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魏主如漠南
하여 捨輜重以輕騎襲柔然
할새 分軍爲四道
러니 魏主至鹿渾谷
하여 遇勅連可汗
注+鹿渾谷, 卽鹿渾海之谷也, 本高車袁紇部所居, 其地直平城西北, 其東卽弱洛水.하니
太子晃曰 賊不意大軍猝至하니 宜掩其不備하여 速進擊之니이다
尙書劉絜曰 賊營塵盛하니 其衆必多라 不如須諸軍大集然後에 擊之니이다
晃曰 塵盛者는 軍士驚擾也라 何得營上而有此塵乎아 魏主疑之不急擊이러니 柔然遁去어늘
追之不及하고 獲其候騎하니 曰 柔然不覺魏軍至하여 惶駭北走에 經六七日하여 知無追者하고 始乃徐行이라하다
魏主深悔之하여 自是로 軍國大事를 皆與晃謀之러라
目
[目] 北魏 河間公 拓跋齊가 武都王 楊保宗과 함께 雒谷에서 서로 마주하여 鎭守하였다.
注+① 拓跋齊는 拓跋翳槐의 玄孫이다. 雒谷은 駱谷이니, ≪北史≫에 〈‘雒’이〉 ‘駱’으로 되어 있다. 양보종의 아우 楊文德이 양보종에게 험지를 잘 방비하며 北魏를 배반하도록 설득하였는데, 탁발제가 양보종을 유인하여 죽였다.
양보종의 부하 苻逹과 任朏(임비)가
注+② 朏은 음이 斐이다. 결국 병사를 일으켜 양문덕을 세워 王으로 삼으니, 양문덕이 白崖를
注+③ 胡三省이 말하기를 “지금 大安軍 동북쪽 80리에 白崖가 있다. 大安軍은 옛 葭萌 지역이다.”라고 하였다. 점거하여 군대를 나누어 여러 鎭地를 빼앗고 나아가 仇池를 포위하여 스스로 仇池公이라고 불렀다.
北魏 將軍 古弼이 공격하니 양문덕이 물러나 달아났다. 皮豹子가 關中의 군대를 감독하여 下辯에 도착하여 仇池의 포위가 풀렸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가려고 하였다.
고필이 사람을 보내 말하기를 “宋나라 사람들은 이번 패한 것을 수치로 여겨 반드시 다시 올 것입니다. 군대가 돌아간 후에 다시 움직이는 것은 어려우니 군대를 훈련하여 힘을 비축하면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이 낫습니다.
가을과 겨울을 지나기 전에 宋나라 군대는 반드시 이를 것입니다. 우리가 편안함으로 수고로운 적을 기다리면 이기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니, 피표자가 그대로 따랐다. 양문덕이 사신을 보내 宋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7월에 宋나라가 楊文德을 征西大將軍 武都王으로 삼아서 葭蘆城에
注+④ 胡三省이 말하기를 “지금 階州 福津縣 동남쪽 70리에 葭蘆城이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魏나라 將軍 鄧艾와 蜀나라 將軍 姜維가 이곳에서 대치하였다고 한다. 北魏 때에는 葭蘆縣을 두었고 後周 때에는 盤堤縣에 편입하였다.”라고 하였다. 주둔하게 하니, 武都와 陰平의 氐族이 대부분 귀의하였다.
目
[目] 魏主가 漠南으로 가서 輜重을 버리고 경무장한 기병으로 柔然을 습격할 적에 군대를 나누어 4개의 길로 나아갔다. 魏主가 鹿渾谷에
注+① 鹿渾谷은 바로 鹿渾海의 골짜기로 본래 高車 袁紇部가 살던 곳이며 그 지역은 平城의 서북쪽에 해당하니, 그 동쪽이 바로 弱洛水이다. 도착하여 勅連可汗과 마주치자
太子 拓跋晃이 말하기를 “적들의 입장에서는 뜻밖에 대군이 갑자기 이른 것이니, 마땅히 그들이 대비하지 못하였을 때 엄습하여 신속히 공격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尙書 劉絜이 말하기를 “적들의 군영 안에 흙먼지가 가득하니 그 무리가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여러 부대가 집결하기를 기다린 후에 공격하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하였다.
탁발황이 말하기를 “흙먼지가 가득하다는 것은 군사들이 매우 놀라서 어지럽기 때문입니다. 어찌 군영에 이런 흙먼지가 일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魏主가 의심하여 급하게 공격하지 않으니, 柔然이 이 기회를 틈타 달아났다.
추격하여도 따라잡지 못하고 柔然의 정찰 기병을 사로잡았는데, 말하기를 “柔然이 北魏 군대가 도착할 것을 생각지 못하다가 당황하며 놀라서 〈무리를 이끌고〉 북쪽으로 달아났는데 6, 7일 지나고 나서 추격하는 자가 없는 것을 알고 비로소 천천히 갔습니다.”라고 하였다.
魏主가 크게 후회하며 이때부터 군대와 국가에 관한 큰일을 모두 탁발황과 의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