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資治通鑑綱目(12)

자치통감강목(12)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자치통감강목(1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丙申年(276)
晉咸寧二年이요 吳天璽元年이라
晉徙河南尹夏侯和爲光祿勳하다
晉主得疾甚劇이러니 及愈 群臣上壽한대 詔曰 每念疫死者 爲之愴然하니
豈以一身之休息而忘百姓邪 諸上禮者 皆絶之하라
文帝臨終 爲晉主敍淮南王陳思王事而泣하여 執齊王攸手以授之注+漢文帝誅淮南厲王長, 魏文帝不能容陳思王植, 引此二事以戒切帝也.러니
太后臨終 亦流涕謂晉主曰 桃符性急而汝爲兄不慈하니 恐不能相容하여 以是屬汝하노니 勿忘我言注+桃符, 齊王攸小字.하라
及是疾甚 朝野皆屬意於攸하니 攸妃 賈充長女也
河南尹夏侯和謂充曰 卿二婿親疏等耳 立人當立德이라하여늘 充不答注+二婿謂攸及太子也.이러라
攸素惡荀勖馮紞傾諂이러니 至是하여 勖使紞說晉主曰 陛下前日疾(苦)[若]不愈 齊王爲公卿百姓所歸하니
太子雖欲高讓이나 其得免乎 宜遣還藩鎭注+苦, 通鑑作若.하니이다 晉主陰納之하여 乃徙和爲光祿勳하고 奪充兵權而位遇無替注+充自文帝時領兵. 位, 職位也. 遇, 禮待也.러라
吳人或言於吳主曰 臨平湖自漢末薉塞注+胡三省曰 “臨平湖, 今在臨安府仁和縣界, 有臨平鎭, 在臨安府城西北四十八里. 薉, 廢切, 荒蕪也.”하니 長老言湖塞하면 天下亂하고 湖開하면 天下平이라하니
近者無故忽開하니 此天下當太平이요 靑蓋入洛之祥也 吳主以問都尉陳訓한대
對曰 臣止能望氣 不能達湖之開塞이라하고 退而告其友曰 靑蓋入洛者 衘璧之事也注+古者相見之禮, 蓋有所執以爲贄, 公‧侯‧伯‧子‧男執玉. 璧者, 蓋其手縛於後, 不能執璧, 故(御)[衘]之.라하다
初吳人掘地得銀尺한대 上有刻文하니 吳主因改元天冊注+吳志 “銀長一尺, 廣三分, 刻上有年月字.”이러니 至是하여 或獻小石刻皇帝字하니 又改元天璽하고
八月 歷陽長 又上言호되 歷陽山石印封發하니 俗謂當太平注+胡三省曰 “據吳志, 鄱陽上言 ‘歷陽山石文理成字.’ 又江表傳曰 ‘歷陽縣有石山, 臨水高百丈, 其三十丈所, 有七穿騈羅.’ 今考晉志, 鄱陽郡無歷陽縣, 有歷陵縣, 陽當作陵. 今饒州圖經亦載鄱陽歷陵縣有石印山.”이라한대 吳主遣使者祠之러니
使者作高梯登其上하여 以朱書石하고 還以聞注+通鑑“以朱書石曰 ‘楚九州渚, 吳九州都, 揚州士, 作天子, 世治, 太平始.’”하니 吳主大喜하여 封其山爲王하고 又改明年元曰天紀라하다
吳殺其郡守張詠車浚尙書熊睦注+車, 昌遮切, 姓也.하다
詠爲湘東太守하여 不出筭緡注+吳主亮太平二年, 分長沙東部都尉立湘東郡.이러니 吳主斬之하여 徇首諸郡하고 浚爲會稽太守하여 公淸有政績이러니
値郡旱饑하여 表求振貸하니 吳主以爲收私恩이라하여 遣使梟首어늘
睦微有所諫이러니 吳主以刀鐶撞殺之하니 身無完肌러라
冬十月 晉加羊祜征南大將軍하다
祜上疏請伐吳曰 期運雖天所授 而功業必因人而成하나니 不一大擧掃滅하면 則兵役無時得息也러라
夫謀之雖多 決之欲獨이니 凡以險阻得全者 謂其勢均力敵耳 若輕重不齊하고 彊弱異勢 雖有險阻 不可保也
蜀之爲國 皆云 一夫荷戟 千人莫當이라하더니 及進兵之日 曾無藩籬之限하여 乘勝席卷하여 徑至成都하니
漢中諸城 皆鳥栖而不敢出 誠以力不足以相抗也注+漢中諸城, 謂漢‧樂諸城也.
今江淮之險 不如劍閣이요 孫皓之暴 過於劉禪하고 吳人之困 甚於巴蜀하며
而大晉兵力 盛於往時어늘 而不於此際 平一四海하고 而更阻兵相守하니 使天下困於征戍 經歷盛衰하여 不可長久也注+謂兵將以盛壯之年出戍, 經歷營陣, 至於衰老也.
今若引梁益之兵하여 水陸俱下注+王濬‧唐彬, 統梁‧益兵.하고 荊楚之衆 進臨江陵注+荊‧楚, 祜所統也.하고 平南豫州 直指夏口注+胡奮爲平南將軍, 王戎爲豫州刺史.하고
徐揚靑兗 竝會秣陵注+徐‧揚, 王渾所統, 靑‧兗, 琅邪王伷所統.이면 以一隅之吳 當天下之衆이니 勢分形散하여 所備皆急하리니
一處傾壞 則上下震蕩이라 雖有智者라도 不能爲吳謀矣리라
吳緣江爲國하여 東西數千里 所敵者大하여 無有寧息이요 孫皓恣虐하니 將疑士困注+將, 子亮切.하여 平日 猶懷去就하니
兵臨 必有應者 兼其俗急速不能持久하고 弓弩戟楯 不如中國하니 唯有水戰 是其所便이나
一入其境이면 則長江 非復所保 還趣城池 去長入短이니 非吾敵也이니이다하니 晉主深納之하다
議者多有不同하되 賈充荀勖馮紞 尤以伐吳爲不可하니 祜歎曰 天下不如意事十常居七八이로다
天與不取하니 豈非更事者恨於後時哉注+言吳可取而不取, 機會一失, 經見其事者, 豈不有後時之恨. 唯杜預及中書令張華與晉主意合이라 贊成其計러라
晉立皇后楊氏하고 以后父駿爲車騎將軍하다
晉主初聘后 后叔父珧上表曰注+珧, 餘招切. 自古一門二后 未有能全其宗者하니 乞藏此表於宗廟하여 異日得以免禍니이다하여늘
晉主許之러니 竟立后而以駿爲將軍封侯注+封臨晉侯.하다 尙書褚䂮郭奕 皆表駿小器하여 不可任社稷之重이라하니 晉主不從하다
駿驕傲自得하니 鎭軍胡奮謂曰 卿恃女更益豪邪 歷觀前世하면 與天家婚 未有不滅門者하니 但早晩事耳注+天子尊無二上, 故曰天家, 言其尊如天也.


丙申年(276)
나라 世祖 武皇帝 司馬炎 咸寧 2년이고, 吳主 孫皓 天璽 원년이다.
[] 봄에 나라가 河南尹 夏侯和를 옮겨 光祿勳으로 삼았다.
[] 晉主(司馬炎)가 질병에 걸려 위독했는데, 완쾌되자 여러 신하들이 축수를 올렸다.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늘 역질로 죽은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그들을 위해 슬픈 마음이 드니,
어찌 이 한 몸이 회복된 것으로 백성들을 잊겠는가. 올린 여러 가지 예물을 모두 거절하라.”라고 하였다.
예전에 文帝(司馬昭)가 임종할 때에 晉主를 위하여 나라 淮南王(劉長)과 나라 陳思王(曹植)의 일을 이야기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齊王 司馬攸의 손을 잡아 그(司馬炎)에게 잡게 해주었는데,注+ 文帝淮南厲王 劉長을 주살하였고, 文帝陳思王 曹植을 용납하지 못하였으니, 이 두 가지 일을 끌어다 황제에게 절실히 경계한 것이다.
太后臨終 때에 역시 눈물을 흘리며 晉主에게 말하기를 “桃符는 성격이 급하고 너는 형이 되어 자애롭지 못하기에 그를 받아들이지 못할까 염려되어 너에게 부탁하니, 나의 말을 잊지 말거라.”注+桃符齊王 司馬攸의 어릴 때 이다.라고 하였다.
晉主의〉 질병이 악화되자 朝野에서 모두 사마유에게 뜻을 두었는데, 사마유의 賈充의 장녀였다.
河南尹 夏侯和가 가충에게 말하기를 “의 두 사위는 親疏가 같으니, 어떤 사람을 황제로 세울 적에는 마땅히 덕이 있는 사람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가충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注+두 명의 사위는 司馬攸太子이다.
사마유는 평소에 荀勖馮紞이 아첨하는 것을 싫어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순욱이 풍담을 시켜서 晉主를 설득하기를 “폐하께서 전일에 병환이 완쾌되지 않았다면 齊王公卿百姓이 뜻을 두는 바가 되었을 것이니,
태자가 비록 높은 뜻으로 양보를 하려고 해도 화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藩鎭으로 돌려보내야 합니다.”注+는 ≪資治通鑑≫에 으로 되어 있다.라고 하니, 晉主가 속으로 받아들이고는 하후화를 옮겨 光祿勳으로 삼고, 가충의 병권을 빼앗았지만 그 지위와 대우는 변함이 없었다.注+賈充文帝(司馬昭) 때부터 병력을 거느렸다. 는 직위이고, 는 예우하는 것이다.
[] 가을 8월에 나라에서 臨平湖가 트이고 石印의 봉인이 열렸다.
[] 나라 사람 중에 어떤 이가 吳主에게 말하기를 “臨平湖나라 말기부터 황폐해져 막혀 있었는데,注+胡三省이 말하기를 “臨平湖는 지금 臨安府 仁和縣 경내에 있고, 臨平鎭이 있으니, 臨安府 성 서북쪽 48리에 있다. (황폐하다)는 烏廢이니, 황폐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長老들이 ‘호수가 막혀 있으면 천하가 어지럽고, 호수가 트이면 천하가 평안해진다.’라고 합니다.
근래에 까닭 없이 갑자기 트이게 되었으니, 이는 반드시 천하가 태평해질 조짐이며, 靑蓋를 씌운 수레가 洛陽에 들어갈 상서로운 조짐입니다.”라고 하였다. 吳主(孫皓)가 그것을 都尉 陳訓에게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신은 단지 天氣를 볼 수 있는 정도이고, 호수가 막히거나 트이는 징조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라고 하고, 물러나와 친구에게 말하기를 “靑蓋를 씌운 수레가 낙양에 들어가는 것은 이다.”注+옛날의 상견례에는 모두 손에 잡는 바로 禮物을 삼는 것이 있었다. 은 옥을 잡는다. “衘璧”은 손을 뒤로 묶어서 璧玉을 잡을 수가 없기 때문에 입에 문 것이다.라고 하였다.
[] 예전에 나라 사람이 땅을 파다가 銀尺을 얻었는데, 그 위에 새겨진 글이 있었다. 吳主가 그로 인해 天冊으로 改元하였는데,注+三國志≫ 〈吳書 孫晧傳〉에 ‘은 길이가 한 척이고 너비가 세 푼인데 그 위에 年月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라고 한다. 이때에 이르러 어떤 이가 皇帝라는 글자가 새겨진 작은 돌을 바치니, 또 天璽라고 개원하였다.
8월에 歷陽長이 또 상주하기를 “歷陽山에 봉인되어 있던 石印이 열렸는데, 세속에서는 ‘태평시대가 될 것이다.’라고 합니다.”注+胡三省이 말하기를 “≪三國志≫ 〈吳書〉에 의거하면 鄱陽에서 상주하기를 ‘歷陽山의 돌에 무늬 결이 글자를 이루었다.’라고 하였다. 또 ≪江表傳≫에 이르기를 ‘歷陽縣石山이 있는데 물가에 임하여 높이가 100이고, 30 되는 곳에 7개의 구멍이 이어져 있다.’라고 하였다. 지금 ≪晉書≫ 〈地理志〉를 고찰해보니 鄱陽郡에는 歷陽縣이 없고 歷陵縣이 있으니 으로 써야 한다. 지금 ≪饒州圖經≫에 역시 鄱陽歷陵縣石印山이 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라고 하였다.라고 하니, 吳主使者를 파견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使者가 높은 사다리를 만들어 그 위로 올라가 붉은 글씨를 돌에다 쓰고 돌아와 보고하니,注+資治通鑑≫에는 “돌에다 붉은 글씨를 다음과 같이 썼다. ‘나라는 九州의 물가이고, 나라는 九州의 도읍이니, 揚州의 인사가 天子가 되어 4를 다스리면 태평세월이 시작된다.’”라고 하였다. 吳主가 크게 기뻐하여 그 산을 으로 봉하고 또 다음 해에는 개원하기를 天紀라고 하였다.
[] 나라가 郡守 張詠車浚(차준)과 尙書 熊睦을 죽였다.注+昌遮이니, 姓氏이다.
[] 張詠湘東太守가 되어 을 내려고 하지 않자,注+吳主 孫亮 太平 2년(257)에 長沙東部都尉를 나누어 湘東郡을 세웠다. 吳主가 그의 목을 베어 여러 에 조리를 돌렸고, 車浚會稽太守가 되어 공정하고 청렴하여 치적이 있었는데,
에 가뭄과 기근이 들자 표문을 올려 구휼해주기를 청하니, 吳主가 사사로운 은혜를 거두려는 것이라 여겨 使者를 파견하여 효수하였다.
그러자 熊睦이 은근히 간언을 하였는데 吳主가 칼자루에 달린 고리로 그를 때려죽이니, 몸에는 온전한 살갗이 없었다.
[] 겨울 10월에 나라가 羊祜에게 征南大將軍의 직위를 더해주었다.
[] 羊祜가 상소를 올려 나라를 정벌할 것을 청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운은 비록 하늘이 내려주는 것이지만, 功業은 반드시 사람을 통해 이룩되는 법이니, 한 번 크게 일어나 쓸어버리지 않으면 병력을 동원하는 것이 그칠 날이 없을 것입니다.
비록 도모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더라도 이를 결정하는 것은 임금께서 홀로 해야 합니다. 험준한 지역에 의지하여 온전함을 얻는 것은 그 세력과 힘이 비슷한 경우일 뿐이니, 만약 경중이 같지 않고 강약의 형세가 다르면 비록 험준한 지역이 있다고 하더라도 보존할 수 없습니다.
蜀漢이란 나라는 〈땅이 험해서〉 모든 사람들이 이르기를 ‘한 사내가 창을 집고 지키면 천 명도 당해내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군대를 진격시키는 날에는 울타리의 한계가 없어 승세를 타고 멍석을 말 듯 신속하게 成都에 이르렀으니,
漢中의 여러 성이 모두 새들이 둥지를 틀 듯 굳게 지키고 감히 나오지 못한 것은 진실로 힘이 부족하여 대항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注+漢中諸城漢城樂城을 말한다.
지금 長江淮河 지역의 험함은 劍閣만 못하고, 孫皓의 폭정은 劉禪보다 지나쳐서 나라 사람들이 겪는 곤란이 巴蜀보다 심하며,
위대한 나라의 병력이 과거보다 강성하니 이때에 천하를 평정하여 하나로 통일하지 않고 다시 험준한 곳에서 병사들이 지키게 하여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정벌하고 지키는 것으로 곤란을 겪게 하면 강성한 병사들이 쇠약해져 오래 갈수가 없습니다.注+〈“經歷盛衰”는〉 병사들이 장년의 나이에 수자리를 살러 나가서 營陣에서 세월을 보내다 노쇠함에 이르게 되는 것을 말한다.
[] 지금 만약 梁州益州의 병력을 이끌고 수로와 육로로 함께 내려가고,注+王濬唐彬梁州益州의 병력을 통솔하였다. 의 군대가 나아가서 江陵까지 이르며,注+ 지역은 羊祜가 통솔한 곳이다. 平南將軍豫州刺史가 곧바로 夏口를 겨냥하고,注+胡奮平南將軍이었고, 王戎豫州刺史였다.
徐州, 揚州, 靑州, 兗州에서 함께 나아가 秣陵(建業)에서 함께 모이도록 하면注+徐州揚州王渾이 통솔하였고, 靑州兗州琅邪王 司馬伷가 통솔하였다. 한 귀퉁이에 있는 나라로 천하의 병사를 대적하는 격이라 나누어지고 흩어지는 형세가 되어 대비가 급박해질 것이니,
한 곳이 무너지면 상하가 놀라 크게 소란해져 비록 지혜로운 자가 있더라도 나라를 위해 계책을 낼 수 없을 것입니다.
나라는 長江에 의지하여 세운 나라여서 동서가 수천 리가 되어 대적할 곳이 넓어 편안하게 쉴 수가 없고, 손호는 방자하고 사나워 장수들이 의심하고 병사들이 피곤하여注+(장수)은 子亮이다. 평일에도 오히려 떠나가기를 생각하니,
우리 병사들이 나아가면 반드시 호응하는 자가 있을 것이며, 아울러 그들의 습속이 성급하여 지구전에 능하지 못합니다. 저들의 활과 쇠뇌, 창과 방패가 中國만 못하니, 오직 水戰이 익숙하지만,
한 번 그들의 경계로 들어가기만 하면 長江이 다시 그들을 보호하지 못할 것이고, 후퇴하여 그들의 城池에 들어가면 유리한 곳을 버리고 불리한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니, 우리들의 적수가 아닙니다.” 晉主(司馬炎)가 이 말을 깊이 받아들였다.
논의하는 자들 가운데 의견이 같지 않은 자들이 대부분이었는데, 賈充荀勖馮紞이 더욱 나라를 정벌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하자, 양호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천하의 일 가운데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보통 열에 일고여덟이로다.
하늘이 준 기회를 받지 않으니, 어찌 그 일을 다시 경험할 자가 나중에 한스러워하지 않겠는가.”注+〈“豈非更事者恨於後時哉”는〉 나라를 취할 수 있는데 취하지 않아 한 번 기회를 잃으면 그 일을 지나쳐 버린 자가 어찌 훗날에 한스러워 하지 않겠는가 하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오직 杜預中書令 張華晉主와 뜻이 맞아서 그 계책에 찬성하였다.
[] 나라가 皇后 楊氏를 세우고, 황후의 아비 楊駿車騎將軍으로 삼았다.
[] 晉主가 처음 楊皇后를 맞이할 적에 양황후의 叔父 楊珧(양요)가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注+餘招이다. “옛날부터 한 집안에서 두 명의 황후가 나왔을 때 그 종족이 온전했던 적이 없었으니, 이 표문을 宗廟에 소장하였다가 훗날에 화를 면하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니,
晉主가 허락을 하여 마침내 황후로 세우고, 〈황후의 아버지〉 楊駿車騎將軍으로 삼아 諸侯로 봉하였다.注+臨晉侯에 봉해진 것이다. 尙書 褚䂮(저략)과 郭奕(곽혁)이 모두 표문을 올려 양준은 그릇이 작아 社稷의 중임을 맡을 수 없다고 하였으나, 晉主가 따르지 않았다.
양준이 교만하고 득의양양해하니, 鎭軍大將軍 胡奮이 말하기를 “은 딸을 믿고 더욱 멋대로 구는 것인가. 이전 시대의 일을 두루 돌아보면 天子의 집안과 혼인을 맺고 멸문을 당하지 않은 자는 없으니, 다만 조만간에 사단이 생길 것이다.”注+천자는 높은 자리에 둘이 없기 때문에 天家라고 한 것이니, 하늘처럼 존중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역주
역주1 吳臨平湖開 石印封發 : “나무라는 뜻을 기록한 것이다. 吳나라가 멸망한 것은 이해에서 겨우 4년이 지난 뒤였다. 君臣과 上下의 사람들이 한창 상서롭다고 여겼는데, 이 글 아래에 ‘晉나라가 羊祜에게 征南大將軍을 더해주었다.’라고 기록하였으니, ≪資治通鑑綱目≫에서 경계를 드리운 것이 크다. 吳나라에서 臨平湖가 트이자 吳나라가 멸망하였고, 陳나라에서 臨平湖가 트이자 陳나라가 멸망하였는데, 대부분 3, 4년을 넘지 않았으니, 變異가 공연히 생기지 않는다고 한 말이 참으로 믿을 만하다. ≪자치통감강목≫에서 湖가 트인 것을 기록한 것이 두 번이다.(이해(276)와 陳나라 丁未年(587))[書譏也 吳亡距此四年耳 君臣上下 方以爲祥焉 下書晉加羊祜征南大將軍 綱目之垂戒深矣 吳臨平湖開而吳亡 陳臨平湖開而陳滅 率不過三四年耳 變不虛生 信哉 綱目書湖開二(是年 陳丁未年)]” ≪書法≫
“孫皓가 형벌을 남용하고 마구 사람을 죽인 것은 그 죄가 桀보다 크다. 그런데 湖가 트이고 石印의 봉함이 열린 것을 상서로운 일이라고 자랑하였다. 이를 기록한 것은 또한 손호가 狂悖하여 멸망할 조짐을 몰랐던 것을 드러낸 것이다.[孫皓淫刑亂殺 罪浮于桀 而湖開印發 誇詡爲瑞 書之 亦以著其狂悖不知滅亡之兆云耳]” ≪發明≫
역주2 벽옥을……일 : 황제가 적국에 투항할 때 하는 행동이다.
역주3 (爲)[烏] : 저본에는 ‘爲’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烏’로 바로잡았다.
역주4 (御)[衘] : 저본에는 ‘御’로 되어 있으나, ≪春秋左氏傳≫ 杜預 注에 의거하여 ‘衘’으로 바로잡았다. 뒤에도 같다.
역주5 (西)[四] : 저본에는 ‘西’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四’로 바로잡았다.
역주6 算緡 : 漢나라 武帝 元狩 4년(B.C.119)에 상인에게는 2천 錢에 1算 즉 20전(算緡錢)을 거두고, 수공자에게는 4천 전에 1算을 거두었는데, 이를 算緡令이라고 한다. 또한 같은 시기에 수레와 배에 세금을 부과한 算車令과 算船令을 시행하였다.

자치통감강목(12) 책은 2021.01.0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19 By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