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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8)

자치통감강목(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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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順帝準昇明元年이요 魏太和元年이라
春正月 魏略陽氐作亂이어늘 二月討平之하다
◑三月 魏以東陽王丕爲司徒하다
宋主昱 自京口旣平으로 驕恣尤甚하여 無日不出하니 從者竝執鋋矛 逢無免者하니 民間擾懼하여 行人殆絶注+鋋, 音蟬, 又以前切, 小矛也.이러라
鍼椎鑿鋸 不離左右하여 一日不殺則慘然不樂하니 殿省憂惶하여 食息不保注+鍼, 其淹切, 與鉗同.하니
阮佃夫等 謀因其出하여 執而廢之라가 事覺被殺하다 太后數訓戒昱한대 昱欲鴆之未果러라
嘗直入領軍府하니 道成 晝臥裸袒이어늘 昱令起立하고 晝腹爲的하여將射之注+晝, 讀與畫同.하니 道成斂板曰 老臣無罪注+板, 手, 笏也.라하니 乃更以骲箭射中其臍하고 投弓大笑注+骲, 蒲交․蒲剝二切. 骨, 鏃也. 或云 “骨鏃亦能害人, 況以之射人腹乎.” 蓋當時所謂骲箭者, 必非骨鏃.하더라
道成憂懼하여 密與袁粲褚淵으로 謀廢立한대 粲曰 主上幼年이라 微過易改注+易, 以豉切. 伊霍之事 非季世所行이니 縱使功成이라도 亦終無全地 淵默然하더라
功曹紀僧眞 言於道成曰 今朝廷猖狂하여 人不自保注+朝廷謂天子也.하니 天下之望 不在袁褚하니 明公 豈得坐受夷滅이리오 道成然之러라
或勸道成하여 犇廣陵起兵이어늘 靑冀刺史劉善明曰 宋氏將亡 愚智共知하니 公神武高世하니 唯當靜以待之하여 因機奮發이면 功業自定이니 不可遠去根本하여 自貽猖蹶이라하니 道成乃止注+猖蹶, 猖狂顚蹶也.하다
越騎校尉王敬則 潛自結於道成하니 道成 命敬則하여 陰結昱左右楊玉夫楊萬年陳奉伯等하여 使伺機便이러니
至是 昱乘露車하고 與左右 於臺岡賭跳注+露車, 車上無覆蓋. 臺岡, 意即臺城之來岡也. 賭跳者, 賭跳躑, 以高者爲勝也.라가 仍往靑園尼寺하여 晚至新安寺하여 偷狗飲酒醉還注+孝武寵姬殷貴妃死, 爲之立寺. 貴妃子子鸞封新安王, 故以新安爲寺名.이어늘
玉夫萬年 刎其首하니 奉伯袖之하고 稱勅開門하여 出與敬則한대 敬則馳詣領軍府하니 道成 戎服乘馬而出이어늘 敬則等 從入宮殿中하여
聞昱已死하고 咸稱萬歲하더라 道成以太后令으로 召諸大臣入議할새 道成謂劉秉曰 此使君家事 何以斷之注+使, 疏吏切. 秉, 道憐之孫. 道憐, 高祖弟也. 秉未答이어늘
道成須髯盡張하고 目光如電하니 秉曰 尙書衆事 可以見付 軍旅處分 一委領軍이라 道成讓袁粲한대 粲不敢當이어늘 王敬則 拔刃跳躍曰 天下事 皆應關蕭公이니 敢有開一言者 血染敬則刀하리라하고
仍手取白紗帽하여 加道成首하고 令即位曰 事須及熱이라 道成正色呵之한대 褚淵曰 非蕭公이면 無以了此라하니 道成乃下議하여 迎立安成王이러라
秉出逢從弟韞하니 問曰 事當歸兄邪아하니 曰 已讓領軍矣 韞拊膺曰 兄肉中 詎有血邪 今年族矣로다
遂以太后令으로 數昱罪惡하여 追廢爲蒼梧王하다 儀衛至東府門하니 安成王 令門者 勿開하고 以待袁司徒粲至하여 乃入即位하니 時年十一이라
以道成爲司空錄尙書事驃騎大將軍하여 出鎭東府하고 劉秉爲尙書令하고 袁粲鎭石頭 秉始謂尙書萬機本이니 以宗室居之 則天下無變이라하더니
旣而道成兼總軍國하여 布置心膂하고 與奪自專하니 褚淵 素相憑附하고 秉粲 閤手仰成矣注+閤手者, 高拱充位而無所爲, 兩手若有所閤也.러라
粲性沖靜하여 每有朝命 常固辭어늘 不得已乃就職이러니 至是 知蕭道成有不臣之志하고 陰欲圖之하여 即日受命하다
魏詔工商賤族有役者 止本部丞注+此蓋以當時授官不分流品, 故詔凡工役之戶, 官止本部丞, 不使及淸流也. 淸流謂士大夫.하다
◑九月 魏更定律令하다
◑冬十月 武都王楊文度襲魏仇池陷之하다
事顯祖爲尙書하여 信用范러니 訢弟瑛諫曰 (𢶏)[檦]能降人以色하고 假人以財하여 輕德義而重勢利하니 聽其言也甘하고 察其行也賊이니 不早絶之 後悔無及이리라하니 不從하다
訢與尙書趙黑有隙하여 發其罪하니 黑坐黜爲門士注+魏有宰士․門士, 宰士掌酒食, 門士守門戶. 黑恨之하여 寢食爲之衰少러니 踰年 復入領選하여 白馮太后하여 稱訢專恣하고 出爲徐州하니
(𢶏)[檦]知太后怨訢하고 乃告訢謀外叛이라하니 太后徵至問狀하고 引(𢶏)[檦]證之하니
訢曰 汝受我恩이니 何忍誣我 (𢶏)[檦]曰 (𢶏)[檦]受公恩 何如公於李敷 公忍之於敷하니 (𢶏)[檦]何爲不忍於公이리오
訢慨然歎曰 吾不用瑛言이러니 悔之可及이리오 黑復於中 構成其罪하여 誅之然後 寢食如故하더라
十一月 魏懷州亂이어늘 討平之하다
魏懷州民伊祁苟作亂하여 馮熙討滅之注+伊祁, 姓也.러니 太后欲屠其城이어늘
張白澤諫曰 凶渠逆黨 盡已梟夷注+凶渠, 謂渠魁也.하니 城中 豈無忠良仁信之士리오 柰何不問白黑하고 一切誅之오하니 乃止하다
宋荊襄都督沈攸之擧兵江陵하여 討蕭道成하다
沈攸之與蕭道成으로 同直殿省相善이러니 至是하여 以道成名位素出己下라가 一旦專制朝權이어늘 心不平하여 謂元琰曰 吾寧爲王陵死언정 不爲賈充生하리라 然亦未暇擧兵注+元琰, 攸之長子. 陵, 通鑑作淩. 王淩, 事見漢後主延熙十四年. 賈充, 事見漢後主景耀三年.이러라
張敬兒與攸之司馬劉攘兵善이러니 疑攸之將起事하여 密問攘兵한대 攘兵寄敬兒馬橙一隻하니 敬兒乃爲之備注+橙, 丁鄧切, 與鐙同, 馬鞁具也. 鞁, 披義切.러라
攸之有素書十數行注+行, 胡郞切. 師古曰 “十行, 詔書也.”하여 常韜在裲襠角云 是明帝與己約誓注+裲襠, 音兩當, 衣名也. 其一當背, 其一當胸, 故名裲襠.러니 將擧兵할새 其妾崔氏諫曰 官年已老하니 那不爲百口計注+宋․齊之間, 義從私屬以至婢僕, 率呼其主爲官.
攸之指裲襠角示之하고 於是 勒兵移檄하여 遣使邀張敬兒及諸州鎭하여 同擧兵하니 敬兒斬其使하고 它鎭亦懷兩端이어늘
攸之遺道成書하여 以爲少帝昏狂하니 宜與諸公密議하여 共白太后하여 下令廢之 柰何交結左右하여 親行弒逆하고 移易朝舊하며 布置親黨하고 宮閤管籥 悉關家人 吾不知子孟孔明遺訓固如此乎注+朝舊, 謂朝廷舊臣也. 子孟, 霍光字, 孔明, 諸葛亮字.인저 足下旣有賊宋之心하니 吾寧敢捐包胥之節이리오하니 朝廷忷懼注+申包胥乞秦師以存楚.하더라
道成以世子賾으로 行郢州事하여 修治器械以備攸之注+道成平桂陽之難, 進爵縣公, 以賾爲世子.러니 及徵賾爲左衛將軍하니 賾乃薦司馬柳世隆自代注+世隆, 元景之弟子也.하고 謂曰
攸之一旦爲變하여 焚夏口舟艦하고 沿流而東하면 不可制也 若得攸之留攻郢城하면 必未能猝拔이니 君爲其內하고 我爲其外 破之必矣리라
及攸之起兵 賾行至尋陽하니 衆欲倍道趨建康이어늘 賾曰 尋陽 地居中流하고 密邇畿甸하니 留屯湓口하여 內藩朝廷하고 外援夏首하여 保據形勝하여 控制西南하면 今日會此 天所置也注+夏首, 夏水口也.
或以城小難固라하니 左中郎將周山圖曰 今據中流하여 爲四方勢援하니 不可以小事難之 苟衆心齊壹하면 江山皆城隍也니라
賾乃奉晉熙王燮하여 鎭湓口하니 道成聞之하고 喜曰 眞我子也라하더라
湘州刺史王蘊與沈攸之 深相結하고 與袁粲劉秉으로 密謀誅道成할새 將帥黃回卜伯興等 皆與通謀注+伯興, 天與之子也.러니 道成初聞攸之事起하고 往詣粲한대 粲辭不見이어늘
通直郎袁達謂粲호되 不宜示異同注+通直郎, 通直散騎侍郎也. 晉武帝置員外散騎侍郎, 元帝泰興二年, 使二人與散騎侍郎同員直, 故謂之通直散騎侍郎也.이라 粲曰 彼若以主幼時艱 與桂陽時不異注+謂桂陽休範反時也.라하여 劫我入臺 何辭拒之리오 一朝同止라가 欲異得乎注+朝, 如字. 同止猶言同處, 言一旦與道成同處行事, 後雖欲爲異, 其可得乎. 道成乃召褚淵하여 與之連席하여 每事共之
劉韞爲領軍將軍하여 入直門下省하고 卜伯興爲直閤하고 黃回等諸將 皆出屯新亭하다 褚淵遭憂去職 朝廷 敦迫不起어늘 粲往譬說하니 淵乃從注+敦, 勸. 迫, 逼也. 說, 輸芮切. 譬說, 猶說諭也.이러니
及粲遭憂하여 淵譬說懇至호되 粲遂不起하니 淵由是恨之러라 至是 淵謂道成曰 西夏事必無成이니 公當先備其內耳注+西夏, 荊州也. 備其內, 謂備袁粲等也.
粲謀旣定 將以告淵이어늘 衆謂不可한대 粲曰 淵與彼雖善이나 豈容大作同異리오 乃以謀告淵한대 淵即以告道成이라
道成遣軍主蘇烈薛淵等하여 助粲守石頭注+淵, 安都之從子也.하니 淵曰 不審公能保袁公共爲一家否 道成曰 所以遣卿 正爲能盡臨事之宜하여 使我無西顧之憂耳注+石頭在臺城西, 故云然. 但努力하고 無多言하라
又以王敬則爲直閤하여 與伯興共總禁兵하니
粲謀矯太后令하여 使韞伯興으로 帥宿衛兵하여 攻道成於朝堂하니 回等帥所領爲應이라
劉秉等竝赴石頭할새 本期夜發이러니 秉恇擾不知所爲하여 晡後即束裝하고 盡室犇石頭하니 粲驚曰 何事遽來 今敗矣로다
道成聞之하고 使王敬則으로 殺韞及伯興하고 蘇烈等據倉城拒粲注+倉城, 石頭倉城也.하니 王蘊聞秉走하고 歎曰 事不成矣로다
道成遣戴僧靜하여 助烈等攻粲하니 秉踰城走어늘 粲下城하고 謂其子最曰 本知一木不能支大廈之崩이나 但以名義至此로라
僧靜踰城獨進하니 最以身衛粲이어늘 僧靜直前斫之하니 粲謂最曰 我不失忠臣이요 汝不失孝子라하고 遂父子俱死하니 百姓哀之하여 爲之謠曰 可憐石頭城이여 寧爲袁粲死언정 不作褚淵生이라하더라
秉父子亦爲追者所殺하니 黃回遂不敢發하다 粲簡淡平素하여 無經世才하고 好飲酒吟諷하여 身居劇任호되 不肯當事하고
主事每往諮決하면 或高詠對之하고 閑居高臥하여 門無雜賓하니 物情不接이라 故及於敗注+主事, 尙書省主事也, 尙書諸曹各有主事.하니라
裴子野曰 袁景倩 民望國華 受付託之重하여 智不足以除姦이요 權不足以處變하여 蕭條散落하여 危而不扶라가
及九鼎旣輕하고 三才將換 區區斗城之裏 出萬死而不辭하니 蓋蹈匹夫之節而無棟梁之具矣注+景倩, 粲字. 三才, 天․地․人也. 斗城, 言城如斗大也.로다
沈攸之攻郢城不克하다
攸之至夏口하여 自恃兵彊하여 有驕色이어늘 主簿宗儼之勸攸之攻郢城한대
功曹臧寅 以郢城地險하니 非旬日可拔이니 若不時擧 挫銳損威하리니 今順流長驅 計日可捷이니 旣傾根本하면 則郢城 豈能自固注+寅, 燾之曾孫也. 擧, 發也.리오
攸之 欲留偏師하여 守郢城하고 自將大衆하여 東下어늘 柳世隆遣人挑戰하여 肆罵穢辱之한대 攸之怒하여 改計攻城이어늘 世隆隨宜拒應하니 攸之不能克하다
宋以楊運長爲宣城太守하다
楊運長 出守宣城하니 於是 太宗嬖臣 無在禁省者矣러라
沈約曰 夫人君南面 九重奧絕하니 陪奉朝夕 義隔卿士하고 階闥之任 宜有司存注+楚辭 “君之門以九重.” 註 “關門․遠郊門․近郊門․城門․皐門․庫門․雉門․應門․路門.”이로되 旣而恩以狎生하고 信由恩固하여 無可憚之姿하고 有易親之色注+易, 以豉切.이라
孝建泰始 主威獨運而刑政糾雜하여 理難遍通이라 耳目所寄 事歸近習하니 及覘歡慍候慘舒하여 動中主情 擧無謬旨注+中, 去聲.하니 人主謂其身卑位薄하여 權不得重이라하나
曾不知鼠憑社貴하며 狐藉虎威하니 外無逼主之嫌하고 內有專用之效하여 勢傾天下호되 未之或悟注+漢中山靖王勝曰 “社鼠不熏, 所託者然也.” 藉, 慈夜切. 楚江乙曰 “虎求百獸而食之, 得狐, 狐曰 ‘子無食我, 天帝使我長百獸. 子以我爲不信, 吾爲子先行, 子隨我後. 百獸見我而敢不走乎.’ 虎以爲然, 遂與之行, 獸見之皆走, 虎不知百獸畏己而皆走也, 以爲畏狐也.”
及太宗晚運 慮經盛衰하니 權倖之徒 慴憚宗戚注+慴, 質涉切, 懼也.하여 欲使幼主孤立하여 永竊國權하고 構造同異하여 興樹禍隙하니 帝弟宗王 相繼屠勦 實祚夙傾 實由於此矣
魏拔葭蘆하여 斬楊文度하고 以其弟文弘으로 爲武都王하다
◑宋蕭道成假黃鉞出頓新亭하다
道成 謂參軍江淹曰 天下紛紛하니 君謂何如 淹曰 成敗在德이요 不在衆寡 雄武有奇略하고 寬容而仁恕하며 賢能畢力하고 民望所歸하며 奉天子以伐叛逆하니 五勝也
彼志銳而器小하고 有威而無恩하며 士卒解體하고 搢紳不懷하며 懸兵數千里而無同惡相濟하니 五敗也 雖豺狼十萬이라도 終爲我獲 必矣리라
行南徐州事劉善明 言於道成曰 攸之包藏禍心 於今十年이라 性旣險躁하고 才非持重하여 而起事累旬 遲迴不進하니
一則暗於兵機하고 二則人情離怨하고 三則有掣肘之患하고 四則天奪其魄注+掣, 尺制切, 挽也. 肘, 陟柳切, 臂節也. 掣肘, 謂慮張敬兒等襲其後也.이라
本慮其剽勇輕速 掩襲未備하여 決於一戰이러니 今六帥齊奮하고 諸侯同擧하니 此籠中之鳥耳


나라 순제順帝 유준劉準 승명昇明 원년이고, 북위北魏 고조高祖 효문제孝文帝 탁발굉拓跋宏 태화太和 원년이다.
[] 봄 정월에 북위北魏 약양略陽저족氐族이 반란을 일으키자, 2월에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 3월에 북위北魏동양왕東陽王 탁발비拓跋丕사도司徒로 삼았다.
[] 가을 7월에 나라 중령군中領軍 소도성蕭道成이 그 임금 유욱劉昱을 시해하고注+① 劉昱은 향년이 15세였다. 안성왕安成王 유준劉準을 세우고 스스로 사공司空 녹상서사錄尙書事에 올랐다.
[] 송주宋主 유욱劉昱경구京口가 평정된 뒤로 더욱 교만 방자하여 하루도 나가지 않는 날이 없었는데, 시종하는 사람들이 창을注+① 鋋은 음이 蟬이고, 또 以前의 切이니, 작은 창이다. 가지고 다녔기에 만나는 자들은 죽음을 면한 일이 없어 민간에서는 걱정하고 두려워하여 길에 사람이 거의 없었다.
형벌을 주는 도구인 형틀注+② 鍼(칼을 씌우다)은 其淹의 切이니, 鉗과 같은 뜻이다.․망치․끌․톱을 곁에서 떠나지 않게 하여 하루라도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슬픈 모습으로 즐거워하지 않으니, 궁궐에서는 걱정하고 두려워하여 먹고 숨 쉬는 것조차 보장할 수 없었다.
완전부阮佃夫 등이 송주宋主가 외부로 나가는 틈을 타서 체포하여 폐위시키려고 도모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죽임을 당했다. 태후가 자주 유욱을 훈계하였는데, 유욱이 짐독으로 태후를 시해하려다가 결행하지 못했다.
유욱이 한번은 불시에 영군부領軍府로 들어갔는데, 소도성蕭道成이 윗도리를 벗은 채로 누워 있었다. 유욱이 일어나라고 명령하여 배에 과녁을 그리고는注+③ 晝(그리다)은 畫와 동일하게 읽는다. 활시위를 당겨 쏘려고 하니 소도성이 수판手板注+④ 板은 手板이니, 笏이다. 거두고서 “노신老臣에게는 죄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다시 박전骲箭으로注+⑤ 骲(뼈로 만든 화살촉)는 蒲交와 蒲剝의 두 가지 切이다. 骨은 화살촉이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뼈 화살촉[骨鏃]도 사람에게 해를 입힐 수 있는데, 더구나 그것으로 사람의 배에 쏘는 것은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하였으니, 당시에 이른바 骲箭은 필시 骨鏃이 아닌 듯하다. 그의 배꼽에 맞추고는 활을 던지고 크게 웃었다.
소도성이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은밀히 원찬袁粲, 저연褚淵과 함께 송주宋主의 폐위를 도모하였는데, 원찬이 말하기를 “주상主上은 나이가 어려 작은 과실은 고치기가 쉽고注+⑥ 易(쉽다)는 以豉의 切이다. 계세季世에 행한 일이 아니니, 설령 일이 성공한다고 해도 끝내 안전할 수 있는 곳은 없다.”라고 하니, 저연은 잠자코 있었다.
공조功曹 기승진紀僧眞이 소도성에게 말하기를 “지금의 조정(황제)은注+⑦ 朝廷은 天子를 말한다. 미쳐 날뛰어 사람들은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지경입니다. 천하 사람들의 바람은 원찬과 저연에게 있지 않으니, 명공明公께서는 어찌 가만히 앉아서 죽임을 당하고자 하십니까.”라고 하니, 소도성이 그렇다고 생각하였다.
어떤 이가 소도성에게 권하여 광릉廣陵으로 달아나서 군사를 일으키라고 하였는데, 청주靑州기주冀州자사刺史유선명劉善明이 말하기를 “송씨宋氏가 멸망할 것은 어리석은 자나 지혜로운 자나 모두 알고 있습니다. 공은 신묘한 무공武工은 세상에 뛰어나니, 다만 조용히 기다렸다가 기회를 틈타 분발하면 공업이 절로 결정될 것이요. 근본 지역에서 멀리 떨어져서 스스로 낭패를 끼쳐서는注+⑧ “猖蹶”은 경거망동하여 실패한다는 뜻이다. 안 됩니다.”라고 하니, 소도성이 그만두었다.
[] 월기교위越騎校尉 왕경칙王敬則이 몰래 스스로 소도성蕭道成과 교분을 맺었는데, 소도성이 왕경칙에게 명을 내려 유욱劉昱의 좌우에 있는 양옥부楊玉夫, 양만년楊萬年, 진봉백陳奉伯 등과 몰래 결탁하여 기회를 엿보도록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유욱이 노거露車를 타고 주위 사람들과 대강臺岡에서 높이 뛰는 것으로 내기를 하고注+① 露車는 수레 위에 덮개가 없는 수레이다. 臺岡은 臺城에서 이어진 언덕인 듯하다. “賭跳”는 뛰는 것으로 내기를 걸어 높이 뛰는 자가 이기는 것이다. 이어서 청원靑園이사尼寺로 가서 저녁 늦게 신안사新安寺注+② 孝武帝의 寵姬였던 殷貴妃가 죽자 그를 위해 절을 세워주었다. 貴妃의 아들 劉子鸞을 新安王에 봉하였기 때문에 절의 이름을 新安이라고 한 것이다. 도착하여 개를 훔쳐 술을 마시고 취해서 돌아왔다.
양옥부와 양만년이 유욱의 머리를 베니, 진봉백이 소매에 넣고는 칙명이라고 하면서 문을 열게 하여 나가서 왕경칙에게 주었다. 왕경칙이 영군부領軍府로 달려가니, 소도성이 군복을 입고 말을 타고 나오자 왕경칙 등이 소도성을 따라 궁전으로 들어왔다.
사람들이 유욱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모두 만세를 불렀다. 소도성이 태후의 명령으로 대신大臣들을 불러들여 의논을 하였는데, 소도성이 유병劉秉에게 말하기를 “이는 그대 집안의 일이니,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는가?”라고 하니注+③ 使(사신)는 疏吏의 切이다. 劉秉은 劉道憐의 손자인데, 유도련은 高祖(劉裕)의 아우이다. 유병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소도성의 수염이 쭈뼛해지고 눈에서 빛이 나자, 유병이 말하기를 “상서대尙書臺의 여러 일을 맡겨주시고, 군대에 관한 일을 모두 영군領軍에게 위임하겠다.”라고 하였다. 소도성이 원찬袁粲에게 양보를 하였는데, 원찬이 감당하지 못하자, 왕경칙이 칼을 빼들고 펄쩍펄쩍 뛰며 말하기를 “천하의 일은 모두 응당 소공蕭公이 관장해야 할 것이니, 감히 한 마디라도 말을 하는 자가 있으면 내 칼이 피로 물들 것이오.”라고 하였다.
이어서 손으로 백사모白紗帽를 가져다가 소도성의 머리에 씌우고 즉위하게 하면서 말하기를 “일은 뜨거울 때 이루어야 합니다.”라고 하니 소도성이 정색을 하며 꾸짖자, 저연褚淵이 말하기를 “소공蕭公이 아니면 이 일을 마무리하지 못할 것이오.”라고 하였다. 소도성이 논의를 결정하여 안성왕安成王을 맞이하여 옹립하기로 하였다.
유병이 나가서 사촌 동생 유온劉韞을 만났는데, “오늘의 일은 당연히 형님의 공으로 돌아가겠지요?”라고 묻자 유병이 대답하기를 “이미 영군領軍에게 양보하였네.”라고 하였다. 유온이 가슴을 치며 말하기를 “형님의 몸속에 어찌 피가 남아 있겠습니까. 올해에 멸족을 당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태후의 명령으로 유욱의 죄악을 열거하고 뒤이어 폐위하여 창오왕蒼梧王으로 삼았다. 의위儀衛동부문東府門에 이르자, 안성왕이 문지기에게 문을 열지 말도록 하고 사도司徒 원찬이 올 때가지 기다렸다가 들어가서 즉위하니 당시 나이가 11세였다.
소도성을 사공司空 녹상서사錄尙書事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으로 삼아 나가서 동부東府진수鎭守하게 하고, 유병을 상서령尙書令으로 삼고, 원찬에게는 석두石頭진수鎭守하게 하였다. 유병이 처음에 상서대尙書臺만기萬機의 근본이라 종실이 그 자리에 있으면 천하의 일이 변화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얼마 뒤에 소도성이 군국軍國의 일을 겸하여 총괄하여 자신의 심복들로 배치하고 여탈의 권한을 자기 마음대로 하니 저연은 평소 서로 의지하는 사이라 붙어 있었고, 유병과 원찬은 손을 놓고注+④ “閤手”는 높이 팔짱을 낀 채 자리만 채우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니, 두 손을 포개는 것처럼 한 것이다. 일이 이루어지는 대로 지켜보았다.
원찬은 성품이 진중하고 조용하여 조정의 명이 있을 때마다 늘 고사를 하다가 부득이하여 직분에 나아갔는데, 이때에 이르러 소도성이 황제의 자리를 찬탈할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은밀히 그를 도모하고자 그날 명을 받았다.
[] 북위北魏가 조서를 내려 공인이나 상인, 천한 족속으로 노역을 하는 사람은 〈관직이〉 본부本部에서 그치게 하였다.注+① 이는 당시에 관직을 줄 때에 을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서를 내려 모든 工役을 하는 집안은 관직을 本部의 丞으로 제한하여 淸流에 미치지 못하게 한 것이다. 淸流는 士大夫를 이른다.
[] 9월에 북위北魏가 율령을 개정하였다.
[] 나라가 양옥부楊玉夫 등 25명을 봉하여 차등 있게 작위를 주었다.
[] 겨울 10월에 무도왕武都王 양문도楊文度북위北魏구지仇池를 습격하여 함락시켰다.
[] 북위北魏서주자사徐州刺史 이흔李訢을 죽였다.
[] 이흔李訢현조顯祖(탁발홍拓跋弘)를 섬겨 상서尙書가 되어 범표范檦를 믿고 등용하였다. 이흔의 동생 이영李瑛이 간언하기를 “범표는 안색으로 남에게 굽신거리며 재물로 남의 마음을 사서 덕의德義를 경시하고 권세와 이익을 중시합니다. 그의 말을 들으면 달콤하고, 그의 행동을 살피면 남을 해치니, 일찍 끊어내지 않으면 뒤에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이흔이 상서 조흑趙黑과 관계가 좋지 않아 그의 죄를 발고하니 조흑이 폄출되어 문사門士注+① 北魏에는 宰士와 門士가 있었는데, 재사는 술과 음식을 담당하고, 문사는 문을 지켰다. 되었다. 조흑이 그를 원망하여 그 때문에 잠을 잘 못 자고 식사량이 줄어들었다. 해를 넘겨서 다시 조정에 들어가 인재 선발을 관장하여 풍태후馮太后에게 이흔의 전횡을 아뢰니, 풍태후馮太后가 이흔을 내쳐서 서주자사徐州刺史로 삼았다.
범표는 풍태후가 이흔을 원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이흔이 외부에서 반란을 도모하였다고 고발하였다. 태후가 이흔을 불러들여 상황을 묻고 범표를 데려와 사실을 증명하게 하니,
이흔이 말하기를 “그대가 나에게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차마 나를 무고할 수 있는가?”라고 하니, 범표가 말하기를 라고 하였다.
이흔이 분개하여 탄식하기를 “내가 이영을 말을 듣지 않았으니,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조흑이 다시 중간에 이흔의 죄를 조작하여 그를 죽인 뒤에 잠자고 먹는 일을 예전처럼 하였다.
[] 11월에 북위北魏 회주懷州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 북위北魏 회주懷州의 백성 이기구伊祁苟注+① 伊祁는 姓이다. 반란을 일으켜 풍희馮熙가 토벌하여 괴멸시키자, 풍태후馮太后가 그 성을 도륙시키려고 하니
장백택張白澤이 간언하기를 “흉악한 괴수와注+② “凶渠”는 우두머리를 말한다. 역당逆黨을 모두 죽이고 효수梟首하였으니, 성안에 어찌 충성스럽고 선량하며 인자하고 믿을 수 있는 선비들이 없겠습니까. 어찌하여 흑백을 묻지도 않고 모조리 죽이려고 하십니까.”라고 하니, 마침내 중지하였다.
[] 나라 형주양주도독荊州襄州都督 심유지沈攸之강릉江陵에서 군대를 일으켜 소도성蕭道成을 토벌하다.
[] 예전에 심유지沈攸之소도성蕭道成과 궁궐에서 함께 숙직을 하여 친하게 지냈다. 이때에 이르러, 명예와 지위가 자기보다 낮았던 소도성이 하루아침에 조정의 권세를 좌지우지 하자 마음이 편하지 않아 심원염沈元琰에게 말하기를 라고 하였다.注+① 沈元琰은 沈攸之의 큰 아들이다. 陵은 ≪資治通鑑≫에 淩으로 되어 있다. 王淩의 일은 蜀漢 後主 延熙 14년(251)에 보이고, 賈充의 일은 蜀漢 後主 景耀 3년(260)에 보인다. 그러나 역시 군사를 일으킬 겨를이 없었다.
장경아張敬兒가 심유지의 사마司馬유양병劉攘兵과 친하게 지냈는데, 심유지가 군대를 일으킬 것이라고 의심하여 몰래 유양병에게 물었다. 유양병이 장경아에게 말안장注+② 橙(등자)은 丁鄧의 切이며, 鐙과 동일한 뜻으로, 말안장에 갖추는 것이다. 鞁(가슴걸이)는 披義의 切이다. 1척을 보내니, 장경아가 이에 대비하였다.
심유지가 흰 비단에 열 줄 넘게 쓴 편지를注+③ 行(줄)은 胡郞의 切이다. 師古는 말하기를 “十行은 詔書이다.” 하였다.양당裲襠(윗옷에 덧입는 옷)注+④ 裲襠의 음은 兩當으로 의복의 명칭이다. 하나는 등에, 다른 하나는 가슴에 해당하므로, 裲襠이라 한 것이다. 속에 넣어두고는 이것은 명제明帝(유욱劉彧)가 자신과 맹세한 것이라고 하였다. 군사를 일으키려고 할 적에 그의 첩 최씨崔氏가 간언하기를 “(주인)의注+⑤ 宋나라와 齊나라 무렵에는 의리상 사적인 친속으로부터 노비에 이르기까지 대개 자신의 주인을 官이라고 불렀다. 나이가 이미 연로하니 어찌 온 가족은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심유지가 양당裲襠 속을 가리켜 보이고는 군대를 정돈하고 격문을 돌려 사신을 보내어 장경아와 여러 주진州鎭을 맞이하여 함께 병사를 일으키려고 하였다. 장경아는 사신의 목을 베었고, 다른 도 섣불리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심유지가 소도성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어린 황제는 아둔하고 사리분별을 못하니 여러 공들과 은밀히 논의하여 함께 태후에게 아뢰어 명을 내려 폐위시켜야 했는데, 어찌하여 좌우에 있는 사람들과 교분을 맺어 친히 시역弒逆을 행하고, 조정의 옛 신하들을 바꾸고 옮기며, 자신과 친한 무리들을 배치하고, 궁궐의 열쇠를 집안사람에게 맡긴 것입니까. 내가 자맹子孟공명孔明이 남긴 교훈이 진실로 이와 같을 줄은 몰랐소.注+⑥ “朝舊”는 조정의 옛 신하를 말한다. 子孟은 霍光의 字이고, 孔明은 諸葛亮의 字이다. 족하足下가 이미 나라를 해칠 마음을 먹었으니, 내가 어찌 감히 신포서申包胥와 같은 절개를 버리겠습니까.”注+⑦ 申包胥는 秦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여 楚나라를 보존하였다.라고 하니 조정이 두려워하였다.
[] 예전에 소도성蕭道成세자世子 소색蕭賾에게注+① 蕭道成이 桂陽王(劉休範)의 난리를 평정하고 나서 縣公으로 작위를 올려주었고, 蕭賾을 世子로 삼았다. 영주郢州의 일을 대행하게 하여 무기를 잘 수리하여 심유지沈攸之를 대비하게 하였는데, 소색을 불러 좌위장군左衛將軍으로 삼으려고 하자, 소색이 사마司馬 유세륭柳世隆注+② 柳世隆은 柳元景의 아우의 아들이다. 천거하여 자신을 대신하게 하고는 말하기를
“심유지가 하루아침에 변란을 일으켜 하구夏口의 함선을 불태우고 물길을 따라 동쪽으로 오면 제압하지 못할 것이니, 만약 심유지가 머물러 영성郢城을 공격하게 할 수 있다면 필시 별안간에 함락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대가 내부에 있고 내가 외부에 있으면, 반드시 적들을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심유지가 군사를 일으키자 소색이 심양尋陽에 이르니, 군사들이 빠른 속도로 건강建康으로 달려가고자 하였다. 소색이 말하기를 “심양은 중류에 위치하여 기전畿甸에 아주 가까우니, 분구湓口에 주둔하여 안으로 조정을 지키고 밖으로 하수夏首注+③ 夏首는 夏水의 입구이다. 원조하여 유리한 지세를 보전하고 점거하여 서쪽과 남쪽을 제압한다면 오늘 이 기회는 하늘이 마련해준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자가 성이 협소하여 지키기가 어렵다고 하니 좌중랑장左中郎將 주산도周山圖가 말하기를 “지금 중류를 점거하여 사방의 후원이 되고 있으니, 작은 일 때문에 그 일을 어렵게 할 수 없다. 군사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면 강과 산이 모두 성과 해자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소색이 이에 진희왕晉熙王 유섭劉燮을 받들고 분구湓口진수鎭守하니 소도성이 그 소식을 듣고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정말 내 아들답구나.”라고 하였다.
[] 나라 중서감中書監 원찬袁粲상서령尙書令 유병劉秉이 모의하여 소도성蕭道成을 죽이려 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 상주자사湘州刺史 왕온王蘊심유지沈攸之와 서로 깊이 교분을 맺고 원찬袁粲, 유병劉秉과 몰래 소도성蕭道成을 죽이기를 도모하여 장수將帥 황회黃回복백흥卜伯興注+① 卜伯興은 卜天與의 아들이다. 등과 모두 함께 내통하여 모의를 하였다. 소도성이 처음에 심유지가 군사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원찬에게 갔으나 원찬이 사양하여 만나주지 않자,
통직랑通直郎注+② 通直郎은 通直散騎侍郎이다. 晉 武帝가 員外散騎侍郎을 두었고, 晉 元帝 泰興 2년(319)에 두 사람으로 하여금 散騎侍郎과 같은 인원수로 당직을 서게 하였다. 그러므로 通直散騎侍郎이라고 한 것이다. 원달袁達이 원찬에게 말하기를 “반대하는 태도를 보여서는 마땅치 않습니다.”라고 하니, 원찬이 말하기를 “저 사람이 만약 황제가 어리고 시절이 어려운 것이 계양왕桂陽王(유휴범劉休範) 때와 다르지 않다고 하여注+③ 〈“與桂陽時不異”는〉 桂陽王 劉休範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를 말한다. 나를 위협하여 대성臺省에 들어간다면 무슨 말로 그에게 거절하겠는가. 갑자기 같은 처지에 있다가 반대를 하려고 한들 가능하겠는가.”注+④ 朝(아침)는 본음대로 읽는다. “同止”는 同處(동일한 처지)라는 말과 같으니, 〈“一朝同止 欲異得乎”는〉 하루아침에 蕭道成과 동일한 처지에서 일을 하다가 뒤에 비록 달리 하고자 한들 가능하겠는가 하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소도성이 저연褚淵을 불러 그와 자리를 함께하여 매사를 함께하였다.
褚淵褚淵
당시에 유온劉韞영군장군領軍將軍이 되어 문하성門下省에 들어가 숙직을 하고, 복백흥은 직합直閤이 되었고, 황회 등 여러 장수들은 모두 나가서 신정新亭에 주둔하고 있었다. 저연이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을 떠나서 조정에서 재촉하였으나 관직에 나오지 않았는데, 원찬이 가서 타일러 깨우치자 저연이 그의 말을 따랐다.注+⑤ 敦은 권하는 것이고, 迫은 재촉하는 것이다. 說(달래다)은 輸芮의 切이니, “譬說”은 說諭(말하여 깨우친다)는 의미와 같다.
원찬이 모친상을 당하여 저연이 간절하게 타일러 깨우쳤는데, 원찬이 결국 관직에 나오지 않자, 저연이 이로 말미암아 그를 원망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저연이 소도성에게 말하기를 “서하西夏(형주荊州)의 반란은 필시 성공하지 못할 것이니, 공은 마땅히 먼저 내부를 방비하십시오.”注+⑥ 西夏는 荊州이다. “備其內”는 袁粲 등을 대비하는 것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원찬은 모의가 이미 정해져서 저연에게 알리려고 하였는데, 무리들이 알려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원찬이 말하기를 “저연이 비록 소도성과 친한 사이지만, 어찌 대사大事에 다른 의견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모의를 저연에게 알리자, 저연이 곧장 소도성에게 고하였다.
소도성이 군주軍主 소열蘇烈설연薛淵注+⑦ 薛淵은 薛安都의 조카이다. 등을 보내어 원찬을 도와 석두石頭를 지키게 하니, 설연이 말하기를 “모르겠습니다만, 공께서는 원공袁公과 함께 한 집안이 되려고 하십니까?”라고 하니 소도성이 말하기를 “을 보내는 이유는 일에 임해 마땅한 처사를 다하여 나로 하여금 서쪽을 돌아보는 근심을注+⑧ 〈“西顧之憂”는〉 石頭가 臺城 서쪽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없애기 위함이다. 다만 노력하고 많은 말을 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또 왕경칙을 직합直閤으로 삼아 복백흥과 금병禁兵을 총괄하게 하였다.
[] 원찬袁粲이 태후의 명령을 위조하여 유온劉韞복백흥卜伯興으로 하여금 숙위병宿衛兵을 이끌고 조당朝堂에서 소도성蕭道成을 공격할 계획을 도모하니 황회黃回 등이 부하들을 이끌고 호응을 하였다.
袁粲袁粲
유병劉秉 등이 함께 석두石頭로 갈 적에 본래 밤에 군대를 출동시키자고 약속을 하였는데, 유병이 두렵고 어지러워 어찌할 줄을 몰라 포시晡時가 지나자 즉시 군장을 꾸리고는 온 가족을 데리고 석두로 달아나니, 원찬이 놀라 말하기를 “무슨 일로 급히 온 것이오? 이제 실패하고 말았소.”라고 하였다.
소도성이 그 소식을 듣고 왕경칙王敬則으로 하여금 유온과 복백흥을 죽이게 하고, 소열蘇烈 등은 창성倉城注+① 倉城은 이다. 점거하여 원찬에게 대항하게 하였다. 왕온王蘊이 유병이 달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일이 실패로 끝나겠구나.”라고 하였다.
소도성이 대승정戴僧靜을 보내어 소열 등을 도와 원찬을 공격하게 하니 유병이 성을 넘어 도망치자 원찬이 성벽에서 내려와 그의 아들 원최袁最에게 말하기를 “본래 나무 하나로는 무너지는 큰 집을 지탱할 수 없는 것을 알았지만, 명분과 의리를 가지고 여기까지 왔다.”라고 하였다.
대승정이 성을 넘어 홀로 진격하니 원최가 몸으로 원찬을 호위하였으나 대승정이 곧바로 전진하여 그를 베었다. 원찬이 원최에게 말하기를 “나는 충신의 직분을 잃지 않았고, 너는 효자의 직분을 잃지 않았구나.”라고 하고는 마침내 부자가 함께 죽으니, 백성들이 그들을 애도하며 노래하기를 “가련하구나, 석두성石頭城이여. 차라리 원찬처럼 죽을지언정, 저연褚淵처럼 살지는 않아야 하네.”라고 하였다.
유병 부자도 추격하던 자에게 죽임을 당하니 황회가 결국 감히 군사들을 움직이지 못했다. 원찬은 간소하고 담박하며 평범하고 소박하여 세상을 경륜하는 재주가 없었고, 음주를 좋아하고 시를 읊조리는 것을 좋아하여 몸은 요직要職에 있었으나 일을 맡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았다.
주사主事注+② 主事는 尙書省의 主事이니, 상서성의 諸曹에 각각 主事를 두었다. 매번 와서 자문을 하고 결정할 때에도 어떤 경우에는 소리 높여 읊조리며 그를 대하였고, 한가할 때는 편안히 누워 있어 집에는 잡된 손님이 없었으니, 세상 물정을 접하지 않았기에 패망에 이른 것이다.
[] 배자야裴子野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원경천袁景倩은 백성들의 희망이자 국가의 뛰어난 인재로 중요한 부탁을 받았는데, 지혜는 간사한 자들을 제거하기에는 부족하였고, 임기응변은 변화에 대처하기에 부족하여 쓸쓸히 낙척하여 위태로워도 부지해주지 못하다가
조정의 위엄이 이미 경시되고, 삼재三才가 바뀌려고 할 적에 보잘것없는 작은 성안에 있다가 나와서 만 번을 죽는다 해도 사양하지 않았으니, 필부의 절개를 지켰지만, 동량棟梁의 재주는 갖추지 못했다.”注+① 景倩은 袁粲의 字이다. 三才는 天․地․人을 말한다. “斗城”은 한 말 정도 되는 작은 성을 말한다.
[] 심유지沈攸之영성郢城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 심유지沈攸之하구夏口에 이르러 스스로 군대의 강성함을 믿고 교만한 기색을 지니고 있었는데, 주부主簿 종엄지宗儼之가 심유지에게 영성郢城을 공격하라고 권하자,
공조功曹 장인臧寅이 “영성은 지형이 험준하여 10일 만에 함락 시킬 수 있는 곳이 아니니, 만약 때에 맞춰 출동하지 않으면 예기가 꺾여 위세를 잃게 될 것입니다.注+① 臧寅은 臧燾의 증손이다. 擧는 출동한다는 뜻이다. 지금 물길을 따라 멀리 달려 내려가면 날을 헤아려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근본(건강建康)이 전복되고 나면 영성을 어찌 굳게 지킬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심유지가 일부 군사를 남겨두어 영성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대군大軍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내려가려고 하였다. 유세륭柳世隆이 군대를 보내어 싸움을 걸어와 함부로 꾸짖고 더러운 말로 모욕하니 심유지가 화가 나서 계획을 바꿔 영성을 공격하였다. 유세륭이 형편에 맞게 저항하고 응전하니 심유지가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 나라가 양운장楊運長선성태수宣城太守로 삼았다.
[] 양운장楊運長이 나가서 선성宣城을 지키니, 이때에 태종太宗(유욱劉彧)이 총애한 신하 중에 금성禁省에 있는 자가 없었다.
[] 심약沈約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인군人君남면南面하여 왕 노릇 할 적에 깊숙한 구중궁궐注+① ≪楚辭≫ 〈九辯〉에 “군주의 궁궐 문은 아홉 겹으로 되어 있다.”라고 하였는데, 그 註에 “關門, 遠郊門, 近郊門, 城門, 臯門, 庫門, 雉門, 應門, 路門이다.”이라고 하였다. 속에 있게 되니, 근습近習이 아침저녁으로 모시고 받들어 정리상情理上 조정의 경사卿士들과는 격리되고 궁궐의 사무는 유사有司가 담당한다. 그렇지만 얼마 뒤에 황제의 은총은 근습近習들과 친압한 데에서 생겨나고 믿음은 은총으로 인해 굳어져서 황제가 근습近習에게 두렵게 하는 태도가 없어지고 쉽게注+② 易(쉽다)는 以豉의 切이다. 가까이하는 기색이 있게 된다.
효건孝建태시泰始 연간에는 군주가 위엄을 독단적으로 운용하였는데, 형벌과 정치가 어지럽게 얽혀 있어 〈군주 혼자〉 이치상 〈상황을〉 두루 정통하기 어려워 귀와 눈의 역할이 근습近習에게 돌아갔다. 황제의 기쁨과 노여움을 엿보고 슬픔과 즐거움을 살피는 데 이르러서는 번번이 임금의 마음에 들게 하여 행동거지가 황제의 뜻에 어긋남이 없었으니注+③ 中(들어맞다)은 去聲이다., 임금은 그들이 신분이 미천하고 지위가 낮아 권력에서 중요한 지위를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일찍이 쥐가 존귀한 사당社堂에 의탁하고 여우가 호랑이의 위엄에 의지한다는 사실을 몰랐으니注+④ 漢나라 中山靖王 劉勝이 말하기를 “社에 사는 쥐는 불을 질러 잡을 수 없다는 것은 의탁한 곳이 그렇기 때문이다.” 하였다. 藉(의지하다)는 慈夜의 切이다. 楚나라 江乙이 말하기를 “호랑이가 짐승들을 다 잡아먹고 또 여우를 잡아먹으려 하자, 여우가 말하기를, ‘그대는 나를 잡아먹지 못한다. 天帝가 나로 하여금 짐승들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게 하였다. 내 말을 못 믿겠으면 내가 그대를 위하여 앞서 갈 테니, 그대가 내 뒤를 따르라. 짐승들이 나를 보고 감히 달아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호랑이가 그 말을 믿고 마침내 따라가보니, 과연 짐승들이 바라보고 모두 달아났는데, 호랑이는 짐승들이 자기를 두려워해서 모두 달아난 줄은 모르고 여우를 두려워한 것이라 생각하였다.” 하였다., 겉으로는 군주를 핍박하는 혐의가 없었으나, 안으로는 전횡하는 일을 있어서 권세가 천하를 전복시켰는데도 미처 깨닫지 못하였다.
태종太宗(유욱劉彧) 만년에 이르러 국가의 성쇠盛衰를 겪으면서 권세와 총애를 받은 근습近習의 무리들이 종척宗戚을 두려워하고注+⑤ 慴은 質涉의 切이니, 두려워한다는 뜻이다. 꺼려서 어린 군주로 하여금 외롭게 서 있게 하여 영원히 국가의 권력을 훔쳐 분열을 조장하고 재앙의 단서를 일으켜 세워서 황제의 동생들과 종실의 제후왕들이 서로 계속해서 죽이게 하였다. 실로 나라의 국운이 일찍 기울어진 것은 실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 북위北魏가로葭蘆를 함락하여 양문도楊文度의 목을 베고 그의 아우 양문홍楊文弘무도왕武都王으로 삼았다.
[] 나라 소도성蕭道成황월黃鉞을 빌려 나가서 신정新亭에 주둔하였다.
[] 소도성蕭道成참군參軍 강엄江淹에게 말하기를 “천하가 어지러우니,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하니, 강엄이 말하기를 “성공과 패배는 덕에 달려 있는 것이지, 군대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은 영웅다운 무공에다 기이한 지략을 소유하였고, 관용을 베풀고 인자하며, 현명하고 능력 있는 자들이 힘을 다하고, 백성들의 바람이 귀의하며, 천자를 받들어 역적을 정벌하니 이것이 다섯 가지 승리의 요인입니다.
저들은 뜻은 예리하나 국량이 작고, 위엄은 있으나 은혜가 없으며, 사졸들은 몸과 마음이 떠났고, 관리들은 지지하지 않으며, 외로운 군대가 적진에 깊이 들어가 수천 리 떨어져 있는데도 함께 악을 행하여 서로 돕는 일이 없으니, 이것이 다섯 가지 패배요인입니다. 비록 10만의 용맹한 군사가 있더라도 끝내는 필시 우리에게 사로잡힐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행남서주사行南徐州事 유선명劉善明이 소도성에게 말하기를 “심유지沈攸之가 난리를 일으킬 마음을 품은 지 지금 십 년째입니다. 성품이 음험하고 조급하며 자질이 신중하지 못하여 반역을 일으킨 지 수십 일이 지났는데도 지체하며 전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군사에 관한 일에 어둡고, 둘째는 인심이 떠나고 원망하며, 셋째는 팔뚝을 잡아끄는 걱정이 있고注+① 掣는 尺制의 切이니, 끌어당김이다. 肘는 陟柳의 切이니, 팔의 관절이다. “掣肘”는 張敬兒 등이 그 후미를 습격할까 우려함을 말한 것이다., 넷째는 하늘이 그의 혼백을 빼앗았기 때문입니다.
본래 그의 용감하고 날랜 군사들이 신속하게 와서 미처 대비하지 못한 우리를 습격하여 한 차례 전쟁에서 승패가 결정되리라 염려했었는데, 지금은 육수六帥가 일제히 분발하고 제후들이 함께 일어나고 있으니, 심유지는 새장 속에 갇힌 새와 같은 처지일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역주
역주1 宋中領軍……自爲司空錄尙書事 : “宋나라 劉昱의 죄는 桀보다 더하였으니, 여러 소인들이 틈을 엿보다가 이어서 그를 죽였는데, 도리어 蕭道成에게 죄를 돌린 것은 어째서인가. 大臣이 국가를 담당하고 어린 임금이 혼몽하여 광기를 부릴 적에 자신의 능력을 다하여 忠貞의 절개를 바쳐야 하고, 반드시 보필할 수 없으면 이어서 죽어야 한다. 만일 임금의 악행을 양성하여 이에 따라 죽음에 빠뜨리고 또 그것에 의해 이익을 추구하면 뜻이 찬탈에 있는 것뿐이니, 이를 버리고 누구를 허물하겠는가. 혹자가 말하기를 宋나라 劉昱의 악행은 劉子業과 같은데 어찌하여 저 사람에게는 ‘國’으로 기록해주었는가 하는데, 유자업의 흉악한 광기는 권력이 자기에게서 나오고 여러 王들이 오래도록 묶여 있어서 朝廷에 딱히 주관할 자가 없고 권력을 잡은 대신이 없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때에 湘東王(劉彧)이 계통을 계승했는데 또한 죽음에서 벗어난 뒤에 우연한 연고 帝位를로 얻은 것이지 逆心을 품은 소도성과 같은 이에게 견줄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죄로 돌릴 것이 없었는데, 하물며 楊玉夫가 은밀하게 소도성의 지시를 받들었으니, 또 賈充과 앞장서서 도모하여 成濟(魏나라 太子舍人으로 임금인 高貴鄕公을 칼로 찔러 죽인 사람)가 칼을 빼어 임금을 벤 것과 다르니, 司馬昭도 오히려 죄책을 받음을 면하지 못하였는데 소도성에게 무슨 말을 하겠는가. 옛적에 趙盾이 망명하다가 국경을 넘지 않은 상태에서 되돌아와 역적을 토벌하지 않은 이유로 자신이 큰 악행을 저질렀다는 말을 들었다. 지금 소도성이 양옥부 등에게 토벌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 따라서 상으로 작위까지 주었으니 죄가 더욱 분명하다. 만약 骲箭(뼈로 만든 화살촉을 쓰는 화살)을 쏜 일로 소도성 역시 죽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압박을 받았다고 한다면 鉏麑(조돈을 죽이려다가 자살한 사람)의 해침과 개를 시켜 〈조돈을 죽이려 한〉 난리에 ≪春秋≫에서는 어찌 이것으로 조돈을 용서하지 않았는가. 이것은 ≪資治通鑑綱目≫에서 宋나라 유욱과 유자업의 시해에 대하여 각각 그 기록을 달리한 것이니, 진실로 湘東王에게 후하게 하고 소도성에게 박하게 한 것이 아니라 또한 각각 그 실상을 추구하였을 뿐이니, 보는 이들은 이를 생각해보아야 한다.[宋昱罪浮于桀 群小伺間 因而斃之 乃歸獄道成 何耶 大臣當國 幼主昏狂 竭股肱之力 効忠貞之節 必不可輔 則繼之以死爾 若養成其惡 從而殞之 又因以爲利 則志在簒奪而已 捨是將誰咎哉 或者謂宋昱之惡 與子業等 何爲彼以國書 殊不知子業凶狂 權出諸己 諸王久在幽縶 朝廷莫適爲主 非有用事大臣 足任其責也 于時湘東繼統 亦得於脫死之餘 偶然之故 非有異志如道成之比 是以無所歸獄 況楊玉夫密奉道成指授 又與賈充唱謀 成濟抽刀者不同 司馬昭猶不能免 道成 何詞乎 昔趙盾(돈)以亡不越境 反不討賊之故 躬受大惡之名 今道成於玉夫輩 不惟不能討 又從而爵賞之 罪益明矣 若以骲箭之事 謂道成亦迫於畏死 則鉏麑之賊 嗾犬之難 春秋何不以是而恕盾乎 此綱目於宋昱子業之弑 所以各異其書者 固非厚於湘東 而薄於道成 亦各原其實而已爾 觀者試思之]” ≪發明≫
역주2 伊尹과……일 : 伊尹과 霍光은 각기 商나라 太甲과 前漢 昌邑王 劉賀를 제왕의 지위에서 내쫓고 권력을 잡고서 다스리다가 태갑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자 이윤이 태갑을 맞이하여 복위시켰고, 곽광은 戾太子의 손자인 漢 宣帝를 즉위시켰다.
역주3 (浦)[滿] : 저본에는 ‘浦’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滿’으로 바로잡았다.
역주4 (乃)[板] : 저본에는 ‘乃’로 되어 있으나, 思政殿訓義 ≪資治通鑑綱目≫(奎7512)에 의거하여 ‘板’으로 바로잡았다.
역주5 流品 : 벼슬에 대해 매겨놓은 품계를 말하거나 또는 門地의 높고 낮음을 이르는 말로 쓰였다. 여기서는 문지의 높낮이를 말한 것으로 신분의 구분을 말한 것이다.
역주6 宋封楊玉夫等二十五人爵有差 : “楊玉夫는 어떠한 사람인가. 弑逆을 행한 사람이다. 定策(천자를 세우는 일)의 공로로 책봉된 사람 몇 명을 기록한 것은 있으나, 시역을 행하여 작위를 책봉 받은 자를 기록한 것은 아직 없었다. 시역을 행한 자를 드러내어 책봉한 것이 25인에 이르렀으니 天理가 사라진 것이다. 기록하여 슬퍼한 것이다.[玉夫 何 行弑者也 書封定策功若干人有之矣 未有行弑而書封爵者也 行弑者而顯封之 至二十五人 天理滅矣 書悲之也]” ≪書法≫
역주7 魏殺其徐州刺史李訢 : “李訢은 남을 증명하여 자신이 화를 면했으니 小人인데, ‘殺(죽였다)’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죽인 것이 해당하는 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李敷의 죽음에 太后(馮太后)가 일찍이 이 때문에 임금(太上 拓跋弘)을 시해하였는데, 이때에 또 이흔을 죽였으니 太后의 악행이라고 여겼으므로 특별히 ‘殺’이라고 기록한 것이다.[訢證人以自免 小人也 其書殺 何 殺之不以其罪也 李敷之死 太后嘗以此弑其君矣 於是又殺訢焉 以爲太后之惡也 故特書殺]” ≪書法≫
역주8 제가 공에게……못하겠습니까 : 李訢이 相州刺史가 되어 뇌물을 받았다가 어떤 사람에게 고발을 당하자, 李敷가 허물을 덮어준 일이 있었는데, 이흔이 죽을 위기에 처하자 이부 형제의 陰事를 고발하여 사형을 면한 일이 丙辰年(476)에 보인다.
역주9 (𢶏)[檦] : 저본에는 ‘𢶏’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檦’로 바로잡았다. 아래도 같다.
역주10 내가……것이다 : 王淩은 삼국시대 魏나라 사람으로 당시 임금인 曹芳을 폐위시키고 曹彪를 세우려다가 司馬懿에게 죽임을 당했고, 賈充 역시 魏나라 사람으로, 司馬昭에게 벼슬하였는데, 당시 임금 高貴鄕公(曹髦)이 검을 뽑아 사마소를 죽이고자 하자 가충이 成濟를 시켜 고귀향공을 죽이게 하였다.
역주11 宋中書監袁粲……不克而死 : “沈攸之는 군사가 무너져 성공하지 못했고 袁粲은 모의가 누설되어 이기지 못했으니, 이들은 모두 역적을 토벌할 책임을 맡기기에 부족한 자들이다. 그러나 ≪資治通鑑綱目≫에서 ‘擧兵(군사를 일으켰다)’이라고 기록하고, ‘討(토벌했다)’라고 기록하고, ‘謀誅’라고 기록하고, ‘不克而死’라고 기록한 것은 모두 인정해준 말이니, 겨우 擧義할 수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서 成敗로 인해 생략하지 않은 것이다.[沈攸之衆潰無成 袁粲謀泄不克 是皆不足任討賊之責 然綱目書擧兵 書討 書謀誅 書不克而死 皆予之之詞者 幸其僅能擧義 不以成敗之故而略之也]” ≪發明≫
역주12 石頭倉城 : ≪資治通鑑新註≫(陝西人民出版社, 1998)에는 군량을 보관한 城樓라고 하였다. ≪景定建康志≫에는 石頭城 내에 있는 성으로 보았다. 또한 石頭倉의 명칭을 ≪晉書≫ 〈沈瑀傳〉 등을 통해 石頭山의 官倉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역주13 (善)[喜] : 저본에는 ‘善’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喜’로 바로잡았다.

자치통감강목(18)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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