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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8)

자치통감강목(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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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元徽四年이요 魏承明元年이라
魏尙書李敷李訢 少相親善注+敷, 順之子也.이러니 訢爲相州刺史하여 受賂라가 爲人所告어늘 敷掩蔽之注+相, 息亮切. 魏改鄴縣爲相州.하니 魏太上聞之하고 檻車徵訢하여 按驗當死하니
敷弟奕 得幸於馮太后 太上意已疏之注+得幸, 私通也.러니 有司以中旨諷訢호되 告敷兄弟陰事하면 可以得免이라하니
訢謂其壻裴攸曰 吾與敷 族世雖遠이나 恩踰同生하니 情所不忍이요 且吾安能知其陰事리오 將若之何오하니
攸曰 何爲爲人死也注+下爲, 去聲. 有馮闡者先爲敷所敗하니 今詢其弟 敷陰事 可得也
訢從之하여 令范檦 列敷事三十餘條注+檦, 匹妙․卑遙二切.하여 有司以聞하니 太上怒하여 遂誅敷奕하니 訢得減死論하여 未幾 復爲尙書러라
馮太后由此怨太上하여 至是密行鴆毒하고 大赦改元하고 復臨朝稱制하여 以馮熙爲太師中書監하니 熙以外戚固辭어늘 乃除洛州刺史注+魏太宗取洛陽, 以晉司州爲洛州.하다
顯祖祔廟 執事之官 故事 皆賜爵이러니 祕書令程駿言호되 建侯裂地 帝王所重이니 或以親賢하고 或因功伐注+以勞定國曰功, 積功曰伐.이라 皇家故事 蓋一時之恩이니 豈可爲長世之法乎리오
太后從之하여 謂群臣曰 凡議事 當依古典正言이니 豈得但修故事而已注+修, 當作循.리오 太后性聰察하여 知書計曉政事하고 被服儉素하고 膳羞減於故事什七八이나 而猜忍多權數하니
魏主宏 性至孝하여 能承顏順志하여 事無大小 皆仰成焉하더라 太后所幸宦者王琚苻承祖等 皆依勢用事하여 官至僕射하고 爵爲王公하여 賞賜巨萬이요
太卜令王叡 得幸於太后하여 超遷尙書하고 祕書令李沖 雖以才進이나 亦由私寵注+沖, 寶之子也.하고 又外禮人望東陽王丕游明根等하여 每褒賞 輒以丕等參之러라
自以失行으로 畏人議己하여 群下語言 小涉疑忌 輒殺之하고 寵臣小過 笞箠或至百餘라가 尋復待之如初하더라
宋加蕭道成左僕射하고 劉秉中書令하다
楊運長阮佃夫等 忌建平王景素益甚하니 景素乃與參軍殷濔等으로 謀爲自全之計注+濔音米, 又音彌.하여 遣人往來建康하여 要結才力之士하니 將軍黃回等 皆與通謀러니
至是 羽林監垣祗祖帥數百人하여 自建康犇京口하여 云 京師已亂이라하여 勸令速入한대 景素信之하여 卽據京口起兵하니
楊阮 遣將軍任農夫及黃回等하여 將水軍以討之러니 蕭道成知回有異志하고 又命將軍李安民等하여 與之偕하니 回不得發이어늘 遂拔京口하여 擒景素斬之하고 黨與皆伏誅하다


송주宋主 유욱劉昱 원휘元徽 4년이고, 북위北魏 고조高祖 효문제孝文帝 탁발굉拓跋宏 승명承明 원년이다.
[] 여름 6월에 북위北魏 태후太后 풍씨馮氏가 그 임금 탁발홍拓跋弘을 시해하고注+① 顯祖(拓跋弘)는 향년이 23세였다. 다시 를 칭하였다.
[] 예전에 북위北魏상서尙書 이부李敷注+① 李敷는 李順의 아들이다. 이흔李訢이 젊어서 서로 친했는데, 그 후에 이흔이 상주자사相州刺史注+② 相(보다)은 息亮의 切이다. 北魏는 鄴縣을 고쳐 相州로 하였다. 되어 뇌물을 받았다가 어떤 사람에게 고발을 당하자, 이부가 허물을 덮어주었다. 북위北魏 태상太上(탁발홍拓跋弘)이 그 일을 듣고 함거檻車로 이흔을 불러들여 조사를 하여 이흔이 사형에 처해질 상황이었다.
당시에 이부의 아우 이혁李奕풍태후馮太后와 사통한 사이라注+③ “得幸”은 사통했다는 의미이다., 태상太上이 마음에 이미 그를 멀리 하였는데, 유사有司태상太上의 뜻을 이흔에게 은밀히 전하기를 이부 형제의 은밀한 일을 고발하면 죽음을 면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흔이 자신의 사위 배유裴攸에게 말하기를 “내가 이부와 집안의 세대는 비록 멀지만, 은혜는 한 배에서 태어난 형제보다 더하니 인정상 차마 고발할 수가 없는데다 내가 어찌 그의 은밀한 일을 알 수가 있겠는가. 이 일을 어찌 한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배유가 말하기를 “어찌 남을 위해 죽으려고 하십니까.注+④ 〈“何爲爲人死也”에서〉 아래의 爲(위하다)는 去聲이다. 풍천馮闡이라는 자가 앞서 이부에 의해 피해를 입었으니, 지금 그의 동생에게 물어보면 이부의 은밀한 일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흔이 그의 말을 따라 범표范檦注+⑤ 檦는 匹妙와 卑遙의 두 가지 切이다. 시켜 이부의 은밀한 일을 30여 조목으로 열거하여 유사가 이를 아뢰자, 태상太上이 진노하여 마침내 이부와 이혁을 주살하니 이흔은 사형에서 감면이 논의되었고 얼마 뒤에 다시 상서尙書의 지위에 올랐다.
[] 풍태후馮太后가 이로 말미암아 태상太上(탁발홍拓跋弘)을 원망하여 이때에 이르러 은밀히 짐독을 써서 독살하고 크게 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고치고는 다시 조정에 나와 를 칭하였다. 풍희馮熙태사太師 중서감中書監으로 삼자, 풍희가 외척이라는 이유를 들어 굳이 사양하니 낙주자사洛州刺史注+① 北魏 太宗이 洛陽을 취하여 晉나라의 司州를 洛州로 삼았다. 제수하였다.
현조顯祖(탁발홍)를 태묘太廟에 합사할 때에 고사에 의거하여 집사관執事官들에게 모두 작위를 하사하려고 하였는데, 비서령祕書令 정준程駿이 말하기를 “제후를 세우고 봉토를 나누는 것은 제왕들이 중시하는 일이니, 혹은 친분과 현명함을 가지고 혹은 공벌功伐注+② 노고를 하여 나라를 안정시키는 것이 功이고, 功을 쌓는 것이 伐이다. 가지고 행하였습니다. 황가皇家의 고사는 일시적인 은혜이니, 어찌 만세의 법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태후가 그 말을 따라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일을 논의함에 마땅히 옛 법전의 바른말에 의거해야 하니 어찌 고사故事만을 따를注+③ 修는 循(따르다)이 되어야 한다.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태후는 성품이 총명하여 글과 셈을 알고 정사에 밝았으며, 옷차림은 검소하고 반찬도 전례보다 열 가지 중에 일고여덟은 줄였지만, 시기심이 많고 잔인하였으며, 권모술수가 많았다.
위주魏主 탁발굉拓跋宏이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태후의 안색을 살펴 뜻에 순종하여 크고 작은 일에 관계없이 모두 우러러 보며 뜻대로 따라주었다. 태후의 총애를 받던 환관 왕거王琚부승조苻承祖 등이 모두 태후의 위세에 의지하여 일을 뜻대로 하여 관직이 복야僕射에 이르고, 작위는 왕공王公에 올랐으며, 상으로 거만巨萬을 하사받았다.
태복령太卜令 왕예王叡가 태후의 총애를 받아 등급을 뛰어넘어 상서尙書에 올랐고, 비서령祕書令 이충李沖注+④ 李沖은 李寶之의 아들이다. 비록 재주로 인해 진급을 하였지만, 역시 사사로운 총애에 연유한 것이며, 또 인망을 갖춘 동양왕東陽王 탁발비拓跋丕유명근游明根 등은 겉으로 예우하여 늘 왕예 등을 포상할 때마다 탁발비 등을 포상에 끼게 하였다.
자신의 잘못된 행동으로 인해 남들이 자신에 대해 논의할까 두려워하여 여러 신하들이 말에 조금이라도 의심되거나 꺼리는 점이 있으면 그때마다 그들을 죽이고, 총애하는 신하가 작은 실수를 저지르면 볼기와 채찍을 100여 대 정도 치고는 이윽고 다시 처음처럼 총애하였다.
[] 나라가 소도성蕭道成에게 좌복야左僕射의 관직을 더해주고, 유병劉秉중서령中書令으로 삼았다.
[] 가을 7월에 나라 건평왕建平王 유경소劉景素경구京口에서 병사를 일으켜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 양운장楊運長완전부阮佃夫 등이 건평왕建平王 유경소劉景素를 더욱 심하게 시기하니, 유경소가 참군參軍 은니殷濔注+① 濔는 음이 米이고, 또 다른 음은 彌이다. 등과 함께 스스로 온전히 할 수 있는 계획을 도모하였다. 사람을 파견하여 건강建康을 오가게 하여 재능과 힘이 있는 인사들과 교분을 맺으니, 장군 황회黃回 등이 모두 내통하여 모의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우림감羽林監 원지조垣祗祖가 수백 명을 이끌고 건강建康에서 경구京口로 달려가서 “경사京師가 이미 혼란스럽다.”라고 하여 속히 들어가도록 권하니, 유경소가 이를 믿고 경구京口를 점거하고 군사를 일으켰다.
양운장과 완전부가 장군 임농부任農夫와 황회 등을 보내어 수군을 이끌고 토벌하게 하였는데, 소도성蕭道成이 황회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또 장군 이안민李安民 등에게 명을 내려 황회와 함께 가게 하니 황회가 출동하지 못하였다. 드디어 경구京口를 함락하여 유경소를 사로잡아 목을 베었고, 그의 당여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역주
역주1 夏六月……復稱制 : “太后인데 ‘弑(시해했다)’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임금은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크게 無道한 짓을 하지 않았으나 비로 太后일지라도 ‘弑’라고 기록되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두 명의 임금이 없는 뜻을 밝히기 위함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婦人이 弑害를 행한 것을 기록한 것은 6번이고(晉나라 皇后 賈氏, 張貴人, 北魏 太后 馮氏, 太后 胡氏의 2번 弑害, 唐나라 皇后 韋氏), 太后가 조정을 다스리기를 ‘復(다시)’라고 기록한 것이 3번이다(이해(476) 北魏 馮氏, 梁나라 乙巳年(525) 北魏 胡氏, 唐나라 嗣聖 3년(686) 武氏).[太后也 書弑 何 君一而已 自非大無道 雖太后不免書弑 所以明無二上之義也 終綱目書婦人行弑者六(晉皇后賈氏 張貴人 魏太后馮氏 太后胡氏再弑 唐皇后韋氏) 太后臨朝稱書復者三(是年魏馮氏 梁乙巳年魏胡氏 唐嗣聖三年武氏)]” ≪書法≫“馮后는 어머니인데 또한 ‘弑(시해했다)’라고 기록할 수 있는가. 임금은 ≪周易≫ 卦爻의 九五의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社稷과 人神의 주인이 되고 宗廟 大統이 연관된 사람이다. 太后가 어머니일지라도 몰래 鴆毒을 사용하였으면 이는 正統을 멸하여 祖宗과 社稷에 죄를 지은 것이다. 만일 北魏에 인물이 있었다면 魏主가 병이 든 이유를 추궁하여 크게 행동하여 宗廟에 고하고 끊어 없앤 뒤에 그 弑逆의 죄를 바로잡아 시체를 시장과 조정에 펼쳐놓았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한다면 天地의 신령과 사람의 분노를 비로소 누그러져 宗廟와 社稷의 신령이 비로소 그 위치에서 편안해할 것이다. 과거에 魯나라 哀姜이 두 임금을 시해하는 데에 관여하였는데, 聖人(孔子)이 모두 弑害의 예로 기록하여 마치 떠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하였으니, 깊이 폄하하여 끊은 것이다. 어찌 어머니이기 때문에 그 죄를 경감할 수 있겠는가. 唐나라 武氏가 그가 낳은 아들을 폐위하자, 君子가 오히려 그 죄를 太廟에서 꾸짖어 죽음을 내리고 그 집안을 멸망시키려 하였는데 하물며 임금이 제 아들이 아닌데 또한 직접 鴆毒을 사용한 자이겠는가. 弑로 그것을 기록한 것이 어찌 지나친 것인가.[馮后母也 亦書弑 可乎 人君居九五之尊 爲社稷人神之主 宗廟大統所繫 太后雖母 然潜行鴆毒 則是絶減正統 得罪於祖宗社稷 使魏國有人 推求大行致疾之由 告諸宗廟 絶而廢之 然後正其弑逆之罪 肆諸市朝 夫如是 則天地神人之憤始紓 而宗廟社稷之靈 始安於其位矣 昔魯哀姜預弑二君 聖人皆以弑例書之 若其去而不返 所以深加貶絶 夫豈以母故末減其罪哉 唐武氏廢其所出之子 君子猶欲數其罪於太廟 賜之死而減其家 況君非己子 而又親行鴆毒者乎 以弑書之 夫豈過哉]” ≪發明≫ 哀姜은 春秋時代 齊 桓公의 딸이며 魯 莊公의 夫人인데 노 장공이 죽은 뒤 장공의 아들 子般이 즉위하자 애강은 자반을 죽여 閔公을 세웠다가 다시 민공을 죽였는데, 제 환공이 僖公을 세운 뒤 애강을 불러다 독을 먹여 죽었다.
역주2 (睿)[叡] : 저본에는 ‘睿’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叡’로 바로잡았다.
역주3 宋建平王……不克而死 : “劉景素는 지난해에 謀反하여 ‘有罪(죄가 있다.)’라고 기록하였는데 여기서 ‘起兵(군사를 일으켰다.)’이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劉昱을 죄준 것이다. 이때에 유욱이 즉위한 지 3년이 넘었는데, 혼몽한 광기가 더욱 극심하여 오직 楊運長과 阮佃夫만을 따랐다. 유경소가 社稷을 염두에 두었다면 그가 起兵한 것은 또한 부득이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한 명의 유경소에게 이전에는 ‘有罪’라고 기록하고 지금에는 ‘起兵’이라고 기록하였으니 유욱이 자신의 잘못을 고쳐 결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資治通鑑綱目≫에서는 악행에 빠진 사람을 가벼이 단절하지 않아 3년 동안 고치지 않은 뒤에 단절하였으니 충후한 마음이다. 그러므로 ‘有罪’라고 기록한 것은 신하된 자의 의리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고, ‘起兵’이라고 기록한 것은 임금 된 자의 경계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景素往年謀反 書有罪矣 此其書起兵何 罪昱也 於是昱立踰三年矣 昏狂益甚 唯楊阮是從 景素 心存社稷 則其起兵 亦不得已耳 故一景素也 前書有罪 今書起兵 則以昱之不能改决矣 綱目不輕絶人於惡 三年無改 然後絶之 忠厚之心也 是故書有罪 所以示爲人臣者之義 書起兵 所以示爲人主者之戒]” ≪書法≫

자치통감강목(18)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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