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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7)

자치통감강목(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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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강목(17)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宋元嘉三年이요 魏始光三年이라
春正月 宋討徐羨之傅亮하여 殺之하고 以王弘爲司徒揚州刺史錄尙書事하고 彭城王義康都督荊湘等州軍事하니 謝晦擧兵反江陵하다
宋主在江陵 孔寗子爲參軍이러니 及即位 以爲步兵校尉하니 與侍中王華竝有富貴之願이라 疾徐羨之傅亮專權하여 構之於宋主하니
帝欲誅二人하여 幷發兵討謝晦하여 乃聲言호되 當伐魏하여 取河南하고 又言拜京陵호되 治行裝艦 處分異常이라 其謀頗泄注+京陵, 蕭太后陵, 即興寧陵也. 在晉陵丹徒縣諫壁里雩山.하니
晦弟㬭馳使告晦한대 晦猶謂不然注+皭, 子肖切.이러니 江夏內史程道惠得尋陽人書하니호되 朝廷將有大處分하니 其事已審이라하여 封以示晦하다
晦以問參軍何承天한대 承天對曰 以王者之重으로 擧天下以攻一州하니 大小旣殊하고 逆順又異 境外求全 上計也
以腹心屯義陽하고 將軍帥衆戰於夏口호되 若敗어든 即趨義陽以出北境 其次也니라
晦良久曰 荊州用武之地 兵糧易給이니 聊且決戰하여 走復何晚이리오
乃使承天造立表檄하고 又與參軍顔邵謀擧兵하니 邵飲藥而死하다
晦立幡戒嚴하며 謂司馬庾登之曰 今當自下 屈卿守城注+幡, 幟也. 立幡, 猶建牙之義. 古者軍行, 則建立牙于軍門, 蓋牙亦旗幟名. 登之, 蘊之孫也.하노라
登之曰 親老在都하고 素無部衆이라 情計二三이니 不敢受旨하노라
晦仍問諸將佐호되 戰士三千이면 足守城否 周超對曰 非徒守城而已 若有外寇 可以立功이니라
登之因請解司馬以授之하니 晦即命超爲司馬하고 而轉登之爲長史하다
宋主以王弘檀道濟始不預廢弑之謀하고 弘弟曇首又所親委 密使報弘하고 且召道濟하여 欲使討晦하니
王華等 皆以爲不可어늘 宋主曰 道濟止於脅從이니 本非創謀 殺害之事 又所不關이니 吾撫而使之 必將無慮리라
道濟至 乃下詔暴羨之亮晦殺二王之罪하고 命中領軍到彥之征北將軍檀道濟하여 以時收翦하고 又命雍州刺史劉粹等하여 斷其走伏注+走, 逃也. 伏, 匿也. 謂斷其逃匿之路也.하다
是日 詔召羨之亮하니 謝㬭遣人報之한대 羨之走至新林하여 自經死注+新林浦, 去建康城二十里.하고 亮出走被執하니
宋主使以詔書示之한대 亮曰 亮受先帝布衣之眷하여 遂蒙顧託하니 黜昬立明 社稷之計也 於是伏誅하다
宋主問討晦之策於檀道濟한대 對曰 臣昔與晦同從北征注+從, 才用切. 從先帝也.하니 入關十策 晦有其九 才略明練 殆爲少敵이나
然未嘗孤軍決勝하니 戎事恐非其長이라 臣悉晦智하고 晦悉臣勇하니 今奉王命以討之 可未陳而擒也注+陳, 讀曰陣.리이다
徴王弘爲侍中司徒錄尙書事揚州刺史하고 彭城王義康爲荊湘都督荊州刺史하다
晦聞徐傅等已誅하고 自出射堂勒兵하니 數日間 四遠投集하여 得精兵三萬하다
奉表稱羨之亮等忠貞 橫被寃酷注+橫, 戶孟切.하니 皆王弘王曇首王華險躁猜忌하여 讒構成禍 今當擧兵하여 以除君側之惡하리이다
袁皇后生皇子劭注+后耽之曾孫也.하니 后自詳視하고 使馳白帝曰 此兒形貌異常하니 必破國亡家리니 不可擧 即欲殺之注+擧, 養也.하다
帝狼狽至后殿戶外하여 禁之 乃止하다 以尙在諒闇이라 故秘之러니 至是始言劭生하다
宋主自將討謝晦하여 二月 殺之하다
宋主下詔戒嚴하고 諸軍進路以討謝晦하니 晦帥衆三萬하여 發江陵할새 列舟艦自江津至於破冢하니 旌旗蔽日이라 歎曰 恨不得以此爲勤王之師
晦欲遣兵하여 襲湘州刺史張邵하니 何承天以邵兄茂度與晦善이라 曰 邵意趣未可知 不宜遽擊之니라 晦以書招邵 不從하다
宋主發建康하다
謝晦下至江口注+江口, 即西江口.러니 到彥之已至彭城洲 庾登之據巴陵하되 畏懦不敢進注+水經注 “江水過長沙下雋縣北, 又東逕彭城口, 水東有彭城磯.”이러니
會霖雨連日이라 參軍劉和之曰 彼此有雨耳 東軍方彊하니 唯宜速戰이니라
登之作大囊하여 貯茅懸於帆檣하고호되 可焚艦이니 宜須晴하여 以緩戰期注+帆, 音凡, 船上幔, 所以風而進船者. 檣, 音墻, 帆柱也.라하니 晦然之하여 停軍十五日
乃使孔延秀 攻彭城洲及洲口柵하여 陷之하니 諸將欲還夏口어늘 到彥之不可하고 乃保隱圻注+水經注 “江水自彭城磯東逕如山北, 山北對隱磯.”하다
晦與徐傅爲自全之計하여 以爲晦據上流하고 而道濟鎭廣陵하여 各有彊兵하고 羨之亮居中秉權하니 可得持久라가
至是聞道濟來하고 惶懼無計러니 道濟旣至 與彥之軍合하니 晦始見艦數不多하고 不即出戰이러니
至晩 因風帆上하여 前後連咽하니 西人離沮하여 無復鬪心이라 一時皆潰하니 晦夜還江陵注+連, 謂沿江戰艦連接不斷. 咽, 一結切, 塞也, 謂戰艦塞江, 前後塡咽.하다
先是 宋主遣劉粹하여 自陸道帥步騎하여 襲江陵이러니 周超逆戰하여 破之하다
晦舊與粹善하고 又其子曠之爲參軍이라 宋主疑之러니 王弘曰 粹無私하니 必無憂也라하다
及受命南討 一無所顧하고 晦亦不殺曠之하고 遣還粹所러라
俄而晦敗問至하니 超詣彥之降이라 晦衆散略盡하여 乃攜其弟遯等北走라가 爲人所執하니 檻送建康하다
何承天自歸於彥之어늘 彥之因監荊州府事하다 於是誅晦㬭及其同黨孔延秀周超等하다
晦女彭城王妃被髪徒跣하여 與晦訣曰 大丈夫當橫尸戰場이어늘 奈何狼藉都市
晦之走也 左右皆棄之호되 唯延陵蓋追隨不捨어늘 宋主以蓋爲鎭軍功曹督護注+延陵, 複姓. 蓋, 其名. 爲鎭軍府功曹, 又兼督護之官也.하다
三月 宋以謝靈運爲秘書監하고 顔延之爲中書侍郎하다
宋主還建康 旣徴靈運延之用之하고 又以慧琳善談論이라하여 因與議朝廷大事하고 遂參權要하니 賓客輻湊하고 四方贈賂相係
琳著高屐하고 披貂裘하고 置通呈書佐注+通呈, 典謁之職. 書佐, 掌書翰.하니 會稽孔顗曰 遂有黑衣宰相하니 可謂冠屨失所矣注+慧琳, 僧也, 故着黑衣.로다
夏五月 宋以檀道濟爲江州刺史하고 到彥之爲南豫州刺史하다
◑宋遣使巡行郡縣하다
遣散騎常侍袁渝等十六人하여 分行諸州郡縣하여 觀察吏政하고 訪求民隱하고 又使郡縣各言損益注+隱, 病也.하다
上臨延賢堂聽訟하고 自是每歲三訊注+延賢堂, 在建康華林園. 周禮秋官小司寇 “以三刺斷庶民獄訟之中, 一曰訊群臣, 二曰訊群吏, 三曰訊萬民.” 注 “刺, 殺也, 訊, 言也. 中謂罪正所定. 三訊罪定則殺之.”하다
左僕射王敬弘性恬淡하며 有重名注+敬弘, 廙之曾孫也, 名裕之, 與宋武帝諱同, 故以字行.한대 關署文案 初不省讀이러니 嘗預聽訟할새 上問以疑獄한대 敬弘不對하니
上變色이어늘 問左右호되 何故不以訊牒副僕射注+謂不以訊牒副本納呈敬弘也. 敬弘曰 臣乃得訊牒讀之호되 正自不解니이다하니 上甚不悅이러니
雖加禮敬이나 不復以時務及之러라
六月 宋以王華王曇首殷景仁劉湛爲侍中하고 謝弘微爲黃門侍郎하다
王華以王弘輔政하고 王曇首爲上所親任하여 與己相埒注+埓, 等也.하니 自謂力用不盡이라하여 每歎息曰 宰相頓有數人하니 天下何由得治리오
是時宰相無常官하여 惟人主所與議論政事하여 委以機密者 皆宰相也 亦有任侍中而不爲宰相者 然尙書令僕射中書監令侍中侍郎給事中 皆當時要官也注+監․令, 中書監․中書令.
華與劉湛王曇首殷景仁俱爲侍中하니 風力局幹 冠冕一時 黃門侍郎謝弘微與華等 皆宋主所重이니 當時號曰五臣注+弘微, 琰之從孫也, 名密. 繼從叔峻, 名犯所繼內諱, 故以字行.이러라
弘微精神端審하고 時然後言하고 婢僕之前 不妄語笑하니 由是尊卑小大敬之若神하니
從叔混特重之하여 常曰 微子異不傷物하고 同不害正하니 注+子者, 男子之美稱. 混特所敬貴號曰微子.이라하더라
混尙晉晉陵公主注+公主, 晉孝武之女.러니 混死 詔絶婚이라 公主悉以家事委弘微하니 混仍世宰輔 僮僕千人이라
唯有二女하여 年數歲러니 弘微爲之紀理生業하여 一錢尺帛이라도 皆有文簿러니 九年而晉亡하니 公主降號東鄉君하여 聽還謝氏하니
入門 室宇倉廩 不異平日하고 田疇墾闢 有加於舊 東鄉君歎曰 僕射平生重此子러니 可謂知人이로다 僕射爲不亡矣注+混仕晉爲尙書左僕射.라하고
親舊見者爲之流涕러라 及東鄉君卒 公私咸謂貲財宜歸二女 田宅僮役應屬弘微라호되 弘微一無所取하고 自以私祿葬東鄉君하다
混女夫殷叡好摴어늘 奪其妻妹及伯母兩姑之分하여 以還戲責注+分, 扶問切. 戲, 摴(蒲)[蒱]戲也. 責, 如字, 又讀曰債.하니 內人皆化弘微之讓하여 一無所爭하니
或譏之曰 謝氏累世財產 充殷君一朝戲責어늘 卿視而不言하니 譬棄物江海以爲廉耳로다
弘微曰 親戚爭財 爲鄙之甚이니 今內人尙能無言이어든 豈可導之使爭乎 分多共少하면 不至有乏이요 身死之後 豈復見關也리오하더라
宋主欲封王曇首王華等하여 拊御床曰 此坐非卿兄弟 無復今日이리라 因出封詔示之注+以誅徐傅等爲曇首華之功.하니
曇首固辭曰 近日之事 賴陛下英明하여 罪人斯得注+罪人指徐羨之等.이니 臣等豈可因國之災以爲身幸이리오 乃止하다
宋遣使如魏하다
◑秋 秦攻涼이러니 夏襲秦苑川하니 秦師還하다
◑宋大旱하고하다
◑冬十月 魏主自將攻夏하다
魏主問公卿호되 今當用兵이니 赫連蠕蠕 二國何先注+蠕, 人兗切. 蠕蠕, 卽柔然也.
長孫嵩等 皆曰 赫連土著이라 未能爲患이니 不如先伐蠕蠕 若追而及之 可以大獲이요 不及이면 則獵於陰山하여 取其禽獸皮角하여 以充軍實이니이다
太常崔浩曰 蠕蠕鳥集獸逃하니 擧大衆追之 則不能及이요 輕兵追之라도 又不足以制敵注+鳥集獸逃, 言其來則如鳥之集, 走則如獸之逃也.이니 赫連氏土地不過千里 政刑殘虐하니 人神所棄 宜先伐之니라
魏主亦聞夏世祖殂하고 諸子相圖하여 國人不安이라하고 欲伐之注+諸子相圖, 謂倫璝昌相殺也.러니
嵩等曰 彼若城守하여 以逸待勞 大檀聞之하고 乘虛入寇 此危道也
浩曰 往年以來 熒惑再守羽林鉤己而行하니 其占秦亡注+天官書, 虛危南有衆星曰羽林也.이요 今年五星竝出東方하니 利於西伐이라 天人相應하니 不可失也니라
於是遣奚斤襲蒲阪하고 周幾襲陝城하고 以薛謹爲鄉導注+謹, 彊之孫也.하다
魏主欲以李順摠前驅之兵이러니 崔浩曰 順誠有籌略이나 然其爲人 果於去就하니 不可專委니라 乃止하니 浩與順由是有隙하다
十一月 夏攻秦하여 入枹罕하다
◯魏主入統萬하니 別將取蒲阪及長安하다
魏主行至君子津注+酈道元曰 “昔漢桓帝, 西幸榆中, 東行代地, 洛陽大賈齎金貨隨帝後行, 夜迷失道, 往投津長曰 ‘子封, 送之渡河.’ 賈人卒死, 津長埋之. 其子尋求父喪, 發冢擧尸, 資貨一無所損, 其子悉以金與之, 津長不受. 事聞於帝曰 ‘君子也.’ 即名其津爲君子濟, 在雲中城西南二百餘里.”하여는 會天暴寒하여 永合이어늘 帥輕騎濟河하여 襲統萬하니
夏主方燕群臣이러니 魏師奄至하니 上下驚擾 夏主出戰而敗하여 退走入城하니
門未及閉 魏豆代田帥衆乘勝入西宮하여 焚其西門이러니 宮門閉어늘 代田踰垣而出하니 魏分兵四掠하니 殺獲數萬이라
魏主謂諸將曰 統萬未可得也 它年 當與卿等取之하리라 乃徙其民萬餘家而還하다
夏弘農太守不戰而走어늘 魏師乘勝長驅하여 遂入三輔하니 蒲阪守將 棄城奔長安이라 奚斤遂克蒲阪하니 夏主之弟助興 自長安奔安定하다
十二月 斤入長安하니 秦雍氐羌皆降하고 河西王蒙遜及氐王楊玄聞之하고 皆遣使附魏러라
魏罷漏戶繒하고 以屬郡縣하다
魏初得中原 民多逃隱하니 天興中 詔采諸漏戶하여 令輸繒帛하고 不𨽻郡縣 賦役不均注+魏皇始二年, 克中山, 始得中原, 晉安帝之隆安元年也. 明年, 改元天興.이러니
是歲始詔罷之하여 以屬郡縣하다


宋나라 太祖 文帝 劉義隆 元嘉 3년이고, 北魏 世祖 太武帝 拓跋燾 始光 3년이다.
[綱] 봄 정월에 宋나라가 徐羨之와 傅亮을 토벌하여 죽이고, 王弘을 司徒 揚州刺史 錄尙書事로 삼고, 彭城王 劉義康을 都督荊湘等州軍事로 삼으니, 謝晦가 군사를 일으켜 江陵에서 반란하였다.
[目] 예전에 宋主가 江陵에 있을 때, 孔寗子가 參軍이었는데 즉위하게 되자 공녕자를 步兵校尉로 삼았다. 그는 侍中 王華와 더불어 나란히 부귀해지려는 소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徐羨之․傅亮이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미워하여 宋主에게 그들을 모함하였다.
황제가 두 사람을 죽이고 아울러 군사를 일으켜 謝晦를 토벌하고자 하여 마침내 선언하기를 北魏를 정벌하여 河南을 탈취해야 한다고 하고, 또 말하기를 京陵을注+① 京陵은 蕭太后의 능으로 바로 興寧陵이니, 晉陵 丹從縣 諫壁里 雩山에 있다. 배알할 것이라 하였는데 행장을 준비하고 함선을 정비할 적에 처리하는 것이 평소와 달라서 그 모의가 많이 누설되었다.
사회의 동생 謝嚼이注+② 皭은 子肖의 切이다. 시급히 사람을 보내어 사회에게 알렸는데, 사회는 여전히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江夏內史 程道惠가 尋陽 사람의 편지를 받았는데 편지에 이르기를 “조정에서 장차 큰 조치가 있을 것인데, 그 일이 이미 분명하다.”라고 하고, 이것을 봉하여 사회에게 보였다.
사회가 參軍 何承天에게 묻자, 하승천이 대답하기를 “제왕의 위엄으로 천하의 병력을 동원하여 한 州를 공격하니 규모의 대소가 이미 다르고 의리의 역순도 다릅니다. 장군께서는 국경의 밖으로 나가셔서 안전을 추구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 다음은 심복에게 義陽에 주둔하도록 하고 장군께서 군대를 인솔하고 夏口에서 싸우는 것인데, 만약 패배하면 곧 의양으로 달려가서 북쪽 경계로 나가는 것이 차선책입니다.”라고 하였다.
한참 있다가 사회가 말하기를注+① 幡은 깃발이다. “立幡”은 建牙(牙旗를 세우다)의 뜻과 같다. 옛날에는 군대가 행군하면 군문에 아기를 세운다. 牙는 또한 깃발 이름이다. 庾登之는 庾蘊의 손자이다. “荊州는 용병에 알맞은 땅이고 군사와 양식을 공급하기 쉬우니, 우선 결전을 벌이고 나서 도망가더라도 어찌 늦겠는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하승천에게 표문과 격문을 만들도록 하고, 또 參軍 顔邵와 함께 군사를 일으킬 것을 모의하였는데, 안소는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目] 謝晦가 깃발을 세우고 경계를 엄중히 하며 司馬 庾登之에게 말하기를 “이제 내가 내려갈 것이니 경에게 성을 지키는 것을 맡긴다.”라고 하니,
유등지가 말하기를 “늙은 부모는 서울에 계시고 또 평소 부리던 부하들이 없기에 정황을 두세 번 헤아려보니, 감히 이 뜻을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사회가 인하여 여러 부하 장수와 보좌관들에게 묻기를 “군사 3천이면 성을 지키기에 충분하지 않은가.”라고 하니, 周超가 답하기를 “단지 성을 수비할 뿐만 아니라 만약 밖에서 침략이 있으면 공적을 세울 수도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유등지가 司馬의 직책을 해면하여 그에게 주기를 청하니, 사회가 즉시 주초를 사마로 임명하고 유등지를 옮겨 長史로 삼았다.
[目] 宋主는 애초에 王弘과 檀道濟가 盧陵王(劉義眞)을 폐위하고 시해하는 음모에 관여하지 않았고, 또 왕홍의 동생 王曇首는 친애하고 신임하는 사람이므로 몰래 사람을 보내 왕홍에게 알리고, 또 단도제를 불러서 謝晦를 토벌하려고 하였다.
王華 등이 모두 안 된다고 말하자, 宋主가 말하기를 “단도제는 위협을 받아 따른 것에 불과하니, 원래 모의를 주도한 것은 아니고 살해하는 일에도 관여하지 않았으니, 내가 그를 다독여 부리면 반드시 염려할 것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단도제가 이르자 조서를 내려서 徐羨之․傅亮․謝晦가 營陽王과 廬陵王을 살해한 죄를 공표하고, 中領軍 到彦之와 征北將軍 단도제에게 명하여 適時에 체포하여 참수하도록 하고, 또 雍州刺史 劉粹 등에게 명하여 그들이 도주하여 숨는 길을 차단하도록 하였다.注+① 走는 달아난다는 뜻이다. 伏은 숨는다는 뜻이니, 〈“斷其走伏”은〉 도망하여 숨는 길을 끊는 것을 말한다.
[目] 이날 조서를 내려서 徐羨之․傅亮을 부르자, 謝嚼은 사람을 보내어 서선지 등에게 이를 알렸는데, 서선지는 달아나 新林에注+① 新林浦는 建康城과 거리가 20리이다. 이르러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고, 부량은 달아났으나 체포되었다.
宋主가 사람을 보내어 조서를 부량에게 보이게 하자, 부량이 말하기를 “저는 先帝에게 평민의 신분으로 있을 때에 은혜를 입어서 마침내 顧命의 부탁을 받았습니다. 혼미한 군주를 내치고 명철한 군주를 세운 것은 사직을 위한 계책입니다. 신에게 죄를 씌우고자 하신다면 어찌 트집 잡을 말이 없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부량을 죽였다.
[目] 宋主가 檀道濟에게 謝晦를 토벌할 계책을 묻자, 대답하기를 “신이 옛날에 사회와 함께 北征에 종사하였는데注+① 從(따르다)은 才用의 切이다. , 關中에 들어가는 열 가지 책략 중 사회가 그 아홉 가지를 내었으니, 재간과 책략에 밝고 노련하여 거의 대적할 사람이 적습니다.
그러나 일찍이 고립무원의 군대를 가지고 승리한 적이 없으니 전투는 아마도 그의 장점이 아닌 것 같습니다. 臣은注+② 陳(진을 치다)은 陣이라고 읽는다. 사회의 지혜를 다 알고 사회는 신의 용기를 다 압니다. 지금 王命을 받들어 그를 토벌하면 진을 치기도 전에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王弘을 불러서 侍中 司徒 錄尙書事 揚州刺史로 삼고, 彭城王 劉義康을 荊湘都督 荊州刺史로 삼았다.
[目] 謝晦는 徐羨之․傅亮 등이 이미 주살되었음을 듣고서 직접 활쏘기 훈련장에 나가서 군사를 정비하였다. 며칠 만에 사방 먼 곳에서 투신해 모여 와서 정예 군사 3만 명을 얻었고,
표문을 받들어 칭하기를 “충정한 서선지와 부량 등이 억울한注+① 橫(그릇되다)은 戶孟의 切이다. 죽음을 당하였으니, 모두 왕홍․왕담수․왕화가 음흉하며 조급하고 시기하여 참소하고 모함하여 화를 조성한 것이다. 지금 군사를 일으켜 군주 곁에 있는 악한 사람을 제거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綱] 윤정월에 宋나라 皇子 劉劭가 태어났다.
[目] 예전에 袁皇后가注+① 袁皇后는 袁耽의 曾孫女이다. 皇子 劉劭를 낳으니, 황후가 직접 자세하게 살펴보고 사람을 시켜 황제(劉義隆)에게 급히 고하기를 “이 아이의 용모가 보통 사람과 다릅니다. 반드시 나라를 무너뜨리고 집안을 망하게 할 것이니, 길러서는注+② 擧는 기른다는 뜻이다. 안 됩니다.”라고 하고, 곧바로 황자를 죽이려고 하였다.
황제가 허둥지둥 황후 궁전의 문 밖에 이르러 금지하자 마침내 그쳤다. 아직 아버지 상중에 있었기 때문에 황자 출생을 비밀로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유소를 낳았다고 말하였다.
[綱] 宋主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謝晦을 토벌하여 2월에 죽였다.
[目] 宋主는 조서를 내려서 경계를 엄중히 하고 여러 군대에게 길을 전진하여 謝晦를 토벌하게 하였다. 사회는 무리 3만 명을 인솔하고서 江陵을 출발할 적에 江津에서 破冢에 이르기까지 함선을 정렬시키니 군대의 깃발이 태양을 가렸다. 사회가 탄식하기를 “한스럽게도 이것을 勤王의 군대로 삼을 수 없구나.”라고 하였다.
사회가 군사를 파견하여 湘州刺史 張邵를 습격하려 하니, 何承天은 장소의 형 張茂度가 사회와 잘 지내기 때문에 말하기를 “장소의 의향은 아직 알 수 없으니, 바로 그를 공격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사회가 편지로 장소를 불렀으나 장소가 따르지 않았다.
宋主가 建康을 출발하였다.
[目] 謝晦가 내려가 江口에注+① 江口는 곧 西江口이다. 이르자 到彥之가 이미 彭城洲에注+② ≪水經注≫에 “江水는 長沙 下雋縣 북쪽을 지나고, 또 동쪽으로 가서 彭城口를 지나는데 물의 동쪽에 彭城磯가 있다.”라고 하였다. 도착해 있었다. 庾登之가 巴陵을 점거하였지만 두려워서 감히 전진하지 못하였는데,
마침 장맛비가 연일 계속되자 參軍 劉和之가 말하기를 “피차 함께 비를 만난 것일 뿐입니다. 동방의 官軍은 바야흐로 강성해질 것이니, 의당 빨리 싸워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유등지가 큰 주머니를 만들어 띠풀을 채워 돛대에 매달게 하고注+③ 帆은 音이 凡이니 배 위의 돛으로, 바람을 돛에 받아 배를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檣은 音이 墻이니 돛대이다. 말하기를 “이것으로 함선을 태울 수 있으니, 날이 개이기를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전투할 시기를 늦춘다.”라고 하니, 사회도 그렇다고 여기고 군대의 진군을 15일간 정지시켰다.
마침내 孔延秀를 시켜 팽성주 및 洲口의 목책을 공격하여 이를 함락시키자, 여러 장군들이 夏口로 돌아가려 하였는데, 도언지가 안 된다고 하고는 마침내 隱圻를注+④ ≪水經注≫에 “江水는 彭城磯에서 동쪽으로 가서 如山 북쪽을 지나는데 산 북쪽에 隱磯를 마주한다.”라고 하였다. 지켰다.
[目] 예전에 謝晦가 徐羨之․傅亮과 함께 자신들의 신변을 보전하는 계책을 세우기를 “사회는 上流를 점거하고 檀道濟는 廣陵에 주둔하여 각각 강한 군사를 소유하고, 서선지․부량이 중앙에서 권력을 쥐고 있으니 오랫동안 지탱할 수 있을 것이다.”라 하였다.
이에 이르러 단도제가 〈군사를 거느리고〉 온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서 계책을 세울 수 없었다. 단도제가 도착하고 나서는 到彥之의 군대와 합하였는데, 사회는 처음에 함선의 수가 많지 않은 것을 보고 바로 출정하지 않았다.
저녁에 이르러 바람에 따라서 돛을 올려서 앞뒤로 배가 이어져서 강을 메우니注+① 連은 강가에 戰艦이 끊임없이 연접해 있음을 말한다. 咽은 一結의 切이니 메운다는 뜻으로, 전함이 강을 메워서 앞뒤로 빽빽한 것을 말한 것이다. 서쪽 군사들이 흩어지고 기가 꺾여서 다시 싸울 마음이 없었으므로 일시에 모두 무너졌다. 사회가 밤에 江陵으로 돌아왔다.
[目] 이보다 먼저 宋主는 劉粹를 파견하여 육로로 보병과 기병을 인솔하여 江陵을 습격하도록 하였는데, 周超가 맞이하여 싸워서 그들을 대파하였다.
謝晦는 오랫동안 유수와 잘 지냈고 또 유수의 아들 劉曠之를 참군으로 삼았으므로, 宋主가 그것을 의심하자 王弘이 말하기를 “유수는 사사로움이 없는 사람이니 근심할 필요는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남방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받자 한 번도 돌아보는 일이 없었고, 사회 역시 유광지를 죽이지 않고 유수가 있는 곳으로 돌려보냈다.
[目] 잠시 후에 謝晦가 패배한 소식이 전해지자, 周超가 到彥之에게 가서 항복하였다. 사회는 무리들이 흩어지고 계책도 다하자 마침내 자기의 동생인 謝遯 등을 이끌고서 북쪽으로 달아나다가 사람에게 잡히니, 檻車에 실려 建康에 송치되었다.
何承天은 스스로 도언지에게 귀부하였는데, 도언지는 이어서 監荊州府事로 삼았다. 이에 謝晦․謝嚼 및 그의 같은 패거리인 孔延秀․周超 등을 주살하였다.
사회의 딸인 彭城王妃가 머리를 풀어 헤치고 맨발로 나와서 사회와 영결하여 말하기를 “대장부가 마땅히 전장에서 시신을 뉘어야 하는데, 어찌 저잣거리를 어지럽히십니까.”라고 하였다.
사회가 달아날 때 측근들은 모두 그를 버렸으나 오직 延陵蓋만은 추종하여 떠나지 않았는데, 宋主가 연릉개를 鎭軍功曹 督護로 삼았다.注+① 延陵은 복성이고, 蓋는 이름이니, 〈“宋主以蓋爲鎭軍功曹督護”는〉 鎭軍府 功曹로 삼고, 또 督護의 관직을 겸하게 한 것이다.
[綱] 3월에 宋나라가 謝靈運을 秘書監으로 삼고, 顔延之를 中書侍郎으로 삼았다.
[目] 宋主는 建康으로 돌아와 謝靈運․顔延之를 불러서 등용하였고, 또 慧琳이 담론을 잘한다고 하여 그것으로 인하여 그와 함께 조정의 큰일을 의논하고 드디어 권력의 요직에 참여하게 하였다. 그러자 빈객이 폭주하고 사방에서 오는 예물이 서로 이어졌다.
혜림은 높은 나막신을 신고 담비 가죽으로 만든 갖옷을 입었으며 通呈과 書佐를注+① 通呈은 빈객 접대를 담당하는 직책이고, 書佐는 문서를 담당한다. 두었다. 會稽 사람 孔覬가 말하기를 “마침내 검은 옷을 입은 재상이 생겼으니注+② 慧琳은 승려이므로 검은 옷을 입은 것이다. , 관원의 관과 신발이 제자리를 잃었다고 말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綱] 여름 5월에 宋나라가 檀道濟를 江州刺史로 삼고, 到彥之를 南豫州刺史로 삼았다.
[綱] 宋나라가 사신을 파견하여 郡縣을 순행하게 하였다.
[目] 散騎常侍 袁渝 등 16명을 파견하여 여러 州의 군․현을 나누어 순행하여 관리의 정사를 관찰하고 백성의 고통을注+① 隱은 고통이라는 뜻이다. 살피게 하였고, 또 군․현에게 각각 정사의 득실을 말하도록 하였다.
[綱] 宋主가 직접 참석하여 송사를 다스렸다.
[目] 상이 延賢堂에 나아가서 송사를 다스렸으며, 이로부터 매년 세 번 신문[三訊]하게 하였다.注+① 延賢堂은 建康 華林園에 있다. ≪周禮≫ 〈秋官 小司寇〉에 “세 번 신문하는 것으로 백성의 정당한 옥사를 결정하였는데, 첫째는 여러 신하들에게 묻는 것이고, 둘째는 여러 관리들에게 묻는 것이고, 셋째는 만민에게 묻는 것이다.”라고 하고, 注에 “刺는 죽인다는 뜻이다. 訊은 〈물어서〉 말하게 한다는 뜻이다. 中은 죄가 바르게 정해진 것을 말한다. 세 번 신문하여 죄가 정해지면 죽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目] 左僕射 王敬弘은注+① 王敬弘은 王廙의 曾孫으로, 이름이 裕之인데, 宋 武帝의 이름과 같으므로 字로 통용되었다. 성격이 편안하고 담박하였으며 명망이 있었는데, 서류에 서명할 때에 처음부터 살펴 읽지 않았다. 일찍이 소송을 판결하는 자리에 참여하였는데 상이 疑獄을 가지고 묻자 왕경홍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상이 안색이 변하여 좌우의 사람들에게 묻기를 “무슨 이유로 訊問에 관련된 서류를 僕射에게 보내지 않았는가.”注+② 신문한 서류의 부본을 王敬弘에게 들여보내지 않았음을 말한다. 라고 하니, 왕경홍이 말하기를 “신은 신문한 서류를 받아서 읽었으나 지금까지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니, 상이 매우 기뻐하지 않았다.
비록 예의와 공경을 더하였으나, 다시는 당시의 중요한 업무를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
[綱] 6월에 宋나라가 王華․王曇首․殷景仁․劉湛을 侍中으로 삼고, 謝弘微를 黃門侍郎으로 삼았다.
[目] 王華는 王弘이 정사를 보좌하고 있고 王曇首가 상에게 친애와 신임을 받고 있어서 자기와 서로 동등하기注+① 埒은 동등함이다. 때문에, 스스로 힘을 다 쓸 수 없다고 생각하여 매번 탄식하기를 “재상이 갑작스럽게 여러 명이 생겼으니 천하가 어떻게 다스려지겠는가.”라고 하였다.
殷景仁殷景仁
이때 재상은 정해진 관원이 없어서 오직 군주가 함께 정사를 의논하여 기밀을 맡긴 사람이 모두 재상이었다. 侍中을 맡으면서 재상이 되지 않은 사람도 역시 있었으나, 尙書令․僕射․中書監․中書令注+② 監과 令은 中書監과 中書令이다. ․侍中․侍郞․給事中이 모두 당시 주요 관직이었다.
[目] 王華는 劉湛․王曇首․殷景仁과 함께 모두 侍中이 되었는데, 풍채와 능력, 도량과 재간이 한 시대의 으뜸이었다. 黃門侍郎 謝弘微와注+① 謝弘微는 謝琰의 從孫이니, 이름이 密이다. 從叔 謝峻에게 養子를 갔는데 이름이 양자 간 쪽의 어머니 이름과 상충되므로 字로 통용되었다. 왕화 등은 모두 宋主가 중시하는 사람들이니, 당시에 五臣이라고 불렀다.
사홍미는 정신이 바르며 세심하였고 때에 알맞은 연후에 말하였으며, 비첩이나 노복의 앞에서는 경망하게 말하거나 웃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존귀한 사람이거나 비천한 사람이거나 나이가 많거나 적은 사람 모두 그를 神과 같이 공경하였다.
당숙 謝混이 특히 그를 중시하여 항상 말하기를 “微子(사홍미)는注+② 〈微子의〉 子는 남자의 美稱이다. 謝混이 특히 존중하고 귀하게 여겨 호칭을 微子라 한 것이다. 의견을 달리 하더라도 남을 상하게 하지 않고 남과 같이 하여도 正道를 해치지 않으니, 나는 이의를 달지 못하겠다.”라고 하였다.
[目] 예전에 謝混이 東晉의 晉陵公主와注+① 공주는 東晉 孝武帝의 딸이다. 혼인하였는데, 사혼이 죽자 〈東晉 安帝는 공주에게〉 조서를 내려 〈謝氏와의〉 혼인 관계를 끊게 하였다. 공주가 사혼 집안의 일을 모두 謝弘微에게 위임하였는데, 사혼은 대대로 宰輔를 지냈으므로 노복이 1천 명이었다.
단지 두 명의 딸이 있어 나이가 몇 살밖에 안 되었는데 사홍미는 그들을 위해 가업을 다스려 한 푼의 돈이나 한 자의 비단이라도 모두 장부에 기록하였다. 9년이 지나 東晉이 망하니, 공주는 호칭이 東鄕君으로 강등되어서 謝氏의 집안으로 돌아가는 것이 허락되었다.
문에 들어서자 가옥과 창고가 평소와 다르지 않았고 전답은 개간되어 예전보다 증가하였다. 동향군은 감탄하여 말하기를 “僕射(사혼)께서는注+② 謝混은 東晉에 벼슬하여 尙書左僕射가 되었다. 평소에 이 아이를 중시하였는데 사람을 알아보았다고 할 만하니, 복야께서는 아직 죽지 않으신 것이다.”라고 하니,
이것을 본 친척과 옛 친구들이 그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 동향군이 卒하자, 공사간에 모든 사람들이 재산은 의당 두 딸에게 주어야 하고, 전답, 가옥, 노복은 응당 사홍미에게 귀속시켜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사홍미는 하나도 가진 것이 없었고, 자신의 사사로운 녹봉으로 동향군을 장사 지냈다.
[目] 謝混의 사위 殷叡가 를 좋아하였는데 그 아내의 동생과 백모, 두 고모 몫의 유산까지 빼앗아 도박 빚을 갚았다.注+① 分(몫)은 扶問의 切이다. 戲는 摴蒱 놀이이다. 責(책무)은 본음대로 읽으며, 또 債라고 읽는다. 집안사람들은 모두 사홍미가 재물을 사양하는 것에 감화되어 전혀 다투는 바가 없었다.
어떤 사람이 그를 비판하여 말하기를 “謝氏 집안의 여러 대에 걸친 재산이 殷君(殷叡)의 하루아침 오락 빚으로 충당되었는데도 경이 보고서 말을 하지 않으니, 비유하건대 재물을 강과 바다에 내버리고 청렴하다고 하는 것과 같을 뿐이다.”라고 하니,
사홍미가 말하기를 “친척들이 재산을 가지고 다투는 것은 비천한 것 가운데 아주 심한 것이다. 지금 집안사람들도 오히려 말을 하는 이가 없는데, 어찌 그들을 유도해서 다투게 할 수 있겠는가. 많은 데서 나누어 적은 데에 제공하면 궁핍한 데에 이르지 않고, 몸이 죽은 이후에 어찌 다시 돈과 관련되겠는가.”라고 하였다.
[目] 宋主는 王曇首․王華 등에게 작위를 책봉하고자 하여 龍床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이 자리는 경의 형제가 아니었다면 다시 오늘 같은 날이 없었을 것이다.”라고 하고, 이어서 책봉하는 조서를 내어 그에게 보였다.注+① 徐羨之와 傅亮을 주살한 것을 王曇首와 王華의 공으로 여긴 것이다.
왕담수가 굳게 사양하며 말하기를 “근래의 일은 폐하의 영명함에 힘입어서 죄인을注+② 죄인은 徐羨之 등을 가리킨다. 잡은 것이니, 신 등이 어찌 나라의 재앙을 이용하여 자신의 행복으로 삼겠습니까.”라고 하니, 宋主가 마침내 중지하였다.
[綱] 宋나라가 사신을 파견하여 北魏에 보냈다.
[綱] 가을에 西秦이 北涼을 공격하였는데 夏나라가 西秦의 苑川을 습격하니, 西秦의 군사들이 돌아갔다.
[綱] 宋나라가 크게 가뭄이 들었고 蝗蟲의 재해가 있었다.
[綱] 겨울 10월에 魏主가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夏나라를 공격하였다.
[目] 魏主가 公卿들에게 묻기를 “지금 군대를 사용할 때이니, 赫連과 蠕蠕(柔然)에서注+① 蠕은 人兗의 切이다. 蠕蠕은 柔然이다. 두 나라 중에 어느 쪽을 우선해야 하는가?”라고 하니,
長孫嵩 등이 모두 말하기를 “혁련은 토착민이므로 아직 우환이 되지 못하니, 우선 〈유목민인〉 蠕蠕을 정벌하는 것이 낫습니다. 만약 추격하여 그들을 따라잡으면 크게 포획할 수 있고, 따라잡지 못하면 陰山에서 사냥하여 禽獸의 가죽과 뿔을 얻어서 군비를 채울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太常 崔浩가 말하기를 “蠕蠕은 새처럼 모이고 짐승처럼 도망치니注+② “鳥集獸逃”는 그들이 오는 것이 새가 모이는 것 같고, 도주하는 것이 짐승이 도망하는 것과 같음을 말한다. , 큰 병력을 거느리고 그들을 추격하면 따라잡을 수 없고, 경무장 병사로 그들을 추격해도 또한 적을 제압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赫連氏는 토지가 천 리를 넘지 않고 정치와 형벌이 잔학하니, 사람과 신이 포기한 곳입니다. 마땅히 그곳을 먼저 정벌하여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目] 魏主가 또한 夏나라의 世祖(赫連勃勃)가 殂하고 여러 아들들이 서로를 도모하여注+① “諸子相圖”는 赫連倫․赫連璝․赫連昌이 서로 죽임을 말한다. 그 나라의 사람들이 불안해한다는 소식을 듣고서 이를 정벌하려고 하였다.
長孫嵩 등이 말하기를 “저들이 만약 성을 수비하여 편안함으로 피곤한 우리를 기다리면, 郁久閭 大檀이 이 소식을 듣고서 빈틈을 타고 들어와서 노략질을 할 것이니, 이는 위태로운 방법입니다.”라고 하였다.
崔浩가 말하기를 “지난 몇 년 이래로 熒惑星이 羽林星注+② ≪史記≫ 〈天官書〉에 虛星과 危星의 남쪽에 여러 별이 있는데 羽林星이라 한다. ․鉤己星에 두 차례 접근하여 운행하는데 그 점은 금년에 五星이 나란히 동쪽 방향에서 나타났으니 이는 서쪽 정벌에 이로운 것입니다. 하늘과 사람이 서로 감응하니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奚斤을 파견하여 蒲阪을 습격하고, 周幾를 파견하여 陝城을 습격하게 하고서 薛謹을注+③ 薛謹은 薛彊의 손자이다. 鄕導로 삼았다.
[目] 魏主가 李順에게 선봉 부대를 총괄하게 하려고 하였다. 崔浩가 말하기를 “이순은 진실로 책략을 갖고 있지만 그의 사람됨이 나서고 물러나는 데에 과감하니 단독으로 맡겨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자, 마침내 중지하였다. 최호는 이순과 이로 인해 틈이 생겼다.
[綱] 11월에 夏나라가 西秦을 공격하여 枹罕에 들어갔다.
[綱] 魏主가 統萬에 들어가니 別將들이 蒲阪과 長安을 점령하였다.
[目] 魏主가 행군하여 君子津에注+① 酈道元이 말하기를 “옛날 漢나라 桓帝가 서쪽으로 榆中에 행차하고 동쪽으로 代地에 순행하였는데, 洛陽의 큰 장사꾼이 금과 돈을 가지고 환제의 뒤를 따라가다가 밤에 헷갈려 길을 잃게 되자 津長에게 찾아가서 투숙하고 말하기를 ‘子封(津長 이름)이여, 河水를 건너서 보내주시오.’라고 하였다. 그런데 장사꾼이 갑자기 죽자 津長이 그를 묻어 주었다. 장사꾼의 아들이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 무덤을 파서 시신을 꺼냈는데 돈과 재물이 하나도 줄어들지 않았다. 장사꾼의 아들이 황금을 다 그에게 주었는데, 津長이 받지 않았다. 이 일이 환제에게 보고되자 환제가 말하기를 ‘군자이다.’라고 하고, 즉시 그 나루 이름을 君子濟라고 하였는데, 雲中城에서 서남쪽으로 2백여 리에 있다.”라고 하였다. 도착하였는데, 마침 날씨가 갑자기 매우 추워져서 강물이 얼어붙었으니, 경무장한 기병만 인솔하고서 황하를 건너 統萬을 습격하였다.
夏主(赫連昌)가 한창 신하들과 연회를 하는데, 北魏의 군대가 갑자기 도착하니, 상하가 놀라고 어지러웠다. 夏主는 출전하였으나 패하여 달아나 성으로 들어갔다.
성문이 아직 다 닫히지 않았는데 북위의 豆代田이 무리를 이끌고서 승세를 타고 西宮으로 들어와서 그 서쪽 문을 불태웠다. 궁성의 문이 닫히자 두대전은 궁의 담을 뛰어넘어 나왔다. 北魏는 군사를 나누어서 사방으로 약탈하였으며, 수만 명을 죽이고 포로로 잡았다.
魏主가 여러 장군들에게 말하기를 “통만을 아직 점령할 수 없으니 다음해에 경들과 함께 빼앗아야 하겠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주민 1만여 家를 옮겨서 돌아왔다.
[目] 夏나라의 弘農太守는 싸우지 않고 달아났는데 北魏의 군대는 승승장구하여 마침내 三輔에 들어가니, 蒲阪의 수비 장수가 성을 버리고 長安으로 달아났다. 奚斤은 마침내 포판에서 승리하니, 夏主의 동생 赫連助興이 장안에서 安定으로 달아났다.
12월에 해근이 장안에 들어가니 秦州․雍州에 사는 氐族과 羌族이 모두 항복하였고, 河西王 沮渠蒙遜과 氐王 楊玄이 그 소식을 듣고 모두 사신을 보내서 北魏에 귀의하였다.
[綱] 北魏가 호적에 누락된 가구의 비단 징수를 중지하고, 郡縣에 속하게 하였다.
[目] 北魏가 처음에 中原을 얻었을 때에 백성들이 대부분 도망쳐 숨었다. 天興(北魏 道武帝 연호) 연간에注+① 北魏 皇始 2년(397)에 中山에서 승리하여 비로소 中原을 얻었으니, 東晉 安帝의 隆安 원년(397)이다. 다음 해에 北魏가 天興으로 연호를 고쳤다. 조서를 내려 호적에 누락된 가구를 찾아내서 繒帛을 바치게 하고 郡縣에는 속하게 하지 않게 하였는데 부세와 요역이 균일하지 않았다.
이해에 비로소 조서를 내려 이를 중지하여 郡縣에 속하게 하였다.


역주
역주1 欲加之罪 其無辭乎 : ≪春秋左氏傳≫ 僖公 10년에 보인다.
역주2 從北征은……것이다 : 東晉 말 桓玄의 난을 평정하고 난 뒤에, 410년 북쪽을 정벌하여 北燕을 멸망시키고, 417년 後秦을 멸망시켰다.
역주3 閏月 宋子劭生 : “황자를 낳는 것은 기록하지 않는데 劉劭를 기록한 것은 어지러움의 시작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漢나라 황자 劉據가 출생했을 때 기록했고, 황자 劉弗陵이 출생했을 때 기록했고, 宋나라 황자 劉劭가 출생했을 때 기록했고, 北魏 황자 拓跋恂이 출생했을 때 기록했고, 魏主 宣武帝의 황자 拓跋詡가 출생했을 때 기록하였으니 모두 어지러움의 시작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황자가 출생한 것을 기록한 것은 5번이고, 皇孫이 출생한 것을 기록한 것은 1번이다(漢나라 宣帝 甘露 3년(B.C.51) 皇孫 劉驁).[子生不書 書劭 志亂始也 是故漢皇子據生書 皇子弗陵生書 宋子劭生書 魏子恂生書 魏主之子詡生書 皆亂始也 終綱目 書子生五 書孫生一(漢宣帝甘露三年皇孫驁)]” ≪書法≫“〈황자의 출생은 기록하지 않는 법인데〉 劉劭의 출생을 특별히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元凶의 시작을 기록한 것이다. 宋나라 군주가 아들을 상중에 낳고 끝내 商臣의 재앙이 있었으니, 은미하게 하여도 드러나니 가릴 수 없다는 것이 이와 같다. 그러므로 유소는 실제로 이때에 태어나지 않았으나 이때에 태어난 것으로 기록하였으니 그 속임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劭生何以特書 記元凶之始也 宋主育子於諒闇 卒有商臣之禍 微之顯 其不可掩也如此 故劭實非生於此時 而書此時生 所以著其僞也]” ≪發明≫ ‘商臣’은 春秋時代 楚나라 世子로, 아버지 楚 成王을 시해하고 즉위한 楚 穆王이다.
역주4 (汎)[帆] : 저본에 ‘汎’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綱目集覽≫에 의거하여 ‘帆’으로 바로잡았다.
역주5 宋主親臨聽訟 : “송사를 다스린 것은 반드시 기록하였으니, 백성의 생명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漢나라 太后가 〈安帝 永初 2년(108)에〉 친히 囚徒를 처리한 것을 기록하고, 宋나라 군주가 친히 임석하여 송사를 다스린 것을 기록하였으며, 北魏의 군주가 친히 疑獄을 판결한 것을 기록하고, 北魏의 군주가 친히 囚徒를 처리한 것을 기록하였으며, 北魏의 군주가 華林에서 송사를 다스린 것을 기록하고, 北周의 군주가 內苑에서 친히 죄수를 처리한 것을 기록하였다(漢나라 安帝 永初 2년에 자세하다.).[聽訟必書 重民命也 故漢太后親錄囚徒則書 宋主親臨聽訟則書 魏主親决疑獄則書 魏主親錄囚徒則書 魏主聽訟于華林則書 周主親錄囚於内苑則書(詳漢安帝永初二年]]” ≪書法≫
역주6 吾無間然 : ≪論語≫ 〈泰伯〉에 보인다.
역주7 摴蒱(저포) : 도박의 일종으로 주사위 모양의 패를 던져 승부를 겨루는 놀이이다.
역주8 (蒲)[蒱] : 저본에는 ‘蒲’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蒱’로 바로잡았다. 아래 訓義도 이를 따랐다.
역주9 後秦이……징조였고 : 이는 東晉 安帝 義熙 11년(415)에 나타난 사건이다.

자치통감강목(17) 책은 2021.11.0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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