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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2)

자치통감강목(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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思政殿訓義 資治通鑑綱目 제16권 상
蜀漢 後主 延熙 16년(253)~蜀漢 後主 景耀 4년(261)
癸酉年(253)
起癸酉漢後主延熙十六年하여 盡己亥晉武帝咸寧五年이니 凡二十七年이라
十六年이라
魏嘉平五年이요 吳建興二年이라
春正月 하다
姜維攻魏西平하여 獲中郞하여 以爲左將軍注+循, 當作脩.하니 循欲刺帝로되 不得近이라
每因上壽하여 且拜且前호되 爲左右所遏하여 事輒不果러니
至是하여 費禕與諸將大會於漢壽하여 歡飮沈醉하니 循刺殺之하다 禕汎愛不疑하여 待新附太過어늘
張嶷嘗與書引岑彭來歙爲戒호되 禕不從이라 故及注+岑彭‧來歙事, 見光武建武十一年. 及, 謂及禍也.하다 魏追封循爲郷侯하고 使其子襲爵하다
二月 吳諸葛恪 擊魏하다
吳軍 還自東興 加諸葛恪荊揚二州牧督中外諸軍事하니 恪遂有輕敵之心하여 復欲出軍이어늘
諸大臣 以爲數出疲勞라하여 固諫不聽하니 中散大夫蔣延固爭注+中散大夫, 王莽所置, 後漢因之.한대 恪命扶出하고
因著論以諭衆曰 昔 秦但得關西耳로되 尙幷呑六國하니 今以魏比秦 土地數倍하고 以吳蜀比六國 不能半也
所以能敵之者 但以操時兵衆 於今適盡하며 而後生者 未長注+長, 知兩切.하고
又司馬懿隕斃하고 而其子幼弱專國하여 雖有智計之士 未得施用하니 是其厄會也
若順衆人之情하고 懐偷安之計하여 以爲長江之險 可以傳世라하여 不論魏之終始하고 而以今日遂輕其後 此吾所以長歎息者也
今衆人 或以百姓尙貧하여 欲務閑息이라하니 此不知慮其大危而愛其小勤者也
漢祖幸已自有三秦이면 何不閉關自娯而數出攻楚하고 豈甘鋒刃而忘安寧哉리오
毎鑑荊邯之說하고 近見家叔父陳表 未嘗不喟然也注+公孫述自帝蜀中, 荊邯說述起兵. 家叔父, 謂諸葛亮. 陳表, 謂所陳出師表.로라 衆人皆心以爲不可호되 莫敢復難注+難, 去聲.이라
獨滕胤謂曰 君前破彊敵 天下震動이러니 今猥以勞役之後 興師出征하니 民疲力屈하고 遠主 有備注+勞役, 謂內有山陵營作, 外有東關之師也. 左傳 “秦大夫蹇叔諫穆公曰 ‘勞師以襲遠, 師勞力屈, 遠主備之, 無乃不可乎.’”
若攻城不克하고 野掠無獲이면 是喪前勞而招後責也 且兵者 大事 事以衆濟 衆苟不悅이면 君獨安之注+左傳 “國之大事, 在祀與戎.”리오
恪又不聽하고 遂大發州郡二十萬衆하여 復擊魏하고 以滕胤爲都下督하여 掌統留事하다
夏四月 姜維伐魏하여 圍狄道하다
維負其才武하고 欲誘諸羌胡以爲羽翼하여 謂自隴以西 可斷而有라하여 毎欲大擧호되
費禕常裁制不從하여 與兵不過萬人曰 丞相猶不能定中夏 況吾等乎注+丞相, 謂諸葛亮.
不如保國治民하여 謹守社稷이니 如其功業 以俟能者 無爲徼倖하여 決成敗於一擧 若不如志 悔之無及이니라
及禕死 維遂將數萬人하여 伐魏圍狄道하다
吳師圍魏新城하여 不克하다
諸葛恪 入淮南하니 或曰 宜圍新城하여 俟救至而圖之 可大獲也리라 從其計注+新城, 合肥新城也.하니
魏司馬師 問於虞松曰 今二方皆急호되 而諸將意沮하니 若之何注+二方皆急, 謂吳攻淮南, 蜀攻隴西也.
松曰 昔 周亞夫堅壁昌邑而吳楚自敗하니 事有似弱而強者 不可不察也注+吳‧楚自敗事, 見景帝三年.
今恪悉其銳衆하여 足以肆暴 而坐守新城 欲以致一戰耳注+致者, 猶古所謂致師也.
若攻城不拔하고 請戰不可하여 師老衆疲 勢將自遁이니 諸將之不進 乃公之利也
姜維投食我麥하니 非深根之寇 且謂我幷力於東이라 是以徑進注+投食我麥, 謂維軍後無轉餉, 投兵魏地, 擬其麥以爲食耳.하니
今若使關中諸軍으로 倍道急赴하여 出其不意 殆將走矣리라
師曰 善타하고 乃使郭淮陳泰 解狄道之圍하고 勅毋丘儉等하여 案兵自守하고 以新城委吳注+案, 抑也.하니 泰至洛門 維果以糧盡引還注+洛門, 聚名也. 在天水郡冀縣. 洛, 一作落.하다
魏揚州牙門將張特 守新城이러니 吳人攻之連月하니 城中兵 合三千人이라
疾病戰死者 過半이어늘 而恪起土山急攻하니 城將陷
特謂吳人曰 今我無心復戰也로되 然魏法 被攻過百日而救不至者 雖降이나 家不坐注+降, 戶江切. 言雖身降而其家不坐罪也.하니
自受敵以來 已九十餘日矣 城雖陷이나 尙有不欲降者하니 我當還爲相語하고 條別善惡하여 明早送名注+爲, 去聲.하리니 且以我印綬去爲信이라
吳人 聽之어늘 特乃夜徹諸屋材하여 柵補其闕爲二重注+編木爲營寨曰柵.하고 明日 謂曰 我但有鬪死耳라하니
吳人大怒하여 進攻之 不能拔이러니 會大暑하여 吳軍病者太半이요 死傷塗地하니
恪內惟失計하여 忿形於色注+惟, 思也.이러라 將軍朱異 以軍事迕恪하니 恪奪其兵注+異, 桓之子也. 迕, 逆也.하고
都尉蔡林 數陳計不用하니 策馬奔魏 魏諸將 伺知其兵已疲하고 乃進救兵하니
七月 恪引去러니 士卒傷病하여 流曳頓仆하고 哀痛嗟呼注+流者, 放而不能自收也. 曳者, 羸困不能自扶, 相牽引而行也. 顚仆, 顚頓而僵仆也.호되 而恪晏然自若하고 詔召相銜 徐乃旋師注+詔召相銜, 言召命相繼也. 舟行以不絶爲相銜, 陸行以馬首尾相接爲相銜.하니
由是 衆庶失望而怨讟興矣注+痛怨而謗曰讟. 汝南太守鄧艾 言於司馬師曰 孫權已沒하고 大臣未附어늘
恪不念撫恤上下하여 以立根基하고 乃競於外事하여 載禍而歸하니 其亡可待也라하더라
冬十月 하고 以孫峻爲丞相하다
恪還建業하여 陳兵入府하고 卽召中書令孫嘿하여 厲聲謂曰 卿等何敢數妄作詔注+怒其數作詔召之也.
征行之後 曹所奏署令長職司 一罷更選注+曹, 謂選曹也. 所奏署, 謂其所聞奏除署者.하고
愈治威嚴하여 多所罪責하고 改易宿衛하여 用其親近하고 復嚴兵하여 欲向靑徐注+嚴, 裝也.어늘
孫峻因民怨衆嫌하여 構恪於吳主亮云 欲爲變이라하고 遂與亮謀하여
置酒請恪하여 伏兵殺之하고 以葦席裹尸하여 投之石子岡하고 幷夷三族注+建業南有長陵, 名曰石子岡, 葬者依焉.하니
臨淮臧均 表請聽故吏收葬이어늘 從之하다 恪少有盛名이라
大帝深器重之로되 而恪父瑾 常以爲戚曰 非保家之主也注+戚, 憂也.
陸遜常謂恪曰 在我前者 吾必奉之同升하고 在我下者 則扶接之 今君氣陵其上하고 意蔑其下하니 非安德之基也注+蔑者, 視之若無.
漢侍中諸葛瞻 亮之子也 恪再攻淮南 越巂太守張嶷 與之書曰 太傅受寄託之重이어늘 而離少主하여 履敵庭하니
恐非良計注+離, 力智切. 郞君宜進言於太傅注+郞君, 謂諸葛瞻也. 古稱貴人子及身嘗事其父者曰郞君, 故藩鎭之子, 亦呼郞君.하여 旋軍廣農하고 務行德惠하여 數年之後 東西竝擧 未爲晩也라하더니 至是果敗하다
吳群臣 共推峻爲太尉하고 滕胤爲司徒하니 有媚峻者 言萬機宜在公族이라하여
乃表峻爲丞相大將軍都督中外諸軍事하고 又不置御史大夫하니 由是 士人失望注+漢承秦制, 置御史大夫, 以副丞相理衆事. 令峻爲丞相, 而不置御史大夫, 則專吳國之政, 故國人失望.이러라
峻驕矜淫暴하니 國人側目이라 與胤으로 雖內不洽而外相苞容하여 共事如前注+洽, 和也, 合也.이러라
吳殺其南陽王和하다
和妃張氏 恪甥也 因此賜和死하고 張妃亦自殺하니
其妾何氏曰 若皆從死 誰當字孤注+從, 才用切. 字, 乳也, 愛也. 遂撫育其子皓及諸姬子德謙俊하여 皆頼以全注+德‧謙‧俊, 三子名.하다
齊王奮 聞恪誅하고 欲至建業觀變이어늘 傅相諫한대 奮殺之하니 亦坐廢爲庶人하다


思政殿訓義 資治通鑑綱目 제16권 상
蜀漢 後主 延熙 16년(253)~蜀漢 後主 景耀 4년(261)
癸酉年(253)
資治通鑑綱目≫ 제16권은 癸酉年 나라(蜀漢) 後主 延熙 16년(253)부터 시작해서 己亥年 나라 武帝 咸寧 5년(279)까지이니, 모두 27년이다.
[] 나라(蜀漢) 後主 延熙 16년이다.
[] 魏主 曹芳 嘉平 5년이고, 吳主 孫亮 建興 2년이다.
[] 봄 정월에 자객이 大將軍 費禕를 암살하였다.
[] 예전에 姜維나라 西平을 공격하여 中郞將 郭循을 포획하여 그를 左將軍으로 삼았다.注+로 써야 한다. 곽순은 황제(後主)를 찔러 죽이려 하였으나 접근할 수가 없었다.
祝壽를 올릴 때를 이용하여 한편으로 절하면서 한편으로 나아갔으나 측근들에게 가로막혀 거사를 번번이 거행하지 못하였다.
지금에 이르러 費禕가 여러 장군들과 함께 漢壽에서 큰 모임을 가지며 즐겁게 술을 마시다가 대취하니, 곽순이 그를 찔러 죽였다. 비위는 널리 사랑을 베풀어 의심하지 않아 새로 귀순한 자들을 너무 지나치게 우대하였는데,
張嶷이 일찍이 편지를 보내어 을 인용하여 경계를 하였으나 비위가 따르지 않았으므로 재앙을 당하게 된 것이다.注+岑彭來歙의 일은 光武 建武 11년(135)에 보인다. 은 재앙에 이르게 된 것을 말한다. 나라에서는 곽순을 追封하여 郷侯로 삼고 그의 아들이 작위를 세습하게 하였다.
[] 2월에 나라 諸葛恪나라를 공격하였다.
[] 나라 군사가 東興에서 돌아오자 諸葛恪에게 荊州牧 揚州牧 都督中外諸軍事를 더해주었다. 제갈각은 마침내 적군을 경시하는 마음이 생겨 다시 군사를 출동시키려 하였는데,
여러 大臣들이 자주 군대가 출동하여 피로하다 하여 굳게 간언을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中散大夫 蔣延이 굳게 간쟁하였는데注+中散大夫王莽이 설치하였고, 後漢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제갈각이 명하여 그를 붙들고 나가게 하고
이어서 논설을 지어 대중들에게 다음과 같이 유시하였다. “옛날에 나라는 關西(函谷關의 서쪽)만을 소유하고도 오히려 六國을 합병하였다. 지금 나라를 나라와 비교하면 土地가 몇 배나 되고, 나라와 蜀漢六國과 비교하면 절반도 못 된다.
그러나 우리가 나라를 대적할 수 있는 이유는 다만 曹操 때의 병사들이 지금에는 마침 다 사라졌으며, 그 뒤에 태어난 자들이 아직 성장하지 않았고,注+(자라다)은 知兩이다.
司馬懿가 죽고 그의 아들이 유약한데 국정을 전담하여 비록 지모가 있는 인사가 있지만 그 재능을 쓰지 못하니, 이는 그들이 厄運을 만난 때이다.
만약 많은 사람들의 뜻을 따르고 구차하게 편안할 계책을 품어 長江의 험난한 지형을 대대로 전해줄 수 있다고 여겨 나라의 전후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오늘날의 상황을 가지고 마침내 그 뒷날의 변화를 경시한다면, 이는 내가 길게 탄식하는 이유이다.
지금 여러 사람들이 백성들이 여전히 가난하여 쉬게 하는 데 힘써야 한다고 하니, 이는 큰 위험을 생각할 줄 모르고 작은 노고를 아끼는 것이다.
옛날에 高祖가 이미 자신이 을 소유한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면 어찌 관문을 닫고 스스로 즐기지 않고서 자주 출동하여 나라를 공격하였으며, 어찌 창칼로 교전하는 것을 감내하고 편안함을 잊었던 것이겠는가.
注+公孫述이 스스로 에서 황제가 되자, 荊邯이 공손술에게 병사를 일으키라고 유세하였다. “家叔父”는 諸葛亮을 말한다. “陳表”는 진술한 〈出師表〉를 말한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마음으로 옳지 않다고 여겼으나 감히 다시 논란하지 못하였다.注+(논란하다)은 去聲이다.
滕胤만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께서 이전에 강한 적군을 격파하자 천하가 진동하였습니다. 지금 외람되이 생각건대, 勞役이 있은 뒤에 군사를 일으켜 출정하려 하시니, 백성들이 피로하여 힘이 고갈될 것이고, 먼 나라 임금이 대비를 하게 될 것입니다.注+勞役”은 국내에는 山陵 공사가 있었고, 국외에는 東關의 전쟁이 있었음을 말한다. ≪春秋左氏傳僖公 32년에 “나라 大夫 蹇叔穆公에게 간언하기를 ‘군사를 피로하게 하여 먼 나라를 습격하려고 하니, 군사들이 피로하여 힘이 고갈될 것이며 먼 나라 임금이 대비할 것이니, 불가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하였다.
만약 성을 공격하여 이기지 못하고 들판을 약탈하여 노획하는 것이 없으면 이전의 공로를 잃고 이후의 책망을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또 전쟁은 큰일입니다. 일이 대중들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대중들이 만약 기뻐하지 않으면 께서 홀로 편안하시겠습니까.”注+春秋左氏傳成公 13년에 “국가의 큰일은 제사와 전쟁에 있다.” 하였다.
제갈각이 또 따르지 않고, 마침내 州郡의 20만 군사를 크게 일으켜 나라를 다시 공격하였고, 등윤을 都下督으로 삼아 留守하는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 여름 4월에 姜維나라를 정벌하여 狄道를 포위하였다.
[] 姜維는 자신의 재주와 武勇을 자부하고 여러 羌族胡族을 유인하여 羽翼으로 삼고자 하여 이르기를 “隴山 서쪽 지역을 잘라서 소유할 수 있다.”고 하여 늘 군대를 크게 일으키려 하였다.
費禕가 항상 제재하여 따르지 않고, 그에게 만 명이 넘지 않는 군대를 내어주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丞相(諸葛亮)께서도 오히려 中夏(中原)를 평정할 수 없었는데, 하물며 우리들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注+丞相諸葛亮을 말한다.
나라를 보전하며 백성을 다스려 삼가 社稷을 지키는 것만 못하니, 북벌의 功業은 유능한 자를 기다리니, 요행을 바라서 일거에 成敗를 결정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뉘우쳐도 소용없을 것이다.”
비위가 하자, 강유는 마침내 수만 명을 인솔하여 나라를 공격하여 狄道를 포위하였다.
[] 나라 군사가 나라 新城을 포위하여 이기지 못하였다.
[] 예전에 諸葛恪淮南을 침입하니, 어떤 이가 말하기를 “마땅히 新城을 포위하여 구원병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도모하면 크게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라 하였는데, 제갈각이 그 계책을 따랐다.注+新城合肥新城이다.
나라 司馬師虞松에게 묻기를 “지금 두 방면이 모두 위급한데 여러 장군들의 의기가 떨어져 있으니, 어찌해야 하겠는가?”注+二方皆急”은 나라가 淮南을 공격하고, 蜀漢隴西를 공격한 일을 말한다.라고 하니,
우송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일에는 허약한 듯하나 강한 것이 있으니 살피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注+가 절로 패배한 것은 景帝 3년(B.C.154)에 보인다.
지금 제갈각이 정예병을 모두 동원하여 횡포를 부리기에 충분한데도, 앉아서 신성을 지키는 것은 우리를 불러내어 한 번 전투를 치르려고 하는 것입니다.注+는 옛날에 이른바 군사를 불러들인다는 것과 같다.
저들이 만약 성을 공격해도 함락하지 못하고 우리 주력과 싸우려고 해도 할 수가 없어서 군대가 지치고 피로해지면 형세상 저절로 도주할 것이니, 여러 장군들이 진격하지 않는 것이 바로 의 유리한 점입니다.
姜維는 우리의 보리를 취하여 먹고 있으니, 깊은 뿌리가 있는 도적이 아니고, 또 우리가 동쪽(나라)에 병력을 집중한다고 생각했기에 곧바로 진격해온 것입니다.注+投食我麥”은 姜維의 군대가 후방의 군량 수송이 없어서 나라 지역에 병력을 투입하여 그 보리를 양식으로 삼으려고 하였을 뿐임을 말한 것이다.
지금 만약 關中의 여러 군대를 두 배 속도로 진군시켜 속히 도달하게 하여 그들의 뜻밖에 나가면 아마도 달아날 것입니다.”
사마사가 “좋다.”라고 하고, 郭淮陳泰를 보내어 狄道의 포위를 풀게 하고 毌丘儉 등에게 명하여 병사들을 움직이지 않고 스스로 지키게 하고 신성을 나라에 맡겨버렸다.注+은 억제한다는 뜻이다. 진태가 洛門에 이르자 강유는 과연 군량이 떨어져서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注+洛門은 고을 이름이니, 天水郡 冀縣에 있다. 一本에는 으로 되어 있다.
[] 나라 揚州 牙門將 張特新城을 수비하였다. 나라 군대가 몇 달을 공격하였는데, 성안의 병사가 도합 3천 명에 불과하였다.
병들고 전사한 자가 반을 넘게 되자 제갈각이 土山을 쌓아서 급히 공격하니, 성이 함락될 지경이 되었다.
장특이 나라 군대에게 말하기를 “지금 우리는 다시 싸울 마음이 없다. 그러나 나라 법에 100일 이상 공격을 받고서 구원병이 이르지 않은 경우에는 비록 항복을 하더라도 그 가족은 죄에 연좌되지 않는다.注+(항복하다)은 戶江이니, 〈“雖降 家不坐”는〉 비록 자신이 항복하더라도 그 가족은 연좌되지 않음을 말한다.
우리가 공격을 받은 이래로 이미 90여 일이 지났다. 비록 성이 함락된다 하더라도 여전히 항복을 원치 않을 자가 있을 것이니, 내가 다시 그들과 이야기하고 투항할 자와 투항하지 않을 자를 조목조목 가려서 내일 아침에 명단을 보내겠다.注+(위하다)는 去聲이다. 우선 내 印綬를 보내서 신표로 삼겠다.” 하였다.
나라 군대가 그의 말을 허락하자 장특이 밤에 여러 집들의 재목을 철거하여 木柵을 만들어 성의 무너진 곳을 두 겹으로 보수하고注+나무를 엮어 營寨를 만든 것을 이라 한다. 다음 날 말하기를 “우리는 다만 싸우다가 죽을 뿐이다.”라고 하니,
나라 군대가 크게 노하여 진격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였다. 마침 날씨가 매우 더워서 나라 군사들은 병자가 태반이었고 사상자들이 길에 깔렸다.
제갈각이 속으로 계책이 잘못되었고 생각하여 분노가 안색에 드러났다.注+는 생각한다는 뜻이다. 將軍 朱異가 군사에 관한 일로 제갈각의 뜻을 거스르자, 제갈각이 그의 군대를 빼앗았다.注+朱異朱桓의 아들이다. 는 거스른다는 뜻이다.
그리고 都尉 蔡林이 자주 계책을 진술하였으나 쓰지 않았으니, 말을 달려 나라로 도주하였다. 나라의 여러 장군들이 나라의 군대가 이미 지친 것을 엿보아 알고서는 구원병을 진격시켰다.
[] 7월에 諸葛恪이 군대를 이끌고 후퇴하였는데, 士卒들이 다치고 병들어 流離하며 서로 부축하다가 쓰러지고 애통해하며 부르짖었으나注+는 풀어져 스스로 거둘 수 없는 것이다. 는 피곤하여 자신을 부지하지 못하고 서로 이끌면서 길을 가는 것이다. “顚仆”는 쓰러지고 넘어진다는 뜻이다. 제갈각은 태연자약하면서 〈長江 가운데의 모래섬에 나가 한 달간 머물었는데〉 소환하는 조서가 연이어 이르자 그제야 천천히 군사를 되돌려왔다.注+詔召相銜”은 소환 명령이 이어지는 것을 말한다. 배로 갈 때 이물과 고물이 이어져 끊이지 않는 것을 相銜이라 하고, 육지로 갈 때 말의 머리와 꼬리가 서로 닿는 것을 相銜이라 한다.
이로 말미암아 대중들이 실망하고 원망하게 되었다.注+원통하여 비방함을 (독)이라 한다. 나라 汝南太守 鄧艾司馬師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孫權이 이미 죽고 나서 大臣들이 따르지 않는데,
제갈각이 위아래를 어루만져 근본을 확립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대외의 전쟁을 고집해 다투다가 재앙을 가지고 돌아가니 머지않아 멸망할 것입니다.”
[] 겨울 10월에 나라가 太傅 諸葛恪을 죽이고 孫峻丞相으로 삼았다.
[] 諸葛恪建業으로 돌아와서 병사들을 늘어놓고 官府로 들어가서는 즉시 中書令 孫嘿을 불러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경들은 어찌하여 감히 자주 망령되어 조서를 작성하는가.”注+자주 조서를 써서 소환한 것에 성을 낸 것이다.라고 하였다.
정벌을 행한 뒤에 選曹에서 아뢰어 임명한 縣令縣長職司(담당관)를 일체 파면하여 다시 뽑고,注+選曹(인사 담당 부서)이다. “所奏署”는 아뢰어 임명한 자를 말한다.
더욱 위엄 있게 다스려 罪責을 많이 주고 宿衛를 바꾸어 가까운 이를 등용하고 다시 병력을 꾸려서 靑州徐州로 향하려고 하였다.注+은 꾸린다는 뜻이다.
孫峻은 백성들이 원망하고 대중들이 싫어하는 것을 이용하여 제갈각을 吳主 孫亮에 무함하여 말하기를 “변란을 일으키려 합니다.”라고 하고, 마침내 손량과 함께 꾀하였다.
술자리를 마련하고 제갈각을 초청하여 병력을 숨겨 그를 죽이고, 갈대 자리로 시체를 싸서 石子岡에 던져버리고 三族을 아울러 멸족시켰다.注+建業 남쪽에 크고 높은 토산이 있는데 이를 石子岡이라고 하며, 매장자를 그곳에 의탁한다.
孫峻이 諸葛恪을 모살하다孫峻이 諸葛恪을 모살하다
臨淮 臧均이 표문을 올려 제갈각의 故吏에게 그의 시체를 거두어 장사 지낼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예전에 제갈각은 젊어서 유명하였다.
大帝(孫權)가 매우 소중하게 여겼으나 제갈각의 아버지 諸葛瑾이 항상 그를 근심하며 말하기를 “집안을 보존할 주인이 아니다.”注+은 근심하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陸遜이 항상 제갈각에게 말하기를 “내 앞에 있는 이를 내가 반드시 받들어 함께 승진하고 내 아래에 있는 이는 보살피고 도와주었다. 지금 그대는 기세가 윗사람을 능멸하고 의기가 아랫사람을 멸시하니, 덕행을 안정되게 할 기반이 아니다.”注+은 없는 것처럼 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蜀漢 侍中 諸葛瞻諸葛亮의 아들이다. 제갈각이 淮南을 재차 공격할 때 越巂太守 張嶷이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太傅(제갈각)는 어린 황제를 보좌할 중임을 받았는데 어린 임금을 떠나 적국에 가려 하니,
아마 훌륭한 계책이 아닌 듯합니다.注+(떠나다)는 力智이다. 郞君이 마땅히 태부에게 進言하여注+郞君諸葛瞻을 말한다. 옛날에 貴人의 아들이나 자신이 상대방의 아버지를 섬긴 적이 있는 이를 郞君이라 하고, 과거에 藩鎭(지방관)의 아들이었던 이를 또한 郞君이라고 불렀다. 군대를 돌려서 널리 농사를 짓도록 하고 힘써 도덕과 은혜를 행하여 몇 년 뒤에 東吳西蜀 두 나라가 함께 擧兵을 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과연 패망하였다.
[] 나라의 여러 신하들이 孫峻을 함께 추대하여 太尉로 삼고 滕胤司徒로 삼았다. 손준에게 아첨하는 자가 말하기를 “萬機(정무)는 마땅히 公族에게 있어야 합니다.”라고 하여
표문을 올려 손준을 丞相 大將軍 都督中外諸軍事로 삼고, 또 御史大夫를 두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士人들이 실망하였다.注+나라가 나라 제도를 계승하여 御史大夫를 두어서 副丞相으로 여러 일을 다스렸다. 孫峻으로 丞相을 삼고 御史大夫를 두지 않았으니, 나라의 정치를 독점하게 되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실망하였다.
손준이 교만하고 자랑하며 음탕하고 포악하니, 나라 사람들이 곁눈질하여 보았다. 등윤과는 마음으로는 맞지 않았으나 겉으로는 서로 포용하면서 이전처럼 일을 함께하였다.注+은 화합한다는 뜻이며, 부합한다는 뜻이다.
[] 나라가 南陽王 孫和를 죽였다.
[] 孫和 張氏諸葛恪甥姪女이다. 孫峻이 이로 인해 손화를 賜死하고 張妃 역시 자살하였다.
손화의 姬妾 何氏가 말하기를 “만약 모두 뒤따라 죽는다면 누가 고아에게 젖을 먹여 키울 것인가?”注+(따라가다)은 才用이다. 는 젖을 먹이며 사랑한다는 뜻이다.라고 하고, 마침내 자신의 아들 孫皓 및 여러 희첩들의 아들 孫德, 孫謙, 孫俊을 양육하여 모두 그 덕분에 온전하게 되었다.注+孫德, 孫謙, 孫俊은 세 아들의 이름이다.
齊王 孫奮이 제갈각이 주살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建業에 와서 변화의 양상을 살펴보려 하자 이 간언하였는데 손분이 그를 죽이니 손분 역시 연좌되어 폐위되고 庶人이 되었다.


역주
역주1 盜殺大將軍費禕 : “盜(자객)는 누구인가. 항복한 사람 郭循이다. 痲秋가 苻洪을 죽였을 적에는 ‘故趙將(前 後趙의 장군)’이라고 기록하였다.(晉나라 穆帝 永和 6년(350)) 곽순은 前 魏나라 신하로서 뜻이 復讐에 있었는데 ‘盜’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逆順을 달리 말하여 우선 費禕를 허물한 것이다. 어째서 허물하는가. 자신이 漢나라 大將軍이었는데 자객이 암살할 수 있었으니, 또한 그 허물을 책임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록하기를 ‘大將軍費禕’라고 한 것이다.[盜者 何 降人郭循也 痲秋殺苻洪 則書故趙將(晉穆帝永和六年) 循故魏臣也 志在復讐 則其書盜 何 逆順異辭 且咎禕也 曷爲咎之 身爲漢大將軍 而盜得殺之 亦不得不任其咎矣 故書曰大將軍費禕]” ≪書法≫
“이는 郭循이다. 이미 左將軍이 되어 品秩이 또한 높은데 어찌하여 ‘盜’라고 썼는가. 저 사람은 진실로 도적의 행동일 뿐이다. 곽순이 진실로 섬기는 분에게 충성을 하려 했다면 어찌 포획당할 때에 죽지 않았는가. 이미 蜀漢의 벼슬을 받고 다시 비수를 끼고서 간사한 짓을 하였으니 이는 바로 豫子(豫讓)가 말한 ‘이미 예물을 바치고 신하가 되어서 또다시 그를 죽이려고 한다면 이는 두 마음을 품는 짓이다.’라는 것이다. 곽순이 이와 같이 행한 것은 魏나라에 이익을 바라는 것에 불과하니, 이는 다만 담장을 뚫고 도둑질하는 하등의 행위인 것이다. ‘盜’라고 쓴 것이 어찌 지나친 것이겠는가.[此郭循也 旣爲左將軍 秩亦尊矣 何以書盜 彼固盜賊之靡耳 循苟欲忠於所事 何不死於見獲之時 旣受漢爵 乃復挾匕首以爲姦 此正豫子所謂旣已委質爲臣 而又求殺之 是二心者也 循之所爲如此 不過徼利於魏 是特穿窬之下者耳 以盜書之 夫豈過哉]” ≪發明≫
역주2 岑彭과……일 : 岑彭은 後漢 光武帝가 즉위하자 장군이 되어 여러 차례 공을 세워 舞陰侯에 봉해졌다. 建武 11년에 반란을 일으킨 公孫述을 공격하여 진격하였는데, 彭亡이란 곳에 주둔했다가 밤에 공손술이 보낸 자객의 칼에 찔려 죽었다.(≪後漢書≫ 〈岑彭列傳〉) 來歙도 光武帝를 도와 공손술을 공격하다가 공손술이 보낸 자객에 의하여 피살되었다.(≪後漢書≫ 〈來歙列傳〉)
역주3 郭循 : ≪資治通鑑≫ 註에 보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偱은 字書를 두루 살펴보건대 그 글자가 없다. ≪三國志≫ 〈三少帝紀〉에 ‘郭脩’로 되어 있고 〈蜀書 張嶷傳〉에도 ‘郭脩’로 되어 있고 裴松之의 註에도 ‘脩의 字는 孝先이다.’ 하였다. 〈費禕傳〉에는 ‘郭循’이라 하였고 〈後主傳〉에도 또한 그러하다. 지금 ≪三國志≫의 舊本은 모두 循자를 쓴 것은 偱자를 따른 것이 많다. 지금 생각건대 이 偱자는 곧 脩자의 오자이다.” 底本과 ≪御批資治通鑑綱目≫에는 循으로 되어 있고 ≪資治通鑑≫에는 偱으로 되어 있다. 訓義에는 ≪資治通鑑≫ 胡三省 注에 따라 脩가 옳다고 본 것으로 보인다. 본서에서는 이설이 많으므로 저본대로 郭循으로 해석하였다.
역주4 三秦 : 項羽가 秦나라를 멸망시킨 후 關中 지역을 雍, 塞, 翟 셋으로 나누고 항복한 秦나라 장수 章邯, 司馬欣, 董翳를 봉하여 漢中에 봉해진 劉邦을 견제하게 하였다.(≪漢書≫ 〈高帝紀〉)
역주5 어찌……없었다 : 諸葛恪은 諸葛瑾의 아들로 諸葛亮의 조카이다. 제갈량은 蜀漢에 벼슬하여 魏나라를 정벌하자는 表文 〈出師表〉를 後主 劉禪에게 올렸는데 名文으로 일컬어졌고, 이를 제갈각이 읽고 감탄한 것이다.
역주6 옛날에……패배하였습니다 : 漢 景帝 때 吳나라와 楚나라가 반란을 일으키자 周亞夫에게 정벌하도록 하였다. 주아부는 출전하지 않고 날랜 군사를 파견하여 은밀히 吳‧楚의 식량 보급로를 차단하자 吳‧楚가 식량이 떨어져 철수하려고 자주 도전해왔으나 성벽을 굳게 지키고 끝내 출전하지 않았다. 어느 날 밤중에 軍中이 놀라 요란하게 서로 공격하며 장막의 부근에까지 이르렀으나 주아부가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있자 다시 진정되었다. 그 뒤에 吳‧楚가 굶주림에 시달려 퇴각하자 출격하여 큰 전공을 거두었다.(≪漢書≫ 〈周亞夫傳〉)
역주7 (軸轤)[舳艫] : 저본에는 ‘軸轤’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舳艫’로 바로잡았다.
역주8 吳殺其太傅諸葛恪 : “諸葛恪은 죄가 많은데, 그가 죄가 없는 경우로써 ‘殺’을 쓴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해당 죄가 아닌 것으로 죽였기 때문이다. ≪資治通鑑綱目≫의 書法은 비록 죄가 있더라도 해당 죄가 아닌 것으로 죽이면 한결같이 죄가 없는 것으로 기록하였다.[恪罪多矣 其以無罪書殺何 殺不以其罪也 綱目之法 雖有罪而殺之不以其罪 一以無罪書之也]” ≪書法≫ 朱子의 〈綱目凡例〉에 無罪면 “아무 관직 아무개를 죽였다.[殺某官某]”라고 쓴다 하였다.
역주9 傅相 : 제후왕의 太傅 겸 國相을 이른다. 漢 景帝 이후 제후왕이 나라를 직접 다스리지 못하게 하여 國相이 이를 다스렸는데 제후왕을 보필하기 때문에 傅相이라 하였다.

자치통감강목(12) 책은 2021.01.0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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