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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7)

자치통감강목(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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起戊辰宋文帝元嘉五年 魏太武帝神䴥元年하여 盡庚寅宋文帝元嘉二十七年 魏太武帝太平眞君十一年이라 凡二十三年이라
宋元嘉五年이요 魏神䴥元年注+䴥, 音加, 牡鹿也. 以獲神鹿改元.이라
◑西秦王乞伏暮末永弘元年이요 北涼承玄元年이요 夏主赫連定勝光元年이라
春二月 하니 夏赫連定稱帝於平涼이어늘 魏人追之敗績이라 夏復取長安하다
魏將軍尉眷 攻上邽하니 夏主退屯平涼이어늘 奚斤進軍安定하여 與丘堆娥清軍合이러니 斤以馬疫糧少 深壘自固하고
遣堆行督租할새 士卒暴掠不設儆備 夏主襲之하니 堆敗還城이어늘 夏主乗勝하여 日夜鈔掠하니 不得芻牧이라 諸將患之러라
監軍侍御史安頡曰注+頡, 同之子也. 受詔滅賊이어늘 今更爲賊所困하니 若不爲賊殺이면 當坐法誅 進退皆無生理로되 而諸王公晏然曾不爲計乎注+奚斤封宜城王, 爲司空.
斤曰 今以歩擊騎 必無勝理 當須京師救騎至라가 合擊之니라
頡曰 今猛冦遊逸於外하고 吾兵疲食盡하니 不一决戰하면 則死在旦夕이라 救騎 何可待乎 等死 死戰 不亦可乎
斤又以馬少爲辭어늘 頡曰 今斂諸將所乘이면 可二百匹이라 頡請募死士擊之하면 就不能破敵이라도 亦可以折其鋭
且赫連昌 狷而無謀하고 好勇而輕注+狷, 急也. 輕, 去聲.하여 毎自出挑戰 衆皆識之 若伏兵掩擊이면 昌可擒也니라한대 斤猶難之러라
頡乃陰與尉眷等謀하여 選騎待之러니 既而 夏主來攻城이어늘 頡出應之하니
夏主自出搏戰이어늘 軍士爭赴之하니 夏主敗走어늘 頡追擒之하니 夏平原王定 收其餘衆하여 奔還平涼하여 即位하다
昌至平城하니 魏主以妹妻之하고 賜爵會稽公하고 頡賜爵西平公하고 眷進爵漁陽公하다
奚斤以昌爲偏裨所擒으로 深恥之하여 乃捨輜重하고 齎三日糧하여 追夏主於平涼이어늘 娥清欲循水而往注+淸蓋欲循涇水而進.이어늘 斤不從하고 自北道邀其走路하니
夏軍將遁이러니 會魏小將 有罪亡歸夏하여 告以魏軍食少無水 夏主乃分兵夾擊之하니 魏兵大潰
斤清皆爲所擒하고 士卒死者 六七千人이라 丘堆棄輜重하고 奔長安하여 與高涼王禮 偕奔蒲坂注+禮, 孤之曾孫也.하니 夏人復取長安이라
魏主大怒하여 命安頡斬丘堆하고 代將其衆하여 鎭蒲坂以拒之하다 昌後竟以謀叛見殺하니라
夏五月 秦王乞伏熾磐卒하고 世子暮末立하다
◑六月 宋以王弘爲衛將軍開府儀同三司하다
光祿大夫范泰說弘曰 天下事重하고 權要難居 卿兄弟盛滿하니 當存降挹注+謂弘及弟曇首皆居權要也. 挹, 音邑, 損也.이라
弘納其言하여 遜位어늘 不許하되 固請이라 故有是命하니라
涼侵秦하니 秦及涼平하다
西秦文昭王 疾病 謂暮末曰 吾死之後 汝能保境則善矣 沮渠成都 蒙遜所重이니 汝宜歸之注+宋武帝永初三年 河西王蒙遜 遣前將軍沮渠成都하여 屯五澗하니熾磐 遣征北將軍出連虔等하여 與成都戰擒之하다니라
至是하여 北涼 因秦喪而伐之하여 攻樂都하여 克其外城하니 暮末 遣使許歸成都以求和한대 蒙遜引兵還하고 遣使入秦弔祭어늘
暮末厚資送成都하여 遣將軍王伐送之한대 蒙遜疑之하여 伏兵執伐以歸러니 既而遣還하고 并遺暮末甚厚러라
冬十一月朔 日食하다


五柳歸庄圖五柳歸庄圖
≪資治通鑑綱目≫ 제25권은 戊辰年(428) 宋나라 文帝 元嘉 5년과 北魏 太武帝 神䴥(신가) 원년부터 시작하여 庚寅年(450) 宋나라 文帝 元嘉 27년과 北魏 太武帝 太平眞君 11년까지이니, 모두 23년이다.
宋나라 太祖 文帝 劉義隆 元嘉 5년이고, 北魏 世祖 太武帝 拓跋燾 神䴥注+ⓛ 䴥는 음이 加이니, 수사슴이다. 신기한 사슴을 잡았으므로 연호를 바꾸었다. 원년이다.
西秦王 乞伏暮末 永弘 원년이고, 北涼 武宣王 沮渠蒙遜 承玄 원년이고, 夏主 赫連定 勝光 원년이다.
[綱] 봄 2월에 北魏 사람들이 夏나라와 上邽에서 전투를 하여 그 군주 赫連昌을 잡아서 돌아갔다. 夏나라 赫連定이 平涼에서 황제를 칭하였는데, 北魏 사람들이 추격하였으나 패배하였다. 夏나라가 다시 長安을 빼앗았다.
[目] 北魏의 將軍 尉眷(울권)이 上邽를 공격하니, 夏主가 물러나 平涼에 주둔하였다. 奚斤이 安定으로 진군하여 丘堆․娥淸의 군대와 합류하였다. 해근은 말이 역병에 걸리고 군량이 부족한 것으로 인해서 보루를 높이 쌓아 스스로 견고히 지켰다.
구퇴를 파견하여 군량을 조달하는 것을 감독하게 할 적에, 병사들이 약탈하느라 경비를 세우지 않았는데 〈이를 틈타〉 夏主가 습격하니, 구퇴는 패하여 성으로 돌아갔다. 夏主가 승리의 기세를 타고서 날마다 〈성 아래에 와서〉 약탈을 하니, 北魏의 군대가 꼴을 베고 가축을 방목할 수 없자 여러 장군들이 이를 근심하였다.
監軍侍御史 安頡이注+① 安頡은 安同의 아들이다. 말하기를 “조서를 받들어 적을 섬멸해야 하는데 지금 도리어 적에게 곤궁함을 당하고 있으니, 만일 적에게 죽지 않더라도 마땅히 법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나아가든 물러나든 모두 살아날 방도가 없는데도 여러 왕공들께서는注+② 奚斤은 宜城王에 책봉되어 司空이 되었다. 편안하게 있으면서 어찌 계책을 세우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해근이 말하기를 “지금 보병으로 기병을 공격하면 필시 승리할 리가 없다. 마땅히 도성에서 구원해줄 기병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합세해서 그들을 공격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안힐이 말하기를 “지금 맹렬한 적들이 밖에서 마음대로 날뛰고 있고, 우리 군사들은 지친데다 식량도 떨어졌으니 한 번 결전을 치르지 않으면 죽음이 조만간에 있을 것입니다. 언제까지 구원해줄 기병을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어찌하든 똑같이 죽는다면 싸우다 죽는 것이 역시 옳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目] 奚斤이 또 말이 적다는 이유로 사양하자, 安詰이 말하기를 “지금 여러 장군들이 타고 있는 말을 모으면 200필이 됩니다. 저 안힐이 청하건대 결사대를 모집하여 그들을 공격하면 가령 적을 격파하지 못하더라도 또한 그 銳氣를 꺾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또 赫連昌은 조급하며 꾀가 없고, 용맹을 좋아하며 경솔하여注+① 狷은 급하다는 뜻이다. 輕(경솔하다)은 去聲이다. 늘 스스로 나와서 싸움을 거는 것을 많은 군사들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만약 병사를 매복시켰다가 급습하면 혁련창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해근은 여전히 그 일을 어렵게 여겼다.
안힐은 마침내 은밀히 尉眷 등과 모의하여 기병을 뽑아서 〈매복시키고〉 혁련창을 기다렸다. 이윽고 夏主가 와서 성을 공격하자, 안힐이 나가서 그에게 대응하였다.
夏主가 스스로 나와서 육박전을 하자 군사들이 다투어 그에게 달려들었다. 夏主가 패하여 달아나자, 안힐이 그를 추격하여 사로잡았다. 夏나라의 平原王 赫連定이 남은 무리를 수습하여 달아나 平涼으로 돌아가서 즉위하였다.
혁련창이 평성에 이르니 魏主가 누이동생을 그에게 아내로 삼게 하고 會稽公의 작위를 내려주었다. 안힐에게는 西平公의 작위를 내려주고, 울권은 漁陽公으로 작위를 높였다.
[目] 奚斤은 赫連昌이 偏裨(偏將)에게 사로잡힌 것을 매우 부끄럽게 여겼다. 마침내 輜重을 남겨두고 3일간의 군량을 가지고서 平涼으로 夏主를 추격하였다. 娥清이 물을 따라서 가자고 하였는데注+① 娥清은 涇水를 따라 전진하려고 하였다., 해근이 따르지 않고 북쪽 길을 따라 혁련정의 도주로를 차단하였다.
夏나라의 군사가 도주하려고 하였는데, 마침 北魏의 하급 장수가 죄를 지어 하나라로 도망해 귀순하여 北魏의 군사가 군량도 적고 마실 물도 없다는 것을 알렸다. 夏主가 마침내 군사를 나누어 그를 협공하니, 北魏의 군사가 크게 무너졌다.
해근과 아청은 모두 사로잡히고, 죽은 병사들이 6, 7천 명이었다. 丘堆는 輜重을 버리고 長安으로 달아나서 高涼王 拓跋禮와注+② 拓跋禮는 拓跋孤의 증손이다. 함께 蒲阪으로 달아나니, 夏나라 군사들이 다시 長安을 탈취하였다.
魏主가 크게 분노하여 安詰에게 구퇴의 목을 벨 것을 명하고, 대신 그 무리를 거느리고 蒲坂을 鎭守하여 그들을 막게 하였다. 혁련창은 이후 결국 반역을 도모한 일로 주살되었다.
[綱] 여름 5월에 西秦王 乞伏熾磐이 卒하고, 世子 乞伏暮末이 즉위하였다.
[綱] 6월에 宋나라가 王弘을 衛將軍 開府儀同三司로 삼았다.
[目] 光祿大夫 范泰가 王弘을 설득하기를 “天下의 일이 소중하고 권력의 요직에는 있기가 어렵다. 卿의 형제들은 성대함이 가득 찼으니 응당 겸손히 사양할 것을 생각하라.”注+① 〈“卿兄弟盛滿”은〉 王弘과 아우 王曇首가 모두 권력 요직에 있음을 말한다. 挹은 음이 邑이니, 줄임이다.라고 하였다.
왕홍이 그 말을 받아들여 자리에서 물러나려고 하자 허락하지 않았는데, 굳이 간청하였으므로 이런 명령이 있게 되었다.
[綱] 北涼이 西秦을 침략하였다. 가을에 西秦이 北涼과 화친을 맺었다.
[目] 예전에 西秦 文昭王(乞伏熾磐)이 병이 심해졌을 때 乞伏暮末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은 뒤에 네가 영토를 보존할 수만 있다면 좋겠다. 沮渠成都는 沮渠蒙遜이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니 너는 마땅히 그를 돌려보내라.”注+① 宋나라 武帝 永初 3년(422)에 河西王 沮渠蒙遜이 前將軍 沮渠成都를 파견하여 五澗에 주둔하게 하였다. 西秦王 乞伏熾磐이 北將軍 出連虔 등을 보내어 저거성도와 싸워서 그를 사로잡았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北涼에서 西秦에 초상이 난 틈을 이용하여 쳐들어와서 樂都를 공격하여 낙도의 外城에서 승리하였다. 걸복모말이 사절을 파견해 저거성도를 돌려보낼 것을 허락하면서 講和를 요구하였다. 저거몽손이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고 사절을 파견해 서진에 들어가서 조문하게 하였다.
걸복모말은 노자를 후하게 주어 저거성도를 보내면서 장군 王伐을 파견해 그를 호송하게 하였다. 저거몽손은 의심하여 병사를 매복시켜서 왕벌을 사로잡아서 돌아갔다. 이윽고 왕벌을 되돌려 보내고 아울러 걸복모말에게 아주 많은 예물을 보냈다.
[綱] 겨울 11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綱] 北涼이 다시 西秦을 공격하였다.


역주
역주1 魏人及夏戰于上邽 執其主昌以歸 : “나라를 멸망하게 한 임금은 그 표현이 5가지인데, ‘死之(죽였다)’가 가장 심하고, ‘執虜(사로잡았다)’가 그 다음이고, ‘以歸(데리고 돌아갔다)’가 그 다음이고, ‘獲(잡았다)’이 그 다음이고, ‘降(항복했다)’이 가장 약하다. 赫連昌은 뒤에 北魏를 배반했다가 죽임을 당하여서 北魏의 벼슬을 받은 것을 기록하지 않았으므로 여기에서도 생략한 것이다.[亡國之君其辭五 死之上也 執虜次之 以歸次之 獲次之 降爲下 昌後叛魏見殺 不書受魏爵也 故略之]” ≪書法≫
역주2 (正)[王] : 저본에는 ‘正’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王’으로 바로잡았다.
역주3 涼 復攻秦 : “‘復’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약속을 배반했기 때문이다. 이해에 西秦과 北涼이 화평을 맺었으므로 이를 기록하여 北涼을 죄준 것이다.[書復 何 背約也 是年秦及涼平矣 故書罪之]” ≪書法≫

자치통감강목(17) 책은 2021.11.0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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