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
목目]
애제哀帝와
평제平帝 때에 이르러서 제후들은 모두
의 먼 후손들로 천자와는 친속이 더욱 소원해졌고
注+① 처음 봉해진 군주가 아니고 모두 그 후손이므로 천자天子와 더욱 소원해졌다고 말한 것이다.,
깊은 궁중에서 생장하여 선비와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지 못해서 권세가 부유한 집안과 다름이 없었으며,
본조本朝(
천자天子)가 단명하여
국통國統이 세 번 끊겼다.
注+② 〈“본조단세本朝短世 국통삼절國統三絶”은〉 성제成帝와 애제哀帝, 평제平帝가 모두 일찍 붕崩하고 또 계사繼嗣가 없음을 이른다.
이 때문에
왕망王莽은
한漢나라가 안팎으로 미약하며
본말本末이 모두 약한 줄을 알고는
注+③ 탄殫은 음이 단單이니 다함이다.,
기탄함이 없이 간악한 마음을 내어 모후母后(태후太后)의 권세를 빙자해서 멋대로 위엄과 복을 행사하였다.
속임수가 이미 이루어지자 마침내 남면南面하는 지존至尊의 자리를 차지하고서 오위장수五威將帥의 관리들을 나눠 보내 천하에 역마를 치달려서 부명符命을 반포하여 돌리게 하니,
한漢나라 제후왕이 이마를 땅에 대고 머리를 조아려서 옥새와 인끈을 받들어 올리기를 행여 뒤늦을까 두려워하였고,
혹은 왕망의 훌륭함을 찬양하고 덕을 칭송해서 아첨하고자 하였으니, 어찌 슬프지 않은가.”
注+④ 궐厥은 조아림이고, 각角은 이마의 모서리이다. “계수稽首”는 머리가 땅에 닿음이다. 불韍은 옥새의 끈이다.
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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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국사공國師公 유수劉秀가 말하기를 “
주周나라에는
천부泉府라는 관청이 있어서, 팔리지 않는 물건을 거두어 사고, 백성들이 얻고자 하는 것을 주었다.” 하니
注+① 천泉은 혹 전錢으로 쓴다. “수불수收不售 여욕득與欲得”은, 백성들이 팔다가 팔리지 않은 것을 관官에서 거두어 취하고, 백성들이 없어서 얻고자 하는 것을 관에서 내어줌을 말한다.,
왕망王莽이 마침내
장안長安과
낙양洛陽,
한단邯鄲과
임치臨淄,
완宛과
성도成都에
오균사시五均司市와
전부錢府의 관청을 두었다.
注+② 《한서漢書》 〈식화지食貨志〉에 “《악어樂語》에 오균五均이 있다.” 하였는데, 그 주注에서 등전鄧展이 말하기를 “《악어樂語》는 낙원樂元의 말이니, 하간헌왕河間獻王이 전한 것으로 오균五均의 일을 말했다.” 하였으며, 신찬臣瓚이 말하기를 “이 글(《악어樂語》)에 이르기를 ‘천자가 제후의 땅을 취하여 오균五均을 세우면, 시장에 물건값이 통일되어 두 가지가 없어서 사士‧농農‧공工‧상商의 사민四民이 항상 균등하여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곤궁하게 할 수가 없고 부자가 가난한 자에게 요구하지 못하니, 이렇게 되면 국가에 여유가 있고 은혜가 백성들에게 미친다.’ 했다.”라고 하였다. 《주례周禮》의 사시司市는 시장의 정사政事와 교화, 정령政令과 형벌을 관장하였다.
사시司市는 항상
에 물건값을
상중하上中下로 정하여 각각 그 시장의 평균값을 도출한 다음
注+③ 고賈(값)는 가價로 읽으니, 아래도 같다. 평平은 거성去聲이니, 〈“각위기시평各爲其市平”은〉 물건값을 공평하게 정하는 것이다.,
백성들이 팔다가 채 다 팔지 못한 물건을 균관均官이 상고하여 징험해서 실제의 값을 알아내어 본값으로 사들이고,
물건이 비싸져서 평균값보다 1전錢이라도 더하면 평균값으로 백성들에게 팔고,
물건값이 싸져서 평균값보다 낮으면 백성들끼리 서로 매매할 것을 허락하였다.
또 백성들이 궁핍하여
사대賖貸(물건을 세내거나 돈을 빌림)하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전부錢府에서 돈을 빌려주고 매월 100
전錢에 이자로 3
전錢을 거두었다.
注+④ 사賖는 세를 내어 사는 것이고, 특貸는 물건을 남에게 빌려주는 것이다. 《주례周禮》에 “무릇 세를 내어 사는 자는 제사의 경우 열흘을 넘기지 않고 상례喪禮의 경우 3개월을 넘기지 않게 하였다. 무릇 빌려주는 사람은 유사有司와 더불어 분변하여 주되, 나라에 내는 세금으로 이자를 삼는다.” 하였으니, 사람이 제사와 상례 때문에 관청에서 물건을 세를 내어 사게 되면 열흘이나 3개월을 넘기지 말고 갚으며, 관에서 물건을 빌리는 자에게는 그 소속된 관리와 함께 값을 결정한 뒤에 주되, 각각 나라에 내는 세금으로 이자를 내게 함을 이른다.
그리고
금은金銀과
연連‧
석錫,
조鳥‧
수獸와
어魚‧
별鼈(자라)을 채취한 백성들과
축목畜牧을 하는 자,
상잠桑蠶,
직임織絍과
방적紡績,
보봉補縫(의복을 꿰맴)을 한 자,
공장工匠과
의醫‧
무巫,
복卜‧
축祝과 기타
방기方技,
상고商賈가 각자 자기가 하는 일을 거주하는 곳에서 자진신고[
자점自占]하면
注+⑤ 연連은 혹 연鏈으로 쓰니, 구리의 등속이다. 석錫은 주석이다. 임絍은 인금人禁의 절切이니, 베틀의 올이다. 방紡은 무량撫兩의 절切이니, 망사이다. 적績은 즉력則歷의 절切이니, 삼을 잇는 것이다. 점占은 지섬之贍의 절切이니, 속으로 자신의 소득을 헤아려 신고하는 것이다. 지之는 감이다.,
현관縣官(관부)에서 그 본전을 제하고 이익을 계산하여 이익의 10분의 1을 나라에 바치게 하였다.
그리고 감히 자진신고하지 않거나 자진신고를 하더라도 사실대로 하지 않은 자는 그가 얻은 것을 모두 몰수하고 현관에서 1년간 노역하게 하였다.
注+⑥ 〈“작현관일세作縣官一歲”는〉 1년 동안 노역을 하게 하여 벌을 보이는 것이다.
희羲 화和 노광魯匡이 다시 술의 독점 판매를 주청하니, 이를 따랐다.
目
[목目] 오위장수五威將帥가 중국中國으로 돌아오면서 흉노匈奴의 동쪽 지역을 지날 적에 오환烏桓의 백성들이 많은 것을 보고 조정朝廷에 보고하자, 조령詔令을 내려 흉노匈奴에게 오환烏桓의 백성들을 돌려주게 하였다.
선우單于가 거듭 원망하여
注+① 중重(거듭)은 직용直用의 절切이다. 마침내 만여 명의
기병騎兵을 보내서 오환을 호송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삭방朔方의 변방 아래에서 군대를 무장하였다.
注+② 겉으로는 오환烏桓의 백성들을 호송한다 하였으나, 실제는 침략하러 온 것이다.
왕망王莽이 군대를 보내 흉노를 공격할 적에 서역西域 방면에서 출동하게 하였는데,
거사車師의 후왕後王(차사후국車師後國의 왕)은 군수품을 공급하는 것을 꺼려서 신하들과 도망하여 흉노에게 들어갈 것을 모의하니,
도호都護 단흠但欽이 후왕을 참수하였다.
注+③ 단흠但欽은 사람의 성명이다.
후왕의 형 호란지狐蘭支가 마침내 2천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흉노에 항복하니,
선우가 군대를 보내서 이들과 함께
거사車師를 공격하여
후성後城(
차사후국車師後國의 도성)의
장長을 죽이고
도호사마都護司馬에 부상을 입혔다.
注+④ 후성後城은 바로 거사車師 후왕後王의 성城이다. 장長은 후성後城의 우두머리이다.
이에
무기교위戊己校尉의
사史인
진량陳良과
종대終帶 등이 무기교위를 죽이고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흉노에 항복하였다.
注+⑤ 사史는 무기교위戊己校尉의 사史이다. 진량陳良과 종대終帶는 두 사람의 성명이다.
目
“
보화寶貨(화폐)가 모두 무거우면 작게 쓰는 데에는 합당하지 못하고, 모두 가벼우면 수레나 선박에 실어 수송하는 데에 번거롭고 비용이 든다.
注+① 취僦는 수송함이다. 일설에 “품삯[임賃]이다.” 하였다.
무게와 크기가 각각 차등이 있으면 쓰기 편리하여 백성들이 즐거워할 것이다.” 하였다.
이 에 다시 금金과 은銀, 귀龜와 패貝, 전錢과 포布의 종류를 만들어 ‘보화寶貨’라 이름하니,
모두 다섯 가지 물건과 여섯 가지 이름에 28종류였다.
注+② 금화金貨가 1종, 은화銀貨가 2종, 귀화龜貨가 4종, 패화貝貨가 5종, 전화錢貨가 6종, 포화布貨가 10종이다. 포布 역시 돈인데 포布라 한 것은 분포되어 유행함을 말한 것이다.
이에 백성들이 혼란하여 이 화폐가 유통되지 못하자
마침내 다만 값어치가 1전錢인 소전小錢과 값어치가 50전錢인 대전大錢 두 가지만 유통하게 하니,
몰래 주조하는 자를 금할 수가 없었다.
注+③ 소전小錢은 지름이 6분分에 무게가 1수銖인데, 전문錢文에 “소전小錢은 값어치가 1전錢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대전大錢은 지름이 1촌寸 2분分이고 무게가 12수銖인데, 전문錢文에 “대전大錢은 값어치가 50전錢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왕망은 마침내 돈을 몰래 주조하지 못하게 하는 법을 무겁게 하여, 한 집에서 돈을 주조하면 이웃의 다섯 집이 연좌되어서, 적몰하여 노비로 삼았다.
이에 백성들이 한漢나라의 오수전五銖錢을 편안히 여기고, 왕망의 돈은 크고 작은 것이 모두 유통되어 알기 어려우며
또 자주 변경하여 믿을 수가 없다고 여겨서, 모두 은밀히 오수전을 가지고 물건을 사고팔았다.
왕망이 다시 글을 내려서 오수전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사방의 변방으로 귀양 보내게 하여, 죄에 연루되어 귀양 간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에 농민과 상인이 생업을 잃어서 양식과 화폐가 모두 풍족하지 못하니,
백성들이 시장과 길거리에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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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처음에 견풍甄豐과 유수劉秀, 왕순王舜이 왕망王莽의 심복이 되어서 지위에 있는 자들을 창도唱導하여 왕망의 공덕을 찬양하였다.
그리하여 안한공安漢公이니 재형宰衡이니 하는 칭호가 모두 이들이 공모해서 지어낸 것이고,
진풍 등이 또한 왕망의 하사를 받아 모두 부귀해지기는 하였으나, 다시 왕망으로 하여금 거섭居攝하게 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거섭居攝이라는 말의 싹은 유경劉慶과 사효謝囂 등에게서 나왔는데,
왕망은 자신의 우익羽翼이 이미 이루어지자 내심 섭황제攝皇帝라고 칭하고 싶어 하였다.
이에 진풍 등이 그 뜻을 받들어 순종하니, 왕망은 곧바로 다시 진풍 등의 자손을 봉하여 보답하였다.
目
[목目] 견풍甄豐 등은 작위가 높아지자 마음속으로 이미 만족하였고,
또 실제로 한漢나라 종실과 천하의 호걸들을 두려워하였는데,
〈왕망과〉 소원疏遠하여 등용되고자 하는 자들이 함께 부명符命을 만들어서
왕망이 마침내 이것에 근거하여 진짜 천자天子의 지위에 올랐다.
이에 왕순王舜과 유수劉秀는 마음속으로 두려워할 뿐이었으나, 진풍은 평소 성질이 강강剛彊하니 왕망도 그가 좋아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진풍의 아들 견심甄尋이 다시 부명符命을 만들어 황황실주黃皇室主가 마땅히 진심(자기)의 아내가 될 것이라고 말하자,
왕망이 노하여 말하기를 “황황실주는 천하의 어머니인데, 이 무슨 말인가.” 하고는 진심을 체포하려 하니,
진풍은 자살하고 진심은 도망했다가 체포되었다.
옥사獄辭가
국사공國師公 유수劉秀의 아들
유분劉棻(유분)과
문인門人 정륭丁隆 등에게까지 관련되고
注+① 분棻은 음이 분墳이다. 공公과
경卿,
당친黨親(
친속親屬)으로
열후列侯 이하까지 연루되어, 죽은 자가 수백 명이었다.
모두 파발마로 그 시신을 실어서 전송하여 보냈다.
注+② 전傳은 파발마로 전송함이다. 치致는 보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