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初
에 李膺等
이 雖廢錮
나 天下士大夫 皆高尙其道而汙穢朝廷
하고 更相標榜
하여 爲之稱號
注+汙穢朝廷, 謂以朝廷爲汙穢也. 立表以示人曰標, 揭書以示人曰榜. 標榜, 猶言表揭也.라
以竇武, 陳蕃, 劉淑爲三君하니 君者는 言一世之所宗也요 李膺, 荀昱, 杜密, 王暢, 劉祐, 魏朗, 趙典, 朱㝢爲八俊하니
俊者는 言人之英也요 郭泰, 范滂, 尹勳, 巴肅, 宗慈, 夏馥, 蔡衍, 羊陟爲八顧하니 顧者는 言能以德行引人者也요
張儉, 翟超, 岑晊, 苑康, 劉表, 陳翔, 孔昱, 檀敷爲八及
하니 及者
는 言其能導人追宗者也
注+表, 景帝子魯恭王之後也. 導, 引也. 宗, 謂所宗仰者.요
度尙, 張邈, 王孝, 劉儒, 胡毋班, 秦周, 蕃嚮, 王章爲八廚
하니 廚者
는 言能以財救人者也
注+毋, 音無. 胡毋, 複姓. 蕃, 音皮, 姓也.라
及陳, 竇用事에 復擧拔膺等이러니 陳, 竇誅에 膺等이 復廢하다
目
十月에 曹節이 諷有司하여 奏諸鉤黨者虞放, 李膺, 杜密, 朱㝢, 荀昱, 翟超, 劉儒, 范滂等하여 請下州郡考治하니
是時에 上年十四라 問節等曰 黨人이 何用爲惡而欲誅之邪아 對曰 相擧群輩하여 欲爲不軌니이다
上曰 不軌欲如何
오 對曰 欲圖社稷
이니이다 上
이 乃可其奏
注+軌, 法度也. 君君臣臣, 所謂法也. 爲人臣而欲圖危社稷, 謂之不法, 誠是也, 而諸閹以此罪加之君子, 帝不之悟.하다
目
逢의 從兄子閎이 少有操行하여 以耕學爲業하니 逢, 隗數饋之호되 無所受라
閎이 見時方險亂而家門富盛하고 常對兄弟歎曰 吾先公福祚를 後世不能以德守之하고
而競爲驕奢
하여 與亂世爭權
하니 此卽晉之三郤矣
注+先公, 謂袁安也. 三郤, 謂晉大夫郤錡, 郤犨, 郤至也. 郤氏世爲晉卿, 三子者憑藉世資, 驕奢侵權, 爲厲公所殺.로다 及黨事起
에 閎
이 欲投迹深林
호되
以母老로 不忍去하여 乃築土室四周於庭호되 不爲戶하고 自牖納飮食이라
母思閎이면 時往就視러니 母去면 便自掩閉하니 兄弟妻子 莫得見也러라 潛身十八年에 卒於土室하니라
目
司馬公이 曰 天下有道에 君子揚于王庭하여 以正小人之罪而莫敢不服하고
天下無道에 君子囊括不言하여 以避小人之禍而猶或不免이라
黨人이 生昏亂之世하여 不在其位어늘 四海橫流에 而欲以口舌救之하여
以至身被淫刑하고 禍及朋友하여 士類殲滅而國隨以亡하니 不亦悲乎아
夫惟郭泰 旣明且哲하여 以保其身하고 申屠蟠이 見幾而作하여 不俟終日하니 卓乎其不可及已로다
目
【목目】 낭중 사필郞中 謝弼이 다음과 같이 봉사封事를 올렸다. “황태후皇太后가 빈 궁궐에 유폐되어 있으니, 만약 안개와 이슬로 인하여 병이 생기시면 폐하陛下께서 무슨 면목으로 천하 사람들을 보시겠습니까.
효화황제孝和皇帝가 자신을 양육해준 두씨竇氏(두태후)의 은혜를 끊지 않으니, 전대前代에 이것을 미담美談으로 여겼습니다. 예禮에 남의 양자가 된 자는 그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환제桓帝를 아버지로 삼으셨으니, 어찌 태후太后를 어머니로 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태재台宰(재상宰相)의 지위를 맡은 중신重臣은 국가의 운명이 달려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사공四公 중에 오직
유총劉寵만이 정성스럽고 한결같이
선善을 지키고
注+“사공四公”은 태위太尉, 사도司徒, 사공司空, 태부太傅를 이른다. “단단斷斷”은 성실하고 한결같은 모양이다., 나머지는 모두 공밥만 먹고 도둑을 불러오는 사람이니, 반드시
이 있을 것입니다.
注+≪시경詩經≫ 〈위풍 벌단魏風 伐檀〉에 이르기를 “공밥을 먹지 않는다.” 하였고, ≪주역周易≫ 하였고, 또 정괘 구사효사鼎卦 九四爻辭에 이르기를 “솥이 발이 부러져 공상公上에게 바칠 음식을 뒤엎었다.” 하였다.
이번의 재이災異를 빌미로 모두 파면하여 내치고, 왕창王暢과 이응李膺을 불러와서 함께 정사政事에 참여하게 하면, 거의 재변災變이 사라지고 국운國運이 영원할 것입니다.”
좌우左右의 측근들이 그의 말을 미워하여, 다른 죄로 사필을 체포해서 고문하다가 옥중에서 죽게 하였다.
目
【
목目】
조령詔令을 내려
알자 풍선謁者 馮禪을 보내
한양漢陽에 흩어져 있는
강족羌族들을 설득하여 항복하게 하니,
단경段熲은 생각하기를 ‘
강족羌族들이 비록 잠시 항복하더라도 반드시 다시 도둑질을 할 것이다. 그들이 허약한 틈을 타서 군대를 풀어 공격하는 것만 못하니, 형세가 반드시
강족羌族을 섬멸할 수 있을 것이다.’
注+“방병放兵”은 군대를 풀어 강족羌族을 공격함을 이른다. 하고는,
이에 전진하여 강족이 주둔하고 있는 4, 50리 거리에 진영을 설치하고, 전안田晏과 하육夏育을 보내 5,00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먼저 출동하여 적을 격파하게 하였다.
강족의 무리가 동쪽
사호곡射虎谷으로 도망하여 군대를 나누어 골짜기의 위아래 입구를 지키자
注+사호곡射虎谷은 서현西縣의 동북쪽에 있다., 단경은 일거에 멸망시켜서 다시는 흩어져 달아나지 못하게 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병사 1,000명을
서현西縣으로 보내 나무를 묶어 너비 20
보步, 길이 40
리里의
목책木柵을 만들어 강족을 막게 하였다.
注+서현西縣은 전한前漢에는 농서군隴西郡에 속하였는데, 후한後漢에는 한양군漢陽郡에 속하였다.
그리고 전안과 하육 등을 나누어 보내 7,000명의 병력에게 입에 재갈을 물리고 밤에 서쪽 산으로 올라가서 진영을 만들고 참호를 파게 하였는데, 오랑캐 진영과 1리쯤 떨어지게 하였다.
또 장개張愷를 보내 3,00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서 동쪽 산으로 올라가게 하니, 오랑캐가 그제야 이 사실을 깨달았다.
目
【목目】 단경段熲이 인하여 장개張愷 등과 동쪽 산과 서쪽 산을 끼고서 군대를 풀어 맹공을 가하고 골짜기 위아래 입구까지 추격하여 궁벽한 산과 깊은 골짜기 곳곳마다 격파하고, 그 거수渠帥(수령首領) 이하 19,000명의 수급을 베었다.
풍선馮禪 등이 불러 항복시킨 4,000명을 안정安定, 한양漢陽, 농서隴西 세 군郡에 나누어 배치하니, 이에 동강東羌이 모두 평정되었다.
目
【목目】 사마온공司馬溫公(사마광司馬光)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만이蠻夷와 융적戎狄은 기류氣類가 비록 다르나, 이익에 나아가고 해로움을 피하며 사는 것을 좋아하고 죽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또한 보통 사람(한漢나라 사람)과 똑같다.
이들을 어거함에 옳은 방도를 얻으면 순히 귀의하여 복종하며, 옳은 방도를 잃으면 이반하고 소요를 일으키는 것은 진실로 당연하다.
이 때문에 선왕先王의 정사에는 배반하면 토벌하고 복종하면 회유하여 사예四裔(네 변방)에 거처하게 해서 예의禮義의 나라를 어지럽히지 않게 했을 뿐이다.
만약
선善과
악惡을 구분하지 않으며 순종하여 오고 배반하여 가는 것을 구분하지 않고서 모두 베어 죽인다면, 어찌 이것이 백성의
부모父母가 된 뜻이겠는가.
注+애艾(베다)는 예刈로 읽는다.
또
강족羌族들이 배반하는 이유는
군현郡縣에서 억울하게 침탈을 당했기 때문이요
注+“침원侵寃”은 침탈을 당하여 원한을 품고 있는 것이다., 배반을 하는데도 즉시 주벌하지 못하는 것은 장수가 훌륭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훌륭한 장수가 이들을 몰아 변방 밖으로 내보내고 어진 수령을 가려 이들을 다스렸다면, 이들 또한
강역疆埸(변방)의 신하가 되었을 것이니
注+역埸(변경)은 음音이 역亦이니, 강역疆埸은 변경邊境이다., 어찌 오로지 많이 죽이는 것을 통쾌하게 여길 수 있겠는가.
어거함에 옳은 방도를 얻지 못하면 비록 화하華夏의 백성들이라도 장차 봉기하여 도둑질을 할 것이니, 또 어찌 다 죽일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단기명段紀明(
단경段熲)이 장수가 되어서 비록 승리하여 공이 있었으나, 군자가 인정하지 않는 바이다.”
注+기명紀明은 단경段熲의 자字이다.
目
【
목目】 처음에,
이응李膺 등이 비록 폐출되어
금고禁錮되었으나 천하의
사대부士大夫가 모두 그들의
도道를 고상하게 여기고
조정朝廷을 더럽게 여겼으며, 그들은 번갈아 서로
표방標榜해서 각자에게
칭호稱號를 부여하였다.
注+“오예조정汙穢朝廷은” 조정朝廷을 더럽다고 여기는 것을 이른다. 표表를 세워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을 표標라 하고, 글을 써 붙여서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을 방榜이라 하니, 표방標榜은 표게表揭라는 말과 같다.
그리하여 두무竇武와 진번陳蕃, 유숙劉淑을 삼군三君이라 하였으니 군君은 한 세상이 높이는 자를 말한 것이요, 이응李膺, 순욱荀昱(순욱), 두밀杜密, 왕창王暢, 유우劉祐, 위랑魏朗, 조전趙典, 주우朱㝢를 팔준八俊이라 하였으니
준俊은 사람 중에 영준英俊한 자를 말한 것이요, 곽태郭泰, 범방范滂, 윤훈尹勳, 파숙巴肅, 종자宗慈, 하복夏馥, 채연蔡衍, 양척羊陟을 팔고八顧라 하였으니 고顧는 덕행德行으로 남을 인도할 수 있는 자를 말한 것이요,
장검張儉,
적초翟超,
잠질岑晊(잠질),
원강苑康,
유표劉表,
진상陳翔,
공욱孔昱(공욱),
단부檀敷를
팔급八及이라 하였으니
급及은 사람들을 인도하여 〈
현자賢者를〉 따르고 높이게 할 수 있는 자를 말한 것이요
注+유표劉表는 경제景帝의 아들인 노공왕魯恭王의 후손이다. 도導는 인도함이다. 종宗은 높이고 우러르는 자를 이른다.,
도상度尙,
장막張邈,
왕효王孝,
유유劉儒,
호무반胡毋班,
진주秦周,
번향蕃嚮,
왕장王章을
팔주八廚라 하였으니
주廚는 재물을 가지고 남을 구원할 수 있는 자를 말한 것이다.
注+무毋는 음音이 무無이니 호무胡毋는 복성複姓이다. 번蕃는 음音이 피皮이니 성姓이다.
진번과 두무가 권력을 잡게 되자 다시 이응 등을 천거하여 선발하였는데, 진번과 두무가 죽임을 당하자 이응 등이 다시 폐출되었다.
目
【목目】 10월에 조절曹節이 유사有司에게 넌지시 말하여 우방虞放, 이응李膺, 두밀杜密, 주우朱㝢, 순욱荀昱, 적초翟超, 유유劉儒, 범방范滂 등 구당鉤黨을 한 자들을 아뢰어 주군州郡에 내려 조사하여 치죄治罪할 것을 청하였다.
이때 상上의 나이가 14세였는데, 조절 등에게 묻기를 “당인黨人들이 무슨 나쁜 짓을 하기에 죽이려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그들은 서로 자기 무리들을 천거하여 불궤不軌를 하려고 합니다.” 하였다.
상上이 말하기를 “
불궤不軌는 어찌 하고자 하는 것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
사직社稷(황제)을 도모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니,
상上이 비로소 아뢴 대로 할 것을 허락하였다.
注+궤軌는 법도法度이니, 임금은 임금 노릇 하고 신하는 신하 노릇 하는 것이 이른바 법法이라는 것이다. 신하가 되어서 사직社稷을 위태롭게 할 것을 도모하려 하는 것을 불법不法이라고 하는 것은 진실로 옳지만, 여러 환관들이 이 죄를 군자君子에게 덮어씌우는데도 황제가 깨닫지 못하였다.
目
【
목目】 혹자가
이응李膺에게 이르기를 “도망갈 만합니다.” 하자, 이응은 대답하기를 “군주를 섬길 적에 어려운 일을 사양하지 않고 죄가 있을 적에 형벌을 피하지 않는 것이 신하의 절개이다.
注+≪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양공襄公 3년에 “군주를 섬길 때에는 어려운 일을 피하지 않고, 죄가 있을 때에는 형벌을 피하지 않는다.” 하였다.
내 나이가 이미 60이 되었고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달려 있으니, 도망가면 장차 어디로 가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조옥詔獄에 나아가 고문을 받다가 죽으니, 문생門生과 예전의 부하들이 모두 금고禁錮를 당하였다.
시어사 경의侍御史 景毅의 아들
경고景顧가 이응의
문도門徒였는데 문도를 기록한
보첩譜牒에 그의 이름이 들어 있지 아니하여
견책譴責을 받지 않았다.
注+녹錄은 기록이고, 첩牒은 문서이다. 이때 문도를 모아 가르쳐서 많은 경우에는 1,000명으로 헤아려졌는데, 각각 그 성명을 보첩譜牒에 기록하였다.
경의는 서글퍼하며 말하기를 “본래 이응이 어질다고 생각해서 아들을 보내어 사사師事하게 하였는데, 어찌 명적名籍에서 빠져 있다 하여 구차히 편안하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스스로 표문을 올려 면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目
【목目】 원봉袁逢의 종형從兄의 아들 원굉袁閎(원굉)은 젊어서부터 조행操行이 있어서 농사지으며 학문하는 것을 업으로 여겼는데, 원봉袁逢과 원외袁隗가 자주 선물을 주었으나 받지 않았다.
원굉은 세상이 한창 험난한데 가문家門이 부유하고 흥성함을 보고는 항상 형제들을 마주하여 탄식하기를 “우리 선공先公의 복록을 후세後世가 덕으로 지켜내지 못하고,
다투어 교만하고 사치하여
난세亂世의 사람들과 권력을 다투니, 이는 바로
진晉나라의
삼극三郤이다.”
注+선공先公은 원안袁安을 이른다. 삼극三郤은 춘추시대 진晉나라 대부大夫인 극기郤錡(극의), 극주郤犨(극주), 극지郤至를 이른다. 극씨郤氏가 대대로 진晉나라의 경卿이 되어 세 사람이 대대로 이어온 권력을 믿고서 교만하고 사치하여 권력을 침범하다가 진 여공晉 厲公에게 살해되었다. 하였다.
당고黨錮의 일이 일어나자, 원굉은 깊은 산속으로 자취를 감추고자 하였다.
그러나 모친이 연로한 까닭에 차마 떠나가지 못하고서 마침내 뜰 가운데에 사방이 둘러싸인 토실土室을 쌓았는데 문을 내지 않고 창문으로 음식飮食을 받아먹었다.
노모老母가 원굉이 그리우면 때로 가서 만나보았는데, 어머니가 가면 곧 창문을 닫으니, 형제兄弟와 처자妻子도 그를 만나보지 못하였다. 몸을 숨긴 지 18년 만에 토실土室에서 별세하였다.
目
【목目】 사마온공司馬溫公(사마광司馬光)이 평하였다. “천하에 도道가 있을 때에는 군자君子가 왕의 조정에서 드날리면서 소인小人의 죄를 바로잡으면 감히 복종하지 않는 이가 없고,
천하에 도道가 없을 때에는 군자가 주머니를 묶듯이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아서 소인의 화를 피하여도 혹 죽음을 면치 못한다.
당인黨人들은 혼란한 세상에 태어나서 지위에 있지 않았는데도 사해四海가 혼란해지자 구설口舌로써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여,
자신은 혹독한 형벌을 받고 화가 붕우朋友에게까지 미쳐서 사류士類가 섬멸殲滅되고 나라가 따라 망하게 되었으니, 또한 슬프지 않은가.
오직
곽태郭泰만은
신도반申屠蟠은
드높아 미칠 수가 없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