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帥從之하여 以基爲前軍하고 旣復勅基停駐한대 基曰 儉等詐謀已露하고 衆心疑沮하니
今不張示威形以副民望하고 而停軍高壘하여 有似畏懦 非用兵之勢也라
若儉欽略民以自益
하고 而州郡兵家爲賊所得者 更懐離心
注+言州郡兵其家有爲賊所得者, 必懷反顧, 而有離散之心也.이면 此爲錯兵無用之地而成姦宄之源
注+錯, 食故切, 置也. 停軍不進, 是置之於無用之地.이니
吳寇因之면 則淮南이 非國家之有矣라 軍宜速據南頓이니 南頓에 有大邸閣하니 計足四十日糧이라
保堅城하고 因積穀하여 先人有奪人之心이니 此平賊之要也니이다
師聽之
하고 進據㶏水
하여 閏月次㶏橋
注+㶏, 於謹切, 又音殷. 水經註 “汝水東南過定陵縣, 又東南逕奇雒城, 枝分別出, 世謂之大㶏水. 㶏水東流至南頓縣北, 入于러니 基復曰 兵聞拙速
이요 未覩巧久
注+孫子之言.라
議者가 多言將軍持重하니 持重이 非不行之謂也라 進而不可犯耳니 今以積實資虜而遠運軍糧이면 甚非計也니이다
師猶未許
어늘 基曰 將在軍
에 君令有所不受
라 彼得則利
요 我得亦利
가 是謂爭地
니 南頓是也
注+孫子之言, 所謂九地, 爭地其一也.라
遂輒進據之러니 儉等亦往爭이라가 聞基先到하고 乃還하다
目
吳孫峻
이 率兵襲壽春
이어늘 師命諸軍深壁
하여 以待東軍之集
注+東軍, 靑‧徐‧兗之軍也.한대 諸將請進攻項
이어늘
師曰 淮南將士가 本無反志라 儉欽欺誘하여 與之擧事하니 小與持久에 詐情自露니 將不戰而克矣라하고
乃遣諸葛誕自安風向壽春
하고 胡遵出譙宋絶其歸路
注+安風縣, 前漢屬六安國, 後漢倂屬廬江郡, 魏分安風等五縣置安豐郡, 屬豫州. 宋, 謂梁國之地, 梁國都睢陽, 故宋都也.하니
儉欽進不得鬪하고 退恐壽春見襲하여 計窮不知所爲하고 將士家皆在北이라 降者相屬이러라
兗州刺史鄧艾
가 將萬餘人趨樂嘉城
注+水經註 “潁水過汝陽縣北, 又東南過南頓縣, 㶏水注之, 又南逕博陽故城東. 城在南頓縣北四十里, 漢宣帝封丙吉爲侯國, 王莽更名樂嘉.”이어늘 儉使欽襲之
하니 師自汝陽潛兵就艾
러니 欽猝遇之
하여 未知所爲
어늘
其子鴦年十八에 勇力絶人이라 謂之曰 及其未定하여 擊之면 可破也라하여
於是에 分爲二隊하여 夜夾攻之할새 鴦率壯士先至鼓譟하니 軍中震擾라
師驚駭
하여 病目突出
하니 恐衆知之
하여 囓被皆破
注+囓被以忍疼. 晉書帝紀 “蒙之以被, 痛甚, 囓被敗而左右莫知焉.”호되 欽失期不應
하니
會明에 鴦見兵盛하고 乃還하다 欽引而東할새 鴦以匹馬로 拒追騎數千하니 所向披靡하여 人莫敢逼이러라
目
泰進軍隴西할새 諸將皆曰 王經이 新敗하고 蜀衆이 大盛하니 今以烏合之卒로 當之면 殆必不可라
不如據險自保하여 觀釁待敝니 此計之得也라 泰曰 維輕兵深入하니 正欲與我爭鋒原野하여 求一戰之利라
當高壁深壘하여 挫其銳氣어늘 今乃與戰하여 使賊得計하니
經旣破走
에 維若以戰克之威
로 進兵東向
하여 據櫟陽積穀之實
하고 招納羌胡
하여 東爭關隴
하고 傳檄四郡
이면 此我之所惡也
注+櫟陽縣, 前漢屬左馮翊, 後漢魏省. 胡三省曰 “余謂櫟陽在長安東北, 維兵方至狄道, 安得便可東據櫟陽. 泰蓋言略陽耳. 櫟, 音藥. 藥‧略聲相近, 因語訛而致傳寫字訛耳. 四郡, 謂隴西‧南安‧天水‧略陽. 略陽時爲廣魏郡, 及晉乃更名略陽.러니
今乃以乘勝之兵으로 挫峻城之下하니 攻守勢殊하고 客主不同이라 吾乘高據勢하여 臨其項領하면 不戰必走矣리라
遂進軍潛行
하여 夜至狄道
하여 東南高山上
에 多擧烽火
하고 鳴鼓角
하니 維不意救兵卒至
라 急攻不克
하여 乃遁而還
注+卒, 讀曰猝.하다
泰每以一方有事
에 輒以虛聲擾動天下
라 故希簡上事
하고 驛書不過六百里
注+希罕簡省也. 恐封上之事繁而擾動天下. 狄道東至洛陽二千二百餘里, 而驛書不過六百里, 蓋傳入近裏郡縣, 使如常郵筒以達洛陽也.하니
大將軍昭曰 陳征西沈勇能斷하여 救將陷之城而不求益兵하니 大將不當爾邪아
目
[目] 司馬師가 그 말을 따라서 王基를 前軍으로 삼고 얼마 뒤에 다시 왕기에게 명하여 정지하게 하자 왕기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毌丘儉 등이 속이려는 도모가 이미 탄로 나서 무리들이 마음속으로 두려워서 사기가 떨어졌으니,
〈우리가〉 지금 위엄 있는 모습을 펼쳐 보여서 백성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고 행군을 정지하고 보루를 높이 쌓아 마치 겁내듯이 하는 것은 용병에 부합하는 형세가 아닙니다.
만약 관구검과 문흠이 백성을 약탈하여 자신을 증강시키고
州郡의 군사들 중에 그 가솔이 적에게 포획된 자가 다시 〈그들을 그리워하여〉 달아나려는 마음을 품으면
注+〈“州郡兵家爲賊所得者 更懐離心”은〉 州郡의 군사들 중에 그 가솔이 적에게 포획된 자는 반드시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고 달아나려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는 쓸데없는 곳에 군사를 두어서 간악한 근원을 이루어주는 것입니다.
注+錯는 食故의 切이니, 둔다는 뜻이다. 군사를 정지하여 전진하지 않는 것이 쓸데없는 곳에 군사를 두는 것이다.
吳나라 도적들이 이를 이용하여 침입하면 淮南은 우리나라의 소유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 군사가 신속하게 南頓을 점거해야 하니, 남돈에는 大邸閣(창고 이름)이 있는데, 그곳의 군량을 계산하면 40일 동안 군대를 먹일 수 있는 양입니다.
견고한 성을 지키고 쌓인 곡식을 이용하여
이것이 적을 평정하는 요점입니다.”
사마사가 그 말을 따라 진격하여
㶏水(은수)를 점거하여
閏正月에
㶏橋에 주둔하였다.
注+㶏은 於謹의 切이고, 또 음이 殷이다. ≪水經註≫에 “汝水는 동남쪽으로 흘러 定陵縣을 지나고, 또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奇雒城을 지나, 지류가 갈라져 따로 나가는데 세상에서는 이를 大㶏水라고 한다. 㶏水는 동으로 흘러 南頓縣 북쪽에 이르러 潁水로 들어간다.” 하였다. 왕기가 다시 말하였다. “군대는 서툴러도 신속히 하여 승리한다는 말은 들었어도 정교하게 오래도록 지체하는 것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注+〈“兵聞拙速 未覩巧久”는〉 ≪孫子≫ 〈作戰〉에 나오는 말이다.
논의하는 이들이 대부분 장군께서 신중하게 행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신중히 행한다는 것은 행군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진하지만 적군을 침범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쌓인 곡식으로 적의 바탕으로 삼게 하고 우리는 멀리서 군량을 운반한다면,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사마사가 여전히 허락하지 않자 왕기가 말하기를 “장군이 군중에 있을 때에는 임금을 명령을 받지 않는 경우도 있다. 적들이 얻으면 이롭고 우리가 얻어도 이로운 곳을
爭地라고 하니,
南頓이 그곳이다.”
注+〈“我得則利……是謂爭地”는〉 ≪孫子≫ 〈九地〉의 말이니, 이른바 九地에 爭地(쌍방이 반드시 빼앗아야 할 땅)가 그 하나이다. 하고,
마침내 전진하여 즉시 남돈을 점거하니, 관구검 등이 또한 가서 다투려 하다가 왕기가 먼저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되돌아갔다.
目
[
目]
吳나라
孫峻이 병사를 통솔하여
壽春을 습격하자,
司馬師가 여러 군대에 명하여 성벽을 높이 쌓아
東軍이 집결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였는데,
注+東軍은 靑州‧徐州‧兗州의 군사이다. 여러 장군들이
項縣을 공격하자고 청하였다.
사마사가 말하기를 “淮南의 將士들은 본래 반란을 일으킬 뜻이 없었다. 毌丘儉과 文欽이 속여 그들과 거사를 일으켰다. 얼마간 그들과 대치하게 되면 속인 실정이 절로 드러날 것이니 싸우지 않고도 이기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諸葛誕을 보내어
安風에서 수춘으로 향하게 하고,
胡遵을
譙縣과
宋(
睢陽)으로 출동하여 반란군들이 돌아갈 길을 차단하게 하였다.
注+安風縣은 前漢 때에 六安國에 속하였고, 後漢 때에 廬江郡에 합병하여 속하였고, 魏나라 때에 安風 등 5縣을 나누어 安豐郡을 설치하여 豫州에 속하였다. 宋은 梁國 지역을 말하는데, 梁國은 睢陽에 도읍을 하였으니, 옛날 宋나라의 도읍지이다.
관구검과 문흠은 전진하여도 싸울 수가 없고 후퇴하여도 수춘이 공격을 받게 될까 염려되어 계책이 곤궁해지자 어찌할 줄을 몰랐고 將士의 가족들이 모두 북쪽에 있었으므로 항복하는 자들이 서로 이어졌다.
兗州刺史 鄧艾가 1만여 군사를 거느리고
樂嘉城으로 달려오자,
注+≪水經註≫에 “潁水는 汝陽縣 북쪽을 지나고 또다시 동남쪽으로 가서 南頓縣을 지나서 㶏水가 들어오고, 또다시 남쪽으로 가서 博陽 옛 성 동쪽을 지난다. 城은 南頓縣 북쪽 40리에 있는데 漢 宣帝가 丙吉을 봉하여 侯國으로 삼았고, 王莽이 명칭을 樂嘉로 바꾸었다.”라고 하였다. 관구검이 문흠을 보내어 습격하게 하였다. 사마사가
汝陽에서 병사를 잠입시켜 등애에게 나아가게 하니, 문흠이 갑자기 그들을 만나게 되자 어찌할 줄을 몰랐다.
문흠의 아들 文鴦이 나이 18세였는데 용력이 남보다 뛰어났다. 문흠에게 말하기를 “저들이 안정되지 못했을 때에 공격하면 격파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두 부대로 나누어 밤에 협공할 적에 문앙이 壯士를 인솔하여 먼저 도착하여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니, 군대 안이 진동하여 소란스러웠다.
사마사가 놀라서 병든 눈이 튀어나오니, 사람들이 알까 두려워 이불을 물어뜯으며 〈고통을 참았는데 이불이〉 모두 찢어졌다.
注+〈“囓被皆破”는〉 이불을 씹으면서 아픔을 참은 것이다. ≪晉書≫ 〈景帝紀〉에 “이불을 뒤집어썼는데 아픔이 심하여 이불을 물어뜯어 찢어졌으나 左右 측근들 중에 아는 자가 없었다.”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문흠이 시기를 놓쳐 호응하지 못하였다.
마침 날이 밝자 문앙은 상대의 군대가 강성한 것을 보고 마침내 돌아갔다. 문흠이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갈 적에 문앙이 한 필의 말을 타고서 추격해오는 수천의 기병을 막았는데, 그가 향하는 곳마다 적들을 풀처럼 쓰러뜨려서 사람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文鴦이 단기로 정예병을 물리치다
目
[目] 司馬師가 병이 위독하여 許昌으로 돌아갔다. 司馬昭가 洛陽에서 가서 안부를 살폈는데 사마사는 사마소에게 여러 군대들을 모두 다스리게 하고 卒하였다. 中書侍郞 鍾會가 사마사를 따라다니며 機密을 담당하였는데,
魏主 曹髦가 尙書 傅嘏에게 조칙을 내려 동남 지역이 막 평정된 것으로 인하여 잠시 사마소를 머물러 許昌에 주둔하게 하여 內外의 지원군으로 삼고 부하에게 여러 군대를 인솔하여 돌아오도록 하였다.
종회는 부하와 도모하여 부하에게 表文을 올리도록 하고 즉시 사마소와 함께 출발하여 洛水 남쪽으로 돌아와 주둔하니, 조칙으로 사마소를 大將軍 綠尙書事로 삼았다.
종회가 이로 말미암아 늘 뿌듯해하는 기색이 있자 부하가 그에게 훈계하기를 “그대는 뜻이 기량보다 커서 勳業을 이루기 어려우니,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目
[目] 陳泰가 隴西로 진군할 적에 여러 장군들이 모두 말하기를 “王經이 막 패배하고 蜀漢의 군대가 매우 왕성하니, 지금 오합지졸로 그들에게 맞서면 필시 불가할 것입니다.
험준한 지형에 의거하여 자신을 지켜 적의 틈을 보면서 지치기를 기다리는 것만 못하니, 이것이 좋은 계책입니다.”라고 하였다. 진태가 말하기를 “姜維가 경무장한 군대로 깊이 침입하였으니, 이는 바로 우리와 들판에서 예봉을 다투어 한 번 전투로 승리를 구하려는 것이다.
마땅히 성벽을 높이 쌓고 보루를 깊이 파서 적들의 날카로운 기세를 꺾어야 했는데 지금 그들과 전투하여 적들에게 좋은 계책을 얻게 하였다.
왕경이 이미 패하여 도주하였는데 강유가 만일 전투에 승리한 위세로 병사를 진격시켜 동쪽을 향하여
櫟陽의 가득 쌓아놓은 곡식을 점거하고
羌人과
胡人들을 불러들여 동쪽으로
關中과
隴西를 다투고
檄文을 네
郡에 보내면 이는 우리에게 좋지 않은 것이다.
注+櫟陽縣은 前漢 때에 左馮翊에 속하고, 後漢과 魏나라 때에는 없앴다. 胡三省이 말하기를 “내가 생각건대 櫟陽은 長安 동북쪽에 있으니, 姜維의 군대가 막 狄道에 이르렀으면 어찌 곧바로 동쪽으로 가서 櫟陽을 점거할 수 있겠는가. 진태는 아마 略陽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櫟은 音이 藥이니, 藥과 略은 음성이 서로 비슷하여 이 때문에 말이 잘못되어 베껴 쓸 적에 글자가 잘못된 것이다.” 하였다. “四郡”은 隴西, 南安, 天水, 略陽이다. 略陽은 이때 廣魏郡이었는데, 晉나라에 와서 다시 명칭을 略陽이라고 하였다.
지금 강유는 승세를 타고 있는 군대를 가지고 견고한 성에서 예기가 꺾였으니, 공격과 수비는 형세가 다르고 정벌 온 적군[客]과 자리를 잡고 있는 아군[主]은 그 위치가 다르다. 우리가 高地에 올라 유리한 지세를 점거하여 적들의 목덜미를 누르면 싸우지 않고도 패주시킬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진군하여 몰래 행군하여 밤중에
狄道에 도착하여 동남쪽 높은 산 위에서
烽火를 많이 올리고 북을 울리며 호각을 불어댔다. 강유는 뜻밖에 구원병이 갑자기 이르자, 급히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여 도주하여 돌아갔다.
注+卒(갑자기)은 猝로 읽는다.
진태는 늘 한 방면에 일이 발생할 때마다 헛소문으로 천하를 동요하게 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글을 올리는 일을 드물게 하고, 역말로 문서 송달하는 것이 6백 리를 넘지 않게 하였다.
注+〈“希簡”은〉 드물게 하거나 생략한 것이다. 〈“希簡上事”는〉 封事를 올리는 일이 번잡하면 천하를 동요하게 할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狄道는 동쪽으로 洛陽과 거리가 2,200여 리나 떨어졌는데 역말로 문서를 송달하는 것이 600리를 넘지 않게 하였으니, 이는 역마[傅]가 인근의 郡縣에 들어가서 늘 우편으로 洛陽에 전달하게 한 것이다.
大將軍 사마소가 말하기를 “征西將軍 진태는 침착하고 용감하며 과단성이 있어 함락될 성을 구원하면서도 증원병을 요구하지 않았으니, 大將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