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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4)

자치통감강목(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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肅宗明皇帝太寧元年이라
趙光初六이요 後趙五年이라
春正月 冦臺登하여 陷越嶲, 漢嘉郡注+臺登縣, 屬越嶲郡.하다
◑二月 葬建平陵하다
◑三月 後趙冦彭城, 下邳하니 徐州刺史卞敦 退保盱眙注+敦, 壼之從父兄也.하다
謀簒位하여 諷朝廷徵己하니 帝手詔徵之한대 移鎮姑孰하여 屯于湖하고 以導爲司徒하고 自領揚州牧注+姑孰, 前漢丹陽春穀縣地, 有姑孰溪, 西入大江. 于湖縣, 本吳督農校尉治, 武帝太康二年, 分丹楊縣, 立于湖縣.하다
欲爲逆이어늘 王彬 諫之甚苦한대 變色하고 目左右하여 將收之러니
正色曰 君 昔歲殺兄하고 今又殺弟邪아하니 乃止注+兄, 謂王澄.하다
寧州刺史王遜하다
成李驤 攻寧州어늘 刺史王遜 遣將軍姚嶽하여 拒戰이러니 大敗之하고 追至瀘水而還하다
遜以嶽不窮追라하여 大怒하여 鞭之하고 怒甚하여 冠裂而卒注+遜傳 “怒甚, 髮上衝冠, 冠爲之裂.”하니
在州十四年 威行殊俗이라 詔除其子堅爲刺史하다
六月 立皇后庾氏하고 注+亮, 后兄也.하다
◑秋七月 趙撃陳安斬之하고 封姚弋仲爲平襄公하다
趙主曜圍安於隴城하니 頻出戰호되 輒敗 突圍出奔이어늘 曜遣將軍平先하여 追斬之하다
善撫將士하여 與同甘苦러니 及死 隴上人 思之하여 爲作壯士之歌注+歌曰 “隴上壯士有陳安, 軀幹雖小腹中寬, 愛養將士同心肝, 䯀驄馬鐵瑕鞍, 七尺大刀奮如湍, 丈八蛇矛左右盤, 十盪十决無當前. 戰始三交失蛇矛, 棄我䯀驄竄岩幽, 爲我外援而懸頭, 西流之水東流河, 一去不還子何.”하니라
氐, 羌 皆送任請降注+任, 質任也.이어늘 以赤亭羌酋姚弋仲으로 爲平西將軍하고 封平襄公注+平襄縣, 漢屬天水郡, 晉屬略陽郡.하다
帝畏王敦之逼하여 以鑒爲外援하여 使鎮合肥하니 忌之하여 表鑒爲尙書令하다
過敦하니 與論西朝人士하여注+時, 江東謂洛都爲西朝. 樂彦輔 短才耳 考其實하면 豈勝滿武秋邪注+彦輔, 廣字, 武秋, 奮字.
鑒曰 彦輔 道韻平淡하고 愍懐之廢 柔而能正이어니와 武秋 失節之士 安能擬之注+愍懷太子廢送許昌, 滿奮旣收東宮官屬之辭太子者, 趙王倫之簒, 奮又奉璽綬, 故謂之失節.리오
敦曰 當是時하여 危機交急이니라 鑒曰 丈夫當死生以之니라
惡其言하여 不復見이러라 敦黨 皆勸殺之호되 不從이러니 還臺하여 遂與帝謀討敦하다
後趙冦青州하여 陷之하다
石虎帥歩騎四萬하여 撃青州한대 郡縣 多降하니 遂圍廣固注+水經註 “廣固城, 在漢齊郡廣縣西北四里, 四周絶澗, 阻水深隍, 曹嶷所築也.”하다
曹嶷 出降이어늘 殺之하고 阬其衆三萬하다 虎欲盡殺嶷衆이어늘 刺史劉徴曰
今留徴 使牧民也 無民이면 焉牧이리오 徵將歸爾注+焉, 於虔切.라한대 虎乃留男女七百口하여 配徵하여 使鎮廣固하다
趙撃涼州하니 張茂降이어늘 趙封茂爲涼王하다
趙主曜自隴上으로 西撃涼州하니 戎卒 二十八萬이라 涼州大震하니 參軍馬岌 勸張茂親出拒戰이러니
長史氾禕請斬之어늘 岌曰 汜公 糟粕書生이라 不思大計注+莊子曰 “桓公讀書於堂上, 輪扁斲輪於堂下, 問桓公曰 ‘敢問公所讀者, 何言也.’ 公曰 ‘聖人之書也.’ 曰 ‘聖人在乎.’ 曰 ‘已死矣.’ 曰 ‘然則君之所讀者, 古人之糟粕已矣. 古之人與其不可傳者死矣.’”로다 明公父子 欲爲朝廷誅曜有年矣어늘
今曜自至하니 遠近 觀公此舉 當立信勇之驗하여 以副秦, 隴之望이니 力雖不敵이나 勢不可以不出이니이다
茂曰 善타하고 乃出屯石頭注+石頭, 在姑臧城東.하다
問計於參軍陳珍한대 珍曰 曜兵雖多 皆氐, 羌烏合之衆이라 恩信未洽하고 且有山東之虞注+謂方與石勒相圖也.하니 安能曠日持久하여 與我爭河西邪잇가
若二旬不退하면 請得弊卒數千하여 爲明公擒之하리이다
趙諸將 爭欲濟河어늘 曜曰 吾軍疲困하여 其實難用이니 今但案甲勿動하고 以威聲震之하여 若出中旬 茂表不至者 吾爲負卿矣리라
茂尋遣使稱藩한대 曜拜茂太師하고 封涼王하고 加九錫하다
楊難敵 降成이라가 復叛하여 殺成將李琀, 李稚하다
難敵 聞陳安死하고 大懼하여 請降於成하니 成將軍李稚 受其賂하고 遣還武都한대 難敵 遂據險不服하다
稚自悔失計하고 亟請討之注+亟, 欺冀切.어늘 成主雄 遣稚兄琀하여 撃之하다
長驅至下辨注+琀, 蕩之長子. 琀, 胡南․胡紺二切. 下辨縣, 屬武都郡.한대 難敵 遣兵하여 斷其歸路하고 四面攻之하니 琀, 稚深入無繼하여 皆爲所殺하다
趙封故世子胤하여 爲永安王하다
趙主曜世子胤 年十歲 長七尺五寸이요 既長 多力善射하고 驍捷如風이러니 靳準之亂 没於黒匿郁鞠部注+靳準之亂, 事見太興元年. 黑匿, 本虜複姓, 郁鞠其名. 或云 “黑匿郁鞠, 鮮卑別部之號.” 或云 “黑匿郁鞠旣歸胤, 曜嘉其忠欵, 封爲左賢王, 則亦匈奴之種也.”하다
陳安 既敗 自言於郁鞠注+通鑑 “胤自言於郁鞠.”한대 郁鞠 禮而歸之하니
曜悲喜하여 謂群臣曰 義孫 故世子也 材器過人하고 且渉歴艱難하니 吾欲法周文王, 漢光武하여 以固社稷而安義光하노니 何如注+故世子胤, 字義孫. 今太子煕, 字義光. 趙主意謂胤乃故世子, 又材器過人, 煕其弟也, 材不及胤, 而爲太子, 恐有不安, 故欲廢煕立胤, 以固社稷而使煕安也. 文王舍伯邑考而立武王, 光武廢太子彊而立東海王陽, 故引以爲證.
左光禄大夫卜泰進曰 文王 定嗣於未立之前하니 則可어니와 光武 以母失恩而廢其子하니 豈足爲法이리오
曏以東海爲嗣라도 未必不如明帝也니이다 文武才略 誠髙絶於世 然太子孝友仁慈하니 亦足爲承平賢主니이다
況東宫 民, 神所繋 豈可輕動이리오 臣等 有死而已 不敢奉詔로소이다 曜黙然이러라
進曰 父之於子 當愛之如一이니이다 今黜熙而立臣하시면 臣何敢自安이리잇고 茍以臣頗堪驅策인댄 豈不能輔熙以承聖業乎잇가 臣請效死於此하여 不敢聞命이로소이다
曜亦以熙羊后所生이요 時后已卒이라하여 不忍廢也러라
即胤之舅也 曜嘉其公忠하여 以爲光禄大夫하여 領太子太傅하고 封胤永安王하여 都督二宫禁衛, 錄尙書事하고 命熙盡家人之禮注+二宮, 曜宮及煕宮也.하다
趙涼王張茂城姑臧하다
茂大城姑臧하고 修靈鈞臺注+元帝太興四年, 茂築靈鈞臺, 以閻曾諫而止, 今復修之.어늘 别駕吴紹諫曰
明公 所以修城築臺者 蓋懲既往之患耳注+先是, 茂兄寔, 爲其帳下閻涉所殺, 今茂以此患爲懲戒. 或曰 “謂懲劉曜來攻也.”어니와 愚以爲茍恩未洽於人心이면 雖處層臺라도 亦無所益이요 適足以疑群下之志하고 示怯弱之形爾니이다
茂曰 亡兄 一旦失身於物注+亡兄, 卽寔也.하니 豈無忠臣義士欲盡節者哉리오마는 顧禍生不意하여 雖有智勇이나 無所施耳
王公設險하고 勇夫重閉 古之道也라하고 卒爲之注+易曰 “王公設險, 以守其國.” 左傳曰 “勇夫重閉, 而況國乎.” 重, 直龍切.하다
冬十一月 하다
敦從子允之 方總角注+総角, 聚兩髦也. 愛其聰警하여 常以自隨러라
敦常夜飲할새 允之辭醉先卧注+敦常之常, 通鑑作甞.러니 敦與錢鳳謀爲逆이어늘 允之悉聞其言하고 即於卧處 大吐하여 衣面竝汚
鳳出 果照視하여 見允之卧於吐中하고 不復疑之하다
其父舒拜廷尉하니 允之求歸省하여 悉以其謀白舒한대 舒與王導俱啓帝하여 陰爲之備하다
欲彊其宗族이라 故徙含督江西하고 以舒, 彬爲荆, 江刺史하다


[] 나라(동진東晉) 태령太寧 원년이다.
[] 조주趙主(전조前趙) 유요劉曜 광초光初 6년이고, 후조後趙 고조高祖 석륵石勒 5년이다.
[] 봄 정월에 대등현臺登縣注+① 臺登縣은 越嶲郡에 속하였다. 침략하여 월수군越嶲郡(월수군)과 한가군漢嘉郡을 함락하였다.
[] 2월에 〈원제元帝를〉 건평릉建平陵에 장례하였다.
[] 3월에 후조後趙팽성彭城하비下邳를 침략하니, 서주자사徐州刺史 변돈卞敦注+① 卞敦은 卞壼의 從父兄(사촌형)이다. 후퇴하여 우이盱眙(우이)를 지켰다.
[] 여름 4월에 왕돈王敦이 군대를 고숙姑孰으로 옮겨 주둔하고서 스스로 양주목揚州牧을 겸하고 왕도王導사도司徒로 삼았다.
[] 왕돈王敦은 황제의 지위를 찬탈할 것을 도모하고 조정에 넌지시 말하여 자기를 부르게 하니, 황제( 명제明帝)가 직접 조령詔令을 내려서 그를 불러들였다. 왕돈은 진영을 고숙姑孰으로 옮겨 우호현于湖縣에 주둔하고는注+① 姑孰은 前漢 때 丹陽郡 春穀縣의 지역으로, 여기에 姑孰溪가 있어서 서쪽으로 흘러 大江(長江)으로 들어간다. 于湖縣은 본래 吳나라 督農校尉의 治所였는데, 晉나라 武帝 太康 2년(281)에 縣을 나누어 于湖縣을 세웠다. 왕도王導사도司徒로 삼고 스스로 양주목揚州牧을 겸하였다.
왕돈이 반역을 하려고 하자, 왕빈王彬이 매우 간절하게 하니, 왕돈은 얼굴빛을 바꾸고 좌우에게 눈짓하여 그를 체포하려고 하였다.
왕빈이 정색하고 말하기를 “께서는 지난해에 형을注+② 兄은 王澄을 이른다. 지금은 또다시 아우를 죽이려 하십니까?” 하니, 왕돈이 마침내 중지하였다.
[] 영주자사寧州刺史 왕손王遜하였다.
[] 나라(성한成漢) 이양李驤영주寧州를 공격하자, 자사刺史 왕손王遜이 장군 요악姚嶽을 보내어 맞아 싸우게 하였는데, 요악이 이양의 군대를 크게 물리치고 노수瀘水까지 추격했다가 돌아왔다.
왕손은 요악이 끝까지 추격하지 않았다 하여 크게 노해서 요악을 채찍으로 때리고는, 지나치게 노여워하다가 이 찢어져 하였다.注+① ≪晉書≫ 〈王遜傳〉에 “지나치게 노여워하여 머리털이 위로 冠까지 솟구쳐 올라가니, 冠이 이 때문에 찢어졌다.” 하였다.
왕손王遜에 재임한 14년 동안에 그 위엄이 풍속이 다른 오랑캐 지역에까지 떨쳐졌다. 이에 조령詔令을 내려서 그의 아들 왕견王堅자사刺史로 제수하였다.
[] 6월에 〈나라(동진東晉)가〉 황후皇后 유씨庾氏를 세우고 유량庾亮注+① 庾亮은 황후의 오라비이다. 중서감中書監으로 삼았다.
[] 가을 7월에 나라(전조前趙)가 진안陳安을 공격하여 참수하고, 요익중姚弋仲(요익중)을 봉하여 평양공平襄公으로 삼았다.
平先以衆擊陳安平先以衆擊陳安
[] 조주趙主 유요劉曜진안陳安농성隴城에서 포위하니 진안이 여러 번 나와 싸웠으나 번번이 패하였다. 진안이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자 유요가 장군 평선平先을 보내어 쫓아가서 참수하였다.
진안은 장병들을 잘 보살펴서 장병들과 고락을 함께하였는데, 그가 죽자 농상隴上의 사람들이 그를 그리워하여 장사壯士의 노래를注+① 그 壯士의 노래(隴上歌)는 다음과 같다.
“隴上의 壯士 중에 陳安이 있으니, 체구는 비록 작으나 도량은 넉넉하여, 장병들을 사랑으로 대하고 마음을 함께하였네. 철 안장의 준마를 타고 달리니, 7척의 큰 칼은 여울물처럼 빠르게 돌리고 丈八蛇矛는 좌우로 움직였네. 열 번 싸워 열 번 모두 깨뜨리니 앞을 막는 자가 없었네. 교전한 지 세 번 만에 丈八蛇矛를 잃으니, 우리 준마를 버리고 바위 사이에 숨었네. 우리를 위해 지원 세력이 되었다가 머리가 잘려 매달렸으니, 서쪽으로 흐르던 물 동쪽 黃河로 흘러가는데, 한 번 가고 돌아오지 않는 그대를 어찌할꼬.”
지었다.
저족氐族강족羌族이 모두 인질을注+② 任은 質任(인질)이다. 보내고 항복을 청하자, 유요는 적정강赤亭羌의 추장인 요익중姚弋仲평서장군平西將軍으로 삼고 평양공平襄公注+③ 平襄縣은 漢나라 때에는 天水郡에 속하였고, 晉나라 때에는 略陽郡에 속하였다. 봉하였다.
[] 8월에 왕돈王敦이 표문을 올려 강서도독江西都督 치감郗鑒상서령尙書令으로 삼았다.
[] 황제( 명제明帝)가 왕돈王敦의 핍박을 두려워하여 치감郗鑒을 조정 밖의 지원 세력으로 삼아서 합비合肥에 진주하게 하니, 왕돈이 그를 꺼려서 표문을 올려 치감을 상서령尙書令으로 삼았다.
치감이 조정으로 돌아오는 길에 왕돈을 방문하니, 왕돈은 그와 함께 서조西朝(낙양洛陽)의注+① 이때에 江東에서는 洛都(洛陽)를 西朝라고 하였다. 인사人士들을 논하면서 말하기를 “악언보樂彦輔는 재주가 부족하니, 그 실제를 살펴보면 어찌 만무추滿武秋보다 낫겠는가.”注+② 彦輔는 樂廣의 字이고, 武秋는 滿奮의 字이다. 하였다.
치감이 말하기를 “악언보는 기질氣質이 평화롭고 담박하며 민회태자愍懐太子(사마휼司馬遹)가 폐위되었을 적에 유순하면서도 능히 바르게 대처하였지만, 만무추는 충절을 잃은 선비이니,注+③ 愍懷太子가 폐출되어 許昌으로 보내질 적에 滿奮은 東宮의 官屬 중에 태자에게 하직 인사를 한 자들을 체포하였고, 趙王 司馬倫이 찬탈할 적에도 만분은 또 옥새와 인끈을 받들어 〈사마륜에게〉 올렸다. 그러므로 충절을 잃었다고 말한 것이다. 어찌 그와 비견하겠는가.” 하였다.
왕돈이 말하기를 “그 당시에 위기가 급하였기 때문이다.” 하니, 치감이 말하기를 “대장부는 죽으나 사나 마땅히 의리를 따르는 것이다.” 하였다.
왕돈은 그의 말을 미워하며 다시는 그를 만나지 않았다. 왕돈의 당여黨與들이 모두 치감을 죽일 것을 권하였으나 왕돈은 따르지 않았는데, 치감은 조정으로 돌아와서 마침내 왕돈을 토벌할 것을 황제와 모의하였다.
[] 후조後趙청주青州 지역을 침략하여 함락하였다.
[] 석호石虎가 보병과 기병 4만을 거느리고서 청주青州를 공격하자 군현郡縣들이 대부분 항복하니, 석호가 마침내 광고성廣固城注+① ≪水經註≫에 “廣固城은 漢나라 齊郡 廣縣 서북쪽 4리 지점에 있는데, 사방이 모두 높은 절벽 아래 흐르는 물줄기로 둘려 있고 물을 의지하여 垓子를 깊이 팠으니, 이는 曹嶷이 축조한 것이다.” 하였다. 포위하였다.
조억曹嶷이 성에서 나와 항복하자, 석호는 그를 죽이고 그 병력 3만을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석호가 조억의 무리를 다 죽이려고 하자, 자사刺史 유징劉徴이 말하기를
“지금 나를 여기에 남겨두는 것은 백성을 돌보게 하기 위해서인데, 백성이 없으면 내가 누구를注+② 焉(어찌)은 於虔의 切이다. 돌보겠습니까. 나는 장차 돌아가겠습니다.” 하자, 석호는 마침내 남녀 7백 명을 남겨두어 유징에게 배속해서 그로 하여금 광고廣固에 진주하게 하였다.
[] 나라(전조前趙)가 양주涼州(전량前涼)를 공격하니 장무張茂가 항복하였다. 나라는 장무를 봉하여 양왕涼王으로 삼았다.
[] 조주趙主 유요劉曜농상隴上에서 서쪽으로 양주涼州를 공격하였는데 병졸이 28만이나 되니, 양주涼州의 사람들이 매우 두려워하였다. 참군參軍 마급馬岌(마급)이 장무張茂에게 직접 나가 유요의 군대를 맞아 싸울 것을 권하였다.
장사長史 범위氾禕가 마급을 참수할 것을 청하자, 마급이 말하기를 “범공氾公고인古人의 찌꺼기인 글만 읽은 서생書生이라서 큰 계책을 생각하지 않습니다.注+① ≪莊子≫에 말하였다. “桓公이 堂上에서 책을 읽고 있을 적에 輪扁이 堂 아래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다가 환공에게 묻기를 ‘감히 묻겠습니다. 公이 읽는 책은 무슨 내용입니까?’ 하니, 환공이 말하기를 ‘聖人의 글이다.’ 하였다. 윤편이 ‘聖人이 살아 있습니까?’ 하고 묻자, 환공이 대답하기를 ‘이미 죽었다.’ 하였다. 그러자 그는 말하기를 ‘그렇다면 임금님께서 읽는 책은 古人의 찌꺼기일 뿐이니, 옛사람은 그 전할 수 없는 것과 함께 죽었습니다.’ 하였다.” 명공明公부자父子(장궤張軌장무張茂)가 조정(동진東晉)을 위하여 유요를 주벌하고자 한 지가 여러 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유요가 스스로 왔으니, 원근遠近의 사람들이 의 이번 거동을 지켜보고 있을 것입니다. 마땅히 신의와 용맹이 있다는 증거를 세워서 , 지역 사람들의 바람에 부응해야 하니, 힘은 비록 대적하지 못하나 형세상 출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장무가 “좋다.” 하고는, 마침내 나가 석두石頭注+② 石頭는 姑臧城 동쪽에 있다. 주둔하였다.
[] 장무張茂참군參軍 진진陳珍에게 계책을 묻자, 진진이 대답하기를 “유요劉曜의 병력이 비록 많으나, 모두 저족氐族강족羌族의 오합지졸이라서 은혜와 신의가 흡족하지 못합니다. 또 산동山東의 우환이 있으니,注+① 〈“有山東之虞”는〉 이때 막 劉曜가 石勒과 서로 도모하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유요가 어찌 여러 날 동안 지구전持久戰을 하여 우리와 하서河西 지역을 다투겠습니까.
만약 20일이 되어도 저들이 후퇴하지 않으면 제가 피폐한 병졸 수천 명을 얻어서 명공明公을 위해 유요를 사로잡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나라의 여러 장수들이 다투어 황하黃河를 건너려고 하자, 유요가 말하기를 “우리 군대가 피곤하여 실전實戰에 투입하기 어려우니, 지금은 다만 군대를 주둔하고서 출동하지 말고 우리 군의 위세만 떨치도록 하라. 만약 중순中旬이 지나도 〈항복을 청하는〉 장무의 표문表文이 이르지 않으면, 내 들을 저버린 것이 될 것이다.” 하였다.
장무가 얼마 후 사신을 보내어 번신藩臣을 칭하자, 유요는 장무를 태사太師에 제수하고 양왕涼王을 봉하고 구석九錫을 내려주었다.
[] 양난적楊難敵나라(성한成漢)에 항복하였다가 다시 배반하여 나라 장수 이함李琀(이함)과 이치李稚를 죽였다.
[] 양난적楊難敵진안陳安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나라에 항복을 청하니, 나라 장군 이치李稚가 그의 뇌물을 받고 무도武都로 돌려보냈는데, 양난적은 마침내 험고한 지역을 점거하고 복종하지 않았다.
이치가 자신의 잘못된 계책을 후회하고 누차注+① 亟(누차)는 欺冀의 切이다. 토벌할 것을 청하자, 성주成主 이웅李雄이 이치의 형 이함李琀을 보내어 그를 공격하게 하였다.
이함이 쉬지 않고 달려 하변下辨에 이르니,注+② 李琀은 李蕩의 長子이니, 琀은 胡南, 胡紺의 두 가지 切이다. 下辨縣은 武都郡에 속하였다. 양난적이 군대를 보내어 그의 퇴로를 차단하고 사방에서 공격하였다. 이함과 이치는 적진에 깊이 쳐들어갔다가 뒤에서 지원하는 군대가 없어서 모두 양난적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 나라(전조前趙)가 옛 세자 유윤劉胤을 봉하여 영안왕永安王으로 삼았다.
[] 처음에 조주趙主 유요劉曜의 세자 유윤劉胤이 나이 10살에 이미 신장이 7척 5촌이었고, 장성해서는 힘이 세고 활쏘기를 잘하였으며 용맹하고 민첩하기가 바람과 같았는데, 근준靳準의 난리에 흑닉욱국부黒匿郁鞠部로 도망하여 몸을 숨겼다.注+는 일이 太興 원년(318)에 보인다. 黑匿은 본래 오랑캐의 複姓이고, 郁鞠은 그 이름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黑匿郁鞠은 鮮卑族 別部의 칭호이다.” 하고, 혹자는 말하기를 “黑匿郁鞠이 劉胤을 돌려보내자, 유요가 그의 충성을 가상히 여겨서 그를 봉하여 左賢王으로 삼았으니, 그렇다면 그 또한 匈奴의 種族이다.” 하였다.
진안陳安이 패하자 注+② ≪資治通鑑≫에 “劉胤이 스스로 黑匿郁鞠에게 말하였다.” 하였다. 흑닉욱국이 예우하여 그를 돌려보냈다.
유요는 한편으로는 슬퍼하고 한편으로는 기뻐하면서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의손義孫(유윤劉胤)은 옛 세자이다. 재주와 기량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고 또 온갖 어려움을 두루 겪었다. 나는 나라 문왕文王나라 광무제光武帝를 본받아서 사직社稷을 견고히 하고 의광義光(유희劉熙)을 편안히 해주고자 하노니, 어떠한가?”注+③ 옛 세자 劉胤은 字가 義孫이고, 지금 태자 劉煕는 字가 義光이다. 趙主 劉曜의 뜻은, 유윤은 옛 세자로 재주와 器局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데, 유희는 그의 아우로 재주가 유윤에게 미치지 못하면서 태자가 되었으니, 아마도 편안하지 못함이 있을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러므로 유희를 폐하고 유윤을 세워서 社稷을 견고히 하고 유희를 편안하게 해주고자 한 것이다. 文王은 장자인 伯邑考을 버리고 武王을 세웠고, 光武帝는 태자 劉彊을 폐하고 東海王 劉陽을 세웠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인용하여 증거로 삼은 것이다. 하였다.
[] 좌광록대부左光禄大夫 복태卜泰가 아뢰기를 그래도 괜찮지만, 광무제光武帝는 어미(곽황후郭皇后)가 은혜를 잃었다 하여 그 자식(유강劉彊)을 폐하였으니, 어찌 본받을 수 있겠습니까.
지난번에 〈광무제가 적장자嫡長子인〉 동해왕東海王(유강劉彊)을 후사로 삼았더라도 반드시 명제明帝보다 못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유윤劉胤문무文武의 재주와 경략이 진실로 세상에 크게 뛰어나나, 태자도 효성스럽고 우애하며 인자하니 또한 충분히 태평성세의 어진 군주가 될 수 있습니다.
더구나 동궁東宫은 백성과 이 의지하는 바이니, 어찌 가볍게 바꿀 수 있겠습니까. 등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이니, 감히 조명詔命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유요劉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유윤劉胤이 아뢰기를 “아버지는 자식에 대하여 마땅히 똑같이 사랑하여야 합니다. 지금 유희劉煕를 내치고 을 태자로 세우시면, 신이 어찌 감히 스스로 편안하겠습니까. 만일 신이 말을 몰고 채찍질하는 것을 잘 감당할 수 있다고 여기신다면, 어찌 유희를 보필하여 성주聖主의 기업을 잇지 못하겠습니까. 신은 청컨대 이 자리에서 목숨을 바쳐서 감히 명령을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유요劉曜 또한 유희가 양후羊后의 소생이고 이때 양후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 하여, 차마 태자의 자리를 폐하지 못하였다.
복태卜泰는 바로 유윤의 외숙이었다. 유요는 그의 공정하고 충성스러움을 가상히 여겨 광록대부光禄大夫로 삼아서 태자태부太子太傅를 겸하게 하고, 유윤을 영안왕永安王으로 봉하여 이궁二宫注+① 二宮은 劉曜의 궁과 劉煕의 궁이다. 금위도독禁衛都督녹상서사錄尙書事로 삼고는, 유희로 하여금 가인家人를 다하게 하였다.
[] 나라 양왕涼王(전량前涼) 장무張茂고장姑臧축성築城하였다.
[] 장무張茂고장姑臧에 크게 을 쌓고 영균대靈鈞臺를 다시 짓자,注+① 元帝 太興 4년(321)에 張茂가 靈鈞臺를 짓다가 閻曾의 諫言 때문에 중단하였었는데, 지금 다시 이것을 만든 것이다. 별가别駕 오소吴紹하기를
명공明公이 성을 쌓고 를 짓는 까닭은 아마도 이미 지나간 환란을 거울삼아 경계하시는 것이지만,注+② 이보다 앞서 張茂의 형 張寔이 그 帳下督 閻涉에게 살해를 당하였으니, 지금 장무는 이러한 우환을 경계한 것이다. 혹자가 말하기를 “劉曜가 와서 공격할 것을 두려워하여 경계한 것이다.” 하였다. 어리석은 신은 생각건대 만일 은혜가 사람들 마음에 흡족하지 못하면 비록 몇 층의 대에 거처하더라도 유익한 바가 없을 것이요, 다만 아랫사람들의 마음을 의심스럽게 하고 겁을 내고 약한 형세를 보일 뿐입니다.” 하였다.
장무가 말하기를 “죽은 형이注+③ 亡兄은 바로 張寔이다. 하루아침에 남에게 몸을 잃었으니, 어찌 충절을 다하고자 하는 충신忠臣의사義士가 없었겠는가마는, 다만 화가 뜻밖에 생겨서 비록 지혜와 용맹이 있더라도 베풀 곳이 없었을 뿐이다.
왕공王公이 험한 것을 만들고 용맹한 사나이가 성문을 이중으로 닫는 것이 옛날의 이다.”注+④ ≪周易≫에 “王公이 험한 것을 만들어 그 나라를 지킨다.” 하였고, ≪春秋左氏傳≫에는 “용맹한 사나이도 성문을 이중으로 닫는데, 하물며 나라이겠는가.” 하였다. 重(겹)은 直龍의 切이다. 하고 마침내 축성築城하였다.
[] 겨울 11월에 왕돈王敦왕함王含에게 강서군江西軍을 도독하게 하였다.
[] 처음에 왕돈王敦종자從子(조카) 왕윤지王允之가 총각이었을注+① “総角”은 두 갈래로 머리를 모은 것이다. 적에, 왕돈은 그의 총명함과 영민함을 사랑하여 항상 자신을 따르게 하였다.
왕돈이 일찍이注+② “敦常”의 常이 ≪資治通鑑≫에는 甞으로 되어 있다. 밤에 술을 마실 적에, 왕윤지가 술에 취했다고 사양하고 먼저 자리에 누웠다. 왕돈이 전봉錢鳳과 함께 반역을 모의하였는데, 왕윤지가 그 말을 다 듣고는 즉시 누운 자리에서 크게 토하여 의복과 얼굴이 모두 더러워졌다.
전봉이 나가자, 왕돈이 과연 불을 밝혀 보고서 왕윤지가 토하여 옷과 얼굴이 모두 더럽혀진 가운데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는 다시 의심하지 않았다.
마침 왕윤지의 아버지 왕서王舒정위廷尉에 제수되니, 왕윤지는 돌아가 부친에게 문안할 것을 청하여 왕돈의 계책을 왕서에게 빠짐없이 아뢰었다. 왕서는 왕도王導와 함께 황제( 명제明帝)에게 모두 아뢰고서 은밀하게 미리 대비하였다.
왕돈은 자기 종족宗族을 강하게 하고자 하여, 왕함王含을 옮겨 강서江西를 도독하게 하고 왕서王舒왕빈王彬형주자사荆州刺史강주자사江州刺史로 삼았다.


역주
역주1 肅宗 明皇帝 : 이름이 紹이고 字가 道畿이니, 元帝의 長子이다. 재위가 3년이고 향년이 27세이다.
역주2 成나라(成漢) : 오호십육국의 하나로 氐族의 하나인 巴氐族 李雄이 건국한 나라이다. 304년에 건국되어 국호를 ‘成’이라 하였다가 338년 李壽가 ‘漢’으로 고쳤기 때문에 보통 ‘成漢’이라 한다.
역주3 敦移屯姑孰……以王導爲司徒 : “‘以’라는 것은 무엇인가. 王敦이 그를 임용한 것이다. 王導는 황실에 충성을 다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의 임용을 받았으니, ≪資治通鑑綱目≫에서는 유독 어진 자를 위해 〈허물을〉 숨겨주지 않는 것인가. 그러나 揚州牧은 要職이고 司徒에 비하여 차이가 있으니, ‘왕돈이 스스로 揚州牧을 겸하고 왕도를 사도로 삼았다.’라고 쓴 것은 왕돈이 제멋대로 행동하고자 함을 나타낸 것이니, 왕도에게 꺼릴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왕돈에게는 ‘배반했다’라고 쓴 뒤로부터 그가 죽을 때까지 ≪資治通鑑綱目≫에서 모두 그의 姓을 삭제한 것이다.[以者 何 敦以之也 王導乃心帝室而受其以 綱目獨不爲賢者諱乎 揚州牧要職也 視司徒有間矣 書自領揚州牧 以導爲司徒 所以見敦之欲自專也 於導何病哉 故敦自書反 以至於死 綱目皆削其姓]” ≪書法≫
역주4 丹楊 : 晉나라 때에는 丹楊과 丹陽이 통용되었으므로, 저본을 따랐다.
역주5 지난해에……죽이고 : 王敦이 杜弢를 토벌하러 豫章에 주둔할 적에 형인 王澄이 이곳에 들렀다가 왕돈을 업신여기자 모함하여 죽였다. 이 일이 晉 懷帝 永嘉 6년(312)에 보인다.
역주6 以庾亮爲中書監 : “‘后의 오라비 亮’이라고 쓰지 않은 것은 庾亮이 어질었기 때문이니, 董重과 楊駿의 경우와는 다르다.[不書后兄亮 亮 賢也 與董重楊駿異矣]” ≪書法≫
역주7 (交)[父] : 저본에는 ‘交’로 되어 있으나, ≪晉書≫에 의거하여 ‘父’로 바로잡았다.
역주8 (乃)[奈] : 저본에는 ‘乃’로 되어 있으나, ≪晉書≫에 의거하여 ‘奈’로 바로잡았다.
역주9 敦表江西都督郗鑒爲尙書令 : “王含에게 江西를 도독하게 했을 때에 ‘敦以’라고 쓴 것은 王敦이 제멋대로 한 것을 죄책한 것인데, 여기서 ‘表’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왕돈은 郗鑒이 밖에 있는 것을 꺼려서 표문을 올려 내직의 임무로 옮겼으니, 이는 치감을 사사로이 위한 것이 아니다. ≪資治通鑑綱目≫에서는 ‘表’라고 써서 치감을 王氏의 徒黨과 나란히 두지 않았다. 〈그렇다면 ‘敦表’라고 쓰지 않고〉 곧바로 ‘以’라고 쓰는 것이 不可한가. 곧바로 ‘以’라고 쓰면 치감이 관직을 옮긴 것이 上의 뜻에서 나온 것이 되니, ‘敦表’라고 쓴 것은 왕돈이 스스로 견고히 하려는 사심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王含督江西 書敦以 罪專也 此其書表 何 敦忌鑒在外 表遷内任 則非私鑒矣 綱目以表書之 不使夷於王氏之黨也 直書以 不可乎 直書以 則是鑒之遷 出上意矣 書曰敦表 所以著敦自固之私也]” ≪書法≫
역주10 靳準의 난리 : 太興 원년에 漢主 劉聰이 卒하자 太子 劉粲이 즉위하였는데, 그해 8월에 靳準이 유찬을 시해하고 대신 임금이 되었다가, 石勒의 군대에게 토벌당한 일을 이른다.
역주11 유윤이……말하니 : 원문은 ‘自言於郁鞠’인데, ≪資治通鑑≫에는 이 뒤에 ‘郁鞠大驚’이라 한 것으로 비추어볼 때 자신의 신분을 밝힌 것으로 보인다.
역주12 文王은……정하였으니 : 周 文王이 武王 姬發을 太子로 세우기 전에 어느 사람도 지정하지 않았는데, 長子인 伯邑考를 보리고 희발을 태자로 세운 것이다.
역주13 敦以王含督江西軍 : “‘敦以’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왕돈의 전횡을 죄책한 것이니, 王含 또한 함께 그 죄책을 받은 것이다. 이때 王敦은 王氏의 세력을 강하게 하고자 하여, 왕함에게 江西를 도독하게 하고 王舒와 王彬에게는 荆州와 江州의 刺史로 삼았는데, 왕서와 왕빈을 쓰지 않은 것은 그들의 忠心을 헤아린 것이다.[書敦以 何 罪専也 含亦與受其罪矣 於是敦意欲强王氏 以含督江西 以舒彬刺荆江 舒彬不書 亮其心也]” ≪書法≫

자치통감강목(14) 책은 2021.11.1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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