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帝過에 式其墓러니 是月에 還宮注+蕭何墓, 在長陵東司馬門道北. 霍光墓, 在茂陵東司馬門道南.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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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년己未年(59)
【강綱】 한漢나라 현종 효명황제顯宗 孝明皇帝영평永平 2년이다. 봄 정월에 광무황제光武皇帝를 명당明堂에서 높여 제사하고 처음으로 면류관을 쓰고 패옥을 차고 영대靈臺에 올라서 운물雲物을 바라보았다.注+“운물雲物”은 구름의 색깔에 따른 재변을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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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3월에 황제가 벽옹辟雍(태학太學)에 왕림하여 대사례大射禮를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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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겨울 10월에 양로례養老禮를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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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상上이 벽옹辟雍에 행차하여 처음으로 양로례養老禮를 행할 적에 이궁李躬을 삼로三老로 삼고 환영桓榮을 오경五更으로 삼았는데注+갱更은 공형工衡의 절切이다. 삼로三老는 노인 중에 천天, 지地, 어인人의 일을 아는 자이고, 오경五更은 노인 중에 오행五行이 번갈아 교대하는 일을 아는 자이다. 일설에 “삼로와 오경은 모두 나이가 많고 일을 경험하고 치사致仕한 자이다.” 하였다. 삼三, 오五라고 이름한 것은 삼신三辰(해, 달, 별)과 오성五星(금성金星, 목성木星, 수성水星, 화성火星, 토성土星)에서 상象을 취한 것이니, 삼신三辰과 오성五星은 하늘이 천하를 밝게 비추게 해주는 별이다., 삼로는 도저대포都紵大袍를 입고 진현관進賢冠을 쓰고 옥장玉杖을 짚었다.注+≪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이 아래에 “오경五更 또한 이와 같이 하되, 지팡이를 짚지 않았다.”는 내용이 있다. 복服은 옷을 입는 것이다. 도都는 도포都布를 이른다. 솜을 옷에 넣는 것을 ‘저紵’라 한다. 포袍는 속옷[설의褻衣]이다. 〈도저대포都紵大袍는〉 도포都布를 가지고 대포大袍를 만들고 여기에 솜을 넣은 것을 이른다. 일설에 “저紵는 경檾(모시)의 등속이니, 모시를 길쌈하여 아름다운 삼베를 만들었으므로 ‘도저都紵’라 한다.” 하였다. 관冠(관을 쓰다)은 거성去聲이다. 진현進賢은 옛 치포관緇布冠이니, 유자儒者의 복식이다. 앞은 높이가 7촌寸이고 뒤는 높이가 3촌寸에 길이가 8촌寸이니, 후한後漢 때에 진현관進賢冠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백성의 나이가 처음 70이 되면 옥장玉杖을 주었다. 옥장은 길이가 7척尺이니, 옥을 조각하여 비둘기 모양을 만들어서 지팡이의 위에 달았다. 비둘기는 음식을 먹을 때에 목이 메지 않는 새이니, 노인들이 음식을 먹을 적에 숨이 막히지 않기를 바라는 뜻이다.
승여乗輿가 벽옹의 예전禮殿에 도착하여 동상東廂에 앉고는 사자使者를 보내 안거安車로 삼로와 오경을 태학太學의 강당으로 맞이하게 하였다.注+“강당講堂”은 수업하는 집이다.
천자天子가 문병門屛에서 맞이하여 서로 예를 행하고 천자는 조계阼階(동쪽 계단)에서 인도하고注+도道(인도하다)는 도導로 읽는다. 삼로는 빈계賓階(서쪽 계단)로부터 올라가되, 삼로와 오경이 계단에 이르면 천자가 읍하기를 예禮와 같이 하였다.
삼로가 올라와서 동면東面을 하자, 삼공三公은 삼로를 위해 안석[궤几]을 진설하고 구경九卿은 신발을 가지런히 놓았다. 천자가 직접 웃통을 벗고 희생을 베어서 장醬을 잡고 음식을 올리고 술잔을 잡고 입가심하게 하였으며注+장醬은 젓갈이고 궤饋는 음식을 올림이니, 장醬은 음식의 맛을 내는 주재료이므로 이것을 잡고 음식을 올린 것이다. 작爵(술잔)은 예기禮器이다. 윤酳은 음이 윤胤으로 〈술이나 물로〉 입가심(탕구질)을 하는 것이니, 음식을 다 먹은 다음 입가심함을 이른다.,
축경祝哽(축경)은 식전에 하였고 축의祝饐(축애)는 식후에 하였다.注+축祝(축원하다)은 지륙之六과 직구職救 두 절切이다. 경哽은 고행古杏의 절切이고, 의饐는 일결一結의 절切이다. 경哽은 음식이 목구멍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니, 〈“축경祝哽”은〉 노인은 매번 음식을 먹을 적에 목구멍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으므로 음식을 먹기 전에 축원해서 목구멍에 머물러 있지 않게 한 것이다. 의饐는 음식이 막혀서 숨이 통하지 못하는 것이니, 〈“축의祝饐”는〉 음식을 먹고 난 뒤에 축원해서 숨이 막히지 않게 한 것이다. 오경이 남면南面하자, 삼공이 음식을 올리되, 예를 또한 삼로와 같이 하였다.
辟雍에 親臨하여 養老禮를 행하다(≪帝鑑圖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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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예禮를 마친 다음 환영桓榮과 제자들을 인도하여 당堂으로 올라오게 해서 상上이 직접 말씀을 내려 경서經書를 설명하자, 여러 유생들이 경서를 잡고 황제 앞에서 묻고 논란하니注+상上은 천자天子를 이른다. “하설下說”은 말씀을 내려 강설함을 이른다. “문난問難”은 의심스러운 것을 들어 논란하여 물음을 이른다. 난難(논란하다)은 거성去聲이니, 아래의 “발난發難”도 같다.,
관을 쓰고 띠를 묶고 홀을 꽂은 사람들이 교문橋門을 에워싸 구경하고 듣는 자가 억만億萬으로 헤아려졌다.注+벽옹辟雍은 사방의 문밖에 에워싸고 있는 물이 있어서 구경하는 자들을 통제하였다. 문밖에 모두 다리가 있는데, 구경하는 자들이 물 밖에 있으므로 “환교문圜橋門”이라 한 것이다. 이에 조령詔令을 내려서 환영에게 관내후關内侯의 작위를 하사하고注+≪자치통감고이資治通鑑考異≫에 “〈명제 본기明帝 本紀〉에 조문詔文이 실려 있는데, 위에는 이궁李躬을 말하고 아래에는 유독 환영桓榮만을 봉하였는바, 궁躬자가 빠진 듯하다.” 하였다. ≪후한서後漢書≫ 〈환영전桓榮傳〉과 원굉袁宏의 ≪후한기後漢紀≫에는 조문詔文에 환영만 말하고 이궁은 언급하지 않았으니, 지금 의심스러운 것을 제쳐놓는다.
삼로三老와 오경五更을 모두 이천석二千石의 녹봉으로 그 몸이 죽을 때까지 봉양하게 하였으며注+양養(봉양하다)은 상성上聲이니, 〈“양종궐신養終厥身”은〉 녹봉으로 봉양하여 그 천수天壽를 다하게 함을 이른다., 천하의 삼로에게 1인당 술 1석石(섬)과 고기 40근斤씩을 하사하였다.注+“천하삼로天下三老”는 향鄕과 현縣의 삼로를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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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상上이 태자太子였을 때부터 환영桓榮에게 ≪상서尙書≫를 배웠는데, 황제의 지위에 오르고 나서도 여전히 환영을 스승의 예로 높였다.
황제는 일찍이 태상부太常府에 행차하여注+환영桓榮이 이때 태상太常으로 있었다. 환영으로 하여금 스승의 자리인 동면東面에 앉게 하고 궤几와 장杖을 진설하고注+궤几(안석)는 노인이 기대는 것이고, 장杖(지팡이)은 노인이 짚고 의지하는 것이다.백관百官과 환영의 문생 수백 명을 모아놓고서注+“문생門生”은 문하에서 수업한 자이다.상上이 직접 경서經書를 받들고 수학受學하였는데,
생도들이 혹 자리에서 나와 의심스러운 것을 논란하자, 상上이 겸손하게 말하기를 “태사太師가 이 자리에 계시다.”注+“집업執業”은 집경執經(경서經書를 받들다)과 같다. “피위避位”는 출석出席(자리에서 나오다)이란 말과 같다. “발난發難”은 의아해하며 논란하는 것이다. 하였다. 자리가 파한 다음 태관太官에서 공급한 음식을 모두 태상太常(환영)의 집에 하사하였다.
환영이 병을 앓을 때마다 황제는 번번이 사자使者를 보내 문안하여 태관太官과 태의太醫가 도로에 서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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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수레에서 내려와 桓榮을 문병하다(≪養正圖解≫)
【목目】 환영桓榮은 병이 위독해지자, 상소하여 은혜에 사례하고 작위와 식읍을 사양하고 되돌려주었다. 황제가 안부를 물으려고 그의 집에 행차했을 적에, 길거리에 들어서자마자 수레에서 내려 경전을 끼고 앞으로 나아가서는 환영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리고,
침상과 요, 장막과 도검刀劍, 옷과 이불을 하사하고 한동안 있다가 떠나왔다.注+“옹경이전擁經而前”은 경서經書를 옆에 끼고 앞으로 나아감을 이른다. 인茵은 요이다. 이로부터 문병하러 온 제후諸侯와 장군將軍, 대부大夫들이 감히 다시는 수레를 타고 그의 집 앞에까지 이르지 못하였고, 모두 침상 아래에서 환영에게 절하였다.
환영이 졸卒하자, 황제는 직접 옷을 갈아입고서 상喪에 임곡臨哭하여 장송葬送하고 수양산首陽山의 남쪽에 장지葬地를 하사하였다.注+이현李賢이 말하기를 “수양산首陽山은 지금의 언사현偃師縣 서북쪽에 있다.” 하였다. 아들 환욱桓郁이 뒤를 이어야 하는데, 그의 조카인 환범桓汎에게 사양하였다.注+〈“자욱당사 양기형자범子郁當嗣 讓其兄子汎”는〉 환영桓榮의 맏아들 환옹桓雍이 일찍 졸卒하였기 때문이다.
황제가 허락하지 않으니, 환욱이 마침내 봉작封爵만 받고 조세 수입을 모두 환범에게 주자, 황제는 환욱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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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호씨胡氏(호인胡寅)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현종顯宗(명제明帝)이 스승을 섬긴 뜻을 보면, 예의와 물건이 성대하여 수천 수백 년에 그 상대가 될 만한 자가 드무니, 군주의 높은 운치와 성대한 예절이라고 이를 만하다.
애석하다. 환영桓榮은 경서經書를 전수함에 장구章句에만 치중하여, 중니仲尼(공자孔子)의 몸을 닦고 천하를 다스리는 깊은 뜻과 큰 의리를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 군주의 덕업德業이 이와 같음에 그쳤으니注+“전문專門”은 경經을 설명하는 자들이 각각 자신의 일가一家를 스스로 옳다고 여김을 말한다. 뜻이 끊긴 곳을 경章이라 하고 말이 끊긴 곳을 구句라 하니, 〈“전문장구専門章句”는〉 그 경章을 나누고 구句를 분석하는 학문에만 오로지 힘씀을 말한 것이다., 만약 자사子思와 맹자孟子와 같은 무리가 이러한 때를 만나서 배운 바를 행할 수 있었더라면, 반드시 이제二帝가 삼제三帝가 되고 삼왕三王이 사왕四王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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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중산왕 유언中山王 劉焉이 봉국封國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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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상上은 중산왕 유언中山王 劉焉이 곽태후郭太后의 작은 아들로 태후太后가 매우 사랑했다 하여 그만 홀로 경사京師에 남겨두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여러 왕들과 함께 봉국封國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그러나 호분虎賁과 관기官騎를 하사하는 등 은총이 더욱 두터워서 홀로 경사京師에 왕래할 수 있었다.注+≪한관의漢官儀≫에 “추기騶騎를 왕가王家에서는 관기官騎라고 이름한다.” 하였다. 황제는 음씨陰氏와 곽씨郭氏를 예우하여 매사를 반드시 균등하게 하였고 상賞을 자주 내려서 은총이 모두 지극하였다.
로 소하蕭何와 곽광霍光에게 제사하고, 황제가 지나갈 적에 그들의 묘에 경의를 표하였다. 이달에 환궁하였다.注+소하蕭何의 묘墓는 장릉長陵의 동쪽 사마문司馬門 길 북쪽에 있고, 곽광霍光의 묘墓는 무릉茂陵의 동쪽 사마문司馬門 길 남쪽에 있다.
역주
역주1行養老禮 :
“光武帝가 中興했을 적에 무기를 내려놓고 六藝를 강하며 軍馬를 쉬게 하고 道를 논하여, 文治에 유념한 것이 오래되었다. 말년에 처음으로 三雍(靈臺, 辟雍, 明堂)을 세웠으나 親臨하지 못했는데, 明帝가 광무제의 뒤를 이어서 明堂에서 높여 제사함을 거행하고 雲臺에서 구름의 색깔을 관망하며 大射禮와 養老禮를 행하여, 東都(東漢)의 문물이 이에 찬란하여 볼만하였으니, 책에 이것을 쓴 것은 훌륭한 명성으로 삼을 만하기 때문이었다. ≪詩經≫ 〈大雅 文王有聲〉에 ‘후손들에게 좋은 계책을 남겨주어서 공경하는 아들을 편안히 한다.’ 하였으니, 光武帝가 이대로 하였고, 또 〈下武〉에 ‘밝게 뒤를 이어 그 선조의 발자취를 이었다.’ 하였으니, 顯宗에게 이러한 일이 있었다.[光武中興 投戈講藝 息馬論道 其留意文治久矣 末年肇建三雍 未及臨嚮 明帝繼之 擧宗祀 望雲物 行大射養老之禮 東都文物 於是 彬彬可觀 書之于冊 足爲美稱 詩曰 貽厥孫謀 以燕翼子 光武以之 又曰 昭哉嗣服 繩其祖武 顯宗有焉]” ≪發明≫
역주2(九)[七] :
저본에는 ‘九’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七’로 바로잡았다.
역주3(杳)[杏] :
저본에는 ‘杳’로 되어 있으나, ≪中文大辭典≫에 의거하여 ‘杏’으로 바로잡았다.
역주4中山王焉 :
“焉은 어떤 사람인가. 郭后가 사랑하던 아들이다. 建武 말년에 일찍이 여러 왕을 보내 封國으로 나아가게 했는데, 明帝가 〈太子로 있으면서〉 특별히 그만 머물러 있기를 청하였다가 이때 비로소 내보냈으니, 황제가 廢后(郭后)를 대우한 것이 조금의 혐의도 없다고 이를 만하다. 특별히 써서 찬미한 것이다.[焉者 何 郭后所愛子也 建武末年 嘗遣諸王就國矣 明帝請特留之 至是始遣 帝之待廢后 可謂無纎介之嫌矣 特書美之]다” ≪書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