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裴叔業
이 侵魏楚王戍
注+① 水經注, 鮦陽縣有葛陵城, 城東北有楚武王冢, 民謂之楚王瑟城. 魏蓋於此置戍, 因謂之楚王戍. 鮦, 徒東切.어늘 肅
이 復令永擊之
한대 永
이 將心腹一人
하여 馳詣楚王戍
하여 令塡外塹
하고 夜伏戰士千人於城外
러니
曉而叔業等이 至城東하여 部分將置長圍어늘 永伏兵이 擊其後軍하여 破之한대 叔業이 自將精兵數千救之어늘
永이 登門樓하여 望叔業이 南行數里하고 卽開門擊其營하여 大破之하니
叔業이 進退失據하여 遂走어늘 左右가 欲追之한대
永曰 吾弱卒이 不滿三千이요 彼精甲猶盛하니 非力屈而敗라 自墮吾計中耳니 旣不測我之虛實하니 足使喪膽이라 俘此足矣니라
魏主라 遣謁者하여 就拜永汝南太守하니 永이 有勇力하고 好學能文이라
魏主
가 常歎曰 上馬能擊賊
하고 下馬作露板
은 惟傅脩期耳
注+② 脩期, 永字.라하니라
目
【目】 예전에 王晏이 世祖(齊 武帝 蕭賾)에게 총애와 신임을 받았는데, 齊主(蕭鸞)가 鬱林王(蕭昭業)을 폐할 것을 모의하자 왕안이 바로 흔쾌히 〈소란을〉 받들어 추대하였다가 齊主가 즉위하자 왕안이 스스로 새로운 조정에 佐命의 공이 있다고 생각하여 일을 제멋대로 처결하는 경우가 많으니, 齊主가 그를 미워하였다.
始安王 蕭遙光이 齊主에게 왕안을 죽일 것을 권하였는데, 齊主가 말하기를 “왕안은 나에게 功이 있고 또 罪가 없다.”라고 하였다. 소요광이 말하기를 “왕안이 武帝도 위하지 못하였는데, 어찌 陛下를 위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齊主가 잠자코 있었다.
왕안은 내심 開府儀同三司의 지위를 기대하여 자주 相工(관상쟁이)을 불러 자신의 관상을 보게 하니, 〈相工이〉 “크게 귀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왕안이 賓客과 함께 있을 적에 다른 사람을 물리치고 말하기를 좋아하였다.
齊主가 그 소식을 듣고 왕안이 반역을 하려고 한다고 의심을 하여 마침내 왕안을 華林省으로 불러서 죽이고 아울러 北中郎司馬 蕭毅도 죽였다.
注+① 省이 華林園에 있었기 때문에 華林省이라고 불렀다. 蕭毅는 太祖(蕭道成)의 조카인 新吳侯 蕭景先의 아들이다. 소의는 호사스럽고 활쏘기와 말타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므로 齊主가 이 일로 인하여 그를 무함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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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鬱林王이 폐위될 적에 王晏의 從弟 王思遠이 왕안에게 말하기를 “형께서 世祖의 후한 은혜를 받았다가 지금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을 도와 이와 같은 일을 하시니, 저들은 임시방편으로 형을 필요로 한 것입니다. 장래에 어떻게 세상에 자립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이때에 〈울림왕을 위해〉 자살을 하신다면 오히려 집안을 보존하여 죽은 뒤에 명예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안이 말하기를 “내가 막 죽을 먹어야 하니, 이 일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라고 하였다.
왕안이 驃騎大將軍으로 임명되자 子弟들에게 말하기를 “
의 말년에 阿戎(왕사원)이 나에게 자결하라고 권하였는데 만약 그의 말을 따랐다면 어찌 오늘이 있었겠는가.”라고 하니,
注+① 齊主(蕭鸞)가 처음 卽位했을 때에 왕안을 진급시켜 驃騎大將軍으로 삼았다. 晉나라와 宋나라 무렵의 사람들이 대부분 從弟를 阿戎이라고 말하였는데, 唐나라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그러하였다. 一說에 “阿戎은 王思遠의 小字이다.” 하였다. 왕사원이 바로 답하기를 “제 소견으로는 지금도 늦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사원은 齊主(蕭鸞)가 마음에 〈왕안을〉 이미 의심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틈을 타서 왕안에게 말하기를 “時局이 다소 변화하였는데, 형께서 또한 알아차리지 못하였습니까.
注+② 不는 否로 읽는다. 일반 사람들이 대부분 자신을 위한 계책에는 서투르면서 남을 위하여 계책을 세우는 데에는 정교합니다.”라고 하였으나, 왕안이 응답하지 않으니, 왕사원이 물러나왔다.
왕안이 바로 탄식하기를 “세상 사람 중에 마침내 남에게 죽기를 권하는 자가 있구나.”라고 하였는데, 열흘 만에 왕안이 죽임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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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司馬溫公(司馬光)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봉작과 녹봉의 廢置, 生死與奪은 人君이 신하를 부리는 큰 권한이다.
注+① 이것은 ≪周禮≫ 〈天官冢宰〉의 이른바 으로 신하들을 제어하는 것을 말한다.
이 있었지만 진실로 신하가 죄가 있으면 바로 사면하지 않고 반드시 槐棘의 아래에서 의논하여
注+② 이것은 ≪周禮≫ 〈秋官 小司寇〉의 이른바 八議이다. 槐棘은 公卿의 지위이다. ≪禮記≫ 〈王制〉에 “獄事가 이루어지면 大司寇가 棘木의 아래에서 다스렸다.” 하였다. 사면할 만하면 사면하고 용서할 만하면 용서하고 형벌을 내릴 만하면 형벌을 내리고 죽일 만하면 죽여서 징벌의 輕重은 실정을 살펴서 정하고 처리의 관대함과 엄격함은 시세에 따라서 하였다.
이 때문에 임금은 사면하는 은혜를 베풀었으나 그 위엄을 잃지 않았고 신하는 죄를 면하였지만 스스로 자부하지 못하였다.
北魏에 이르러서는 그렇지 않아서 공훈이 있거나 존귀한 신하들에게 이따금 미리 죽이지 않을 것으로 허락하여 저들로 하여금 교만하여 죄에 저촉하게 하였고 또 죄에 따라서 저들을 죽였다.
이것은 믿지 못할 명령으로 그들을 유혹하여 죽을 곳으로 빠지게 하였으니, 刑政의 잘못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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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魏主(元宏)가 新野에 도착하니, 齊나라 新野太守 劉思忌가 방어하자, 北魏가 신야를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여, 길게 포위망을 둘러싸 지키게 하였다.
韓顯宗이 赭陽에 주둔하였는데, 胡松이 蠻族의 병사를 이끌고 한현종의 군영을 공격하니, 한현종이 힘껏 싸워 그를 격파하고 호송의 裨將의 목을 베었다.
한현종이 신야에 도착하였는데, 魏主가 말하기를 “卿이 적들을 격파하고 비장의 목을 베었으니, 우리 군대의 사기를 매우 고양하였소. 朕이 바로 견고한 성을 공격할 것인데 어찌하여
를 작성하여 알리지 않았는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지난번에 들으니, 王肅이 적군 두세 사람과 나귀와 말 몇 필을 노획하고 모두 露布를 작성하였는데, 臣은 항상 그것을 비웃었습니다. 근래에 비록 오랑캐를 꺾었지만 참수하거나 사로잡은 자가 많지 않으니, 왕숙의 행위를 허물로 여기면서 그 허물을 본받는다면 죄가 더욱 클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魏主가 그를 더욱 현명하게 여겼다.
注+① 尤는 꾸짖음이며 잘못함이다. ≪春秋左氏傳≫ 襄公 21년에 “저들의 행위를 허물로 여기면서 그 허물을 본받는다면 죄가 더욱 심하다.” 하였다.
齊主(蕭鸞)가 徐州刺史 裴叔業에게 조서를 내려서 雍州를 구원하게 하자 배숙업이 아뢰기를 “北方 사람들은 멀리 출정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고 오직 약탈만을 즐거워하니, 만약 오랑캐의 경내를 침략하면 司州ㆍ雍州의 도적들은 자연히 분산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齊主가 따랐다.
배숙업이 병사를 이끌고 虹城을 공격하여 男女 4,000여 명을 노획하였다.
注+② 胡三省이 말하기를 “이 虹城은 곧 漢나라 때의 虹縣이다. 지금 泗州에 여전히 虹縣이 있다.” 하였다. ≪漢書音義≫에 “虹은 音이 貢이다. 지금 사람은 絳과 같이 읽는다.” 하였다. 齊主가 다시 中庶子 蕭衍과 尙書 崔慧景을 보내서 雍州를 구원하였는데, 제나라 將軍 韓秀方 등 15명의 장군이 모두 북위에 항복하니, 북위가 제나라 병사를 沔水 북쪽에서 격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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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裴叔業이 北魏의 楚王戍를 침략하였는데
注+① ≪水經注≫에 “鮦陽縣에는 葛陵城이 있고, 갈릉성의 동북쪽에는 楚 武王의 무덤이 있어서 백성들이 이곳을 楚王瑟城이라고 말한다.” 하였다. 北魏는 대개 여기에 수비병을 두어 지켰으므로 그 때문에 ‘楚王戍’라고 말한 것이다. 鮦은 徒東의 切이다. 王肅이 다시 傅永에게 명령하여 그를 공격하게 하였다. 부영이 心腹 한 사람을 데리고 초왕수로 달려가서 초왕수 밖의 해자를 메우게 하고 밤중에 戰士 1,000명을 성 밖에 매복하게 하였다.
날이 밝자 배숙업 등이 城의 동쪽에 도착하여 부대를 나누고 장차 길게 포위망을 설치하려 하였는데, 부영이 매복시킨 병사들이 북위의 後軍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배숙업이 친히 精兵 수천 명을 거느리고 그 후군을 구원하였다.
부영은 城門의 樓臺에 올라가서 배숙업이 남쪽으로 몇 리를 행군하는 것을 바라보고, 바로 문을 열고 그의 군영을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배숙업이 진퇴하는 데 의거할 것을 잃어 마침내 달아났는데, 좌우 사람들이 그를 추격하려고 하자
부영이 말하기를 “우리의 약한 병졸들이 3,000명도 되지 않고 저들은 精兵 甲士가 여전히 많으니, 힘으로 굴복시켜 물리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우리가 세운 계획에 떨어졌을 뿐이다. 그들이 이미 우리의 虛實을 예측하지 못하였으니, 저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 충분하고 사로잡은 것이 충분하다.”라고 하였다.
魏主(元宏)가 謁者를 보내서 현장에서 부영을 汝南太守에 임명하였다. 부영은 용기와 힘이 있었고 배우기를 좋아하고 문장에 능통하였다.
魏主가 일찍이 감탄하여 말하기를 “말에 오르면 적을 공격할 수 있고 말에서 내리면 露板(勝捷文)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傅脩期뿐이다.”라고 하였다.
注+② 傅脩期는 傅永의 字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