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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3)

자치통감강목(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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思政殿訓義 資治通鑑綱目 제17권 상
晉 武帝 太康 원년(280)~晉 惠帝 元康 9년(299)
庚子年(280)
起庚子晉武帝太康元年하여 盡甲子晉惠帝永興元年이니 凡二十五年이라
晉世祖武皇帝太康元年이라 諸軍 竝進하니 吳丞相張悌迎戰이라가 死之하다
正月 王渾 出橫江하니 所向皆克이라 二月 王濬, 唐彬 擊破丹陽監盛紀注+輿地志 “歸州秭歸縣, 東有丹陽城, 吳之邊鎭, 有督有監.” 督者, 督諸軍事之職. 監者, 監諸軍事之職. 盛紀, 姓名.하다
吳人 於江磧要害處 竝以鐵鎖橫截之注+水渚有沙石曰磧.하고 又作鐵錐하니 長丈餘
暗置江中하여 逆拒舟艦注+錐, 鋒芒銳者.이라 作大筏數十하니 方百餘步
縛草爲人하여 被甲持杖하고 令善水者 以筏先行이라가 遇鐵錐하면 錐輒著筏而去注+著, 陟略切, 下著手同.하다
又作大炬하니 長十餘丈이요 大數十圍 灌以痲油하여 在船前이라가 遇鎖하면 然炬燒之하니 須臾 融液斷絶注+融, 炊氣上出也. 液, 流膏也.이라
於是 船無所礙하니 遂克西陵, 荊門, 夷道注+荊門, 在西陵之東‧夷道之西.하다
杜預遣牙門周旨等하여 帥奇兵八百하고 夜渡江하여 襲樂鄕할새 多張旗幟하고 起火巴山注+巴山, 在歸州巴東縣.하다
吳都督孫歆하여 與江陵督伍延書曰 北來諸軍 乃飛渡江也라하니라
旨等 伏兵城外러니 遣軍出拒王濬이라가 大敗而歸하니 伏兵 隨入하여 虜歆而還하다
擊殺吳水軍都督陸景하고 預進克江陵하여 斬吳將伍延하니
於是 沅, 湘以南으로 接于交, 廣 州郡 皆望風送印綬注+沅, 音元. 沅水出牂牁, 湘水出零陵, 皆入江. 交‧廣, 春秋百粵地, 漢置交州, 吳主休分交州, 置廣州.어늘 預杖節稱詔而撫之하다
詔濬하여 與胡奮, 王戎으로 共平夏口, 武昌하고 順流長하여 直造秣陵하고
預當鎭靜零, 桂하여 懷輯衡陽注+零, 謂零陵郡. 桂, 謂桂陽郡. 衡陽, 吳主亮泰平二年, 分長沙西部都尉立.하다 預遂分兵益濬, 戎하고 遣羅尙하여 與濬合攻武昌하여 降之하다
預與衆軍會議할새 或曰 百年之寇 未可盡克이요 方春水生하여 難於久駐하니 宜俟來冬하여 更爲大擧라하여늘
預曰 昔 樂毅藉濟西一戰하여 以幷彊齊注+事見周赧王三十一年. 藉, 慈夜切.하니 今兵威已振하여
譬如破竹이라 數節之後에는 皆迎刃而解하여 無復著手處也라하고 遂指授群帥方略하여 徑造建業하다
吳丞相張悌 督沈瑩, 諸葛靚하여 帥衆至牛渚注+牛渚, 一名和石, 在太平州當塗縣北. 山下有磯, 古津渡也. 與和州之橫江浦相對, 六朝屯戍之地.하니 瑩曰 上流諸軍 素無戒備하여 晉水軍 必至此리니
宜畜力以待之 若幸而勝이면 江西自淸注+大江北流, 自建業言之, 歷陽‧皖城, 皆爲江西.이라 今渡江與戰이라가 不幸而敗하면 則大事去矣니이다
悌曰 吳之將亡 賢愚所知 及今渡江이면 猶可決戰이니
若其敗喪이면 同死社稷하여 無所復恨이요 若其克捷이면 兵勢萬倍 乘勝迎之하면 不憂不破
若坐待蜀兵之至하면 恐士衆散盡하고 君臣俱降하여 無復一人死難者리니 不亦辱乎
三月 渡江하여 與晉揚州刺史周浚戰하여 大敗于板橋注+張舜民曰 “出秦淮西南行, 循東岸行小夾中十里, 過板橋店.”하니
欲遁去하여 使迎悌한대 悌不肯이어늘 自往牽之하고 曰 存亡 自有大數하니 非卿一人所支 奈何故自取死잇고
悌垂涕曰 仲思 今日 是我死日也注+仲思, 靚字. 且我爲兒童時 便爲卿家丞相所識拔注+丞相, 謂諸葛亮也. 悌, 襄陽人, 蓋亮在荊州, 識之於童幼也.하니
常恐不得其死하여 負名賢知顧 今以身徇社稷이니 復何道邪注+道, 言也. 流涕而去하다
悌遂爲晉兵所殺하고 幷斬瑩等하니 吳人 大震이러라
詔王濬하여 下建平하여 受杜預節度하고 至建業하여 受王渾節度러니
至西陵한대 預曰 濬 已得建平이면 則順流長驅하여 威名已著하니 不宜受制於我라하고
遂與書하여 曰 足下旣摧其西藩하니 便當徑取建業하여 討累世之逋寇하고
釋吳人於塗炭하여 振旅還都하면 亦曠世一事也注+言歷世所曠見之事.니라 大說하여 表呈預書하다
及張悌敗死 揚州別駕何惲 謂刺史周浚호되 宜速渡江하여 直指建業이니이다 使白王渾한대
惲曰 渾 闇於事機하고 而欲愼己免咎하여 必不我從이리이다 固使之러니
果曰 受詔 但屯江北하고 不使輕進하니 今者違命이면 勝不足多 若其不勝이면 爲罪已重이라
且詔令龍驤受我節度하니 但當具君舟檝하여 一時俱濟耳注+檝, 與楫同.니라
惲曰 龍驤 克萬里之寇하니 以旣成之功으로 來受節度 未之聞也
且明公 爲上將하여 見可而進이니 豈一一須詔令乎잇가 不聽注+須, 待也.하다
自武昌으로 順流而下하니 吳主遣將軍張象하여 帥舟師萬人禦之러니 望旗而降하니 吳人 大懼러라
吳主之嬖臣岑昏 以傾險諛佞으로 致位九列하여 好興功役하여 爲衆患苦注+九列, 九卿之序列.러니
至是하여 殿中數百人 請於吳主曰 北軍日近이어늘 而兵不擧刃하니 將如之何잇고
吳主曰 何故 對曰 正坐岑昏耳니이다 吳主曰 若爾 當以奴謝百姓이니라 衆共收昏하여 屠之하다
吳陶濬 謂吳主曰 蜀船皆小하니 今當得二萬兵하여 乘大船以戰이면 自足破之니이다
於是 合衆授濬節鉞이러니 未發而潰하다
琅邪王伷亦臨近境이라 吳主分遣使者하여 奉書渾, 濬하여 請降而送璽綬於伷하다
濬舟師過三山注+胡三省曰 “三山, 在今建康府上元縣西南四十五里, 又西卽江寧夾.”할새 遣信하여 要與論事注+信, 卽信使. 要, 讀曰邀.어늘 擧帆直指建業하고 報曰 風利하여 不得泊也로라
是日 濬戎卒八萬이요 方舟百里하여 鼓譟入于石頭注+方舟者, 倂兩舟而行也.하니 吳主皓面縛하여 詣軍門降이어늘
解縛焚櫬하고 收其圖籍하니 克州四, 郡四十三, 戶五十二萬三千, 兵二十三萬注+吳有荊‧揚‧交‧廣四州.하다
◑朝廷 聞吳已平하고 群臣 皆賀上壽어늘 帝執爵流涕하고 曰 此 羊太傅之功也注+羊祜贈太傅.니라
騎將軍孫秀不賀하고 南面流涕하고注+秀, 吳主皓從弟, 泰始六年來奔. 討逆 弱冠 以一校尉創業注+漢獻帝時, 曹操表孫策爲討逆將軍. 先是, 袁術表策爲懷義校尉, 時策才二十歲故云.이러니
今後主擧江南而棄之하니 悠悠蒼天 此何人哉오하니라
◑吳之未下也 大臣 皆以爲未可輕進이라호되 獨張華堅執하여 以爲必克하다
賈充 上表하여 稱吳地未可悉定이요 方夏江淮下濕하여 疾疫必起리니 宜召軍還하여 以爲後圖
雖要斬張華라도 不足以謝天下리이다 帝曰 此是吾意 但與吾同耳니라
杜預聞充奏乞罷兵하고 馳表固爭이러니 使至轘轅 而吳已降이라 慚懼하여 詣闕請罪어늘 帝撫而不問하다
夏四月 賜孫皓爵歸命侯하고 하다
賜孫皓爵歸命侯하고 遣使하여 分詣荊, 揚하여 撫慰牧, 守已下하고 除其苛政하니 吳人 大悅이러라
◑王濬之東下也 吳城戍皆望風款附호되 獨建平太守吾彦 嬰城不下러니 聞吳亡하고 乃降한대 帝以爲金城太守하다
◑五月 皓至하여 泥頭面縛하고 詣東陽門注+晉志 “洛陽城東有建春‧東陽‧淸明三門.”이어늘 詔遣謁者解縛하고 賜以衣服車乘하며 拜其子弟爲郞하고
吳之舊望 隨才擢敍하며 孫氏將吏渡江者 復十年하고 百姓 復二十年하다
帝臨軒大會하여 引見皓하고 謂曰 朕設此座以待卿 久矣注+見, 賢遍切.로라 皓曰 臣於南方 亦設此座以待陛下니이다
賈充 謂皓曰 聞君在南方 鑿人目하고 剝人面이라하니 此何等刑也
皓曰 人臣 有弑其君及姦囘不忠者하면 則加此刑耳注+斥充世受魏恩, 而姦回附晉, 弑高貴鄕公也.니라 黙然甚愧러라
帝從容問散騎常侍薛瑩皓所以亡한대 對曰 皓昵近小人하고 刑罰放濫하여 大臣諸將 人不自保하니 此其所以亡也니이다
他日 又問吾彦한대 對曰 吳主英俊하고 宰輔賢明하니이다 帝笑曰 若是 何故亡
彦曰 天祿永終하여 歷數有屬이라 故爲陛下禽耳니이다하니 帝善之하다
諸葛靚 逃竄不出이어늘 帝與之有舊 知其在姊琅邪王妃家하고 因就見焉한대
逃于厠이어늘 帝逼見之하니 靚流涕하고 曰 臣 不能漆身皮面하고 復見聖顔하니 誠爲慙恨注+豫讓漆身, 聶政皮面.이니이다
詔以爲侍中한대 固辭不拜하고 歸于鄕里하여 終身不向朝廷而坐하니라
封拜平吳功臣하다
王濬之入建業也 其明日 王渾 乃濟江하여 以濬不待己라하여 意甚愧忿하여 將攻濬이어늘
濬參軍何攀 勸濬送皓與渾하니 由是 事得解하다 何惲 與周浚牋하여 使諫止渾한대
不納하고 表濬違詔하여 不受節度하니 渾子濟尙公主하고 宗黨彊盛注+公主, 文帝女常山公主也.이라
有司請檻車徵濬한대 帝弗許하고 但以詔書責之하니
上書曰 臣前被詔書 直造秣陵하니이다 以十五日至三山하니 渾在北岸하여 遣書邀臣호되
臣水軍風發하여 無緣迴船이요 及以日中至秣陵하여 暮乃被渾所下當受節度之符注+被, 蒙也. 當受渾節度之符文, 於日暮時, 方蒙行下.하니
欲令明日還圍石頭하고 又索諸軍人名定見注+人名定見, 謂人名定數可見者也.하니이다 臣以爲皓已來降하니 無緣空圍石頭
又兵人定見 亦非當今之急이라 不可承用이니 非敢忽棄明制也니이다
事君之道 苟利社稷이면 死生以之 若顧嫌避咎하면 此人臣不忠之利 非明主社稷之福也니이다
又騰周浚書 云 濬 燒皓宮하여 得其寶物注+騰其書, 使上聞.이라하니
復表曰 夫犯上干主 其罪可救 乖忤貴臣 禍在不測이니이다
孫皓方圖降首注+降首, 謂降服而首罪也. 左右已劫其財物하여 放火燒宮이어늘 臣至하여 乃救止之하니이다
周浚 先入皓宮하고 王渾 先登皓舟하니 及臣後入 乃無席可坐니이다
若有遺寶 則渾, 浚 已先得之矣 今年平吳 誠爲大慶이나 於臣之身 更受咎累니이다
至京師하니 有司奏濬違詔하여 大不敬이라하여 請付廷尉한대 不許하다
渾, 濬 爭功不已어늘 帝命廷尉劉頌하여 校其事러니
以渾爲上功하고 濬爲中功注+頌, 漢廣陵厲王胥之後也.하니 帝以頌折法失理라하여 左遷京兆太守注+折, 斷也. 魏文帝受禪, 改京兆尹爲太守, 夷於列郡.하다
乃詔增賈充及渾邑八千戸하고 進渾爵爲公하며 以濬爲輔國大將軍하여 與杜預, 王戎으로 皆封縣侯하고 諸將賞賜有差注+濬爲襄陽縣侯, 預爲當陽縣侯, 戎爲安豐縣侯.하다
策告羊祜廟하고 封其夫人爲萬歲鄕君하여 食邑五千戸하다
自以功大로되 而爲渾父子黨與所抑이라하여 毎進見陳說 或不勝忿憤하고 徑出不辭
益州護軍范通 謂曰 卿 功則美矣 然恨所以居美者 未盡善也 卿旋斾之日 角巾私第하여 口不言平吳之事注+旋, 復返也. 旆, 繼旐之旗, 沛然而垂. 角巾, 巾之有角者.하고
若有問者하면 輒曰 聖主之德이요 群帥之功이니 老夫 何力之有리오하면 此藺生所以屈廉頗也니라
濬曰 吾始懲鄧艾之禍하여 不得無言이어니와 其終不能遣諸胷中 是吾褊也注+鄧艾之死, 以鍾會所蔽, 艾情不得上通也.니라
時人 咸以濬功重報輕이라하여 爲之憤邑注+爲, 去聲. 邑, 與唈通. 憤邑, 言憤懣不平而嗚唈嘆息也.이라 博士秦秀等 上表訟之한대 帝乃遷濬鎭軍大將軍하다
嘗詣濬이러니 嚴設備衛然後 見之러라
杜預還襄陽하여 以爲天下雖安이나 忘戰必危라하여 乃勤於講武하여 申嚴戍守하며
又引滍, 淯水하여 以浸田萬餘頃注+滍, 音雉. 淯, 音育. 水經註 “滍水, 出南陽魯山縣西堯山, 東逕犨縣, 又東南逕昆陽縣, 又東北逕潁川定陵縣, 東入于汝. 淯水, 出弘農盧氏縣攻離山, 東南逕南陽西鄂縣‧宛縣而屈, 南過淯陽縣, 又南過新野縣, 西過鄧縣, 南入于沔.”하고 開揚口하여 通零, 桂之漕하니 公私賴之注+水經註 “揚水, 上承江陵縣赤湖, 東北流, 逕郢城南, 又東北與三湖水會. 三湖者, 合爲一水, 東通荒谷, 東岸有父城. 春秋傳曰 ‘莫敖縊于荒谷, 群帥囚於冶父’, 謂此處也. 春夏水盛, 則南通大江, 否則南迄江隄. 揚水, 又東入華容縣, 又東北與柞溪水合, 又北逕竟陵縣, 又北注于沔, 謂之揚口.”러라
預身不跨馬하고 射不穿札이로되 而用兵制勝 諸將莫及注+跨, 枯化切, 騎也. 札, 甲札也. 射不穿札, 言射無力也.이라
在鎭 數餉遺洛中貴要어늘 或問其故한대 預曰 吾但恐爲害 不求益也라하더라
冬十月 尙書胡威卒하다
威爲尙書 嘗諫時政之寛한대 帝曰 尙書郞以下 吾無所假借로라
威曰 臣之所陳 豈在丞, 郞, 令史리오 正謂如臣等輩 始可以肅化明法耳니이다
初置司州하다
是歲 以司隷所統郡으로 置司州하니 凡州十九 郡國一百七十三이요 戶二百四十五萬九千八百四十注+州十九, 謂司‧兗‧豫‧冀‧幷‧靑‧徐‧荊‧揚‧涼‧雍‧秦‧益‧梁‧寧‧幽‧平‧交‧廣.이러라
詔曰 自漢末 四海分崩하여 刺史內親民事하고 外領兵馬러니 今天下爲一하니 當韜戢干戈
刺史分職 皆如漢氏故事注+察擧郡縣長吏而已.하고 悉去州郡兵하여 大郡 置武吏百人하고 小郡 五十人하라
交州牧陶璜 上言호되 交, 廣 東西數千里 不賓屬者六萬餘戸하여 服官役 纔五千餘家니이다
二州脣齒하여 惟兵是鎭注+交州, 統合浦‧交趾‧新昌‧武平‧九眞‧九德‧日南. 廣州, 統南海‧臨賀‧始安‧始興‧蒼梧‧欝林‧桂林‧高涼‧高興‧寧浦郡.이니이다 又寧州諸夷 接據上流하여 水陸竝通注+僕水‧葉楡水‧勞水‧橋水, 皆出寧州界, 入交‧廣界. 又霍弋自寧州遣楊稷等, 經略交‧廣, 是水陸竝通也.하니 州兵未宜約損以示單虛니이다
僕射山濤 亦言不宜去州郡武備라호되 帝不聽이러니
及永寧之後 盜賊 群起하여 州郡 不能制하니 天下遂大亂하여 如濤所言注+永寧, 惠帝年號.이라
然其後 刺史復兼兵民之政하여 州鎭 愈重矣러라


思政殿訓義 資治通鑑綱目 제17권 상
武帝 太康 원년(280)~ 惠帝 元康 9년(299)
庚子年(280)
資治通鑑綱目≫ 제17권은 庚子年 나라 武帝 太康 원년(280)부터 甲子年 나라 惠帝 永興 원년(304)까지이니, 모두 25년이다.
[] 나라 世祖 武皇帝 太康 원년이다. 봄에 여러 군대가 함께 전진하니, 나라 丞相 張悌晉軍을 맞이하여 싸우다가 죽었다.
3월에 龍驤將軍 王濬舟師(수군)를 거느리고 石頭城에 들어가니, 吳主 孫皓가 나와 항복하였다.
[] 정월에 王渾橫江으로 출동하였는데, 진격하는 곳마다 모두 승리하였다. 2월에 王濬唐彬이 〈나라의〉 丹陽監盛紀를 격파하였다.注+輿地志≫에 “歸州秭歸縣 동쪽에 丹陽城이 있으니, 나라의 변방 지역으로, 여기에는 이 있고 이 있다.” 하였다. 은 여러 軍事를 감독하는 직책이고, 은 여러 軍事를 감시하는 직책이다. 盛紀는 사람의 성명이다.
나라 사람은 長江의 자갈이 있는 要害處에 모두 쇠사슬을 가지고 가로막아 적의 전함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注+물가에 모래와 돌이 있는 것을 이라 한다. 또 끝이 뾰족한 鐵椎를 만들었는데 길이가 한 길이 넘었다.
이것을 은밀히 강 가운데에 설치하여 침공하는 전함을 맞아 막게 하였다.注+는 끝이 예리한 쇠망치이다. 王濬이 큰 뗏목 수십 개를 만들었는데, 사방 둘레가 백여 였다.
풀을 묶어 인형을 만들되 갑옷을 입히고 지팡이를 잡게 하고서 헤엄을 잘 치는 자로 하여금 뗏목을 가지고 먼저 가다가 철퇴를 만나면 철퇴가 뗏목에 걸려 제거되도록 하였다.注+(붙음, 닿음)은 陟略이니, 아래에 보이는 “著手”의 도 이와 같다.
또 큰 횃불을 만들었는데, 길이가 10여 이고 크기가 수십 아름이었다. 여기에 痲油(참기름)를 부어서 전함 앞에 두었다가 쇠사슬을 만나면 횃불에 불을 붙여 태우니, 순식간에 불기운이 솟아올라 쇠사슬이 녹아 끊어졌다.注+은 불기운이 위로 솟아오르는 것이다. 은 녹아서 기름처럼 흐르는 것이다.
이에 전함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없어져 마침내 西陵荊門, 夷道注+荊門西陵의 동쪽, 夷道의 서쪽에 있다. 점령하였다.
杜預牙門 周旨 등을 보내어 기병 8백 명을 거느리고 한밤중에 長江을 건너가서 樂鄕을 기습하게 할 적에 수많은 旗幟를 펼치고 巴山에 불을 놓았다.注+巴山歸州巴東縣에 있다.
[] 나라 都督 孫歆이 두려워하여 江陵督伍延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북쪽에서 쳐들어온 여러 군대가 마침내 날듯이 쉽게 장강을 건너왔다.” 하였다.
周旨 등이 성 밖에서 매복하고 있었는데, 손흠이 군대를 보내어 나와 王濬에게 항거하다가 대패하고 돌아가니, 복병들이 뒤따라 들어가 손흠을 생포하여 돌아왔다.
왕준이 나라 수군 도독인 陸景을 공격하여 죽이고, 杜預가 진격하여 江陵을 점령하고 나라 장수 오연을 참수하였다.
이에 沅水湘水 以南으로 交州, 廣州와 인접해 있는 州郡들이 모두 소문을 듣고 印綬를 보내오자,注+이다. 沅水牂牁에서 발원하고 湘水零陵에서 발원하니, 모두 장강으로 들어간다. 交州廣州春秋時代 百粵(백월)의 땅인데 나라 때에는 여기에 교주를 설치하였고, 吳主 孫休는 교주를 나누어 광주를 설치하였다. 두예가 을 잡고 詔令이라고 하여 이들을 鎭撫하였다.
황제는 왕준에게 詔令을 내려 胡奮, 王戎과 함께 夏口武昌을 평정하게 하고 강물을 따라 승승장구하여 곧바로 秣陵에 이르게 하였으며,
두예에게 零陵桂陽郡을 안정시켜 衡陽 지역의 懷柔를 담당하도록 하였다.注+零陵郡을 이르고, 桂陽郡를 이른다. 衡陽吳主 孫亮泰平(太平) 2년(257)에 長沙西部都尉를 나누어 세웠다. 두예는 마침내 병력을 나누어 왕준과 왕융에게 더 보태주고 羅尙을 파견하여 왕준과 연합하여 武昌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 杜預가 여러 군대와 회의할 적에 혹자는 말하기를 “100년 동안 있었던 적을 다 죽일 수가 없고, 막 봄이 되어서 봄물이 불어나 오래 주둔하기가 어려우니, 마땅히 오는 겨울을 기다려서 다시 총공격해야 합니다.” 하였다.
두예가 말하기를 “옛날 樂毅濟西一戰에서 승세를 타고 강한 나라를 겸병하였다.注+〈“樂毅藉濟西一戰 以幷彊齊”는〉 (빌리다, 의뢰하다)는 慈夜이다. 지금 우리 군대는 위엄을 이미 떨쳤으니,
비유하건대 대나무를 쪼개는 것과 같으니, 대나무를 몇 마디 쪼갠 뒤에는 모두 칼날이 닿기만 하면 쪼개져서 더 이상 손쓸 곳이 없는 것과 같다.” 하고는 마침내 여러 장수들에게 方略을 지시하고서 곧바로 나라 도성인 建業으로 진공하였다.
[] 나라 丞相 張悌沈瑩諸葛靚을 독려하여 병력을 거느리고 牛渚에 이르니,注+牛渚는 일명 和石이니, 太平州當塗縣 북쪽에 있다. 산 아래에 낚시터가 있는데, 옛날 나루터이다. 和州橫江浦와 마주해 있으니, 六朝時代屯戍하던 지역이다. 심영이 말하기를 “상류의 우리 군대가 평소 경계하고 대비함이 없어서 나라 수군이 반드시 여기에 이를 것이니,
마땅히 힘을 모아 대비해야 합니다. 만약 다행히 승리한다면 장강 서쪽 지역이 저절로 소탕될 것입니다.注+大江(長江)이 북쪽으로 흐르니, 建業에서 말한다면 歷陽皖城(환성)이 모두 장강의 서쪽이 된다. 이제 장강을 건너가 적과 싸우다가 불행히 패한다면 大事가 잘못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장제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은 어진 이와 어리석은 이가 모두 아는 바이다. 이제 장강을 건너가면 오히려 決戰할 수가 있다.
만일 실패하여 망한다면 함께 사직을 위하여 죽어 더 이상 여한이 없게 될 것이요, 만약 승리한다면 兵勢가 만 배나 더 증가할 것이니, 승세를 타고 적을 맞이하여 공격하면 격파하지 못할 걱정이 없다.
만약 가만히 앉아서, 이 오기를 기다리면 우리의 병사들이 다 흩어지고 군주와 신하가 모두 항복하여 國難에 죽은 자가 다시는 한 사람도 없게 될까 염려스러우니, 치욕스럽지 않겠는가.”
[] 3월에 나라 군대가 장강을 건너가서 나라 揚州刺史 周浚과 싸워 板橋에서 대패하였다.注+
諸葛靚이 도망가고자 하여 사람을 보내어 張悌를 맞이하려 하자, 장제가 가려고 하지 않으니, 제갈정이 직접 가서 옷깃을 잡아끌며 말하기를 “나라의 보존과 멸망은 본래 큰 운수가 있으니, 한 사람이 지탱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찌하여 일부러 죽음을 자초하십니까?” 하였다.
장제가 눈물을 떨구며 말하기를 “仲思여! 오늘은 바로 내가 죽을 날이다.注+仲思諸葛靚의 자이다. 또 내가 어린아이였을 적에 경의 집안 丞相(諸葛亮)의 눈에 들어 발탁되었으니,注+丞相諸葛亮을 말한 것이다. 張悌襄陽 사람이니, 제갈량이 荊州에 있을 적에 어린아이인 그를 안 듯하다.
나는 항상 제대로 죽지 못하여 名賢의 돌보아주신 은혜를 저버릴까 두려워하였다. 이제 社稷을 위하여 몸을 희생하려 하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注+는 말함이다. 하자, 제갈정이 눈물을 흘리고 떠나갔다.
장제는 마침내 나라 군대에게 살해당하였고 沈瑩 등도 함께 참수되니, 나라 사람들이 매우 두려워하였다.
[] 처음에 王濬에게 詔令을 내려 建平으로 내려가서는 杜預의 지휘를 받게 하고 建業에 이르러서는 王渾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왕준이 西陵에 이르니, 두예가 말하기를 “왕준이 이미 건평을 점령했다면 흐르는 강물을 따라 승승장구하여 위엄과 명성이 이미 드러났으니, 나에게 제재를 받을 필요가 없다.” 하고는
마침내 그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足下가 이미 적의 서쪽 藩屛을 꺾었으니, 응당 곧바로 전진하여 建業을 점령해서 累代에 걸쳐 도망해 있던 적을 토벌하고
도탄에 빠져 있는 나라 사람들을 해방시켜 군대를 수습하여 도성으로 돌아올 수 있다면 이 또한 역대에 보기 드문 훌륭한 일이다.”注+〈“曠世一事也”는〉 역대에 보기 드문 일을 말한다. 하였다. 왕준이 크게 기뻐하고 表文을 올리면서 두예의 편지를 함께 올렸다.
張悌가 패전하여 죽자 揚州 別駕 何惲(하운)이 刺史 周浚에게 이르기를 “속히 장강을 건너가서 곧바로 建業으로 향하여야 합니다.” 하니, 주준이 그로 하여금 王渾에게 아뢰게 하였다.
하운이 말하기를 “왕혼은 일의 機會에 어둡고 자기 몸을 조심하여 죄책을 면하고자 해서 반드시 우리의 의견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주준이 굳이 그를 보냈다.
과연 왕혼이 말하기를 “내가 조령을 받을 적에 단지 장강의 북쪽에 주둔하게만 하였고 가볍게 진격하라고 하지는 않았으니, 지금 명령을 어기면 승리를 하여도 훌륭한 일이 되지 못하고, 만약 승리하지 못하면 매우 무거운 죄를 받을 것이다.
또 조령에 龍驤將軍 王濬으로 하여금 나의 지휘를 받게 하였으니, 마땅히 그대의 에서 배와 노를 장만하여 함께 渡江할 뿐이다.”注+(노)은 과 같다. 하였다.
何惲이 말하기를 “용양장군이 먼 곳에 있는 적을 이겼습니다. 이미 공적을 세운 사람이 와서 지휘를 받는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明公上將軍이 되어서 승리할 수 있는 기회를 보면 전진해야 하니, 어찌 일일이 조령을 기다립니까.” 하였으나 왕혼이 듣지 않았다.注+은 기다림이다.
[] 王濬武昌에서 강물을 따라 내려가니, 吳主 孫皓가 장군 張象을 보내어 수군 만 명을 거느리고 막게 하였다. 나라 병사들이 나라 군대의 깃발을 바라보고 항복하니, 나라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吳主의 총애하는 신하 岑昏은 마음이 음험하고 아첨을 잘하여 九卿의 반열에 올랐고, 토목공사를 일으키기를 좋아하여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하였다.注+九列”은 九卿의 서열이다.
이때에 대궐 가운데에 수백 명이 모여 吳主에게 청하기를 “북쪽 군대가 날로 가까이 오는데 우리 병사들이 칼을 들고 싸우지 않으니, 장차 어찌합니까?” 하였다.
吳主가 말하기를 “무슨 연고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바로 “잠혼 때문입니다.” 하였다. 吳主가 말하기를 “만약 그렇다면 마땅히 이 종놈을 가지고 백성들에게 사죄하여야 한다.” 하니, 여러 사람들이 함께 잠혼을 체포하여 屠戮하였다.
나라 陶濬吳主에게 이르기를 “ 지방의 배가 모두 작으니, 이제 마땅히 2만의 병력을 얻어 큰 배를 타고 싸우면 충분히 적을 격파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이에 병력을 규합하여 陶濬에게 節鉞을 주었는데, 나라 군대는 출동하기도 전에 궤멸하였다.
[] 이때에 琅邪王 司馬伷(사마주)도 가까운 지역에 와 있었다. 吳主使者를 나누어 보내어 王渾王濬에게 편지를 받들어 올려 항복을 청하고 玉璽와 인끈을 사마주에게 보내었다.
왕준의 수군이 三山을 지날 적에注+胡三省이 말하였다. “三山은 지금 建康府 上元縣 서남쪽 45리 지점에 있으며, 또 서쪽은 바로 江寧夾이다.” 왕혼이 사자를 보내어 함께 일을 논의할 것을 요구하였으나,注+은 바로 信使(使者)이다. (요구하다)는 로 읽는다. 왕준이 닻을 올려 곧바로 建業으로 향하고 답하기를 “바람의 기세가 빨라서 정박할 수 없다.” 하였다.
이날에 왕준의 병력이 8만이고 두 대씩 나란히 짝을 지은 배들이 100리에 늘어 있었다. 晉軍이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石頭城에 들어가니,注+方舟”는 배 두 척을 나란히 하여 가는 것이다. 吳主 孫皓가 두 손을 뒤로 묶고 얼굴은 앞을 향하고서 을 수레에 싣고 軍門에 나와 항복하였다.
왕준이 그의 포박을 풀고 관을 불태우고 圖籍을 거두니, 4개 와 43개 에 52만 3천의 戶口와 23만의 병력을 접수하였다.注+나라는 이때 荊州揚州, 交州廣州 4개 를 소유하였다.
[] 朝廷에서는 이미 나라가 평정되었다는 말을 듣고 여러 신하들이 모두 축하하고 축수를 올렸는데, 황제는 술잔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이것은 羊太傅(羊祜)의 공이다.”注+羊祜에게 太傅를 추증하였다. 하였다.
이때 驃騎將軍 孫秀는 축하하지 않고 남쪽을 향하여 눈물을 떨구며 말하기를注+孫秀吳主 孫皓從弟인데, 泰始 6년(270)에 나라로 망명해왔다. “옛날에 討逆將軍은 약관의 나이에 일개 校尉의 신분으로 창업을 하였는데注+後漢 獻帝曹操表文을 올려서 孫策討逆將軍으로 삼았다. 이보다 앞서 袁術은 표문을 올려 손책을 懷義校尉로 삼았는데, 이때 나이가 겨우 20세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지금 後主(嗣君)가 江南을 들어 포기하니, 아득하고 아득한 푸른 하늘아! 이는 무슨 사람인가.” 하였다.
[] 나라가 항복하기 전에 나라의 大臣들이 모두 가볍게 진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으나, 張華만이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고 강하게 고집하였다.
賈充이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나라 땅을 다 평정할 수가 없고 곧 여름이어서 長江淮河 지방이 낮고 습하여 전염병이 반드시 창궐할 것이니, 마땅히 군대를 召還하여 후일을 도모해야 합니다.
비록 장화를 腰斬刑에 처하더라도 천하에 사죄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이것은 나의 뜻이니, 장화는 다만 나와 의견을 같이하였을 뿐이다.” 하였다.
杜預는 가충이 상주하여 군대를 해산할 것을 청했다는 말을 듣고 급히 표문을 올려 굳게 간쟁하려 하였다. 두예의 使者轘轅山(洛陽 근교의 산)에 이르렀을 적에 나라가 이미 항복하였다. 가충은 부끄럽고 두려워 대궐에 나와 벌을 내릴 것을 청하였는데, 황제는 그를 어루만지고 불문에 부쳤다.
[] 여름 4월에 孫皓에게 歸命侯의 작위를 내리고 使者를 보내어 荊州揚州 지방을 순행하여 나라의 가혹한 정사를 없애게 하였다.
[] 孫皓에게 歸命侯의 작위를 내리고 사자를 보내어 荊州揚州로 나누어 가서 太守 이하를 위로하고 가혹한 정사를 없애니, 나라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 王濬이 동쪽으로 내려갈 적에 나라의 城邑을 지키던 군대들이 모두 소문을 듣고 귀순하였으나, 유독 建平太守 吾彦은 성을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나라가 망했다는 말을 듣고는 마침내 항복하니, 황제는 그를 金城太守로 삼았다.
[] 5월에 孫皓洛陽에 이르러 머리에 진흙을 바르고 두 손을 뒤로 묶고 얼굴은 앞을 향하고서 東陽門에 나오자,注+晉書≫ 〈地理志〉에 “洛陽城 동쪽에 建春門, 東陽門, 淸明門이 있다.” 하였다. 詔令을 내려서 謁者을 보내어 포박을 풀고 의복과 수레를 하사하고 그의 자제들을 郞官으로 제수하였다.
그리고 나라에서 오랫동안 명망 있는 가문의 사람들을 재능에 따라 발탁하여 등용하였으며, 孫氏의 장수와 관리로서 長江을 건너온 자들에게는 10년 동안 賦稅를 면제하고, 백성들에게는 20년 동안 부세를 면제하였다.
황제가 前殿에 나와서 신하들을 크게 모으고서 손호를 引見하고 이르기를 “이 이 자리를 마련하여 을 기다린 지가 오래이다.”注+(알현하게 하다)은 賢遍이다. 하니, 손호가 대답하기를 “南方에서 이러한 자리를 만들어 폐하를 기다렸습니다.” 하였다.
賈充이 손호에게 이르기를 “듣건대 그대가 남방에 있을 적에 사람의 눈알을 파내고 사람의 얼굴 가죽을 벗겼다 하니, 이것이 무슨 형벌인가?” 하니,
손호가 대답하기를 “신하 중에 군주를 시해하거나 간사한 마음을 품고 不忠하는 자가 있으면 이 형벌을 가했다.”注+ 하니, 가충이 묵묵히 듣고서 매우 부끄러워하였다.
[] 황제가 조용히 散騎常侍 薛瑩에게 孫皓가 망한 이유를 묻자, 대답하기를 “손호가 소인들을 친근히 하고 형벌을 함부로 내려서 大臣과 여러 장수들이 저마다 자기 몸을 보존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멸망한 이유입니다.” 하였다.
후일에 또다시 吾彦에게 묻자, 대답하기를 “나라 군주는 英明하고 준걸스러웠으며 宰輔들도 현명하였습니다.” 하였다. 황제가 웃으며 말하기를 “이와 같다면 무슨 이유로 망했는가?” 하니,
오언이 대답하기를 “하늘의 복록이 영원히 끊기어 국운이 돌아갈 곳이 있으므로 폐하에게 사로잡힌 것입니다.” 하니, 황제가 그의 말을 좋게 여겼다.
[] 諸葛靚이 도망하여 숨고서 나오지 않았다. 황제는 그와 옛 친분이 있었는데, 그가 자신의 누님인 琅邪王 王妃의 집에 있음을 알고는 찾아가서 만나보려고 하였다.
그러자 제갈정이 측간으로 도망하였는데, 황제가 가까이 다가가 그를 보니 제갈정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신이 몸에 옻칠하고 얼굴 가죽을 벗기지 못하고서 다시 성상의 얼굴을 뵈니, 진실로 부끄럽고 한스럽습니다.”注+〈“漆身皮面”은〉 하였다.
詔令을 내려 그를 侍中으로 삼았으나,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고 鄕里로 돌아가서 종신토록 조정을 향해 앉지 않았다.
[] 나라를 평정한 공신들을 하고 관직을 제수하였다.
[] 王濬建業으로 들어갈 적에 그 다음날 王渾이 비로소 장강을 건너가서는 왕준이 자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하여 마음에 몹시 부끄러워하고 분노하여 장차 왕준을 공격하려 하였다.
이때 왕준의 參軍何攀(하반)이 왕준에게 孫皓를 압송하여 왕혼에게 줄 것을 권하니, 이로 말미암아 사태가 다소 풀리게 되었다. 何惲周浚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로 하여금 하여 왕혼에게 〈왕준과 을 다투는 일을〉 중지하게 하였으나,
왕혼이 받아들이지 않고 표문을 올려 “왕준이 詔令을 어겨 자신의 지휘를 받지 않았다.”고 말하니, 왕혼의 아들 王濟公主에게 장가들고 친족들이 강성하였다.注+公主文帝의 딸인 常山公主이다.
有司檻車로 왕준을 압송할 것을 청하자, 황제는 허락하지 않고 다만 詔書를 내려 왕준을 꾸짖으니,
왕준이 다음과 같이 上書하였다. “이 지난번에 詔書를 받았을 적에, 곧바로 秣陵으로 나아가라 하셨습니다. 15일 三山에 이르렀는데, 이때 왕혼이 북쪽 江岸에 있으면서 신에게 편지를 보내어 만나자고 하였으나,
신이 거느린 수군이 바람이 거세게 일어서 배를 돌릴 방도가 없었습니다. 정오에 말릉에 도착하여 저녁때가 되어서야 왕혼이 신에게 ‘마땅히 지휘를 받으라.’고 내린 符文을 받았습니다.注+는 받음이다. 마땅히 王渾의 지휘를 받으라는 符文이니, 해가 저물 때에 비로소 내려보낸 공문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符文에는 신으로 하여금 다음날 돌아와 石頭城을 포위하게 하고 또 현재 군인들의 定員名單을 파악하여 올릴 것을 요구하였습니다.注+人名定見”은 인명과 定員을 알 수 있게 한 것을 이른다. 신이 생각하건대 孫皓가 이미 와서 항복하였으니 부질없이 석두성을 포위할 이유가 없었고,
또 병사들의 정원을 파악하는 일도 지금 급히 해야 할 것이 아니어서 받들어 쓸 수가 없었으니, 신이 감히 밝은 制命을 소홀히 하고 버린 것이 아닙니다.
군주를 섬기는 도리는 진실로 社稷에 이로우면 목숨을 각오하고 하는 것이니, 만약 혐의를 돌아보고 죄책을 피한다면 이것은 신하가 자신을 이롭게 하고자 불충하는 일이요, 밝은 군주와 사직의 복이 아닙니다.”
王浚과 王渾이 공을 크게 다투다王浚과 王渾이 공을 크게 다투다
[] 王渾이 또다시 周浚의 편지를 올렸는데 편지에 이르기를 “王濬孫皓의 궁중을 불태우고 보물을 얻었다.”注+〈“又騰周浚書”는〉 그 글을 전하여 황제에게 알리려고 한 것이다.고 말하였다.
이에 왕준이 또다시 表文을 올려 다음과 같이 변명하였다. “윗사람을 범하고 군주를 범함은 용서할 수 있는 죄이고, 權臣의 지시를 거스름은 그 화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손호가 막 항복하여 자수할 것을 도모할 적에注+降首”는 항복하여 자수함을 이른다. 좌우의 측근들이 이미 재물을 약탈하고 불을 놓아 궁중을 불태웠는데, 신이 도착하여 마침내 저지하였습니다.
주준이 맨 먼저 손호의 궁중에 들어갔고 왕혼이 먼저 손호의 배에 올랐는데, 신이 뒤늦게 들어갔을 적에는 결국 앉을 자리조차 없었습니다.
만약 남은 보물이 있었다면 왕혼과 주준이 먼저 얻었을 것입니다. 금년에 나라를 평정함은 진실로 국가의 큰 경사이나, 신의 처지에서는 도리어 허물과 죄를 받게 되었습니다.”
[] 王濬京師에 이르자, 有司가 왕준이 詔令을 어겨 크게 불경하다 하여 廷尉에게 회부할 것을 청하였으나,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王渾과 왕준이 계속하여 戰功을 다투므로 황제가 정위 劉頌에게 명하여 이 일을 따지게 하였는데,
왕혼의 공적을 상등으로 삼고 왕준의 공적을 다음으로 삼으니,注+劉頌나라 廣陵厲王 劉胥의 후손이다. 황제는 유송의 판결이 사리에 위배된다 하여 京兆太守로 좌천시켰다.注+은 결단함이다. 나라 文帝禪讓을 받고는 京兆尹京兆太守로 고쳐 여러 과 똑같게 하였다.
황제는 마침내 조령을 내려 賈充과 왕혼에게 食邑 8천 를 더해주고 왕혼의 작위를 으로 승진하였으며, 왕준을 輔國大將軍으로 삼아 杜預, 王戎과 함께 모두 縣侯에 봉하고 여러 장수들에게도 차등을 두어 을 하사하였다.注+왕준은 襄陽縣侯가 되고, 두예는 當陽縣侯가 되고, 왕융은 安豐縣侯가 되었다.
策命을 내려 羊祜의 사당에 고하게 하고 그의 夫人을 봉하여 萬歲鄕君이라 하여 식읍 5천 호를 삼게 하였다.
[] 王濬이 많은데 王渾父子와 그의 도당들에게 억눌림을 당했다고 생각하여 매양 나아가서 황제를 뵙고 말할 적에 간혹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인사도 하지 않고 곧장 나가버렸다.
益州 護軍 范通이 왕준에게 이르기를 “은 훌륭하나 훌륭함에 대처하는 방법이 십분 하지 못함이 한스럽습니다. 경이 회군하던 날에 私第에서 角巾을 쓰고서 나라를 평정한 일을 자신의 입으로 말씀하지 않으며,注+은 다시 돌아옴이다. (거북과 뱀의 그림이 있는 깃발)의 끝에 베 조각을 매단 깃발이니, 깃발의 술이 크게 늘어져 있는 것이다. 角巾은 뿔이 있는 두건이다.
만약 묻는 자가 있으면 번번이 ‘聖主의 덕이요 여러 장수의 공이니, 老夫가 무슨 힘이 있겠는가.’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방법입니다.” 하자,
왕준이 말하기를 “내가 처음 鄧艾의 화를 경계하여 말이 없을 수 없었는데, 끝내 이것을 가슴속에서 버리지 못한 것은 나의 편협한 성질 때문이다.”注+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모두 왕준은 공이 많은데 보답이 가볍다 하여 그를 위해 울분을 토했다.注+(위하다)는 去聲이다. (근심하다)은 과 통하니, “憤邑”은 분노하고 불평하며 서글퍼하고 탄식함을 이른다. 박사 秦秀 등이 표문을 올려 억울함을 말하자, 황제가 마침내 왕준을 鎭軍大將軍으로 승진시켰다.
왕혼이 일찍이 왕준에게 찾아갔었는데, 왕준은 철저하게 守衛를 갖춘 뒤에야 그를 만났다.
[] 杜預襄陽으로 돌아가서 이르기를 “천하가 비록 편안하나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태롭다.” 하고는 마침내 부지런히 武備를 닦아 거듭 엄하게 국경을 지키게 하였으며,
滍水(치수)와 淯水를 끌어다가 농지 만여 (1경은 약 1만 평)을 관개하고注+는 음이 이고, 은 음이 이다. ≪水經註≫에 “滍水南陽 魯山縣 서쪽 堯山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犨縣(주현)을 지나고 또다시 동남쪽으로 昆陽縣을 지나며, 또다시 동북쪽으로 潁川 定陵縣을 지나 동쪽으로 汝水로 들어간다. 淯水弘農 盧氏縣 攻離山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南陽 서쪽 鄂縣宛縣을 지나 꺾어 돌아 남쪽으로 淯陽縣을 지나, 또다시 남쪽으로 新野縣을 지나가고 서쪽으로 鄧縣을 지나서 남쪽으로 沔水로 들어간다.” 하였다. 揚口水路를 열어 零陵桂陽漕運을 통하게 하니, 公私間에 큰 도움을 주었다.注+水經註≫에 “揚水는 위로 江陵郡 赤湖의 물을 이어받아 동북쪽으로 흘러 郢城의 남쪽을 지나가고 또다시 동북쪽으로 三湖의 물과 만난다. 삼호는 세 줄기의 물이 합하여 한 물이 되어서 동쪽으로 荒谷을 지나가는데 동쪽 언덕에 冶父城(야보성)이 있으니, ≪春秋左氏傳≫에 ‘莫敖荒谷에서 목을 매어 죽고 여러 장수들이 冶父에서 갇히었다.’라고 한 것이 이곳을 말한 것이다. 봄과 여름에 물이 많아지면 남쪽으로 장강과 통하고 그렇지 않으면 남쪽으로 장강의 둑을 따라 흘러간다. 양수는 또다시 동북쪽의 華容縣으로 들어가고 또다시 동북쪽으로 柞溪水와 합류하며 또다시 북쪽으로 竟陵縣을 지나고 또다시 북쪽으로 沔水로 흘러드니, 이곳을 揚口라 한다.” 하였다.
두예는 말을 제대로 타지 못하고 활을 쏘면 갑옷을 꿰뚫지 못했으나, 용병하여 승전함은 여러 장수들이 미치지 못하였다.注+枯化이니, 말을 탐이다. 은 갑옷이니, “射不穿札”은 활을 쏠 적에 힘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진영에 있을 적에 洛陽貴族要路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주 선물을 보냈는데 혹자가 그 이유를 묻자, 두예가 대답하기를 “나는 다만 그들이 나를 해칠까 두려워서일 뿐이요, 유익함을 구하는 것은 아니다.” 하였다.
[] 겨울 10월에 尙書 胡威하였다.
[] 胡威尙書가 되었을 적에 일찍이 時政寬大함을 간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尙書郞 이하에게는 내가 관대하게 한 적이 없었다.” 하니,
호위가 말하기를 “신이 말씀드린 것이 어찌 令史에 해당하는 것이겠습니까. 바로 신과 같은 무리를 말한 것이니, 이렇게 해야 비로소 교화를 엄숙히 하고 법을 밝힐 수 있습니다.” 하였다.
[] 처음으로 司州를 설치하였다.
[] 이해에 司隷가 통솔하는 을 가지고 司州를 설치하니, 도합 가 19에 郡國이 173이고, 戶口가 2,459,840이었다.注+19司州, 兗州, 豫州, 冀州, 幷州, 靑州, 徐州, 荊州, 揚州, 涼州, 雍州, 秦州, 益州, 梁州, 寧州, 幽州, 平州, 交州, 廣州를 이른다.
[] 詔令을 내려 州郡의 군대를 해산하였다.
[] 다음과 같이 詔令을 내렸다. “나라 말기부터 천하가 분열되어 刺史가 안으로는 백성의 일을 직접 다스리고 밖으로는 兵馬를 통솔하였는데, 이제 천하가 통일되었으니, 마땅히 창과 방패를 감추고 거두어야 한다.
刺史의 직책을 모두 나라의 고사와 같게 하고,注+〈“刺史分職皆如漢氏故事”는〉 刺史郡縣長吏(수령)를 살피고 천거할 뿐이라는 말이다. 州郡의 군대를 전부 제거하여 큰 에는 武官 100명을 두고, 작은 에는 무관 50명을 두게 하라.”
交州牧陶璜上言하기를 “交州廣州東西로 수천 리요 복속하지 않는 자가 6만여 여서 관청의 다스림에 복종하는 자가 겨우 5천여 입니다.
는 입술과 이와 같아서 오직 군대를 주둔해야 지킬 수 있습니다.注+交州合浦, 交趾, 新昌, 武平, 九眞, 九德, 日南을 통치하고, 廣州南海, 臨賀, 始安, 始興, 蒼梧, 欝林, 桂林, 高涼, 高興, 寧浦郡을 통치하였다.寧州의 여러 오랑캐들은 上流를 점거하여 수로와 육로가 아울러 통하니,注+僕水, 葉楡水, 勞水, 橋水가 모두 寧州의 경계에서 발원하여 交州廣州의 경계로 들어가며, 또 寧州에서 楊稷 등을 보내어 교주와 광주를 經略하니, 이는 수로와 육로가 아울러 통하는 것이다. 의 병사를 줄여 孤單하고 虛弱함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僕射 山濤도 “주군의 무비를 제거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하였으나, 황제가 듣지 않았다.
高逸圖 山濤高逸圖 山濤
永寧 연간 이후에 도적이 봉기하자 주군이 통제하지 못하니, 천하가 마침내 크게 혼란하여 산도가 말한 것과 같게 되었다.注+永寧 惠帝의 연호이다.
그러나 이후로 자사가 병사와 백성의 정사를 겸하니, 이 더욱 중하게 되었다.


역주
역주1 諸軍竝進……吳主皓出降 : “‘死之’라고 쓴 것은 충절을 인정한 것이다. ‘迎戰(맞이하여 싸우다)’이라고 쓴 경우가 있지 않은데, 여기에서 ‘맞이하여 싸우다가 죽었다.’고 쓴 것은 거듭 인정한 것이다. 무릇 나라가 멸망할 적에 ‘死之’라고 쓴 것은 나라가 멸망할 때에 좋게 여긴 말이니, 나라가 비록 망했으나 사람이 없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나라가 멸망한 경우에 ‘死之’라고 쓴 것이 세 나라이다. 蜀漢이 망할 때에 傅僉과 諸葛瞻과 北地王에게 썼고, 吳나라가 망할 때에 張悌에게 썼고, 涼나라가 망할 때에 掌據에게 썼으니, 모두 나라가 멸망할 때에 좋게 여긴 말이다.[書死之 予節也 未有書迎戰者 書迎戰死之 重予之也 凡國滅 書死之 亡國之善辭也 以爲國雖亡而不爲無人焉耳 終綱目 國滅 書死之者三國 漢之亡也 書傅僉諸葛瞻北地王 吳之亡也 書張悌 涼之亡也 書掌據 皆亡國之善辭也]” ≪書法≫
“‘石頭城에 들어갔다.’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晉軍이 아직 吳나라의 國都에 이르지 않았는데 孫皓가 나와 항복하였으니, 기타 社稷을 위하여 죽지 않은 자와 또 다른 것이다.[◯書入石頭 何 未及國也 而皓出降 與他不死社稷者 又異矣]” ≪書法≫ “孫皓의 죄가 桀王보다도 더 심하였다. 張悌는 그가 패망할 줄을 알았는데 그의 승상이 되었으니, 지혜롭다고 말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가 諸葛靚에게 고한 말을 보면 또한 죽음에 대처하는 것을 잘 알았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므로 ≪자치통감강목≫에서 이에 대하여 ‘諸軍이 함께 진격했다.’고 썼으면 적의 형세가 매우 강함을 볼 수 있고, ‘맞이하여 싸우다가 죽었다.’고 썼으면 항거하고 싸우다가 적에게 죽임을 당한 것임을 볼 수 있으니, 이는 충절을 온전히 지켰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吳나라 전체의 많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도 더 이상 국난에 죽지 않아 장제가 말한 것과 같이 되니, 또한 치욕이 아니겠는가. 이는 진실로 書法의 뜻이다.[孫皓罪浮于桀 張悌知其敗亡 而爲之相 不足以言智 然觀其告諸葛靚之言 亦可謂審於處死者 故綱目於此書諸軍竝進 則見敵勢之甚強 書迎戰死之 則見拒戰而死敵 此所以予其全節者也 不然 以全吳之衆 無復一人死難 如悌所云 不亦辱乎 此固書法之意也]” ≪發明≫
“또 말하였다. ‘吳나라를 평정하였을 때에 王渾과 王濬이 功을 다투었다. 이제 여기에서 쓴 것을 보면 왕준이 舟師를 거느리고 石頭城에 들어가자 「吳主 孫皓가 나와서 항복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 공이 진실로 왕준에게 돌아가는 것이니, 이는 論功行賞하는 斷案이다.’[◯又曰 平吳之擧 渾濬爭功 今觀此書 濬以舟師入石頭 吳主皓出降 則其功固有歸矣 此論功行賞之斷案也]” ≪發明≫
書法은 ‘筆法’이란 말과 같다. 朱子는 ≪자치통감강목≫을 편찬할 적에 孔子의 ≪春秋≫ 筆法을 따라 綱과 目으로 나누었는바, 綱은 ≪春秋≫의 經文을, 目은 ≪春秋左氏傳≫의 傳文을 따랐다. ≪자치통감강목≫의 筆法을 밝힌 것으로는 劉友益(宋)의 ≪綱目書法≫, 尹起莘(宋)의 ≪綱目發明≫이 그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두 책은 현재 淸나라 聖祖(康熙帝)가 엮은 ≪御批資治通鑑綱目≫에 모두 수록되어 있다. 이 필법은 綱에 주안점이 맞춰져 있는데, 우리나라 학자들이 특별히 이 ≪자치통감강목≫을 愛讀한 이유는 바로 이 필법에 있다. ≪어비자치통감강목≫에는 이외에도 汪克寬(元)의 ≪綱目凡例考異≫ 등 많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으나, 본서에서 다 소개하지 못하고 ≪강목서법≫과 ≪강목발명≫의 중요한 것만을 발췌하여 수록하였다. 또한 陳濟(明)의 ≪資治通鑑綱目集覽正誤≫를 인용하여 오류를 바로잡기도 하였다. 본고에서는 각각 ≪書法≫, ≪發明≫, ≪正誤≫로 요약하여 표기하였다.
역주2 : 反切音을 표시한 것이다. ‘反(번)’은 뒤집는다(되치다)는 뜻으로 번역을 의미하고, ‘切’은 자른다는 의미이다. 앞 글자의 初聲을 따고 뒷글자의 中聲과 終聲을 따서 읽는다.
역주3 (鶩)[騖] : 저본에는 ‘鶩’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騖’로 바로잡았다.
역주4 일은……보인다 : 周나라 赧王 31년에 燕나라의 樂毅가 上將軍이 되어 燕과 趙, 楚, 韓, 魏의 군사를 거느리고 齊나라에 들어가 濟西에서 齊軍을 격파하고는 그 승세를 타고 齊나라의 수도인 臨淄로 쳐들어가 성을 함락시키자, 燕나라 湣王이 악의를 昌國君에 봉하여 齊나라에 머물며 아직 함락되지 않은 성을 굴복시키도록 하니, 악의가 6개월 동안 齊나라의 70여 성을 굴복시켰던 일을 가리킨다.(≪資治通鑑綱目 제1권 하≫)
역주5 蜀……병사들 : 晉나라 王濬‧唐彬 등이 蜀 지역에서 장강을 따라 내려오는 수군을 가리킨다.(≪資治通鑑新注≫, 陝西人民出版社, 1998)
역주6 張舜民이……된다 : 張舜民은 北宋시대 인물로, 자는 芸叟, 호는 浮休居士이며, 벼슬은 監察御史, 諫議大夫 등을 지냈다. 인용한 내용은 장순민의 ≪畫墁集≫ 권7 〈郴行錄〉에 보인다.
역주7 輿櫬 : 관을 실은 수레를 대동하는 것으로, 죽음을 결심하거나 또는 죄가 있어서 마땅히 죽어야 한다는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역주8 (票)[驃] : 저본에는 ‘票’로 되어 있으나, ≪晉書≫에 의거하여 ‘驃’로 바로잡았다.
역주9 遣使行荊揚 除吳苛政 : “漢나라 高祖가 처음 關中에 들어갔을 적에 ‘秦나라의 가혹한 법을 없앴다.’고 썼고, 世祖(光武帝)가 처음에 河北에 이르렀을 적에 ‘王莽의 가혹한 정사를 없앴다.’고 썼는데, 이때 ‘吳나라의 가혹한 정사를 없앴다.’라고 썼으니, 이는 백성들을 위로한 군대로써 晉나라를 인정한 것이다.[漢高之初入關也 書除秦苛法 世祖之初至河北也 書除莽苛政 於是書曰除吳苛政 其予晉以弔民之師也]” ≪書法≫
역주10 賈充이……것이다 : 魏나라의 제4대 황제인 高貴鄕公 曹髦를 가충이 시해한 것을 이른다. 고귀향공은 제위에 오르기 전의 작위인데 시호가 없어 이렇게 칭하였다. 조모는 曹丕의 손자로, 曹芳이 폐위된 뒤 황제에 즉위하여 처음에는 총명하고 재주가 있어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모았으나, 司馬師에 이어 司馬昭가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실권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司馬氏의 횡포가 심해지자 王沈 등과 함께 사마소를 제거하려 하다가 사마소의 심복인 賈充 등에 의해 살해당하고 사마소에 의해 曹奐이 다음 황제로 옹립되었다.(≪三國志≫ 권4 〈魏書 高貴鄕公傳〉)
역주11 옛날에……가리킨다 : 자기를 알아준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복수를 감행하였던 豫讓과 聶政의 고사를 가리킨다. 예양은 戰國時代 晉나라 사람으로 智伯을 섬겨 총애를 받았는데, 趙襄子가 지백을 쳐서 멸망시키자, 지백의 원수를 갚기 위해 신분을 숨기고 일부러 죄수가 되어 조양자 집안의 측간 벽을 바르며 조양자를 암살하고자 하였고, 이 일이 실패하자 몸에 옻칠을 하여 모습을 나병 환자처럼 바꾸고 숯을 삼켜 벙어리가 되어 조양자를 刺殺하려고 하다가 조양자에게 잡히자 自決하였다. 섭정은 전국시대 자객으로, 자기에게 은덕을 베푼 韓나라의 대신인 嚴仲子를 위해 그의 원수인 韓나라 정승 俠累를 죽인 뒤에 스스로 자신의 낯가죽을 벗기고 배를 갈라 죽었다.(≪史記≫ 권86 〈刺客列傳 豫讓‧聶政〉)
역주12 藺生이……굴복시킨 : 인생은 전국 시대 趙나라의 재상 藺相如인바, 和氏璧과 관련된 외교 문제를 지혜롭게 처리하고 秦나라에서 돌아와 上卿이 되자, 廉頗가 오랫동안 큰 공을 세운 자기보다 높은 지위에 있다고 하여 인상여에게 모욕을 가하려 하였다. 그런데도 인상여가 국가의 일을 먼저 생각하고 사적인 감정을 뒤로 돌리자, 염파가 가시나무 매를 짊어지고 인상여의 집에 찾아가서 사과하였다. 이후 두 사람이 刎頸之交를 맺어 매우 친하게 지내면서 국사를 돌보았다. 이에 이들 두 사람이 조정에 있는 동안에는 秦나라에서 감히 趙나라를 공격하지 못하였다.(≪史記≫ 권81 〈廉頗藺相如列傳〉)
역주13 鄧艾가……때문이다 : 鍾會의 모함으로 인하여 등애가 監軍 衛瓘에게 죽임을 당한 것을 가리킨다. 魏나라 景元 4년(263)에 등애가 蜀漢의 도성인 成都를 함락하여 後主가 항복함으로써 蜀漢이 망하니, 이 공으로 등애가 太尉에 올랐다. 등애는 성도에 있으면서 吳나라를 멸망시킬 계책을 세우는 데에 온 힘을 쏟았으나, 한편으로 자신의 공로를 과시하고 자랑하였다. 이를 미워한 종회가 등애가 올린 글과 表文을 가로채어 그것을 모두 오만무례한 내용으로 바꾸었다. 이로 인해 魏나라에서 檻車로 등애를 압송하였는데, 등애 本營의 將兵들이 등애를 탈출시켰으나, 감군 衛瓘이 田續을 보내어 등애 父子를 綿竹의 서쪽에서 덮쳐 살해하였다.(≪資治通鑑≫ 권78 〈魏紀〉 元皇帝 下)
역주14 (治)[冶] : 저본에는 ‘治’로 되어 있으나, ≪水經註≫에 의거하여 ‘冶’로 바로잡았다.
역주15 詔罷州郡兵 : “漢나라 高祖에게는 일찍이 ‘군대를 해산하여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썼고, 光武帝에게도 일찍이 ‘車騎와 材官을 해산하여 다시 평민으로 돌아가게 했다.’고 썼으니, 모두 찬미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州郡의 군대를 해산하였다.’고 쓴 것은 찬미한 것인가. 武備를 망각하였음을 비난한 것이다. 큰 郡에 무관 100명과 작은 군에 50명을 가지고 어떻게 비상사태를 대비할 수 있겠는가. 永寧 연간 이후에 武備를 망각한 폐해가 나타났다. 그러므로 이것을 써서 비난한 것이다.[漢高嘗書兵罷歸家矣 光武亦嘗書罷車騎材官 還復民伍矣 皆美之也 此書罷州郡兵 其美之歟 譏忘武也 大郡百人 小郡五十 何足以備不虞哉 永寧之後 忘武之弊見矣 故書譏之]” ≪書法≫
“천하가 비록 편안하나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태로운데, 晉나라 武帝는 겨우 吳會 지방을 점령하자, 이미 武備를 폐할 마음이 있었다. 그러므로 ‘詔令을 내려 州郡의 군대를 해산했다.’고 써서 그 잘못을 드러낸 것이다.[天下雖安 忘戰必危 晉武甫平吳會 已有撤備之意 故書詔罷州郡兵 以著其失]” ≪發明≫
역주16 霍弋 : 字가 紹先으로, 삼국시대 蜀漢 때부터 西晉 초기에 고위 군관을 지낸 인물이다. 劉備 때에 太子舍人이었고 유비 사후에는 諸葛亮 밑에서 丞相府記室로 있었다. 제갈량이 죽은 뒤에는 黃門侍郞이 되었고 劉禪이 태자가 된 뒤에는 中庶子가 되어 태자를 직간으로 보필하였다. 이후 永昌郡의 蠻夷가 난을 일으켰을 적에 永昌太守에 임명되어 오랑캐를 토벌하였고 평정된 뒤에는 監軍翊軍將軍이 되어 南中의 여러 郡을 통솔하였다. 유선이 晉나라에 항복한 후에도 계속해서 南中都督이 되어 交阯, 日南, 九眞 세 郡을 평정하여 그 공으로 列侯에 봉해졌다.(≪三國志≫ 권41 〈蜀書 霍弋傳〉)

자치통감강목(13) 책은 2020.12.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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