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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0)

자치통감강목(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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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申年(204)
九年이라 春二月 袁尙 復攻譚이어늘 夏四月 曹操攻鄴하다
秋七月 還戰이라가 敗走幽州하니 操遂入鄴하여 自領冀州牧하다
正月 曹操濟河하여 遏淇水하여 入白溝하여 以通糧道注+袁尙在鄴, 操將攻之, 故通糧道. 班志 “淇水至黎陽入河.” 曹操於水口下, 大枋木以成堰, 遏淇水, 東入白溝.하다 二月 復攻譚於平原할새 留審配守鄴이어늘
操爲土山地道以攻之하고 又攻絶其糧道하다 五月 鑿塹圍城호되 周回四十里注+土山·地道, 急攻也, 知非急攻可拔, 故鑿塹圍城, 絶其內外, 以久困之.
初令淺하여 示若可越하니 配望見笑之하고 不出争利하다 操一夜濬之하여 廣深二丈하고 引漳水灌之하니 城中餓死者 過半注+廣, 古曠切. 深, 悉禁切. 水經註 “漳水過鄴縣西.”이러라
七月 將萬餘人하여 還救鄴할새 先使主簿李孚 入城하니
孚著平上幘하고 投暮 詐稱都督하고 歴北圍而東하여 呵責守圍將士하여 隨輕重行罰注+平上幘者, 其上平也, 武吏服平上幘. 投, 至也.하고
遂歴操營前하여 至南圍하여 責怒守者하여 收縛之하다 因開其圍하고 馳到城下하여 呼城上人得入注+不先經操營前, 則守圍者必疑, 不可得而收縛, 圍亦不可開矣.하다
操聞하고 笑曰 此非徒得入也 方且復出하리라 孚知圍不可復冒하고 乃謂配호되 悉出城中老弱하여 以省榖하라
持白幡出降할새 孚隨輩出하여 突圍得去注+隨輩出, 謂隨降者之等輩, 同出城.하다
尙兵旣至 配出兵城北이어늘 操逆擊之러니 敗還하고 尙亦破走하여 依曲漳爲營注+曲漳, 漳水之曲也.이러니 操遂圍之하다
하여 求降이어늘 不聽하니 衆潰하여 犇中山하다
審配殺辛毗家屬하고 令士卒堅守死戰하여 伏弩射操하여 幾中注+中, 去聲.이러니 配兄子榮 開門内操兵注+內, 讀曰納.하다
配拒戰被執이어늘 毗以馬鞭擊其頭而罵之한대 配顧曰 狗輩 正由汝曹하여 破我冀州하니 恨不得殺汝也로라
且汝今日 能殺生我邪注+言殺生由曹操, 不由辛毗. 操引見配하고 欲活之러니 配意氣壮烈하여 終無撓辭 遂斬之하다
操乃臨祀紹墓하여 哭之流涕하고 慰勞紹妻하고 還其家人寳物하고 賜繒絮稟食注+食, 讀曰하다
紹與操共起兵할새 紹問操曰 若事不輯이면 則方面何所可據注+輯, 猶集也. 集, 成也. 操曰 足下意以爲何如
紹曰 吾南據河하여 北阻燕, 代하고 兼戎狄之衆하여 南向以爭天下 庶可以濟乎인저
操曰 吾任天下之智力하여 以道御之 無所不可라하니라
九月 詔以操領冀州牧하니 操讓하고 還兗州注+當時, 政自操出, 領則眞領, 而讓非眞讓也.하다
遣從事牽招하여 至上黨注+牽招, 姓名.이러니 聞尙走하고 說高幹以幷州迎之호되 不從이어늘 招乃詣操하여 復爲從事注+從事, 謂冀州從事.하다
操又辟崔琰하여 爲别駕하고 謂曰 昨案户籍하니 可得三十萬衆이라 故爲大州也로다
對曰 今九州幅裂하고 二袁 親尋干戈하니 冀方蒸庶 暴骨原野注+幅裂, 如布帛之裂也. 尋, 用也. 蒸, 衆也.어늘
未聞王師 存問風俗하여 救其塗炭이요 而唯以校計甲兵爲先하니 斯豈鄙州士女 所望於明公哉잇가
操改容謝之하다 許攸恃功하여 驕嫚操하니 操竟殺之注+烏巢之捷, 計出於攸, 故恃其功. 通鑑 “許攸恃功驕嫚, 甞於衆坐, 呼操小字曰 ‘某甲, 卿非我, 不得冀州也.’ 操笑曰 ‘汝言, 是也.’ 然內不樂, 後竟殺之.”하다
冬十月 有星孛于東井하다
◑高幹 以幷州降이어늘 復以爲刺史하다
◑十二月 曹操攻平原하여 拔之하니 袁譚 走保南皮하다
袁譚 復背曹操 操與書責之然後 進討注+句.하니 拔平原하여 走保南皮어늘 操入平原하여 略定諸縣하다
公孫度卒하니 子康 襲行郡事하다
曹操表度爲武威將軍하고 封永寧鄉侯하니 度曰 我王遼東하니 何永寧也注+度, 遼東太守也.오하고 藏印綬於武庫注+遼東郡之武庫也.러니 是歲하니 子康하다
丹陽郡吏 殺其太守孫翊하니 하다
丹陽督嬀覽 丞戴員 殺太守孫翊注+員, 音云. 戴員, 姓名.하다 欲逼取翊妻徐氏한대 徐紿之曰 乞須晦日 設祭除服然後 聽命호리라하고
潜使所親으로 語翊舊將孫高, 傅嬰等하여 與共圖覽하니 高, 嬰 涕泣許諾하고 密呼翊時侍養者二十餘人하여 與盟誓合謀注+侍養, 謂侍翊左右而厚蒙給養者.하다
晦日設祭하여 徐哭泣盡哀畢 乃除服하고 薰香沐浴하고 言笑懽悦하니 密覘하고 無復疑意
徐呼高, 嬰하여 置户内하고 使人召覽入하여 適得一拜注+通鑑 “徐氏出戶拜覽, 適得一拜.” 徐大呼호되 二君 可起어다
高, 嬰 俱出하여 共殺覽하고 餘人 卽就外殺員하니 徐氏乃還縗絰하고 奉覽, 員首하여 以祭翊墓하니 擧軍 震駭注+還縗絰, 謂復著縗絰也.러라
孫權 族誅覽, 員餘黨하고 擢高嬰하여 爲牙門注+牙門, 將也.하다


갑신년甲申年(204)
나라 효헌황제 건안孝獻皇帝 建安 9년이다. 봄 2월에 원상袁尙이 다시 원담袁譚을 공격하자, 여름 4월에 조조曹操업현鄴縣을 공격하였다.
가을 7월에 원상이 업현으로 돌아와 싸우다가 패하여 유주幽州로 달아나니, 조조가 마침내 업현에 들어가서 스스로 기주목冀州牧을 겸하였다.
】 정월에 조조曹操가 황하를 건너 기수淇水를 막아 물길이 백구白溝로 들어가게 해서 군량을 수송하는 길을 통하게 하였다.注+원상袁尙업현鄴縣에 있으니, 조조曹操가 장차 그를 공격하려 하였으므로 군량을 수송하는 길을 통하게 한 것이다.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기수淇水여양黎陽에 이르러 황하黃河로 들어간다.” 하였으니, 조조가 수구水口 아래에 큰 통나무로 제방을 설치하고 기수淇水를 막아 동쪽 백구白溝로 들어가게 했다.” 하였다. 2월에 원상袁尙이 다시 원담袁譚평원平原에서 공격할 적에 심배審配를 남겨두어 업현鄴縣을 지키게 하였는데,
조조가 토산土山을 일으키고 지도地道를 파서 공격하고, 또 그의 군량 수송로를 공격하여 끊었다. 5월에 조조가 참호를 파서 성을 포위하였는데 둘레가 40리였다.注+토산土山지도地道는 급히 공격하기 위한 것이니, 급히 공격하여 함락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러므로 참호를 파고 성을 포위해서 내외內外를 단절시켜 오래도록 곤궁하게 한 것이다.
처음에는 참호를 얕게 파서 넘어갈 수 있을 것처럼 보이니, 심배가 바라보고는 비웃고 나와서 이로움을 다투지 않았다. 조조가 하룻밤에 참호를 깊이 파서 너비와 깊이가 두 길이 되게 하고, 장수漳水를 끌어다가 업성鄴城에 주입시키니, 성안에서 굶어 죽은 자가 절반이 넘었다.注+(너비)은 고광古曠이다. (깊이)은 실금悉禁이다. ≪수경주水經註≫에 “장수漳水업현鄴縣 서쪽을 지나간다.” 하였다
】 7월에 원상袁尙이 만여 명을 거느리고 돌아와 업현鄴縣을 구원할 적에 먼저 주부主簿이부李孚로 하여금 에 들어가게 하였다.
이부는 〈무관武官이 쓰는〉 평상책平上幘을 착용하고 저물녘에 조조군曹操軍도독都督이라 사칭하고, 북쪽(조조군)의 포위망을 지나 동쪽으로 가면서 포위망을 지키는 장병들을 질책하여 죄의 경중에 따라 벌을 시행하고注+평상책平上幘은 머리 윗부분이 평평한 것이니, 무관武官들은 평상책을 착용하였다. 는 이름이다.,
마침내 조조의 진영 앞을 지나 남쪽의 포위망에 이르러서 수비하는 자들을 질책해서 포박하였다. 이부는 기회를 틈타 조조군의 포위망을 열고 성 아래로 달려가서 성 위에 있던 원상의 병사들을 부르니 〈성 위에 있는 사람이 밧줄로 끌어올려 이부가〉 성안으로 들어갔다.注+이부李孚가 먼저 조조군曹操軍의 진영 앞을 지나가지 않았으면 포위망을 지키는 자가 반드시 의심하였을 것이니, 이부가 조조군의 수비하는 병사들도 포박할 수 없었을 것이고 포위 또한 열 수 없었을 것이다.
조조는 이 말을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이 사람은 다만 우리의 포위망 속으로 들어올 뿐만 아니라 장차 다시 나갈 것이다.” 하였다. 이부는 포위망이 철저하여 다시 뚫고 나갈 수 없음을 알고는 마침내 심배審配에게 이르기를 “성중城中의 노약자를 모두 성 밖으로 내보내어 곡식을 절약하라.” 하였다.
밤중에 노약자들이 백기白旗를 가지고 나가 항복할 적에 이부가 그들을 따라 나가서 포위망을 뚫고 무사히 떠나갔다.注+수배출隨輩出”은 항복하는 자들의 무리를 따라 함께 성을 나감을 이른다.
원상袁尙의 군대가 도착하자, 심배審配가 군대를 성 북쪽으로 출동시켰는데, 조조曹操가 맞아 공격하니 패하여 돌아왔다. 원상 또한 패주하여 곡장曲漳에 의지해서 진영을 만들었는데注+곡장曲漳장수漳水의 굽이이다., 조조가 마침내 원상을 포위하였다.
원상이 두려워하여 항복을 청했으나 조조가 항복을 받아주지 않으니, 원상의 무리들이 무너져서 중산中山으로 달아났다.
심배가 신비辛毗의 가솔들을 죽이고는 병졸들로 하여금 굳게 지켜 결사적으로 싸우게 하고 궁노부대를 매복시켜 조조를 쏘아 거의 맞출 뻔하였는데注+(맞추다)은 거성去聲이다., 심배의 형의 아들 심영審榮이 성문을 열어 조조의 군대를 받아들였다.注+(받아들이다)는 으로 읽는다.
심배審配가 항거하여 싸우다가 사로잡히자 신비辛毗가 말채찍으로 그의 머리를 치면서 꾸짖으니, 심배가 돌아보고 말하기를 “개 같은 무리들아! 바로 네놈들 때문에 우리 기주冀州가 격파되었으니, 너를 죽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또 네가 금일今日에 능히 나를 네 맘대로 죽이고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注+〈“차여금일 능살생아야且汝今日 能殺生我邪”는〉 나를 살리고 죽임이 조조曹操에게 달려 있고, 신비辛毗에게 달려 있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조조曹操는 심배를 인견引見하고는 살려주고자 하였으나, 심배의 의기意氣장렬壮烈하여 끝내 굽히는 말이 없자, 마침내 그를 참수하였다.
조조는 원소袁紹의 묘에 가서 제사하여 하고 눈물을 흘렸으며, 원소의 아내를 위로하고 그 가솔들과 보물을 돌려주고, 비단과 솜과 창고의 곡식을 하사하였다.注+(양식)는 로 읽는다.
】 처음에 원소袁紹조조曹操와 함께 군대를 일으킬 적에 원소가 조조에게 묻기를 “만약 일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방면方面 중에 어느 곳을 점거해야 하는가?”注+과 같으니, 은 이룸이다. 하니, 조조가 말하기를 “족하足下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였다.
원소가 말하기를 “내 남쪽으로 황하를 점거하여 북쪽으로 , 를 의지하고 융적戎狄의 무리를 겸병하고서 남쪽을 향해 천하를 다투면 거의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조조는 말하기를 “저는 천하의 지혜롭고 용력勇力이 있는 자에게 맡겨서 로써 어거할 것이니, 그렇게 하면 불가不可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 9월에 조령詔令을 내려 조조曹操에게 기주목冀州牧을 겸하게 하니, 조조가 사양하고 연주兗州로 돌아갔다.注+당시에 정사가 조조曹操에게서 나왔으니, 겸하게 한 것은 진짜 겸하게 한 것이고 사양한 것은 진짜 사양한 것이 아니다.
】 처음에 원상袁尙종사 견초從事 牽招상당上黨으로 보냈는데注+견초牽招는 사람의 성명姓名이다., 견초는 원상이 패주敗走했다는 말을 듣고 고간高幹에게 병주幷州를 가지고 원상을 맞아들일 것을 설득하였으나 따르지 않자, 견초가 마침내 조조曹操에게 가서 다시 종사從事가 되었다.注+종사從事”는 기주종사冀州從事를 이른다.
조조는 또 최염崔琰을 불러 별가别駕로 삼고 이르기를 “어제 호적户籍을 살펴보았는데, 30만의 병력을 얻을 수 있으니 진실로 큰 가 될 만하다.” 하자,
최염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지금 가 비단 폭처럼 찢어지고 골육骨肉인 두 원씨袁氏가 창과 방패를 사용하고 있으니, 기주冀州 지방 백성들의 해골이 언덕과 들에 뒹굴고 있습니다.注+폭렬幅裂”은 국토國土가 마치 포백布帛의 폭처럼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이다. 은 씀이다. 은 무리이다.
그런데도 천자의 군대가 백성들의 풍속風俗(질고疾苦)을 위로하여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원한다는 말을 듣지 못했고, 오직 갑옷과 병기를 계교計較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으니, 이것이 어찌 우리 사녀士女들이 명공明公에게 바라는 바이겠습니까.”
이에 조조는 용모를 고치고 그에게 사과하였다. 허유許攸을 믿고서 조조에게 교만하게 굴자, 조조가 끝내 그를 죽였다.注+〈“허유시공許攸恃功”은〉 오소烏巢에서 승리한 계책이 허유許攸에게서 나왔으므로 그 공을 믿은 것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허유許攸가 공을 믿고 교만하여 일찍이 여러 사람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조조曹操의 어렸을 때 를 부르며 ‘아, 은 내가 아니면 기주冀州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하니, 조조曹操가 웃으며 말하기를 ‘네 말이 옳다.’ 하였다. 그러나 내심 기뻐하지 않았는데, 뒤에 끝내 그를 죽였다.” 하였다.
】 겨울 10월에 패성孛星동정東井에 나타났다.
고간高幹병주幷州를 가지고 항복하자, 다시 그를 자사刺史로 삼았다.
】 12월에 조조曹操평원平原을 공격하여 함락하니, 원담袁譚이 달아나 남피南皮를 지켰다.
원담袁譚이 다시 조조曹操를 배반하였다. 조조가 편지를 보내어 질책한 뒤에 진군하여 토벌하니注+여기서 를 뗀다., 원담이 평원平原에서 철수하여 달아나 남피南皮를 지켰다. 이에 조조가 평원平原에 들어가서 여러 경략經略하여 평정하였다.
공손탁公孫度하니, 아들 공손강公孫康이 세습하여 의 일을 행하였다.
조조曹操표문表文을 올려 공손탁公孫度무위장군武威將軍으로 삼고 영녕향후永寧鄉侯로 봉하게 하니, 공손도가 말하기를 注+공손탁公孫度요동태수遼東太守이다. 하고는 인수印綬무고武庫(무기고)에 보관하였다.注+〈“무고武庫”는〉 요동군遼東郡의 무기고이다. 이해에 하니, 아들 공손강公孫康이 뒤를 이었다.
단양군丹陽郡의 관리가 태수 손익太守 孫翊을 죽이니, 손익의 아내 서씨徐氏가 토벌하여 그들을 죽였다.
단양丹陽규람嬀覽(규람)과 대원戴員(대운)이 태수 손익太守 孫翊을 죽였다.注+이니, 대원戴員은 사람의 성명이다. 규람이 손익의 아내 서씨徐氏를 핍박하여 취하고자 하자, 서씨가 거짓말하기를 “바라건대 모름지기 그믐날에 남편의 제사를 지내고 상복을 벗은 뒤에 명령을 따르겠다.” 하고는
은밀히 친한 사람을 시켜서 손익의 옛 장수인 손고孫高부영傅嬰 등에게 말하여 함께 규람을 도모하게 하니, 손고와 부영이 눈물을 흘리며 이를 허락하고는 예전에 손익을 모시면서 급양給養(의식을 대줌)을 받은 자 20여 명을 은밀히 불러서 함께 맹세하고 모여 계책을 세웠다.注+시양侍養”은 손익孫翊좌우左右에서 모시면서 급양給養을 후하게 받은 자를 이른다.
서씨徐氏는 그믐날 남편의 제사를 지내면서 곡하고 울면서 슬픔을 다한 뒤에 마침내 상복을 벗고는 향을 피워 목욕하고 사람들과 담소談笑를 나누며 기뻐하니, 규람嬀覽이 은밀히 엿보고는 더 이상 의심하는 뜻이 없었다.
서씨徐氏손고孫高부영傅嬰을 불러 문안에 숨겨두고 사람을 시켜서 규람을 불러 들어오게 하고는 다만 일배一拜만 한 뒤에注+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서씨徐氏가 문을 나와 규람嬀覽에게 절하는데, 다만 일배一拜만 했다.” 하였다. 서씨가 크게 고함치기를 “두 은 일어날지어다.” 하였다.
손고와 부영이 일어나 함께 규람을 죽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즉시 밖으로 나가서 대원戴員을 죽였다. 서씨는 마침내 상복과 을 다시 착용하고 규람과 대운의 머리를 받들어 손익孫翊에 제사하니, 온 진영이 진동하고 놀랐다.注+환최질還縗絰”은
손권孫權이 규람과 대운의 잔당殘黨을 멸하고 손고와 부영을 발탁하여 아문牙門으로 삼았다.注+아문牙門장수將帥이다.


역주
역주1 (飮)[飤] : 저본에는 ‘飮’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飤’로 바로잡았다.
역주2 九州 : 아홉 개의 州로 중국 전체를 가리킨다. 지역은 시대마다 약간씩 다르나, 대체로 冀州ㆍ靑州ㆍ徐州ㆍ兗州ㆍ豫州ㆍ揚州ㆍ荊州ㆍ雍州ㆍ幷州 또는 幽州를 가리킨다.
역주3 某甲 : 그의 출생 연도를 따져 부른 것으로 예를 들어 甲子년에 태어났으면 甲子生 이라고 부른 것이다. 옛날에는 상대방을 높여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고 字를 불렀으며, 상대방의 지위가 높으면 관직명을 부르거나 明公 따위로 불렀는데, 許攸는 曹操를 무슨 ○○生으로 낮추어 부른 것이다.
역주4 내가……편안[永寧]하겠는가 : 曹操는 公孫度가 遼東 지방을 안정시켜 길이 편안하게 하라는 뜻으로 永寧鄕侯에 봉하였는데, 공손도는 “내가 요동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왕 노릇 하니, 오래지 않아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 어떻게 이 지방이 오랫동안 평안하겠는가.”라고 말한 것이다.
역주5 翊妻徐氏 討殺之 : “婦人이 賊을 토벌한 것은 ≪資治通鑑綱目≫을 쓴 이래로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특별히 쓴 것이다. ≪자치통감강목≫이 끝날 때까지 부인이 적을 토벌한 것이 두 번인데(孫翊의 妻 徐氏, 馮寳의 妻 洗氏), 토벌하여 능히 죽인 자는 한 사람뿐이다.[婦人討賊 綱目以來未有也 故特書之 終綱目婦人討賊二(孫翊妻徐氏 馮寳妻洗氏) 討而能殺之者 一人而已]” ≪書法≫ “女子가 능히 절개를 지켜 욕을 당하지 않은 것도 매우 가상히 여길 만한데, 능히 변고에 임하여 계책을 내어서 徐氏와 같이 한 자는 있지 않다. 그러므로 특별히 ‘討殺’이라고 써서 그 공적을 드러낸 것이다.[女子能守節不辱者 已足深嘉 未有能臨變設謀如徐氏者 故特書討殺 以著其績]” ≪發明≫
역주6 縗服(최복)……이른다 : 縗服은 喪服으로, 縗는 衰와 통용되는바, 縗服은 斬衰와 齊衰로 나뉘는데, 婦人은 남편을 위해 斬衰三年을 입는다. 絰은 삼베로 만든 끈으로 머리에 착용하는 것을 首絰, 허리에 착용하는 것을 腰絰 또는 麻帶라 한다.

자치통감강목(10) 책은 2022.07.1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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