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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1)

자치통감강목(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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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丑年(221)
이라
魏黃初二年이라
春正月 魏封孔羨爲宗聖侯注+羨, 孔子二十一世孫.하다
奉孔子祠하다
注+漢獻帝初平元年, 董卓壞五銖錢, 今復之.하다
◑夏四月 하다
蜀中 傳言帝已遇害라하니 於是 漢中王 發喪制服하고 諡曰孝愍皇帝라하다 群下競勸王稱尊號어늘
司馬費詩 上疏曰注+時詩爲益州前部司馬. 殿下以曹操父子簒位故 羈旅萬里하사 合衆討賊이러니 今大敵未克而先自立하시면 恐人心疑也하노이다
不悅하여 左遷之하고 遂卽帝位於武擔之南注+擔, 都濫‧都覃二切. 武擔山, 在成都西北, 蓋以乾位在西北, 故就之以卽祚.하여 大赦, 改元하고 以諸葛亮爲丞相하고 許靖爲司徒하다
司馬公曰 三代之前 海內萬國 有人民社稷者 通謂之君하고 合萬國而君之者 乃謂之王하고
王德旣衰 方伯連帥 能帥其屬하여 以尊天子 則謂之霸러니
自漢儒 推五德生勝하여 以秦爲閏位하여 在木火之間이라하여 霸而不王하니 於是 正閏之論 興矣注+五德生勝, 詳見秦始皇二十六年. 秦以水德, 在周漢木火之間, 不在五德相生之正運, 故曰閏位.
及三國五胡南北之亂 各有國史하여 互相排黜注+三國, 漢‧魏‧吳也. 晉惠帝以來, 五胡肆虐, 漢劉淵, 匈奴也, 後趙石勒, 羯也, 前燕慕容廆, 鮮卑也, 前秦苻洪, 氐也, 後秦姚弋仲, 羌也. 南, 謂宋‧齊‧梁‧陳. 北, 謂後魏‧北齊‧後周也. 互相排黜, 謂彼此貶斥也. 南謂北爲索虜, 北謂南爲島夷, 索虜者, 以北人辮髮, 謂之索頭也, 島夷者, 以東南際海, 土地卑下, 謂之島中也.이라 朱氏代唐 四方幅裂하고
朱邪入汴 比之窮新注+後梁朱晃, 受唐禪. 邪音耶, 後唐莊宗李存勖, 本姓朱邪氏. 入汴, 滅後梁, 自以爲繼唐, 比朱梁於有窮簒夏, 新室簒漢.하여 運歷年紀 皆棄而不數하니 此皆偏辭 非公論也
今此書 獨以周, 秦, 漢, 晉, 隋, 唐爲正統하고 其後子孫 雖微弱播遷이나 然猶承祖宗之業하고
四方與之爭衡者 皆其故臣也 猶得用天子之制以臨之하고 至於天下離析하여는 本非君臣이면 則皆以列國之制處之
이나 不可無歲, 時, 月, 日以識事之先後注+識, 音誌. 漢傳於魏而晉受之하고
晉傳於宋以至於陳하여 而隋取之하고 唐傳於梁以至於周하여 而大宋 承之
不得不取其年號하여 以紀其國之事하니 非尊此而卑彼하여 有正閏之辨也
昭烈 雖云中山靖王之後 然不能紀其世次하여 與南唐稱吳王恪後 無異注+五代間, 李知誥據淮南, 自謂唐太宗第三子吳王恪之後. 不敢以後漢, 東晉爲比하여 使得紹漢氏之遺統也로라
孫權 徙治武昌하다
自公安徙都於鄂하고 更名鄂曰武昌注+鄂, 漢江夏邑.이라하다
◑五月 立夫人吳氏爲皇后하고 子禪爲皇太子하다
吳氏 將軍懿之妹 故劉璋兄瑁之妻也
六月 하다
魏主丕從太祖入鄴하여 悅袁熙妻甄氏하니 太祖爲聘焉하여 生子叡注+爲, 去聲. 叡, 古作睿.러니
及卽位 郭貴嬪 有寵注+嬪, 婦人之美稱, 可賓敬也. 六宮置貴嬪, 始此.이라 甄氏留鄴하여 失意하여 出怨言하니 貴嬪 讒殺之하다
魏主丕以宗廟在鄴이라하여 祀太祖于洛陽建始殿하여 如家人禮注+武王之封魏王, 建宗廟於鄴. 建始殿, 丕所起, 以建國之始命名.하다
是月晦 日食하다
魏有司以日食으로 奏免太尉한대 詔曰 災異之作 以譴元首어늘 而歸過股肱하니
豈禹, 湯罪己之義乎注+左傳 “臧文仲曰 禹‧湯罪己, 其興也勃焉.” 其令百官으로 各虔厥職하고 後有天地之眚 勿劾三公注+漢制, 有災異則免三公.하라
秋七月 하다
帝恥關羽之沒하여 將擊孫權이어늘 將軍趙雲曰 國賊 曹操 非孫權也 若先滅魏 則權自服하리이다
今操雖斃 子丕篡盜하니 當因衆心하여 早圖關中이라 居河, 渭上流하여 以討凶逆이면 關東義士 必裹糧策馬하여 以迎王師하리니
不應置魏하고 先與吳戰이니이다 兵勢一交 不得卒解하리니 非良策也注+卒, 讀曰猝.니이다
群臣諫者 甚衆이로되 帝皆不聽하고 乃留諸葛亮하여 輔太子하여 守成都하고 而自率諸軍東下하다
飛雄猛 亞於關羽 善待卒伍而驕於士大夫하고 愛禮君子而不恤軍人하니 帝常戒之로되 飛不悛이러라
至是하여 當率萬人하고 會江州러니 臨發 爲帳下所殺하여 以其首奔孫權하다 帝聞飛營都督 有表하고 曰 噫 飛死矣注+噫, 音醫, 恨聲. 表當自飛上, 而都督越次上之, 故知其必死也.라하니라
孫權 請和어늘 不許하니 遂遣陸遜하여 督諸將拒守하다
孫權 遣使求和하니 諸葛瑾 因致牋하여 曰 關羽之親 何如先帝 荊州大小 孰與海內注+時蜀人傳漢帝已遇害, 因稱之爲先帝.
俱應仇疾이니 誰當先後 若審此數하면 易於反掌矣리이다 帝不聽하다
吳人 或言瑾別遣親人하여 與漢相聞者어늘 權曰 孤與子瑜 有生死不易之誓注+子瑜, 瑾字.하니 子瑜之不負孤 猶孤之不負子瑜也니라
陸遜 亦表明瑾必無此라한대 報曰 玄德 昔遣孔明至吳注+蓋謂亮至吳求救時也. 孤嘗語子瑜曰 卿與孔明同産이니 何不留之오한대
子瑜言亮已委質於人하니 義無二心이라 弟之不留 猶瑾之不往也라하니 其言 足貫神明이라 今豈當有此乎
孤與子瑜 可謂神交 非外言所間注+間, 居莧切.이라 知卿意至일새 輒封來表示之矣注+以示子瑜.라하니라
帝遣吳班, 馮習하여 攻破權將李異等於巫하고 進軍秭歸注+巫縣, 漢屬南郡, 吳初屬宜都郡, 後孫休分立建平郡, 巫屬焉.하니 以陸遜爲大都督하여 督朱然等五萬人하여 拒守注+權始命呂蒙, 爲大督以取關羽, 今又復命陸遜, 爲大都督以拒帝. 大都督之號, 蓋昉此.하다
注+據水經註, 陵雲臺, 在洛陽城中金市之東.하다
遣使稱臣하고 送于禁等還魏하니 朝臣 皆賀로되 劉曄 獨曰 權 無故求降하니 必內有急이라
恐中國 往承其釁故 委地求降하여 一以却中國之兵하고 二假中國之援하여 以強其衆而疑敵人耳
夫吳, 蜀 各保一州하니 有急相救 此小國之利也注+各保一州, 謂約而言之, 吳保揚, 蜀保益也.어늘 今自相攻하니 天亡之也
宜大興師하여 徑渡江襲之 蜀攻其外하고 我攻其內 吳之亡 不出旬月이라 吳亡則蜀亦不能久存矣리이다
魏主不聽하고 遂受吳降하고 遣太常邢貞하여 奉策拜權爲吳王하고 加九錫하니
劉曄 諫曰 權 雖有雄才 故漢票騎將軍, 南昌侯耳 官輕勢하며 士民 有畏中國心하니 不可與成所謀也注+所謀, 謂欲自王於國.
夫王位 去天子一階耳 禮秩服御 相亂也注+漢自景‧武以後, 裁削藩王, 不使與京師同制, 自曹操爲魏王, 加九錫, 禮秩服御與天子相亂矣. 今信其僞降하여 崇其位號以封殖之하면 是爲虎傅翼也注+封, 增土以培之. 殖, 養之使蕃茂也. 爲, 去聲, 下爲國同. 傅, 讀曰附.니이다
却蜀兵之後 必外盡禮以事中國하고 而內爲無禮하여 以怒陛下하리니
陛下伐之 則彼徐告其民曰 我事中國 不失臣禮어늘 而無故伐我하니
必欲殘我國家하고 俘我人民하여 以爲僕妾耳注+俘, 虜也.라하면 民信其言하리니 則上下同心而戰加十倍矣리이다 魏主丕不聽하다
至吳하니 吳人 以爲宜稱上將軍, 九州伯이요 不當受魏封注+王制 “九州, 其一州爲天子之縣內, 八州八伯.”이라한대
權曰 沛公 亦受項羽封爲漢王하니 蓋時宜耳 何損邪아하고 遂出都亭候貞하다
入門不下車어늘 張昭曰 君 敢自尊大하니 豈以江南寡弱하여 無方寸之刃乎아하니 卽下車하다
中郞將徐盛 忿憤하여 謂同列曰 盛等 不能奮身出命하여 爲國家幷許洛, 呑巴蜀하여 而令吾君與貞盟하니 不亦辱乎아하고 因涕泣橫流하다
聞之하고 謂其徒曰 江東將相 如此하니 非久下人者也로다 魏諸將 以吳內附라하여 意皆縱緩이로되 獨夏侯尙 益修攻守之備러라
魏主令于禁으로 詣鄴謁高陵할새 豫於陵屋 畫關羽戰克, 龐德憤怒, 禁降服之狀하니하고 慙恚病死注+畫, 古畵字通.하다
司馬公曰 禁 將數萬衆하여 敗不能死하고 生降於敵이라가 旣而復歸하니 廢之可也 殺之可也어늘 乃畫陵屋以辱之하니 斯不君矣注+賞慶刑威曰君.로다
孫權 城武昌하다
◑冬十月 하다
魏主丕欲以彪爲太尉한대 彪辭曰 嘗爲漢朝三公하여 値世衰亂이로되 不能立尺寸之益하니 若復臣魏 於國之選 亦不爲榮也라하더니
及是하여 公卿 朝朔旦 乃幷引彪하여 待以客禮하고 賜几杖하여 使著布單衣, 皮弁以見注+著, 直略切. 見, 賢遍切, 下同.하고
拜光祿大夫하여 朝見 位次三公하고 又令門施行馬하여 以優崇之注+行馬者, 一木橫中, 兩木互穿, 以施四角, 施之於門, 所以斷人出入也. 漢‧魏三公門, 施行馬.하다
以穀貴故也
孫權 遣使如魏하다
吳遣中大夫趙咨하여 入謝于魏하다 魏主丕問曰 吳王 何等主也 咨對曰 聰明仁智雄略之主也니이다
魏主問其狀한대 對曰 納魯肅於凡品 聰也 拔呂蒙於行陣 明也 獲于禁而不害 仁也
取荊州而兵不血刃 智也 據有三州하여 虎視天下 雄也 屈身於陛下 略也注+三州, 荊‧揚‧交也.니이다
丕曰 頗知學乎 對曰 吳王 任賢使能하여 志存經略하니 雖有餘閑 博覽書史 然不效書生尋章摘句而已注+擿, 挑也. 魏主好文章, 故咨以此言譏之.니이다
曰 吳可征不注+不, 讀曰否. 對曰 大國 有征伐之兵하고 小國 有備禦之固注+此二語, 本之管子.하니이다
曰 吳難魏乎 對曰 帶甲百萬이요 江漢爲池하니 何難之有리잇고
曰 吳如大夫者幾人 對曰 聰明特達者 八九十人이요 如臣之比 車載斗量이라 不可勝數니이다
魏遣使하여 求珍物於孫權하다
魏主丕遣使하여 求大貝, 明珠, 象, 犀, 玳瑁, 孔雀, 翡翠, 鬪鴨, 長鳴鷄於吳注+象出交趾, 雄者有兩長牙, 長丈餘. 玳, 音代. 瑁, 音妹. 玳瑁如龜, 其甲相覆而生, 若甲然, 甲上有斑文. 孔雀, 雄者尾金翠色, 光耀可愛, 人採其尾, 以飾扇拂. 翡翠, 大小一如雀, 雄赤曰翡, 雌靑曰翠, 羽可爲飾. 鴨馴狎, 能闘者難得. 長鳴鷄者, 其鳴長聲也. 范成大曰 “長鳴鷄, 自南詔諸蠻來, 形矮而大鳴. 聲圓長, 一鳴半刻, 終日啼號不絶. 蠻甚貴之, 一鷄直銀一兩. 邕州谿洞亦有之.”한대
吳群臣曰 荊, 揚 貢有常典이라 魏所求非禮 宜勿與니이다 吳王權曰 彼所求者 於我瓦石耳 孤何惜焉이리오
且彼在諒闇이어늘 而所求若此하니 寧可與言禮哉리오하고 具以與之하다
孫權 立子登爲太子하다
吳王權 爲登하여 妙選師友하여 以諸葛瑾子恪, 張昭子休, 顧雍子譚, 陳武子表 爲中庶子하여
入講詩書하고 出從騎射하여 待以布衣之禮하고 謂之四友라하다 魏欲封登萬戶侯어늘 以年幼辭之하다
魏置護鮮卑烏桓校尉하다
魏太祖旣克蹋頓하니 烏桓 浸衰 鮮卑大人軻比能, 素利, 彌加等 因求通市注+通關市, 以其土物, 與中國互市也.어늘 太祖皆表以爲王하다
軻比能 本小種이라 以勇健廉平으로 爲衆所服하여 威制餘部하니 自雲中, 五原으로 東扺遼水 皆爲鮮卑庭하여 分地統御注+扺, 至也.러라
軻比能 近塞하니 中國叛人 多歸之하고 素利等 在塞外하여 道遠故 不爲邊患이러라
魏主丕以牽招爲護鮮卑校尉하고 田豫爲護烏桓校尉하여 使鎭撫之하다


辛丑年(221)
나라(蜀漢) 昭烈皇帝 章武 원년이다.
나라 文帝 曹丕 黃初 2년이다.
】 봄 정월에 나라가 孔羨(공선)을 봉하여 宗聖侯로 삼았다.注+孔羨孔子의 21세손이다.
孔子의 사당을 받들게 하였다.
나라가 五銖錢을 다시 사용하였다.注+나라 獻帝 初平 원년(190)에 董卓五銖錢을 혁파하였는데, 이제 다시 회복한 것이다.
】 여름 4월에 漢中王(劉備)이 皇帝의 자리에 올랐다.
劉備가 成都에서 稱帝하다劉備가 成都에서 稱帝하다
蜀主 劉備蜀主 劉備
지방에서 전하기를 “황제(獻帝)가 이미 살해를 당하였다.” 하니, 이에 漢中王을 발표하고 喪服을 만들어 입고 獻帝諡號孝愍皇帝라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다투어 왕에게 尊號를 칭할 것을 권하자,
司馬 費詩가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注+이때 費詩益州前部司馬로 있었다.殿下께서는 曹操父子가 황제의 지위를 찬탈하였기 때문에 萬里 먼 객지의 나그네가 되시어 병력을 규합하여 역적을 토벌하셨는데, 이제 큰 을 이기기 전에 먼저 스스로 황제의 지위에 서시면, 사람들의 마음이 의심할까 두렵습니다.”
왕은 기뻐하지 아니하여 그를 좌천시키고, 마침내 武擔山의 남쪽에서 황제의 지위에 올라注+都濫都覃의 두 이다. 武擔山成都의 서북쪽에 있으니, 이는 乾方의 위치가 서북쪽에 있으므로 건방에 나아가 즉위한 것이다. 大赦를 하고 改元을 하였으며, 諸葛亮丞相으로 삼고 許靖司徒로 삼았다.
司馬公(司馬光)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三代 이전에 海內 모든 나라 중에 人民社稷을 보유한 자를 통틀어 이라 일렀고, 모든 나라를 합하여 군주 노릇을 하는 자를 이라 일렀고,
이 이미 쇠한 뒤에 方伯連帥(연수)가 능히 자기 무리를 거느리고서 天子를 높이는 자를 霸者라 일렀다.
나라의 儒者로부터 五德(五行의 덕)이 相生하고 相剋하는 이치를 미루어 나라를 閏位(비정통의 帝位)로 보아 木德火德의 사이에 있다 해서 나라를 패자로 여기고 왕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에 正位閏位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게 되었다.注+ 나라는 水德을 사용하여 나라와 나라의 의 사이에 있어서 오덕이 상생하는 正運에 있지 않으므로 閏位라 한 것이다.
三國五胡, 南朝北朝의 혼란에 이르러서는 나라마다 각각 國史가 있어서 상대되는 나라를 서로 배척하였다.注+三國”은 나라(蜀漢), 나라, 나라이다. 나라는 惠帝 이후로 五胡가 포학함을 부리니, 나라의 劉淵匈奴族이었고 後趙石勒羯族이었으며, 前燕慕容廆鮮卑族이었고 前秦苻洪氐族이었으며, 後秦姚弋仲羌族이었다. 南朝, , , 을 이르고, 北朝後魏(北魏), 北齊, 後周를 이른다. “互相排黜”은 피차 공격하고 배척함을 이른다. 남조에서는 북조를 일러 索虜(삭로)라 하고 북조에서는 남조를 일러 島夷라 하였으니, 삭로란 북쪽 사람들이 머리를 땋아 늘어뜨렸으므로 그들을 ‘머리에 새끼를 꼬았다.’고 말한 것이고, 도이는 동남쪽이 바닷가에 있어서 토지가 낮으므로 그들을 ‘섬 가운데’라고 말한 것이다. 朱氏(朱全忠)가 나라를 대신하자 사방이 분열되었고,
朱邪氏(李存勖)가 汴京에 들어오자 〈朱氏後梁을〉 옛날 나라를 찬탈한 有窮氏나라를 찬탈한 王莽나라에 비유하여注+後梁朱晃(朱全忠)이 나라의 禪位를 받았다. 이니, 後唐莊宗李存勖本姓朱邪氏인데, 汴京에 들어가 後梁을 멸망시키고 스스로 나라의 뒤를 이었으므로 朱梁(後梁)을 나라를 찬탈한 有窮나라를 찬탈한 新室(나라)에 견준 것이다. 曆法紀年을 모두 버리고 따지지 않았으니, 이는 모두 편벽된 말이고 공정한 의논이 아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책에서는 오직 만을 정통으로 삼아서 그 뒤의 자손들이 비록 미약하고 流離하였더라도 祖宗基業을 잇게 하였다.
그리고 사방에서 이들과 더불어 優劣을 다투는 자들은 모두 옛 신하이기 때문에 여전히 天子의 제도를 사용하여 그들에게 군림하게 하였고, 천하가 분열됨에 이르러는 본래 君臣 관계가 아니었으면 모두 列國의 제도로 대하였다.
그러나 , (四時)와 , 로써 일의 先後를 표시하지 않을 수가 없다.注+(기록하다)는 이다. 帝位를, 나라가 나라에 전하였는데 나라가 받았고,
나라가 나라(南朝)에 전하여 나라에 이르렀는데 나라가 취하였으며, 나라가 나라에 전하여 나라에 이르렀는데 大宋이 이어받았다.
그러므로 그 年號를 취하여 그 나라의 일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이것을 높이고 저것을 낮추어서 正位(正統)와 閏位(閏統)의 구분을 둔 것이 아니다.
昭烈이 비록 中山靖王의 후손이라고 하나 그 世次를 기록할 수가 없어서 이 또한 南唐烈祖 李昇吳王 李恪의 후손이라고 칭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注+五代 사이에 李知誥(李昇)가 淮南을 점거하고 스스로 太宗의 세 번째 아들인 그러므로 감히 에 견주어 나라의 傳統을 잇게 할 수 없는 것이다.”
孫權이 치소를 武昌으로 옮겼다.
孫權公安에서 鄂邑으로 도읍을 옮기고는 악읍을 武昌으로 改名하였다.注+鄂邑나라 江夏이다.
】 〈昭烈帝가〉 宗廟를 세우고 高皇帝 이하를 祫祭하였다.
】 5월에 夫人 吳氏를 세워 皇后로 삼고, 아들 劉禪皇太子로 삼았다.
吳氏는 장군 吳懿의 누이이고, 劉璋의 형인 劉瑁의 아내이다.
】 6월에 나라가 夫人 甄氏(견씨)를 죽였다.
】 처음에 魏主 曹丕太祖(曹操)를 따라 鄴城에 들어가서 袁熙의 아내 甄氏를 좋아하니, 태조가 그를 위하여 견씨를 부인으로 맞아들이게 하여 아들 曹叡를 낳았다.注+(위하다)는 去聲이다. 古文에는 로 되어 있다.
그러나 조비가 즉위하고 난 뒤에는 郭貴嬪이 총애를 받았다.注+婦人美稱이니, 손님으로 공경할 만한 것이다. 貴嬪을 둔 것이 이때 처음 시작되었다. 견씨가 업성에 머물러 있으면서 失意에 빠져 원망하는 말을 하니, 귀빈이 참소하여 그녀를 죽였다.
나라가 太祖(曹操)를 建始殿에서 제사하였다.
魏主 曹丕宗廟鄴城에 있다 하여 太祖洛陽建始殿에서 제사하여 평민의 와 같이 하였다.注+獻帝가〉 武王(曹操)을 魏王에 봉하자, 宗廟鄴城에 세웠다. 建始殿曹丕가 처음 세운 것이니, 建國의 시초라 하여 건시전이라 命名한 것이다.
】 이달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나라 有司日食이 있다 하여 太尉免職할 것을 아뢰자, 다음과 같이 詔令을 내렸다. “災異가 일어남은 元首(군주)를 견책한 것인데 허물을 股肱大臣에게 돌리니,
어찌 禹王湯王이 자신을 罪責한 의리이겠는가.注+春秋左氏傳莊公 11년에 臧文仲이 말하기를 “禹王湯王이 자신을 罪責하였으므로 그 나라가 일어난 것이 빨랐다.” 하였다. 百官들로 하여금 각각 자기 직책을 경건히 수행하게 하고, 뒤에 天地의 재앙이 있을 때에는 三公을 탄핵하지 말라.”注+나라 제도에 災異가 있으면 三公을 면직하였다.
】 가을 7월에 昭烈帝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孫權을 정벌하였다.
先主 劉備가 군대를 일으켜 吳나라를 정벌하다先主 劉備가 군대를 일으켜 吳나라를 정벌하다
】 황제(劉備)는 關羽戰歿한 것을 수치로 여겨서 장차 孫權을 공격하려 하였는데, 장군 趙雲이 다음과 같이 하였다. “나라의 曹操이고 손권이 아니니, 만약 먼저 나라를 멸망시키면 손권이 저절로 복종할 것입니다.
지금 조조가 비록 죽었으나 그의 아들 曹丕가 황제의 자리를 찬탈하여 도둑질하였으니, 마땅히 여러 사람의 마음을 인하여 일찍 關中을 도모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河水渭水上流를 점거하여 흉악한 역적을 토벌하면 關東義士들이 반드시 양식을 싸서 짊어지고 말을 채찍질하여 왕자의 군대를 맞이할 것이니,
나라를 버려두고 먼저 나라와 싸워서는 안 됩니다. 兵勢는 한 번 교전하면 반드시 단번에 결판이 나지 않을 것이니,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注+(갑자기)은 로 읽는다.
신하들 중에 간언하는 자가 매우 많았으나 昭烈帝는 모두 듣지 않고 마침내 諸葛亮을 남겨두어 太子를 보좌해서 成都를 지키게 하고, 직접 諸軍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내려갔다.
車騎將軍 張飛가 그 부하에게 살해당하였다.
張飛는 영웅스럽고 용맹함이 關羽의 다음이었다. 관우는 병졸들을 잘 대우하고 大夫들에게는 교만하였으며, 장비는 군자들을 사랑하여 예우하고 軍人(병사)을 돌보지 않으니, 황제(劉備)가 항상 경계하였으나 장비는 고치지 않았다.
이때에 장비는 1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江州에서 회합하기로 하였는데, 출발에 앞서 부하가 살해하여 그의 머리를 가지고 孫權에게로 달아났다. 昭烈帝는 장비 진영의 都督이 표문을 올렸다는 말을 듣고는 말하기를 “아, 슬프다. 장비가 죽었다.”注+이니, 한탄하는 소리이다. 표문은 마땅히 張飛가 직접 올려야 하는데, 都督이 차례를 넘어 올렸으므로 장비가 반드시 죽었음을 안 것이다. 하였다.
孫權이 화해를 청했으나 황제(劉備)가 허락하지 않으니, 손권은 마침내 陸遜을 보내어서 장수들을 감독하여 막게 하였다.
孫權이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니, 諸葛瑾이 인하여 편지를 보내기를 “關羽가 어찌 先帝(獻帝)만큼 친하며, 荊州가 어찌 海內만큼 크겠습니까.注+이때 지방 사람들이 나라 獻帝가 이미 살해 당했다고 전하였으므로 인하여 헌제를 칭하여 先帝라 한 것이다.
蜀漢이 모두 나라를 원수로 여겨 미워해야 할 것이니, 그렇다면 누구를 앞에 두고 누구를 뒤에 두어야 하겠습니까. 만약 이 도리를 살핀다면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알기가 쉬울 것입니다.” 하였으나, 황제가 듣지 않았다.
이때 나라의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제갈근이 친한 사람을 별도로 보내서 나라와 서로 소식을 전한다.”라고 하였는데, 孫權이 말하기를 “나와 子瑜(諸葛瑾)는 死生 간에도 바꾸지 않을 굳은 맹세가 있으니,注+子瑜諸葛瑾의 자이다. 자유가 나를 저버리지 않는 것은 내가 자유를 저버리지 않는 것과 같다.” 하였다.
陸遜 또한 표문을 올려서 諸葛瑾이 반드시 이러한 일이 없을 것이라고 밝히자, 孫權이 답장을 보내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玄德이 예전에 孔明을 우리 나라에 보내왔을 적에注+〈“昔遣孔明至吳”는〉 諸葛亮나라에 와서 구원을 청했을 때를 말한다. 내 일찍이 子瑜에게 말하기를 ‘과 공명은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간인데, 어찌 그를 우리 나라에 머물게 하지 않는가?’ 하니,
자유가 말하기를 ‘諸葛亮은 이미 남에게 폐백을 바쳐 신하가 되었으니, 의리상 두 마음을 품을 수가 없습니다. 저의 아우가 나라에 머물지 않는 것은 제가 그의 나라로 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하였으니, 그 말이 충분히 神明을 감동시킬 수 있다. 이제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나와 자유는 정신으로 사귄다[神交] 이를 만하니, 외부의 말이 이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注+(이간하다)은 居莧이다. 경의 뜻이 지극함을 알기에 곧바로 올린 표문을 봉함하여 자유에게 보이노라.”注+〈“表示之矣”는〉 表文子瑜에게 보인 것이다.
】 황제가 吳班馮習을 보내서 孫權의 장수인 李異 등을 巫縣에서 격파하고 秭歸로 진군하니,注+巫縣나라 때에는 南郡에 속하였고 나라 초기에는 宜都郡에 속하였는데, 뒤에 孫休가 나누어 建平郡을 세우니, 무현이 여기에 속하였다. 손권은 陸遜大都督으로 삼아 朱然 등 5만 명을 감독해서 막도록 하였다.注+孫權이 처음으로 呂蒙을 명하여 大督으로 삼아서 關羽를 잡았는데, 지금 또다시 陸遜을 명하여 대도독으로 삼아 황제를 막게 하였으니, 대도독이라는 칭호가 이때 시작되었다.
나라가 凌雲臺를 쌓았다.注+水經註≫에 근거해보면 凌雲臺洛陽城金市의 동쪽에 있었다.
】 8월에 孫權이 사신을 보내어 나라에 항복하니, 나라가 손권을 봉하여 吳王으로 삼았다.
孫權이 사신을 나라에 보내어 을 칭하고 于禁 등을 나라에 돌려보내니, 나라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축하하였으나 劉曄이 홀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손권이 이유 없이 항복을 청하니, 반드시 국내에 위급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
中國(나라)이 가서 그 틈을 탈까 염려되므로 땅을 바치고 항복을 청해서 첫 번째로는 중국의 군대를 물리치고, 두 번째로는 중국의 지원을 빌려 그 무리를 강성하게 하고 을 의심하게 하려는 술책일 뿐입니다.
蜀漢이 각각 한 를 확보하고 있으니, 급한 일이 있을 때에 서로 구원함은 이는 약소국의 이익입니다.注+各保一州”는 요약하여 말한 것이니, 나라는 揚州를 보유하고 蜀漢益州를 보유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자기들끼리 서로 공격하니, 이는 하늘이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크게 군대를 일으켜서 곧바로 長江을 건너가 기습해야 하니, 蜀漢이 그 밖을 공격하고 우리가 그 안을 공격하면, 나라의 멸망이 열흘에서 한 달을 넘지 않을 것입니다. 나라가 망하면 蜀漢 또한 오래 보존되지 못할 것입니다.”
魏主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마침내 나라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太常 邢貞을 보내어 策書를 받들어 孫權을 제수해서 吳王으로 삼고 九錫을 가하니,
劉曄이 다음과 같이 간하였다. “손권은 비록 영웅의 재주가 있으나 옛날 나라의 票騎將軍 南昌侯일 뿐입니다. 관직이 하찮고 권세가 낮으며, 군사와 백성들이 중국(나라)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으니, 백성들과 더불어 자신이 도모하는 바를 이룰 수 없습니다.注+所謀”는 스스로 자기 나라에서 왕 노릇 하고자 함을 이른다.
왕의 지위는 천자와의 차이가 한 등급일 뿐이니, 禮秩(禮儀爵秩)과 服御(服飾, 車馬, 器用 등)가 서로 혼란스럽습니다.注+나라는 景帝武帝 이후로 藩王(제후왕)들을 제재하여 京師(천자)와 제도를 똑같이 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曹操魏王이 되어서 九錫을 가한 뒤로부터 禮秩服御가 천자와 차이가 없어 혼란하게 되었다. 이제 그가 거짓 항복하는 것을 믿고서 그의 작위와 칭호를 높여주어 후대하고 번성하게 하면 이는 호랑이를 위하여 날개를 달아주는 격입니다.注+은 땅을 더하여 후대하는 것이고, 은 길러서 번성하게 하는 것이다. (위하다)는 去聲이니, 아래의 “爲國”의 도 같다. (붙이다)는 로 읽는다.
손권은 蜀漢의 군대를 물리친 뒤에 반드시 겉으로는 를 다하여 중국을 섬기고 안으로는 무례한 짓을 자행하여 陛下를 노하게 할 것입니다.
폐하가 그를 정벌하면 그는 서서히 자기 백성들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중국을 섬김에 신하의 예를 잃지 않았는데 이유 없이 우리를 정벌하니,
이는 반드시 우리 국가를 멸망하고 우리 人民을 포로로 잡아서 노예와 을 삼고자 하는 것이다.’라고注+는 사로잡음이다. 하면 백성들이 그 말을 믿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마음을 함께하여 전투력이 10배나 증가할 것입니다.” 魏主 曹丕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邢貞나라에 이르니, 나라 사람들은 孫權을 마땅히 上將軍, 九州伯이라고 칭해야 하고 나라의 봉작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注+禮記≫ 〈王制〉에 “九州 중에 한 는 천자의 縣內(畿內)가 되고, 나머지 여덟 주는 여덟 명의 이 된다.” 하였다.
이에 손권이 말하기를 “沛公 또한 項羽의 봉작을 받아 漢王이 되었으니, 時宜에 마땅하게 할 뿐이다. 어찌 손해될 것이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都亭에 나가서 형정을 기다렸다.
형정이 궁궐 문에 들어오면서 수레에서 내리지 않자, 張昭가 말하기를 “이 감히 스스로 높은 체하고 큰 체하니, 아마도 江南이 약소하여 한 치 되는 칼날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인가.” 하니, 형정이 즉시 수레에서 내렸다.
中郞將 徐盛이 분노를 참지 못하여 同列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들이 몸을 떨쳐 일어나 목숨을 내놓아서 국가를 위해 을 겸병하고 을 병탄하지 못해서 우리 군주로 하여금 邢貞과 맹약하게 하니, 치욕이 아니겠는가.” 하고 인하여 눈물을 줄줄 흘렸다.
형정은 이 말을 듣고 자신의 무리들에게 이르기를 “江東의 장수와 정승이 이와 같으니, 오랫동안 남에게 낮출 자가 아니다.” 하였다. 나라의 장수들은 나라가 內附했다 하여 마음이 모두 느슨해졌으나, 유독 夏侯尙만은 공격하고 수비하는 대비를 더욱 갖추었다.
魏主于禁으로 하여금 鄴城에 가서 高陵(曹操의 능)에 배알하게 하였는데, 미리 의 지붕에다가 을 그려두었다. 우금은 이것을 보고 부끄럽고 화가 나서 병들어 죽었다.注+古字와 통한다.
司馬公(司馬光)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于禁이 수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서 싸움에 패하여 죽지 못하고 살아서 에게 항복하였다가 이윽고 다시 돌아왔으니, 그를 폐출하는 것도 하고 죽이는 것도 가한데, 마침내 의 지붕에 그림을 그려서 욕을 보였으니, 이는 임금답지 못한 짓이다.”注+을 주어 慶賀하고 형벌을 주어 威嚴을 보이는 것을 이라 한다.
孫權武昌築城하였다
】 겨울 10월에 나라가 楊彪光祿大夫로 삼았다.
】 처음에 魏主 曹丕楊彪太尉로 삼고자 하였는데, 양표가 사양하기를 “일찍이 나라 조정의 三公이 되어서 세상이 쇠퇴하고 혼란한 때를 만났으나 尺寸의 작은 공도 세우지 못했습니다. 만약 다시 나라의 신하가 되면 국가에서 사람을 선발하는 일에도 또한 영화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에 公卿들이 초하룻날 아침 조회할 적에, 마침내 양표도 함께 불러들여서 로 대우하였으며 几杖을 하사하여 布單衣皮弁을 착용하고서 조비를 뵙게 하였다.注+(입다)은 直略이다. (뵙다)은 賢遍이니, 아래도 같다.
光祿大夫를 제수하여 조현할 적에 지위가 삼공의 다음이 되게 하고 또 문에 行馬를 설치하여 우대하고 높였다.注+行馬는 나무 하나를 가운데에 (가로)으로 두고 나무 두 개를 서로 꿰어서 四角을 만들어 문에 설치하니, 사람의 출입을 금지하는 것이다. 나라와 나라는 三公의 문에 행마를 설치하였다.
나라가 五銖錢을 혁파하였다.
】 곡식 값이 비싸졌기 때문이었다.
孫權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나라가 中大夫 趙咨를 보내어 나라에 들어가 사례하게 하였다. 魏主 曹丕가 묻기를 “吳王은 어떠한 군주인가?” 하니, 조자가 대답하기를 “귀 밝고 눈 밝고 인자하고 지혜로우며 영웅스럽고 지략이 있는 군주입니다.” 하였다.
魏王이 구체적인 내용을 묻자, 조자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魯肅을 보통 사람 중에서 받아들였으니 이는 귀 밝음이요, 呂蒙行伍(졸병)에서 발탁하였으니 이는 눈 밝음이요, 于禁을 사로잡고도 살해하지 않았으니 이는 인자함이요,
荊州를 취할 적에 군대를 출동시키고도 병기에 피를 묻히지 않았으니 이는 지혜로움이요, 세 를 점거하고서 천하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니 이는 영웅스러움이요, 폐하에게 몸을 굽히니 이는 지략입니다.”注+三州”는 荊州, 揚州, 交州이다.
조비가 묻기를 “오왕이 자못 학문을 아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오왕은 어진 이에게 맡기고 능력 있는 자를 부려서 뜻이 經略함에 있으니, 비록 한가로운 여가에 서책과 史籍을 널리 보지만, 書生들이 文章을 찾고 文句를 뽑아다 쓰는 것은 본받지 않습니다.”注+은 뽑아냄이니, 魏主가 문장을 좋아하였으므로 趙咨가 이 말로써 기롱한 것이다. 하였다.
나라를 정벌할 수 있는가?”注+로 읽는다. 하니, 대답하기를 “大國은 정벌하는 군대가 있고 小國은 수비하는 견고함이 있습니다.”注+〈“大國……有備禦之固”〉 하였다.
나라가 나라를 어렵게 여기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갑옷 입은 병사가 백만이고 長江漢水를 해자로 삼으니, 어찌 어렵게 여기겠습니까.” 하였다.
나라에 大夫(趙咨)와 같은 자가 몇 사람이나 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총명하여 특별히 통달한 자가 8, 90명이고, 과 같은 무리는 수레로 싣고 말[]로 헤아릴 정도여서 이루 다 셀 수 없습니다.” 하였다.
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孫權에게 진귀한 물건을 바칠 것을 요구하였다.
魏主 曹丕가 사신을 보내어 大貝, 明珠, 象牙, 犀角, 玳瑁(대모), 孔雀, 翡翠(비취), 鬪鴨, 長鳴鷄나라에 요구하였는데,注+코끼리는 交趾에서 나오니, 수놈은 두 개의 긴 이빨이 있는데 길이가 한 길 남짓 된다. 이고 는 음이 이다. 玳瑁는 거북과 비슷하니 그 껍질이 서로 덮인 채로 태어나는데 마치 갑옷과 같고 껍질 위에 얼룩무늬가 있다. 孔雀은 수컷은 꼬리가 金翠色으로 광채가 있어 사랑스러우니, 사람들이 그 꼬리를 채집하여 부채와 佛麈(승려들이 참선할 때 사용하는 拂子)를 만든다. 비취새는 크기가 공작과 같은데, 붉은 수컷을 라 하고 푸른 암컷을 라 하는바, 깃털이 장식을 만들 만하다. 오리는 순하여 길들이기 쉬우니 싸움을 잘하는 것은 구하기 어렵다. 長鳴鷄는 그 울음소리가 긴 것이다. 范成大가 말하기를 “장명계는 南詔의 여러 南蠻에서 왔으니, 형체가 왜소하고 울음소리가 크다. 소리가 원만하고 긴데 한번 울면 半刻(7, 8분)을 울어서 종일토록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남만에서는 이것을 매우 귀하게 여겨 이 닭 한 마리의 값이 한 냥이다. 邕州谿洞에도 있다.” 하였다.
나라의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우리 荊州揚州에서 공물을 바치는 데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습니다. 나라에서 요구하는 것은 가 아니니, 마땅히 주지 말아야 합니다.” 하였다. 吳王 孫權이 말하기를 “저들이 요구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기왓장과 돌과 같을 뿐이니, 내 어찌 이것을 아끼겠는가.
또 저는 喪中에 있는데도 요구하는 바가 이와 같으니, 어찌 저들과 더불어 예를 말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모두 주었다.
孫權이 아들 孫登을 세워 太子로 삼았다.
吳王 孫權孫登을 위해 師友를 잘 선발하여 諸葛瑾의 아들 諸葛恪, 張昭의 아들 張休, 顧雍의 아들 顧譚, 陳武의 아들 陳表中庶子로 삼아서,
들어가서는 ≪詩經≫과 ≪書經≫을 하고 나와서는 따르며 말 타고 활 쏘면서 布衣로 대하고는, 그들을 四友라고 하였다. 나라에서 손등을 萬戶侯에 봉하고자 하였으나, 손권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사양하였다.
나라에서 護鮮卑校尉護烏桓校尉를 두었다.
】 처음에 太祖(曹操)가 蹋頓(답돈)을 이기자, 烏桓이 점차 쇠약해졌다. 鮮卑大人軻比能, 素利, 彌加 등이 인하여 通市(관문을 통하여 무역함)를 요구하자,注+〈“通市”는〉 關市(변경에 설치한 시장)를 열어 그들의 토산물을 가지고 중국과 무역하는 것이다. 태조가 표문을 올려 모두 왕으로 삼았다.
가비능은 본래 선비의 작은 종족 출신인데, 용맹하고 굳세고 청렴하고 공평함으로 여러 사람들을 복종시켜 위엄으로 다른 부족을 제어하니, 이때 雲中五原으로부터 동쪽으로 遼水에 이르기까지 모두 鮮卑의 뜰로 삼아서 땅을 나누어 통솔하였다.注+는 이름이다.
가비능은 변방과 가까이 있기 때문에 중국을 배반하는 사람들 중에 그에게 귀의하는 자가 많았고, 소리 등은 변방 밖에 있어서 길이 멀기 때문에 변방의 우환이 되지 않았다.
魏主 曹丕牽招護鮮卑校尉로 삼고, 田豫護烏桓校尉로 삼아서 오랑캐들을 鎭撫하게 하였다.


역주
역주1 昭烈皇帝章武元年 : “‘章武’라고 크게 쓴 것은 어째서인가. 昭烈이 高祖와 光武帝의 뒤를 이었기 때문이다. 魏나라가 찬탈하여 황제의 자리에 섰고 吳나라가 江東 지역을 割據하였는데, 소열은 漢나라 皇室의 親族인 中山靖王의 후손이다. 이름(명분)이 바르고 말이 순하니, 〈帝位가〉 이 사람을 버리고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資治通鑑綱目≫은 ‘章武 元年’을 게시하여 크게 썼으니, 그런 뒤에야 正閏(正統과 非正統)과 順逆(順理와 邪逆)이 각각 제자리를 얻게 되었다. 그러므로 ‘國統이 아래에서 바로잡혀서 人道가 정해졌다.’라고 한 것이다.(이 내용은 본래 習鑿齒의 ≪漢晉春秋≫에 보인다.)[大書章武 何 紹昭烈於高光也 魏簒立 吳割據 昭烈親中山靖王之裔 名正言順 舍此安歸 綱目揭章武之元而大書之 然後正閏順逆 各得其所 故曰統正於下而人道定矣(本習鑿齒漢晉春秋)]” ≪書法≫
역주2 魏復五銖錢 : “‘復’이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董卓이 혁파한 것이 이때 32년이 되었다.[書復 何 卓壞之也 於是三十有二年矣]” ≪書法≫
역주3 漢中王 卽皇帝位 : “‘卽皇帝位(황제의 자리에 올랐다.)’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正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孫權과 曹丕는 모두 그의 성명을 지적하여 ‘황제를 칭했다.’고 썼고, 后를 세우고 太子를 세웠을 적에 모두 ‘皇’이라고 쓰지 않았으니, 이는 정통과 차별하기 위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卽皇帝位’라고 쓴 것이 4번이다.(高帝와 光武帝, 昭烈帝, 晉나라 元帝에 자세히 보인다.)[書卽皇帝位 何 正統也 故孫曹皆斥姓名 書稱皇帝 立后 立太子 皆不書皇 所以殊之於正統也 終綱目 書卽皇帝位四(詳高帝光武昭烈晉元帝)]” ≪書法≫
“三代 이후로 오직 漢나라가 천하를 얻은 것이 정통이 된다. 無道한 秦나라를 주벌하고 逆賊 項羽를 토벌하여 國祚(국통)를 전한 것이 400년이 넘었으니, 한 자의 땅과 한 명의 백성도 漢나라의 소유 아님이 없었다. 桓帝와 靈帝에 이르러 임금답지 못하여 董卓이 禍를 일으키자, 영웅들이 떼 지어 일어나 동탁을 공격하였으니, 동탁이 이미 주륙을 당하였으면 천하는 진실로 漢나라의 천하인 것이다. 그런데 曹操가 때를 타고 皇命을 제멋대로 행사하여 천자를 협박하고 國母를 시해하니, 義士들이 이 때문에 탄식하고 격분하였다. 이때 만일 한 명의 지아비라도 천하에 의리를 宣揚하는 자가 있었다면 모두 君子가 허여하였을 것이니, 하물며 당당한 皇室의 後裔로서 뛰어난 명성이 세상을 뒤덮을 만한 자(劉備)에 있어서이겠는가.
曹丕가 이미 제위를 찬탈하자 漢나라의 제사를 주관할 사람이 없었는데, 昭烈이 蜀漢에서 제위를 바로잡아 친히 大統을 이었으니, 명분이 바르고 말이 순하여 본래 의심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런데 陳壽의 ≪三國志≫로부터 天子의 제도로 온전히 魏나라를 인정하고 蜀漢을 列國으로 대우하였다. 그러므로 ≪資治通鑑≫에서 이를 인습하여 魏나라를 기준으로 삼아 年度를 기록했는데, ≪資治通鑑綱目≫에 이르러서 비로소 소열로 獻帝의 뒤를 계승하여 漢나라의 남은 正統을 이었으니, 진실로 왜곡하여 異說을 세워 矛盾을 만들기를 좋아한 것이 아니다. 다만 ≪자치통감≫에는 〈司馬溫公이〉 스스로 이르기를 ‘우선 그 연도를 취하여 여러 나라의 일을 기록한 것이고, 이것을 높이고 저것을 낮추어서 正閏의 구분을 둔 것이 아니다.’ 하였으니, 이는 史筆을 인습하여 기술한 것이고, 애당초 특별히 의리를 천명하는 事例를 세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說이 저것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자치통감강목≫으로 말하면 ≪春秋≫의 의리를 취하여 천하 만세에 正論을 보여주었는바, 曹操와 曹丕의 찬탈과 도둑질로 인하여 大義를 펼 수 없었는데, 다행히 소열이 있어서 漢나라의 大統을 충분히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 말이 여기에서 나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진실로 병행되어 서로 어긋나지 않으니, 요컨대 또한 서로 발명해주기를 기다리는 뜻이 있는 것이다.
진수의 ≪삼국지≫를 살펴보면 ‘소열은 涿縣 사람으로 中山靖王 劉勝의 후손이다. 유승의 아들 劉正이 元狩 6년(117)에 탁현의 陸城亭侯에 봉해졌는데, 酎金의 죄에 걸려 侯의 지위를 잃고 인하여 이곳에 살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劉雄이고 아버지 劉弘이 소열을 낳았다.’ 하여, 그 世次와 本末이 매우 분명하다. 또 歐陽脩의 ≪五代史≫를 살펴보면 〈南唐世家〉가 실려 있는데, 여기에 ‘李昇은 徐州 사람이다. 대대로 본래 미천하였고 아버지 李榮은 唐나라 말기에 난리를 만나서 어느 곳에서 죽었는지 알지 못한다. 이변이 어려서 고아가 되자 楊行密이 길러 자식으로 삼았고, 또 徐溫에게 주어서 인하여 徐氏 姓을 따랐는데, 吳나라를 찬탈한 뒤에 비로소 李氏 姓을 회복하고는 스스로 唐나라 憲宗의 아들인 建王 李恪의 후손이라 했다.’ 하였다.
≪資治通鑑≫을 살펴보면 ‘唐主(南唐의 군주 李昇)가 吳王 李恪을 先祖로 삼고자 하였는데, 혹자가 말하기를 「李恪은 죄를 짓고 죽었으니, 鄭王 李元懿를 선조로 삼는 것만 못하다.」 하자, 당주가 有司에게 명령하여 두 왕의 후손들을 상고하게 하니, 吳王의 孫子 李禕가 功이 있고 이의의 아들 李峴이 재상이 되었다 하여 마침내 오왕을 선조로 삼아 이현으로부터 5대를 지나 아버지 李榮에 이르렀다 하였으니, 그 이름이 모두 유사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하였다.
이는 소열과 현격한 차이가 나는 것이다. 더구나 諸葛亮이 한 번 소열을 보고는 맨 먼저 ‘장군은 皇室의 後孫’이라고 칭하였고, 뒤에 孫權에게 구원을 청할 때에도 손권을 대하여 ‘劉豫州는 皇室의 후손’이라고 말하였으니, 제갈량은 진실로 함부로 말하는 자가 아니다. 이 때문에 張松이 劉璋을 설득할 때에도 ‘유예주는 使君의 宗室’이라고 말하였고, 훗날에 苻堅이 晉나라를 정벌하는 것을 諫하는 苻融에게 대답한 말에 또한 이르기를 ‘劉禪은 漢나라의 遺祚(後嗣)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또한 中國에게 합병당하였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소열이 漢나라 황실의 후손이 됨은 명백하여 의심할 나위가 없는바, 이로써 大統을 이음에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해에 조비가 즉위하자 소열이 곧바로 지위와 칭호를 바로잡아서 漢나라의 국통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였으니, 사리의 마땅함에 깊이 부합한다. 光武帝가 鄗(학) 땅에서 즉위하고 晉나라 元帝가 江左에서 즉위한 것과 전후로 자취가 똑같으니, 기타의 참람하고 도둑질하여 스스로 황제라 칭할 것을 급하게 여긴 자와는 진실로 비할 바가 아니다. 이 일은 ≪자치통감강목≫ 가운데 가장 중대한 일이다. 나는 그러므로 顚末을 낱낱이 상고하고 자세히 분별하여 후세의 君子에게 고하고, 또한 朱子가 붓을 잡고 이것을 기록한 뜻을 온 천하에 밝게 드러내는 것이다.[三代而下 惟漢得天下爲正 誅無道秦 討逆賊羽 傳祚踰四百年 尺地一民 莫非漢有 至桓靈不君 董卓煽禍 英雄群起而攻之 卓旣誅戮 則天下固漢之天下也 曹操乘時擅命 脅制天子 戕殺國母 義士爲之歎憤 苟有一夫唱義於天下 皆君子之所予 況於堂堂帝室之冑 英名蓋世者乎 丕旣簒位 漢祀無主 昭烈正位蜀漢 親承大統 名正言順 本無可疑 自陳壽志三國 全以天子之制予魏 而以列國待漢 故通鑑因之 以魏紀年 至綱目 始以昭烈承獻帝之後 紹漢遺統 固非曲立異說 好爲矛盾 特通鑑自謂姑取其年 以紀諸國之事 非尊此卑彼 有正閏之辨 此蓋因史筆以紀述 初不別立義例 故其說不得不取於彼 若夫綱目 則取春秋之義 以示天下萬世之正論 所以因操丕之簒竊 大義莫得而伸 幸有昭烈 足以存漢氏之統 故其說不得不出於此 二者固竝行而不相悖 要亦有待於互相發明之意也 按陳壽志 昭烈涿縣人 中山靖王勝之後 勝子正 元狩六年 封涿縣陸城亭侯 坐酎金失侯 因家焉 祖雄 父弘 生昭烈 其世次本末甚明 又按歐陽脩五代史 載南唐世家 李昇徐州人 世本微賤 父榮遇唐末之亂 不知所終 昇少孤 楊行密養以爲子 又乞與徐溫 因冒姓徐 至簒吳之後 始復姓李 自言唐憲宗子建王恪之後 及考以通鑑 則曰唐主欲祖吳王恪 或曰 恪誅死 不若祖鄭王元懿 唐主命有司 考二王苗裔 以吳王孫禕有功 禕子峴爲宰相 遂祖吳王 自峴五代 至父榮 其名率皆有司所撰 此與昭烈大相遼絶 況諸葛一見昭烈 首稱將軍帝室之冑 及後求救孫權 亦以豫州王室之冑 對權稱之 亮固非妄言者也 是以張松之說劉璋 且謂豫州使君之宗室 而異時苻堅答苻融諫伐晉之語 亦曰 劉禪可非漢之遺祚 然亦爲中國所幷 然則昭烈之爲漢裔 顯顯無疑 以之紹統 夫復何說 是年曹丕旣立 昭烈卽正位號 不使漢統墜地 深合事宜 其與光武卽位于鄗 晉元卽位江左 先後一轍 固非其他僭竊急於自帝者之比 斯事在綱目中 最其大者 臣故歷考顚末 詳而辨之 以告後之君子 亦使朱氏秉筆之志 暴白於天下云]” ≪發明≫
역주4 五德의……보인다 : 五德은 五行의 德으로, 오행은 金‧木‧水‧火‧土의 다섯 가지 기운이 운행됨을 이르며, 相生은 木이 火를 낳고 火가 土를 낳고 土가 金을 낳고 金이 水를 낳고 水가 木을 낳는 것이며, 相剋은 木이 土를 이기고 土가 水를 이기고 水가 火를 이기고 火가 金을 이기고 金이 木을 이김을 이른다. 秦 始皇 26년 조 綱에 “水德으로 정하고 10월을 歲首로 삼았다.[定爲水德 以十月爲歲首]” 하였고, 그 目에 “齊나라 사람 鄒衍이 五德이 끝나고 시작하는 運을 논하여 저술하였다.[齊人鄒衍 論著終始五德之運]” 하였는데, 이에 대한 訓義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伏羲가 木德으로 왕이 되었는데, 木은 火를 낳으므로 神農은 火德으로 왕이 되었고, 火는 土를 낳으므로 黃帝는 土德으로 왕이 되었고, 土는 金을 낳으므로 少昊는 金德으로 왕이 되었고, 金은 水를 낳으므로 顓頊은 水德으로 왕이 되었고, 水는 木을 낳으므로 帝嚳은 다시 木德으로 왕이 되었고, 木은 다시 火를 낳으므로 帝堯는 火德으로 왕이 되었고, 火는 다시 土를 낳으므로 帝舜은 土德으로 왕이 되었고, 土는 다시 金을 낳으므로 夏나라는 金德으로 왕이 되었고, 金은 다시 水를 낳으므로 商나라는 水德으로 왕이 되었고, 水는 다시 木을 낳으므로 周나라는 木德으로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五德이 끝나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鄒衍은 周나라가 火德을 얻었다고 생각하였는데, 이는 武王의 집에 불이 흘러든 것을 周나라가 천명을 받은 증거로 삼았고, 또 복색에 붉은색을 숭상하였기 때문이다. 추연의 설을 가지고 시작과 끝을 삼는다면 秦나라는 마땅히 土로써 行을 삼아야 하는데, 지금 始皇은 水가 火를 이긴다 하여 스스로 水로써 行을 삼았으니, 이른바 ‘五行이 서로 이기는 것을 미루었다.’라는 것이다. 漢나라 초에 土로써 行을 삼았으니, 이 또한 오행의 설에 근거한 것이다.[伏羲以木德王 木生火 故神農以火德王 火生土 故黃帝以土德王 土生金 故少昊以金德王 金生水 故顓頊以水德王 水生木 故帝嚳又以木德王 木又生火 故帝堯以火德王 火又生土 故帝舜以土德王 土又生金 故夏以金德王 金又生水 故商以水德王 水又生木 故周以木德王 此五德之終而復始也 鄒衍以爲周得火德 蓋以火流王屋爲周受命之符 且服色尙赤故也 就衍之說以爲終始 秦當以土爲行 今始皇以水勝火 自以水爲行 所謂推五勝也 漢初以土爲行 蓋亦祖行之說也]”
역주5 吳王……하였다 : 이는 본서 164쪽 ≪發明≫의 唐 憲宗의 아들 建王 李恪의 후손이라 한 것과 다르다. 李昇의 선조에 대해 세 가지 설이 있는데, ≪南唐書≫, ≪江南野史≫ 등에 기록된 建王 李恪의 후예라는 설과 ≪舊五代史≫ 등에 기록된 唐 玄宗의 아들 永王 李璘의 후예라는 설이다. 또한 唐 太宗의 아들 建王 李恪이라는 설이 있다. ≪발명≫은 첫 번째 설을 따른 것이고 ≪資治通鑑≫에서는 세 번째 설을 따른 것이다. ≪자치통감≫ 胡三省의 註에도 세 번째 설을 따랐는데 訓義에서는 이를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역주6 後漢과 東晉 : 後漢의 光武帝가 前漢(西漢)을 계승한 것과 東晉의 元帝가 西晉을 계승한 것을 가리킨다.
역주7 立宗廟 祫祭高皇帝以下 : “≪周易≫의 萃卦와 渙卦에 모두 ‘王者가 宗廟의 가운데에 이른다.’고 말하였으니, 漢王(劉邦) 2년 8월에 ‘종묘와 사직을 세웠다.’고 쓴 아래에 나는 이미 그 뜻을 말하였다. 지금 四海가 분열되어서 이산된 때라고 이를 만한데, 昭烈이 처음으로 蜀漢을 얻고서 황제의 지위를 바로잡고 大統을 이었고, 또 마침 인심을 취합하는 시초를 당하였으니, ≪資治通鑑綱目≫에서 이것을 쓴 것은 光武帝가 즉위한 2년에 ‘종묘와 사직을 洛陽에 세웠다.’고 쓴 것과 같은 뜻이다. 이는 모두 여러 사람의 마음을 총집하여 취괘와 환괘의 뜻을 깊이 얻은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資治通鑑≫에서는 이것을 기재하지 않았는데, ≪자치통감강목≫은 어찌하여 특별히 예전의 여러 史書에서 취하여 썼겠는가.[在易之萃渙 皆言王假有廟 臣於漢王二年八月 書立宗廟社稷之下 已言其義矣 今焉四海分裂 可謂渙散之時 而昭烈始得蜀漢 正位繼統 又適當萃聚人心之始 綱目書此 蓋與光武卽位二年 書立宗廟社稷于洛陽 同意 是皆總攝群情 深得萃渙之義者也 不然 通鑑卽不載此 綱目何以特取諸前史而筆之哉]” ≪發明≫
역주8 魏殺夫人甄氏 : “甄氏는 누구인가. 曹丕의 正妃이다. 조비가 황제라고 칭한 지 1년이 넘었는데, 어찌하여 여전히 夫人이라고 칭하였는가. 이때 貴嬪인 郭氏가 큰 총애를 입고 있었는데 오래도록 皇后로 서지 못하니, 조비의 뜻이 屬望한 바가 있었다. 견씨가 비록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았더라도, 화를 면하고자 한들 면할 수 있었겠는가. ≪資治通鑑綱目≫은 그 심정을 깊이 탐구하였으므로 그녀에게 죄가 없다고 여겨 ‘殺’이라고 쓴 것이다.[甄氏 何 丕正妃也 丕稱皇帝踰年矣 曷爲猶稱夫人 於是貴嬪郭氏方有大寵 久而不立 丕意有所屬矣 雖微怨言 甄氏欲免 得乎 綱目深探其情 故以無罪書殺]” ≪書法≫
역주9 六宮 : 옛날 皇后의 寢宮으로 正寢이 하나, 燕寢이 다섯으로 합하여 六宮이라 하였다. ≪禮記≫ 〈昏義〉에 “옛날 天子의 后는 六宮과 三夫人, 九嬪과 29명의 世婦, 81명의 御妻를 두어 천하의 內治를 다스렸다.[古者 天子后位之宮 三夫人 九嬪 二十七世婦 八十一御妻 以聽天下之內治]”라고 보이나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역주10 魏祀太祖於建始殿 : “建始殿은 어찌하여 썼는가. 비난한 것이다. 건시전을 어째서 비난하였는가. ≪禮記≫ 〈曲禮〉에 ‘궁실을 지으려고 할 적에 종묘를 먼저 세운다.’ 하였다. 지난해에 ‘曹丕가 洛陽에 가서 궁실을 경영했다.’고 썼는데, 이때 궁실의 殿宇가 이미 이루어졌으나 종묘가 세워지지 못하여 마침내 太祖를 건시전에서 제사하면서 평민의 예와 같이 하였으니, 이는 禮가 아니다. ‘건시전에서’라고 쓴 것은 올바른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다.[建始殿 何 譏也 建始殿則何譏 禮將營宮室 宗廟爲先 去年 書如洛陽營宮室矣 及是 殿宇已成 而宗廟不立 乃祀太祖于建始殿 如家人禮 則非禮矣 書曰於建始殿 非地也]” ≪書法≫
역주11 帝自將伐孫權 : “初平 연간 이래로 병력을 가하여 공격한 사람들에게 ‘攻’이나 ‘擊’이라고 썼을 뿐이었는데, 여기에서 ‘伐’이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吳나라를 죄책하고, 또 漢나라를 높인 것이다.[自初平以來 諸相加兵者 書攻擊而已 此其書伐 何 罪吳 且尊漢也]” ≪書法≫
역주12 車騎將軍張飛 爲其下所殺 : “‘爲所殺(살해당하였다)’이라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경계하지 않음을 비난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에 ‘爲所殺’이라고 쓴 것이 11번이니, 夷蠻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바, 모두 살해당한 이유가 남에게 있지 않고 〈자신에게 있음을〉 비난한 것이다.[爲所殺 何 譏不戒也 綱目書爲所殺十一 夷蠻不與焉 皆譏不在人也]” ≪書法≫
역주13 魏築凌雲臺 : “무릇 ‘臺를 쌓았다.’고 쓴 것은 비난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에 대를 쌓았다고 쓴 것이 6번인데, 모두 비난한 것이다.[凡書築臺 譏也 綱目書築臺六 皆譏也]” ≪書法≫
역주14 孫權……魏封權爲吳王 : “孫氏가 江左(江東)에 나라를 세움에 大義가 분명하지 못하였다. 처음 曹操가 동쪽으로 내려 올 적에 이미 조조를 맞이하여 항복하려는 계책이 있었는데, 다행히 孔明이 밖에서 激發하고 周瑜와 魯肅이 안에서 계책을 바친 데 힘입어 마침내 한 번 승리를 얻었다. 이윽고 의리를 지킴이 돈독하지 못해서 關羽를 도모하여 잡아서 順함을 버리고 逆으로 나아갔다. 이 때문에 建安 22년(217)에 ‘손권이 조조에게 항복했다.’고 썼고, 24년에 ‘荊州牧을 겸했다.’고 썼고, 이때에 이르러 또다시 ‘사신을 보내어 魏나라에 항복했다.’고 썼으니, 이는 손권이 魏나라에 굴복한 실제이다. 후일에 비록 능히 스스로 자기 나라에서 황제가 되었으나 결국은 몰래 점거한 괴수일 뿐이고, 漢나라를 보존하려는 마음과 역적을 토벌하는 의리가 있는 자가 아니다. 한 번 쓰는 데 그치지 않고 특별히 쓰고 여러 번 썼으니, 또한 孫氏가 不義에 굽혀서 애당초 지킬 지조가 없는 자임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잠시 따르다가 돌연 저버렸으니, 어찌 족히 말할 것이 있겠는가. 아, 슬프다.[孫氏立國江左 大義不明 始焉曹操東下之時 已有迎降之謀 所賴孔明激發於外 瑜肅獻謀於內 遂得一捷 旣而守義不篤 圖取關羽 捨順就逆 是以建安二十二年書權降操 二十四年書領荊州牧 至是又書遣使降魏 此則孫權屈服於魏之寔 他時雖能自帝其國 要亦竊據之雄而已 非有存漢之心 討賊之義者也 特書屢書 不一書而止 亦足以知孫氏之屈於不義 初無所守者矣 乍從乍違 何足道哉 噫]” ≪發明≫
역주15 (畢)[卑] : 저본에는 ‘畢’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卑’로 바로잡았다.
역주16 關羽가……형상 : 이 내용은 본서 123, 124쪽에 보인다.
역주17 魏以楊彪爲光祿大夫 : “楊彪는 정권이 曹氏에게 있을 때에 다리가 접혀 펴지지 않는다고 칭한 뒤로부터 10여 년이 되었고 이때 비로소 나왔는데 ‘光祿大夫로 삼았다.’고 썼으니, 이는 그를 찬미한 것인가. 아니다. 아래 ‘管寧이 부름에 나아오지 않았다.’고 썼으니, 그렇다면 이는 찬미한 것이 아니다.[彪自政在曹氏 遂稱腳攣 積十餘年 至是始出 書爲光祿大夫 其美之歟 非也 下書管寧不至 則此非美矣]” ≪書法≫
역주18 魏罷五銖錢 : “五銖錢은 정월로부터 처음 ‘다시 사용했다.’고 썼었는데, 일찍이 10개월이 못 되어 곡식 값이 비싸다는 이유로 혁파하였고, 7년이 못 되어 다시 사용해서 魏나라의 시대가 끝날 때까지 오수전이 아니면 바로 곡식과 비단을 사용하여 일찍이 바꾸어 주조하지 않았다.[五銖自正月始書復 曾未十月 以穀貴罷之 不七年而復復 終魏之世 非用五銖 卽用穀帛 未嘗改鑄也]” ≪書法≫
역주19 이……것이다 : ≪管子≫ 〈小匡〉에 桓公이 管仲에게 從事하는 방법을 묻자, 관중이 대답하기를 “임금께서 卒伍를 정돈하고 甲兵을 정비하고자 하시면 大國에서도 장차 졸오를 정돈하고 갑병을 정비하려 할 것이고, 임금께서 출정하여 싸우는 일을 하려 하시면 小國 제후들의 신하들은 수비하는 대비를 할 것이니, 그렇다면 속히 천하에 뜻을 이루기 어려울 것입니다. 임금께서 속히 천하 제후들에게 뜻을 얻으려 하신다면 군대의 일은 명령을 은밀히 내리시되 정사를 여기에 붙여두소서.[君若欲正卒伍修甲兵 則大國亦將正卒伍修甲兵 君有征戰之事 則小國諸侯之臣 有守圉之備矣 然則難以速得意於天下 公欲速得意於天下諸侯 則事有所隱 而政有所寓]”라고 보인다.

자치통감강목(11) 책은 2020.12.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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