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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9)

자치통감강목(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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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강목(19)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起丁丑齊明帝建武四年 魏孝文帝太和二十一年하여 盡甲申梁武帝天監三年 魏宣武帝正始元年하니 凡八年이라
春正月 立子恪하여 爲太子하다
◑ 齊主 殺其尙書令王晏하고 以徐孝嗣爲尙書令하다
爲世祖所寵任이러니 及齊主 謀廢鬱林王 卽欣然推奉이라가 及齊主 卽位 自謂佐命新朝라하여 事多專决하니 齊主 惡之러니
始安王遙光 勸齊主誅晏한대 齊主曰 晏 於我有功하고 且未有罪 遙光曰 晏 尙不能爲武帝하니 安能爲陛下乎 齊主默然이러라
意望開府하여 數呼相工하여 自視하니 云 當大貴라하다 又好與賓客으로 屏人語하니
齊主 聞之하고 疑晏欲反하여 遂召晏於華林省하여 誅之하고 幷北中郎司馬蕭毅注+① 省在華林園, 因名華林省. 毅, 太祖從子新吳侯景先之子也.하다 奢豪하고 好弓馬 故齊主 因事陷之하다
鬱林王之將廢也 晏從弟思遠 謂晏曰 兄 荷世祖厚恩이라가 今一旦 賛人如此事하니 彼以權計相須 未知將來 何以自立이리오
若及此引決이면 猶可保全門戶하여 不失後名이리라 晏曰 方噉粥하니 未暇此事라하더니
及拜驃騎 謂子弟曰 隆昌之末 阿戎 勸吾自裁러니 若從其語인댄 豈有今日注+① 齊主初卽位, 進晏爲驃騎大將軍. 晉宋間人, 多謂從弟爲阿戎, 至唐猶然. 一說 “阿戎, 思遠小字.”이리오 思遠 遽應曰 如阿戎所見 今猶未晩也
思遠 知齊主意已疑異하고 乗間謂曰 時事稍異하니 兄亦覺不注+② 不, 讀曰否. 凡人 多拙於自謀而巧於謀人이라 不應하니 思遠 退어늘
方歎曰 世乃有勸人死者라하더니 旬日而敗하다
外弟阮孝緒 亦知晏必敗하고 逃匿不見注+① 外弟, 妻弟也. 一說 “姑之子也.”이러니 嘗食醬美러니 問知得於晏家하고 吐而覆之注+② 旣吐其所食者, 又覆其所餘者.러니
及晏敗 人爲之懼한대 孝緒曰 親而不黨하니 何懼之有리오하니 卒免於罪하다
二月 魏主 如平城하다 穆泰陸叡 伏誅하고 新興公丕 以罪免死爲民하다
魏主 至平城하여 引見穆泰陸叡之黨하여 問之하니 無一人稱枉者 時人 皆服任城王澄之明이러라 伏誅하고 死於獄이어늘 宥其妻子하여 徙遼西하다
魏主遷都하여 變易舊俗하니 新興公丕 不樂이러니 及變衣冠 而丕 獨胡服於其間이러라
太子恂 將遷洛陽 元隆 與穆泰等으로 密謀留恂하고 因擧兵斷關하여 規據陘北注+① 規, 猶圖謀也. 據, 拒守也. 陘北, 卽恒․朔二州之地. 關, 卽鴈門之東陘․西陘二關也.하다
丕在并州 隆等 以其謀告之한대 口雖折難이나 心頗然之러니
至是하여 有司 奏隆超 皆泰黨罪當族이라하니 應從坐注+② 隆․超, 皆丕之子也.러니
魏主 以丕 嘗受詔許以不死라하여 聽免死爲民하고 殺隆超하다
丕及陸叡 與僕射李沖領軍于烈 俱受不死之詔러니 旣誅 魏主 賜沖烈詔曰
叡之反逆 旣異餘犯하니 雖欲矜恕 如何可得이리오 然猶聽自死하고 免其孥戮하며 連坐應死러니 特恕爲民注+① 拏, 子也. 免其拏戮, 謂叡妻子免死徙遼西也.하라
本期始終而彼自棄絶이라 故此别示하노니 想無致怪로다 謀反之外 皎如白日耳
又以北方酋長及侍子 畏暑라하여 聽秋朝洛陽하고 春還部落하니 時人 謂之鴈臣注+② 以鴈避寒而南來, 望煖而北還也.이라하다
司馬公曰
夫爵祿廢置하고 殺生予奪 人君所以馭臣之大柄也注+① 此周禮所謂八柄馭群臣者也.
先王之制 雖有親故賢能功貴勤賓이나 茍有其罪 不直赦也하고 必議於槐棘之下注+② 此周禮所謂八議也. 槐棘, 公卿之位. 王制 “獄成, 大司寇聽之於棘木之下.”하여 可赦則赦하고 可宥則宥하며 可刑則刑하고 可殺則殺하여 輕重視情하고 寛猛隨時
故君得以施恩而不失其威하고 臣得以免罪而不敢自恃러니
及魏不然하여 勲貴之臣 往往豫許之以不死하여 使彼驕而觸罪하고 又從而殺之하니
以不信之令으로 誘之하여 使陷於死地하니 刑政之失 無此爲大焉이로다
旣廢 頗自悔過러니 中尉李彪 表恂復與左右謀逆이라한대 魏主 賜恂死하다
魏宋王劉昶하다
◑ 魏主 還洛陽하다
魏主 至龍門하여 遣使祀夏禹하고 至蒲阪하여 祀虞舜하다 至長安하여 遣使祀周文王武王于豐鎬하고 遂還洛陽注+① 水經註 “龍門上口在漢河東北屈縣西, 所謂孟門也. 龍門下口在河東皮氏縣西北, 大禹所鑿, 故於此祠焉.” 阪, 音反. 皇甫謐云 “舜都蒲阪, 故又於此祀焉.”하다
秋七月 立昭儀馮氏爲后하다
欲母養太子恪한대 恪母高氏 暴卒하다
八月 하다
發河北五州兵二十萬하여 以伐齊注+① 五州, 冀․定․瀛․相․齊也.할새 假彭城王勰中軍大將軍한대
辭曰 昔 陳思 求而不允이어늘 愚臣 不請而得하니 何否泰之相遠也注+② 曹魏文帝時, 陳思王植上表求自試以攻吳蜀, 帝不許. 天地交曰泰, 天地不交曰否. 陳思於魏文, 上下之情不通, 故曰否. 勰則君臣兄弟之情無間, 故曰泰.
魏主 笑曰 二曹 以才名相忌어늘 吾與汝以道德相親注+③ 二曹, 謂魏文帝․陳思王也.이니라
齊主 聞有魏師하고 遣軍主胡松하여 助戍赭陽하고 鮑擧 助戍舞陰注+④ 胡松, 助北襄城太守成公期戍赭陽. 鮑擧, 助西汝南北義陽二郡太守黃瑤起戍舞陰. 赭陽, 卽漢․晉之堵陽縣, 至宋時猶屬南陽郡. 堵, 亦音者. 舞陰縣, 自漢以來屬南陽郡, 爲西汝南․北義陽二郡治所.하다
氐帥楊靈珍 叛魏하다
以氐帥楊靈珍으로 爲南梁州刺史注+① 魏置梁州於仇池, 置南梁州於武興.하니 靈珍 擧州降齊하여 襲魏武興王楊集始한대
集始 窘急亦降于齊어늘 遣李崇討之하다
九月 魏主 攻齊南陽不克하다
魏荆州刺史薛眞度 攻齊南陽이어늘 太守房伯玉 擊敗之注+① 眞度, 安都之從祖弟. 伯玉, 法壽之從弟也.하니 魏主怒하고 以南陽小郡이라하여 志必滅之러니
至是引兵攻之하여 衆號百萬하고 襲宛克之하다 伯玉 嬰内城拒守어늘
魏主 遣中書舍人孫延景하여 數之曰 卿 事武帝蒙殊常之寵하여 不能建忠致命而盡節於其讐하니 一也注+② 齊主夷滅武帝子孫, 故謂之讐.
頃年薛眞度來 傷我偏師하니 二也 今鸞輅親臨 不面縛麾下하니 三也니라
宛城東南 有橋 魏主 過之할새 伯玉 使勇士數人으로 衣斑衣하고 戴虎頭帽하여 伏於라가 突出擊之注+③ 虎頭帽者, 帽爲虎頭形.하니
魏主人馬 俱驚이라 召善射者하여 射殺之하니 乃得免하다
伐氐하여 克武興하니 楊靈珍 犇齊하다
李崇 槎山分道하여 出氐不意하여 表裏襲之注+① 槎, 士雅, 除木曰槎.하니 群氐 散歸하고
靈珍 戰敗어늘 遂克武興하니 靈珍 犇還漢中이어늘 以爲武都王이러라
魏主 聞之하고 喜曰 使朕無西顧之憂者 李崇也라하고 以崇爲梁州刺史하여 安集其地하다
魏主 至新野하니 齊太守劉思忌 拒守어늘 攻之不克하여 築長圍以守之하다
韓顯宗 屯赭陽이어늘 胡松 引蠻兵攻其營하니 顯宗 力戰破之하고 斬其裨將하다
顯宗 至新野어늘 魏主 謂曰 卿 破賊斬將하니 殊益軍勢로다 方攻堅城이어늘 何爲不作露布
對曰 頃聞王肅 獲賊二三人 驢馬數匹하고 皆爲露布하니 臣常哂之 近雖得摧醜虜 擒斬不多하니 尤而效之 其罪彌大니이다 魏主 益賢之注+① 尤, 責也, 過也. 左傳曰 “尤而效之, 罪又甚焉.”하더라
齊主 詔徐州刺史裴叔業하여 救雍州한대 叔業 啓稱 北人 不樂遠行하고 惟樂鈔掠하니 若侵虜境하면 則司雍之寇 自然分矣리이다하니 從之어늘
叔業 引兵攻虹城하여 獲男女四千餘人注+② 胡三省曰 “此虹城卽漢虹縣也. 今泗州猶有虹縣.” 漢書音義 “虹, 音貢. 今人讀如絳.”하다 齊主 復遣中庶子蕭衍 尙書崔慧景하여 救雍州러니 齊將軍韓秀方等十五將 皆降於魏하니 敗齊兵於沔北하다
齊將軍魯康祚 侵魏太倉口注+① 據傅永傳, 太倉口在魏豫州界. 是時魏置豫州於汝南新息縣廣陵城, 與齊義陽隔淮對壘, 則太倉口當在淮北岸, 以魏人積倉粟於此而有是名也.어늘 魏豫州刺史王肅 使長史傅永으로 將甲士三千擊之할새 齊魏 夾淮而軍하니 相去十餘里
曰 南人好夜斫營하리니 必於淮中 置火以記淺處라하고
乃夜分兵爲二部하여 伏於營外하고 又以瓢貯火하여 密使人으로 於深處置之하고 戒曰 見火起하면 則亦然之注+② 然, 與燃同.하라
是夜 康祚等 果引兵斫永營이어늘 伏兵 夾擊之하니 康祚等 走趣淮水러니 火旣競起 不知所從이어늘 溺死及斬首數千級이러라
裴叔業 侵魏楚王戍注+① 水經注, 鮦陽縣有葛陵城, 城東北有楚武王冢, 民謂之楚王瑟城. 魏蓋於此置戍, 因謂之楚王戍. 鮦, 徒東切.어늘 復令永擊之한대 將心腹一人하여 馳詣楚王戍하여 令塡外塹하고 夜伏戰士千人於城外러니
曉而叔業等 至城東하여 部分將置長圍어늘 永伏兵 擊其後軍하여 破之한대 叔業 自將精兵數千救之어늘
登門樓하여 望叔業 南行數里하고 卽開門擊其營하여 大破之하니
叔業 進退失據하여 遂走어늘 左右 欲追之한대
永曰 吾弱卒 不滿三千이요 彼精甲猶盛하니 非力屈而敗 自墮吾計中耳 旣不測我之虛實하니 足使喪膽이라 俘此足矣니라
魏主 遣謁者하여 就拜永汝南太守하니 有勇力하고 好學能文이라
魏主 常歎曰 上馬能擊賊하고 下馬作露板 惟傅脩期耳注+② 脩期, 永字.라하니라
以劉季連爲益州刺史하다
曲江公遙欣 好武事하니 齊主 以諸子尙幼라하여 内仗遙欣하고 外倚后弟劉暄内弟江祏注+① 內弟, 舅之子也. 齊主母景皇后, 祏之姑也, 故曰內弟.이라 故以始安王遙光으로 爲揚州하고 遙欣으로 爲荆州하여
而遙欣 在江陵 多招材勇하고 厚自封殖하니 齊主 惡之러니
南郡太守劉季連 密表遙欣 有異迹注+② 季連, 遵考之弟, 思考之子也. 包藏禍心者, 謂之異志. 形見於事爲, 謂之異迹.이라한대 齊主 乃以季連으로 爲益州刺史하여 使據遙欣上流하여 以制之하다
是歲 高昌王馬儒 遣使入貢于魏하여 求内徙어늘 魏主 遣韓安保迎之하고 割伊吾之地五百里하여 以居儒한대
高昌人 戀土하여 不願東遷하여 殺儒하고 立麴嘉爲王하고 復臣於柔然注+① 麴氏得高昌始此.하다


≪資治通鑑綱目≫ 제29권은 丁丑年(497) 齊나라 明帝 建武 4년과 北魏 孝文帝 太和 21년부터 甲申年(504) 梁나라 武帝 天監 3년과 北魏 宣武帝 正始 원년까지이니, 모두 8년이다.
齊나라 高宗 明帝 蕭鸞 建武 4년이고, 北魏 高祖 孝文帝 元宏 太和 21년이다.
【綱】 봄 정월에 北魏가 아들 元恪을 세워 太子로 삼았다.
【綱】 齊主(明帝)가 尙書令 王晏을 죽이고 徐孝嗣를 尙書令으로 삼았다.
【目】 예전에 王晏이 世祖(齊 武帝 蕭賾)에게 총애와 신임을 받았는데, 齊主(蕭鸞)가 鬱林王(蕭昭業)을 폐할 것을 모의하자 왕안이 바로 흔쾌히 〈소란을〉 받들어 추대하였다가 齊主가 즉위하자 왕안이 스스로 새로운 조정에 佐命의 공이 있다고 생각하여 일을 제멋대로 처결하는 경우가 많으니, 齊主가 그를 미워하였다.
始安王 蕭遙光이 齊主에게 왕안을 죽일 것을 권하였는데, 齊主가 말하기를 “왕안은 나에게 功이 있고 또 罪가 없다.”라고 하였다. 소요광이 말하기를 “왕안이 武帝도 위하지 못하였는데, 어찌 陛下를 위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齊主가 잠자코 있었다.
왕안은 내심 開府儀同三司의 지위를 기대하여 자주 相工(관상쟁이)을 불러 자신의 관상을 보게 하니, 〈相工이〉 “크게 귀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왕안이 賓客과 함께 있을 적에 다른 사람을 물리치고 말하기를 좋아하였다.
齊主가 그 소식을 듣고 왕안이 반역을 하려고 한다고 의심을 하여 마침내 왕안을 華林省으로 불러서 죽이고 아울러 北中郎司馬 蕭毅도 죽였다.注+① 省이 華林園에 있었기 때문에 華林省이라고 불렀다. 蕭毅는 太祖(蕭道成)의 조카인 新吳侯 蕭景先의 아들이다. 소의는 호사스럽고 활쏘기와 말타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므로 齊主가 이 일로 인하여 그를 무함하였던 것이다.
【目】 鬱林王이 폐위될 적에 王晏의 從弟 王思遠이 왕안에게 말하기를 “형께서 世祖의 후한 은혜를 받았다가 지금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을 도와 이와 같은 일을 하시니, 저들은 임시방편으로 형을 필요로 한 것입니다. 장래에 어떻게 세상에 자립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이때에 〈울림왕을 위해〉 자살을 하신다면 오히려 집안을 보존하여 죽은 뒤에 명예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안이 말하기를 “내가 막 죽을 먹어야 하니, 이 일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라고 하였다.
왕안이 驃騎大將軍으로 임명되자 子弟들에게 말하기를 “의 말년에 阿戎(왕사원)이 나에게 자결하라고 권하였는데 만약 그의 말을 따랐다면 어찌 오늘이 있었겠는가.”라고 하니,注+① 齊主(蕭鸞)가 처음 卽位했을 때에 왕안을 진급시켜 驃騎大將軍으로 삼았다. 晉나라와 宋나라 무렵의 사람들이 대부분 從弟를 阿戎이라고 말하였는데, 唐나라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그러하였다. 一說에 “阿戎은 王思遠의 小字이다.” 하였다. 왕사원이 바로 답하기를 “제 소견으로는 지금도 늦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사원은 齊主(蕭鸞)가 마음에 〈왕안을〉 이미 의심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틈을 타서 왕안에게 말하기를 “時局이 다소 변화하였는데, 형께서 또한 알아차리지 못하였습니까.注+② 不는 否로 읽는다. 일반 사람들이 대부분 자신을 위한 계책에는 서투르면서 남을 위하여 계책을 세우는 데에는 정교합니다.”라고 하였으나, 왕안이 응답하지 않으니, 왕사원이 물러나왔다.
왕안이 바로 탄식하기를 “세상 사람 중에 마침내 남에게 죽기를 권하는 자가 있구나.”라고 하였는데, 열흘 만에 왕안이 죽임을 당하였다.
【目】 王晏의 外弟 阮孝緒는 또한 왕안이 반드시 실패할 것을 알고서 달아나 숨어서 그와 만나지 않았다.注+① 外弟는 妻의 동생이다. 一說에 “고모의 아들이다.”라고 하였다. 그가 한번 醬을 맛보니 맛이 있었는데, 물어서 왕안의 집에서 얻었다는 것을 알고는 먹었던 것을 토하고 남은 것을 쏟아버렸다.注+② 〈“吐而覆之”는〉 먹었던 것을 토하고 나서 또 남은 것을 쏟아버린 것이다.
왕안의 일이 실패하고 나자 사람들이 완효서를 위해 염려하였는데, 완효서가 말하기를 “친척이지만 같은 당여가 아니니, 어찌 두려워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니, 마침내 죄를 면하였다.
【綱】 2월에 魏主(元宏)가 平城에 갔다. 穆泰와 陸叡는 伏誅되고 新興公 元丕는 죄가 있으나 죽음을 면하고 庶民이 되었다.
【目】 魏主(元宏)가 平城에 도착하여 穆泰와 陸叡의 당여를 引見하여 심문하였는데, 목태가 복주되고 육예는 감옥에서 죽었는데, 그의 처자식을 용서하여 遼西로 옮기게 하였다.
예전에 魏主가 낙양으로 遷都하여 옛날 풍속을 바꾸니, 新興公 元丕가 즐거워하지 않았는데, 조신들의 衣冠을 〈漢服으로〉 바꾸었을 적에 원비만 혼자 그 사이에서 胡服을 입었다.
太子 元恂이 洛陽으로 옮기려 할 때에 〈원비의 아들〉 元隆이 목태 등과 함께 몰래 모의하여 원순을 평성에 머물게 하고, 이어서 병사를 일으켜 관문(鴈門關)을 차단하고 陘嶺 이북 지역을 막아 지킬 것을 도모하였다.注+① 規는 圖謀함과 같다. 據는 막아 지킨다는 뜻이다. “陘北”은 바로 恒州와 朔州 2州의 땅이다. 關은 바로 鴈門의 東陘과 西陘의 두 關門이다.
元丕가 并州에 있었기 때문에 원륭 등이 자기들이 도모한 것을 원비에게 고하자 원비가 말로는 비록 비난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매우 옳다고 여겼다.
이때에 이르러 有司는 원륭과 元超가 모두 목태의 당여로 죄가 멸족에 해당된다고 아뢰니 원비가 죄에 따라 연좌되었다.注+② 元隆과 元超는 모두 元丕의 아들이다.
魏主는 “원비가 일찍이 죽이지 않을 것을 허락한 조서를 받았다.”고 하여 죽임을 면하여 서민이 되는 것을 허락하고, 원륭과 원초를 죽였다.
【目】 예전에 元丕와 陸叡는 僕射 李沖과 領軍 于烈과 함께 모두 ‘죽이지 않는다[不死]’라고 쓴 조서를 받았는데, 육예가 죽고 나서 魏主(元宏)는 이충과 우렬에게 다음과 같이 조서를 내렸다.
“육예의 반역은 이미 다른 범죄와는 다르니, 비록 불쌍히 여겨 용서해주려고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그가 자살하는 것을 허락하고 그의 처자식의 죽음을 사면하였으며, 원비는 죄에 연좌되어 응당 죽어야 하지만 특별히 용서하여 서민으로 삼도록 하였다.注+① 拏는 자식이다. “免其拏戮”은 陸叡의 처자식이 죽음을 면하고 遼西로 옮긴 것을 말한다.
朕은 본래 그들이 처음과 끝이 똑같기를 기대했으나 저들이 스스로 〈짐의 바람을〉 버리고 끊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특별히 그대들에게 諭示하노니, 그대들이 매우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謀反한 일을 제외하고는 〈免死의 조서가〉 태양처럼 분명할 것이다.”
또 魏主는 북방의 酋長과 侍子들이 더위를 염려한다고 하여 가을에는 洛陽에서 조회를 하고 다음해 봄에는 部落으로 돌아갈 것을 허락하니,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鴈臣’이라고 하였다.注+② 〈鴈臣은〉 기러기가 추위를 피하여 남쪽으로 왔다가 따뜻한 날이 가까워져서 북쪽으로 돌아가는 것을 이른 것이다.
【目】 司馬溫公(司馬光)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봉작과 녹봉의 廢置, 生死與奪은 人君이 신하를 부리는 큰 권한이다.注+① 이것은 ≪周禮≫ 〈天官冢宰〉의 이른바 으로 신하들을 제어하는 것을 말한다.
이 있었지만 진실로 신하가 죄가 있으면 바로 사면하지 않고 반드시 槐棘의 아래에서 의논하여注+② 이것은 ≪周禮≫ 〈秋官 小司寇〉의 이른바 八議이다. 槐棘은 公卿의 지위이다. ≪禮記≫ 〈王制〉에 “獄事가 이루어지면 大司寇가 棘木의 아래에서 다스렸다.” 하였다. 사면할 만하면 사면하고 용서할 만하면 용서하고 형벌을 내릴 만하면 형벌을 내리고 죽일 만하면 죽여서 징벌의 輕重은 실정을 살펴서 정하고 처리의 관대함과 엄격함은 시세에 따라서 하였다.
이 때문에 임금은 사면하는 은혜를 베풀었으나 그 위엄을 잃지 않았고 신하는 죄를 면하였지만 스스로 자부하지 못하였다.
北魏에 이르러서는 그렇지 않아서 공훈이 있거나 존귀한 신하들에게 이따금 미리 죽이지 않을 것으로 허락하여 저들로 하여금 교만하여 죄에 저촉하게 하였고 또 죄에 따라서 저들을 죽였다.
이것은 믿지 못할 명령으로 그들을 유혹하여 죽을 곳으로 빠지게 하였으니, 刑政의 잘못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다.”
【綱】 3월에 魏主(元宏)가 前 太子 元恂을 죽였다.
【目】 元恂은 폐위되고 나서 자기의 잘못을 꽤 후회하였다. 中尉 李彪는 표문을 올려 원순이 다시 자신의 측근들과 반역을 도모한다고 하자 魏主가 원순에게 죽음을 내렸다.
【綱】 北魏의 宋王 劉昶이 卒하였다.
【綱】 魏主가 洛陽으로 돌아왔다.
【目】 魏主(元宏)가 龍門에 도착하여 사신을 파견하여 夏禹에게 제사를 지내고 蒲阪에 도착하여 虞舜에게 제사를 지냈다. 長安에 도착하여 사신을 파견하여 周 文王과 武王의 제사를 豐과 鎬에서 제사 지내고 마침내 洛陽으로 돌아왔다.注+① ≪水經註≫에 “龍門上口는 漢나라 河東郡 北屈縣 서쪽에 있는데 이른바 孟門이다. 龍門下口는 河東郡 皮氏縣 서북쪽에 있는데 大禹가 굴착한 곳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제사를 지낸 것이다.” 하였다. 阪은 音이 反이다. 皇甫謐이 말하기를 “舜임금이 蒲坂에 도읍을 하였기 때문에 또 여기에 제사를 지낸 것이다.” 하였다.
【綱】 가을 7월에 北魏는 昭儀 馮氏(馮潤)를 세워 황후로 삼았다.
【目】 馮后가 친어미처럼 太子 元恪을 양육하려고 하였는데, 원각의 生母 高氏가 갑자기 卒하였다.
【綱】 8월에 魏主(元宏)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齊나라를 정벌하였다.
【目】 北魏가 황하 북쪽 지역 5州의 병사 20만 명을 출동하여 齊나라를 정벌할 적에注+① 5州는 冀州, 定州, 瀛州, 相州, 齊州이다. 彭城王 元勰(원협)에게 中軍大將軍을 내렸는데,
사양하며 말하기를 “옛날에 陳思王이 〈출정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는데, 어리석은 臣은 요청하지 않았는데 이 임무를 얻었으니, 어찌 통하고 막힌 운수가 서로 크게 차이가 납니까.”라고 하니,注+② 曹魏 文帝(曹丕) 때에 陳思王 曹植이 表文을 올려 자신이 한번 吳ㆍ蜀을 공격한 것을 청하였는데 문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하늘과 땅이 교감하여 〈만물이 통하는 것을〉 ‘泰’라고 하고, 하늘과 땅이 교감하지 못하여 〈만물이 통하지 않는 것을〉 ‘否’라고 한다. 진사왕 조식이 위 문제에게 상하의 情이 통하지 않았으므로 ‘否’라고 한 것이고, 元勰은 君臣과 兄弟의 정에 틈이 없으므로 ‘泰’라고 한 것이다.
魏主(元宏)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曹丕와 曹植은 재주와 명성을 서로 시기하였지만, 나는 너와 道德으로 서로 가까이하고 있다.”라고 하였다.注+③ “二曹”는 魏 文帝와 陳思王을 말한다.
齊主(蕭鸞)는 북위의 군대가 온다는 것을 듣고 軍主 胡松을 파견하여 赭陽(자양)을 도와 지키게 하고 鮑擧를 파견하여 舞陰을 도와 지키게 하였다.注+④ 胡松은 北襄城 太守 成公期를 도와서 赭陽을 수비하였고 鮑擧는 西汝南과 北義陽 2郡 太守 黃瑤起를 도와 舞陰을 수비하였다. 赭陽은 곧 漢ㆍ晉 시기의 堵陽縣이니, 宋나라 때에 이르러 여전히 南陽郡에 소속되었다. 堵도 음이 者이다. 舞陰縣은 漢나라 이래로 南陽郡에 소속되었고, 西汝南ㆍ北義陽 2郡의 치소가 되었다.
【綱】 氐族의 수령 楊靈珍이 北魏를 배반하였다.
【目】 北魏가 氐族의 수령 楊靈珍을 南梁州刺史로 삼았는데,注+① 北魏는 仇池에 梁州를 설치하였고, 武興에 南梁州를 설치하였다. 양영진이 南梁州 지역을 들어서 齊나라에 항복하고서 北魏의 武興王 楊集始를 습격하였다.
양집시는 형세가 궁박하고 위급하여 또한 齊나라에 항복하였는데, 북위가 李崇을 파견하여 그를 토벌하게 하였다.
【綱】 9월에 魏主(元宏)가 齊나라의 南陽을 공격하였는데 이기지 못하였다.
【目】 예전에 北魏 荆州刺史 薛眞度가 齊나라 南陽을 공격하였는데, 南陽太守 房伯玉이 북위의 군대를 공격하여 격파하였다.注+① 薛眞度는 薛安都의 從祖弟(6촌 형제)이다. 房伯玉은 房法壽의 從弟(4촌 형제)이다. 魏主(元宏)가 노하고 남양은 작은 郡이라고 하여 반드시 남양을 멸망시킬 것을 결심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魏主가 군사를 이끌고 남양을 공격하면서 군사 수를 백만이라고 칭하고 宛城의 外城을 습격하여 함락시켰다. 방백옥이 内城의 성벽에 올라 지키며 적을 막았는데,
魏主가 中書舍人 孫延景을 파견하여 방백옥의 죄를 하나하나 따지며 말하기를 “卿은 武帝(蕭頤)를 섬기면서 특별한 총애를 받고서도 충절을 세워 목숨을 바치지 않고 그의 원수(蕭鸞)에게 절개를 다하였으니, 첫 번째 죄이다.注+② 齊主가 武帝(蕭頤)의 子孫을 죽였기 때문에 원수라고 말한 것이다.
지난해에 설진도가 〈군대를 이끌고〉 이곳에 왔을 때에도 卿이 나의 한 군대를 손상시켰으니, 두 번째 죄이다. 지금 가 친히 나왔는데도 얼굴을 앞으로 하고 손을 뒤로 묶고서 나의 깃발 아래에 항복을 하지 않으니, 세 번째 죄이다.”라고 하였다.
완성의 동남쪽에 다리가 있었는데, 魏主가 그곳을 지나갈 적에 방백옥이 용감한 병사 몇 사람에게 斑衣(색동옷)를 입고 虎頭帽를 쓰게 하고서 다리 밑에 매복해 있다가 갑자기 나와 그들을 공격하게 하였다.注+③ 虎頭帽는 모자를 호랑이 머리 모양으로 만든 것이다.
魏主의 군사와 말이 모두 놀랐기 때문에 활을 잘 쏘는 사람을 불러서 화살을 쏘아서 색동옷 입은 자들을 맞추어 죽이게 하니, 비로소 면할 수 있었다.
【綱】 北魏가 氐族을 정벌하여 武興을 함락시키니, 楊靈珍이 齊나라로 망명하였다.
【目】 李崇이 〈楊靈珍을 정벌할 적에〉 산에 나무를 베어 길을 내어서 氐族들이 생각하지 못한 때에 안팎으로 습격을 하니,注+① 槎는 士雅의 切이니, 나무를 없애는 것을 槎라고 한다. 여러 저족들이 흩어져 돌아갔다.
양영진이 싸움에 패하자 〈북위 군대가〉 드디어 武興을 함락시키니, 양영진이 도망하여 漢中으로 돌아갔는데 제나라가 그를 武都王으로 삼았다.
魏主(元宏)는 이숭이 승리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朕에게 서쪽을 돌아보게 하는 근심이 없게 한 사람은 이숭이다.”라고 하고, 이숭을 梁州刺史로 삼아서 그 지역을 안무하게 하였다.
【綱】 겨울 11월에 魏主(元宏)가 新野를 포위하여 드디어 齊나라 병사를 沔水 북쪽에서 패배시켰다.
【目】 魏主(元宏)가 新野에 도착하니, 齊나라 新野太守 劉思忌가 방어하자, 北魏가 신야를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여, 길게 포위망을 둘러싸 지키게 하였다.
韓顯宗이 赭陽에 주둔하였는데, 胡松이 蠻族의 병사를 이끌고 한현종의 군영을 공격하니, 한현종이 힘껏 싸워 그를 격파하고 호송의 裨將의 목을 베었다.
한현종이 신야에 도착하였는데, 魏主가 말하기를 “卿이 적들을 격파하고 비장의 목을 베었으니, 우리 군대의 사기를 매우 고양하였소. 朕이 바로 견고한 성을 공격할 것인데 어찌하여 를 작성하여 알리지 않았는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지난번에 들으니, 王肅이 적군 두세 사람과 나귀와 말 몇 필을 노획하고 모두 露布를 작성하였는데, 臣은 항상 그것을 비웃었습니다. 근래에 비록 오랑캐를 꺾었지만 참수하거나 사로잡은 자가 많지 않으니, 왕숙의 행위를 허물로 여기면서 그 허물을 본받는다면 죄가 더욱 클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魏主가 그를 더욱 현명하게 여겼다.注+① 尤는 꾸짖음이며 잘못함이다. ≪春秋左氏傳≫ 襄公 21년에 “저들의 행위를 허물로 여기면서 그 허물을 본받는다면 죄가 더욱 심하다.” 하였다.
齊主(蕭鸞)가 徐州刺史 裴叔業에게 조서를 내려서 雍州를 구원하게 하자 배숙업이 아뢰기를 “北方 사람들은 멀리 출정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고 오직 약탈만을 즐거워하니, 만약 오랑캐의 경내를 침략하면 司州ㆍ雍州의 도적들은 자연히 분산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齊主가 따랐다.
배숙업이 병사를 이끌고 虹城을 공격하여 男女 4,000여 명을 노획하였다.注+② 胡三省이 말하기를 “이 虹城은 곧 漢나라 때의 虹縣이다. 지금 泗州에 여전히 虹縣이 있다.” 하였다. ≪漢書音義≫에 “虹은 音이 貢이다. 지금 사람은 絳과 같이 읽는다.” 하였다. 齊主가 다시 中庶子 蕭衍과 尙書 崔慧景을 보내서 雍州를 구원하였는데, 제나라 將軍 韓秀方 등 15명의 장군이 모두 북위에 항복하니, 북위가 제나라 병사를 沔水 북쪽에서 격파하였다.
【綱】 12월에 齊나라가 北魏 太倉口를 침략하니, 北魏 豫州刺史 王肅이 제나라를 패배시켰다.
【目】 齊나라 將軍 魯康祚가 北魏의 太倉口를 침략하자,注+① ≪北史≫ 〈傅永傳〉에 의거하면 太倉口는 北魏 豫州의 경계에 있다. 이때에 北魏가 豫州를 汝南 新息縣 廣陵城에 설치하여, 齊나라 義陽과 淮水를 사이에 두고 城壘를 쌓아 대치하였으니, 太倉口는 회수 북쪽 언덕에 있어야 한다. 북위 사람이 여기에 창고의 곡식을 쌓아두었으므로 이런 이름이 있었던 것이다. 북위 豫州刺史 王肅이 長史 傅永을 시켜 甲士 3,000명을 거느리고 제나라 군대를 공격할 적에 제나라와 북위의 군대가 淮水를 끼고 주둔하였는데, 서로 거리가 10여 리였다.
부영이 말하기를 “남방 사람들은 밤중에 군영을 공격하기를 좋아하니, 반드시 회수 가운데에 등불을 두어서 물이 얕은 곳을 표시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밤중에 병사들을 나누어 2부대로 만들어 군영 밖에 매복시키고, 또 표주박에 불씨를 넣어서 은밀하게 사람을 시켜 물이 깊은 곳에 두게 하고 경계하기를 “〈적군이 표시한〉 불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또한 표주박에 불을 붙여라.”라고 하였다.注+② 然(불타다)은 燃과 같다.
이날 밤에 노강조 등이 과연 병사를 이끌고 부영의 군영을 공격하였는데, 매복한 병사들이 挾擊하였다. 노강조 등이 회수로 달려가니 불이 이미 〈강가의 여러 곳에서〉 다투어 일어났기 때문에 갈 곳을 알지 못하였는데, 물에 빠져 죽은 자와 참수한 수급이 수천이었다.
【目】 裴叔業이 北魏의 楚王戍를 침략하였는데注+① ≪水經注≫에 “鮦陽縣에는 葛陵城이 있고, 갈릉성의 동북쪽에는 楚 武王의 무덤이 있어서 백성들이 이곳을 楚王瑟城이라고 말한다.” 하였다. 北魏는 대개 여기에 수비병을 두어 지켰으므로 그 때문에 ‘楚王戍’라고 말한 것이다. 鮦은 徒東의 切이다. 王肅이 다시 傅永에게 명령하여 그를 공격하게 하였다. 부영이 心腹 한 사람을 데리고 초왕수로 달려가서 초왕수 밖의 해자를 메우게 하고 밤중에 戰士 1,000명을 성 밖에 매복하게 하였다.
날이 밝자 배숙업 등이 城의 동쪽에 도착하여 부대를 나누고 장차 길게 포위망을 설치하려 하였는데, 부영이 매복시킨 병사들이 북위의 後軍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배숙업이 친히 精兵 수천 명을 거느리고 그 후군을 구원하였다.
부영은 城門의 樓臺에 올라가서 배숙업이 남쪽으로 몇 리를 행군하는 것을 바라보고, 바로 문을 열고 그의 군영을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배숙업이 진퇴하는 데 의거할 것을 잃어 마침내 달아났는데, 좌우 사람들이 그를 추격하려고 하자
부영이 말하기를 “우리의 약한 병졸들이 3,000명도 되지 않고 저들은 精兵 甲士가 여전히 많으니, 힘으로 굴복시켜 물리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우리가 세운 계획에 떨어졌을 뿐이다. 그들이 이미 우리의 虛實을 예측하지 못하였으니, 저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 충분하고 사로잡은 것이 충분하다.”라고 하였다.
魏主(元宏)가 謁者를 보내서 현장에서 부영을 汝南太守에 임명하였다. 부영은 용기와 힘이 있었고 배우기를 좋아하고 문장에 능통하였다.
魏主가 일찍이 감탄하여 말하기를 “말에 오르면 적을 공격할 수 있고 말에서 내리면 露板(勝捷文)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傅脩期뿐이다.”라고 하였다.注+② 傅脩期는 傅永의 字이다.
【綱】 齊나라가 劉季連을 益州刺史로 삼았다.
【目】 曲江公 蕭遙欣이 군사와 관계된 일을 좋아하니, 齊主(蕭鸞)는 여러 아들들이 아직 어리다고 하여 内親으로는 소요흔에게 의지하고 外親으로는 皇后의 동생 劉暄과 内弟 江祏(강석)에게 의지하였다.注+① 內弟는 외삼촌의 아들이다. 齊主(蕭鸞)의 어머니가 景皇后이며, 江祏의 고모이므로 內弟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始安王 蕭遙光을 揚州刺史로 삼고 소요흔을 荆州刺史로 삼았다.
소요흔이 江陵에 있을 적에 재주와 용기가 있는 자들을 많이 불러 모으고 매우 자신의 세력을 기르니, 齊主(元宏)가 그를 미워하였다.
南郡太守 劉季連이 은밀히 표문을 올려 소요흔이 이상한 행동을 한다고 아뢰자注+② 劉季連은 劉遵考의 동생이며 劉思考의 아들이다. 재앙을 조성할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을 “異志”라고 한다. 정황이 일에 드러나는 것을 “異迹”이라고 한다. 齊主가 마침내 유계련을 益州刺史를 삼아서 소요흔이 있는 곳의 上流 지역을 점거하여 그를 제어하게 하였다.
【綱】 高昌 사람이 그의 임금 馬儒를 시해하였다.
【目】 이해에 高昌王 馬儒가 사신을 보내 北魏에 들어가 조공을 바쳐서 內地로 옮길 것을 요청하였다. 魏主(元宏)가 韓安保를 보내 그를 영접하게 하고, 伊吾의 지역 500리를 나누어 주어 마유를 살게 하였다.
高昌 사람들이 고향 땅에 연연하여 동쪽으로 옮기는 것을 원하지 않아서, 마유를 죽이고 麴嘉를 세워 왕으로 삼고, 다시 柔然에 신종하였다.注+① 麴氏가 高昌을 얻은 것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역주
역주1 齊建武四年 魏太和二十一年 : ≪資治通鑑綱目≫에서는 421년부터 588년까지는 無統이다. 朱熹의 凡例를 보면 正統인 경우 歲年(干支) 다음에 國號, 諡號, 姓名, 年號, 年度 등을 大字로 쓰는 데 반해, 無統일 경우 위처럼 小字로 쓴다. 본서의 내용은 無統에 해당하므로 이 부분을 모두 小字로 표기하였다. 隋나라 文帝가 천하를 통일한 589년 이후로는 隋나라를 정통으로 삼아서 大字로 표시하였다.
역주2 隆昌 : 494년에 齊나라 鬱林王이 황제로 있을 때 사용한 연호이다.
역주3 한 사람도……승복하였다 : 496년 北魏 穆泰와 陸叡의 모반이 일어나자 조정에서 元澄을 보내어 토벌하게 하였는데, 원징이 平城으로 들어가서 목태와 육예의 徒黨을 다스리자 백성들이 안정되었다. 여기서는 원징이 이 모반을 잘 처리하여 억울한 사람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역주4 先王의……議賓 : 八議를 말한 것이니, 周나라의 八辟에서 유래한 제도로, 특별 심의를 거쳐 형벌을 감면할 수 있도록 규정한 여덟 가지 조건이다. 팔의는 議親(왕의 친족의 죄를 논하여 형벌을 감면하는 것)․議故(왕의 친구의 죄를 논하여 형벌을 감면하는 것)․議賢(훌륭한 덕행을 지닌 자의 죄를 논하여 형벌을 감면하는 것)․議能(뛰어난 재능을 가진 자의 죄를 논하여 형벌을 감면하는 것)․議功(공로가 있는 자의 죄를 논하여 형벌을 감면하는 것)․議貴(지위가 높은 자의 죄를 논하여 형벌을 감면하는 것)․議勤(국사에 노력한 자의 죄를 논하여 형벌을 감면하는 것)․議賓(國賓의 죄를 논하여 형벌을 감면하는 것)이다.
역주5 八柄 : 임금이 신하를 통솔하는 8가지 수단으로, 爵ㆍ祿ㆍ予ㆍ置ㆍ生ㆍ奪ㆍ廢ㆍ誅이다.
역주6 魏主殺其故太子恂 : “앞에서 ‘죄가 있어 폐위하여 庶人으로 만들었다.[有罪廢爲庶人矣]’라고 기록하고 여기서 ‘前 太子[故太子]’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魏主를 심하게 여긴 것이다. 元恂이 폐위를 당한 뒤로 꽤 잘못을 후회하였는데 中尉 李彪가 그가 반역을 도모한다고 표문을 올리자 대번에 죽음을 내렸으니 그를 죽인 것이 지나쳤으므로 지척하여 ‘主’라고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폐위한 것이 죄로써 하지 않고 주벌한 것이 그 죄로써 하였으면 戰國時代 趙나라 太子 章의 경우 앞에서 ‘태자를 폐위했다.[廢太子]’라고 기록한 뒤에 ‘주벌했다.[誅]’라고 기록하였고, 폐위한 것이 그 죄로써 하고 죽인 것이 죄로써 하지 않았으면 北魏 太子 元恂의 경우 앞에서 ‘죄가 있어 폐위했다.[有罪廢]’고 기록하고 뒤에 ‘죽였다[殺]’고 기록하였으니, ≪資治通鑑綱目≫의 판단 기준이 공정하다. ≪자치통감강목≫이 끝날 때까지 ‘태자를 죽였다.[殺大子]’고 기록한 것은 3번이다(趙나라 太子 䆳, 北魏 太子 恂, 蜀나라 太子 元膺이다.).[前書有罪廢爲庶人矣 此其書故太子何 甚魏主也 恂自被廢 頗知悔過 中尉李彪 表其謀逆 遽賜之死 則殺之爲過矣 故斥書主 是故廢不以罪 誅以其罪 則趙太子章 前書廢太子 而後書誅 廢以其罪 殺不以罪 則魏太子恂 前書有罪廢 而後書殺 綱目之權衡公矣 終綱目書殺大子三(趙太子䆳 魏太子恂 蜀太子元膺)]” ≪書法≫
역주7 魏主自將伐齊 : “‘정벌하였다[伐]’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蕭鸞을 미워한 것이다.[書伐 何 惡鸞也]” ≪書法≫
역주8 鸞輅 : 천자가 타는 수레로, 鸞駕라고도 한다. 여기서는 북위의 주군 원굉을 가리킨다.
역주9 竇下 : 橋洞으로 다리 밑에 아치형으로 된 구멍을 말한다.
역주10 : 反切音을 표시한 것이다. ‘反(번)’은 뒤집는다(되치다)는 뜻으로 번역을 의미하고, ‘切’은 자른다는 의미이다. 앞 글자의 初聲을 따고 뒷글자의 中聲과 終聲을 따서 읽는다.
역주11 魏主圍新野 遂敗齊兵于沔北 : “魏主가 이에 앞서 齊나라를 정벌할 적에 齊主(蕭鸞)의 죄를 하나하나 꾸짖었으니 군사의 출동에 진실로 명분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윽고 깃발을 돌려 북으로 돌아와서 마침내 무력을 남용하지 않았으니 또한 아름다워할 만하다. 지금 또 까닭 없이 군대를 일으켰으니 전일에 비할 것이 못 된다. 하물며 당시에 文治를 한창 일으키면서 侵伐을 그치지 않으니 어찌 戎虜의 속성이 본래 殺伐을 숭상해서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어찌하여 戎車를 누차 타고 전쟁에 나가기를 그칠 줄 모르는가. ≪資治通鑑綱目≫에서는 ‘자신이 지휘하여 제나라를 정벌했다.[自將伐齊]’, ‘남양을 공격했다.[攻南陽]’, ‘신야를 포위했다.[圍新野]’에 모두 해당 문장 위에 ‘魏主’라고 기록하였으니, 나무란 것이다. 어찌 帝王으로 자처하면서 성을 공격하며 땅을 약탈하는 짓을 할 것인가.[魏主前此伐齊 數齊主之罪 師出固曰有名 旣而返斾北旋 不遂黷武 亦可嘉矣 今又無故稱兵 則非前日之比 況時方興起文治 而乃侵伐不已 豈其戎虜之性 固以殺伐爲尙乎 不然 何爲戎車屢駕 而不知止也 綱目於自將伐齊 攻南陽 圍新野 皆書魏主于上 蓋譏之爾 烏有以帝王自處 而爲侵城略地之擧哉]” ≪發明≫
역주12 露布 : 露板이라고도 한다. 戰勝을 알리기 위해 布帛에 써서 장대 위에 걸어 누구나 볼 수 있게 한 것을 말한다. 후대 捷報를 알리는 문서 양식을 말한다.
역주13 齊侵魏太倉口 魏豫州刺史王肅敗之 : “北魏가 齊나라에게 가한 것을 ‘伐’이라고 기록하고 제나라가 북위에게 가한 것은 어찌하여 ‘侵’이라고 기록하였는가. 蕭鸞을 미워한 것이다.[魏加齊 書伐 齊加魏 則曷爲書侵 惡鸞也]” ≪書法≫
역주14 高昌弑其君馬儒 : “夷狄에게는 ‘죽였다[殺]’라고 기록하는데 高昌은 순수한 이적이 아니기 때문에 특별히 ‘시해했다[弑]’라고 기록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에서 夷狄에게 ‘弑’라고 기록한 것은 6번이다.(이해(497) 高昌, 隋나라 開皇 17년(597) 吐谷渾, 19년(599) 突厥, 唐나라 貞觀 16년(642) 高句麗, 開成 4년(839) 回紇, 辛亥年(951) 契丹이다.)[夷狄書殺 高昌非純夷也 故特書弑 綱目夷狄書弑六(是年 高昌 隋開皇十七年 吐谷渾 十九年 突厥 唐貞觀十六年 高麗 開成四年 回紇 辛亥年 契丹)]” ≪書法≫

자치통감강목(19) 책은 2022.11.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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