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吳軍이 還自東興에 加諸葛恪荊揚二州牧督中外諸軍事하니 恪遂有輕敵之心하여 復欲出軍이어늘
諸大臣
이 以爲數出疲勞
라하여 固諫不聽
하니 中散大夫蔣延固爭
注+中散大夫, 王莽所置, 後漢因之.한대 恪命扶出
하고
因著論以諭衆曰 昔에 秦但得關西耳로되 尙幷呑六國하니 今以魏比秦에 土地數倍하고 以吳蜀比六國에 不能半也나
所以能敵之者
는 但以操時兵衆
이 於今適盡
하며 而後生者
가 未長
注+長, 知兩切.하고
又司馬懿隕斃하고 而其子幼弱專國하여 雖有智計之士나 未得施用하니 是其厄會也라
若順衆人之情하고 懐偷安之計하여 以爲長江之險을 可以傳世라하여 不論魏之終始하고 而以今日遂輕其後면 此吾所以長歎息者也라
今衆人이 或以百姓尙貧하여 欲務閑息이라하니 此不知慮其大危而愛其小勤者也라
昔에 漢祖幸已自有三秦이면 何不閉關自娯而數出攻楚하고 豈甘鋒刃而忘安寧哉리오
毎鑑荊邯之說
하고 近見家叔父陳表
에 未嘗不喟然也
注+公孫述自帝蜀中, 荊邯說述起兵. 家叔父, 謂諸葛亮. 陳表, 謂所陳出師表.로라 衆人皆心以爲不可
호되 莫敢復難
注+難, 去聲.이라
獨滕胤謂曰 君前破彊敵
에 天下震動
이러니 今猥以勞役之後
로 興師出征
하니 民疲力屈
하고 遠主
가 有備
注+勞役, 謂內有山陵營作, 外有東關之師也. 左傳 “秦大夫蹇叔諫穆公曰 ‘勞師以襲遠, 師勞力屈, 遠主備之, 無乃不可乎.’”라
若攻城不克
하고 野掠無獲
이면 是喪前勞而招後責也
라 且兵者
는 大事
라 事以衆濟
니 衆苟不悅
이면 君獨安之
注+左傳 “國之大事, 在祀與戎.”리오
恪又不聽하고 遂大發州郡二十萬衆하여 復擊魏하고 以滕胤爲都下督하여 掌統留事하다
目
[目] 吳나라 군사가 東興에서 돌아오자 諸葛恪에게 荊州牧 揚州牧 都督中外諸軍事를 더해주었다. 제갈각은 마침내 적군을 경시하는 마음이 생겨 다시 군사를 출동시키려 하였는데,
여러
大臣들이 자주 군대가 출동하여 피로하다 하여 굳게 간언을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中散大夫 蔣延이 굳게 간쟁하였는데
注+中散大夫는 王莽이 설치하였고, 後漢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제갈각이 명하여 그를 붙들고 나가게 하고
이어서 논설을 지어 대중들에게 다음과 같이 유시하였다. “옛날에 秦나라는 關西(函谷關의 서쪽)만을 소유하고도 오히려 六國을 합병하였다. 지금 魏나라를 秦나라와 비교하면 土地가 몇 배나 되고, 吳나라와 蜀漢을 六國과 비교하면 절반도 못 된다.
그러나 우리가
魏나라를 대적할 수 있는 이유는 다만
曹操 때의 병사들이 지금에는 마침 다 사라졌으며, 그 뒤에 태어난 자들이 아직 성장하지 않았고,
注+長(자라다)은 知兩의 切이다.
또 司馬懿가 죽고 그의 아들이 유약한데 국정을 전담하여 비록 지모가 있는 인사가 있지만 그 재능을 쓰지 못하니, 이는 그들이 厄運을 만난 때이다.
만약 많은 사람들의 뜻을 따르고 구차하게 편안할 계책을 품어 長江의 험난한 지형을 대대로 전해줄 수 있다고 여겨 魏나라의 전후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오늘날의 상황을 가지고 마침내 그 뒷날의 변화를 경시한다면, 이는 내가 길게 탄식하는 이유이다.
지금 여러 사람들이 백성들이 여전히 가난하여 쉬게 하는 데 힘써야 한다고 하니, 이는 큰 위험을 생각할 줄 모르고 작은 노고를 아끼는 것이다.
옛날에
漢 高祖가 이미 자신이
을 소유한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면 어찌 관문을 닫고 스스로 즐기지 않고서 자주 출동하여
楚나라를 공격하였으며, 어찌 창칼로 교전하는 것을 감내하고 편안함을 잊었던 것이겠는가.
注+公孫述이 스스로 蜀에서 황제가 되자, 荊邯이 공손술에게 병사를 일으키라고 유세하였다. “家叔父”는 諸葛亮을 말한다. “陳表”는 진술한 〈出師表〉를 말한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마음으로 옳지 않다고 여겼으나 감히 다시 논란하지 못하였다.
注+難(논란하다)은 去聲이다.
滕胤만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君께서 이전에 강한 적군을 격파하자 천하가 진동하였습니다. 지금 외람되이 생각건대,
勞役이 있은 뒤에 군사를 일으켜 출정하려 하시니, 백성들이 피로하여 힘이 고갈될 것이고, 먼 나라 임금이 대비를 하게 될 것입니다.
注+“勞役”은 국내에는 山陵 공사가 있었고, 국외에는 東關의 전쟁이 있었음을 말한다. ≪春秋左氏傳≫ 僖公 32년에 “秦나라 大夫 蹇叔이 穆公에게 간언하기를 ‘군사를 피로하게 하여 먼 나라를 습격하려고 하니, 군사들이 피로하여 힘이 고갈될 것이며 먼 나라 임금이 대비할 것이니, 불가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하였다.
만약 성을 공격하여 이기지 못하고 들판을 약탈하여 노획하는 것이 없으면 이전의 공로를 잃고 이후의 책망을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또 전쟁은 큰일입니다. 일이 대중들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대중들이 만약 기뻐하지 않으면
君께서 홀로 편안하시겠습니까.”
注+≪春秋左氏傳≫ 成公 13년에 “국가의 큰일은 제사와 전쟁에 있다.” 하였다.
제갈각이 또 따르지 않고, 마침내 州郡의 20만 군사를 크게 일으켜 魏나라를 다시 공격하였고, 등윤을 都下督으로 삼아 留守하는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目
[目] 姜維는 자신의 재주와 武勇을 자부하고 여러 羌族과 胡族을 유인하여 羽翼으로 삼고자 하여 이르기를 “隴山 서쪽 지역을 잘라서 소유할 수 있다.”고 하여 늘 군대를 크게 일으키려 하였다.
費禕가 항상 제재하여 따르지 않고, 그에게 만 명이 넘지 않는 군대를 내어주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丞相(
諸葛亮)께서도 오히려
中夏(
中原)를 평정할 수 없었는데, 하물며 우리들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注+丞相은 諸葛亮을 말한다.
나라를 보전하며 백성을 다스려 삼가 社稷을 지키는 것만 못하니, 북벌의 功業은 유능한 자를 기다리니, 요행을 바라서 일거에 成敗를 결정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뉘우쳐도 소용없을 것이다.”
비위가 卒하자, 강유는 마침내 수만 명을 인솔하여 魏나라를 공격하여 狄道를 포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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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魏나라 揚州 牙門將 張特이 新城을 수비하였다. 吳나라 군대가 몇 달을 공격하였는데, 성안의 병사가 도합 3천 명에 불과하였다.
병들고 전사한 자가 반을 넘게 되자 제갈각이 土山을 쌓아서 급히 공격하니, 성이 함락될 지경이 되었다.
장특이
吳나라 군대에게 말하기를 “지금 우리는 다시 싸울 마음이 없다. 그러나
魏나라 법에 100일 이상 공격을 받고서 구원병이 이르지 않은 경우에는 비록 항복을 하더라도 그 가족은 죄에 연좌되지 않는다.
注+降(항복하다)은 戶江의 切이니, 〈“雖降 家不坐”는〉 비록 자신이 항복하더라도 그 가족은 연좌되지 않음을 말한다.
우리가 공격을 받은 이래로 이미 90여 일이 지났다. 비록 성이 함락된다 하더라도 여전히 항복을 원치 않을 자가 있을 것이니, 내가 다시 그들과 이야기하고 투항할 자와 투항하지 않을 자를 조목조목 가려서 내일 아침에 명단을 보내겠다.
注+爲(위하다)는 去聲이다. 우선 내
印綬를 보내서 신표로 삼겠다.” 하였다.
吳나라 군대가 그의 말을 허락하자 장특이 밤에 여러 집들의 재목을 철거하여
木柵을 만들어 성의 무너진 곳을 두 겹으로 보수하고
注+나무를 엮어 營寨를 만든 것을 柵이라 한다. 다음 날 말하기를 “우리는 다만 싸우다가 죽을 뿐이다.”라고 하니,
吳나라 군대가 크게 노하여 진격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였다. 마침 날씨가 매우 더워서 吳나라 군사들은 병자가 태반이었고 사상자들이 길에 깔렸다.
제갈각이 속으로 계책이 잘못되었고 생각하여 분노가 안색에 드러났다.
注+惟는 생각한다는 뜻이다. 將軍 朱異가 군사에 관한 일로 제갈각의 뜻을 거스르자, 제갈각이 그의 군대를 빼앗았다.
注+朱異는 朱桓의 아들이다. 迕는 거스른다는 뜻이다.
그리고 都尉 蔡林이 자주 계책을 진술하였으나 쓰지 않았으니, 말을 달려 魏나라로 도주하였다. 魏나라의 여러 장군들이 吳나라의 군대가 이미 지친 것을 엿보아 알고서는 구원병을 진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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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目]
諸葛恪이
建業으로 돌아와서 병사들을 늘어놓고
官府로 들어가서는 즉시
中書令 孫嘿을 불러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경들은 어찌하여 감히 자주 망령되어 조서를 작성하는가.”
注+자주 조서를 써서 소환한 것에 성을 낸 것이다.라고 하였다.
정벌을 행한 뒤에
選曹에서 아뢰어 임명한
縣令 및
縣長과
職司(담당관)를 일체 파면하여 다시 뽑고,
注+曹는 選曹(인사 담당 부서)이다. “所奏署”는 아뢰어 임명한 자를 말한다.
더욱 위엄 있게 다스려
罪責을 많이 주고
宿衛를 바꾸어 가까운 이를 등용하고 다시 병력을 꾸려서
靑州와
徐州로 향하려고 하였다.
注+嚴은 꾸린다는 뜻이다.
孫峻은 백성들이 원망하고 대중들이 싫어하는 것을 이용하여 제갈각을 吳主 孫亮에 무함하여 말하기를 “변란을 일으키려 합니다.”라고 하고, 마침내 손량과 함께 꾀하였다.
술자리를 마련하고 제갈각을 초청하여 병력을 숨겨 그를 죽이고, 갈대 자리로 시체를 싸서
石子岡에 던져버리고
三族을 아울러 멸족시켰다.
注+建業 남쪽에 크고 높은 토산이 있는데 이를 石子岡이라고 하며, 매장자를 그곳에 의탁한다.孫峻이 諸葛恪을 모살하다
臨淮 臧均이 표문을 올려 제갈각의 故吏에게 그의 시체를 거두어 장사 지낼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예전에 제갈각은 젊어서 유명하였다.
大帝(
孫權)가 매우 소중하게 여겼으나 제갈각의 아버지
諸葛瑾이 항상 그를 근심하며 말하기를 “집안을 보존할 주인이 아니다.”
注+戚은 근심하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陸遜이 항상 제갈각에게 말하기를 “내 앞에 있는 이를 내가 반드시 받들어 함께 승진하고 내 아래에 있는 이는 보살피고 도와주었다. 지금 그대는 기세가 윗사람을 능멸하고 의기가 아랫사람을 멸시하니, 덕행을 안정되게 할 기반이 아니다.”
注+蔑은 없는 것처럼 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蜀漢 侍中 諸葛瞻은 諸葛亮의 아들이다. 제갈각이 淮南을 재차 공격할 때 越巂太守 張嶷이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太傅(제갈각)는 어린 황제를 보좌할 중임을 받았는데 어린 임금을 떠나 적국에 가려 하니,
아마 훌륭한 계책이 아닌 듯합니다.
注+離(떠나다)는 力智의 切이다. 郞君이 마땅히 태부에게
進言하여
注+郞君은 諸葛瞻을 말한다. 옛날에 貴人의 아들이나 자신이 상대방의 아버지를 섬긴 적이 있는 이를 郞君이라 하고, 과거에 藩鎭(지방관)의 아들이었던 이를 또한 郞君이라고 불렀다. 군대를 돌려서 널리 농사를 짓도록 하고 힘써 도덕과 은혜를 행하여 몇 년 뒤에
東吳와
西蜀 두 나라가 함께
擧兵을 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과연 패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