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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4)

자치통감강목(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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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강목(1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起戊戌晉成帝咸康四年하여 盡己未晉穆帝升平三年하니 凡二十二年이라
四年이라
趙建武四年이라
◯成改號漢하니 中宗李壽漢興元年이라
◯代髙祖什翼犍建國元年이라
◯舊大國一이요 漢, 涼小國二 新小國一이니 凡四僭國이라
趙王虎 燕王皝 合兵攻段氏하여 破之하니 虎拔令支하고 悉取其地하다
趙王虎擊段遼할새 使桃豹等으로 將舟師十萬하고 出漂하고 支雄等 帥步騎七萬하고 爲前鋒注+水經曰 “淸河東北過漂渝邑, 入于海.” 註云 “漂楡故城, 俗謂之角飛城. 趙記云 ‘石勒使王述煮鹽于角飛.’ 魏土地記曰 ‘勃海郡高城縣東北一百里, 北盡漂渝, 東臨巨海, 民咸煮鹽爲業.’”하다
燕王皝 引兵하고 攻掠令支以北하니 段遼將追之注+令, 音鈴, 又郞定切. 令支縣, 漢屬遼西, 故孤竹君之國, 晉省. 段氏據之, 爲國都.어늘
慕容翰曰 今趙兵在南하니 當幷力禦之어늘 而更共燕闘라가 萬一失利하면 何以禦南敵乎잇가
段蘭怒曰 吾前爲卿所誤하여 以成今日之患하니 今不復墮卿計中矣리라하고 乃悉衆追之한대 設伏邀擊하여 大破之하고 掠五千户而歸하다
虎進屯金臺注+按水經註 “金臺, 在涿郡故安縣, 有金臺陂, 臺在陂北十餘步.” 卽燕昭王築以事郭隗之臺.하고 支雄 長驅入薊하니 遼所署漁陽, 上谷, 代郡守相 皆降이라 取四十餘城하다
北平相陽裕 帥數千家하고 登燕山以自固注+裕, 耽之兄子也. 五代志 “北平無終縣有燕山.”어늘 諸將 恐其爲後患하여 欲攻之한대
虎曰 裕 儒生이라 矜惜名節하여 恥於迎降耳 無能爲也라하고 遂過之하여 至徐無注+徐無縣, 屬北平郡.하니 遼不敢復戰하여 棄令支하고 奔密雲山하고 慕容翰 奔宇文氏注+密雲山, 在漢平岡縣界.하다
虎入令支宫하여 徙二萬餘户於司, 雍, 兗, 豫四州注+段氏都令支, 以其所居爲宮.하고 士大夫之有才行者 皆擢敍之하니 陽裕詣軍門降하다
夏四月 成李壽弑其主期而自立하여 改國號漢하다
成主期驕虐日甚하여 多所誅殺하니 大臣 多不自安하고
尤忌漢王壽威名하여 使出屯涪하니 壽懼不免하여 毎當入朝 常詐爲邊書하여 辭以警急이러라
巴西處士龔壯父叔 皆爲李特所殺注+父․叔, 父及叔父也.하니 欲報仇하여 積年不除喪이러라 壽數以禮辟之하니 不應而往見壽어늘
壽問自安之策한대 壯曰 蜀民 本皆晉臣이니 節下若能發兵하여 西取成都하고 稱藩於晉이면 則福流子孫하고 名垂不朽리니 豈徒脱今日之禍而已注+魏․晉以來, 持節․假節出當方面者, 人皆稱之爲節下.리오
壽然之하여 遂襲成都하니 壽世子勢 爲翊軍校尉 開門納之하니 遂克成都하여 屯兵宫門하고 奏殺大臣數人하고 縱兵大掠이라가 數日乃定하다
矯太后任氏令하여 廢期爲縣公하고 幽之하니 期縊而卒하다
羅恒, 解思明等 勸壽如壯策한대 壽用任調等言하여 遂自稱帝하고 改國號曰漢이라하고 尊父驤帝號하고 更以舊廟 爲大成廟注+舊廟, 祀李特․李雄者也, 雄建國號曰成, 壽改曰漢. 故以特․雄廟爲大成廟.하다
竟盡殺成主雄諸子하고 以安車束帛으로 徵龔壯爲太師한대 誓不仕하고 贈遺 一無所受러라
五月 趙王虎擊燕이라가 不克하니 燕慕容恪 追撃하여 大敗之하다
趙王虎以燕不會攻段遼하고 而自専其利라하여 伐之하고 又遣使四出하여 招誘民夷하여 得三十六城하고 遂進逼棘城하니 欲出亡이어늘
帳下將慕輿根 諫曰 趙彊我弱하니 大王 一舉足이면 則趙之氣勢遂成하여 不可復敵矣리이다
今固守堅城이면 其勢百倍 事之不濟 不失於走 奈何望風委去하여 爲必亡之理乎잇가 乃止 然猶懼形於色이러라
玄菟太守劉佩曰 事之安危 繋於一人하니 大王 當自彊以厲將士 不宜示弱이니이다
事急矣 請出擊之하리니 縱無大捷이나 足以安衆이라하고 乃將敢死數百騎하고 出衝趙兵하여 所向披靡하여 斬獲而還하니
於是 士氣自倍 皝意乃安이러라
根等 晝夜力戰하여 凡十餘日 趙兵 不能克而退어늘 遣其子恪하여 帥二千騎하고 追擊之하니
趙兵 大敗하여 斬獲三萬餘級이라 諸軍皆潰하고 惟游撃將軍石閔一軍 獨全이러라
本姓冉이니 虎養以爲子하니 驍勇善戰하고 多策略이라 虎愛之 比諸孫이러라
虎還鄴 蒲洪 以功拜都督六夷諸軍事하다
言於虎曰 洪 雄儁하여士死力하고 諸子皆有非常之才하며 且握彊兵하여 據近畿하니 宜密除之하여 以安社稷注+近畿, 謂洪屯枋頭, 距鄴爲近.이니이다
虎曰 吾方倚其父子하여 以取呉, 蜀하니 奈何殺之리오하고 待之愈厚러라
分兵討諸叛城하여 皆下之하여 誅滅甚衆이라
虎遣曹伏하여 將青州之衆하여 戍海島하고 運糧三百萬斛하여 以給之注+韋昭曰 “海中山有依止曰島. 今海州東海縣, 有島山, 去岸八十里.”하며
又以船三百艘 運榖詣髙句麗하고 使王典으로 帥衆萬餘하여 屯田海濵하고
又令青州 造船千艘하여 謀復擊燕하다
趙冀州大蝗하다
趙冀州八郡이어늘 司隷請坐守宰注+趙都鄴, 以冀州爲司部.한대
趙王虎曰 此朕失政所致어늘 而欲委咎守宰하니 豈罪己之意邪 司隷不進讜言하여 佐朕不逮하고 而欲妄陷無辜하니 可白衣領職注+黜其品秩, 同於民庶, 而仍領司隷之職.하라
以司徒導爲太傅都督中外諸軍事하고 郗鑒爲太尉하고 庾亮爲司空이러니
六月 更以導爲丞相하고 罷司徒官하다
導性寛厚하여 委任諸將趙胤, 賈寧等하여 多不奉法하니 大臣 患之 與鑒牋曰
主上 自八九歲 以及成人 入則在宫人之手하고 出則唯武官, 小人이라 讀書 無從受音句하고 顧問 未嘗遇君子하니
秦政 欲愚其黔首 天下猶知不可어든 況欲愚其主哉注+秦始皇名政.
人主春秋旣盛이어늘 不稽首歸政하고 甫居師傅之尊하여 多養無頼之士注+甫, 方也, 始也.하니 公與下官 竝荷託付하여 大姦不掃하면 何以見先帝於地下乎아하고
欲共起兵廢導로되 不聽이러라
勸導密爲之備한대 導曰 吾與元規으로 休戚是同이라 悠悠之談 宜絶智者之口注+悠悠, 多也. 言智者之口, 不宜亦傳道悠悠之談. 則如君言이면 吾便角巾還第리니 復何懼哉
孫盛 諫亮曰注+盛, 楚之孫也. 王公 常有世外之懐하니 豈肯爲凡人事耶注+常有世外之懷, 言導心常欲謝事, 優游於人世之外.잇가 此必佞邪之徒 欲間内外耳라하니 乃止하다
是時 雖居外鎮이나 而遥執朝權하고 旣據上流하여 擁彊兵하니 趣勢者多歸之
導内不能平하여 嘗遇西風塵起하여 舉扇自蔽하고 徐曰 元規塵汚人이라하니라
◯導以李充爲掾하다 充以時俗 崇尚浮虛라하여 嘗以爲
老子絶仁棄義 蓋患乎情仁義者寡而利仁義者衆耳어늘 而凡人 見形逐迹하여 離本逾遠이라하여 乃作學箴하여 以祛其蔽注+離, 力智切. 箴, 音針, 也. 祛, 丘居切, 却也.하니
名之攸彰 道之攸廢 乃損所隆하고 乃崇所替 非仁이면 無以長物이요 非義 無以齊恥注+長, 展兩切. 仁義 固不可遠이니 去其害仁義者而已注+遠, 于願切.니라
霖雨하다
蜀中 久雨하니 百姓 饑疫이라 漢主壽命群臣하여 極言得失한대 龔壯 上封事曰
陛下起兵之初 上指星辰하고 昭告天地하여 㰱血盟衆하고 舉國稱藩注+謂將稱藩于晉也.하시니 天應人悦하여 大功克集이러니 而論者未諭하여 權宜稱制注+謂壽卽皇帝位也.하니이다
今淫雨百日 饑疫竝臻하니 天其或者將以監示陛下故也 愚謂宜遵前盟하여 推奉建康이면 彼必不愛髙爵重位하여 以報大功이요
雖降階一等이라도 而子孫無窮하여 永保福祚하시리니 不亦休哉注+降階一等, 謂王降皇帝一等.잇가
壽省書内慙하여 秘而不宣하다
冬十月 하다
顔含 以老遜位하다 論者 以王導 帝之師傅 百僚宜爲降禮注+爲, 去聲, 下同. 降禮, 謂拜之.라하니
太常馮懐 以問含한대 含曰 王公 雖貴重이나 禮無偏敬注+臣子惟拜君父, 施之於導, 則爲偏敬. 偏, 不正也.이니 降禮之言 或是諸君事宜 鄙人 老矣하여 不識時務로라
旣而告人曰 吾聞伐國 不問仁人注+董仲舒曰 “昔者魯君問柳下惠 ‘吾欲伐齊, 何如?’ 柳下惠曰 ‘不可.’ 歸而有憂色, 曰 ‘吾聞伐國, 不問仁人. 此言何爲至於我哉.’”이라하니 馮祖思問佞於我하니 我豈有邪德乎注+祖思, 懷字.
郭璞 嘗欲爲之筮한대 含曰 年在天이요 位在人하니 修己而天不與者 命也 守道而人不知者 性也 自有性命하니 無勞蓍龜하라하다
致仕二十餘年 年九十三而卒하다
代王翳槐卒하니 弟什翼犍하다
代王翳槐之弟什翼犍 質於趙 翳槐疾病 命諸大人立之러니
翳槐卒 諸大人 以什翼犍在遠하여 來未可必이라하다 謀立次弟孤한대
孤不可라하고 自詣鄴하여 迎什翼犍하고 請身留爲質이어늘 趙王虎義而俱遣之하니 什翼犍 即位於繁畤北하고 分國之半하여 以與孤注+繁畤縣, 屬雁門郡.하다
代自猗盧卒 國多内難하여 部落離散이러니 什翼犍 雄勇有智略하여 能修祖業하여 始置百官하여 分掌衆務하고
以代人燕鳳爲長史하고 許謙爲郞中令하고 制反逆, 殺人, 姦盗之法하여 號令明白하고 政事淸簡하여 無繋訊連逮之煩하니 百姓 安之
於是 東自濊貉으로 西及破落那하고 南距陰山하고 北盡沙漠 率皆歸服하여 有衆數十萬人注+新唐書西域傳曰 “寧遠者, 本拔汗那. 或曰 ‘潑汗, 元魏時, 謂之破落那.’ 去長安八千里. 居西鞬城, 在眞珠河之北.”이러라
段遼 自密雲山으로 遣使求迎于趙러니 旣而中悔하여 復遣使于燕하다
趙王虎遣麻秋하여 帥衆迎之할새 勅秋曰 受降 如受敵하니 不可輕也니라
燕王皝 亦自將迎遼하니 遼密與燕으로 謀覆趙軍하다
遣恪하여 伏精騎於密雲山이라가 大敗秋兵하여 獲其司馬陽裕하고 盡得遼衆하다
待遼以上賓之禮하고 以裕爲郞中令이러니 久之 遼謀反이어늘 斬之하다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제20권은 무술년戊戌年 나라 성제成帝 함강咸康 4년(338)부터 기미년己未年 나라 목제穆帝 승평升平 3년(359)까지이니, 모두 22년이다.
[] 나라(동진東晉) 현종顯宗 성황제成皇帝 함강咸康 4년이다.
[] 나라(후조後趙) 태조太祖 석호石虎 건무建武 4년이다.
나라(성한成漢)가 국호國號나라로 바꾸니, 중종中宗 이수李壽 한흥漢興 원년이다.
나라 고조髙祖 탁발십익건拓跋什翼犍 건국建國 원년이다.
옛날의 큰 나라(후조後趙)가 하나이고 작은 나라가 나라(성한成漢)와 나라(전량前涼) 둘이고 새로운 작은 나라(나라)가 하나이니, 합하여 참국僭國이 넷이다.
[] 봄에 조왕趙王 석호石虎연왕燕王 모용황慕容皝이 군대를 연합하여 단씨段氏를 공격해서 격파하니, 석호가 영지令支를 함락하고 그 땅을 모두 점령하였다.
[] 조왕趙王 석호石虎단료段遼를 공격할 적에 도표桃豹 등으로 하여금 수군 10만을 거느리고서 표유진漂渝津에서注+① ≪水經≫에 “淸河가 동북쪽으로 漂渝邑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는데, 註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漂渝의 옛 성을 세속에서는 角飛城이라 하는데, 에 ‘石勒이 王述로 하여금 角飛에서 소금을 굽게 했다.’ 하였고, 에 이르기를 ‘勃海郡 高城縣은 동북쪽으로 1백 리이다. 북쪽으로는 漂楡 끝까지이고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임하였는데, 이곳 백성들은 모두 소금을 굽는 것으로 생업을 삼는다.’ 하였다.” 출발하게 하고, 지웅支雄 등은 보병과 기병 7만을 거느리고 선봉을 맡게 하였다.
연왕燕王 모용황慕容皝이 군대를 이끌고 영지令支注+② 令은 음이 鈴이고, 또 郞定의 切이다. 令支縣은 漢나라 때에는 遼西郡에 속하였다. 옛 孤竹君의 나라인데 晉나라 때에 없앴다. 段氏가 이곳을 점거하고서 國都로 삼았다. 이북을 공격하여 노략질하니, 단요가 장차 그를 추격하려 하였다.
모용한慕容翰이 말하기를 “지금 나라(후조後趙) 군대가 남쪽에 있으니 마땅히 힘을 합하여 막아야 하는데, 다시 나라(전연前燕)와 싸우다가 만일 승리하지 못하면 어떻게 남쪽의 적을 막겠습니까.” 하였다.
단란段蘭이 노하여 말하기를 “내가 예전에 때문에 잘못되어서 오늘의 우환을 이루었으니, 지금 다시 경의 계략에 빠지지 않겠다.” 하고는 마침내 병력을 모두 동원하여 추격하였는데, 모용황이 매복埋伏을 설치하여 요격邀擊해서 크게 격파하고 5천 를 노략질하고서 돌아갔다.
[] 석호石虎가 전진하여 금대金臺注+① ≪水經註≫를 살펴보건대 “金臺는 涿郡의 故安縣에 있는데 金臺陂가 있다. 금대는 금대피 북쪽 10여 보 지점에 있다.” 하니, 금대는 바로 燕나라 昭王이 건축하여 郭隗를 섬기던 臺이다. 주둔하고 지웅支雄이 승승장구하여 (계) 지역으로 쳐들어가니, 단료段遼가 임명한 어양漁陽, 상곡上谷, 대군代郡태수太守들이 모두 항복하였다. 이에 40여 성을 점령하였다.
단요의 북평상北平相양유陽裕가 수천의 가호家戶를 거느리고 연산燕山에 올라가 몸소 굳게 지키자,注+② 陽裕는 陽耽의 형의 아들이다. 에 “北平의 無終縣에 燕山이 있다.” 하였다. 제장諸將들은 그가 후환이 될까 염려하여 공격하고자 하였다.
석호가 말하기를 “양유는 유생儒生이라서 명예를 소중히 여기고 절개를 아껴 우리를 맞이해서 항복하는 것을 부끄러워할 뿐이니, 능히 무슨 일을 하지 못한다.” 하고는 마침내 그대로 지나가 서무徐無注+③ 徐無縣은 北平郡에 속하였다. 이르자, 단료가 감히 다시 싸우지 못하여 영지令支를 포기하고 밀운산密雲山으로注+④ 密雲山은 漢나라 平岡縣 경계에 있다. 달아났으며 모용한慕容翰우문씨宇文氏에게로 달아났다.
석호가 영지의 으로注+⑤ 段氏가 令支에 도읍하고 사는 곳을 宮으로 삼았다. 들어가 2만여 사주司州, 옹주雍州, 연주兗州, 예주豫州로 옮기고 사대부 중에 재주와 훌륭한 행실이 있는 자를 모두 발탁하여 등용하니, 양유가 군문軍門에 나와 항복하였다.
[] 여름 4월에 나라(성한成漢) 이수李壽가 그의 군주 이기李期를 시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여 국호를 으로 고쳤다.
[] 성주成主 이기李期가 교만하고 포악함이 날로 심하여 많은 사람을 주살誅殺하니, 대신들이 대부분 안절부절못하였다.
이기는 한왕漢王 이수李壽의 위엄과 명성을 더욱더 시기하여 그로 하여금 부성涪城(부성)에 나가 주둔하게 하니, 이수가 화를 면치 못할까 두려워하여 들어가 조회할 때가 되면 매번 거짓으로 변방에서 보내온 글을 만들어 급한 경보가 있다는 핑계를 대고 〈조회하지 않았다.〉
[] 처음에 파서巴西처사處士 공장龔壯의 아버지와 숙부가注+① 父․叔은 아버지와 숙부이다. 모두 이특李特에게 살해당하자, 공장은 원수를 갚고자 하여 여러 해 동안 상복을 벗지 않았다. 이수李壽가 여러 번 예를 갖추어 그를 벽소辟召하자, 공장은 이에 응하지 않았으나 이수를 찾아가 만나보았다.
이수가 스스로 몸을 편안히 할 계책을 묻자, 공장이 말하기를 “ 지역의 백성들은 모두 본래 나라의 신하였습니다. 절하節下注+② 魏․晉 이래로 持節과 假節을 가지고 나가 方面을 맡은 자들을 사람들이 모두 節下라 칭하였다. 만약 능히 군대를 출동하여 서쪽으로 성도成都를 점령하고 나라에 번신藩臣을 칭하면 이 자손들에게 미치고 이름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니, 어찌 오늘날의 화를 벗어나는 것에서 그치겠습니까.” 하였다.
이수가 그 말을 옳게 여겨 마침내 성도를 기습하니, 이수의 세자世子이세李勢익군교위翊軍校尉였으므로 성문을 열고 받아들였다. 마침내 성도를 함락하고 군대를 궁문宫門에 주둔시키고서 태후太后에게 아뢰어 대신大臣 몇 명을 죽이고 군대를 풀어 크게 노략질하다가, 며칠 만에 비로소 안정되었다.
태후 임씨任氏의 명령을 사칭하여 이기李期를 폐하여 현공縣公으로 삼고 깊숙이 가두어두니, 이기가 목을 매어 하였다.
[] 나항羅恒해사명解思明 등이 이수李壽에게 공장龔壯의 계책대로 할 것을 권하였으나, 이수는 임조任調 등의 말을 따라 마침내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고쳐 이라 하였다. 그리고 아버지 이양李驤에게 제호帝號(헌황제獻皇帝)로 추존하고 다시 옛 사당을 대성묘大成廟注+① 옛 사당은 李特과 李雄을 제사하는 곳이다. 이웅이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成이라 하였는데, 이수가 漢으로 고쳤으므로 이특과 이웅의 사당을 大成廟라 한 것이다. 하였다.
뒤에 성주成主 이웅李雄의 아들들을 모두 죽이고 안거安車속백束帛을 예물로 보내어 공장을 징소徵召하여 태사太師를 삼았으나, 공장은 벼슬하지 않기로 맹세하고 보내온 선물을 하나도 받지 않았다.
[] 5월에 조왕趙王 석호石虎나라(전연前燕)를 공격하였다가 이기지 못하자, 나라 모용각慕容恪이 추격하여 크게 물리쳤다.
[] 조왕趙王 석호石虎나라가 나라(후조後趙)와 연합하여 단료段遼를 공격하지 않고 스스로 그 이익을 독점했다 해서 나라를 공격하였다. 또 사자使者를 보내어 사방으로 내보내어 나라의 백성들과 오랑캐를 불러 유인해서 나라의 36개 성을 얻고 마침내 전진하여 극성棘城을 압박하니, 모용황慕容皝이 나라 밖으로 도망하고자 하였다.
장하帳下의 장수 모여근慕輿根이 간하기를 “나라는 강하고 우리는 약하니, 대왕이 한 번 발을 떼었다 하면 나라의 강한 기세가 마침내 이루어져서 다시는 나라를 대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견고한 성을 굳게 지키면 우리의 형세가 100배는 더 커질 것이니,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그때 달아나도 늦지 않습니다. 어찌하여 소문만 듣고 나라를 버리고 떠나가서 반드시 망할 이치를 만드십니까.” 하니, 모용황이 마침내 중지하였으나 오히려 두려움이 얼굴빛에 드러났다.
현토태수玄菟太守 유패劉佩가 말하기를 “일의 편안하고 위태로움은 군주 한 사람에게 달려 있으니, 대왕은 마땅히 자신을 강하게 하여 장병들을 격려해야 하고 약함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사세가 급박하게 되었습니다. 신은 청컨대 나가 공격할 것이니, 비록 대승을 거두지는 못하더라도 여러 사람의 마음을 충분히 안정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는 마침내 죽기를 각오한 수백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나가 나라 군영으로 돌진하니, 향하는 곳마다 적군을 쓰러트려서 참수하거나 사로잡아 돌아왔다.
이에 나라 군대의 사기가 저절로 배가되었고, 비로소 모용황의 마음이 편안해졌다.
[] 모여근慕輿根 등이 밤낮으로 힘써 싸우자, 10여 일 만에 나라 군대가 이기지 못하고 후퇴하였다. 모용황慕容皝이 그의 아들 모용각慕容恪을 보내어 2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게 하니,
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여 3만여 수급首級을 참수하거나 사로잡았다. 나라의 여러 군대가 모두 무너지고 오직 유격장군游撃將軍 석민石閔의 한 군대만 홀로 온전하였다.
석민은 본성本姓이니 석호石虎가 길러 양자로 삼았는데, 날래고 용맹하여 전투를 잘하였으며, 책략策略이 많았다. 이에 석호가 여러 손자처럼 그를 사랑하였다.
[] 석호石虎업성鄴城으로 돌아가자, 포홍蒲洪으로 도독육이제군사都督六夷諸軍事에 제수되었다.
석민石閔이 석호에게 말하기를 “포홍은 영웅호걸로서 장병將兵들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게 하였고, 그의 여러 아들이 모두 비상한 재주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강한 군대를 보유하여 근기近畿 지방을注+① 近畿는 蒲洪이 枋頭에 주둔하여, 鄴城과 거리가 가까운 것을 말한 것이다. 점거하고 있으니, 마땅히 은밀히 제거해서 사직社稷을 편안히 해야 합니다.” 하였다.
석호가 말하기를 “내가 막 그 부자父子에게 의지하여 (동진東晉)와 (성한成漢)을 점령하려 하는데, 어찌 그를 죽이겠는가.” 하고는 더욱더 후대하였다.
[] 모용황慕容皝이 군대를 나누어 여러 배반한 성을 토벌해서 모두 함락시켰는데, 죽여 없앤 사람이 매우 많았다.
석호石虎조복曹伏을 보내어 청주青州의 병력을 거느려 해도海島注+① 韋昭가 말하기를 “바다 가운데 있는 산중에 의지하여 살 수 있는 곳을 島라 한다. 지금 海州 東海縣에 島山이 있는데 海岸에서 80리 떨어져 있다.” 하였다. 주둔시키고 군량 3백만 을 운반하여 그에게 주었다.
또 배 3백 척으로 곡식을 운반하여 고구려高句麗에 보내고 왕전王典으로 하여금 군대 1만여 명을 거느리고서 바닷가에서 둔전屯田을 경작하게 하였다.
청주青州에 명하여 배 1천 척을 건조하여 다시 나라(전연前燕)를 공격할 것을 도모하였다.
[] 나라(후조後趙) 기주冀州 지방에 큰 황충蝗蟲의 재해가 크게 발생하였다.
[] 나라 기주冀州 지방의 여덟 황충蝗蟲의 재해가 있자, 사예교위司隷校尉注+① 趙나라는 鄴城에 도읍하고 冀州를 司部라 하였다. 수령들을 죄줄 것을 청하니,
조왕趙王 석호石虎가 말하기를 “이는 짐이 정사를 잘못한 소치인데 수령들에게 허물을 전가轉嫁하고자 하니, 어찌 자신에게 죄를 돌려 자책하는 뜻이겠는가. 사예교위는 충직한 말을 올려 짐의 부족한 점을 보좌하지 않고 함부로 무고無辜한 사람을 죄에 빠트리고자 하니, 백의白衣(평민平民)의 신분으로 직책을 수행하도록 하라.”注+② 〈“白衣領職”은〉 그의 品秩을 떨어뜨려 서민과 똑같게 하고 司隷校尉의 직임을 그대로 수행하게 한 것이다. 하였다.
[] 〈나라(동진東晉)가〉 사도司徒 왕도王導태부太傅 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諸軍事로 삼고 치감郗鑒태위太尉로 삼고 유량庾亮사공司空으로 삼았는데,
6월에 다시 왕도를 승상으로 삼고 사도司徒의 관직을 없앴다.
[] 왕도王導는 성품이 너그럽고 후덕하여 조윤趙胤, 가녕賈寧 등 여러 장수에게 직임을 맡겼는데, 이들이 대부분 법도를 받들어 따르지 않으니, 대신大臣이 이를 염려하였다. 유량庾亮치감郗鑒에게 편지를 보내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주상主上( 성제成帝)이 8, 9세 때부터 성인成人이 될 때까지 궁궐에 들어가면 궁녀의 손에 있었고 궁궐에서 나오면 곁에는 오직 무관武官소인小人뿐이었습니다. 책을 읽을 적에는 음과 구두를 따라서 배울 곳이 없었고 자문을 받을 적에는 일찍이 군자를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나라의 영정贏政注+① 秦나라 始皇帝의 이름이 政이다. 그 나라의 백성들을 어리석게 하고자 하자, 천하가 오히려 이것이 불가不可함을 알았는데, 하물며 그 군주를 어리석게 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임금께서 이미 장성하신 나이신데, 〈왕도王導가〉 머리를 조아려 정사를 돌려주지 않고 바로 지금注+② 甫는 바로 지금이고, 시작이다. 사부師傅의 높은 지위에 거하여 무뢰無賴인사人士들을 많이 기르고 있으니, 선제先帝( 명제明帝)의 부탁(고명顧命)을 받은 하관下官(자신에 대한 겸사)이 모두 몹시 간악한 자들을 소탕하지 않으면 어떻게 선제를 지하에서 뵙겠습니까.”
이에 함께 군대를 일으켜 왕도를 폐위시키고자 하였으나, 치감이 따르지 않았다.
[] 혹자가 왕도王導에게 은밀히 대비할 것을 권하자, 왕도가 말하기를 “내가 원규元規(유량庾亮)와 고락을 함께한 사이이니 이러저러한 많은 말들은 마땅히 지혜로운 자가 끊어버리고 더 이상 전해지지 않게 하여야 한다.注+① “悠悠”는 많음이니, 지혜로운 자는 또한 입으로 이러저러한 많은 말들을 전하지 말아야 함을 말한 것이다. 만일 그대의 말과 같다면 나는 곧 〈은사隱士들이 쓰는〉 각건角巾을 쓰고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 다시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하였다.
손성孫盛注+② 孫盛은 孫楚의 손자이다. 유량에게 간하기를 “왕공王公(왕도)은 항상 세상을 초월한 생각이 있으니,注+③ “常有世外之懐”는 王導의 마음이 항상 정사를 사양하고 세속 밖에서 한가로이 놀고자 함을 말한 것이다. 어찌 기꺼이 범인凡人의 일을 하겠습니까. 이는 반드시 간사한 무리들이 안팎을 이간질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니, 유량이 마침내 〈왕도를 폐할 것을〉 중지하였다.
[] 이때 유량庾亮이 비록 바깥 진영鎭營에 있었으나, 멀리서 조정의 권력을 쥐고 있고, 이미 〈장강長江의〉 상류上流를 차지하여 강한 병력을 보유하니, 권세를 추종하는 자들이 대부분 그에게 귀의하였다.
왕도는 마음이 화평하지 못하였는데, 일찍이 서풍이 불어 먼지가 일어나자 부채를 들어 자기 몸을 가리고 천천히 말하기를 “원규元規의 먼지가 사람을 오염시킨다.” 하였다.
[] 왕도王導이충李充연속掾屬으로 삼았다. 이충은 당시의 풍속이 부화浮華함과 허무함을 숭상한다 하여 일찍이 말하기를
노자老子을 끊고 를 버린 이유는 다만 인의仁義를 마음에 둔 자가 적고 인의를 이용하는 자가 많음을 근심하였기 때문인데, 보통 사람들은 형체만 보고 자취를 좇아 근본에서 더욱더 멀어지게 되었다.” 하여 〈학잠學箴〉을 지어 그 병폐를 제거하고자 하였는데,注+① 離(거리)는 力智의 切이다. 箴은 음이 針이니, 바로잡음이다. 祛는 丘居의 切이니, 물리침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름이 드러나게 됨은 바로 가 폐해지는 것이다. 이에 사람들이 높이는 것(이름)을 덜고 이에 쇠퇴한 것()을 높여야 한다. 이 아니면 만물을 자라게注+② 長(자라나다)은 展兩의 切이다. 할 수 없고 가 아니면 염치를 고르게 할 수 없다. 인과 의는 참으로 멀리할注+③ 遠(멀리하다)은 于願의 切이다. 수가 없으니, 인과 의를 해치는 것을 제거할 뿐이다.”
[] 가을에 나라(성한成漢)에 장맛비가 내렸다.
[] 지방에 오랫동안 비가 내리니, 백성들이 굶주리고 전염병에 걸렸다. 한주漢主 이수李壽가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정사의 잘잘못을 극언極言하게 하자, 공장龔壯이 다음과 같은 봉사封事를 올렸다.
“폐하가 군대를 일으키던 초기에는 위로 별을 가리켜 징험으로 삼고 하늘과 땅에 분명히 고하여 피를 입에 발라 여러 사람들에게 맹세하고 백성들을 이끌고 나라(동진東晉)의 번신藩臣으로 자처하시니,注+① 〈“舉國稱藩”은〉 장차 晉나라에 藩臣을 칭함을 이른다. 注+② 〈“權宜稱制”는〉 李壽가 황제의 지위에 나아감을 이른다.
지금 장맛비가 백 일 동안 내리자 기근과 전염병이 함께 발생하니, 어쩌면 하늘이 장차 폐하에게 감계鑑戒를 보이려고 해서인 듯합니다. 어리석은 신은 생각하건대 마땅히 예전의 맹약을 따라 건강建康(동진東晉)을 추대하여 받들면 저 나라는 반드시 높은 관작과 중한 지위를 아끼지 않고 큰 에 보답할 것입니다.
비록 품계가 한 등급이 강등되더라도注+③ “降階一等”은 왕이 황제의 지위에서 한 등급이 내려감을 이른다. 자손들이 무궁하여 영원히 복록을 보존할 것이니, 또한 아름답지 않습니까.”
이수는 글을 살펴보고 마음이 부끄러워 이 글을 숨기고 밖에 선포하지 않았다.
[] 겨울 10월에 광록훈光禄勲 안함顔含치사致仕하였다.
[] 안함顔含은 늙었다 하여 벼슬자리를 내놓았다. 이때 의논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왕도王導는 황제의 사부師傅이므로 백관들은 마땅히 강례降禮(무릎 꿇고 절하는 예)를 행해야 한다.”注+① 爲(위하다)는 去聲이니, 아래의 “嘗欲爲之”의 爲도 이와 같다. 降禮는 상대에게 절함을 이른다. 하니,
태상太常 풍회馮懐가 이 문제를 가지고 안함에게 물었다. 안함이 말하기를 “왕공王公이 비록 귀하고 소중하나, 예에는 편경偏敬(과분한 공경)이 없으니,注+② 臣子는 오직 君父에게만 절하니, 이것을 王導에게 베풀면 偏敬이 된다. 偏은 바르지 못함이다. 강례를 올려야 한다는 말은 아마도 제군諸君이 응당 해야 할 일이다. 나는 늙어서 시무時務를 알지 못한다.” 하였다.
이윽고 안함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남의 나라를 공격할 적에는 인인仁人에게 묻지 않는다 하였는데注+ 지난번에 풍조사馮祖思注+④ 祖思는 馮懐의 자이다. 나에게 아첨함에 대해 물었으니, 내가 아마도 바르지 못한 덕이 있는가 보다.” 하였다.
곽박郭璞이 일찍이 그를 위하여 시초점을 치려고 하자, 안함이 말하기를 “수명은 하늘에 달려 있고 지위는 사람에게 달려 있으니, 내 몸을 닦는데도 하늘이 수명을 주지 않는 것은 이요, 를 지켰는데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것은 이다. 본래 성과 명이 있으니, 수고롭게 시초점이나 거북점을 치지 말라.” 하였다.
치사致仕한 지 20여 년이 지나 나이 93세에 하였다.
[] 대왕代王 탁발예괴拓跋翳槐하니, 아우 탁발십익건拓跋什翼犍이 즉위하였다.
[] 대왕代王 탁발예괴拓跋翳槐의 아우 탁발십익건拓跋什翼犍나라(후조後趙)에 인질로 가 있었다. 탁발예괴가 병이 위독하자 여러 대인大人에게 명하여 탁발십익건을 세우게 하였다.
탁발예괴가 하자, 여러 대인들은 ‘탁발십익건이 먼 나라에 있으니 반드시 올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하여 다음 아우 탁발고拓跋孤를 세울 것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탁발고는 불가하다 하고 직접 업성鄴城에 가서 탁발십익건을 맞이하고 자신이 나라에 머물러 인질이 될 것을 청하였다. 조왕趙王 석호石虎가 그를 의롭게 여겨서 형제를 함께 보내니, 탁발십익건이 번치繁畤注+① 繁畤縣은 雁門郡에 속하였다. 북쪽에서 즉위하고 나라의 절반을 나누어서 탁발고에게 주었다.
[] 나라는 탁발의로拓跋猗盧한 뒤로부터 나라에 내란內亂이 많아서 부락部落의 백성들이 이산離散하였다. 탁발십익건拓跋什翼犍이 빼어나게 용맹하고 지략智略이 있어서 능히 선조의 기업을 닦아 처음으로 백관百官을 설치해서 여러 사무를 나누어 관장하게 하였다.
그리고 나라 사람 연봉燕鳳장사長史로 삼고 허겸許謙낭중령郞中令으로 삼고서 반역자와 살인자, 간악한 도적을 다스리는 법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호령이 분명하고 정사가 깨끗하고 간략하여, 사람들을 구속하여 심문하고 연좌하여 체포하는 번거로움이 없으니, 백성들이 편안히 여겼다.
이에 동쪽으로는 예맥濊貉(예맥)으로부터 서쪽으로는 파락나破落那,注+① ≪新唐書≫ 〈西域傳〉에 말하였다. “寧遠은 본래 拔汗那인데, 혹자는 말하기를 ‘潑汗은 元魏(北魏) 때에 破落那이다.’라고 하였다. 長安에서 8천 리 떨어져 있으며 西鞬城에 위치하니, 眞珠河의 북쪽에 있다.” 하였다. 남쪽으로는 음산陰山, 북쪽으로는 사막沙漠에 사는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나라로 귀의하여 복종하니, 무리 수십만 명을 보유하게 되었다.
[] 12월에 나라(후조後趙)가 군대를 보내어 단료段遼를 맞이하니, 나라(전연前燕) 모용각慕容恪이 그를 공격하여 물리치고 단료를 데리고 돌아와서 죽였다.
[] 단료段遼밀운산密雲山에서 사자使者를 보내어 나라에서 자신을 맞이해줄 것을 청하였는데, 이윽고 중간에 〈잘못된 계책임을〉 뉘우치고 다시 사신을 나라에 보내 자신을 맞이해줄 것을 청하였다.
조왕趙王 석호石虎마추麻秋를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단료를 맞이하게 할 적에 마추에게 당부하기를 “항복을 받아들일 적에는 적군의 공격을 받는 것과 똑같이 대비하여야 하니,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하였다.
연왕燕王 모용황慕容皝이 또한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단료를 맞이하니, 단료는 은밀히 연나라와 더불어 조나라 군대를 전복시킬 것을 모의하였다.
모용황이 모용각慕容恪을 보내어 정예 기병을 밀운산에 매복시켰다가 마추의 군대를 크게 물리쳐서 그의 사마司馬 양유陽裕를 사로잡고 단료의 무리들을 다 차지하였다.
모용황은 단료를 상빈上賓의 예로 대우하고 양유를 낭중령郞中令으로 삼았는데, 오랜 뒤에 단료가 배반을 도모하자 모용황이 그를 참수하였다.


역주
역주1 趙記 : ≪隋書≫ 권33 〈經籍志〉에 “≪趙記≫는 10권이다.[趙記十卷]”이라고 한 것 외에 저자와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다. ≪수경주≫에 인용된 것은 여기에 한 번만 보인다.
역주2 魏土地記 : 北魏 시대의 여러 가지 일을 기록한 책으로 알려져 있는데, 完本은 전하지 않으며 저자와 편찬 연대도 자세하지 않다.
역주3 : ≪水經註≫에도 ‘楡’로 되어 있고 ≪資治通鑑≫의 주석에 인용된 ≪水經註≫의 내용에도 ‘楡’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과 ≪資治通鑑綱目≫의 원문에는 모두 ‘渝’를 ‘楡’로 바로잡지 않고 그대로 두었으므로 地名에 있어 楡와 渝가 통용되는 것으로 보아 ‘渝’를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역주4 五代志 : 이는 ≪五代史志≫ 즉 ≪隋書≫의 〈志〉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수서≫와 ≪오대사지≫는 별개의 책으로 나중에 ≪오대사지≫가 ≪수서≫에 합간된 것이다. ≪수서≫는 唐 太宗 貞觀 10년(636)에 만들어졌으며 이때에는 〈紀〉와 〈傳〉만 존재하였다. 이후 梁․陳․北齊․北周․隋 5代의 제도를 편찬한 것이 ≪오대사지≫로 唐 高宗 顯慶 원년(656)에 완성된다.
역주5 (壯)[將] : 저본에는 ‘壯’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將’으로 바로잡았다.
역주6 (親)[規] : 저본에는 ‘親’으로 되어 있으나, 문맥에 의거하여 ‘規’로 바로잡았다.
역주7 폐가……칭하였습니다 : 본서 제20권 상 晉 成帝 咸康 4년(338) 4월 조에 이와 관련된 내용이 보인다.
역주8 光禄勲顔含致仕 : “漢나라 때 승상 韋賢이 致仕했다고 쓴 뒤로부터(宣帝 地節 3년(B.C.67)) 東漢을 지나서는 겨우 한 번 썼었는데(和帝 永元 13년(101)) 이때 다시 보이니, 이는 그칠 줄 앎을 아름답게 여긴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치사를 쓴 것이 22번이다(宣帝 地節 3년에 자세히 보인다.).[自漢書丞相賢致仕(宣帝地節三年) 是後歴東漢 僅一書(和帝永元十三年) 於是復見 美知止也 終綱目 書致仕二十二(詳宣帝地節三年)]” ≪書法≫
역주9 董仲舒가……하였다 : 이 내용은 ≪漢書≫ 권56 〈董仲舒列傳〉에 보인다.
역주10 趙遣兵迎段遼……殺之 : “段遼가 일찍이 군주를 시해했다고 썼는데 誅라고 쓰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죽일 만한 합당한 죄가 있어서 죽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죄가 있더라도 그에 합당한 죄로 아닌 것으로 죽인 것이 아닌 경우 ≪資治通鑑綱目≫에서는 한결같이 殺이라고 썼다.[遼嘗書弑君矣 不書誅 何 殺不以其罪也 故雖有罪 而殺之不以其罪 綱目一以殺書之]” ≪書法≫

자치통감강목(14) 책은 2021.11.1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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