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資治通鑑綱目(3)

자치통감강목(3)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자치통감강목(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乙亥年(B.C. 166)
匈奴入寇어늘 遣兵擊之러니 出塞而還하다
匈奴十四萬騎 入朝那, 蕭關注+班志 “朝那縣, 屬安定郡.” 朝, 追輸切. 蕭闕, 在朝那界.하여 殺北地都尉卬하고 虜人畜甚多注+卬, 五郞切, 名也, 姓孫.하고 使騎兵으로 入燒回中宮하니 候騎至雍甘泉注+回中宮, 在安定郡回中地. 騎, 奇寄切, 候騎, 候邏騎也.이라
詔發車千乘, 騎卒十萬하고 親勒兵하여 欲自征匈奴하니
群臣호대 不聽이러니 皇太后固要한대 乃止注+要, 讀曰邀. 固要, 謂力止之也.하고 以張相如, 欒布 爲將軍하여 擊逐出塞而還하다
魏尙하여 復爲雲中守하다
輦過郞署注+駕人以行曰輦. 署, 郞舍也. 할새 問郞署長馮唐曰 父家安在注+漢書, 馮唐傳 “父老何自爲郞, 家安在.” 對曰 趙人이로소이다
上曰 吾居代時 尙食監高祛 數爲我하여 言趙將李齊之賢호되 戰於鉅鹿下注+尙, 主也, 尙食監, 主膳食之官. 祛, 音墟.러니 今吾每飯 意未嘗不在鉅鹿也로니
父知之乎注+飯, 上聲. 言每食時, 念高祛所言, 其心未嘗不在鉅鹿. 對曰 尙不如廉頗李牧之爲將也니이다
搏髀曰注+搏, 拊也. 髀, 音陛, 股之外也. 拊之者, 有所激然耳.嗟乎
吾獨不得頗牧爲將이로다 吾豈憂匈奴哉리오
唐曰 陛下雖得之 弗能用也시리이다
上曰 公何以知之 對曰
上古王者之遣將也 跪而推轂曰 閫以內者 寡人制之하고 閫以外者 將軍制之注+推, 通回切. 推轂, 言天子親爲推其車轂也. 閫, 苦本切, 門橛也, 此謂郭門之閫也.하라하여
軍功爵賞 皆決於外하고 歸而奏之하니 此非虛言也니이다
李牧 爲趙將 軍市租 皆自用饗士하고 賞賜 不從中覆하여 委任而責成功이라
得盡其智能하여 而趙幾霸注+不從中覆, 言不必覆奏朝廷而後行. 一說 “不從中覆校其所用之數.”하니이다
今臣 竊聞호니 魏尙 爲雲中守하여 其軍市租 盡以饗士卒하고 私養錢으로 自饗賓客, 軍吏, 舍人注+私養錢, 魏尙之私錢也. 或曰 “官所別廩給也.” 賓客, 游士爲尙所賓者也. 이라
是以 匈奴遠避하여 不近雲中之塞러니 虜曾一入이어늘 擊之하여 所殺甚衆하니이다
夫士卒 起田中從軍하니 安知尺籍伍符注+籍, 秦昔切. 尺籍, 所以書軍令. 伍符, 軍士伍伍相保之符信也. 一說 “尺籍者, 書其斬捕之功於一尺之板.”리오
終日力戰하여 斬首捕虜호되 上功幕府 一言 不相應이라하여 文吏以法繩之하여 其賞不行하고 而法必用注+上, 時掌切. 上功, 謂上斬首捕虜之數也. 應, 去聲. 不相應, 謂斬捕之數不同也. 繩, 索也, 所以彈畫而取直者. 言文法之吏, 正治其事, 亦猶繩也.하니이다
且尙 坐上功首虜 差六級이어늘 陛下下之吏하여 削其爵하고 罰作之注+罰作, 謂罰爲徒, 居作一歲刑也.하시니 由此言之하면 陛下雖有頗牧이라도 弗能用也시리이다
하여 是日 令唐으로 持節赦魏尙하여 復以爲雲中守하고 而拜唐爲車騎都尉注+詳考班表, 漢無車騎都尉官, 時使唐主中尉及郡國車士.하다
增諸祀壇場珪幣하다
詔廣增諸祀 壇場珪幣注+築土爲壇, 除地爲場. 珪‧幣, 所以薦神.하고 且曰
先王 遠施호되 不求其報하고 望祀호되 不祈其福하며 右賢左戚하고 先民後己 至明之極也注+右賢左戚, 謂先賢後親也.
今吾聞祠官祝釐 皆歸福於朕躬하고 不爲百姓이라하니 朕甚愧之注+祠官, 攝行祀事者也. 釐, 音禧, 福也. 爲, 去聲.하노라
其令祠官致敬하고 無有所祈하라


을해년(B.C. 166)
[綱] 나라 태종太宗 효문황제孝文皇帝 14년이다.
겨울에 흉노匈奴가 쳐들어와 침략하므로, 군대를 보내어 공격하였는데, 흉노가 변방을 나가자 돌아왔다.
[目] 흉노匈奴의 14만 기병騎兵조나朝那(주나)와 소관蕭關으로 침입하여注+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조나현朝那縣안정군安定郡에 속하였다.” 하였다. 추수追輸이다. 소궐蕭闕조나朝那의 경계에 있다.북지도위北地都尉 손앙孫卬을 죽이고 사람과 가축을 사로잡아 간 것이 매우 많았으며,注+오랑五郞이니, 이름이다. 이다. 기병騎兵으로 침입하여 회중궁回中宮을 불태우니, 정탐하는 기병이 땅의 감천궁甘泉宮에까지 이르렀다.注+회중궁回中宮안정군安定郡 회중回中 지역에 있다. 기기奇寄이니, 후라候邏(순라巡邏)하는 기병이다.
조령詔令을 내려 병거兵車(전차) 1천 기졸騎卒 10만 명을 징발하고, 이 직접 군대를 무장하여 직접 흉노를 정벌하고자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는데 황태후皇太后가 강력히 만류하자 이 마침내 중지하고,注+(요구하다)는 로 읽으니, “고요固要”는 강력히 만류함을 이른다. 장상여張相如난포欒布장군將軍으로 삼아서 흉노를 공격하여 내쫓아 흉노가 변방을 나가자 돌아왔다.
[綱] 작도作徒(징역형으로 일한) 위상魏尙을 사면하여 다시 운중수雲中守로 삼았다.
[目] 을 타고 낭서郞署를 지날 적에注+사람을 멍에 하여 가게 하는 것을 이라 한다. 이 근무하는 집무실이다. 낭서의 풍당馮唐에게 “부로父老(당신)의 집은 어디에 있는가?”注+한서漢書》 〈풍당전馮唐傳〉에 “부로父老는 언제부터 낭관郞官이 되었으며, 집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되어 있다.라고 물으니, 풍당이 대답하기를 “저는 나라 사람입니다.” 하였다.
이 말하기를 “내가 나라에 있을 적에 상식감尙食監 고거高祛가 자주 나를 위해 나라 장수 이제李齊의 유능함을 말하면서 거록성鉅鹿城 아래에서 용감히 싸운 일을 말하였는데,注+은 주관함이니, 상식감尙食監은 군주의 반찬과 음식을 주관하는 관원이다. 는 음이 이다. 나는 지금도 밥을 먹을 때마다 마음이 일찍이 거록성에 있지 않은 적이 없다.
부로父老는 이 사람(이제李齊)을 아는가?”注+(밥을 먹다)은 상성上聲이다. 매번 밥을 먹을 때마다 고거高祛가 말한 것을 생각하여 마음이 일찍이 거록鉅鹿에 있지 않은 적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하니, 풍당이 대답하기를 “이제는 오히려 염파廉頗이목李牧이 장수 노릇 했던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이 넓적다리를 치며 말하기를注+은 친다는 뜻이고 는 음이 이니, 넓적다리의 바깥쪽이다. 넓적다리를 친 것은 격동한 바가 있어 그러한 것이다. “아!
내 오직 염파와 이목과 같은 사람을 얻어 장수로 삼지 못하였으니, 〈염파와 이목과 같은 사람을 얻어 장수로 삼는다면〉 내 어찌 흉노를 걱정하겠는가.” 하였다.
이에 풍당이 아뢰기를 “폐하께서는 비록 이들을 얻더라도 등용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하였다.
[目] 이 “이 어떻게 아는가?” 하고 추궁하자, 풍당馮唐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상고시대에 왕자王者가 장군을 파견할 적에 무릎을 꿇고 수레바퀴를 밀어주며 말하기를 ‘도성문 이내는 과인寡人이 통제하고 도성문 이외는 장군이 통제하라.’注+(밀다)는 통회通回이다. “퇴곡推轂”은 천자가 직접 그 수레바퀴를 밀어줌을 말한 것이다. 고본苦本로 문지방인데, 여기서는 도성문의 문지방을 이른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군대의 작록爵祿상사賞賜를 모두 밖에서 장군이 자유롭게 결단하게 하고 장군이 돌아와서 군주에게 아뢰기만 하였으니, 이는 빈말이 아닙니다.
이목李牧나라 장수가 되었을 적에 군대 안에 설치한 시장에서 받는 조세를 모두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여 병사들에게 연향을 베풀어주었으며, 으로 하사하는 것을 중앙(조정)에 아뢰게 하지 않고 이목에게 전임專任해서 성공을 책임지웠습니다.
그러므로 이목이 자신의 지혜와 재능을 다하여 나라를 거의 패자霸者가 되게 했던 것입니다.注+부종중복不從中覆”은 굳이 조정에 복주覆奏한 뒤에 행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일설에 “중앙에서 그 사용한 바의 를 다시 따지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지금 이 엎드려 듣건대 위상魏尙운중수雲中守가 되어서 군대 안에 설치한 시장에서 받는 조세를 모두 사용하여 사졸들에게 연향을 베풀어주고,注+사양전私養錢”은 위상魏尙사전私錢(개인 돈)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에서 특별히 지급한 것이다.” 한다. 빈객賓客은 유세하는 선비로서 위상의 손님이 된 자이다. 사사로이 가솔들을 봉양하는 돈을 가지고 스스로 빈객賓客군리軍吏사인舍人들에게 연향을 베풀어주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흉노가 멀리 피하여 운중군雲中郡의 변경에 가까이 오지 못하였는데, 오랑캐가 일찍이 한 번 침입하자 위상이 이들을 공격하여 죽인 것이 매우 많았다고 합니다.
병졸들은 밭 가운데에서 농사짓다가 종군하였으니, 어찌 척적尺籍오부伍符를 알겠습니까.注+(기록하다)은 진석秦昔이다. 척적尺籍군령軍令을 쓴 것이고 오부伍符는 병사들이 마다 서로 보증한 부신符信이다. 일설에 “척적尺籍은 수급을 베고 적을 사로잡은 을 한 자 정도 되는 판자에 쓴 것이다.”라고 하였다.
종일토록 힘써 싸워서 수급을 베고 포로를 잡았는데, 막부幕府전공戰功을 보고할 적에 한 마디 말이 서로 부합하지 않았다 하여, 법조문을 맡은 관리가 법으로 다스려서 은 행해지지 않고 형벌하는 법만 적용되었다 합니다.注+(올리다)은 시장時掌이다. “상공上功”은 적의 수급을 베고 포로로 잡은 숫자를 올려 보고함을 이른다. (부합하다)은 거성去聲이다. “불상응不相應”은 수급을 베고 포로로 잡은 숫자가 서로 맞지 않음을 말한다. 은 먹줄[]이니, 먹줄을 튕겨 줄을 그어 곧음을 취하는 것이다. 법조문을 맡은 관리가 바로 이 일을 다스리기를 먹줄과 같이 곧게 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또 위상이 수급을 베고 포로로 잡은 전공戰功을 보고할 적에 여섯 명의 수급이 차이가 나는 죄에 걸렸는데, 폐하께서 그를 옥리獄吏에게 내려서 관작을 삭탈하고 벌을 주셨으니,注+벌작罰作”은 로 복역함을 이르니, 1년 동안 노역勞役하는 형벌이다. 이를 가지고 말하면 폐하께서는 비록 염파와 이목이 있더라도 등용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目] 이 기뻐하여 이날 즉시 풍당馮唐으로 하여금 을 가지고 가서 위상魏尙을 사면하여 다시 운중수雲中守로 삼고, 풍당馮唐을 제수하여 거기도위車騎都尉로 삼았다.注+한서漢書》 〈백관표百官表〉를 자세히 살펴보면 나라에는 ‘거기도위車騎都尉’란 관직이 없으니, 이때에 풍당馮唐으로 하여금 중위中尉군국郡國의 전차병을 주관하게 한 것이다.
[綱] 봄에 여러 제사하는 과 마당과 규옥珪玉과 폐백을 더 늘리게 하였다.
[目] 조령詔令을 내려 여러 제사 지내는 곳의 과 마당, 규옥珪玉폐백幣帛을 더 늘리게 하고注+흙을 쌓아 을 만들고 땅을 소제하여 마당을 만든다. 규옥珪玉폐백幣帛에게 올리는 예물이다.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선왕先王은 멀리 베풀되 보답을 바라지 않고 를 지내되 을 기원하지 않았으며, 어진 이를 높이고 친척을 낮추었으며, 백성을 우선하고 자신을 뒤에 하였으니, 이는 현명함의 극치이다.注+우현좌척右賢左戚”은 현자를 우선하고 친척을 뒤에 함을 이른다.
지금 내 들으니, 사관祠官이 축원하여 복을 기원할 적에 모두 복을 의 몸에 돌리고 백성을 위하지 않는다고 하니, 짐이 몹시 이것을 부끄러워하노라.注+사관祠官은 제사 일을 대행하는 자이다. 는 음이 이니, 복이라는 뜻이다. (위하다)는 거성去聲이다.
사관祠官(예관禮官)으로 하여금 공경을 지극히 하고, 복을 기원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역주
역주1 十四年……出塞而還 : “특별히 쓴 것이니, 〈武帝 때에〉 祈連山에 이르렀다가 돌아오고, 狼居胥山을 봉하고 돌아오고, 燕然山에 올라 공을 돌에 새겨 기록하고 돌아온 것을 쓴 것과 크게 차이가 있다.[特筆也 與書至祈連而還 封狼居胥山而還 登燕然山 刻石勒功而還者 大有逕庭矣]” 《書法》
“11년에 ‘匈奴가 狄道로 침입하자, 백성들을 모집하여 변방 아래로 이주시켰다.’라고 썼고, 이해에 또다시 ‘흉노가 쳐들어와 침략하자, 군대를 보내어 공격해서 흉노가 변방을 나가자 돌아왔다.’라고 썼으니, 옛날 周나라 宣王이 잠깐 玁狁(험윤, 周나라 때 흉노의 명칭)을 정벌하여 太原에 이른 것과 한 바퀴자국에서 나온 것처럼 똑같다. 변경을 침범함은 바로 개와 양과 같은 오랑캐들의 일상적인 일이다. 이들을 몰아내어 국경을 나가면 즉시 중지하였으니, 이는 盛德의 일이다. 무력을 남용하여 〈武帝가〉 오랑캐의 조정을 갈아엎어 밭으로 만들고 소굴을 소탕함은 과연 무슨 일인가? 특별히 여기에 기록하였으니, 이는 찬미한 것이다.[十一年 書匈奴寇狄道 募民徙塞下 是年 又書入寇 遣兵擊之 出塞而還 殆與薄伐玁狁 至于太原者 如出一轍 夫侵邊犯境 乃犬羊之常爾 驅而出之 盡境卽止 此盛德事也 窮兵黷武 犁庭掃穴 果何爲哉 特筆于此 蓋美之也]” 《發明》
역주2 作徒 : “‘作徒’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황제가 허물을 고침을 아름답게 여긴 것이다. ‘다시 그로써 ~을 삼다.[復以爲之]’라고 한 예가 네 가지가 있으니, 〈군주가〉 허물을 고친 말이 있고, 〈군주가〉 허물을 되풀이한 말이 있고, 군주가 마음대로 명령하지 못하는 말이 있고, 그대로 인습하는 말이 있다.[書作徒 何 美改過也 復以爲之例 有四 有改過之辭 有貳過之辭 有不能令之辭 有因仍之辭]” 《書法》
역주3 郎官 : 녹봉이 比三百石 이상으로, 禁衛를 제외하고는 특별한 관직이 아니고 정원도 없다. 낭관은 대부분 選擧로 뽑히며, 낭관이 되었다는 것은 황제를 가까이 모시는 가신단에 포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주4 望祭 : 멀리서 바라보고 제사함을 이른다. 옛날 山川의 神에게 직접 가서 제사하기 어려울 경우 일정한 장소에 단을 설치하고 멀리서 바라보면서 제사하였는데, 때로는 江에 가로막혀 갈 수가 없을 경우 先祖의 묘소에도 望祭를 지냈다 한다.

자치통감강목(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