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禮畢에 帝問司隷校尉劉毅하여 曰 朕은 可方漢何帝오 對曰 桓, 靈이니이다
帝曰 何至於此오 對曰 桓, 靈은 賣官하여 錢入官庫하고 陛下는 賣官하여 錢入私門하시니
以此言之하면 殆不如也니이다 帝大笑曰 桓, 靈은 不聞此言이어늘 今朕有直臣하니 固爲勝之로다
目
尙書張華 以文學才識으로 名重一時하니 論者皆謂宜爲三公이라호되 荀勗‧馮紞이 以伐吳之謀로 深疾之러라
會에 帝問華호되 誰可託後事者오 華對以明德至親이 莫如齊王이라하니 由是忤旨라
勗이 因而譖之하여 以華都督幽州러니 華撫循夷‧夏하여 譽望益振이라
帝復欲徴之
러니 紞
이 侍側
이라가 從容語及鍾會
라 紞曰 會之反
은 頗由太祖
注+文帝, 廟號太祖.하니이다
帝變色하여 曰 卿是何言邪오 紞이 免冠謝曰 善御者는 必知六轡緩急之宜라
故
로 漢高尊寵五王而誅滅
注+五王, 兩韓信‧彭越‧英布‧盧綰.하고 光武抑損諸將而克終
注+光武不使功臣預政事, 故皆保其福祿, 無誅譴者.하니
非上有仁暴之殊요 下有愚智之異也라 蓋抑揚與奪이 使之然耳니이다
目
紞이 言於帝曰 陛下詔諸侯之國을 宜從親者始니 齊王이 獨留京師可乎잇가
勗曰 百僚皆歸心齊王하니 陛下試詔之國하시면 必擧朝以爲不可하리니 則臣言驗矣리이다
帝以爲然하여 乃以攸爲大司馬, 都督靑州諸軍事하다 王渾이 上書하여 以攸至親盛德으로 宜賛朝政이어늘
今出之國
하여 假以虛號
하고 而無典戎幹方之實
하니 懼非陛下追述先帝, 太后待攸之宿意也
注+典戎, 典兵也. 幹, 正也, 詩 “幹不庭方.”니이다
若以同姓寵之太厚
하면 則有吳, 楚逆亂之謀
인댄 漢之呂, 霍, 王氏
는 皆何人也
注+漢景帝時, 吳王濞‧楚元王戊謀反, 高后時諸呂‧宣帝時諸霍‧平帝時王莽, 皆以外戚簒逆, 渾之意蓋謂齊王不當疑, 三楊不當信也.잇고
歷觀古事컨대 輕重所在에 無不爲害니 唯當任正道而求忠良耳니이다
若以智計猜物이면 雖親이나 見疑니 疏者庸可保乎잇가
目
[目] 제사하는 예가 끝나자, 황제가 司隷校尉 劉毅에게 “朕은 漢나라의 어느 황제에게 견줄 만한가?”라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桓帝와 靈帝입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어찌 이들에 견주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환제와 영제는 관직을 팔아먹고서 그 돈을 국가의 창고에 들였고 폐하는 관직을 팔아서 그 돈을 사사로이 집에 들
였으니, 이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아마 그들만도 못할 듯합니다.” 하였다. 황제가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환제와 영제는 이런 말을 모두 듣지 못했는데 지금 짐에게는 직언하는 신하가 있으니, 참으로 내가 그들보다 낫다.” 하였다.
目
[目] 尙書 張華가 文學과 才識으로 당시에 명성이 자자하니,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마땅히 三公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였으나, 荀勗(순욱)과 馮紞(풍담)이 그가 吳나라를 공격하는 계책을 냈다 하여 매우 미워하였다.
마침내 황제가 장화에게 묻기를 “누가 後事를 맡을 만한 자인가?” 하니, 장화가 “밝은 덕을 갖춘 至親 가운데에 齊王(司馬攸)과 같은 이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니, 장화는 이 때문에 황제의 뜻에 거슬렸다.
순욱이 이로 인해 장화를 참소해서 都督幽州로 삼았는데, 장화가 오랑캐와 中夏 사람들을 어루만져서 명망이 더욱 높아졌다.
황제가 다시 그를 불러오고자 하였는데, 풍담이 곁에서 모시고 있다가 조용히
鍾會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풍담이 말하기를 “종회가 배반한 것은 거의
太祖 때문입니다.”
注+文帝(司馬昭)는 廟號가 太祖이다. 하니,
황제가 얼굴빛을 바꾸고 말하기를 “卿은 무슨 말을 하는가?” 하였다. 풍담이 관을 벗고 사죄하며 아뢰기를 “말을 잘 부리는 자는 반드시 여섯 고삐의 완급을 알맞게 조절할 줄 압니다.
그러므로
漢 高祖는 다섯 명의 왕을 높이고 총애하였으나 끝내
誅滅하였고,
注+다섯 왕은 두 명의 韓信(淮陰侯 韓信과 韓王 信)과 彭越, 英布, 盧綰이다. 光武帝는 여러 장수들을 억제하여 끝을 잘 마쳤습니다.
注+光武帝는 功臣들로 하여금 정사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모두 福祿을 보존하여 주벌을 받지 않았다.
이것은 위로는 인자함과 포악함의 차이가 있고, 아래로는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의 차이가 있어서가 아니라 억제하고 드높임과 주고 빼앗음을 적절하게 시행하였기 때문입니다.
目
[目] 馮紞이 머리를 조아리고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이미 臣의 말을 옳게 여기셨으니, 마땅히 〈서리를 밟으면〉 단단한 얼음이 이루어지는 조짐을 생각하여 鍾會와 같은 무리로 하여금 다시는 국가를 傾覆하지 못하도록 하셔야 합니다.” 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오늘날 어찌 다시 종회와 같은 자가 있겠는가.” 하니,
풍담이 인하여 좌우를 물리치고 말하기를 “계책을 도모하는 폐하의 신하 중에 천하에 큰 공을 드러내어 한 방면의 鎭을 점거한 자들이나 軍馬를 총괄하는 자들은 모두 성상이 염려해야 할 대상입니다.”
하였다. 황제가 침묵을 하니, 이로 말미암아 張華를 등용하려던 계획을 중지하고 부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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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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賈充이 늙고 병들어서 자신의
諡號의 기록을 걱정하자,
注+諡는 〈살았을 때의〉 행실의 자취이다. 傳(기록)은 柱戀의 切이니, 傳이란 생존했을 때의 행실을 모두 기록해서 후세에 전하는 것이다. 賈充이 스스로 간사하고 弑逆을 해서 후세에 마땅히 나쁜 시호를 加할 줄을 알고, 또 훌륭한 史官의 사필에 誅罰을 면치 못할 줄을 안 것이다. 從子인
賈模가 말하기를 “옳고 그름은 오래되면 저절로 나타나니, 엄폐할 수가 없습니다.”
注+見(나타남)은 賢遍의 切이다. 하였다.
이때에 가충이 죽으니, 후사가 없었다. 그의 아내
郭槐가 외손인
韓謐(한밀)을
世孫으로 삼고자 하였는데,
注+韓謐은 賈充의 사위인 韓壽의 아들이다. 世孫은 嫡孫으로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대를 잇는 자를 이른다.
曹軫이 간하기를 “禮에 他姓으로 후사를 삼는 글이 없습니다.” 하였다. 곽괴가 表文을 올리기를 “가충의 유언입니다.” 하니,
황제가 이를 허락하고 이어서
詔令을 내리기를 “만일
功이
太宰(가충)와 같고 처음
封하여 후사가 없는 자가 아니면 이것을
準例로 삼을 수 없다.”
注+“始封無後者”는 처음 封地를 받고 대를 이을 후사가 없는 자를 이른다. 하였다.
太常에서 시호를 논하게 되자 博士 秦秀가 말하기를 “가충이 禮를 어기고 情에 빠져서 큰 인륜을 어지럽혔습니다.
옛날
鄫나라가 외손인
莒나라의
公子를 길러 후사로 삼았는데, ≪
春秋≫에 ‘
莒나라 사람이
鄫나라를 멸했다.’
注+≪春秋穀梁傳≫에 “‘莒나라 사람이 鄫나라를 멸했다.’ 하였는데, 참으로 멸망시킨 것이 아니고 他姓을 세워 제사를 받들게 함은 바로 멸망하는 道임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라고 썼으니, 이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血食을 끊고 조정의 혼란한 근원을 열어놓았기 때문에 이렇게 쓴 것입니다.
살펴보건대 시호 짓는 법에 기강과 법도를 혼란시킨 것을 ‘荒’이라고 하니, ‘荒公’이라고 시호할 것을 청합니다.” 하였는데, 황제가 시호를 ‘武’로 바꾸었다.
目
[目] 齊王 司馬攸의 덕망이 날로 융성해지니, 荀勗, 馮紞, 楊珧가 모두 그를 미워하였다.
풍담이 황제에게 말하기를 “폐하께서 詔令을 내려 제후들에게 封國으로 나아가게 한 것은 친한 자부터 시작하여야 하는데, 齊王이 홀로 京師에 있는 것이 온당하겠습니까.” 하였다.
순욱이 말하기를 “백관들의 마음이 모두 齊王에게 돌아가 있습니다. 폐하께서 한번 조령을 내려 그에게 봉국으로 나아가게 하시면 반드시 온 조정의 사람들이 불가하다 할 것이니, 그러면 신의 말이 사실로 증명될 것입니다.” 하였다.
황제는 그의 말을 옳게 여겨 마침내 사마유를 大司馬 都督靑州諸軍事로 삼았다. 이에 王渾이 다음과 같이 上書하였다. “사마유는 至親이면서 성대한 덕을 갖춘 인물이니, 마땅히 조정의 정사를 도와야 하는데,
이제 봉국으로 내보내며 헛된 이름을 빌려주어 군대를 주관하고 방면을 다스리는 실제가 없으니, 폐하께서
先帝와
太后가 사마유를 대우한 예전의 뜻을 따르지 않으실까 염려스럽습니다.
注+“典戎”은 군대를 통솔하는 것이다. 幹은 바로잡음이니, ≪詩經≫에 “조회 오지 않는 나라를 바로잡는다.” 하였다.
만약 ‘
同姓을 너무 총애할 경우
吳나라와
楚나라처럼 반역을 하고 난을 일으키는 도모가 있을 것이다.’라고 한다면,
漢나라의
呂氏,
霍氏,
王氏가 모두 어떤 사람입니까.
注+漢나라 景帝 때에 吳王 劉濞와 楚나라 元王 劉戊가 모반을 하였고, 高后 때의 여러 呂氏와 宣帝 때의 여러 霍氏와 平帝 때의 王莽은 모두 외척으로 찬탈하고 반역하였으니, 王渾의 뜻은 齊王을 마땅히 의심해서는 안 되고 三楊을 믿어서는 안 됨을 말한 것이다.
옛날 일을 일일이 살펴보건대
오직 마땅히
正道에 맡기고
忠良을 구할 뿐입니다.
만약 지혜와 계책으로 사람을 시기한다면 비록 친한 사람이라도 의심을 받으니, 소원한 자를 어찌 보존할 수 있겠습니까.”
目
[
目] 이에
扶風王 司馬駿과
光祿大夫 李憙와
中護軍 羊琇와
侍中 王濟,
甄德이 모두
極諫하였다.
注+甄德은 文帝의 딸인 長廣公主에게 장가들었다.
왕제와 견덕은 또 그 아내인 공주로 하여금 모두 들어가 눈물을 흘리면서 황제에게 司馬攸를 머물게 할 것을 청하자,
황제가 노하여 王戎에게 이르기를 “형제간은 지극히 친한 사이이다. 이제 齊王을 내보냄은 본래 朕의 집안일인데
견덕과 왕제가 연이어 부인을 보내와서 朕이 살아 있는데도 와서 곡을 한단 말인가.” 하고는 마침내 왕제와 견덕을 궁중에서 내보냈으며, 이희는 마침내 연로하다 하여 직위를 내놓고 집에 있다가 卒하였다.
이희는 조정에 있을 적에 친인척과 친구들과 함께 의복과 음식만 나누어 먹고 일찍이 천자의 관작을 남에게 사사로이 내리지 않으니,
注+〈“未嘗私以王官”은〉 천자의 官爵을 남에게 사사로이 내리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사람들이 이 때문에 그를 칭찬하였다.
目
[目] 혹자가 吳郡 사람 陸喜에게 이르기를 “薛瑩은 吳나라 선비 중에 마땅히 제일의 인물이 되겠는가?” 하니, 육희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孫皓가 無道하니,
吳나라 선비들 중에 침묵을 지키고 몸을 숨겨 등용되지 않은 자가 제일이고, 높은 자리를 피하고 낮은 자리에 거하여 적은 녹봉으로써 농사짓는 것을 대신한 자가 두 번째이며,
강직하게 나라를 깊이 생각하여 정사를 집행하고 두려워하지 않은 자가 세 번째이고,
注+侃은 剛直함이다. 時宜를 참작해서 때때로 작은 이익을 바친 자가 네 번째이며,
온화하고 공손하고 행실을 닦고 신중하여 군주에게 영합하지 않은 자가 다섯 번째이다. 이것 외에는 굳이 다시 나열할 것이 없다.
저 上等의 선비들은 대부분 자취를 없애 재앙에서 멀어졌고, 中等의 선비들은 명성과 직위를 소유하여 殃禍와 가까워졌으니, 설영이 처신한 바를 살펴보면 네 번째와 다섯 번째의 사이에 속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