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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20)

자치통감강목(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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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강목(20)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梁太宗簡文帝綱大寳元年이요 魏大統十六年이요 東魏武定八年이요 齊顯祖文宣帝高洋天保元年이라 ◑ 是歲 東魏亡하니 齊代하다
春正月 東魏高洋 自爲丞相都督中外諸軍錄尙書事하고 封齊王하다
霸先 發始興至大庾嶺注+① 胡三省曰 “大庾嶺, 在今南安軍大庾縣西南二十里.”하여는 蔡路養 拒之할새 其黨蕭摩訶 年十三이라 單騎出戰하니 無敢當者注+② 摩訶, 路養妻姪.러니
霸先擊之한대 路養敗走어늘 進軍南康한대 湘東王繹 承制하여 授霸先交州刺史하다
梁邵陵王綸 至江夏하여는 自稱都督中外諸軍承制하다
綸自鄱陽으로 進至九江하여는 尋陽王大心 以江州讓之어늘 綸不受하고 引兵西上하여 至江夏하여는 南平王恪 以郢州讓之어늘 亦不受한대 乃推綸爲假黄鉞都督承制하다
魏楊忠 圍安陸한대 柳仲禮馳歸救之注+① 晉志 “荊州江夏郡有安陸縣.”러니 諸將恐仲禮至하여 請急攻之어늘
忠曰 攻守勢殊하니 未可猝拔이요 若引日勞師하여 表裏受敵 非計也
南人 多習水軍하고 不閑野戰하나니 仲禮師在近路어든 吾出其不意하여 以奇兵襲之하면 彼怠我奮이라 一舉可克이니
克仲禮인댄 則安陸不攻自拔이요 諸城可傳檄定也라하고
乃選騎二千하여 銜枚夜進하여 敗仲禮於漴頭獲之하니 安陸竟陵 皆降이라 於是 漢東盡入于魏注+② 漴, 音崇, 又上降切. 漴頭, 地名也.하다
梁廣陵人來嶷 說前太守祖皓曰注+① 皓, 暅之子也. 董紹先輕而無謀하고 人情不附하니 襲而殺之 此壯士之任耳注+② 輕, 牽正切.
今欲糾帥義勇하여 奉戴府君하노니 若其克捷인댄 可立桓文之勲이요 必天未悔禍인댄 猶足爲梁室忠臣注+③ 春秋左氏傳隱公十二年, “天其以禮悔禍于許”, 此云必天未悔禍, 言假使果必天未改悔梁室之禍, 事或無成.이니라
皓曰 此僕所願也라하고 乃相與糾合勇士百餘人하여 襲廣陵하여 斬董紹先하고 馳檄遠近하여 推蕭勔爲刺史注+④ 勔, 勃之兄也.러니
景遣郭元建攻之한대 皓嬰城固守하다
魏楊忠乘勝하여 至石城하여 欲進逼江陵注+① 集覽 “郢州之理古石城也. 郡跨大江之東, 因山爲固.” 圖經 “‘子城三面墉基天造, 正西絶璧, 下臨漢江.’”이어늘 梁湘東王繹 遣舎人庾恪하여 說忠曰 詧來伐叔이어늘 而魏助之하니 何以使天下歸心이리오
忠遂停湕北이러니 繹請送質求和한대 魏人許之하여 乃盟而還注+② 湕, 居偃切. 湕北, 湕水之北也, 水出南郡.하다
胡氏曰 湘東責魏助姪伐叔 是矣어니와 已父被圍餓死而不救하고 兄制于賊手而不救하며 宗廟社稷日就亡滅而不救하니 則詧何有於叔哉
夫所惡於下者 無以事上인댄 則理順而人服矣 蕭繹 身負大罪하니 人得而誅之어늘 而魏師不能聲罪致討하니 亦可惜哉인저
侯景陷廣陵하여 殺梁祖皓하고 屠其城하다
◑ 三月 하다
侯景取梁主之女溧陽公主하여 甚愛之러니 請梁主褉飲樂遊苑할새 梁主聞絲竹하고 悽然泣下注+① 溧, 音栗. 溧陽, 丹邑, 溧水所出. 樂遊苑, 在玄武湖南.하더라
梁旱蝗하다
江南連年旱蝗호되 江揚尤甚이라 百姓流亡하여 草木根葉 食之皆盡하고 富室或衣羅綺懷金玉而死하니 白骨成丘러라
侯景性殘酷하여 於石頭 立大碓하여 有犯法者 擣殺之注+① 碓, 都隊切, 機舂也.하고 常戒諸將曰 破柵平城 當淨殺之하여 使天下知吾威名호리라하니
由是 百姓不附하고 又禁人偶語하니 犯者 刑及外族注+② 男子謂舅家爲外家, 婦人謂父母之家爲外家. 外族, 外家之族.이러라
夏四月 梁王僧辯 克湘州하고 殺河東王譽하다
湘東世子方等之死 湘州將周鐵虎功最多 譽委遇甚重이러니
至是하여는 僧辯得鐵虎하여 命烹之한대 呼曰 侯景未滅이어늘 奈何殺壯士오하니 僧辯 奇其言而釋之하다
繹聞高祖之喪호되 以長沙未下라하여 匿之러니 至是하여는 始發喪하고 刻檀爲高祖像하여 事之甚謹하여 動靜 必咨焉이러라
以天子制於賊臣이라하여 不肯從大寳之號하고 猶稱太淸四年하고 下令하여 大舉討侯景할새 移檄遠近하다
五月 梁鄱陽王範卒하다
範自樅陽으로 遣信告江州刺史尋陽王大心이어늘 大心以湓城處之러니 旣至 以晉熙爲晉州하고 遣其世子嗣하여 爲刺史注+① 晉安帝分廬江郡立晉熙郡.하다
大心政令不出一郡이라하여 遣兵擊莊鐵하니 嗣與鐵善이어늘 遣侯瑱하여 將兵助之한대 由是 二鎭相猜하여 無復討賊之志
大心使徐嗣徽 築壘稽亭하여 以備範한대 市糴不通注+② 稽亭渚在江州城東.하여 範數萬之衆 無所得食하여 多餓死 憤恚而卒하다
東魏徐之才宋景業 善圖讖하더니 因高德政하여 勸齊王洋受魏禪注+① 德政, 顥之子也. 洋之爲開府也, 德政爲管記, 由是親昵, 言無不盡.이어늘
洋以告婁太妃한대 太妃曰 汝父如龍하고 汝兄如虎로되 猶以天位不可妄據라하여 終身北面하더니 汝獨何人이완대 欲行舜禹之事乎아하다
洋以告之才한대 之才曰 正爲不及父兄이라 故宜早升尊位耳니라
洋鑄像卜之而成이어늘 以問肆州刺史斛律金한대 金固言不可하고 請殺景業等이어늘
洋以人心不壹이라하여 使德政如鄴察之라가 未還 洋擁兵而東하여 至平都城하여 召諸勲貴議之한대 莫敢對注+② 宋白曰 “遼州平城縣, 本漢湟縣地, 晉置武鄕縣, 此地屬焉. 隋開皇十六年, 於趙簡子所立平都故城, 置平城縣.”러니
長史杜弼曰 關西 國之勍敵注+③ 謂宇文氏也.이니 今若受禪인댄 彼必挾天子하고 稱義兵而東하리니 王何以待之乎注+④ 此天子謂西魏主.
徐之才曰 彼亦欲爲王所爲 縱其屈彊이나 不過隨我稱帝耳라하니 弼無以應이러라
德政至鄴하여는 公卿莫有應者러니 司馬子如逆洋於遼陽하여 固言未可注+① 遼陽縣自漢末以來屬樂平郡, 隋開皇十一年, 改曰遼山縣.호되 景業等 復勸之한대 洋乃發晉陽이라
東魏進洋하여 位相國하고 摠百揆하며 備九錫이어늘 洋至鄴하여 作圜丘하여 備法物하고 使侍中張亮等으로 見東魏主하여 逼以禪位한대
魏主斂容曰 推挹已久로니 謹當遜避注+② 推, 吐雷切. 挹, 遜也.호리라 乃下御坐하여 歩就東廊하여 詠范曄漢獻帝贊하고 求入與六宮别하니 舉宮皆哭注+③ 曄, 宋文帝時人. 其贊曰 “獻生不辰, 身播國屯, 終我四百, 永作虞賓.”이러라
直長趙道德 以故犢車一乘으로 送出雲龍門할새 百僚拜辭하고
遂遷于北城注+④ 長, 竹兩切. 直長, 官名. 凡殿中諸局, 各有奉御, 有直長. 趙道德, 蓋尙乘直長也, 亦高氏之私人.하여 遣彭城王韶等하여 奉璽綬禪位于齊한대 齊王洋卽皇帝位于南郊하다
自魏敬宗以來 百官絶祿이러니 至是始復給之하고 封東魏主爲中山王하여 待以不臣之禮하고
追尊獻武王文襄王하여 皆爲皇帝호되 獻武 廟號高祖 文襄 廟號世宗이라하고 尊王太后爲皇太后하고 降魏朝封爵有差注+⑤ 獻武, 歡諡. 文襄, 澄諡. 王太后卽婁氏.하다
梁境唯荆益所部 尙完實이러니 益州刺史武陵王紀 移告征鎭하고 使世子圓照 帥兵受湘東王節度注+① 移, 箋․表之類也. 官曹․公府不相臨敬, 則爲移文.한대
繹授以信州刺史하여 令屯白帝하여 未許東下注+② 梁置信州於白帝.하다
梁侯瑱殺莊鐵하고 據豫章하다
鄱陽王範 旣卒 侯瑱往依莊鐵한대 鐵忌之어늘 瑱不自安하여 詐引鐵謀事라가 因殺之하고 自據豫章하다
齊立子殷하여 爲太子하다
齊主娶趙郡李希宗之女하여 生子殷及紹德하고 又納段韶之妹러니
及將建中宮 高隆之高德政 欲結勲貴之援하여 乃言漢婦人 不可爲天下母라호되 不從하고 乃立李氏爲后하고 以其子殷으로 爲太子하다
魏立蕭詧하여 爲梁王하다
魏人欲令岳陽王詧 發哀嗣位호되 詧辭어늘 乃遣使冊命詧하여 爲梁王하고 建臺하여 置百官하다
燕昭成帝奔高麗注+① 昭成, 馮弘諡.할새 使其族人馮業으로 以三百人浮海奔宋하여 因留新會하니
自業至孫融 世爲羅州刺史注+② 晉恭帝元熙二年, 分南海郡立新會郡. 五代志 “高涼郡石龍縣, 舊置羅州.”하고 融子寳爲高涼太守注+③ 漢合浦郡高涼縣, 孫吳立郡, 梁置高州.러니
高涼洗氏世爲蠻酋하여 部落十餘萬家注+④ 洗, 音銑. 有女하여 多籌略하고 善用兵하니 諸洞皆服其信義어늘 融聘以爲寳婦하니
融雖世爲方伯이나 非其土人이라 號令不行하더니 洗氏約束本宗하여 使從民禮하고 參決辭訟하여 雖親戚이라도 無所縱舍하니 由是 馮氏始得行其政이러라
高州刺史李遷仕遣使召寳注+① 五代志 “高涼郡, 梁置高州.”한대 寶欲往이어늘 洗氏止之曰
刺史被召援臺 乃稱有疾하고 鑄兵聚衆而後 召君하니 此必欲質君하여 以發君之兵也 願且無往하여 以觀其變하라
數日 遷仕果反하여 遣主帥杜平虜하여 將兵逼南康이어늘 陳霸先使周文育으로 擊之러니
洗氏謂寳曰 平虜今與官軍相拒하니 勢不得還이요 遷仕在州하여 不能爲也
君若自往하면 必有戰鬪 宜遣使하여 卑辭厚禮 告之曰 身未敢出하여 欲遣婦參이라하면 彼必喜而無備하리니
我將千餘人하여 歩擔雜物하여 唱言輸賧하고 得至柵下하면 破之必矣리라하니 寶從之注+② 賧, 吐濫切. 夷人以貨財贖罪也.
遷仕果不設備어늘 洗氏襲擊大破之하니 遷仕走保寧都어늘 文育亦擊走平虜하고 據其城注+③ 吳分漢贛縣, 立陽都縣, 晉武太康元年, 更名寧都.이라
洗氏與霸先으로 會於灨石이러니 還謂寶曰 陳都督 非常人也 甚得衆心하니 必能平賊이니 宜厚資之注+④ 灨, 古送․古暗二切. 灨石, 地名, 在南康軍.라하더라
梁王詧入朝于魏하다
◑ 秋七月 侯景陷江州及豫章하다
東魏遣牒雲洛等하여 迎鄱陽世子嗣하여 使鎭皖城이어늘 未行注+① 雲當作云. 牒云, 虜複姓. 皖, 戶板切. 皖城, 廬江皖縣之城. 侯景遣任約하여 將兵寇江州한대 洛等引去하니 嗣失援敗死
約遂略地至湓城하니 尋陽王大心 出兵戰敗 帳下 猶有戰士千餘人이라 咸勸大心走保建州호되 大心 不能用하여 遂以州降注+② 五代志 “弋陽郡殷城縣, 舊曰苞信, 梁置義城郡及建州.” 帳下勸大心走保之者, 便於入齊也.이어늘
景遣于慶하여 略地至豫章하여는 侯瑱力屈하여 亦降之하니 景以瑱同姓이라하여 待之甚厚하여 質其妻子하고 遣隨慶하여 徇蠡南諸郡注+③ 蠡, 音禮. 蠡南諸郡, 指彭蠡湖以南諸郡, 如豫章․廬陵․安成․臨川․南康․是也.이러니
巴山人黄法𣰋有勇力하더니 合徒衆하여 保鄕里注+④ 劉昫曰“吳分臨汝爲新建縣, 梁置巴山郡.” 𣰋, 巨俱切.어늘 太守賀詡 下江州할새 命法𣰋하여 監郡事하여 屯新淦注+⑤ 自巴山順流赴江州爲下. 淦, 古暗切. 新淦縣, 漢屬豫章郡, 五代志 “屬廬陵郡.”하니 慶分兵襲之한대 法𣰋敗之어늘
陳霸先使周文育으로 進軍擊慶하니 法𣰋引兵會之하다
齊定律하고 始立九等戶하다
齊主初立 勵精爲治러니 趙道德以事屬黎陽太守房超한대 超不發書하고 棓殺其使注+① 屬, 之欲切, 下同. 魏收志 “孝昌中, 分汲郡置黎陽郡, 屬司州, 治黎陽城.” 棓, 與棒同, 步項切, 打也, 又木杖也. 使, 疏吏切, 下同.어늘 齊主善之하여 命守宰하여 各設棓以誅屬請之使러니
久之 中郞宋軌奏曰注+② 中郞, 當作郞中. 若受使請賕 猶致大戮인댄 身爲枉法하면 何以加罪리오 乃罷之하다
尋詔僕射薛琡等하여 取魏麟趾格討論하여 損益以爲齊律하고
簡練六坊之人호되 每一人必當百人하여 任其臨陳必死然後取之하여 謂之百保鮮卑注+③ 魏․齊之間, 六軍宿衛之士, 分爲六坊. 任, 保任也. 百保, 言其勇可保一人當百人也. 高氏以鮮卑創業, 當時號爲健鬪, 故衛士皆用鮮卑.라하고
又簡華人勇力者하여 謂之勇士라하여 以備邊要注+④ 邊要, 邊上要害之地.하고
始立九等之戶하여 富者 稅其錢하고 貧者 役其力注+⑤ 戶有上․中․下三等, 每等又分上․中․下, 是爲九等.하다


梁나라 太宗 簡文帝 蕭綱 大寳 원년이고, 西魏 文帝 元寶炬 大統 16년이고, 東魏 孝静帝 元善見 武定 8년이고, 北齊 顯祖 文宣帝 高洋 天保 원년이다. 이해에 東魏가 멸망하였으니, 北齊가 이를 대신하였다.
【綱】 봄 정월에 東魏의 高洋이 스스로 丞相 都督中外諸軍事 錄尙書事가 되고 齊王에 봉하였다.
【綱】 梁나라가 陳霸先을 交州刺史로 삼았다.
【目】 陳霸先이 始興을 떠나 大庾嶺에 도착하자注+① 胡三省이 말하기를 “大庾嶺은 지금 南安軍 大庾縣 서남쪽 20리 부근에 있다.”라고 하였다. 蔡路養이 그를 막았는데, 그의 무리 蕭摩訶가 나이 열셋으로 單騎로 나가 싸우니, 감히 당해내는 사람이 없었다.注+② 蕭摩訶는 蔡路養의 처조카이다.
진패선이 공격하자 채노양이 패배하여 달아나니, 〈진패선이〉 南康으로 진군하였는데, 湘東王 蕭繹이 承制(황제의 권한으로 일을 편의대로 시행함)하여 진패선을 交州刺史에 제수하였다.
【綱】 梁나라 邵陵王 蕭綸이 江夏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都督中外諸軍事라 일컫고 承制하였다.
【目】 蕭綸이 鄱陽에서 나아가 九江에 이르자 尋陽王 蕭大心이 江州를 그에게 양보하였는데 소륜이 받지 않았고, 〈소륜이〉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올라가서 江夏에 이르자, 南平王 蕭恪이 郢州를 그에게 양보하였는데, 소륜이 역시 받지 않으니, 마침내 소륜을 추대하여 假黄鉞 都督으로 삼고 承制하게 하였다.
【綱】 西魏 사람들이 安陸을 포위하여 梁나라 司州刺史 柳仲禮를 사로잡고 드디어 漢水 동쪽 지역을 차지하였다.
【目】 西魏의 楊忠이 安陸을 포위하자 柳仲禮가 말을 달려 돌아와 구원하려고 하였는데,注+① ≪晉書≫ 〈地理志〉에 “荊州 江夏郡에 安陸縣이 있다.”라고 하였다. 〈서위의〉 諸將들이 유중례가 오는 것을 두려워하여 속히 유중례를 공격하자고 요청하였다.
양충이 말하기를 “공격과 수비는 형세가 다르니, 〈안륙은〉 갑자기 함락시킬 수 없고, 만약 시일을 끌며 군대를 수고롭게 한다면 안팎으로 적의 공격을 받게 되니 좋은 계책이 아니요.
남방 사람들은 대부분 水戰에 익숙하고 들판에서의 전투에 익숙하지 않으니, 유중례의 군대가 가까운 거리에 접근했을 때 내가 그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곳으로 나가 奇兵으로 습격하면 저들은 나태하고 나는 분발하여 한 번에 이길 수 있소.
유중례를 이기면 안륙은 공격하지 않아도 절로 함락될 것이며, 여러 城은 檄文만 전해도 평정할 수 있소.”라고 하였다.
마침내 기병 2천 명을 선발하여 재갈을 물리고 밤에 나아가서 漴頭에서 유중례를 패배시키고 사로잡으니, 안륙과 竟陵이 모두 항복하였다. 이에 漢水 동쪽 지역은 다 西魏의 영역으로 들어갔다.注+② 漴의 음은 崇이며, 또 上降의 切이다. 漴頭는 지명이다.
【綱】 梁나라 祖皓가 廣陵에서 군사를 일으켜 侯景의 부하 장수 董紹先을 죽였다.
【目】 梁나라 廣陵 사람 來嶷이 전 廣陵太守 祖皓를 설득하기를注+① 祖皓는 祖暅(조긍)의 아들이다. “董紹先은 경솔하면서 꾀가 없고 인심이 복종하지 않으니, 그를 습격하여 죽이는 것이 壯士의 임무입니다.注+② 輕(경솔하다)은 牽正의 切이다.
지금 의롭고 용감한 자들을 규합하고 인솔하여 府君(太守의 尊稱)을 받들고 싶으니, 만약 승리한다면 桓公, 文公과 같은 공훈을 세울 수 있을 것이고, 필시 하늘이 내린 재앙을 후회하지 않아 〈梁나라를 돌보지 않는다면〉 오히려 양나라 황실의 충신이 되기에 충분합니다.”라고 하였다.注+③ ≪春秋左氏傳≫ 隱公 12년에, “하늘이 혹시 禮로 대우하여 許國에 내린 재앙을 후회한다면”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필시 하늘이 〈허국에 내린〉 재앙을 후회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니, 가령 필시 하늘이 梁나라에 내린 재앙을 후회하지 않는다면 일이 혹여 실패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조호가 말하기를 “이는 내가 원하던 일이요.”라고 하고는 마침내 서로 용맹한 병사 1백여 명을 규합하여 광릉을 습격하여 동소선을 죽이고, 먼 지역과 가까운 지역에 檄文을 전하여 蕭勔을 추대하여 刺史로 삼았다.注+④ 蕭勔은 蕭勃의 형이다.
侯景이 郭元建을 파견하여 공격하였는데, 조호는 籠城하여 굳게 지켰다.
【綱】 2월에 西魏의 군대가 나아가서 石城에 주둔하였는데, 梁나라 湘東王 蕭繹이 맹약을 청하자, 서위의 군대가 돌아갔다.
【目】 西魏의 楊忠이 승리의 기세를 타서 石城에 도착하여 나아가서 江陵을 압박하려 하자,注+① ≪資治通鑑綱目集覽≫에 “〈石城은〉 지금 郢州의 理古石城이다. 郡이 大江의 동쪽을 끼고 있는데, 산으로 인해 견고한 지형이 된다.”라고 하였다. 〈圖經〉에 “‘의 삼면을 두른 성벽의 기초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졌는데, 정면 서쪽은 절벽이며 아래로는 漢江을 굽어보고 있다.’라고 하였다.” 하였다. 湘東王 蕭繹이 舍人 庾恪을 보내어 양충을 설득하기를 “蕭詧이 와서 숙부를 공격하는데 서위가 그 일을 돕고 있으니, 어떻게 천하 사람들의 마음을 귀의하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양충이 마침내 湕水의 북쪽에서 멈추었는데, 소역이 인질을 보내어 화친을 요청하자, 서위의 사람들이 이를 허락하여 맹약을 맺고 돌아갔다.注+② 湕은 居偃의 切이다. ‘湕北’은 湕水의 북쪽으로, 물줄기가 南郡에서 나온다.
【目】 胡氏(胡寅)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湘東王이 西魏에게 조카가 숙부를 치는 것을 도운 일을 질책한 것은 옳다. 그러나 이미 아버지(蕭衍)가 포위를 당해 굶어 죽어도 구원하지 않고, 형(蕭綱)이 적(侯景)의 손에 제압을 당해도 구원하지 않으며, 종묘사직이 나날이 멸망해가는데도 구원하지 않았으니, 蕭詧이 숙부에게 무슨 거리낌이 있겠는가.
이치가 순하여 사람들이 복종하게 된다. 소역은 자신이 큰 죄를 지었으니 사람마다 그를 주벌할 수 있는데, 서위의 군사들이 그의 죄를 드러내어 토벌하지 않았으니, 역시 애석하다.”
【綱】 侯景이 廣陵을 함락하여 梁나라의 祖皓를 죽이고, 그 성을 도륙하였다.
【綱】 3월에 梁主(簡文帝 蘇綱)가 樂遊苑에서 을 열었다.
【目】 侯景은 梁主(蕭綱)의 딸 溧陽公主에게 장가들어 그녀를 매우 총애하였다. 〈후경이〉 梁主에게 청하여 樂遊苑에서 褉飲을 열었는데, 梁主가 악기 연주소리를 듣고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注+① 溧의 음은 栗이다. 溧陽은 丹陽邑으로, 溧水가 발원하는 곳이다. 樂遊苑은 玄武湖의 남쪽에 있다.
【綱】 梁나라가 가뭄과 메뚜기의 피해를 입었다.
【目】 당시에 江南은 해를 이어 가뭄과 메뚜기의 피해가 있었는데, 江州와 揚州가 더욱 심하였다. 백성들은 떠돌아다니며 풀뿌리와 나뭇잎을 먹어서 모두 없앴고, 부유한 집에서도 비단옷을 입고 황금과 옥을 품고 있으면서도 굶어 죽으니 백골이 언덕처럼 쌓였다.
侯景은 성격이 잔혹하여 石頭에 큰 방아를 세워놓고 법을 어긴 사람이 있으면 그를 찧어서 죽이고注+① 碓는 都隊의 切이니, 방아이다. 항상 장수들에게 훈계하기를 “목책을 부수고 城을 평정하면 마땅히 깨끗이 죽여 없애서 천하 사람들에게 나의 위세와 명성을 알도록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해 백성들은 그에게 의탁하지 않았고, 또 사람들이 모여서 말하는 것을 금지하였는데, 이를 어긴 사람은 형벌이 외척에까지 미쳤다.注+② 남자의 경우에는 처가를 일러 外家라 하고, 부인의 경우에는 부모의 집을 일러 外家라 한다. ‘外族’은 외가의 친족이다.
【綱】 여름 4월에 梁나라 王僧辯이 湘州를 함락하고 河東王 蕭譽를 죽였다.
【目】 애초에 湘東王의 世子 蕭方等의 죽음에는 湘州의 장수 周鐵虎의 공이 가장 많았기에 蕭譽가 그를 매우 중하게 대우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王僧辯이 주철호를 잡아 그를 烹刑에 처하라고 명하였는데, 〈주철호가〉 소리치며 말하기를 “侯景이 아직 죽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壯士를 죽인단 말입니까.”라고 하니, 왕승변이 그 말을 기특하게 여겨 풀어주었다.
【綱】 梁나라 湘東王 蕭繹이 檄文을 보내어 侯景을 토벌하였다.
【目】 蕭繹은 高祖(梁 武帝 蕭衍)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長沙가 아직 함락되지 않아 이 사실을 숨겼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發喪하고 박달나무를 깎아서 高祖의 형상을 만들어 공손하게 섬겼으며, 모든 일에 반드시 자문을 구하였다.
〈소역은〉 天子가 賊臣(侯景)에게 통제를 받는다고 여겨서 大寳(梁 簡文帝 연호)라는 연호를 따르려 하지 않고 여전히 ‘太淸(양 무제 연호) 4년’이라 칭하고, 명령을 내려 크게 군사를 일으켜 후경을 토벌하도록 하면서 먼 곳과 가까운 곳에 격문을 보냈다.
【綱】 5월에 梁나라 鄱陽王 蕭範이 卒하였다.
【目】 蕭範이 樅陽에서 편지를 보내어 江州刺史 尋陽王 蕭大心에게 알렸는데, 소대심은 그를 湓城에 머물게 하였다. 〈소범이〉 도착하고 난 뒤에 晉熙를 晉州로 바꾸고, 世子 蕭嗣를 파견하여 刺史로 삼았다.注+① 晉 安帝(司馬德宗)때에 廬江郡을 나누어 晉熙郡을 설립하였다.
소대심은 명령이 시행되는 곳이 한 개의 郡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여겨서 군사를 파견하여 莊鐵을 공격하였는데, 소사는 장철과 평소 사이가 좋았던 터라 侯瑱을 파견하여 군사들을 이끌고 장철을 돕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두 鎭營은 서로 사이가 벌어져 다시 역적을 토벌할 뜻을 지니지 않았다.
소대심이 徐嗣徽를 시켜서 稽亭에 보루를 쌓고 소범을 대비하도록 하였는데, 곡식을 매입하여 유통하지 못하였다.注+② 稽亭渚는 江州城 동쪽에 있다. 그리하여 소범이 거느리던 수만 명의 무리가 먹을 것을 얻지 못하여 대부분 굶어 죽자, 소범은 분을 못 이기고 죽었다.
【綱】 齊王 高洋이 皇帝라 일컫고, 東魏主(孝靜帝 元善見)를 폐위하여 中山王으로 삼았다.
【目】 東魏의 徐之才와 宋景業이 圖讖을 잘하였는데, 高德政을 통해 齊王 高洋에게 禪讓을 받도록 권하였다.注+① 高德政은 高顥의 아들이다. 高洋이 官府를 열었을 때 고덕정이 管記를 지냈는데, 이로 말미암아 친밀하여 하지 못하는 말이 없었다.
고양이 婁太妃에게 알리자 太妃가 말하기를 “그대의 아버지는 용과 같고 그대의 형은 호랑이와 같았지만, 오히려 天子의 지위를 함부로 차지하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北面하였는데, 그대는 유독 어떤 사람이기에 舜임금과 禹임금이 하였던 일을 행하려 하는가!”라고 하였다.
고양이 서지재에게 알리니, 서지재가 말하기를 “바로 아버지와 형에 미치지 못하므로 빨리 높은 자리에 올라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고양이 神像을 주조하여 이 일을 점쳐보고 성공으로 나오자 마침내 肆州刺史 斛律金에게 물었는데, 곡률금이 굳게 불가하다고 말하고 송경업 등을 죽이라고 청하였다.
고양은 인심이 통일되지 않았다고 여겨 고덕정을 鄴城으로 보내어 살피도록 하고는 아직 돌아오기 전에 고양이 군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가서 平都城에 이르러 공훈이 있는 귀족들을 불러 그 일을 논의하니, 감히 대답하지 못하였다.注+② 宋白이 말하기를 “遼州 平城縣은 본래 漢나라 湟縣 지역인데, 晉나라 때에는 武鄕縣을 설치하였으니, 이 지역이 그에 속하였다. 隋나라 開皇 16년(596)에 趙簡子가 세웠던 平都故城에 平城縣을 설치하였다.”라고 하였다.
長史 杜弼이 말하기를 “關西에는 나라의 강적이 있는데注+③ 〈‘國之勍敵’은〉 宇文氏를 말한다. 지금 만일 禪讓을 받는다면 저들이 天子를 끼고 義兵이라고 일컬어 동쪽으로 향할 것이니, 왕께서는 어떻게 그들을 대적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注+④ 여기에서 天子는 西魏主(元寶炬)를 말한다.
서지재가 말하기를 “그들 역시 왕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하고 싶어 하니, 비록 그들이 완강하게 복종하지 않더라도 그들 역시 우리를 따라서 皇帝를 칭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두필이 응대하지 못하였다.
【目】 高德政이 鄴城에 도착하니, 公卿들 중에 호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司馬子如가 遼陽에서 高洋을 맞이하고는 〈禪讓을 받음은〉 아직 안 된다고 굳게 말하였는데,注+① 遼陽縣은 漢나라 말기 이후로 樂平郡에 속하였는데, 隋나라 開皇 11년(591)에 遼山縣으로 바뀌었다. 宋景業 등이 다시 〈천명을 받아야 한다고〉 권하자, 고양이 마침내 晉陽에서 출발하였다.
東魏에서는 고양의 지위를 相國으로 올리고 百官을 거느리며 九錫을 갖추게 하였는데, 고양은 鄴城에 도착하여 圜丘를 만들고 法物을 갖추고 侍中 張亮 등을 시켜서 東魏主를 알현하도록 하여 禪位하도록 압박하였다.
東魏主가 용모를 단정히 하며 말하기를 “겸손히 사양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삼가 마땅히 양위하도록 하겠다.”라고 하고,注+② 推(사양하다)는 吐雷의 切이며, 挹은 사양하다는 뜻이다. 마침내 御坐에서 내려와 걸어서 東廊으로 가서 范曄이 漢 獻帝를 두고 지은 贊을 읊고는 들어가 六宮(妃嬪들)과 이별하기를 바라자, 후궁들이 모두 통곡하였다.注+③ 范曄은 宋 文帝 때 사람이다. 그의 贊에 “獻帝는 태어남이 때를 만나지 못하여 자신의 몸은 떠돌고 나라는 무너졌네. 우리 4백 년 왕조를 끝마치고 영원히 되었네.”라고 하였다.
直長 趙道德이 옛 犢車 한 대를 가지고 雲龍門으로 나가는 것을 전송할 적에 百官이 엎드려 작별하였다.
〈東魏主가〉 마침내 北城으로 거처를 옮겨注+④ 長(우두머리)은 竹兩의 切이다. 直長은 관직명이다. 궁궐의 여러 부서에는 각각 奉御와 直長이 있는데, 趙道德은 尙乘直長으로, 또한 高氏의 私人이다. 彭城王 元韶 등을 보내어 玉璽와 印綬를 받들어 齊王(고양)에게 선양하도록 하니, 제왕 고양이 南郊에서 皇帝의 자리에 올랐다.
北魏 敬宗 이래로 백관의 녹봉이 끊어졌으나 이때부터 비로소 다시 지급되었으며, 東魏主를 中山王으로 책봉하여 신하로서의 예절을 하지 않도록 대우하였다.
獻武王(高歡)과 文襄王(高澄)을 추존하여 모두 황제로 삼되, 獻武王의 廟號는 高祖로 하고 文襄王의 廟號는 世宗으로 하였으며, 王太后를 받들어 皇太后로 삼고, 東魏 조정의 봉작을 깎아내려 차등이 있도록 하였다.注+⑤ 獻武는 高歡의 시호이고, 文襄은 高澄의 시호이다. 王太后는 바로 婁氏이다.
【綱】 梁나라 武陵王 蕭紀가 世子 蕭圓照를 보내어 군사를 인솔하고 구원하게 할 적에 〈蕭繹이〉 白帝에 주둔하게 하였다.
【目】 당시에 梁나라 경내에서 荆州와 益州의 관할 지역이 여전히 온전하고 충실하였는데, 益州刺史 武陵王 蕭紀가 에게 문서를 보내어 알리고 世子 蕭圓照를 시켜서 군사를 인솔하고 湘東王 蕭繹의 지휘를 받도록 하였다.注+① 移는 箋․表의 종류이다. 官曹와 公府에서 서로 높이지 않는 경우에는 移文을 사용한다.
소역은 〈소원조를〉 信州刺史에 임명하여 白帝에 주둔하도록 하고 동쪽으로 내려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注+② 梁나라가 白帝에 信州를 설치하였다.
【綱】 梁나라 侯瑱이 莊鐵을 죽이고 豫章을 점거하였다.
【目】 鄱陽王 蕭範이 卒하고 나자 侯瑱이 莊鐵에게 가서 의지하였다. 장철이 그를 꺼리자 후진이 스스로 불안하여 장철을 속여서 일을 모의하는 데에 끌어들였다가 이로 인해 그를 죽이고 스스로 豫章을 점거하였다.
【綱】 北齊에서 〈齊主(高洋)의〉 아들 高殷을 세워 太子로 삼았다.
【目】 齊主는 趙郡 사람 李希宗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高殷과 高紹德을 낳았고, 또 段韶의 여동생을 맞아들였다.
中宮을 세우려고 할 적에 高隆之와 高德政이 공로가 있는 귀족들의 지원을 받고자 하여 마침내 말하기를 “漢族의 부인은 천하 사람들의 어머니가 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으나, 〈齊主가〉 따르지 않고는 마침내 李氏를 세워 황후로 삼고 그의 아들 고은을 太子로 삼았다.
【綱】 西魏가 蕭詧을 세워 梁王으로 삼았다.
【目】 西魏 사람들이 岳陽王 蕭詧을 시켜서 〈梁 武帝의〉 發喪을 하고 지위를 잇게 하려고 하였으나 소찰이 사양하자, 이에 사신을 보내어 소찰에게 冊命을 내려 梁王으로 삼고 臺省을 건립하고 百官을 두었다.
【綱】 梁나라 高州刺史 李遷仕가 반란을 일으키자, 高涼太守 馮寳의 아내 洗氏가 토벌하여 그를 패퇴시켰다.
【目】 애초에 燕나라(北燕) 昭成帝(馮弘)가 고구려로 달아날 적에注+① 昭成帝는 馮弘의 諡號이다. 그의 친족 馮業을 시켜서 300명을 데리고서 바다에 배를 띄워 宋나라(劉宋)로 달아나도록 하였는데, 그대로 新會에 머물렀다.
풍업에서 손자 馮融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羅州刺史가 되었으며,注+② 晉나라 恭帝 元熙 2년(420)에 南海郡을 나누어 新會郡을 세웠다. ≪五代志≫에 “高涼郡 石龍縣에 옛날에 羅州를 설치하였다.”라고 하였다. 풍융의 아들 馮寳는 高涼太守가 되었다.注+③ 漢나라 合浦郡 高涼縣 지역에 孫吳(삼국시대 吳나라) 때에 郡을 세웠고, 梁나라 때에 高州를 설치하였다.
高涼 사람 洗氏는 대대로 蠻族의 추장이 되어 부락은 십여만 가구였으며,注+④ 洗은 음이 銑이다. 딸이 있는데 책략이 많고 用兵을 잘하여 여러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녀의 信義에 감복하자, 풍융이 그녀를 풍보의 아내로 삼았다.
풍융이 비록 여러 대에 걸쳐 方伯이 되었으나 그곳의 토착민이 아니었기에 號令이 시행되지 않았는데, 선씨가 本家의 친족을 단속하여 백성들에게 예절을 따르도록 하고, 訟事에 참여하여 결정하여 비록 친척이라도 놓아주는 일이 없었으니, 이로 말미암아 馮氏가 비로소 정치를 시행할 수 있었다.
【目】 高州刺史 李遷仕가 사신을 보내어 馮寳를 불렀는데,注+① ≪五代志≫에 “高涼郡은 梁나라 때에 高州를 설치하였다.”라고 하였다. 풍보가 가려고 하자 洗氏가 그를 저지하면서 말하기를
“刺史가 臺城을 구원하도록 부름을 받았을 때 질병이 있다고 핑계를 대고는 병기를 만들고 무리를 모은 뒤에 그대를 불렀으니, 이는 반드시 그대를 인질로 삼고 그대의 군대를 움직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우선 가지 말고 상황의 변화를 관망하십시오.”라고 하였다.
며칠이 지나 이천사가 과연 반란을 일으켜 主帥 杜平虜를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南康을 압박하도록 하자, 陳霸先이 周文育을 시켜 그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선씨가 풍보에게 말하기를 “두평로가 지금 官軍과 서로 맞서고 있으니 형세상 군대를 돌릴 수 없고, 이천사는 高州에 있어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그대가 만일 스스로 가면 반드시 전투가 일어날 것이니, 마땅히 사신을 보내어 겸손한 말과 후한 예물로 그에게 고하기를 ‘제가 감히 나갈 수가 없어 아내를 보내어 찾아뵙도록 하려 합니다.’라고 하면, 그가 반드시 기뻐하고 대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천여 명을 거느리고 가서 여러 물건을 지고 걸어가면서 재물을 바쳐 속죄한다고 말을 하고 목책 아래에 도달할 수 있게 되면 분명히 그를 격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풍보가 그녀의 말대로 하였다.注+② 賧(속바치다)은 吐濫의 切이니, 夷人이 재물을 가지고 속죄하는 것이다.
이천사가 과연 대비를 갖추지 않았는데 선씨가 습격하여 크게 격파하니, 이천사는 달아나서 寧都를 지켰다. 주문육 역시 두평로를 공격하여 패주시키고 그의 城을 점거하였다.注+③ 吳나라가 漢나라의 贛縣을 나누어 陽都縣을 설치하였는데, 晉 武帝 太康 원년(280)에 寧都로 이름을 고쳤다.
선씨가 진패선과 灨石에서 만났다가 돌아와서 풍보에게 말하기를 “陳都督(진패선)은 보통 사람이 아니기에 여러 사람의 마음을 많이 얻었으니, 반드시 역적을 평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땅히 그를 후하게 도와야 합니다.”라고 하였다.注+④ 灨은 古送과 古暗의 두 가지 切이다. 灨石은 지명으로, 南康軍에 있다.
【綱】 梁王 蕭詧이 西魏로 들어가 조회하였다.
【綱】 가을 7월에 侯景이 江州와 豫章을 함락하였다.
【目】 애초에 東魏에서 牒雲洛 등을 보내어 鄱陽王의 世子 蕭嗣를 맞이하여 皖城에 鎭守하게 하였는데, 〈소사가〉 출발하기 전에注+① 雲은 云이 되어야 하니, 牒云은 오랑캐의 複姓이다. 皖은 戶板의 切이다. 皖城은 廬江 皖縣의 城이다. 侯景이 任約을 보내어 병사를 이끌고 江州를 공격하자, 첩운락 등이 몸을 빼어 떠나니, 소사는 마침내 원조해줄 세력을 잃게 되어 패배하여 죽었다.
임약이 드디어 땅을 경략하여 湓城에 도착하자, 尋陽王 蕭大心이 군대를 출동시켜 싸워서 패배하였지만, 휘하에는 아직도 戰士 천여 명이 있었기에 모두 소대심에게 권하여 달아나 建州를 지키라고 하였다. 그러나 소대심이 〈그 계책을〉 쓰지 못하고 마침내 江州를 가지고 항복하였다.注+② ≪五代志≫에 “弋陽郡 殷城縣은 옛날에 ‘苞信’이라고 하였는데, 梁나라 때에 義城郡과 建州를 설치하였다.”라고 하였다. 帳下(휘하의 사람)들이 蕭大心에게 달아나서 〈建州를〉 지키라고 권한 것은 北齊로 들어가기 편리하기 때문이다.
후경이 于慶을 보내어 땅을 경락하여 豫章에 도착하자, 후진이 힘에 부쳐 역시 그에게 항복하니, 후경은 侯瑱이 同姓이라는 이유로 아주 후하게 대우하였으며, 그의 처자를 인질로 삼고 우경을 따라 함께 보내어 彭蠡湖 이남에 있는 여러 郡을 순시하도록 하였다.注+③ 蠡의 음은 禮이다. 蠡南의 諸郡은 彭蠡湖 이남의 여러 郡을 가리키니, 豫章, 廬陵, 安成, 臨川, 南康과 같은 지역이 이곳이다.
巴山 사람 黄法𣰋는 용력이 있었는데, 무리를 모아서 鄕里를 지켰다.注+④ 劉昫가 말하기를 “吳나라 때에는 臨汝를 나누어 新建縣을 만들었고, 梁나라 때에는 巴山郡을 설치하였다.”라고 하였다. 𣰋는 巨俱의 切이다. 太守 賀詡가 江州로 내려갈 적에 황법구에게 명을 내려 郡의 업무를 감독하게 하여 新淦에 군대를 주둔시키자,注+⑤ 巴山에서 물길을 따라 江州로 나아가기에 내려감[下]이 된다. 淦은 古暗의 切이다. 新淦縣은 漢나라 때에 豫章郡에 속했는데, ≪五代志≫에는 “廬陵郡에 속한다.”라고 하였다. 우경이 군대를 나누어 기습하였는데, 황법구가 그를 패퇴시켰다.
陳霸先이 周文育에게 군대를 전진시켜 우경을 치도록 하니, 황법구가 군대를 이끌고 그들과 회합하였다.
【綱】 北齊가 법률을 제정하고 처음으로 9등급의 戶를 세웠다.
【目】 齊主(高洋)가 처음 즉위하였을 때 힘을 쏟아 정치를 하였다. 趙道德이 黎陽太守 房超에게 어떤 일을 부탁하자 방초가 편지를 열어 보지도 않고 그 使者를 몽둥이로 쳐서 죽였는데,注+① 屬(부탁하다)은 之欲의 切이니, 아래도 동일하다. 魏收의 ≪魏書≫ 〈地形志〉에 “孝昌 연간(525~528)에 汲郡을 나누어 黎陽郡을 설치하여 司州에 속하게 하였으며, 黎陽城에 治所를 두었다.”라고 하였다. 棓(몽둥이)는 棒과 동일하니, 步項의 切로, 때린다는 뜻이며, 또 몽둥이라는 뜻이다. 使(사신)는 疏吏의 切이니, 아래도 동일하다. 齊主가 이를 잘한 일이라고 여겨 守宰들에게 명하여 각각 몽둥이를 마련하여 청탁을 하러 오는 使者를 죽이도록 하였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中郎 宋軌가 상주하기를注+② 中郞은 郞中이 되어야 한다. “만약 사신이 청탁하는 뇌물을 받았을 적에 오히려 주살을 당한다면 몸소 법을 어긴 경우에는 무슨 죄를 더해야 하겠습니까!”라고 하니, 마침내 그 일을 철폐하였다.
이윽고 僕射 薛琡 등에게 조서를 내려 東魏의 을 따라 토론하여 덜어내거나 보태게 하여 北齊의 법률을 만들었고,
6坊에 있는 사람을 가려 뽑되, 한 사람마다 반드시 1백 명을 담당하게 하여 그에게 陣地에 나가서는 필사적으로 싸우라는 책임을 맡긴 뒤에 그들을 채용하여 ‘百保鮮卑’라고 불렀다.注+③ 北魏와 北齊 무렵에 6軍의 宿衛하는 병사를 6坊으로 나누었다. 任은 책임을 맡기는 것이다. 百保는 그 용맹이 한 사람당 백 명을 감당하는 것을 보증할 수 있음을 말한다. 高氏는 鮮卑族을 데리고 창업을 하였는데, 당시에 건장하고 전투를 잘한다고 하였기 때문에 호위하는 병사는 모두 선비족을 기용하였다.
또 漢族 중에서 용력이 있는 사람을 가려 뽑아 그들을 ‘勇士’라고 부르고 변경의 요충지에 배치하였다.注+④ ‘邊要’는 변경의 요충지이다.
처음으로 아홉 등급의 戶를 세워 부유한 사람은 돈으로 세금을 내도록 하고, 가난한 사람은 힘으로 부역을 하도록 하였다.注+⑤ 戶는 상․중․하 세 등급이 있는데, 매 등급을 또 상․중․하로 나누어 9등급이 되었다.


역주
역주1 梁以陳霸先爲交州刺史 : “이때에 湘東王이 承制하여 〈陳霸先을〉 交州刺史에 제수하였을 뿐인데, 기록하기를 ‘梁나라가 누구를[梁以]’이라고 하였으니 어찌 상동왕이 承制한 것을 인정한 것이겠는가. 상동왕의 承制를 ≪資治通鑑綱目≫에서는 다만 ‘스스로 일컬었다[自稱]’라고 기록하였으니 인정해준 적이 없는 것이다. 기록하기를 ‘양나라가 누구를[梁以]’이라고 한 것은 진패선을 인정해준 것이다.[於是湘東承制 命刺交州耳 書曰梁以 豈予湘東以承制乎 湘東承制 綱目止書自稱 未嘗予也 書曰梁以 成霸先也]” ≪書法≫
역주2 魏人圍安陸……遂取漢東 : “‘사로잡았다[獲]’는 것은 무엇인가. 비천한 말이다. 柳仲禮는 大都督으로서 겨우 하루 동안 한 번 전투하고 곧이어 다시 배반하여 侯景에게 항복하기를 諸將들의 선두가 되었다. 지금 蕭繹은 叔姪끼리 서로 공격하는데 오히려 부리는 바(소역)에게 힘을 다 바치니, 매우 비천함이 된다. ‘사로잡았다[獲]’이라고 기록하였다.[獲者 何 賤辭也 仲禮爲大都督 僅日一戰 尋復叛降 爲諸將先 今繹叔姪相攻 顧乃盡力所使 可賤甚矣 故書獲]” ≪書法≫
역주3 梁祖皓起兵廣陵 殺侯景將董紹先 : “1백여 명일 뿐인데 ‘군사를 일으켰다[起兵]’라고 기록한 것은 무엇인가. 의리를 인정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에서는 의리를 인정하였다. 그러므로 劉崇이 1백여 명으로 나섰는데도 ‘군사를 일으켜 王莽을 토벌하였다.[起兵討莽]’라고 기록하고(新나라 王莽 居攝 원년(6)), 祖皓가 1백여 명으로 나섰는데도 ‘廣陵에서 군사를 일으켰다.[起兵廣陵]’라고 기록하였다.(이해(550))[百餘人耳 書起兵 何 予義也 綱目予義 是故劉崇以百餘人書起兵討莽(新莽居攝元年) 祖皓以百餘人書起兵廣陵(是年)]” ≪書法≫
역주4 魏師進次石城……魏師還 : “‘주둔하였다[次]’라고 기록한 것은 무엇인가. 느긋한 말이다. ‘맹약을 청하였다[請盟]’라고 기록한 것은 무엇인가. 비천한 말이다. 蕭繹은 君父가 굶어 죽어도 侯景을 원수로 삼지 않고, 형이 환난에 있는데도 구원하지 않으며, 밤낮으로 湘州를 공격하며 襄陽을 공격하여 한 집안에서 전쟁을 하였다. 西魏 군사들이 조금 전진하여 아직 깊이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인질을 보내어 화친을 요청하는 것을 마음에 달가워하였다. ≪資治通鑑綱目≫에서 ‘주둔하였다[次]’라고 기록하고 ‘맹약을 청하였다[請盟]’라고 기록하였으니 소역을 매우 병통으로 여긴 것이다.[書次 何 緩辭也 書請盟 何 卑辭也 蕭繹君父餓死而不之讐 君兄在難而不之救 日夜攻湘州 攻襄陽 動干戈於同室 及魏師少進 未深入也 則送質求和甘心焉 綱目書次 書請盟 所以深病繹也]” ≪書法≫
역주5 子城 : 큰 성에 부속된 작은 성인데 內城이나 外城 바깥쪽에 있는 瓮城이나 月城 따위를 일컫는다.
역주6 (人)[今] : 저본에는 ‘人’으로 되어 있으나, ≪御批資治通鑑≫의 ≪集覽≫에 의거하여 ‘今’으로 바로잡았다.
역주7 아랫사람에게서……않으면 : ≪大學≫에 보인다.
역주8 禊飲(계음) : 음력 3월 上巳日에 모여서 1년 동안 몸에 밴 부정을 냇물에 흘려보내는 풍속을 말한다.
역주9 梁主禊飲樂遊苑 : “기록한 것은 슬퍼한 것이다. 아버지가 죽고 자신이 욕을 당하는데도 褉飲을 하였으니 매우 슬퍼할 만한 것이다.[書悲之也 父死身辱而褉飲焉 可悲甚矣]” ≪書法≫
역주10 (揚)[陽] : 저본에는 ‘揚’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陽’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1 梁湘東王繹 移檄討侯景 : “蕭繹은 앞에서 ‘격문을 보내어 군사를 파견하였다.[移檄遣兵]’라고 기록되었는데 여기에서 다시 ‘격문을 보냈다[移檄]’라고 기록된 것은 무엇인가. 나무란 것이다. 臺城이 함락된 지 1년이 넘었고 高祖(梁 武帝 蕭衍)의 초상이 난 지 또 1년이 되었다. 그런 뒤에 發喪하고 遠近에 檄文을 보내면서 끝내 병사 한 명을 출동시켰다든지 역적 한 명을 죽였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으니 이는 진정 어떠한 마음인가. ≪資治通鑑綱目≫에서는 發喪을 삭제하고 거듭 ‘격문을 보냈다[移檄]’라고 기록하였으니, 마치 ‘단지 격문만 보내 토벌했을 뿐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을 뿐이다. 그러므로 〈晉나라〉 司馬睿는 북쪽 정벌의 뜻이 없으니 ‘격문을 보내어 북쪽을 정벌하였다.[移檄北征]’라고 기록하였고, 蕭繹은 원수 갚는 의리를 시급해하지 않았으니 ‘檄文을 보내어 侯景을 토벌하였다.[移檄討侯景]’라고 기록하였고, 〈唐나라〉 高駢은 역적을 토벌할 마음이 없었으니 ‘檄文을 보내어 역적을 토벌하였다.[移檄討賊]’라고 기록하였다. ≪資治通鑑綱目≫에서는 ‘檄文을 보냈다.[移檄]’라고 기록한 것이 7번인데(漢 獻帝 初平 2년(191)에 자세하다.), 오직 司馬睿ㆍ蕭繹ㆍ高駢만 나무라는 말이 된다.[繹前書移檄遣兵矣 於是復書移檄 何 譏也 臺城之陷 餘一年矣 高祖之喪 且周期矣 然後發喪 移檄遠近 而終不聞出一兵 殺一賊 是誠何心哉 綱目削其發喪 再書移檄 若曰徒能移檄討之云爾 是故睿無北伐之志 則書曰移檄北征 繹無急讐之義 則書曰移檄討侯景 高駢無討賊之心 則書曰移檄討賊 綱目書移檄七(詳漢獻帝初平二年) 惟睿繹駢爲譏辭]” ≪書法≫
“蕭繹이 후경을 토벌한 것은 옳으나, 臺城이 함락됨으로부터 이때에 이르도록 모두 며칠이나 지났으며, 또 梁祖(蕭衍)가 서거한 지부터 이때에 이르도록 모두 며칠이 지났는가. 소역은 〈원수 갚으려〉 창을 깔고 자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목숨을 바쳐 죽지 못하고 지금에야 비로소 원근에 격문을 보냈으니 과연 어찌 미칠 수 있겠는가. ≪資治通鑑綱目≫에서는 이를 기록한 것은 인정한 것이 아니고, 바로 아버지를 무시하며 임금을 무시한 악행을 드러낸 것이다.[繹之討景 是矣 自臺城之陷 至是凡幾日 又自梁祖之殂 至是凡幾日 繹不能枕戈泣血 致命效死 今乃始移檄遠近 果何及哉 綱目書此 非予之也 正所以著其無父無君之惡耳]” ≪發明≫
역주12 齊王洋稱皇帝……爲中山王 : “전대에 찬탈하여 즉위할 때에는 반드시 廢置한 것이 있고 혹은 미리 威權을 보여 위협하는 행동을 자행한 뒤에 이를 틈타 취하였는데 高洋처럼 쉬운 경우가 없었으니 어째서인가. 高氏는 오래도록 大權을 독점하여 中外가 모두 이미 歸服하였으므로 聲色을 움직일 것도 없이 손을 맞잡은 채 〈천자의〉 지위와 호칭을 바르게 차지하였으니 진실로 예나 지금이나 難易의 다름이 있는 것이 아니고 형세가 그렇게 한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고양이 용이하게 簒奪한 점을 알려고 하는 자는 당연히 高歡 이래로 ≪資治通鑑綱目≫에 가록된 것을 보아서 살피면 얻을 수 있을 것이다.[前代簒立 必有所廢置 或先示威權 以肆脇制之舉 然後乘而取之 未有若高洋之易者 何哉 高氏久擅大權 中外俱已歸服 故不動聲色 拱手而正位號 固非有今昔難易之殊也 勢使然爾 然則欲知高洋簒奪之易者 當於高歡以來 見諸綱目所書者觀之 則得之矣]” ≪發明≫
역주13 虞舜의 손님 신세 : 舜임금이 堯임금의 아들 丹朱를 賓禮로 대우했기 때문에 虞賓이라 하는데, 이에 의해 亡國之主를 비유한 것이다.
역주14 梁武陵王紀……次于白帝 : “侯景이 반란한 지 3년에 蕭紀는 마침내 군사를 파견하여 나아가 구원하게 하였으니 많은 죄가 있다. 그러므로 동쪽으로 내려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 비록 湘東王의 命이었지만 ≪資治通鑑綱目≫에서는 곧바로 ‘蕭圓照를 白帝에 주둔하게 하였다.[圓照次于白帝]’라고 기록하였으니 소기의 마음을 벌준 것이다. 이때에 ‘들어와 구원하였다[入援]’라고 기록한 것이 5번인데 韋粲 이외에 나머지는 모두 나무랄 만하였으나 오직 蕭紀가 보다 심하였다. ≪자치통감강목≫이 끝날 때까지 ‘들어와 구원하였다[入援]’라고 기록한 것은 15번이고(晉 愍帝 建興 4년(316)에 자세하다.), ‘들어와 호위하였다[入衛]’라고 기록한 것은 3번이고(晉 懷帝 永嘉 2(308)에 자세하다.), ‘난리에 달려왔다[赴難]’라고 기록한 것은 3번이고(晉成帝 咸和 4(329)에 자세하다.), ‘주둔했다[次]’라고 기록한 것은 1번일 뿐이다.[景叛三年 紀乃遣兵赴援 有餘罪矣 故不許東下 雖湘東之命 綱目直書圓照次于白帝 所以誅紀心也 於是書入援五 自韋粲外 餘皆可譏 惟紀爲甚焉 終綱目書入援十五(詳晉愍帝建興四年) 書入衛三(詳晉懷帝永嘉二年) 赴難三(詳晉成帝咸和四年) 書次者一而已]” ≪書法≫
“蜀으로부터 臺城까지 거리가 비록 매우 먼 듯하지만 君父가 陷沒된 것이 이미 오래되었으니, 武陵王 蕭紀가 이에 이르러 능히 달려와 지원할 수 있었는데, 또다시 또 大衆을 친히 거느리고 流星처럼 빨리 달려오지 못한 것은 어째서인가. ‘世子 蕭圓照를 보내어 白帝에 주둔하게 하였다.[遣世子次于白帝]’라고 기록하였으니 죄가 절로 드러난다.[自蜀至臺城 相去雖若甚遠 然其君父陷沒 亦旣久矣 武陵至是 方克赴援 又不能親將大衆 星馳而下 何哉 書遣世子次于白帝 罪自見矣]” ≪發明≫
역주15 征鎭 : 魏晉 이후 장군이나 대장군의 칭호이다. 征東ㆍ征西ㆍ鎭東ㆍ鎭西와 같은 것으로, 軍事를 감독하고 지방을 수비하는 무관직의 총칭이다.
역주16 梁高州刺史李遷仕反……討敗之 : “‘洗氏’를 기록한 것은 무엇인가. 부녀자의 절조를 장하게 여긴 것이다. 부녀자가 역적을 토벌한 것은 이전에 孫翊의 妻 徐氏를 기록하였으니, 여기서 다시 보인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부녀자가 ‘토벌했다[討]’라고 기록한 것은 2번일 뿐이다.(漢 獻帝 建安 9년(204), 이해(550))[書洗氏 何 壯婦節也 婦人討賊 前書孫翊妻徐氏矣 於是再見 終綱目婦人書討二而已(漢獻帝建安九年 是年)]” ≪書法≫“洗氏는 일개 婦人인데 의리를 떨쳐 역적을 토벌하였으므로 ≪資治通鑑綱目≫에서는 특별히 책에 기록하였다. 저 大丈夫로 自處하는 袁君正과 같은 무리들로 역적에게 결부하기에 달가워하는 자들은 부끄러워 죽고 싶지 않겠는가.[洗氏一婦人 乃能奮義討賊 故綱目特書于册 彼以大丈夫自處 若袁君正之徒 乃甘於附賊者 可不愧死無地哉]” ≪發明≫
역주17 麟趾格 : 東魏 孝靜帝가 여러 관료들에게 麟趾閣에서 法制의 제정을 논의하도록 조서를 내려서 만든 법률을 말한다.

자치통감강목(20) 책은 2022.11.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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