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資治通鑑綱目(13)

자치통감강목(13)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자치통감강목(1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辛丑年(281)
二年이라 春三月 하다
帝旣平吳 頗事遊宴하여 怠於政事하니 掖庭 殆將萬人이라
常乘羊車하고 恣其所之하여 至便宴寢注+晉志 “羊車, 一名輦車, 上如軺, 伏兔箱, 漆畵輪軛.”하니 宮人 競以竹葉揷戶하고 鹽汁灑地하여 以引帝車注+羊嗜竹葉而喜醎, 故以二者引帝車.러라
后父楊駿及弟珧, 濟始用事하여 勢傾內外하니 時人 謂之三楊이라
舊臣 多被疏退러라 山濤數有規諷하니 帝雖知而不能改러라
冬十月 鮮卑慕容涉歸寇昌黎하다
鮮卑莫護跋 始自塞外 入居遼西棘城之北하여 號慕容部注+棘城, 在昌黎縣界. 莫護跋從宣帝伐公孫氏有功, 拜率義王, 始建國于棘城之北. 時燕代多冠步搖冠, 莫護跋見而好之, 遂襲冠焉, 諸部因爲步搖. 其後音訛轉曰慕容, 因以爲氏. 或云 “慕二儀之德, 繼三光之容, 故以爲氏.” 胡三省曰 “步搖之說誕, 或云之說, 慕容氏旣得中國, 其臣子從而爲之辭.”러니
至孫涉歸하여 遷於遼東之北하고 世附中國하여 數從征討有功하여 拜大單于러니 至是始叛하여 寇昌黎注+莫護跋生木延, 木延生涉歸. 昌黎, 漢之交黎縣, 屬遼西郡, 東漢屬遼東屬國都尉. 魏正始五年, 鮮卑內附, 復置遼東屬國, 立昌黎縣以居之, 後立昌黎郡.하다
◑自漢, 魏以來 羌, 胡, 鮮卑降者 多處之塞內諸郡이러니 其後數因忿恨하여 殺害長吏하여 漸爲民患이라
侍御史郭欽 上疏曰 戎狄彊獷하여 歷古爲患注+彊, 巨良切, 暴橫也. 獷, 古猛切, 麤惡貌.이라 魏初民少하여 西北諸郡 皆爲戎居하고
內及京兆하여 魏郡, 弘農 往往有之하니 今雖服從이나 若百年之後 有風塵之警이면
胡騎自平陽, 上黨으로 不三日而至孟津, 北地, 西河, 太原, 馮翊, 安定, 上郡하여 盡爲狄庭矣리이다
宜及平吳之威 謀臣猛將之略하여 漸徙內郡雜胡於邊地하여
峻四夷出入之防하고 明先王荒服之制 此萬世長策也니이다 不聽注+禹貢五服, 相距方五千里, 荒服內距甸服二千里.하다
注+魏揚州治壽春, 晉平吳, 乃移治秣陵.하다
吳民之未服者 屢爲寇亂이어늘 皆討平之하고 賓禮故老하고 搜求俊乂하여 威惠竝行하니 吳人 悅服이러라


辛丑年(281)
[] 나라 世祖 武皇帝 太康 2년이다. 봄 3월에 나라의 伎妾[妓妾] 5천 명을 뽑아서 궁중으로 들여왔다.
[] 황제는 나라를 평정한 뒤에 자못 놀고 잔치함을 일삼아서 정사를 태만히 하니, 宮庭에 있는 여인이 거의 만 명에 가까웠다.
황제는 항상 이 끄는 수레를 타고 양이 가는 대로 내버려두고는 〈양이 어느 宮人의 거처에〉 도착하면 곧 그곳에서 잠을 자니,注+晉書≫ 〈輿服志〉에 “이 끄는 수레는 일명 ‘輦車’이니, 위는 와 같고 수레의 곁채에 가 있으며, 수레바퀴에 옻칠을 하고 그림을 그렸다.”라고 하였다. 궁인들이 다투어 대나무 잎을 문에 꽂아놓고 소금물을 땅에 뿌려서 황제의 수레를 유인하였다.注+양이 댓잎을 좋아하고 짠 것을 좋아하므로 댓잎과 소금물을 가지고 황제의 수레를 유인한 것이다.
황후의 친정 아비인 楊駿과 아우 楊珧楊濟가 처음 권력을 행사하여 권세가 내외를 휩쓰니, 당시 사람들이 이들을 일러 三楊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옛 신하들은 대부분 소외되어 물러났다. 山濤가 여러 번 황제에게 規諫을 하였으나 황제는 비록 알더라도 고치지 못하였다.
[] 겨울 10월에 鮮卑慕容涉歸昌黎를 침략하였다.
[] 처음에 鮮卑莫護跋이 비로소 변방 밖에서 들어와 遼西棘城 북쪽에 살면서 이름을 慕容部라 했었다.注+棘城昌黎縣의 경계에 있다. 莫護跋宣帝(司馬懿)를 따라 公孫氏를 공격할 적에 공을 세우고 率義王에 제수되어 처음으로 극성의 북쪽에 나라를 세웠다. 이때 燕代 지역에는 步搖冠을 많이 썼는데 막호발이 이것을 보고 좋아하여 마침내 보요관을 쓰니, 여러 부족들이 인하여 이들을 ‘步搖’라고 불렀다. 이후에 그 음이 와전되어 ‘慕容’이라 하고 그대로 로 삼았다. 혹자는 말하기를 “二儀(하늘과 땅)의 덕을 사모하고 三光(해와 달과 별)의 모습을 이었으므로 이것으로 를 삼았다.” 하였다. 胡三省이 말하기를 “步搖에서 유래했다는 설은 虛誕하고, 혹자의 설은 慕容氏가 중국을 차지하자 그의 신하들이 따라서 붙인 말이다.” 하였다.
손자 慕容 涉歸에 이르러 遼東의 북쪽으로 옮기고 대대로 중국에 붙어서 여러 차례 정벌을 따라 출전해서 공을 세워 大單于에 제수되었는데, 이때에 처음으로 배반하여 昌黎縣을 침략하였다.注+莫護跋木延을 낳고 목연이 涉歸를 낳았다. 昌黎나라의 交黎縣이니, 遼西郡에 속하였고 東漢에서는 遼東屬國都尉에 속하였다. 나라 正始 5년(244)에 鮮卑가 안으로 歸附하자 다시 요동속국을 설치하고 昌黎縣을 세워 이들을 거처하게 하였는데, 뒤에 昌黎郡을 세웠다.
[] 이래로 羌族, 胡族, 鮮卑族으로서 항복한 자들을 대부분 변방 안의 여러 에 살게 하였는데, 그 뒤에 이민족들이 분노와 원한으로 인하여 자주 長吏(수령)를 살해하니, 점점 백성들의 폐해가 되었다.
侍御史 郭欽이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戎狄이 강포하고 추악하여 예로부터 患難이 되었습니다.注+巨良이니, 횡포함이다. 古猛이니, 추악한 모양이다. 나라 초기에 백성들이 적어서 서북의 여러 에 모두 오랑캐들이 거처하게 되었고,
안으로 京兆에까지 이르러 魏郡弘農에 왕왕 이들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이들이 복종하고 있으나 만약 100년 뒤에 兵亂警報가 있으면,
오랑캐 기병들이 平陽上黨에서 3일 안으로 孟津, 北地, 西河, 太原, 馮翊, 安定, 上郡까지 도달하여 모두 오랑캐의 조정이 될 것입니다.
마땅히 나라를 평정한 위세와 智謀가 있는 신하와 용맹한 장군의 지략을 써서 內郡에 있는 오랑캐들을 점차 변방으로 옮겨
사방 오랑캐들이 출입하는 禁令을 엄하게 하고 先王荒服의 제도를 밝혀야 하니, 이것이 萬代의 장구한 계책입니다.” 황제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注+
[] 揚州刺史 周浚이 진영을 秣陵으로 옮겼다.注+나라의 揚州壽春治所로 삼았는데, 나라가 나라를 점령하고서는 마침내 치소를 秣陵으로 옮겼다.
[] 나라 백성 중에 복종하지 않은 자들이 자주 침략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周浚이 모두 토벌하여 평정하고 나이 많은 노인들을 賓禮로 예우하고 준걸스러운 人才들을 찾아보고서 위엄과 은혜를 함께 행하니, 나라 사람들이 기뻐하고 복종하였다.


역주
역주1 選吳伎妾五千人入宮 : “이보다 앞서 한번은 ‘公卿의 딸을 뽑았다.’고 썼고 한번은 ‘양갓집의 딸을 취했다.’고 썼는데, 모두 비난한 것이다. 이때 다시 ‘吳나라의 伎妾을 뽑았다.’고 썼으니, 晉 武帝의 마음이 더욱 여색에 빠진 것이다. 그러므로 앞서 5천 명을 취한 것을 쓰지 않았는데, 이때에는 이것을 썼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미인을〉 가려 뽑았다.’고 쓴 것이 5번인데 진 무제가 3번을 차지하였다.(癸巳年(273) 조에 자세히 보인다.)[先是一書選公卿女矣 一書取良家女矣 皆譏也 於是復書選吳伎妾 晉武之志益荒矣 故前取五千人 不書 於此特書之 終綱目 書采選五 晉武居三焉(詳癸巳年)]” ≪書法≫
“成湯이 桀王을 추방한 뒤에 스스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여 위태롭게 여기고 조심해서 장차 깊은 못에 빠질 듯이 여긴다.’고 말하였는데, 晉 武帝는 吳나라를 평정하고서 곧장 잔치하고 놀았고, 심지어는 吳나라의 伎妾 5천 명을 뽑아 궁중에 들였으니, 이는 모두 멸망한 吳나라의 물건이다. 이미 妲己의 고사를 들어 이들을 죽여 吳나라 백성들을 위로하지 못하고 도리어 마침내 잘못된 전철을 따랐다. 또 더 나아가 마침내 여색에 빠져 병이 들어 목숨을 잃게 되었고, 육신이 미처 차가워지기도 전에 사직이 잿더미가 되고 생민들이 도탄에 빠졌다. 이것을 본 뒤에야 帝王이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노력한 것이 진실로 안일과 즐거움을 싫어하고 근심과 부지런함을 좋아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거하는 자리가 하늘의 지위이고 다스리는 바가 하늘의 직책이며 잘못을 저지른 자에게 형벌을 내리는 것을 하늘의 토벌이라 하고 훌륭한 자에게 상을 주는 것을 하늘의 명령이라 하여,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부지런히 정사를 하여 하늘과 함께 운행하는 것은 바로 사직과 백성을 위한 계책이다. 아! 진 무제가 만일 이 뜻을 알았다면 장차 이른 새벽부터 밤늦도록 부지런히 힘쓰느라 편안히 잠잘 겨를도 없었을 것이니, 어찌 뒤뜰에서 놀고 잔치하는 잘못이 있었겠는가. 이것을 책에 크게 쓴 것은 후대의 본보기로 삼은 것이다.[成湯放桀之後 自謂慄慄危懼 若將殞于深淵 晉武平吳甫爾 遽事宴遊 甚至選其伎妾五千入宮 此皆亡吳之物 旣不能擧妲己故事 誅之以弔吳民 反乃尋其覆轍 又甚益之 遂至沈湎成疾 以殞其軀 肉未及寒 社稷爲墟 生民塗炭 然後知帝王兢兢業業 固非惡佚樂而好憂勤也 所居天位 所治天職 刑曰天討 賞曰天命 夙寤晨興 與天同運 正所以爲社稷生靈計耳 嗚呼 晉武苟知此意 則將蚤夜孜孜 寢不遑安 烏有遊宴後庭之失哉 大書于冊 爲後鑑也]” ≪發明≫
역주2 伏兔 : 古代 수레의 부속 부품으로, 수레 곁채의 밑판과 車軸을 연결하는데, 형태가 엎드려 있는 토끼와 같아서 이렇게 부른 것이다.(≪周禮≫ 〈考工記 輈人〉)
역주3 (乎)[呼] : 저본에는 ‘乎’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의 註에 의거하여 ‘呼’로 바로잡았다.
역주4 禹貢의……리였다 : ≪書經≫ 〈夏書 禹貢〉에 왕성을 중심으로 사방 500리 간격으로 명칭을 달리하여 구분하였는데, 왕성이 포함된 맨 안쪽이 甸服이고, 그 다음이 차례대로 侯服, 綏服, 要服, 荒服인바, 황복에서 전복까지의 거리가 2,000리라고 한 것이다.
역주5 揚州刺史周浚 移鎭秣陵 : “晉代에는 刺史들 가운데에 기록할 만한 자는 모두 난을 다스린 것으로 일컬어졌고, 周浚으로부터 이하는 劉沈, 劉琨, 王遜, 賈疋(가아), 麴允, 祖逖, 陶侃, 周訪, 譙王 司馬丞, 段匹磾가 모두 칭찬할 만한 자이다. 明帝 이후로는 자사를 제수하고 파면하는 것이 〈황제에게서 결정되지 않고〉 대부분 國政을 집행하는 자의 뜻에서 나올 뿐이었다.[晉世刺史 其可書者 皆以戡亂稱 自周浚而下 劉沈劉琨王遜賈疋麴允祖逖陶侃周訪譙王丞段匹磾 皆可稱者也 明帝以後 刺史除罷 大扺出於柄國者之意而已矣]” ≪書法≫

자치통감강목(13) 책은 2020.12.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19 By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