陳象이 각각 上書하여 간절하게 간언하자注+吳主는 左無難營과 右無難營의 군대를 설치하고, 또 五營의 군대를 설치하였는데, 각각 督을 두어 그들을 다스리게 하였다.吳主가 크게 노하여 진정과 진상을 族誅하고, 주거와 굴황을 포박하여 궁전으로 들어왔다.
주거와 굴황이 여전히 머리를 조아리며 피가 흐르는데도 말의 기세가 꺾이지 않았으므로, 손권이 곤장 100대를 치게 하였다. 마침내 손화를 태자에서 폐위시켜 庶人으로 삼아 故鄣縣으로 귀양 보내고,注+故鄣縣은 丹陽郡에 소속되어 있다.
孫霸에게 죽음을 내렸으며, 楊笁과 全寄 등을 죽이고 주거에게도 곧이어 죽음을 내리고, 다음 해에 潘氏을 세워서 皇后로 삼았다.
綱
[綱] 吳나라가 堂邑縣에 塗塘(涂水에 쌓은 제방)을 설치하였다.注+堂邑縣은 前漢 때에 臨淮郡에 속하였고, 後漢 때에 廣陵郡에 속하였으며, 魏나라와 吳나라 때에 두 나라의 경계 사이에 버려진 땅이었다. 塗는 마땅히 涂로 써야 하고, 滁로 읽는다. 涂水는 堂邑에 있다.
目
[目] 군사 10만을 堂邑에 보내어 塗塘을 설치하여 북쪽 길을 차단하였다.注+塗塘으로써 魏나라 병사가 建業을 엿보는 것을 단절시킨 것이다.
綱
[綱] 12월에 魏나라가 吳나라를 공격하여 江陵에서 싸워 吳나라를 크게 격파하였다.
目
[目] 魏나라 王昶이 말하기를 “孫權이 훌륭한 신하들을 추방하고 嫡子와 庶子가 편을 갈라 다투고 있으니, 이 틈을 타 吳나라를 공격하는 것이 좋습니다.”注+“良臣”은 朱據 등을 말한다.라고 하자,
司馬懿가 新城太守州泰를 보내 巫와 秭歸를 습격하게 하고,注+州泰는 성명이다.荊州刺史王基를 夷陵으로 향하게 하고, 왕창을 江陵으로 향하게 하였다.注+魏나라 荊州刺史는 征南將軍府와 함께 모두 宛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때 이미 新野로 옮겨 주둔하였다. 왕창이 대오리로 엮은 줄을 매어 다리를 만들어서 강을 건너 吳나라 군대를 공격하였다.注+絙은 居登의 切이니, 큰 줄이다. 대오리로 다리를 만들어 허공에 매달아서 건넜는데, 繩橋라고 하고, 또 笮橋라고 하였다. 吳나라가 沮水와 漳水를 끌어다가 江陵 이북의 땅을 침수시켜서 魏나라 군사들을 막았다. 그러므로 왕창이 다리를 만들어 강을 건넌 것이다.
吳나라 장군 施績이 밤에 강릉으로 달아났는데,注+績은 朱然의 아들이다. 주연은 본래 施氏인데, 朱治가 아들로 삼았으니, 魏나라 사람이 본래 유래한 성으로 그를 불렀다. 왕창이 그들을 평지로 유인하여 싸우려고 하여 마침내 먼저 다섯 군대를 보냈다가 큰 길을 따라 돌아오게 하여 吳나라 군사들이 보고서 기뻐하게 만들고,注+“案大道”는 큰 길을 따라서 돌아오는 것이다.
또 획득한 鎧馬(갑옷 입힌 말)와 甲士의 머리를 성 주변에 둘러놓아 吳나라 군사들을 분노하게 하고는 병사를 잠복시켜 吳나라 군사들을 기다렸다.注+首는 잘린 사람의 머리를 말한다. 環(둘러싸다)은 음이 宦이다.
시적이 과연 추격해오자, 왕창이 시적과 싸워서 크게 격파하고 吳나라의 두 장수를 참수하였다.注+“二將”은 鍾離茂와 許旻을 말한다. 왕기와 주태가 또한 吳나라 병력을 격파하니, 항복한 자가 수천 명이었다.
역주
역주1吳廢其太子和……立子亮爲太子 :
“孫和에게는 ‘廢’라고 기록하고, 孫霸에게는 ‘殺’이라고 기록하고, 朱據에게는 ‘及’이라고 기록하고는 또 爵位를 삭제하지 않고 기록하였으니, 이는 모두 죄가 없는 사람들이다. 枕席의 사사로움은 昏主를 미혹시킬 뿐만 아니라 비록 明君이라도 역시 반드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고, 忠直한 말은 昏主만 어길 뿐만 아니라 비록 明君이라도 또한 반드시 따르는 것은 아니다. 살펴보건대 吳主 孫權은 嫡子를 폐하고 庶子를 세웠으며, 朱據 등의 충성스러운 말과 애써 올린 간언을 따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 따라서 죽였으니, 한 시대 호걸의 만년 말로가 어둡고 어긋난 것이 이러하였다.[和書廢 霸書殺 據書及 且不去其爵 是皆無罪之人也 夫衽席之私 非惟昏主惑之 雖明君亦未必能免 忠直之言 非惟昏主違之 雖明君亦未必能聽 觀吳主權之廢嫡立庶 朱據等忠言苦諫 不惟不能聽 又從而殺之 以爲一世人豪 晩節末路 昏繆乃爾]” ≪發明≫
역주3袁氏의 패망 :
袁紹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袁譚‧袁熙‧袁尙이었다. 원소가 죽자 여러 사람들은 원담이 장남이므로 그를 세우려 하였는데, 審配가 원소의 명령이라고 속여 원상을 후계자로 세웠다. 원담은 후계자가 되지 못하여 스스로 장군이라 일컫고 黎陽에 주둔하였다. 원희‧원상은 조조에게 패하여 遼東太守 公孫康에게 투신하였으나 죽임을 당하였고, 원담은 曹操에게 투신했다가 반란하여 군대가 패하여 죽었다.
역주4晉 獻公이……죽었고 :
春秋時代의 申生은 晉 獻公의 世子였는데, 헌공의 愛妾인 驪姬가 신생을 죽이려고 계책을 꾸며서 신생이 아버지 헌공을 독살하려 했던 것처럼 만들자, 이에 헌공은 노하여 태자의 스승 杜原款을 죽였다. 어떤 사람이 신생에게 사실을 밝혀 억울한 누명을 벗으라고 권하자, 신생은 “내가 사실을 밝히면 여희의 죄가 드러날 것이다. 아버님은 이미 늙으셨으니, 아버님으로부터 여희를 빼앗고 싶지 않다.” 하였다. 또 도망치라고 권하자 “아버님을 죽이려 했다는 더러운 누명을 쓰고 내가 다른 나라로 도망친들 그 나라에서 나를 받아주겠는가.” 하고는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이에 세상 사람들이 신생을 恭世子라고 불렀다.(≪春秋左氏傳≫ 僖公 4년)
역주5漢 武帝……죽었으니 :
漢 武帝의 太子 劉據가 江充과 사이가 좋지 못했는데, 마침 巫蠱의 일이 발생하자 이 사건을 맡은 강충이 태자를 다급히 몰아붙였는데 太子宮의 땅에서 오동나무로 만든 木偶人을 캐내어 증거를 확보함으로써 태자를 궁지에 빠뜨렸다. 태자는 견디다 못해 드디어 사람을 시켜 강충을 잡아다 놓고 “우리 父子를 혼란시키려 하는구나.” 하고 참수하였다. 그리고 長樂宮의 衛卒을 동원해서 무제가 보낸 군대와 市街戰을 하였으나 끝내 패하여 자살하였다.(≪漢書≫ 〈武五子傳〉)
역주6思子宮을 세웠으나 :
漢 武帝는 추후에 太子 劉據가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다고 생각하고 ‘思子宮’을 지은 것을 말한다.
역주7無難督 :
無難은 吳나라 孫權이 설치한 군영으로 황제에 대한 侍衛와 정벌에 참여하였다. 無難營은 左部와 右部로 나누어지며 督으로 통솔하게 하였다.
역주8五營督 :
五營은 吳나라에서 설치한 군영으로 황제의 시위를 담당하였으며, 督으로 통솔하게 하였다.
역주9吳作堂邑塗塘 :
“塘을 만든 것을 반드시 기록한 것은 백성의 노력을 중시한 것이다. 塘을 만든 것을 기록한 것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塘을 만든 것을 기록한 것은 네 번이다.(吳나라 塗塘, 浦里塘, 梁나라 緣淮塘, 〈五代〉 吳越의 捍海石塘)[作塘必書 重民力也 書作塘始此 終綱目 書作塘四(吳塗塘浦里塘 梁緣淮塘 吳越捍海石塘)]” ≪書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