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綱】 한漢나라 효순황제 영화孝順皇帝 永和원년元年이다. 겨울 12월에 왕공王龔을 태위太尉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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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왕공王龔은 환관宦官들이 권력을 독차지하는 것을 미워하여 글을 올려서 그 내용을 자세히 말하니, 여러 황문黃門이 객客으로 하여금 무함하여 왕공의 죄罪를 아뢰게 하였다.
상上이 왕공에게 명命하여 빨리 죄를 자수하게 하자注+극亟은 빠름이다. “자실自實”은 자기의 죄罪를 자수自首하는 것이다., 이고李固가 양상梁商에게 다음과 같이 주기奏記하였다. “왕공王公(왕공王龔)이 꼿꼿하고 바른 지조 때문에 참소하고 아첨하는 자들에게 억울하게 무함을 당하여 죄를 얻게 되니, 여러 사람들이 이 사실을 들어 알고는 탄식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注+횡橫(억울하다)은 호맹胡孟의 절切이다.
삼공三公은 지위가 높고 책임이 중하여 옥관獄官에 나아가 억울함을 호소하는 의리가 없으니, 조금이라도 의기意氣에 감동(분개)하여 절개를 세우면 영원히 생生과 결별하게 됩니다.注+이理는 옥관獄官이다. “예리詣理”는 법사法司에 가서 변론하고 대답함을 이른다. “감개感槪”는 의기意氣에 감동하여 절개節槪를 세움을 이른다. 인引은 긺이요, 분分 또한 결단함이다. 결決은 결訣과 통하니, “인결引決”은 영원히 이 세상과 이별한다는 뜻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자재自裁(자결自決)’라는 말과 같으니, 생사生死를 결단함을 이른다.” 하였다.
이 때문에 옛 법에 삼공三公에게 큰 죄罪가 있지 않으면 중重하게 심문하지 않았으니注+대신大臣의 옥사獄事는 사안이 중하기 때문에 ‘중문重問’이라 한 것이다. 성제成帝 때 승상 설선丞相 薛宣과 어사대부 적방진御史大夫 翟方進이 죄罪가 있자, 상上이 다섯 명의 이천석二千石으로 하여금 모여 심리審理하게 하였다., 왕공王公에게 갑자기 다른 변고가 생기면, 조정朝廷(황제)은 현자賢者를 살해했다는 오명을 얻고, 여러 신하들은 현자를 구원하고 보호하는 충절이 없게 될 것입니다.注+졸卒(갑자기)은 졸猝로 읽는다.
속담에 이르기를 ‘선인善人이 환란에 있으면 굶주려도 미처 밥을 먹지 못하고 달려가 구원한다.’ 하였으니,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注+“기불급찬飢不及餐”은 마땅히 속히 구원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양상이 즉시 이 일을 아뢰니, 일이 비로소 해결되었다.
綱
【강綱】 양기梁冀를 하남윤河南尹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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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양기梁冀는 술을 좋아하고 방탕하게 놀아서, 관직에 있을 적에 방종하고 포악하였다. 장사하는 나그네인 여방呂放이 이 사실을 양상梁商(양기의 보父)에게 고하여 꾸짖게 하니, 양기가 사람을 보내 여방을 죽이고는 여방의 원수에게 의심을 떠넘겨서 그 종족과 빈객賓客 100여 명을 체포하여 멸족하였다.注+추推(밀치다)는 통회通回의 절切이다. 악행惡行은 양기梁冀가 저질렀는데 죄를 타인他人에게 전가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그 말을 가탁하여 여방呂放의 원수가 죽였다고 의심하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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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무릉武陵의 만족蠻族이 배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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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처음에 무릉태수武陵太守가 말하기를 “만이蠻夷들이 무리를 서로 거느리고 와서 복종하니 조세와 부역을 더 올릴 수 있다.”注+“솔복率服”은 서로 거느리고 와서 복종함을 말한다. 하자, 우후虞詡가 아뢰기를 “예로부터 성왕聖王은 풍속이 다른 오랑캐를 신하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선제先帝의 옛 법에 공세貢稅의 많고 적음이 유래由來가 있은 지 오래되었으니, 지금 갑자기 공세를 올리면 오랑캐들이 반드시 원망하여 배반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계산해보건대, 얻는 것이 잃는 것을 보상하지 못할 것이니,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으나, 황제가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이때에 과연 만족蠻族이 공물로 바치는 삼베의 양이 옛 약속과 다르다고 다투고는 마침내 향리鄕吏를 죽이고 모든 종족이 배반하였다.注+“공포貢布”는 공물로 바치는 종포賨布(종포)이다. 한漢나라가 일어나자 무릉武陵의 여러 만족蠻族들로 하여금 매년 대인大人(성인)은 삼베 한 필匹을 바치고, 소구小口(미성년자)는 두 장丈(반 필)을 바치게 하였는데, 이것을 종포賨布라 하였다. 종賨은 조종徂宗의 절切이니, 종賨이란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대강 징수하고 각박하게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역주
역주1以梁冀爲河南尹 :
“〈앞에서 ‘以王龔爲太尉’라고 썼는데〉 여기에서 다시 ‘以’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王龔을 梁冀와 구별한 것이니, ≪資治通鑑綱目≫에서 어진 자와 불초한 자를 구별한 것이 엄격하다. 西漢의 세대에는 ‘京兆尹’을 쓴 것이 8번인데, 黃霸 이외에는 모두 엄격하고 유능한 자들이었다. 東漢은 雒陽에 도읍한 지 100여 년에 河南尹 중에 알려진 자가 없었는데, 이때 처음으로 梁冀 兄弟를 썼으니, 楊秉과 朱儁이 아니라면 거의 훌륭한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東漢이 끝날 때까지 ‘河南尹으로 삼았다.’고 쓴 것이 3번이요, 사건을 통해서 나타낸 것이 3번이다.[再書以 何 殊龔於冀也 綱目之別賢不肖嚴矣 西漢之世 書京兆尹八 自黃霸外皆嚴能者也 東漢都雒百有餘年 河南尹無聞焉 於是 始書梁冀兄弟 微楊秉,朱儁 幾無人矣 終東漢 書以爲河南尹三 因事見者三]다” ≪書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