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漢
이 率驃騎大將軍杜茂等七將軍
하여 圍蘇茂於廣樂
注+賢曰 “廣樂地闕, 今宋州虞城縣, 有長樂故城, 蓋避隋煬帝諱改.”이러니 周建
이 招集得十餘萬人
하여 救之
注+建, 劉永將也.라
漢이 迎與之戰이라가 不利하고 墮馬傷膝하여 還營하니 建等이 遂連兵入城이라
諸將이 謂漢曰 大敵在前이어늘 而公傷臥하시니 衆心懼矣니이다
漢이 乃勃然裹創而起하여 椎牛饗士하여 慰勉之하니 士氣自倍라
旦日에 蘇茂, 周建이 出兵圍漢이어늘 漢이 奮擊大破之하니 茂走還湖陵하다
目
【목目】 풍이馮異가 적미赤眉와 기일을 약속하고 회전會戰할 적에 장사壯士들로 하여금 적미와 똑같게 옷을 바꿔 입고서 길가에 매복하게 하였다.
해가 뜨자 적미가 만 명을 보내 풍이의 선봉부대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풍이가 약간의 병력만 내어 구원하니, 적들은 풍이의 군세가 약한 것을 보고는 병력을 총동원하여 풍이를 공격하였다.
풍이가 이에 군대를 풀어놓아 크게 싸우니, 해가 기울 적에 적의 사기가 쇠진하였다. 이때 복병이 갑자기 일어나서 의복衣服이 서로 혼란하니,
적미는
피아彼我를 구별하지 못하여 마침내 놀라 궤멸하였다.
注+졸卒(갑자기)은 졸猝로 읽는다. 지識(표지하다)는 음이 지志이다. 별別(나누다)은 필렬筆列의 절切이다. 풍이는 이들을 추격하여
효산崤山 밑에서 대파하고 남녀 8만 명에게 항복을 받았다.
注+≪자치통감강목집람資治通鑑綱目集覽≫에 “효崤는 산의 이름이니, 지금 섬현陝縣 동쪽에 있는 두 효산崤山이 이것이다. 저底는 아래이다.” 하였다.
황제가
친서親書(
새서璽書)를 내려 풍이를 위로하기를 “처음에는 비록
회계回谿에서 날개를 떨구었으나 끝내는
면지澠池에서 날개를 펼쳤으니,
고 이를 만하다.”
注+시翅는 시지施智의 절切이니 날개이다. 회계回谿는 면지澠池의 북쪽에 있다. “수시垂翅”와 “분익奮翼”은 새를 가지고 비유한 것이다. 풍이馮異가 전에 회계回谿에서 적미赤眉와 싸워서 크게 패하였다. 우隅는 모퉁이이니, 동우東隅는 해가 뜨는 곳이다. 상유桑楡는 저녁 무렵을 이르니, ≪회남자淮南子≫에 “서쪽으로 해가 질 적에 그림자가 나무 끝에 드리워져 있는 것을 상유桑楡라 한다.” 하였다. 하였다.
目
【
목目】
유영劉永은 〈황제의
사자使者인〉
복륭伏隆이
극현劇縣으로 왔다는 말을 듣고, 자신도 사자를 보내
장보張步를 세워
제왕齊王으로 삼았다.
注+≪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극현劇縣은 북해군北海郡에 속했다.” 하였으니, 이때 장보張步가 이곳에 도읍하였다. 장보가 왕의 작위를 탐하여 주저하고 결정하지 못하자,
복륭이 타이르기를 “
고조高祖께서
천하天下에 약속하기를
유씨劉氏가 아니면 왕이 되지 못한다 하였으니
注+이주二州는 청주靑州와 서주徐州이다., 지금 10만
호戶의
후侯가 될 수 있을 뿐이다.” 하였다.
장보는 복륭을 남겨두어 함께 두 주州를 지키고자 하였으나, 복륭이 듣지 않고 돌아가 복명할 것을 요구하니, 장보는 마침내 복륭을 구류하고 유영이 봉해준 제왕齊王의 작위를 받았다.
복륭은 간사間使(틈을 타 은밀히 출동하는 사자)를 보내 황제에게 글을 올리기를 “신臣 복륭은 사명을 제대로 받들지 못해서 흉한 역적에게 사로잡혔습니다.
비록
곤액困阨에 빠졌으나 목숨을 바치고 돌아보지 않으니
注+“봉사무상奉使無狀”은 죄가 큼을 말한 것이다., 원컨대
신臣 복륭을 염려하지 마시고 제때에 진군하소서.” 하였다.
황제는 복륭의 아뢰는 글을 받고 그의 아비인 복담伏湛(복담)을 불러서 눈물을 흘리고 이 글을 보여주며 말하기를 “우선 허락하여 급히 돌아오게 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하였다. 그 뒤에 장보가 과연 복륭을 죽였다.
目
【목目】 장풍張豐이 배반할 적에 팽총彭寵과 병력을 연합하니, 주부朱浮는 황제가 직접 팽총을 정벌하지 않는다 하여 글을 올려 구원을 청하였으나,
조서詔書로 답하기를 “헤아려보건대, 이 배반한 오랑캐는 오랫동안 온전할 형세가 없어서 그 가운데 반드시 안에서 서로 목을 베어 죽이는 자가 있을 것이다. 지금 군수물자가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앞으로 보리가 익기를 기다리고 있다.”
注+수須는 기다림이다. 하였다.
주부의 성안에 식량이 다하여 사람이 서로 잡아먹을 지경이었는데, 마침 경황耿況이 기병을 보내서 구원하자, 주부가 마침내 자신의 몸만 빼어 달아나니, 계성薊城(계성)이 마침내 팽총에게 항복하였다. 팽총은 스스로 연왕燕王이라고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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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이때에 백성들은 기근에 허덕이고 도로가 단절되어 군수물자가 제대로 이르지 못하니, 풍이馮異의 군사들이 모두 과일로 양식을 대신하고 있었다.
조령詔令을 내려 조광趙匡을 우부풍右扶風으로 제수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풍이를 돕게 하고 비단과 곡식도 아울러 보내주니, 풍이의 군대에 식량이 매우 많아졌다.
이에 풍이는 호걸 중에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차츰 공격하여 죽이고, 항복하고 귀의한 자들 중에 공이 있는 자들을 포상하였으며, 여러 진영의 우두머리들을 모두 경사京師로 보내고
그 무리를 해산하여 본업本業에 돌아가게 하니, 위엄이 관중關中에 행해져서 남은 도둑이 모두 평정되었다.
目
【
목目】
오한吳漢이
표기대장군 두무驃騎大將軍 杜茂 등 7명의 장군을 거느리고서
광락廣樂에서
소무蘇茂를 포위하였는데
注+이현李賢이 말하기를 “광락廣樂은 지명에 나와 있지 않으니, 지금의 송주 우성현宋州 虞城縣에 장락長樂의 고성故城이 있는바, 하였다.,
주건周建이 10여만 명의 병력을 소집하여 소무를 구원하였다.
注+주건周建은 유영劉永의 장수이다.
오한이 그를 맞아 싸우다가 승리하지 못하고 말에서 떨어져 무릎을 다친 채 진영으로 돌아오니, 주건 등이 병력을 연합하여 성城으로 쳐들어왔다.
장수들이 오한에게 이르기를 “큰 적이 앞에 있는데 공公께서 부상을 당하여 누워 계시니, 여러 병사들이 내심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하자,
오한은 상처를 싸매고 벌떡 일어나서 소를 잡아 병사들에게 연향을 베풀어 위로하고 권면하니, 사기가 절로 배가되었다.
아침나절에 소무와 주건이 병력을 내어 오한을 포위하자, 오한이 맹공을 가하여 대파하니, 소무가 달아나 호릉湖陵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