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목目] 장조張祚가 스스로 양왕涼王이라 칭하고 개원改元하고서 백관을 설치하고 하늘과 땅에 교사郊祀를 지내니, 상서尙書 마급馬岌이 매우 간곡히 간하다가 죄에 걸려 관직에서 파면되었다.
낭중郎中 정기丁琪가
注+① 琪는 음이 其이다. 다시 간하기를 “
무공武公 이래로
대代마다 신하의 예절을 지켜서 충성을 마음에 간직하고 겸손을 실천하였습니다.
注+② 武公은 의 시호이다. “履謙(겸손을 실천하다)”은 일찍이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왕 노릇 하지 않았음을 이른다.
그러므로 능히 한 주州의 병력을 가지고 온 세상의 오랑캐에게 항거하여 해마다 군대를 일으켰으나 백성들이 괴로움을 고하지 않았는데,
지금 스스로 높여 양왕涼王이라고 하면 안팎의 민심이 떠날 것이니, 어떻게 한 귀퉁이의 작은 땅을 가지고 천하의 강한 적에게 항거하겠습니까.” 하니, 장조가 크게 노하여 그를 참수하였다.
目
[
목目]
환온桓温의
별장別將이
상락上洛을 공격하여
진秦나라
형주자사荆州刺史 곽경郭敬을 사로잡고 전진하여
청니青泥를 격파하였다.
注+① 上洛縣은 西都(前漢) 때에는 弘農郡에 속하였고 東漢 때에는 京兆에 속하였는데, 晉 武帝 泰始 2년(266)에 나누어 上洛郡을 설치하였다. 靑泥城은 藍田縣의 남쪽에 있다.
진주秦主 부건苻健이 태자太子 부장苻萇 등을 보내어 군사 5만 명을 인솔하고 환온을 막아 남전藍田에서 싸웠는데 진秦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환온이 전진하여 싸워 파상灞上에 이르니, 부장 등이 후퇴하여 장안성長安城 남쪽에 주둔하였고 부건苻健이 노약자 6천 명과 함께 장안의 작은 성을 굳게 지켰다.
그리고 정예병 3만 명을 모두 동원해서 대사마大司馬 뇌약아雷弱兒 등을 보내어 부장과 연합해서 환온을 막게 하였다.
삼보三輔 지방의 군현郡縣이 모두 와서 항복하자, 환온은 거주하는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타일러서 안도하여 생업을 회복하게 하니,
백성들이 다투어 소와 술을 가지고 와서 맞이하여 위로하였고,
注+② 勞(위로하다)는 去聲이다. 남녀들이 길 좌우에서 구경하였으며, 노인 중에는 눈물을 떨구며 “뜻 밖에 오늘날 다시
관군官軍(
진군晉軍)을 보는구나.” 하는 자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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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진秦나라 태자 요장姚萇 등이 환온桓温을 추격해서 동관潼關에 이르니, 환온의 군대가 여러 번 패하여 망실한 군사가 1만 명에 달했다. 부웅苻雄이 사마훈司馬勲을 공격하니, 사마훈 또한 달아나 한중漢中으로 돌아왔다.
환온이
파상灞上에 주둔하였을 적에
순양태수順陽太守注+① 晉 成帝가 順陽을 南鄕郡으로 고쳤는데, 이윽고 옛 이름으로 회복하였다. 설진薛珍이 환온에게 곧바로 진격하여
장안長安을 압박할 것을 권하였으나 환온이 따르지 않으니, 설진은 한 부대를 거느리고 홀로 패수를 건너가서 노획한 것이 자못 많았다.
환온이 후퇴하자, 설진은 마침내 돌아와서 이것을 여러 사람들에게 드러내어 말하면서 스스로 자기의 용맹을 자랑하고는 환온의 신중함을 허물하니, 환온이 그를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