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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4)

자치통감강목(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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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年이라
나라 光初七이요 後趙六年이라
春正月 殺其從事周嵩, 周莚及會稽内史周札하다
一門五侯하여 宗族强盛이라 王敦 忌之注+札封東遷縣侯, 兄靖子懋淸流亭侯, 懋弟贊武康縣侯, 贊弟縉都鄕侯, 兄玘子勰烏程縣侯, 凡五侯.하고 嵩以兄顗之死 心常憤憤하니 惡之러니
道士李脱 以妖術惑衆이라 誣嵩及札兄子莚 與脱謀不軌라하여 殺之하고 遣沈充襲會稽하니 拒戰而死하다
後趙陷東莞, 東海하고 攻趙河南하여 斬其守將注+莞, 音官. 東莞縣, 漢屬琅邪郡, 武帝太始元年, 分琅邪, 立東莞郡.하다
自是 二趙構隙하여 日相攻掠하니 河東, 弘農之間 民不聊生注+河東․弘農, 二趙之界上也.이러라
成主雄 后任氏無子하고 有妾子十餘人이라 立其兄蕩之子班하여 爲太子하고 使任后母之하다
群臣 請立諸子한대 雄曰 吾兄 先帝之嫡統이요 有奇材大功이러니 事埀克而早世하니 朕常悼之注+蕩死, 見惠帝太安二年.하노라 且班 仁孝好學하니 必能負荷先烈이리라
太傅驤 諫曰 先王立嗣 必子者 所以明定分而防簒奪也 宋宣公, 吳餘祭 足以觀矣注+宣公遜國於弟穆公, 穆公遜於宣公子殤公, 殤公遇弑. 春秋譏宋之亂, 由宣公廢子立弟, 國以不寧者十世. 吳子壽夢, 有子四人, 長曰諸樊, 次曰餘祭, 次曰夷末, 次曰季札. 壽夢賢季札, 欲立以爲嗣, 札辭不可, 然後立諸樊. 諸樊卒, 舍其子而立弟, 約以次傳, 必及季子. 及夷末卒, 季子辭位以逃. 夷末之子僚立, 而諸樊之子光弑之.니이다 不聽하니
退而流涕曰 亂自此始矣리라 爲人 謙恭下士하고 動遵禮法하니 每有大議 輒令豫之하니라
茂疾病 執駿手하고 泣曰 吾家世以孝友恭順著稱하니 晉室 雖微 汝奉承之하여 不可失也니라
且下令曰 吾官 非王命이요 茍以集事 死之日 當以白帢入棺하고 勿以朝服斂注+帢, 士服也.하라
及卒 趙以駿爲涼州牧, 涼王하다
六月 加司徒導大都督揚州刺史하여 督諸軍討敦하니 復反이러라
無子하여 養兄含子應爲嗣러니 至是하여 疾甚이어늘 矯詔하여 拜爲武衛將軍以自副하다
錢鳳曰 脱有不諱하면 便當以後事付應邪잇가
敦曰 非常之事 非常人所能爲 且應 年少하니 豈堪大事리오 我死之後 釋兵歸朝하여 保全門户 上計也
退還武昌하여 收兵自守하고 貢獻不廢 中計也 及吾尙存하여 悉衆而下하여 萬一僥倖 下計也注+下, 謂順流而下.니라
謂其黨曰 公之下計 乃上策也라하고 遂與沈充定謀하고 以宿衛尙多라하여 奏令三番休二注+作三次更番, 其一調出, 其二休息於家.하다
帝親任中書令温嶠하니 惡之하여 請爲左司馬하다 嶠乃繆爲勤敬하여 綜其府事하고 時進密謀하여 以附其欲注+繆, 詐也. 綜, 機縷也, 所以持經而施緯, 使不失其條理者也. 故謂能統理衆事者, 爲綜理.하다
深結錢鳳하여 爲之聲譽하여 每曰 錢世儀精神滿腹注+世儀, 鳳字.이라하니 嶠素有藻鑑之名이라 甚悦하여 深欲結好注+藻鑑, 謂善於人倫藻鑑也. 人有美質而加之褒飾, 謂之黼藻, 如衣裳之加藻火,黼黻也. 鑑, 所以別姸醜. 故明於知人而能褒獎後進者, 有藻鑑之名.러라
丹楊尹이어늘 嶠言於敦曰 京尹 咽喉之地 公宜自選注+洪适曰 “西漢丹陽郡, 則治宛陵, 丹陽縣, 則今之建康也, 東漢史皆作丹陽, 西晉移郡於建業, 元帝改太守爲丹楊尹.하라 然之하여 問誰可者한대 嶠薦錢鳳하고 鳳亦推嶠어늘
嶠偽辭호되 不聽하고 遂表用之하여 使覘伺朝廷하다
嶠恐既去而鳳於後間之注+間, 讒間․離間之間.하여 因敦餞别하여 起行酒할새 至鳳하니
未及飲 嶠偽醉하여 以手版擊鳳幘墜하고 至作色曰注+晉輿服志 “手版, 卽古笏矣. 尙書令․僕射․尙書, 手版頭復有白筆, 以紫皮裹之, 名曰笏.” 通鑑, 墜下無至字. 錢鳳 何人이완대 温太真行酒而敢不飲고하니
以爲醉하여 兩釋之注+太眞, 嶠字.하니라
嶠與敦别할새 涕泗横流하고 出閤復入者再三이라
行後 謂敦曰 嶠於朝廷甚密하고 而與庾亮深交하니 未可信也니이다
敦曰 太真 昨醉하여 小加聲色이어늘 何得便爾相讒고하다
嶠至建康하여 盡以敦逆謀告帝注+句.하고 與亮畫計討之하니
聞之하고 大怒曰 吾乃爲小物所欺라하고 與王導書曰 太真 别來幾日 作如此事하니 當募人生致之하여 自拔其舌호리라
帝加導大都督, 領揚州刺史하고 使嶠與將軍卞敦, 應詹, 郗鑒으로 分督諸軍하다
請召臨淮太守蘇峻 兗州刺史劉遐等하여 入衛하니 帝屯於中堂注+中堂, 當在宣陽門外. 晉都建康, 外城環之以籬. 諸門皆用洛城門名. 宣陽門, 在城南面.하다
導聞敦疾篤하고 帥子弟하여 爲之發哀하니 衆以爲敦信死라하여 咸有奮志러라
於是 尙書騰詔하여 下敦府하니
輒立兄息하여 以自承代하여 不由王命注+息, 子也, 謂以兄含子應爲嗣也하고 頑凶相獎하여 志窺神器러니 天不長姦하여 敦以隕斃
復煽逆注+長, 展兩切.하니 今遣司徒導等하여 討之하노라 諸爲敦所授用者 一無所問하고
敦之將士 從敦彌年하여 違離家室하니 朕甚愍之하노라 其單丁 遣歸하여 終身不調注+單丁, 謂家止有男丁一人, 無兼次者. 調, 徒笑切. 不調, 謂不復從軍也.하고
餘皆與假三年하노니 休訖還臺하여 當與宿衛 同例三番注+謂三番休二也.하라하다
見詔하고 甚怒而病轉篤이라 將舉兵할새 使郭璞筮之한대 璞曰 無成이리이다
素疑璞助嶠 又問吾壽幾何 璞曰 明公起事 禍必不久 若住武昌이면 壽不可測이리이다
大怒曰 卿壽幾何 曰 命盡今日日中이니이다
乃收璞斬之하고 而使王含, 錢鳳, 鄧岳, 周撫等으로 帥衆向京師하다
問曰 事克之日 天子云何注+云何, 猶言如何. 敦曰 尙未南郊하니 何稱天子리오 便盡卿兵勢하여 但保護東海王及裴妃而已注+元帝, 以第三子沖, 奉東海王越後. 裴妃, 越妃也.니라
七月 含水陸五萬 奄至江寧南岸하니 人情 恟懼 嶠燒朱雀桁하여 以挫其鋒注+武帝太康二年, 分秣陵立臨江縣. 二年, 更名江寧. 南岸, 卽秦淮南岸也. 桁, 與航通, 方舟也. 駕方舟以爲橋, 在國東南四里.하다
帝欲親將兵撃之러니 聞橋已絶하고 大怒어늘 嶠曰 今宿衛寡弱하고 徵兵未至하니 若賊豕突이면 社稷 且恐不保 何愛一橋乎注+豕突, 猪性觸突人, 故取以爲喩.잇가
司徒導遺含書曰
承大將軍已不諱注+參問起居, 謂之參承, 詗候安否, 謂之詗承.하니 兄此舉 謂可如昔年之事乎注+謂如元帝永昌元年, 敦克石頭時也. 昔年 佞臣 亂朝하여 人懐不寧이라 如導之徒 心思外濟注+佞臣, 謂刁協․劉隗也. 心思外濟, 言思投外以自濟也.러니 今則不然하여
大將軍 來屯于湖 漸失人心하고 臨終之日 委重安期注+安期, 應字.하여 諸有耳者 皆知將爲禪代하니 非人臣之事也
先帝中興 遺愛在民하고 聖主聰明하여 徳洽朝野어시늘 兄乃欲妄萌逆節하니 凡在人臣 誰不憤歎이리오
導門户大小 受國厚恩하니 今日之事 明目張膽하여 爲六軍之首하여 寧爲忠臣而死언정 不爲無頼而生矣注+賴, 利也. 無賴, 謂無利入於家也. 或曰 “江湖之間, 謂小兒多詐狡獪, 爲無賴.”니라 不答하다
或以爲含, 鳳 衆力百倍하고 苑城 小而不固하니 宜及軍勢未成하여 大駕自出拒戰注+苑城, 蓋孫氏都秣陵所築. 晉置建康於秣陵水北, 南渡建都, 依苑城以爲守.이라한대
郗鑒曰
群逆縱逸하여 勢不可當이니 可以謀屈이요 難以力競이라 且含等 號令不一하고 抄盗相尋하니 曠日持久하면 必啟義士之心이라
今决勝負於一朝하여 萬一蹉跌이면 雖有申胥之徒라도 何補既往哉注+左傳定四年 “伍員與申包胥友, 曰 ‘我必復楚國.’ 包胥曰 ‘我必能興之.’ 及吳入郢, 昭王奔隨, 包胥如秦乞師, 立依於庭墻而哭, 日夜不絶聲, 勺飮不入口七日. 秦子蒲․子虎帥車五百乘, 救楚, 吳師大敗, 楚子入於郢.”리오
帝乃帥諸軍하여 出屯南皇堂하고 夜募壮士하여 遣將軍段秀等하여 帥千人渡水하여 掩其未備러니
平旦 戰於越城하여 大破之하니 匹磾弟也注+越城, 在秦淮南.
聞含敗하고 大怒曰 我兄 老婢耳 門户衰하여 世事去矣 我當力行이라하고 因作勢而起라가 困乏復卧注+氣不能充體爲困. 力不能擧身爲乏.하여
乃謂應曰 我死어든 汝便即位하여 先立朝廷百官然後 營葬하라하다
尋卒하니 秘不發喪하고 裹尸以席하고 蠟塗其外하여 埋於廳事中하고 日夜縱酒淫樂注+樂, 音洛.이러라
帝使人説沈充하여 許以爲司空注+說, 輸芮切.이러니 不奉詔하고 遂舉兵하여 與含合이어늘
司馬顧颺 説充曰 今舉大事 而天子已扼其喉咽하여 鋒摧氣沮하니 持久必敗 若决破柵塘하여 因湖水以灌京邑하고 縱舟師以攻之하면 上策也注+時, 充等寇逼京邑, 故編木立柵以護湖塘, 因謂之柵塘. 湖水, 卽玄武湖水也, 在建康城北.
籍初至之鋭하고 并東, 西軍之力하여 十道俱進이면 衆寡過倍 理必摧陷이니 中策也注+籍, 去聲. 幷, 必正切. 東軍, 謂沈充軍. 西軍, 謂王含․錢鳳等軍也.
轉禍爲福하여 召錢鳳計事라가 因斬之以降 下策也라하니 不能用이러라
劉遐, 蘇峻等 帥精卒萬人至하여 撃充, 鳳하여 大破之하다 尋陽太守周光 帥千餘人하고 赴敦하여 求見應한대 辭以疾이어늘
退하여 見其兄撫하고 曰 王公已死어늘 兄何爲與錢鳳作賊고하니 衆皆愕然이러라
含等 遂燒營夜遁하니 明日 帝還宫하다
欲奔荆州어늘 應曰 不如江州注+荊州, 王舒. 江州, 王彬.니라
含曰 大將軍 平素與江州云何한대 而欲歸之注+前年, 敦兵犯闕, 元帝使敦弟彬勞敦, 彬乃勃然, 數敦之罪, 敦怒. 王導勸彬起謝, 彬曰 “脚痛不能拜.” 去年, 敦又欲反, 彬又切諫, 敦欲殺彬. 彬曰 “君昔年殺兄, 今又殺弟邪.” 敦乃止. 今彬爲江州刺史, 故含云然.
應曰 此乃所以宜歸也 江州當人强盛時하여 能立同異하니 此非常人所及注+能立同異, 謂哭周顗, 數敦罪及諫敦爲逆也.이라
今覩困厄하면 必有愍惻之心이어니와 荆州 守文하니 豈能意外行事邪注+守文, 謂執守文法.
不從하고 遂奔荆州하니 王舒遣軍迎之하여 沈其父子於江하다 王彬 聞應當來하고 密具舟待之러니 不至하니 深以爲恨이러라
周光 斬鳳하여 詣闕自贖하고 爲故將吳儒所殺하여 傳首建康하니 敦黨 悉平하다
有司發敦瘞하여 焚其衣冠하고 跽而斬之하고 與充首 同懸於南桁注+跽, 巨几切, 跪也. 南桁, 卽朱雀桁.하다
郗鑒曰 前朝誅楊駿等 皆先極官刑하고 後聽私殯하니 臣以爲王誅加於上하고 私義行於下 宜聽敦家收葬이니이다
帝許之하다
導等 皆以討敦功으로 受封賞하니 有司奏 王彬等 當除名이니이다
詔曰 司徒導以大義滅親하니 猶將百世宥之어든 況彬等 皆其近親乎 悉無所問하라
有詔하여 敦綱紀除名하고 參佐禁錮注+綱紀, 綜理府事者也, 參佐, 諸僚屬也.하니 温嶠上疏曰
剛愎不仁하여 忍行殺戮하니 處其朝者 恒懼危亡注+朝, 府朝也.이라 原其私心하면 豈遑安處리오
必其賛導凶悖 自當正以典刑이어니와 如其枉陷姦黨 謂宜施之寛貸니이다
郗鑒 以爲先王立君臣之教 貴於仗節死義하니 王敦佐吏 雖多逼迫이나 然進不能止其逆謀하고 退不能脱身遠遁하니 準之前訓에(하여) 宜加義責이니이다
帝卒從嶠議注+義責, 謂以大義責之.하다
代王賀傉 徙居東木根山하다
是歲 賀傉 始親國政注+元帝太興四年, 賀傉立, 母惟氏專制國政.하니 以諸部多未服이라하여 乃築城於東木根山하고 徙居之注+河西有根山, 在五原郡東地. 此木根山, 在河東, 故曰東木根山.하다


[] 진주晉主(동진東晉) 숙종肅宗 명황제明皇帝 태령太寧 2년이다.
[] 나라(전조前趙) 유요劉曜 광초光初 7년이고, 후조後趙 고조高祖 석륵石勒 6년이다.
[] 봄 정월에, 왕돈王敦이 자기의 종사관從事官주숭周嵩주연周莚(주연) 및 회계내사會稽内史 주찰周札을 죽였다.
[] 주찰周札의 한 가문에 5명의 가 있어서 종족宗族이 강성하니,注+① 周札은 東遷縣侯에 봉해졌고, 형 周靖의 아들 周懋는 淸流亭侯, 주무의 아우 周贊은 武康縣侯, 주찬의 아우 周縉은 都鄕侯, 형 周玘의 아들 周勰(주협)은 烏程縣侯에 봉해졌으니, 모두 5명의 侯이다. 왕돈王敦이 그를 시기하였다. 또 주숭周嵩은 형 주의周顗의 죽음을 가지고 〈왕돈에게〉 마음속으로 항상 분노를 품으니, 왕돈이 그를 미워하였다.
마침 도사道士 이탈李脱이 요망한 방법으로 백성들을 현혹하자, 왕돈은 주숭과 주찰의 형의 아들인 주연이 이탈과 반역을 도모했다고 무함하여 그들을 죽였다. 왕돈이 심충沈充을 보내어 회계會稽를 기습하니, 주찰이 맞아 싸우다가 죽었다.
[] 후조後趙동관군東莞郡(동관군)과注+① 莞은 音이 官이다. 東莞縣은 漢나라 때에는 琅邪郡에 속하였는데, 晉나라 武帝 太始 원년(265)에 琅邪郡을 나누어 東莞郡을 세웠다. 동해군東海郡을 함락하고, 나라(전조前趙)의 하남河南 지역을 공격하여 그곳을 지키는 장수를 참수하였다.
[] 이로부터 나라(전조前趙)와 후조後趙 두 나라가 원한이 생겨서 날마다 서로 공격하고 침략하니, 하동河東홍농弘農 지역 사이의 백성들이 제대로 살 수가 없었다.注+① 河東과 弘農은 前趙와 後趙 두 나라의 경계이다.
[] 성주成主(성한成漢) 이웅李雄이 그 형의 아들 이반李班을 태자로 세웠다.
[] 성주成主 이웅李雄의 황후 임씨任氏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첩의 자식은 10여 명이 있었다. 이웅이 자기 형 이탕李蕩의 아들 이반李班을 태자로 세우고 임후任后를 그의 어미로 삼았다.
여러 신하들이 아들 중에서 태자를 세울 것을 청하자, 이웅이 말하기를 “우리 형님은 선제先帝적통嫡統이고 기이한 재능과 큰 이 있었는데, 일이 거의 성공할 즈음에 일찍 세상을 떠났으니注+① 李蕩이 죽은 것은 晉나라 惠帝 太安 2년(303)에 보인다. 은 항상 이것을 슬퍼하였노라. 또 이반은 인자하고 효성스러우며 학문을 좋아하니, 반드시 선조先祖공업功業을 계승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태부太傅 이양李驤하기를 “선왕先王이 후사를 세울 적에 반드시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삼는 것은, 정해진 명분을 밝혀 찬탈을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라 선공宣公나라 여제餘祭의 일을 통해 그 잘못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注+② 宋나라 宣公이 나라를 아우 穆公에게 사양하자, 목공이 선공의 아들 殤公에게 자리를 사양하였는데, 상공이 시해를 당하였다. ≪春秋公羊傳≫에서는 이를 두고, 宋나라의 혼란은 宣公이 아들을 폐하고 아우를 세움에서 연유하였는데, 나라가 이 때문에 10대가 지나도록 편안하지 못하였다고 비난하였다.
吳子 壽夢에게 4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長子는 諸樊, 그 다음은 餘祭, 그 다음은 夷末, 그 다음은 季札이었다. 수몽은 계찰을 어질게 여겨서 그를 후사로 세우고자 하였으나, 계찰이 불가하다고 사양하니, 그런 뒤에 제번을 세웠다. 제번이 卒하자 그 아들을 버리고 아우를 세우면서 차례로 전하여 반드시 막내아들인 계찰에게 傳位하기로 약속하였으나, 이말이 卒하자 계찰은 즉위를 사양하고 도피하였다. 이에 이말의 아들 僚가 즉위하였는데, 제번의 아들 光이 그를 시해하였다.
하였으나, 이웅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양李驤은 물러나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이 이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하였다. 이반은 인품이 겸손하고 선비들에게 자신을 낮추며 예법禮法을 따라 행동하니, 이웅은 매번 큰 의논이 있을 때마다 번번이 그로 하여금 참여하게 하였다.
[] 여름 5월에 나라(전조前趙)의 양왕涼王(전량前涼) 장무張茂하니, 세자世子 이 뒤를 이었다.
[] 장무張茂가 병이 위독하자 아들 장준張駿의 손을 잡고 울면서 당부하기를 “우리 집안은 대대로 효도와 우애, 공손과 순종으로 세상에 알려졌으니, 나라 황실이 비록 쇠미해졌으나 네가 잘 받들어서 가풍家風을 잃지 말라.” 하였다.
또 명령을 내리기를 “나의 관직은 황명이 아니요 구차히 일을 이루기 위해서 받은 것이니, 죽는 날에 마땅히 흰색의 모자(의 복식)를注+① 帢(모자)은 士의 服飾이다. 갖춰 입관하고 조복朝服으로 염습하지 말라.” 하였다.
그가 하자 나라는 장준張駿양주목涼州牧 양왕涼王으로 삼았다.
[] 6월에 사도司徒 왕도王導에게 대도독大都督 양주자사揚州刺史를 더해주고 여러 군대를 독려하여 왕돈王敦을 토벌하게 하니, 왕돈이 다시 배반하였다.
가을 7월에 왕돈의 군대가 강녕江寧에 이르자, 황제( 명제明帝)가 직접 출정하여 왕돈의 군대를 격파하니, 왕돈이 죽고 무리가 궤멸하였다. 그의 도당徒黨전봉錢鳳심충沈充주살誅殺되었다.
[] 왕돈王敦은 자식이 없어서 형 왕함王含의 아들 왕응王應을 거둬 길러 후사로 삼았는데, 이때 병이 심해지자 조령詔令을 위조하여 왕응을 무위장군武衛將軍으로 제수하여 자신의 로 삼았다.
전봉錢鳳이 말하기를 “혹시라도 할 수 없는 일(왕돈의 죽음)이 생기면, 마땅히 후사를 왕응에게 맡기시렵니까?” 하니,
왕돈이 말하기를 “비상한 일은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또 왕응은 나이가 적으니 어찌 큰일을 감당하겠는가. 내가 죽은 뒤에 군대를 해산하고 우리 가문을 보전하는 것이 상책上策이요,
물러나 무창武昌으로 돌아가서 병력을 거두어 스스로 지키고 조정에 대한 공헌貢獻을 폐하지 않는 것이 중책中策이요, 내가 아직 살아 있을 때에 병력을 모두 동원하여 강을 따라 내려가서注+① 〈“悉衆而下”의〉 下는 물결을 따라서 내려감을 이른다. 만의 하나 요행을 바라는 것이 하책下策이다.” 하였다.
전봉은 그 도당들에게 이르기를 “의 하책이 바로 상책이다.” 하고는, 마침내 심충沈充과 반역할 계책을 정하였다. 그리고 〈궁성의〉 숙위병宿衛兵이 아직 많다 하여 아뢰어서 〈교대하는〉 세 중에 두 번을 쉬게 하였다.注+② 〈“三番休二”는〉 세 番을 만들어서 번갈아 교대하게 하는데, 그중 하나는 징발하고 나머지 둘은 집에서 휴식하게 하는 것이다.
温嶠温嶠
[] 황제( 명제明帝)가 중서령中書令 온교温嶠를 친애하고 신임하니, 왕돈王敦이 그를 미워해서 청하여 자신의 좌사마左司馬로 삼았다. 온교는 이에 거짓으로 공경하여 왕돈의 의 일을 다스리고注+① 繆는 거짓이다. 綜은 베틀의 실이니, 날줄을 유지하고 씨줄을 얽어서 그 條理를 잃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능히 여러 가지 일을 다스리는 것을 ‘綜理’라고 한다. 때로 은밀한 계책을 올려서 왕돈의 욕망에 영합하였다.
전봉錢鳳과 깊이 교분을 맺고서 그를 위하여 칭찬해서 매번 말하기를 “전세의錢世儀注+② 世儀는 錢鳳의 자이다. 온몸에 원기元氣가 가득하다.” 하였다. 온교는 평소 〈인재人才를 알아보아〉 조감藻鑑注+③ “藻鑑”은 인재 감별하기를 잘하는 것을 이른다. 아름다운 자질을 가진 사람을 크게 칭찬하고 장려하는 것을 黼藻라 하니, 이는 윗옷과 아래치마에 水藻(마름), 火焰, 黼黻의 수를 놓는 것과 같다. 鑑은 예쁘고 추악함을 구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물을 잘 알아서 능히 後進을 장려하는 자에게 藻鑑이라는 명칭이 있는 것이다. 잘한다는 명성이 있었으므로, 전봉이 매우 기뻐하여 그와 우호를 맺기를 몹시 원하였다.
마침 단양윤丹楊尹注+이 말하였다. “西漢의 丹陽郡은 宛陵을 치소로 하였고 丹陽縣은 지금의 建康인데, 東漢의 역사책에는 모두 丹陽으로 되어 있다. 西晉 때에 建業으로 郡을 옮겼는데, 元帝가 太守를 바꾸어 丹楊尹이라 하였다.” 결원이 되자, 온교가 왕돈에게 말하기를 “경윤京尹은 목구멍과 같은 중요한 관직이니, 이 마땅히 직접 선발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왕돈이 그 말을 옳게 여겨서 누가 괜찮은지를 묻자, 온교는 전봉을 천거하고 전봉 또한 온교를 추천하였다.
온교가 거짓으로 사양하였으나, 왕돈은 듣지 않고 마침내 표문을 올려 온교를 등용해서 하여금 조정을 엿보게 하였다.
[] 온교温嶠는 자신이 조정으로 떠나간 다음 전봉錢鳳이 뒤에서 이간질을注+① 間(이간질하다)은 讒間, 離間의 間이다. 할까 염려하였다. 그리하여 왕돈王敦이 베풀어준 전별餞别 자리에서 일어나 술을 돌릴 적에 술잔이 전봉에게 이르렀는데,
전봉이 미처 술을 마시기 전에 온교가 거짓 취한 체하면서 수판手版으로 전봉의 두건을 쳐서 땅에 떨어지게 하고는, 크게 낯빛을 붉히며 말하기를注+② ≪晉書≫ 〈輿服志〉에 “手版은 옛 笏이다. 尙書令, 僕射, 尙書는 手版의 머리 부분에 다시 흰 붓이 있어서 자색의 가죽으로 이를 쌌는데, 이름을 笏이라 한다.” 하였다. ≪資治通鑑≫에는 ‘墜’자 아래 ‘至’자가 없다. “전봉은 과연 어떠한 사람이기에, 온태진温太真注+③ 太眞은 温嶠의 자이다. 술잔을 돌리는데 감히 마시지 않는가?” 하였다.
왕돈은 온교가 크게 취했다고 여겨 두 사람을 화해시켰다.
[] 온교温嶠왕돈王敦과 작별할 적에 눈물을 줄줄 흘리고 문에서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기를 두세 번 하였다.
온교가 도성으로 간 뒤에 전봉錢鳳이 왕돈에게 이르기를 “온교는 조정과 매우 친밀하고 유량庾亮과 교분이 깊으니,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왕돈이 말하기를 “태진太真이 어제 저녁에 술에 취하여 조금 언성을 높이고 얼굴빛을 사납게 한 것인데, 그대는 어찌 대번에 그를 비방하는가?” 하였다.
온교가 건강建康에 도착해서 황제에게 왕돈의 역모를 모두 하고注+① 여기에서 句를 뗀다. 유량과 함께 왕돈을 토벌할 계획을 세웠다.
왕돈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내 마침내 작은 놈에게 속임을 당했다.” 하고는, 왕도王導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태진太真이 작별한 지 며칠 만에 이와 같은 짓을 하고 있으니, 내가 사람들을 모집하여 산 채로 잡아오게 해서 직접 그의 혓바닥을 뽑겠다.” 하였다.
[] 황제가 왕도王導에게 대도독大都督 영양주자사領揚州刺史를 더해주고, 온교温嶠로 하여금 장군 변돈卞敦응첨應詹, 치감郗鑒과 함께 여러 군대를 나누어 감독하게 하였다.
치감이 임회태수臨淮太守 소준蘇峻연주자사兗州刺史 유하劉遐 등을 불러들여 서울을 호위하게 할 것을 청하니, 황제가 중당中堂注+① 中堂은 마땅히 宣陽門 밖에 있었을 것이다. 晉나라는 建康에 도읍할 적에 바깥 城에는 울타리를 빙 둘러치고, 여러 문에는 모두 낙양성의 궁문 이름을 사용하였으니, 宣陽門은 성의 남쪽에 있었다. 주둔하였다.
왕도는 왕돈王敦의 병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자제子弟를 거느리고 가서 그를 위하여 초상이 났다고 발표하니, 사람들은 왕돈이 참으로 죽었다고 생각하여 모두 분발하는 뜻이 있었다.
[] 이때 상서성尙書省에서 조서詔書를 전하여 왕돈王敦에 내리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왕돈이 제멋대로 형의 자식(왕응王應)을 세워서 스스로 자신의 뒤를 잇게 하여注+① 息은 자식이니, 〈“輒立兄息”은〉 형 王含의 아들 王應을 후사로 삼은 것을 이른다. 황명에 따라 임명하지 않았고, 완악하고 흉악한 자들이 서로 장려해서 뜻이 황제의 자리를 엿보았는데, 하늘이 간악함을 조장하지注+② 長(조장하다)은 展兩의 切이다. 아니하여 왕돈이 이에 죽었다.
그런데 전봉錢鳳이 다시 반역을 선동하니, 이제 사도司徒 왕도王導 등을 보내어 그를 토벌하노라. 여러 관리 중에 왕돈이 제수하여 등용한 자들은 한결같이 문책을 하지 않겠노라.
그리고 왕돈의 장병은 몇 년 동안 왕돈을 따라 집안을 멀리 떠나와 있으니, 이 매우 가엾게 여긴다. 집안에 장정壯丁이 한 명만 있는 자는 돌려보내 종신토록 다시 징용하지 말고,注+③ “單丁”은 집안에 男丁 한 명만 있고 이 없음을 이른다. 調(징발하다)는 徒笑의 切이니, “不調”는 從軍하지 않음을 이른다.
나머지는 모두 3년 동안의 휴가를 주노니, 휴가가 끝나면 바로 조정으로 돌아와서 마땅히 숙위병宿衛兵과 똑같이 삼번三番을 하도록 하라.”注+④ 〈“同例三番”은〉 세 番 중에 둘을 쉬게 함을 이른다.
[] 왕돈王敦조서詔書를 보고 매우 노하여 병이 더욱 위독해졌다. 왕돈이 군대를 일으키려 할 적에 곽박郭璞으로 하여금 시초점蓍草占을 치게 하니, 곽박이 말하기를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왕돈은 평소 곽박이 온교温嶠를 돕는다고 의심하였다. 또다시 묻기를 “나의 수명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자, 곽박이 대답하기를 “명공明公이 일을 일으키면 오래지 않아 화가 반드시 생길 것이요, 만약 무창武昌에 머물면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장수할 것입니다.” 하였다.
왕돈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의 수명은 얼마나 되겠는가?” 하니, 곽박이 대답하기를 “명이 오늘 정오에 다할 것입니다.” 하였다.
왕돈은 마침내 곽박을 체포하여 참수하고, 왕함王含전봉錢鳳, 등악鄧岳주무周撫 등으로 하여금 병력을 인솔하고 경사京師로 향하게 하였다.
전봉이 묻기를 “일이 성공하는 날에 천자를 어찌해야 합니까?”注+① “云何”는 如何(어떠한가)라는 말과 같다. 하자, 왕돈이 말하기를 “아직 남교南郊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았으니, 어찌 천자라고 칭한단 말인가. 곧 의 병력을 다 동원하여 동해왕東海王(사마충司馬沖)과 배비裴妃注+② 元帝(司馬睿)는 셋째 아들 司馬沖으로 하여금 東海王 司馬越의 뒤를 받들게 하였다. 裴妃는 司馬越의 妃이다. 하였다.
[] 7월에 왕함王含수군水軍육군陸軍 5만 명이 갑자기 강녕江寧남안南岸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불안에 떨며 두려워하였다. 온교温嶠을 불태워 왕함의 군대의 예봉銳鋒을 꺾었다.注+① 晉 武帝 太康 2년(281)에 秣陵을 나누어 臨江縣을 세웠는데, 〈晉 明帝〉 太寧 2년(324)에 江寧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南岸은 바로 秦淮河의 남쪽 기슭이다. 桁은 航과 通하니, 배다리이다. 배를 나란히 연결하여 다리를 만든 것이니, 國都 동남쪽 4리 지점에 있다.
황제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공격하고자 하였는데, 다리가 이미 끊겼다는 말을 듣고 크게 노하자, 온교가 말하기를 “지금 숙위병宿衛兵의 인원이 적어 세력이 약하고 징발한 병사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니, 만약 적이 저돌적으로 공격하면注+② “豕突”은, 돼지의 성질이 〈아무것도 돌보지 않고〉 돌진하여 사람을 들이받기 때문에 이를 취하여 비유한 것이다. 사직社稷도 보존하지 못할까 두려운데, 어찌 다리 하나를 아끼십니까.” 하였다.
[] 사도司徒 왕도王導왕함王含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었다.
대장군大將軍(왕돈王敦)이 이미 죽었다는 말을 들었으니,注+① 찾아뵙고 起居를 묻는 것을 ‘參承’이라 이르고, 〈뵙지 않고 서신 등으로〉 安否를 살피는 것을 ‘詗承’이라 이른다. 형의 이번 거사가 지난해의 일과 같으리라고 생각하는가.注+② 〈“可如昔年之事”는〉 晉 元帝 永昌 원년(322)에 王敦이 石頭城을 점령했을 때의 일을 이른다. 지난해에는 간신들이 조정을 어지럽혀서 사람마다 불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나와 같은 무리도 마음속으로 밖으로 나가 스스로 구제할 것을 생각하였는데,注+③ 佞臣은 刁協과 劉隗를 이른다. “心思外濟”는 밖으로 나가 스스로 구제할 것을 생각함을 이른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대장군이 와서 우호于湖에 주둔함에 점점 민심을 잃었고, 또 임종하는 날에 안기安期에게注+④ 安期은 王應의 자이다. 중임을 맡겨서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대장군이 장차 선대禪代(선양禪讓)를 통해 제위를 찬탈하려 하는 것을 알고 있으니, 이것은 신하가 할 일이 아니다.
선제先帝중흥中興하심에 남은 사랑이 백성들에게 보존되어 있고, 지금 성스러운 군주君主가 총명하여 덕이 조야朝野에 흡족하다. 그런데도 형은 마침내 반역하는 일을 함부로 시작하고자 하니, 무릇 신하된 자들 중에 누가 분노하고 탄식하지 않겠는가.
우리 문호門户대소大小가 나라의 큰 은혜를 입었으니, 오늘날의 일은 눈을 밝게 뜨고 간담肝膽을 키워 6의 우두머리가 되어서 차라리 충신이 되어 죽을지언정 무뢰한無頼漢注+⑤ 賴는 이로움이니, “無賴”는 집안에 수입이 없음을 이른다. 혹자는 말하기를 “江湖의 사이에서는, 속임수가 많고 교활한 어린아이를 일러 ‘無賴’라 한다.” 하였다. 되어 살지 말라.” 왕함은 답을 보내지 않았다.
[] 혹자가 이르기를 “왕함王含전봉錢鳳은 병력이 우리의 백 배나 되고, 우리 도성의 원성苑城注+① 苑城은 아마도 孫氏(孫權)가 秣陵에 도읍할 때 축조한 것인 듯하다. 晉나라는 수도인 建康을 秣陵의 강북에 설치하였는데, 남쪽으로 건너와 도성을 세울 적에 苑城을 의지하여 수비하였다. 작고 견고하지 못합니다. 마땅히 적의 군세軍勢가 이루어지기 전에 대가大駕(황제)가 직접 나가 적군을 맞아 싸워야 합니다.” 하였다.
그러자 치감郗鑒이 다음과 같이 반대하였다.
“여러 역신逆臣들이 방종하고 제멋대로 행동하여 그 세력을 당해낼 수 없으니, 계책으로 적을 굴복시켜야 하고 힘으로 다투기가 어렵습니다. 또 왕함 등은 호령號令이 통일되지 못하고 끊임없이 노략질과 도둑질을 하고 있으니, 오랫동안 지구전을 하면 반드시 의사義士들의 마음을 격분시킬 것입니다.
지금 하루아침에 적과 승부를 결단하다가 만일 차질이 생긴다면, 비록 신포서申包胥의 무리가 있더라도 지난 잘못을 만회하는 데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注+② ≪春秋左氏傳≫ 定公 4년에 “伍員(伍子胥)은 申包胥와 친한 사이였는데, 〈오원이 吳나라로 망명하면서〉 말하기를 ‘내 반드시 楚나라에 복수하겠다.’ 하자, 신포서가 말하기를 ‘나는 반드시 楚나라를 다시 일으키겠다.’ 하였다. 吳나라 군대가 楚나라 도성인 郢으로 쳐들어오자, 楚나라 昭王이 隨나라로 달아나니, 신포서가 秦나라에 가서 원병을 청할 적에 뜰의 담장에 의지하고 서서 통곡하였는데, 밤낮으로 곡소리를 그치지 않았고 7일 동안 한 잔의 물도 입에 넣지 않았다. 이에 秦나라의 子蒲와 子虎가 兵車 500乘을 거느리고 楚나라를 구원하여 吳나라 군대가 대패하니, 楚子가 다시 郢으로 돌아갔다.” 하였다.
황제는 마침내 여러 군대를 거느리고 나가 남황당南皇堂에 주둔하고는, 밤에 장사壮士를 모집해서 장군 단수段秀 등을 보내어 천 명을 거느리고 강물을 건너가 적이 아직 대비하지 못했을 때 습격하게 하였다.
다음 날 새벽에 단수가 월성越城에서注+③ 越城은 秦淮河의 남쪽에 있다. 싸워 적을 대파大破하니, 단수는 단필제段匹磾의 아우이다.
[] 왕돈王敦왕함王含이 패했다는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우리 형은 늙은 계집종과 같다. 가문이 쇠하여 세상일이 틀어져버렸다. 내 마땅히 〈병을 무릅쓰고〉 힘써 출격하겠다.” 하고는, 억지로 힘을 내어 일어나다가 기운과 힘이 빠져서注+① 기운이 몸에 충만하지 못한 것을 困이라 하고, 몸을 들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없는 것을 乏이라 한다. 다시 누웠다.
마침내 왕응王應에게 이르기를 “내가 죽으면, 네가 곧바로 즉위하여 먼저 조정의 백관을 세운 뒤에 장례를 치르도록 하라.” 하였다.
[] 왕돈王敦이 얼마 후 하니, 왕응王應을 숨기고 발표하지 않고서 시신을 자리로 싸고 그 밖에 밀랍을 칠하여 청사廳事 안에 묻고는, 밤낮으로 술을 마시면서 지나치게 향락에 빠졌다.注+① 樂(즐기다)은 音이 洛이다.
[] 황제가 사람을 보내 심충沈充을 설득하여注+① 說(설득하다)는 輸芮의 切이다. 그를 사공司空으로 삼을 것을 허락하였는데, 심충은 조명詔命을 따르지 않고 마침내 군대를 일으켜서 왕함王含과 연합하였다.
사마司馬고양顧颺(고양)이 심충을 설득하기를 “지금 대사大事를 일으켰으나, 천자가 이미 목구멍과 같은 요해처要害處를 차지하고 있어서 우리의 예봉銳鋒이 꺾이고 사기가 저상沮喪되었으니, 지구전을 하면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만약 책당柵塘을 무너뜨려서 현무호玄武湖의 물을 끌어다가 경읍京邑에 대고 수군水軍을 풀어놓아 공격하면 이것이 상책上策입니다.注+② 이때 沈充 등이 京邑(都城) 가까이까지 침입해왔다. 이에 나무를 엮어 柵을 세워 湖塘을 보호하고는, 이를 柵塘이라고 하였다. 湖水는 바로 玄武湖의 물이니, 建康城 북쪽에 있다.
〈군대가 도성에〉 막 도착했을 때의 예기銳氣에 의지해서 동군東軍서군西軍의 힘을 합하여 10갈래의 길로 함께 진격하면, 우리의 병력이 저들보다 배가 넘어서 이치상 반드시 관군을 꺾고 무찌를 수 있으니, 이것이 중책中策입니다.注+③ 籍(의지하다)는 去聲이다. 幷(합병하다)은 必正의 切이다. 東軍은 沈充의 군대를 이르고, 西軍은 王含과 錢鳳 등의 군대를 이른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계기를 삼는 것으로 전봉錢鳳을 불러 일을 계책하다가 그 틈을 타서 전봉을 참수하고 항복하는 것이 하책下策입니다.” 하였는데, 심충은 그의 말을 따르지 못하였다.
[] 유하劉遐소준蘇峻 등이 정예병 만 명을 거느리고 도착하여 심충沈充전봉錢鳳을 공격해서 대파하였다. 심양태수尋陽太守 주광周光이 1천여 명의 병력을 인솔하고 왕돈王敦의 진영으로 달려가서 왕응王應을 만나보려 하였으나, 왕응은 병을 핑계로 사양하였다.
주광은 물러가서 형 주무周撫를 보고 말하기를 “왕공(왕돈)이 이미 죽었는데, 형은 어찌하여 전봉과 역적질을 하십니까.” 하니, 무리가 모두 놀랐다.
왕함王含 등이 마침내 진영을 불태우고 밤에 도주하니, 다음 날 황제가 환궁을 하였다.
[] 왕함王含형주荆州로 달아나려 하자, 왕응王應이 말하기를 “강주江州로 가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注+① 荊州刺史는 王舒이고, 江州刺史는 王彬이다.
왕함이 말하기를 “대장군大將軍(왕돈王敦)이 평소 강주江州(왕빈王彬)와 어떻게 지냈는데, 강주江州로 돌아가고자 하는가?”注+② 前年(322)에 王敦의 군대가 대궐을 침범하자, 元帝가 왕돈의 아우 王彬으로 하여금 왕돈을 위로하게 하였는데, 왕빈이 발끈하여 왕돈의 죄를 열거하니 왕돈이 노하였다. 王導가 왕빈에게 일어나 사죄할 것을 권하자, 왕빈이 말하기를 “저는 다리가 아파서 절을 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지난해(323) 왕돈이 또다시 배반하고자 하자 왕빈이 또 지극히 諫하니, 왕돈은 왕빈을 죽이고자 하였다. 왕빈이 말하기를 “君이 지난해에는 형(王澄)을 죽였는데, 이제는 또 아우를 죽이시렵니까.” 하니, 왕돈이 마침내 중지하였다. 지금 왕빈이 江州刺史로 있으므로 왕함이 이렇게 말한 것이다. 하니,
왕응이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마땅히 강주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강주자사江州刺史 왕빈王彬은 우리가 강성할 때를 당하여 능히 다른 의견을 세웠으니,注+③ “能立同異”는, 王彬이 周顗의 喪에 곡하고, 王敦의 죄를 열거하며, 왕돈이 반역하는 것을 諫한 것을 이른다. 이는 보통 사람이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들이 위험에 처해 곤란한 것을 보면, 반드시 가엾게 여기고 측은해하는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형주자사荊州刺史(왕서王舒)는 법규法規만을 굳게 지키니,注+④ “守文”은 法條文을 굳게 지킴을 이른다. 어찌 뜻밖의 일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왕함은 그 말을 따르지 않고 마침내 형주로 달아났는데, 왕서가 군대를 보내 그를 맞이하고는 왕함 부자父子를 강물에 빠뜨려 죽였다. 왕빈은 왕응이 올 것이라는 말을 듣고 은밀히 배를 장만하여 기다렸는데, 왕응이 오지 않으니 깊이 하였다.
주광周光전봉錢鳳을 참수하고서 대궐에 나와 스스로 속죄하고, 심충沈充은 옛 부하 장수인 오유吳儒에게 살해당하여 수급首級이 파발마로 건강建康에 보내지니, 왕돈王敦이 모두 평정되었다.
유사有司가 왕돈의 무덤을 파서 시신을 꺼내어 그 옷과 관을 불태우고 무릎을 꿇은 모습을 만들어서 참수하고는, 심충의 머리와 함께 남항南桁(남항)에 매달았다.注+⑤ 跽는 巨几의 切이니, 무릎을 꿇음이다. 南桁은 朱雀桁이다.
[] 치감郗鑒이 말하기를 “앞 조정朝政에서는 양준楊駿 등을 주벌할 적에 모두 먼저 관청의 형벌을 지극히 사용하고 난 뒤에는 사사로이 장례를 치를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은 생각하건대, 위에서 황제의 주벌을 가하고 아래에서 사사로운 가 행해져야 합니다. 마땅히 왕돈王敦의 집에서 그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할 것을 허락해야 합니다.” 하니,
황제가 이를 허락하였다.
[] 왕도王導 등이 모두 왕돈王敦을 토벌한 으로 봉지封地을 받으니, 유사有司가 아뢰기를 “왕빈王彬 등을 마땅히 제명除名해야 합니다.” 하였다.
황제는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사도司徒 왕도는 대의大義로써 친족의 사사로운 정을 돌아보지 않았으니 장차 백세百世토록 죄를 용서해야 하거늘, 하물며 모두 그의 가까운 친척인 왕빈 등에 있어서랴. 모두 문책하는 바가 없도록 하라.” 하였다.
[] 조령詔令을 내려서 왕돈王敦강기綱紀들을 제명하고 참좌參佐들을 금고시키니,注+① 綱紀는 府의 일을 다스리는 자이고, 參佐는 여러 官屬들이다. 온교温嶠가 상소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왕돈이 강퍅하고 인자하지 못해서 잔인하게 살육을 행하였으니, 그의 부서府署注+② 朝는 府朝(府署)이다. 머문 자들은 항상 위태롭고 멸망하게 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들의 사사로운 마음을 따져보면 어찌 편안히 거처할 겨를이 있었겠습니까.
만일 흉악함과 패악함을 도와서 인도한 자는 응당 떳떳한 형벌로 죄를 바로잡아야 하지만, 만일 억울하게 간악한 무리에 빠진 자들은 마땅히 너그럽게 용서해야 합니다.”
이에 치감郗鑒이 다음과 같이 반대하였다. “선왕先王군신간君臣間의 가르침을 세울 적에 절개를 지키고 를 위해 죽는 것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왕돈의 보좌관들이 비록 핍박과 압박을 많이 받았으나, 나아가서는 왕돈의 역모를 저지하지 못하고 물러가서는 몸을 빼어 멀리 도망하지 못하였으니, 예전의 가르침에 따라 마땅히 군신간君臣間대의大義에 따라 책벌을 가해야 합니다.”注+③ “義責”은 君臣間의 大義로써 책벌함을 이른다.
황제는 결국 온교의 의논을 따랐다.
[] 대왕代王 탁발하녹拓跋賀傉동목근산東木根山으로 거처를 옮겼다.
[] 이해에 탁발하녹拓跋賀傉이 처음으로 국정國政을 친히 담당하였는데,注+① 元帝 太興 4년(321)에 拓跋賀傉이 즉위하였는데, 당시에 어머니 惟氏가 國政을 제멋대로 운영하였다. 여러 부족 중에 복종하지 않는 자가 많다 하여 마침내 동목근산東木根山注+② 河西에 木根山이 있는데 五原郡 동쪽 지역에 있었다. 여기의 木根山은 河東에 있기 때문에 東木根山이라고 하였다. 성을 쌓고 거처를 그리로 옮겼다.


역주
역주1 成主雄……爲太子 : “이때 이웅에게 첩의 자식이 있었으나 그를 태자로 세우지 않고 李班을 세웠으니, ‘그 형의 아들 이반을 세웠다.’라고 쓴 것은 亂의 시초를 드러낸 것이다. 그러므로 지척하여 成主라고 쓴 것이다.(漢나라(前趙)가 아들 劉粲과 劉煕를 태자로 세웠을 때 主를 쓰지 않은 것에 의거한 것이다.)[於是 雄有妾子 不立 立班 書立其兄子班 著亂始也 故斥書主(據漢立子粲子熙(下)[不]書主)]” ≪書法≫
역주2 張駿 : 오호십육국의 하나인 前涼의 4대 군주이다.
역주3 趙涼王張茂卒 世子駿嗣 : “張茂가 〈형 張寔의〉 뒤를 이어 스스로 즉위하였으니, 비록 기록할 만한 공적은 없으나 그가 죽을 때에 자식(世子)에게 晉나라를 섬기라고 부탁하고 또 자기 관직이 晉나라의 命이 아니라 하여 죽을 때까지 이것을 부끄러워하였으니, 그렇다면 또한 일찍이 晉나라를 잊지 않은 자이고 다만 趙나라에 굴복하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가 卒하였을 때 ‘趙涼王’이라고 썼으니, 이는 그를 가엾게 여긴 것이다.[茂自嗣立 雖無可紀 然其死也 以事晉屬其子 且以官非晉命 恥之終身 則亦未嘗忘晉者也 特屈於趙耳 故卒之 書曰趙涼王 閔之也]” ≪書法≫
역주4 加司徒導……其黨錢鳳沈充伏誅 : “위에서는 ‘討’라고 쓰고 아래에서는 ‘拒’라고 쓴 것이 많은데, 여기에서는 ‘敦復反(王敦이 다시 배반했다.)’이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왕돈이 본래 배반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왕돈을 토벌하는 군대가 이르기 전에 왕돈의 군대가 이미 江寧에 도착하였으므로 ‘反’이라고 쓴 것이다. ‘親征’이라고 쓴 것이 이때 처음 시작되었으니, ≪資治通鑑綱目≫에서 ‘自將(직접 군대를 거느렸다.)’이라고 쓴 것이 38번인데(漢나라 高帝 5년(B.C.202)에 자세하다.), ‘親征’이라고 쓴 것은 2번이다(이해(324)와 唐나라 太宗 貞觀 18년(644)).[上書討 下書拒 多矣 此其書敦復反 何 敦本欲反也 討敦之師未至 而敦兵已至江寧矣 故書反 書親征 始此 綱目書自將三十八(詳漢高帝五年) 書親征二(是年 唐太宗貞觀十八年)]” ≪書法≫
역주5 조정에……맡겨서 : 원문에는 ‘歸朝’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는 ‘歸身朝廷’으로 되어 있다.
역주6 洪适 : 1117~1184. 宋나라 饒州 鄱陽 사람으로 金石文에 능하였으며, 호는 盤洲이다. ≪隷釋≫, ≪隷續≫ 등의 저서를 남겼다.
역주7 그 밖의 壯丁 : 원문은 ‘兼次’이다. 이는 ‘兼丁(그 밖의 장정)’을 이야기한 것으로 보인다.
역주8 東海王……된다 : 司馬沖 아버지 司馬越이 東海王에 봉해지고 나서 永嘉 초년에 사마월이 王敦을 揚州刺史로 삼고 신임하였는데, 왕돈이 이때의 은혜를 갚고자 한 것이다.(≪晉書≫ 권59 〈東海王越〉)
역주9 朱雀桁 : 建康의 朱雀門 남쪽에 있는 배다리를 말한다. 秦淮河의 남쪽과 북쪽 연안에 걸쳐 있고 도성으로 통하는 大路와 연결되어 있으며 배다리를 열어서 배가 통과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그 기원은 삼국시대 吳나라 南津橋로 晉代에 주작항으로 바꾸었다.
역주10 (大)[木] : 저본에는 ‘大’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木’으로 바로잡았다.

자치통감강목(14) 책은 2021.11.1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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