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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7)

자치통감강목(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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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酉年(A.D.49)
二十五年이라 春正月 貊人, 鮮卑, 烏桓 竝入朝貢하다
遼東徼外貊人 冦邊이어늘 太守祭肜 招降之하고
又以財利 撫納鮮卑大都護偏何하여 使招致異種하여 絡繹款塞注+偏何, 姓名. 往來不絶曰絡繹, 字通作落驛.하다
肜曰 審欲立功인댄 當歸擊匈奴하여 斬送頭首라야 乃信耳니라
偏何等 卽擊斬匈奴하여 持頭詣郡하고 其後相攻 輒送首級하여 受賞賜
自是 匈奴衰弱하여 邊無冦警하고 鮮卑, 烏桓 竝入朝貢하다
爲人 質厚重毅하고 撫夷狄以恩信이라 皆畏而愛之하여 得其死力이러라
南單于 擊北單于하여 破之하고 來請使者監護하다
南單于遣其弟左賢王莫하여 將兵萬餘人하여 擊北單于弟薁鞬左賢王하여 生獲之注+莫者, 左賢王之名.하니 北單于震怖하여 却地千餘里
南單于復遣使詣闕貢獻하고 求使者監護하고 遣侍子하여 修舊約注+宣帝舊約.하다
三月晦 日食하다
馬援軍 至臨鄕하여 擊破蠻兵注+水經註 “武陵郡沅南縣, 建武中所置, 縣在沅水之陰, 因以沅南爲名. 縣治故城, 昔馬援討臨鄕所築也.”하다 嘗有疾이러니
虎賁中郞將梁松 來候之할새 獨拜牀下호되 不答하니 松意不平이라
諸子問曰 梁伯孫 帝壻 貴重朝廷하여 公卿已下莫不憚之注+伯孫, 松字.어늘 大人 奈何獨不爲禮잇고
援曰 我乃松父友也 雖貴 何得失其序乎아하다
兄子嚴, 敦 竝喜譏議하고 通輕俠注+嚴․敦, 竝余之子也. 輕, 謂輕薄. 俠, 謂任俠.이러니 前在交趾 還書誡之曰
吾欲汝曹聞人過失이어든 如聞父母之名하여 耳可得聞이언정 口不可得言也하노라
好議論人長短하며 妄是非政法 此吾所大惡注+是非政法, 謂譏刺時政也. 寧死언정 不願聞子孫有此行也하노라
龍伯高 敦厚周愼하여 口無擇言하며 謙約節儉하고 廉公有威하니 吾愛之重之하여 願汝曹效之하노라
杜季良 豪俠好義하여 憂人之憂하고 樂人之樂하여 父喪致客 數郡畢至하니 吾愛之重之어니와 不願汝曹效也하노라
效伯高不得이면 猶爲謹勅之士 所謂刻鵠不成이라도 尙類鶩者也注+鵠, 胡沃切, 鳥名. 鶩, 亡遇․莫卜二切, 可畜而不能高飛者曰鴨, 野生而高飛者曰鶩.어니와 效季良不得이면 陷爲天下輕薄子
所謂畵虎不成이면 反類狗者也라하다 伯高者 山都長龍述也 季良者 越騎司馬杜保也注+山都, 縣名, 屬南陽郡.
保仇人 上書하여 訟保爲行浮薄하여 亂群惑衆하니 伏波將軍 萬里還書하여 以誡兄子어늘 而梁松, 竇固與之交結이라하다
帝召松, 固하여 以訟書及援誡書示之한대 松, 固叩頭流血하여 而得不罪
詔免保官하고 擢拜龍述爲零陵太守注+零陵, 郡名, 屬荊州.하니 由是恨援이러라
及援討武陵蠻 軍次下雋注+雋, 字兗切. 下雋, 縣名, 屬長沙郡.하니 有兩道可入호되 從壺頭 則路近而水險注+壺頭, 山名, 在武陵郡沅陵縣東.하고 從充이면 則塗夷而運遠注+充, 縣名, 屬武陵郡.이라
耿舒欲從充道어늘 援以爲 棄日費糧하니 不如進壺頭하여 搤其咽喉하면 充賊自破라하여 以事上之한대 帝從援策하다
進營壺頭하니 乘高守隘하고 水疾하여 船不得上이라 會暑甚하여 士卒多疫死하고 援亦中病하니
乃穿岸爲室以避炎氣注+中, 去聲. 武陵記曰 “壺頭山邊, 有石窟, 卽援所穿室也.”하다 每升險鼓譟 輒曳足以觀之하니 左右哀其壯하여 莫不爲之流涕러라
耿舒與兄好畤侯弇書曰注+好畤, 縣名, 屬右扶風. 前舒上書하여 當先擊充하니 糧雖難進이나 而兵馬得用이라 軍人數萬 爭欲先奮이러니
今壺頭竟不得進하고 大衆 怫鬱行死하니 誠可痛惜注+怫鬱, 謂氣蘊積而不得舒也. 行死, 謂行將疫死也.이니이다 前到臨鄕 無故自致하니 若夜擊之 卽可殄滅이어늘
伏波類西域賈胡하여 到一處輒止하여 以是失利 今果疫疾하여 皆如舒言注+賈, 音古, 賈胡, 商胡也. 言似商胡, 所至之處, 輒停留也.이라하다
得書奏之하니 帝乃使梁松으로 乘驛責問援하고 因代監軍하다
援卒하니 因是構陷援한대 帝大怒하여 追收援新息侯印綬注+構會其過惡也. 郡國志 “新息侯國, 屬汝南郡.”하다
在交趾 常餌薏苡實이러니 能輕身하고 勝瘴氣라하여 軍還 載之一車注+薏苡, 味甘, 微寒, 主風濕痺, 下氣, 除筋骨邪氣, 久服輕身益氣. 瘴, 熱病也. 南方瘴熱, 春氣深, 則瘴起, 染之者必死.하다
及卒後 有上書譖之者하여 以爲 昔所載還 皆明珠文犀라하니 帝益怒注+明珠, 出合浦, 大者徑寸. 犀, 南徼外獸, 爾雅注 “形似水牛猪頭, 二角, 一在頂, 一在鼻.” 文犀, 卽通天犀, 角上白縷直至端.
援妻孥惶懼하여 與嚴草索相連하여 詣闕請罪注+古者, 罪不至扑刑者, 令衣褐帶索, 相隨以執役, 卽所謂胥靡者.어늘 帝乃出松書以示之하니 方知所坐하여 上書訴寃하다
前雲陽令朱勃 詣闕上書曰 竊見故伏波將軍馬援 間者南討 立陷臨鄕하여 師已有業 未竟而死注+業, 緖也.하니
吏士雖疫이나 援不獨存이라 惟援 得事朝廷二十二年 北出塞漠하고 南渡江海하여 觸冒害氣하여 僵死軍事注+北出塞漠, 謂討烏桓.어늘
名滅爵絶하여 國土不傳하니 海內不知其過하고 衆庶未聞其毁로되
家屬杜門하여 葬不歸墓注+援傳 “妻孥惶懼, 不敢以喪還舊塋, 裁買城西數畝地, 槀葬而已.”하고 怨隙竝興하여 宗親怖慄이라 死者不能自列하고 生者莫爲之訟하니 臣竊傷之注+列, 陳也.하노이다
願下公卿하여 平援功罪 宜絶宜續하여 以厭海內之望하소서 帝意稍解注+厭, 益涉切, 塞也, 滿也. 望, 願望也.하다
胡氏曰 梁松 坐馬援書하여 叩頭泣血 帝所親見也어늘 而使之乘驛責援하여 代監其軍注+泣血, 管見作流血.하며
請營壺頭하고 耿舒 請從充道하여 兩事俱上 帝從援策이러니 尋復聽舒하여 咎援失利하고 誣陷之言 又自松口
帝平日料敵制勝 明見萬里之外러니 乃於此擧 屢失事宜하니 得非春秋旣高 智有所困耶
不然이면 有臣如援而不保令終하니 其爲君德之累 豈小小哉
冬十月 監軍謁者宗均 하여 告諭群蠻하여 降之하다
謁者宗均 監援軍注+宗, 姓也.이러니 旣卒 軍士疫死者太半이요 蠻亦飢困이라
乃與諸將議曰 今道遠士病하여 不可以戰이라 欲權承制降之하노니 何如 諸將 莫敢應이라
均曰 夫忠臣出境 有可以安國家 専之可也라하고 乃矯制하여 調伏波司馬呂种하여 守沅陵長注+調, 徒弟切, 試也. 言矯制選試也.하고
命种하여 奉詔書하고 入虜營하여 告以恩信하고 因勒兵隨其後하니 蠻夷震怖하여 冬十月 共斬其大帥而降하다
於是 入賊營하여 散其衆하여 遣歸本郡하고 爲置長吏而還하니 群蠻 遂平이라
未至 先自劾矯制之罪어늘 嘉其功하여 迎賜以金帛하다
遼西, 烏桓 內屬이어늘 置校尉以領之하다
是歲 遼西, 烏桓大人郝旦等 率衆內屬注+烏桓, 推勇健能理決闘訟者, 爲大人.이어늘 詔封烏桓渠帥하여 爲侯王君長者 八十一人이라
使居塞內하여 布於緣邊諸郡하고 令招來種人하여 給其衣食하고 遂爲漢偵候하여 助擊匈奴, 鮮卑하다
司徒掾班彪上言호되 烏桓 天性 輕黠하여 好爲寇賊하니 若久放縱而無總領者 必復掠居人이요
但委主降掾吏 恐非所能制注+降, 平聲. 主降掾吏, 蓋當時權置也. 臣愚 以爲宜復置烏桓校尉 誠有益於附集이요 省國家之邊慮注+西都, 置護烏桓校尉, 至王莽時, 烏桓叛, 校尉由是罷.리이다
帝從之하여 於是 始復置校尉於上谷寗城하여 開營府하여 幷領鮮卑賞賜, 質子 歲時互市焉注+寗城, 縣名, 屬上谷郡.하다


기유년己酉年(A.D.49)
나라 세조 광무황제世祖 光武皇帝 건무建武 25년이다. 봄 정월에 맥인貊人선비鮮卑, 오환烏桓이 함께 들어와 조공朝貢하였다.
요동遼東 변방 밖에 있는 맥족貊族 사람들이 변경을 침략하자, 태수 채융太守 祭肜(채융)이 불러 항복을 받았다.
채융은 또 재리財利로써 선비鮮卑대도호 편하大都護 偏何를 어루만지고 받아들여서 그로 하여금 다른 종족들을 초치하여 끊임없이 변방에 이르게 하였다.注+편하偏何는 사람의 성명姓名이다. 끊이지 않고 왕래하는 것을 “낙역絡繹”이라 하니, ≪자통字通≫에는 낙역落驛으로 되어 있다.
채융이 〈편하 등에게〉 말하기를 “참으로 공을 세우고자 한다면, 마땅히 돌아가 흉노匈奴를 공격해서 머리를 베어 보내야만 비로소 그대들을 믿을 것이다.” 하니,
편하 등이 즉시 흉노를 공격해서 참수하고 그 머리를 가지고 에 나왔고, 그 뒤 서로 공격할 때마다 번번이 수급을 보내 상을 받았다.
이로부터 흉노가 쇠약하여 변경에는 흉노의 침략을 알리는 경고가 없어졌으며, 선비鮮卑오환烏桓이 함께 들어와 조공하였다.
채융은 인품이 질박하고 후덕하며 진중하고 굳세며, 이적夷狄들을 은혜와 신의로써 어루만졌다. 그러므로 오랑캐들이 모두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하여 사력을 다해 싸웠다.
남선우南單于북선우北單于를 격파하고, 와서 사자使者감호監護해주기를 청하였다.
남선우南單于가 그의 아우 좌현왕 막左賢王 莫을 보내 만여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북선우北單于의 아우 욱건좌현왕薁鞬左賢王을 공격해서 사로잡으니注+좌현왕左賢王의 이름이다., 북선우가 놀라고 두려워하여 천여 리를 퇴각하였다.
남선우가 다시 사자使者를 보내 대궐에 나와 공물을 바치고, 사자가 감호監護해줄 것과 시자侍子를 보내 옛 약속을 받들 것을 청하였다.注+〈“구약舊約”은〉 선제宣帝의 옛 약속이다.
】 3월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 여름에 신식후 마원新息侯 馬援이 군중에서 하니, 조령詔令을 내려 그 인수印綬를 거두게 하였다.
마원馬援의 군대가 임향臨鄕에 이르러 만족蠻族의 군대를 격파하였다.注+수경주水經註≫에 “무릉군 원남현武陵郡 沅南縣건무建武 연간에 설치하였는데, 원수沅水 남쪽에 있어서 원남沅南이라 이름하였다. 고성故城에 치소로 두었으니, 옛날 마원馬援임향臨鄕을 토벌할 적에 쌓은 이다.” 하였다. 처음에 마원이 일찍이 병을 앓았는데,
호분중랑장 양송虎賁中郞將 梁松이 와서 문안할 적에 홀로 아래에서 절하였으나 마원이 답례하지 않으니, 양송이 내심 불편해하였다.
여러 아들이 묻기를 “양백손梁伯孫(양송梁松)은 황제의 사위로 조정에서 귀중하여 공경公卿 이하가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는데注+백손伯孫양송梁松의 자이다., 대인大人께서 어찌하여 유독 답례하지 않습니까?” 하니,
마원이 말하기를 “나는 양송의 아버지의 친구이니, 양송이 아무리 귀한들 어찌 그 순서를 잃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마원馬援의 조카인 마엄馬嚴마돈馬敦은 모두 남을 비판하기를 좋아하고, 경박한 협객과 교제하였다.注+마엄馬嚴마돈馬敦은 모두 마여馬余의 아들이다. 은 경박함을 이르고 임협任俠을 이른다. 마원이 전에 교지交趾에 있을 적에 글을 보내 다음과 같이 경계하였다.
“나는 너희들이 남의 과실過失을 듣거든 부모의 이름을 들은 것과 같이하여, 귀로는 얻어 들을지언정 입으로는 말하지 않기를 바라노라.
남의 장단점을 따지기 좋아하며 망령되이 정사政事을 함부로 옳다 그르다 하는 것은 내가 크게 싫어하는 바이니注+시비정법是非政法”은 시정時政을 비난함을 이른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자손 중에 이런 행실을 하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노라.
용백고龍伯高는 후덕하고 두루 삼가서 입에 가릴 말이 없으며 겸손하고 절약하고 청렴하고 공정하여 위엄이 있으니, 내 그를 애지중지하여 너희들이 그를 본받기를 원하노라.
두계량杜季良은 기개가 높고 를 좋아해서 남의 근심을 근심해주고 남의 즐거움을 즐거워해주어서 아버지의 에 손님을 초치함에 여러 의 사람들이 모두 왔으니, 내 그를 애지중지하지만 너희들이 본받기를 원치 않노라.
용백고를 본받다가 이루지 못하더라도 삼가고 조심하는 선비가 될 것이니, 이른바 ‘큰 고니를 조각하다가 이루지 못하더라도 오리를 닮는다.’注+(고니)은 호옥胡沃이니 새의 이름이다. (집오리)은 망우亡遇막복莫卜의 두 가지 이니, 기를 수 있으나 높이 날지 못하는 것을 이라 하고, 야생으로 높이 나는 것을 이라 한다.는 것이지만, 두계량을 본받다가 이루지 못하면 천하의 경박한 사람이 될 것이니,
이른바 ‘범을 그리다가 이루지 못하면 도리어 개를 닮는다.’는 것이다.” 용백고는 산도장山都長용술龍述이고, 두계량은 월기사마越騎司馬두보杜保이다.注+산도山都의 이름이니 남양군南陽郡에 속하였다.
】 마침 두보杜保의 원수가 상서上書하여 고발하기를 “두보의 행실이 경박하고 진실되지 못하여 사람들을 혼란하게 하고 미혹시키니, 복파장군伏波將軍(마원馬援)이 만 리 먼 곳에서 글을 보내 형의 아들들을 경계하였는데, 양송梁松두고竇固가 이들과 친하게 사귑니다.” 하였다.
황제가 양송과 두고를 불러서 고발한 글과 마원의 경계한 글을 보여주자, 양송과 두고는 머리를 땅에 두드려 피를 흘려 사죄하고서야 죄를 면할 수 있었다.
황제가 조령詔令을 내려 두보의 관직을 면직시키고 용술龍述(용백고龍伯高)을 발탁하여 영릉태수零陵太守에 제수하니注+영릉零陵의 이름이니 형주荊州에 속하였다., 양송이 이로 인해 마원을 원망하게 되었다.
】 그러다가 마원馬援무릉武陵만족蠻族을 토벌할 적에 군대가 하준下雋에 주둔하였다.注+자연字兗이다. 하준下雋의 이름이니 장사군長沙郡에 속하였다. 무릉武陵으로 들어갈 수 있는 두 길이 있었는데, 호두산壺頭山을 따르면 길이 가까우나 물이 험하고注+호두壺頭의 이름이니 무릉군 원릉현武陵郡 沅陵縣 동쪽에 있다., 을 따라 들어가면 길이 평탄하나 운송로가 멀었다.注+의 이름이니 무릉군武陵郡에 속하였다.
경서耿舒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고자 하였으나, 마원이 이르기를 “〈으로 들어가면〉 여러 날이 걸리고 양식을 허비하니, 호두산壺頭山으로 나아가 그 중요한 곳을 옥죄는 것만 못하다. 이렇게 하면 의 적이 스스로 무너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일을 올리자, 황제는 마원의 계책을 따랐다.
마원馬援이 나아가 호두산壺頭山에 진영을 쳤는데, 적이 높은 곳에 올라가 좁은 곳을 지켰고 물길이 빨라서 배가 올라갈 수 없었다. 마침 더위가 심하여 병졸 중에 역병疫病으로 죽은 자가 많고 마원 또한 병에 걸리니,
마침내 언덕을 파 굴을 만들어서 더운 기운을 피하였다.注+(맞다, 걸리다)은 거성去聲이다. ≪무릉기武陵記≫에 “호두산壺頭山 가에 석굴石窟이 있으니, 바로 마원馬援이 뚫은 석실石室이다.” 하였다. 적이 험한 곳에 올라가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를 때마다 마원이 발(다리)을 끌고 가서 관망하니, 좌우의 측근들은 그의 장한 뜻을 가엾이 여겨서 그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경서耿舒가 형 호치후 경엄好畤侯 耿弇에게 편지를 보내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注+호치好畤의 이름이니 우부풍右扶風에 속하였다. “지난번 제가 글을 올려서 마땅히 먼저 을 공격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은 〈운송로가 멀어 가지고 있는〉 양식으로는 나아가기 어려우나 〈길이 평탄하여〉 군대와 말[]을 쓸 수는 있어서 이에 수만의 군사들이 다투어 먼저 분발하여 출전하고자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호두산에서는 끝내 전진하지 못하여 여러 사람들이 역병이 일어나 죽을까 우울해하고 있으니, 참으로 애통하고 애석합니다.注+불울怫鬱”은 가 쌓여 펴지지 못함을 이른다. “행사行死”는 장차 역병으로 죽을 것임을 이른다. 지난번 임향臨鄕에 이르렀을 적에 적이 이유 없이 스스로 왔는데, 만약 그날 밤에 공격했더라면 적을 곧바로 섬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복파장군伏波將軍서역西域의 오랑캐 장사꾼과 같아서 한 곳에 도착하면 번번이 머물러서 이 때문에 좋은 기회를 잃었습니다. 지금 과연 역질疫疾이 크게 일어나서 모두 저의 말처럼 되었습니다.”注+는 음이 이니 “고호賈胡”는 장사하는 오랑캐이다. 〈“유고호 도일처첩지類賈胡 到一處輒止”는〉 장사하는 오랑캐와 같이 이르는 곳마다 번번이 머무름을 말한 것이다.
경감이 이 편지를 받고서 임금에게 아뢰니, 황제는 마침내 양송梁松으로 하여금 파발마를 타고 가서 마원을 문책하게 하고, 마원 대신 군대를 감독하게 하였다.
마침 마원이 하였는데, 양송이 이 틈을 타고 마원을 모함하자, 황제는 크게 노하여 마원의 신식후 인수新息侯 印綬를 추가로 거두었다.注+〈“구함構陷”은〉 죄악을 얽어 만든 것이다. ≪후한서後漢書≫ 〈군국지郡國志〉에 “신식후국新息侯國여남군汝南郡에 속했다.” 하였다.
】 처음에 마원馬援교지交趾에 있을 적에 항상 의이薏苡(의이)의 열매를 먹었는데, 몸을 가볍게 하고 장기瘴氣를 이길 수 있다 하여 군대가 돌아올 적에 수레에 가득 싣고 돌아왔다.注+의이薏苡는 맛이 달고 약간 차가우니, 풍습風濕으로 인한 마비를 주로 치료하고 를 내리게 하며 힘줄과 뼈의 사기邪氣를 제거하는데, 오래 복용하면 몸이 가벼워지고 기운이 난다. 은 열병이다. 남쪽 지역은 더워서 봄 기운이 따뜻해지면 장기瘴氣가 일어나는데, 이에 감염된 자는 반드시 죽는다.
그런데 마원이 한 뒤에 상서上書하여 참소하는 자가 말하기를 “예전에 수레에 가득히 싣고 돌아온 것이 모두 명주明珠문서文犀(무늬가 있는 서각犀角)였습니다.”라고 하니, 황제가 더욱 노여워하였다.注+명주明珠합포合浦에서 나오는데, 큰 것은 지름이 1이다. 는 남쪽 변방 밖에 있는 짐승이니, ≪이아爾雅≫의 에 “모습이 물소와 유사하고 돼지 머리에 뿔이 둘인데, 하나는 이마에, 하나는 코에 있다.” 하였다. 문서文犀는 바로 통천서通天犀이니, 뿔 위에 흰 줄이 끝까지 죽 이어져 있다.
마원의 처자는 황송해하여 마엄馬嚴과 함께 새끼줄로 서로 묶고서 대궐에 나와 죄줄 것을 청하였는데注+옛날에 죄가 복형扑刑(채찍의 형벌)에 이르지 않는 자에게는 갈옷을 입고 새끼줄로 띠를 매고 서로 따라 노역을 하게 하였으니, 바로 이른바 서미胥靡란 것이다., 황제가 마침내 양송梁松의 글을 내어 보이니, 마원의 처자식들은 비로소 자신들이 죄를 받은 이유를 알고서 글을 올려 억울함을 하소연하였다.
전 운양령前 雲陽令 주발朱勃이 대궐에 이르러 다음과 같이 상서上書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고 복파장군故 伏波將軍 마원馬援이 근자에 남쪽 지역을 토벌할 적에 즉시 임향臨鄕을 함락하여 군대가 이미 공이 있었는데 끝마치지 못하고 죽으니注+은 실마리이다.,
관리와 병사들이 비록 역병을 앓았으나 마원 혼자 생존하지는 않았습니다. 마원이 조정을 섬긴 지 22년 동안에 북쪽으로는 변방의 사막을 나가고 남쪽으로는 강해江海를 건너가서 해로운 기운을 무릅쓰고 군대의 일에 쓰러져 죽었는데注+북출새막北出塞漠”은 오환烏桓을 토벌한 것을 이른다.,
이름이 없어지고 관작이 끊어져서 봉토封土가 전해지지 못하니, 해내海內에서는 그의 잘못을 알지 못하고 여러 백성들은 그를 비난하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가솔들이 문을 닫고 나오지 못하여 상여가 선영으로 돌아가 장례하지 못하였고注+후한서後漢書≫ 〈마원전馬援傳〉에 “처자식들이 황송하여 감히 상여를 가지고 옛 선영으로 돌아가 장례하지 못하고 겨우 도성 서쪽에 있는 몇 의 땅을 사서 고장槀葬(예를 갖추지 않고 매장함)하였을 뿐이다.” 하였다., 마원을 원망하는 말이 함께 일어나서 마원의 종친宗親들이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는 스스로 자신의 입장을 진술하지 못하고注+은 진술함이다. 산 자는 그를 위하여 하소연하지 못하니, 은 적이 서글퍼합니다.
원컨대 공경公卿들에게 회부하여 마원의 봉국封國을 끊어야 하는지 이어야 하는지를 공평하게 논의하여 해내海內의 바람에 부응하소서.” 이에 황제의 뜻이 비로소 조금 풀렸다.注+익섭益涉이니 채움이고, 만족함이다. 원망願望함이다.
호씨胡氏(호인胡寅)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양송梁松마원馬援의 편지 때문에 죄에 걸려 머리를 땅에 두드려 피를 흘리며 〈용서를 빈 것은〉 황제가 직접 본 바인데, 그로 하여금 역마를 타고 가서 마원을 문책하게 하고 대신 그의 군대를 감독하게 하였다.注+읍혈泣血”은 에는 유혈流血로 되어 있다.
또 마원은 호두산壺頭山에 진영을 칠 것을 청하고 경서耿舒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갈 것을 청하여 두 가지 일을 모두 올렸을 적에 황제가 마원의 계책을 따랐는데, 얼마 후 다시 경서의 말을 듣고서 마원이 좋은 기회를 잃은 것을 허물하였으며, 게다가 무함하는 말이 또 양송의 입에서 나왔다.
황제가 평소 적을 헤아려서 승리할 적에는 만 리의 밖을 밝게 보았는데, 이 일에 있어서는 일의 마땅함을 여러 번 잃었으니, 이는 나이가 많아져서 지혜가 곤궁한 바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마원과 같은 훌륭한 신하에 있어서 끝을 잘 마치도록 보전해주지 못했으니, 군주의 덕에 누가 됨이 어찌 적다고 하겠는가.”
】 겨울 10월에 감군알자 종균監軍謁者 宗均이 황제의 제명制命을 사칭하여 여러 만족蠻族을 타일러서 항복을 받았다.
알자 종균謁者 宗均마원馬援의 군대를 감독하였는데注+이다., 마원이 하자 군사 중에 역병으로 죽은 자가 태반이고, 만족蠻族들 또한 굶주리고 곤궁하였다.
종균이 이에 장수들과 상의하기를 “지금 길이 멀고 군사들이 병들어서 전투할 수가 없다. 임시방편으로 황제의 제명制命을 받들어 적을 항복시키고자 하니, 어떠한가?” 하니, 장수들이 감히 대답하지 못하였다.
종균이 말하기를 “충신忠臣은 국경을 나갔을 적에 국가를 편안히 할 수 있으면 자기 마음대로 해도 괜찮다.” 하고는 마침내 제명을 사칭하여 복파사마 여충伏波司馬 呂种(여충)을 선발하여 수원릉장守沅陵長으로 임명하고注+調도제徒弟로 등용함이니, 〈“교제조矯制調”는〉 제명制命을 사칭하여 선발해서 등용함을 말한 것이다.
여충에게 명하여 조서를 받들고 오랑캐 진영으로 들어가서 은혜와 신의로써 타이르게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군대를 무장하여 그 뒤를 따르니, 만이蠻夷가 놀라고 두려워해서 겨울 10월에 함께 그들의 대수大師(큰 우두머리)를 참수하고 항복하였다.
이에 종균이 적진으로 들어가서 그 군대를 해산하여 본군本郡으로 돌려보내고 장리長吏를 배치하고 돌아오니, 여러 만족蠻族이 마침내 평정되었다.
종균이 경사京師에 도착하기 전에 먼저 황제의 제명을 사칭한 죄를 스스로 탄핵하자, 은 그의 을 가상히 여기고 맞이하여 금과 비단을 하사하였다.
요서遼西오환烏桓내속內屬하자, 교위校尉를 설치하여 이들을 다스렸다.
】 이해에 요서遼西오환烏桓대인大人학단郝旦(학단) 등이 무리를 거느리고 내속內屬하자注+오환烏桓은 용맹하고 건장하며 싸움과 분쟁을 다스리고 결단할 수 있는 자를 추대하여 대인大人이라 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려 오환의 추장을 봉해서 후왕侯王군장君長으로 삼은 자가 81명이었다.
이들을 변방 안에 두어 변방의 여러 에 흩어져 거주하게 하고, 또 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종족들을 불러 와서 그들에게 옷과 밥을 공급해주고 마침내 나라를 위하여 정탐해서 흉노匈奴선비鮮卑를 공격하는 일을 돕게 하였다.
이때에 사도연司徒掾반표班彪(반표)가 다음과 같이 상언上言하였다. “오환은 천성天性이 경솔하고 교활하여 도적질을 좋아하니, 만약 오랫동안 풀어놓아 통솔하는 자가 없으면 반드시 다시 거주하는 사람을 노략질할 것이고,
주항연리主降掾吏에게만 맡겨둔다면 능히 제재할 수 있는 바가 아닐 듯합니다.注+(항복하다)은 평성平聲이다. 주항연리主降掾吏는 아마도 당시에 임시로 설치한 듯하다. 어리석은 은 생각하건대, 마땅히 다시 오환교위烏桓校尉를 설치해야 하니, 이렇게 하면 진실로 오랑캐들이 내부內附하고 안집安集하는 데에 유익할 것이요, 국가가 변경에 대한 염려를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注+서도西都(전한前漢)에서는 호오환교위護烏桓校尉를 설치하였었는데, 왕망王莽 때에 오환烏桓이 배반하자, 이로 인해 교위校尉를 파하였다.
황제가 그의 말을 따라서 이에 처음으로 상곡上谷영성寗城에 다시 교위校尉를 설치하고 영부營府를 열어, 선비鮮卑에 대한 상사賞賜와 인질로 오는 아들과 세시歲時에 교역하는 것을 모두 관장하게 하였다.注+영성寗城의 이름이니 상곡군上谷郡에 속하였다.


역주
역주1 新息侯……其印綬 : “≪春秋≫에 軍中에서 죽었다고 쓴 것은 국사에 죽은 것을 가상히 여긴 것이다. 위에서는 ‘군중에서 卒하였다.’라고 썼고, 아래에서는 ‘그의 印綬를 거두었다.’고 썼으니, 황제의 잘못이 크다. 특별히 ‘詔’라고 쓴 것은 비판한 것이다.[春秋 書卒于師 嘉死事也 上書卒于軍 下書收其印綬 帝之失大矣 特書詔 譏之]” ≪書法≫ “군주와 신하의 사귐이 어렵다. 馬援은 구름이 일어나듯 어지러이 소요하던 초기에 군주를 가려 섬겨서 世祖의 넓고 큰 도량을 한 번 보자마자 진짜 帝王이 있음을 알고서 즉시 폐백을 바쳐 신하로 복종하였으며, 황제 또한 정성을 미루어 그를 등용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지혜와 재주를 분발하여 공적을 세워서 中興의 名臣이 되었는데, 말년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보전하지 못하였다. 더구나 마원의 이번 출정은 다만 성공하지 못했을 뿐이요, 군대를 패하게 하거나 장수를 죽게 한 죄가 있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황제가 이와 같이 노여워하였단 말인가. ≪資治通鑑綱目≫에 ‘援卒于軍(마원이 군중에서 죽다.)’이라고 썼으니 그가 王事에 죽은 실제를 나타낸 것이요, ‘詔收印綬(詔令를 내려 그의 인수를 거두었다.)’라고 썼으니 그가 기록할 만한 죄가 없는 실제를 나타낸 것이다. 이로 보건대, 현명함이 光武帝와 같고 지혜가 馬援과 같더라도 始終을 보전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타인에 있어서이겠는가. 아, 슬프도다.[君臣之交難矣哉 馬援當雲擾之初 擇君而事 一見世祖恢廓大度 知其帝王有眞 卽委質臣服 帝亦推誠用之 由是奮其智能 建立事功 爲中興名臣 及其晩節 乃不能自保 況援此行 止於未能成功而已 非有敗軍殺將之罪 何爲怒之若此 綱目書援卒于軍 則見其沒於王事之實 書詔收印綬 則見其無罪可書之實 由是觀之 明如光武 智如馬援 猶不保始終 況他人乎 吁]” ≪發明≫
역주2 ≪讀史管見≫ : 宋나라 胡安國의 양자인 胡寅이 司馬光의 ≪資治通鑑≫이 사실을 두루 갖추었으나 의논을 세운 실제가 적다 해서 春秋大義에 입각하여 자세히 논평한 史評集이다. 호인은 자가 明仲, 호가 致堂, 시호가 文忠으로 崇安 사람이다.
역주3 矯制 : “황제의 制命을 사칭[矯]하면 비록 功이 있더라도 반드시 ‘矯’라고 쓰니, ≪資治通鑑綱目≫을 편수한 것은 군주와 신하의 의리를 밝히려는 것이었다.[矯制雖有功 必書矯 綱目之修 君臣之義而已矣]” ≪書法≫

자치통감강목(7) 책은 2019.10.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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