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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8)

자치통감강목(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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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申年(72)
十五年이라 春二月 帝東巡하여 耕于下邳하다 三月 至魯하여
詣孔子宅注+下邳縣, 本屬東海郡, 是年, 以臨淮郡爲下邳國, 下邳縣屬焉.
하다
幸孔子宅하여 親御講堂하여 命皇太子, 諸王說經注+賢曰 “孔子宅, 在今兗州曲阜縣故魯城中歸德門內闕里之中, 背洙面泗, 矍相國之東北也.” 漢春秋曰 “帝時升廟, 立群臣中庭, 北面皆再拜, 帝進爵而後坐.”하다
封皇子恭爲鉅鹿王하고 黨爲樂成王하고 衍爲下邳王하고 暢爲汝南王하고 昞爲常山王하고 長爲濟陰王注+樂成國, 本信都郡, 帝改名.할새
帝親定其封域하여 裁令半楚, 淮陽注+諸子之封域, 比楚王英ㆍ淮陽王延之地, 裁及其一半.하다 馬后曰 諸子食數縣 於制 不已儉乎잇가
帝曰 我子豈宜與先帝子等이리오 歲給二千萬이면 足矣라하니라
遣都尉耿秉, 竇固하여 將兵屯涼州하다
謁者僕射耿秉 數上言하여 請撃匈奴注+秉, 國之子也.한대 上以顯親侯竇固 嘗從其世父融하여 在河西하여 明習邊事注+父之昆弟, 先生爲世父, 後生爲叔父.라하여
乃使秉, 固 與太僕祭肜 虎賁中郎將馬廖 下博侯劉張 好畤侯耿忠等으로 共議之注+廖, 音聊, 援之子. 張, 齊王縯之孫, 忠, 弇之子也.하다
耿秉曰 昔者 匈奴并左衽之屬이라 不可得而制러니 孝武旣得河西四郡及居延, 朔方
羌, 胡分離하고 唯有西域이요 俄復内屬이라 呼韓邪單于請事欵塞하니 其勢易乗也니이다
今有南單于하여 形勢相似이나 西域 尙未内屬하고 北虜未有釁作하니
臣愚 以爲當先擊白山하여 得伊吾하고 破車師하고 通使烏孫諸國하여 以斷其右臂注+白山, 卽祁連山. 伊吾, 卽伊吾盧地.
伊吾亦有匈奴南呼衍一部 破此 復爲折其左角이니 然後 匈奴可擊也注+呼衍, 本南部之號, 後因以爲氏, 蓋其貴種也.리이다
善其言이러니 議者或以爲 今兵出白山이면 匈奴必并兵相助리니 又當分其東하여 以離其衆이니이다하니 從之하다
十二月 以秉爲駙馬都尉하고 固爲奉車都尉하며 以騎都尉秦彭爲秉副하고 耿忠爲固副하여 皆置從事, 司馬하여 出屯涼州하다


임신년壬申年(72)
나라 현종 효명황제顯宗 孝明皇帝 영평永平 15년이다. 봄 2월에 황제가 동쪽으로 순행하여 하비下邳에서 친경례親耕禮를 행하였다. 3월에 지역에 가서 공자孔子의 고택에 나아갔다.注+하비현下邳縣은 본래 동해군東海郡에 속했었는데, 이해에 임회군臨淮郡하비국下邳國으로 삼으면서 하비현下邳縣을 소속시켰다.
공자孔子의 고택에 행차하여 친히 강당講堂에 나아가 황태자皇太子제왕諸王들에게 명하여 경서經書를 강설하게 하였다.注+이현李賢이 말하기를 “공자孔子의 고택은 지금의 연주 곡부현兗州 曲阜縣나라 성중 귀덕문城中 歸德門궐리闕里의 가운데에 있었는데, 수수洙水를 등지고 사수泗水를 마주하였으니, 확상국矍相國(곽상국)의 동북쪽이다.” 하였다. ≪한춘추漢春秋≫에 “황제가 이때 공자孔子의 사당에 올라가서 신하들을 뜰에 세우고 북향하여 모두 공자孔子에게 재배再拜하였으며, 황제가 술잔을 올린 뒤에 앉았다.” 하였다.
황자皇子 6명을 봉하여 왕으로 삼았다.
황자 유공皇子 劉恭을 봉하여 거록왕鉅鹿王으로 삼고 유당劉黨악성왕樂成王, 유연劉衍하비왕下邳王, 유창劉暢여남왕汝南王, 유병劉昞상산왕常山王, 유장劉長제음왕濟陰王으로 삼았는데,注+악성국樂成國은 본래 신도군信都郡인데, 황제가 이름을 바꾸었다.
황제가 친히 그 국경[봉역封域]을 정하여 겨우 초왕楚王(유영劉永)과 회양왕淮陽王(유연劉延)의 절반이 되게 하였다.注+여러 아들의 봉역封域초왕 유영楚王 劉英회양왕 유연淮陽王 劉延의 봉지에 비하면 겨우 절반에 미친 것이다. 마후馬后가 말하기를 “여러 황자들이 몇 개의 을 식읍으로 삼는 것은, 제도에 비해 너무 적지 않습니까?” 하니,
황제가 말하기를 “내 아들을 어찌 선제先帝(광무제光武帝)의 아드님들과 똑같이 할 수 있겠는가. 해마다 2천만 을 주면 충분하다.” 하였다.
】 겨울에 도위 경병都尉 耿秉두고竇固를 보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양주涼州에 주둔하게 하였다.
알자복야 경병謁者僕射 耿秉이 여러 번 상언上言하여 흉노匈奴를 공격할 것을 청하자注+경병耿秉경국耿國의 아들이다., 현친후 두고顯親侯 竇固가 일찍이 세부世父(백부伯父) 두융竇融을 따라 하서河西에 있으면서 변방의 일을 밝게 익혔다 하여注+아버지의 형제 중에 아버지보다 먼저 태어난 분을 세부世父라 하고, 뒤에 태어난 분을 숙부叔父라 한다.,
마침내 경병과 두고로 하여금 태복 제융太僕 祭肜(채융)과 호분중랑장 마료虎賁中郎將 馬廖(마료), 하박후 유장下博侯 劉張, 호치후 경충好畤侯 耿忠 등과 함께 의논하게 하였다.注+는 음이 이니, 〈마료馬廖는〉 마원馬援의 아들이다. 유장劉張제왕 유연齊王 劉縯(광무제光武帝의 형)의 손자이고, 경충耿忠경엄耿弇의 아들이다.
경병耿秉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옛날에 흉노匈奴가 옷깃을 왼쪽으로 하는 여러 오랑캐 무리들을 병탄하였기 때문에 제재할 수 없었는데, 효무제孝武帝하서河西의 4개 거연居延삭방朔方을 얻자,
강족羌族호족胡族이 분리되고 오직 서역西域만 남아 있었으며, 얼마 후 서역이 다시 내속内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나라를 섬길 것을 청하여 변방의 문을 두드렸으니, 그 형세가 타기 쉬웠습니다.
지금 남선우南單于가 있어서 형세가 비슷하지만, 서역은 아직도 내속内屬하지 않고 북쪽 오랑캐는 틈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은 생각하건대, 먼저 백산白山을 공격해서 이오伊吾를 점령하고 거사車師를 격파하고 오손烏孫의 여러 나라와 사신을 통해 흉노의 오른팔을 잘라야 합니다.注+ 이오伊吾는 바로 이오로伊吾盧의 지역이다.
이오伊吾에도 흉노의 일부가 있으니, 이들을 격파하면 다시 그 왼쪽 뿔을 자르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한 뒤에야 흉노를 공격할 수 있습니다.”注+호연呼衍은 본래 남부南部의 칭호였는데 뒤에 이것으로 를 삼았으니, 아마도 흉노의 귀족일 것이다.
이 그 말을 좋게 여겼는데, 의논하는 자들 중에 혹자가 말하기를 “지금 군대가 백산白山으로 출동하면 흉노匈奴가 반드시 병력을 연합하여 서로 도울 것이니, 또 마땅히 그 동쪽을 분리시켜 그 무리를 흩어지게 하여야 합니다.” 하니, 이 이 말을 따랐다.
12월에 경병耿秉부마도위駙馬都尉로, 두고竇固봉거도위奉車都尉로 삼았으며, 기도위 진팽騎都尉 秦彭을 경병의 로, 경충耿忠을 두고의 로 삼고는, 모두 종사從事사마司馬를 두어서 양주涼州에 나가 주둔하게 하였다.


역주
역주1 詣孔子宅 : “史書에는 ‘幸孔子宅(孔子의 고택에 행차하다.)’이라고 썼는데, 여기에서 ‘詣孔子宅’이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황제의 지위를 道보다 위에 올려놓지 않은 것이다. 군주가 신하의 집에 왕림했을 때에만 ‘幸’이라고 쓰니, ≪資治通鑑綱目≫에서 ‘詣孔子宅’이라고 쓴 것이 1번뿐이다.[史書幸孔子宅 此其書詣 何 不以位加道也 唯君臨其臣 則書幸 綱目書詣孔子宅 一而已]” ≪書法≫ “하늘이 下民을 도와 군주와 스승을 세워서 다스림과 가르침을 맡겨서 서로 병행하게 하였으니, 진실로 한 가지를 들고 한 가지를 폐할 수 없는 것이다. 후세에는 군주를 너무 심하게 높여서 孔子를 제후의 신하[陪臣]로 삼아 天子가 절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자가 있었으니, 스승을 높이고 道를 중히 여긴 뜻은 아마도 이와 같지 않을 듯하다. 顯宗이 師傅를 높인 것이 前古에 뛰어나니, 그가 桓榮을 스승으로 섬긴 禮를 보면 이것을 알 수 있다. 황제가 魯 지역에 행차한 것을 예전의 史書에서는 모두 ‘幸孔子宅’이라고 썼으니, 이는 진실로 세속에서 익숙히 들은 말로 배우는 자들 역시 그 구두에 익숙하여 살피지 못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을 편수할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詣孔子宅’이라고 썼으니, 아! 우리 聖人의 道가 어찌 區區하게 이 한 글자를 따지겠는가. 그러나 賢者의 마을에 경례하고 賢者의 墓에 경의를 표하여, 옛 제왕들이 한 어진 선비에게도 저와 같이 공경하였는데, 어찌 공자께서는 만세의 仁義禮樂의 宗主로서 三綱을 붙들고 世敎를 드리워서 天地가 힘입어 확립되고 인류가 힘입어 멸망되지 않았다고 하면서, 孔子의 고택에 황제가 친림하고 행차하는 禮를 加할 수 있겠는가. 군자가 이것을 표출하지 않았다면 聖人이 衆人과 똑같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식견이 있는 자와 더불어 말할 수 있고, 세속에 아첨하는 자와는 쉽게 논할 수가 없으니, 슬프다.[天佑下民 作之君師 職治職敎 相與竝行 固不可擧一而廢一也 自後世尊君太甚 於是有以孔子爲陪臣而天子不當拜之者 崇師重道之意 殆不如此 顯宗尊崇師傅 夐絶前古 觀其師事桓榮之禮 蓋可見矣 至魯之行 前史皆曰幸孔子宅 此固世俗習熟之語 學者亦習其句讀而不察者也 至綱目修之 始以詣孔子宅爲文 嗚呼 吾聖人之道 豈區區較此一字哉 式閭表墓 古帝王於一賢士 猶敬之如彼 孰謂萬世仁義禮樂之宗主 扶三綱 垂世敎 天地賴之以有立 人類賴之以不滅 其故居宮室 乃可以臨幸之禮加之哉 不有君子表而出之 則聖人與衆人等耳 雖然此可與識者語 未易與諛俗論也 嗟夫]” ≪發明≫
역주2 封皇子六人爲王 : “景帝의 여섯 아들과 武帝의 세 아들을 세울 적에는 모두 나열하여 썼는데, 여기에서 나열하여 쓰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황제(明帝)의 아름다운 뜻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황제의 아름다운 뜻을 이루려고 하면서 어찌하여 나열하여 쓰지 않았는가. 황제가 말하기를 ‘내 아들을 어찌 先帝의 아드님들과 똑같이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이에 아들들의 封地가 겨우 楚王(劉英)과 淮陽王(劉延)의 절반이 되게 하였으니, 황제는 절제할 줄을 알았다. 그러므로 생략하고 나열해 쓰지 않은 것이니, 이는 황제의 아름다움을 이루어주기 위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은 漢나라 宣帝 이하로 唐나라에 이르기까지 아들을 봉한 것을 다 쓰지 않고 연고가 있을 때에만 썼다.[景帝六子 武廟立三子 皆序 此其不序 何 成帝意也 成帝意則曷爲不序 帝之言曰 我子豈宜與先帝子等 於是封域 裁半楚淮陽 帝知節矣 故略之不序者 所以成帝之美也 綱目自漢宣帝以下至唐 封子不悉書 有故則書之]다” ≪書法≫
역주3 南呼衍 : 呼衍은 單于의 씨족인 攣鞮氏와 혼인을 맺는 인척 씨족으로 흉노의 지배층을 형성했다. 흉노가 남북으로 분열되면서 연제씨의 권위는 하락하고 호연씨 등 인척 씨족의 권위가 상승하였다.(≪後漢書 外國傳 譯註≫) 여기서 南呼衍은 아래 보이는 呼衍王의 세력을 가리킨 듯하다.
역주4 白山은……祁連山이다 : 본서 98쪽 訓義①에서는 白山을 天山으로 보았다.

자치통감강목(8) 책은 2019.09.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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