만일 大兵이 한 번 도착하기만 하면 반드시 와해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 司馬師가 그 말을 따라서 王基前軍으로 삼고 얼마 뒤에 다시 왕기에게 명하여 정지하게 하자 왕기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毌丘儉 등이 속이려는 도모가 이미 탄로 나서 무리들이 마음속으로 두려워서 사기가 떨어졌으니,
〈우리가〉 지금 위엄 있는 모습을 펼쳐 보여서 백성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고 행군을 정지하고 보루를 높이 쌓아 마치 겁내듯이 하는 것은 용병에 부합하는 형세가 아닙니다.
만약 관구검과 문흠이 백성을 약탈하여 자신을 증강시키고 州郡의 군사들 중에 그 가솔이 적에게 포획된 자가 다시 〈그들을 그리워하여〉 달아나려는 마음을 품으면注+〈“州郡兵家爲賊所得者 更懐離心”은〉 州郡의 군사들 중에 그 가솔이 적에게 포획된 자는 반드시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고 달아나려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는 쓸데없는 곳에 군사를 두어서 간악한 근원을 이루어주는 것입니다.注+食故이니, 둔다는 뜻이다. 군사를 정지하여 전진하지 않는 것이 쓸데없는 곳에 군사를 두는 것이다.
나라 도적들이 이를 이용하여 침입하면 淮南은 우리나라의 소유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 군사가 신속하게 南頓을 점거해야 하니, 남돈에는 大邸閣(창고 이름)이 있는데, 그곳의 군량을 계산하면 40일 동안 군대를 먹일 수 있는 양입니다.
견고한 성을 지키고 쌓인 곡식을 이용하여 이것이 적을 평정하는 요점입니다.”
사마사가 그 말을 따라 진격하여 㶏水(은수)를 점거하여 閏正月㶏橋에 주둔하였다.注+於謹이고, 또 음이 이다. ≪水經註≫에 “汝水는 동남쪽으로 흘러 定陵縣을 지나고, 또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奇雒城을 지나, 지류가 갈라져 따로 나가는데 세상에서는 이를 大㶏水라고 한다. 㶏水는 동으로 흘러 南頓縣 북쪽에 이르러 潁水로 들어간다.” 하였다. 왕기가 다시 말하였다. “군대는 서툴러도 신속히 하여 승리한다는 말은 들었어도 정교하게 오래도록 지체하는 것은 보지 못하였습니다.注+〈“兵聞拙速 未覩巧久”는〉 ≪孫子≫ 〈作戰〉에 나오는 말이다.
논의하는 이들이 대부분 장군께서 신중하게 행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신중히 행한다는 것은 행군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진하지만 적군을 침범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쌓인 곡식으로 적의 바탕으로 삼게 하고 우리는 멀리서 군량을 운반한다면,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사마사가 여전히 허락하지 않자 왕기가 말하기를 “장군이 군중에 있을 때에는 임금을 명령을 받지 않는 경우도 있다. 적들이 얻으면 이롭고 우리가 얻어도 이로운 곳을 爭地라고 하니, 南頓이 그곳이다.”注+〈“我得則利……是謂爭地”는〉 ≪孫子≫ 〈九地〉의 말이니, 이른바 九地爭地(쌍방이 반드시 빼앗아야 할 땅)가 그 하나이다. 하고,
마침내 전진하여 즉시 남돈을 점거하니, 관구검 등이 또한 가서 다투려 하다가 왕기가 먼저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되돌아갔다.
[] 나라 孫峻이 병사를 통솔하여 壽春을 습격하자, 司馬師가 여러 군대에 명하여 성벽을 높이 쌓아 東軍이 집결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였는데,注+東軍靑州徐州兗州의 군사이다. 여러 장군들이 項縣을 공격하자고 청하였다.
사마사가 말하기를 “淮南將士들은 본래 반란을 일으킬 뜻이 없었다. 毌丘儉文欽이 속여 그들과 거사를 일으켰다. 얼마간 그들과 대치하게 되면 속인 실정이 절로 드러날 것이니 싸우지 않고도 이기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諸葛誕을 보내어 安風에서 수춘으로 향하게 하고, 胡遵譙縣(睢陽)으로 출동하여 반란군들이 돌아갈 길을 차단하게 하였다.注+安風縣前漢 때에 六安國에 속하였고, 後漢 때에 廬江郡에 합병하여 속하였고, 나라 때에 安風 등 5을 나누어 安豐郡을 설치하여 豫州에 속하였다. 梁國 지역을 말하는데, 梁國睢陽에 도읍을 하였으니, 옛날 나라의 도읍지이다.
관구검과 문흠은 전진하여도 싸울 수가 없고 후퇴하여도 수춘이 공격을 받게 될까 염려되어 계책이 곤궁해지자 어찌할 줄을 몰랐고 將士의 가족들이 모두 북쪽에 있었으므로 항복하는 자들이 서로 이어졌다.
兗州刺史 鄧艾가 1만여 군사를 거느리고 樂嘉城으로 달려오자,注+水經註≫에 “潁水汝陽縣 북쪽을 지나고 또다시 동남쪽으로 가서 南頓縣을 지나서 㶏水가 들어오고, 또다시 남쪽으로 가서 博陽 옛 성 동쪽을 지난다. 南頓縣 북쪽 40리에 있는데 宣帝丙吉을 봉하여 侯國으로 삼았고, 王莽이 명칭을 樂嘉로 바꾸었다.”라고 하였다. 관구검이 문흠을 보내어 습격하게 하였다. 사마사가 汝陽에서 병사를 잠입시켜 등애에게 나아가게 하니, 문흠이 갑자기 그들을 만나게 되자 어찌할 줄을 몰랐다.
문흠의 아들 文鴦이 나이 18세였는데 용력이 남보다 뛰어났다. 문흠에게 말하기를 “저들이 안정되지 못했을 때에 공격하면 격파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두 부대로 나누어 밤에 협공할 적에 문앙이 壯士를 인솔하여 먼저 도착하여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니, 군대 안이 진동하여 소란스러웠다.
사마사가 놀라서 병든 눈이 튀어나오니, 사람들이 알까 두려워 이불을 물어뜯으며 〈고통을 참았는데 이불이〉 모두 찢어졌다.注+〈“囓被皆破”는〉 이불을 씹으면서 아픔을 참은 것이다. ≪晉書≫ 〈景帝紀〉에 “이불을 뒤집어썼는데 아픔이 심하여 이불을 물어뜯어 찢어졌으나 左右 측근들 중에 아는 자가 없었다.”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문흠이 시기를 놓쳐 호응하지 못하였다.
마침 날이 밝자 문앙은 상대의 군대가 강성한 것을 보고 마침내 돌아갔다. 문흠이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갈 적에 문앙이 한 필의 말을 타고서 추격해오는 수천의 기병을 막았는데, 그가 향하는 곳마다 적들을 풀처럼 쓰러뜨려서 사람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文鴦이 단기로 정예병을 물리치다文鴦이 단기로 정예병을 물리치다
[] 殿中 官員 尹大目은 옛 曹氏 집안의 하인이었다.注+尹大目은 이때 殿中校尉였다. 司馬師를 따라 행군하였는데, 사마사의 눈이 튀어나온 것을 알고 아뢰기를 注+〈“乞爲公追解語之”는〉는 文欽을 뒤쫓아가서 司馬師를 위하여 자신이 오해를 풀도록 말하겠다는 것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말을 타고 문흠을 따라가서 말하기를 注+〈“君侯何苦不可復忍數日中也”는〉 文欽司馬師와 서로 대치하면 사마사의 병이 이미 위독하여 반드시 변고가 있게 될 텐데, 어찌 며칠을 견디지 못하냐고 말한 것이다. 윤대목은 마음으로는 실제 曹氏를 위하려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문흠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더욱 노해 꾸짖으면서 윤대목을 활로 쏘아 맞추려 하였다.
윤대목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세상의 큰일이 실패하였구나. 그대는 스스로 잘 노력하시오.”라고 하였다. 毌丘儉은 문흠이 후퇴했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서 밤에 도주하니, 壽春 역시 무너졌다.
孫峻이 진격하여 槖皐에 이르니,注+은 음이 이고, 또 로도 읽는다. 는 글자의 본음대로 읽는다. 橐皐地名이니, 杜預가 말하기를 “九江 逡遒縣 동남쪽에 있다.”라고 하였다. 문흠은 후속 부대가 없는 고립된 군대로 자립할 수 없다 하여 마침내 손준에게 나아가 항복하였다. 관구검이 愼縣으로 도주하자,注+여기서 를 뗀다. 백성이 그를 쫓아가서 죽여 수급을 서울로 전하였다.注+愼縣나라 때에 汝南郡에 속하였고, 나라 때에 나누어 汝陰郡에 속하였다.
조칙을 내려 관구검의 삼족을 멸하고 諸葛誕鎭東大將軍 都督揚州諸軍事로 삼으니 나라 군대도 역시 돌아갔다.
관구검의 손녀로서 劉氏에게 시집간 이가 죽임을 당하게 되었는데 임신을 하였기 때문에 廷尉의 감옥에 갇혔다. 司隷主簿 程咸이 논의하기를注+나라와 나라의 제도에 의하면 列卿은 각각 , 功曹, 主簿, 五官 등 관원을 두었다. “시집간 여자가 이미 아이를 낳아 길렀으면 다른 집의 어미가 된 것입니다.
그를 죽여도 어지러움의 근원을 징계하기에 부족하고 孝子의 은정만 손상할 것이고, 또 남자는 妻族에 의해 죄를 만나지 않는데 여자만 부모와 남편의 집안에 의해 주륙을 받으니, 약한 여자를 불쌍히 여기며 法制를 공평히 적용하는 것이 아닙니다.注+嬰戮”은 주륙을 받는다는 말과 같다. “二門”은 父母의 집과 남편의 집을 말한다. 여자는 陰性의 부류이고 받은 기질이 유약하여 집에 있을 때는 부모를 따르고, 시집간 뒤에는 남편을 따르므로 女弱이라고 한 것이다.
의 생각으로는 시집가지 않은 여자는 부모의 형벌을 따르게 하고, 이미 혼인한 부인은注+(초례)는 子肖이니, 관례와 혼례 때의 의식 명칭이다. 술을 따라주고 술잔을 주고받지 않는 것을 라고 한다. “旣醮”는 이미 시집갔음을 뜻한다. 남편 집안의 형벌을 따르게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는데 나라 조정에서 이를 따라 마침내 기록하여 법령으로 삼았다.
[] 나라 大將軍 司馬師하자, 2월에 사마사의 아우 司馬昭가 스스로 大將軍 錄尙書事가 되었다.
[] 司馬師가 병이 위독하여 許昌으로 돌아갔다. 司馬昭洛陽에서 가서 안부를 살폈는데 사마사는 사마소에게 여러 군대들을 모두 다스리게 하고 하였다. 中書侍郞 鍾會가 사마사를 따라다니며 機密을 담당하였는데,
魏主 曹髦尙書 傅嘏에게 조칙을 내려 동남 지역이 막 평정된 것으로 인하여 잠시 사마소를 머물러 許昌에 주둔하게 하여 內外의 지원군으로 삼고 부하에게 여러 군대를 인솔하여 돌아오도록 하였다.
종회는 부하와 도모하여 부하에게 表文을 올리도록 하고 즉시 사마소와 함께 출발하여 洛水 남쪽으로 돌아와 주둔하니, 조칙으로 사마소를 大將軍 綠尙書事로 삼았다.
종회가 이로 말미암아 늘 뿌듯해하는 기색이 있자 부하가 그에게 훈계하기를 “그대는 뜻이 기량보다 커서 勳業을 이루기 어려우니,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 가을 7월에 나라 孫峻朱公主를 죽였다.
[] 나라 將軍 孫儀 등이 孫峻을 죽이려고 도모하다가 이기지 못하니, 죽은 사람이 수천 명이었다. 全公主朱公主를 참소하기를 “손의와 함께 도모하였다.”라고 하자 손준이 마침내 주공주를 죽였다.注+朱公主吳主 孫權의 딸로 朱據에게 시집간 사람이다. 예전에 孫和太子였을 때 全公主가 태자를 폐위하여 魯王(孫霸)을 즉위시키려 하였으나 주공주가 따르지 않자 이로 말미암아 틈이 생겼다.
[] 8월에 姜維나라를 정벌하여 나라 군대를 洮西에서 격파하고, 마침내 狄道를 포위하였다가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姜維가 洮西에서 魏나라 병사를 패퇴시키다姜維가 洮西에서 魏나라 병사를 패퇴시키다
[] 姜維가 다시 출병을 논의하자 征西大將軍 張翼이 조정에서 쟁론하기를 “나라는 작고 백성은 피로하니, 무력을 남용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강유는 마침내 수만 명을 거느려서 枹罕(부한)에 도착하였다.注+枹罕縣前漢 때에 金城郡에 속하였고, 後漢 때에 隴西郡에 속하였고, 나라 때에 없앴다. 나라 雍州刺史 王經이 강유와 洮西에서 교전하여 크게 패하니, 사망자가 만으로 헤아려졌다.
왕경이 狄道城으로 회군하여 수비하였다.注+洮西洮水의 서쪽이다. 장익이 강유에게 말하기를 “중지할 만합니다. 전진하다가 혹 이 큰 공로를 훼손하면 뱀을 그리면서 다리를 덧붙여 그리는 것이 될 것입니다.”注+戰國策≫ 〈齊策〉에 “昭陽(나라 장군)이 나라를 위하여 나라를 공격하여 나라 군대를 격파하여 장군을 죽이고는 군사를 이동하여 나라를 공격하였다. 陳軫齊王의 사자가 되어 昭陽을 만나 말하기를, ‘나라에서 제사를 지낸 사람이 그 舍人들에게 한 잔[]의 술을 내리자, 사인들이 서로 말하기를, 「몇 사람이 마시기엔 부족하고, 한 사람이 마시면 넉넉하겠으니, 각기 땅에다 뱀을 그려서 먼저 그린 사람이 술을 마시기로 하자.」라고 하였는데, 그중 한 사람이 먼저 그리고는 술잔을 집어서 마시려 하면서, 왼손에는 술잔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뱀의 발을 그리면서 「내가 뱀의 발까지 그릴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발을 다 그리기 전에 다른 한 사람이 뒤이어 그리고는 그 술잔을 뺏으면서 말하기를 「뱀은 본디 발이 없는데, 자네가 어찌 발을 그릴 수 있는가.」라고 하고, 마침내 그 술을 마셨습니다. 지금 께서는 나라를 공격하여 이미 승리하셨는데 다시 군사를 이동하여 나라를 공격하면 이는 뱀에 다리를 더 보태는 것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니, 소양은 깨닫고 마침내 군사를 철수하였다.”라고 하였다.라고 하니, 강유는 크게 노하여 마침내 狄道를 포위하였다.
나라는 鄧艾에게 조칙을 내려서 行安西將軍으로 삼아 征西將軍 陳泰와 힘을 합쳐 강유를 방어하게 하였다.
[] 陳泰隴西로 진군할 적에 여러 장군들이 모두 말하기를 “王經이 막 패배하고 蜀漢의 군대가 매우 왕성하니, 지금 오합지졸로 그들에게 맞서면 필시 불가할 것입니다.
험준한 지형에 의거하여 자신을 지켜 적의 틈을 보면서 지치기를 기다리는 것만 못하니, 이것이 좋은 계책입니다.”라고 하였다. 진태가 말하기를 “姜維가 경무장한 군대로 깊이 침입하였으니, 이는 바로 우리와 들판에서 예봉을 다투어 한 번 전투로 승리를 구하려는 것이다.
마땅히 성벽을 높이 쌓고 보루를 깊이 파서 적들의 날카로운 기세를 꺾어야 했는데 지금 그들과 전투하여 적들에게 좋은 계책을 얻게 하였다.
왕경이 이미 패하여 도주하였는데 강유가 만일 전투에 승리한 위세로 병사를 진격시켜 동쪽을 향하여 櫟陽의 가득 쌓아놓은 곡식을 점거하고 羌人胡人들을 불러들여 동쪽으로 關中隴西를 다투고 檄文을 네 에 보내면 이는 우리에게 좋지 않은 것이다.注+櫟陽縣前漢 때에 左馮翊에 속하고, 後漢나라 때에는 없앴다. 胡三省이 말하기를 “내가 생각건대 櫟陽長安 동북쪽에 있으니, 姜維의 군대가 막 狄道에 이르렀으면 어찌 곧바로 동쪽으로 가서 櫟陽을 점거할 수 있겠는가. 진태는 아마 略陽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니, 은 음성이 서로 비슷하여 이 때문에 말이 잘못되어 베껴 쓸 적에 글자가 잘못된 것이다.” 하였다. “四郡”은 隴西, 南安, 天水, 略陽이다. 略陽은 이때 廣魏郡이었는데, 나라에 와서 다시 명칭을 略陽이라고 하였다.
지금 강유는 승세를 타고 있는 군대를 가지고 견고한 성에서 예기가 꺾였으니, 공격과 수비는 형세가 다르고 정벌 온 적군[]과 자리를 잡고 있는 아군[]은 그 위치가 다르다. 우리가 高地에 올라 유리한 지세를 점거하여 적들의 목덜미를 누르면 싸우지 않고도 패주시킬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진군하여 몰래 행군하여 밤중에 狄道에 도착하여 동남쪽 높은 산 위에서 烽火를 많이 올리고 북을 울리며 호각을 불어댔다. 강유는 뜻밖에 구원병이 갑자기 이르자, 급히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여 도주하여 돌아갔다.注+(갑자기)은 로 읽는다.
진태는 늘 한 방면에 일이 발생할 때마다 헛소문으로 천하를 동요하게 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글을 올리는 일을 드물게 하고, 역말로 문서 송달하는 것이 6백 리를 넘지 않게 하였다.注+〈“希簡”은〉 드물게 하거나 생략한 것이다. 〈“希簡上事”는〉 封事를 올리는 일이 번잡하면 천하를 동요하게 할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狄道는 동쪽으로 洛陽과 거리가 2,200여 리나 떨어졌는데 역말로 문서를 송달하는 것이 600리를 넘지 않게 하였으니, 이는 역마[]가 인근의 郡縣에 들어가서 늘 우편으로 洛陽에 전달하게 한 것이다.
大將軍 사마소가 말하기를 “征西將軍 진태는 침착하고 용감하며 과단성이 있어 함락될 성을 구원하면서도 증원병을 요구하지 않았으니, 大將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 겨울에 나라가 처음 太廟를 지었다.注+예전에 나라 大帝(孫權)는 太廟를 세우지 않았고, 武烈皇帝(孫堅)가 長沙太守를 지냈으므로, 사당을 臨湘(長沙郡 治所)에 세우고 長沙太守를 시켜서 제사를 받들게 할 뿐이었다. 겨울 10월에 처음 太廟建業에 짓고, 大帝를 높여서 太祖로 하였다.


역주
역주1 魏揚州都督毋丘儉…… 儉走死 : “毌丘儉 등에게 ‘討’라고 기록한 것은 司馬師를 죄준 것이다. 그러므로 사마사에게 ‘擊’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이때에 吳나라 孫峻이 병사를 거느리고 壽春을 습격하려 하였는데, 文欽은 이미 사마사를 공격하다가 패퇴하고는 손준이 槖皐에 이르렀다는 소문을 듣고 급히 손준에게 나아가 항복하니, 吳나라에 항복한 것이다. 〈문흠이 항복했다고 기록하지 않고〉 吳나라로 도주했다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문흠을 위하여 숨겨준 것이다. 문흠을 숨겨준 것은 사마사를 미워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관구검도 역시 도망치다가 죽었다고만 기록한 것이다.[儉等書討 罪師也 故師書擊 於是 吳孫峻率兵 將襲壽春 欽旣攻師敗退 聞峻至槖皐 遽詣峻降 則降吳也 書奔吳 何 爲欽諱也 諱欽 所以惡師也 故儉亦止書走死]” ≪書法≫
“司馬師가 자기 임금을 폐위하고 罪名이 명백하게 드러나니 毌丘儉과 文欽이 사마사를 토벌하다가 비록 패하여 죽었으나 명분과 의리는 매우 올바르다. 그러므로 그 관직을 기록하고 병사를 일으켜서 司馬師를 토벌하였다고 기록하였으니, 모두 인정해준 것이다. 陳壽의 ≪三國志≫ 〈魏書〉에 반란했다고 관구검과 문흠을 기록하고, 또 진수는 이보다 앞서 魏나라를 임금으로 삼았으므로 曹操를 토벌한 사람에게 반란으로 기록하였다. 지금 司馬氏는 魏나라에 반란한 자이다. 진수가 이미 魏나라를 임금으로 삼고 다시 魏나라를 위하여 역적을 토벌한 사람에게 反逆으로 부른 것은 어째서인가. 진수와 같은 사람은 強弱이 있음만 알고 逆順이 있음을 알지 못했으니 逆賊의 忠臣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君子가 안색을 바로 하여 기록하지 않았다면 관구검과 문흠 등은 참으로 반역자일 뿐이다.[司馬師旣廢其主 罪名暴白 儉欽討之 雖敗而死 然名義則甚正也 故書其官 書起兵討師 皆所以予之耳 陳壽志魏 乃以反書儉欽 且壽前此以魏爲主 故於討操之人 以反書之 今司馬氏 反魏者也 壽旣主魏 乃復於爲魏討賊之人 名以反逆 何哉 若壽者 知有強弱 而不知有逆順 可謂逆賊之忠臣矣 不有君子正色書之 則儉欽輩 眞反者耳]” ≪發明≫
역주2 方嶽 : 堯임금 시대에 사방의 한 지역을 관장하는 重臣을 가리킨 말이다. 堯임금이 羲氏, 和氏 등에게 명하여 四岳을 담당하게 하고 그들이 죽자 일을 나누어 八伯을 두고 八州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方岳이라고도 하는데, 방악은 ≪書經≫ 〈周書 周官〉에 “왕이 때로 순행하여 제도를 四岳에게서 상고하며, 제후는 각기 方岳에서 조회하거든 크게 黜陟을 밝힌다.[王乃時巡 考制度于四岳 諸侯各朝于方岳 大明黜陟]” 하였다. 방악은 사방의 제후를 통괄하는 사람인데, 이후 州刺史나 우리나라에서는 道臣(관찰사)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서는 毌丘儉이 揚州都督으로 한 방면의 군사를 책임지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3 周亞夫의……계책입니다 : 漢나라 景帝 때 周亞夫가 공격하지 않고 성벽을 견고하게 지켜서 吳와 楚의 반란을 격파하였다.
역주4 남(적군)보다……있으니 : ≪春秋左氏傳≫ 文公 7년 조에 “敵에 앞서 敵의 戰意를 빼앗는 것은 軍事에 훌륭한 戰略이고, 敵을 逐出하기를 도망가는 자를 追捕하듯이 하는 것은 軍事에 훌륭한 戰術이다.[先人有奪人之心 軍之善謀也 逐寇如追逃 軍之善政也]”라는 말에서 나온 말로 이는 적군 가까이로 진격하라는 말이다.
역주5 (穎)[潁] : 저본에는 ‘穎’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潁’으로 바로잡았다.
역주6 文欽은……하겠습니다 : ≪資治通鑑≫에 “文欽은 본래 明公의 심복인데 남에게 잘못 이끌리게 된 것입니다. 또 천자의 고향 사람으로 평소 저와 서로 믿고 지냈으니 청하건대 공을 위하여 문흠을 뒤쫓아가서 오해를 풀도록 하겠습니다.[文欽本是明公腹心 但爲人所誤耳 又天子鄕里 素與大目相信 乞爲公追解語之]”라 하였다.
역주7 君侯(문흠)께서는……말입니까 : 이 말은 아래 訓義③에서처럼 尹大目이 문흠에게 며칠을 더 참으면 司馬師의 병환이 악화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윤대목도 사마사의 진형에 있기 때문에 이를 직접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이처럼 돌려 말해서 군후께서 어찌하여 다시 며칠을 참지 못하고 도망가느냐고 말 한 것이지만 문흠이 듣기에는 군후께서 어찌하여 다시 며칠을 참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켰냐는 뜻으로 들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 문장에 문흠이 윤대목의 眞意를 깨닫지 못하고 노한 것이다.
역주8 如字 : 한 글자에 여러 독음이 있는 경우 본음대로 읽으라는 것이다.
역주9 吳孫峻 殺朱公主 : “이때에 孫儀가 孫峻을 죽이려고 도모하다가 이기지 못해 죽었는데 기록하지 않았으니 생략한 것이다. 그렇지만 참소로써 先君의 딸을 죽인 것은 그 죄가 크므로 ‘殺’이라고 기록하였으니 그를 죄준 것이다.[於是孫儀謀殺孫峻 不克死 不書 略之也 而用譛殺先君之女 其罪大矣 故書殺 罪之]” ≪書法≫
역주10 吳始作太廟 : “앞에서 魏나라가 처음으로 社稷과 宗廟를 세웠다고 기록하였으니 참람함의 처음을 기록한 것이다. 여기서 처음이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늦었다는 말이다. 吳나라가 이때에 나라를 세우고 改元한 것이 35년이나 지났는데 처음으로 太廟를 지었으니, 특별히 ‘始’라고 기록한 것은 늦었음을 기록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에 宗廟에 ‘始’라고 기록한 것이 두 번이고, ‘初’라고 기록한 것은 한 번이다(丁巳年(957) 北漢主).[前書魏始建社稷宗廟 志僭始也 此其書始 何 緩辭也 吳於是 立國改元 三十五年矣 而始作太廟 特書曰始 所以志其慢也 綱目宗廟書始二 書初一(丁巳年北漢主)]” ≪書法≫

자치통감강목(12) 책은 2021.01.0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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