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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4)

자치통감강목(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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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年이라
秦皇始四 燕元璽三年이라
◑涼王張祚和平元年이라
春正月 張祚自稱涼王하다
祚自稱涼王하고 改元하고 置百官하고 郊祀天地하니 尙書馬岌 切諫이라가 坐免官하다
郎中丁琪復諫曰注+琪, 音其. 自武公以來 世守臣節하여 抱忠履謙이라
故能以一州之衆으로 抗舉世之虜하여 師徒歲起호되 民不告疲注+武公, 張軌諡. 履謙, 謂未甞建國自王也.러니
今而自尊이면 則中外離心하리니 安能以一隅之地 拒天下之彊敵乎잇가 祚大怒하여 斬之하다
浩連年北伐 師徒屢敗하여 糧械都盡하니 桓溫 因朝野之怨하여 上疏請廢之한대
朝廷 不得已免浩爲庶人하여 徙之信安하니 自此 內外大權 一歸於溫矣注+漢獻帝初平三年, 分太未, 立新安縣. 武帝太康元年, 更名信安.러라
浩少與溫齊名이요 而心競不相下하니 常輕之러니 浩既廢黜 雖愁怨不形辭色이나 常書空作咄咄怪事字注+咄, 當沒切. 咄咄, 咨嗟語也.러라
久之 謂掾郗超曰 浩有德有言하니 嚮爲令, 僕 足以儀型百揆어늘 朝廷 用違其才耳注+令․僕, 尙書令․僕射.라하고 將以浩爲尙書令하여 以書告之하다
浩欣然許焉이라가 將答書 慮有謬誤하여 開閉者十數라가 竟逹空函하니 大怒하여 由是遂絶하여 卒於徙所하다
二月 하다
統歩騎四萬하여 發江陵하고 水軍 自襄陽入均口하여 至南鄉注+水經注 “順陽郡筑陽縣, 有涉都城, 沔水逕東北, 均水於縣入沔, 謂之均口.” 筑陽與南鄕縣, 漢皆屬南陽郡, 漢建安中, 分南陽右壤, 立南鄕郡, 二縣屬焉. 武帝更名順陽郡, 成帝咸康四年, 復曰南鄕郡. 鄕, 如字.하고
歩兵 自淅川趣武關注+析縣, 前漢屬弘農郡, 後漢屬南陽郡, 武關在其西. 後魏置淅川縣, 有淅水. 淅, 先的切.하고 命司馬勲하여 出子午道以伐秦하다
姚襄하여 降於燕하다
◑夏四月 桓温 大敗秦兵于藍田하고 進軍灞上하니 三輔皆降하다
桓溫别將 攻上洛하여 獲秦荆州刺史郭敬하고 進擊青泥하여 破之注+上洛縣, 漢西都, 屬弘農郡, 東漢屬京兆, 武帝泰始二年, 分置上洛郡. 靑泥城, 在藍田縣南.하니
秦主健 遣太子萇等하여 帥衆五萬하고 拒溫하여 戰于藍田이라가 秦兵 大敗
轉戰而前하여 進至灞上하니 萇等 退屯城南하고 健與老弱六千으로 固守長安小城하고
悉發精兵三萬하여 遣大司馬雷弱兒等하여 與萇合하여 以拒溫하다
三輔郡縣 皆來降이어늘 撫諭居民하여 使安堵復業하니
争持牛酒迎勞注+勞, 去聲.하고 男女夾路觀之하며 耆老有垂泣者하여 曰 不圖今日 復覩官軍이라하다
燕以慕容恪爲大司馬하다
燕王儁 以恪爲大司馬録尙書事하여 封太原王하고 評爲司徒하여 封上庸王하고 霸爲吳王하고 德爲梁公하고 暐爲中山王하고 陽騖爲司空注+德, 儁之弟. 暐, 儁之子也.하다
燕王皝 奇霸之才 故名之曰霸하여 將以爲世子러니 群臣 諫而止하다이나 寵遇猶踰於世子하니 由是 惡之하다
以其嘗墜馬折齒라하여 更名曰𡙇이러니 尋以其應讖文이라하여 更名曰垂注+𡙇, 傾雪切, 本作缺. 垂少好畋游, 因獵墜馬折齒. 慕容儁僭卽王位, 改名𡙇, 外以慕容𡙇爲名, 內實惡而改之, 尋以讖記之文, 乃去夬, 以垂爲名焉.라하고 遷侍中하고 録留臺事라가 徙鎮龍城하니 垂大得東北之和
愈惡之하여 復召還하다
五月 江西流民하여 降姚襄이어늘 詔屯兵中堂하고 謝尙 入衛하다
江西流民郭敞等千餘人 執陳留內史劉仕하고 降於姚襄하니 建康 震駭어늘
以尙書周閔으로 爲中軍將軍하여 屯中堂注+晉南渡後, 陳留郡寄治譙郡長垣縣界. 閔, 顗之子也.하고 謝尙 自歴陽으로 還衛京師하여 固江備守하다
北海王猛 少好學하고 倜儻有大志하여 不屑細務하니 人皆輕之注+北海, 屬靑州, 漢平壽縣也.로되 悠然自得하여 隐居華陰注+華陰縣, 前漢屬京兆, 後漢․晉屬弘農郡.이러니
聞溫入關하고 披褐詣之하여 捫虱而談當世之務호되 旁若無人注+披, 通作被, 平聲.이라
異之하여 問曰 吾奉天子之命하고 將鋭兵十萬하여 爲百姓除殘賊이로되 而三秦豪傑 未有至者 何也
猛曰 公 不遠數千里하고 深入敵境하여 今長安咫尺이로되 而不度灞水하니 百姓 未知公心이라 所以不至注+恐官軍知難而退也.니이다
嘿然無以應이라가 徐曰 江東 無卿比也라하고 乃署猛軍謀祭酒하다
與秦丞相雄等으로 戰于白鹿原하여 溫兵 不利하여 死者萬餘人注+魏收地形志 “京兆藍田縣, 有白鹿原.”이러라
溫指秦麥하여 以爲糧이러니 既而 秦人 悉芟麥하고 清野以待之하니 溫軍 乏食이라
徙關中三千餘户而歸할새 欲與猛俱還한대 辭不就하다
秦太子萇等 隨溫擊之하여 比至潼關 溫軍 屢敗하여 失亡以萬數 苻雄 擊司馬勲하니 勲亦奔還漢中하다
溫之屯灞上也 順陽太守薛珍 勸溫徑進逼長安注+成帝改順陽曰南鄕郡, 旣而復舊.호되 弗從하니 珍以偏師獨濟하여 頗有所獲이러니
及溫退 乃還하여 顯言於衆하여 自矜其勇하고 而咎溫之持重하니 殺之하다
秦東海王苻雄하다
秦主健弟東海王雄하니 哭之嘔血하고 曰 天不欲吾平四海邪 何奪吾元才之速也注+元才, 雄字.오하다
雄以佐命元勲으로 位兼將相하여 權侔人主로되 而謙恭汎愛하고 遵奉法度
重之하여 常曰 元才 吾之周公也라하다 子堅 襲爵하다
性至孝하고 幼有志度하여 博學多能하여 交結英豪하니 呂婆樓, 彊汪及略陽梁平老 皆與之善注+婆樓, 本略陽氐酋也. 彊, 其兩切. 彊汪, 姓名.하다
大饑하다


[] 나라(동진東晉) 효종孝宗 목황제穆皇帝 영화永和 10년이다.
[] 진주秦主(전진前秦) 부건苻健 황시皇始 4년이고 연주燕主(전연前燕) 모용준慕容儁 원새元璽 3년이다.
양왕涼王(전량前涼) 장조張祚 화평和平 원년이다.
[] 봄 정월에 장조張祚가 스스로 양왕涼王이라 칭하였다.
[] 장조張祚가 스스로 양왕涼王이라 칭하고 개원改元하고서 백관을 설치하고 하늘과 땅에 교사郊祀를 지내니, 상서尙書 마급馬岌이 매우 간곡히 간하다가 죄에 걸려 관직에서 파면되었다.
낭중郎中 정기丁琪注+① 琪는 음이 其이다. 다시 간하기를 “무공武公 이래로 마다 신하의 예절을 지켜서 충성을 마음에 간직하고 겸손을 실천하였습니다.注+② 武公은 의 시호이다. “履謙(겸손을 실천하다)”은 일찍이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왕 노릇 하지 않았음을 이른다.
그러므로 능히 한 의 병력을 가지고 온 세상의 오랑캐에게 항거하여 해마다 군대를 일으켰으나 백성들이 괴로움을 고하지 않았는데,
지금 스스로 높여 양왕涼王이라고 하면 안팎의 민심이 떠날 것이니, 어떻게 한 귀퉁이의 작은 땅을 가지고 천하의 강한 적에게 항거하겠습니까.” 하니, 장조가 크게 노하여 그를 참수하였다.
[] 은호殷浩가 죄로 파면되어 서인庶人이 되어서 신안信安으로 귀양 가고 왕술王述양주자사揚州刺史로 삼았다.
[] 은호殷浩가 매년 북벌北伐을 할 적에 군대가 여러 번 패하여 군량과 병기가 모두 소진되니, 환온桓溫이 조야의 원망을 인하여 글을 올려 폐출할 것을 청하자,
조정이 부득이하여 은호를 파면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아서 신안信安으로注+① 漢 獻帝 初平 3년(192)에 太未를 나누어 新安縣을 세웠는데, 晉 武帝 太康 원년(280)에 이름을 다시 信安으로 고쳤다. 귀양 보내니, 이로부터 내외의 큰 권세가 모두 환온에게 돌아갔다.
[] 은호殷浩는 젊어서 환온桓溫과 명성이 비슷하였고 서로 경쟁하는 마음을 내려놓지 않았는데, 환온은 항상 그를 경시하였다. 은호는 폐출당한 뒤에 비록 시름과 원망을 얼굴과 말소리에 드러내지 않았으나, 항상 공중에 ‘돌돌괴사咄咄怪事(쯧쯧 괴상한 일이로다.)’자를注+① 咄은 當沒의 切이니, “咄咄”은 혀를 차며 한탄하는 말이다. 썼다.
오랜 뒤에 환온이 연속掾屬치초郗超(치초)에게 이르기를 “은호가 덕망이 있고 말을 잘하니, 지난번에 상서령尙書令이나 복야僕射注+② 令․僕은 尙書令과 僕射이다. 되었을 적에 백관들의 의표儀表가 되기에 충분하였는데, 조정에서 임명한 관직이 그의 재주와 걸맞지 않았다.” 하고는 장차 은호를 상서령尙書令을 삼고자 하여 편지로 그에게 통고하였다.
은호는 흔연히 이를 허락하였다가 장차 답서를 보내려 할 적에 혹시 거짓이 있을까 염려해서 편지를 뜯었다가 봉하기를 십수 번 반복하고는 결국 빈 편지를 보냈다. 환온이 크게 노하여 이로 말미암아 그를 임명하려는 생각을 마침내 끊으니, 은호는 유배지에서 하였다.
[] 2월에 환온桓温이 군대를 거느리고 나라(전진前秦)를 정벌하였다.
[] 환온桓温이 보병과 기병 4만을 거느려 강릉江陵에서 출발하고 수군은 양양襄陽에서 균구均口로 들어가 남향南鄉注+① ≪水經注≫에 “順陽郡 筑陽縣에 涉都城이 있으니, 沔水가 동북쪽으로 지나가고 均水가 縣에서 沔水로 들어가는바, 이곳을 均口라 한다.” 하였다. 筑陽縣과 南鄕縣은 漢나라 때 모두 南陽郡에 속하였는데, 漢나라 建安 연간에 南陽의 오른쪽 땅을 나누어 남향군을 세우고 축양현과 남향현 두 고을을 여기에 소속시켰다. 晉 武帝가 다시 이름을 順陽郡으로 바꾸고 晉 成帝 咸康 4년(338)에 다시 南鄕郡으로 복구하였다. 鄕은 본음대로 읽는다. 이르렀다.
그리고 보병은 석천淅川(석천)에서注+② 析縣은 前漢 때에는 弘農郡에 속하였고 後漢 때에는 南陽郡에 속하였으니, 武關은 그 서쪽에 있었다. 後魏(北魏)는 淅川縣을 설치하니, 淅水가 있었다. 淅은 先的의 切이다. 무관武關으로 달려가게 하고는 사마훈司馬勲에게 명하여 자오도子午道로 출동하여 나라를 정벌하게 하였다.
[] 요양姚襄이 배반하여 나라(전연前燕)에 항복하였다.
[] 여름 4월에 환온桓温나라(전진前秦) 군대를 남전藍田에서 크게 무찌르고 나아가 파상灞上에 군대를 주둔하니, 삼보三輔 지방이 모두 항복하였다.
[] 환온桓温별장別將상락上洛을 공격하여 나라 형주자사荆州刺史 곽경郭敬을 사로잡고 전진하여 청니青泥를 격파하였다.注+① 上洛縣은 西都(前漢) 때에는 弘農郡에 속하였고 東漢 때에는 京兆에 속하였는데, 晉 武帝 泰始 2년(266)에 나누어 上洛郡을 설치하였다. 靑泥城은 藍田縣의 남쪽에 있다.
진주秦主 부건苻健태자太子 부장苻萇 등을 보내어 군사 5만 명을 인솔하고 환온을 막아 남전藍田에서 싸웠는데 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환온이 전진하여 싸워 파상灞上에 이르니, 부장 등이 후퇴하여 장안성長安城 남쪽에 주둔하였고 부건苻健이 노약자 6천 명과 함께 장안의 작은 성을 굳게 지켰다.
그리고 정예병 3만 명을 모두 동원해서 대사마大司馬 뇌약아雷弱兒 등을 보내어 부장과 연합해서 환온을 막게 하였다.
삼보三輔 지방의 군현郡縣이 모두 와서 항복하자, 환온은 거주하는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타일러서 안도하여 생업을 회복하게 하니,
백성들이 다투어 소와 술을 가지고 와서 맞이하여 위로하였고,注+② 勞(위로하다)는 去聲이다. 남녀들이 길 좌우에서 구경하였으며, 노인 중에는 눈물을 떨구며 “뜻 밖에 오늘날 다시 관군官軍(진군晉軍)을 보는구나.” 하는 자가 있었다.
[] 나라(전연前燕)가 모용각慕容恪대사마大司馬로 삼았다.
[] 연왕燕王 모용준慕容儁모용각慕容恪대사마大司馬 녹상서사録尙書事로 삼아서 태원왕太原王에 봉하고 모용평慕容評사도司徒로 삼아서 상용왕上庸王에 봉하였다. 그리고 모용패慕容霸오왕吳王으로, 모용덕慕容德양공梁公으로, 모용위慕容暐중산왕中山王으로, 양무陽騖사공司空으로 삼았다.注+① 慕容德은 慕容儁의 아우이고, 慕容暐는 모용준의 아들이다.
[] 처음에 연왕燕王 모용황慕容皝모용패慕容霸의 재주를 기이하게 여겼다. 그러므로 이름을 라 하여 장차 그를 세자로 삼으려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하여 중지하였다. 그러나 모용패를 총애하고 대우함이 오히려 세자보다 더하니, 이 때문에 모용준慕容儁이 그를 미워하였다.
일찍이 모용패가 말에 떨어져 이가 부러졌다고 하여 이름을 𡙇(결)로 바꾸었는데, 얼마 후 그의 이름이 도참서圖讖書에 응한다 하여 이름을 로 바꾸고는注+① 𡙇은 傾雪의 切이니, 본래 缺로 썼다. 慕容垂는 어려서 사냥과 놀이를 좋아하였는데,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이가 부러지니, 慕容儁이 참람되이 왕위에 오르고는 그의 이름을 𡙇로 고쳤다. 겉으로는 이름을 慕容𡙇이라 하여 높이는 듯하였으나, 내심은 실로 그를 미워하여 고친 것이다. 얼마 후에 圖讖書의 글 때문에 夬을 버리고 垂로 이름을 삼았다. 시중侍中으로 옮기고 유대留臺의 일을 다스리게 하다가 용성龍城으로 옮겨 진주하게 하니, 모용수慕容垂가 동북 지방에서 큰 추대推戴를 받았다.
모용준이 더욱더 그를 미워하여 마침내 불러 돌아오게 하였다.
[] 5월에 강서江西유민流民이 배반하여 요양姚襄에게 항복하자, 조령을 내려 군대를 중당中堂에 주둔하게 하였고, 사상謝尙이 도성에 들어와 호위하였다.
[] 강서江西유민流民 곽창郭敞 등 천여 명이 진류내사陳留內史 유사劉仕를 붙잡아서 요양姚襄에게 항복하니, 도성인 건강建康이 진동하고 놀랐다.
상서尙書주민周閔중군장군中軍將軍으로 삼아 중당中堂에 주둔시키고注+① 晉나라가 남쪽(建康)으로 천도한 뒤에 陳留郡의 治所를 譙郡 長垣縣의 경계에 임시로 설치하였다. 周閔은 周顗(주의)의 아들이다. 사상謝尙역양歴陽에서 경사京師로 돌아와 호위하여 장강을 굳게 점거하여 수비하였다.
[] 환온桓温나라(전진前秦) 군대와 싸워 승리하지 못하니, 6월에 군대가 돌아왔다.
[] 북해北海注+① 北海는 靑州에 속하였으니, 漢나라의 平壽縣이다. 사람 왕맹王猛이 젊어서 학문을 좋아하고 재능이 탁월하며 가슴에 큰 뜻을 품고 있어서 자잘한 일을 좋아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를 경시하였으나, 왕맹은 태연히 스스로 만족해하며 화음현華陰縣注+② 華陰縣은 前漢 때에는 京兆에 속하였고 後漢과 晉나라 때에는 弘農郡에 속하였다. 은거하였다.
그러다가 환온桓温관중關中으로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는 허름한 갈옷을 입고注+③ 披(입다)는 被와 통하니, 平聲이다. 찾아가 이를 잡으면서 당세의 일을 말하였는데, 곁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아무 거리낌 없이 말하였다.
환온이 기이하게 여기고 묻기를 “내가 천자의 명을 받들고 정예병 10만 명을 거느려 백성을 위해 반역자들을 제거하였는데도 삼진三秦 지역의 호걸豪傑들이 아무도 찾아와서 복종하지 않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왕맹이 말하기를 “공이 수천 리를 멀다 여기지 않고 깊이 적의 경내에 들어와서는 지금 장안長安이 지척 사이에 있는데도 파수灞水를 건너가지 않으니, 백성들은 공의 마음을 알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오지 않는 것입니다.”注+④ 官軍(晉軍)이 어려움을 알고 후퇴할까 두려워한 것이다. 하였다.
환온은 묵묵히 대답하지 않다가 천천히 말하기를 “강동江東 지방에는 에 비견할 자가 없다.” 하고는 왕맹을 군모좨주軍謀祭酒로 임용하였다.
[] 환온桓温나라 승상丞相 부웅苻雄 등과 백록원白鹿原에서注+① 魏收의 ≪魏書≫ 〈地形志〉에 “京兆 藍田縣에 白鹿原이 있다.” 하였다. 싸웠는데, 환온의 군대가 승리하지 못하여 죽은 자가 만여 명이었다.
처음에 환온은 나라의 보리를 보고는 양식으로 삼겠다고 생각하였다. 이윽고 나라 사람들이 보리를 모두 베어버리고 들을 깨끗이 치워 적이 취할 것이 없게 하고 기다리니, 환온의 군대가 먹을 것이 없었다.
환온은 관중關中의 3천여 호를 옮기고 돌아올 적에 왕맹王猛과 함께 돌아오고자 하였으나, 왕맹이 사양하고 나오지 않았다.
[] 나라 태자 요장姚萇 등이 환온桓温을 추격해서 동관潼關에 이르니, 환온의 군대가 여러 번 패하여 망실한 군사가 1만 명에 달했다. 부웅苻雄사마훈司馬勲을 공격하니, 사마훈 또한 달아나 한중漢中으로 돌아왔다.
환온이 파상灞上에 주둔하였을 적에 순양태수順陽太守注+① 晉 成帝가 順陽을 南鄕郡으로 고쳤는데, 이윽고 옛 이름으로 회복하였다. 설진薛珍이 환온에게 곧바로 진격하여 장안長安을 압박할 것을 권하였으나 환온이 따르지 않으니, 설진은 한 부대를 거느리고 홀로 패수를 건너가서 노획한 것이 자못 많았다.
환온이 후퇴하자, 설진은 마침내 돌아와서 이것을 여러 사람들에게 드러내어 말하면서 스스로 자기의 용맹을 자랑하고는 환온의 신중함을 허물하니, 환온이 그를 죽였다.
[] 나라(전진前秦) 동해왕東海王 부웅苻雄하였다.
[] 진주秦主 부건苻健의 아우 동해왕東海王 부웅苻雄하니, 부건이 곡하여 피를 토하고 말하기를 “하늘이 내가 사해四海를 평정함을 바라지 않으시는가. 어이하여 나의 원재元才注+① 元才는 苻雄의 자이다. 이리도 빨리 빼앗아가는가.” 하였다.
부웅은 좌명원훈佐命元勲으로서 지위가 장수와 정승을 겸하여 권세가 군주와 대등하였으나, 겸손하고 공손하며 사람들을 두루 사랑하였고 법도를 받들어 따랐다.
그러므로 부건이 그를 소중히 여겨서 항상 말하기를 “원재는 나의 주공周公이다.” 하였다. 부웅의 아들 부견苻堅이 작위를 세습하였다.
부견은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럽고 어려서부터 기백氣魄풍도風度가 있었으며 박학하고 재능이 많아 영웅호걸들과 교제하니, 여파루呂婆樓강왕彊汪,注+② 婆樓는 본래 略陽의 氐族 추장이다. 彊은 其兩의 切이니, 彊汪은 사람의 성명이다. 약양略陽 사람 양평로梁平老가 모두 그와 친하였다.
[] 나라(전진前秦)에 큰 기근이 들었다.


역주
역주1 張軌 : 255~314. 前涼의 始祖로 西晉 말의 동란기에 涼州 중심으로 반독립적 세력을 이루었으나 끝까지 西晉의 신하로 자처하였다.
역주2 殷浩以罪免爲庶人……以王述爲揚州刺史 : “庾翼과 褚裒가 모두 北伐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한 자들인데, ≪資治通鑑綱目≫에서 꾸짖음이 없었다. 그런데 은호는 어찌하여 죄가 있다고 썼는가. 은호가 姚襄을 기습하였다가 패망하였으니, 은호의 죄이다. 그러므로 비록 桓溫이 상소하여 청하였으나, 綱에 그 사실을 쓰지 않은 것이다.[庾翼褚裒皆北伐無成者也 綱目無責焉 浩則曷爲以罪書 襲姚襄以取敗 浩之罪也 故雖桓溫疏請 不書]” ≪書法≫
“殷浩의 폐출됨이 조정에서 나오지 않고 桓溫에게서 나왔는데, 어찌하여 환온이 아뢰어 은호를 파면했다고 쓰지 않았는가. 은호가 마음대로 자기 의견을 써서 매년 군대를 패망시키자, 환온이 朝野의 원망을 인해 상소하여 폐출할 것을 청하였으니, 아뢴 것은 비록 환온에게 있으나 죄는 은호에게 있었다. 그러므로 다만 은호가 죄로 파면했다고 쓰고 환온에게는 미치지 않은 것이다. 예컨대 능히 은호를 파면할 수 있는 자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은호가 스스로 죄를 지어 파면되었다고 말한 것과 같다. 이미 죄라고 말했으면 환온이 비록 청하지 않았더라도 어찌 파면함을 그만둘 수 있었겠는가.[殷浩之廢 不出於朝廷 而出於桓溫 何不以桓溫奏免殷浩書之 浩率意自用 連年喪師 溫因朝野之怨 疏請廢之 奏雖在溫 而罪則在浩 故但書浩以罪免 而不及溫 若曰浩非有能免之者 浩自以罪免也 既曰罪矣 則溫雖不請 庸可已乎]” ≪發明≫
역주3 桓温帥師伐秦 : “일찍이 桓温이 군대를 거느려 漢나라(成漢)를 정벌했다고 썼는데, 여기에서 다시 환온이 군대를 거느려 秦나라(前秦)를 정벌했다고 쓴 것은 환온이 자기 마음대로 행동함을 죄책한 것이다. 그러므로 뒤에 비록 한 번 그의 공을 썼으나, 제멋대로 행한 죄는 功으로 덮어 가릴 수 없으니, 이는 신하의 大義를 보인 것이다.[嘗書桓温帥師伐漢矣 於是 復書桓溫帥師伐秦 罪專也 故後雖一書其功 而專行之罪 則不可以功掩 所以示臣子之大義也]” ≪書法≫
역주4 桓温……師還 : “桓温이 신하 노릇을 하지 않자, ≪資治通鑑綱目≫에서 이미 그가 제멋대로 행동하는 자취를 드러내었으나, 그가 공이 있으면 또한 그 사실을 없애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晉나라가 長江 밖으로 遷都하였을 적에 겨우 목숨이 붙어 있는 상황이었는데, 환온이 經世濟民의 재주가 있었으니, 만일 영명한 군주가 그를 잘 부려서 썼다면 남은 백성들을 위문하고 죄 있는 자를 공격하여 옛 강토를 수복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오직 晉나라에 그를 통제하여 쓸 만한 군주가 없었으므로 환온이 跋扈할 마음을 두었으나, 그 經略한 공은 덮어 가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위에서 秦나라(前秦) 군대를 대파하고 나아가 灞上에 군대를 주둔했다고 쓴 것은 그의 공적을 서술한 것이요, 여기에서 秦나라와 싸워 승리하지 못하고 6월에 군대가 돌아왔다고 쓴 것은 그의 패전을 숨긴 것이다. 무릇 이러한 종류는 모두 중국의 체통을 높이고 正統의 의리를 보존한 것이니, 이는 진실로 ≪자치통감강목≫에서 中華를 귀하게 여기고 오랑캐를 천하게 여기는 뜻인바, 어찌 환온 때문에 필법에 가볍게 하거나 무겁게 하는 차이를 두겠는가. 요점은 보는 자가 음미하여 생각함에 달려 있는 것이다.[桓溫不臣 綱目 既著其專輙之迹矣 至其有功 而亦不泯其實者 何也 晉遷江表 氣息奄奄 溫有經濟之才 儻有英主驅而用之 弔伐遺黎 克復舊壤 有不難者 惟晉無駕馭之君 故溫有跋扈之志 至其經略之功 則不可掩 故上書大敗秦兵 進軍灞上者 序其績也 此書戰秦不利 六月師還者 諱其敗也 凡此類 皆以尊中國之體 存正統之義 此固綱目貴華賤夷之旨 豈以溫故而輕重其筆哉 要在觀者味而思之也]” ≪發明≫

자치통감강목(14) 책은 2021.11.1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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