秦三과 楚十九와 燕十一과 魏三十三과 趙悼襄王偃元과 韓二十九와 齊二十一年이라
綱
◑ 趙李牧
이 伐燕
하야 取武遂方城
注+班志 “武遂縣屬河間國, 方成縣屬廣陽國.” 後漢志, 作方城.하다
目
嘗居代雁門
하야 備匈奴
注+秦置雁門郡, 在代郡西南. 匈奴居北邊, 逐水草遷徙. 無城郭, 然亦各有分地. 無文書, 以言語相爲約束. 唐虞以上曰山戎‧獫狁‧獯鬻, 夏曰淳維, 殷曰鬼方, 周亦曰獫狁, 秦漢曰匈奴, 魏隋唐皆曰突厥.러니 以便宜置吏
하고 市租
를 皆輸莫府
하야 爲士卒費
注+市租, 軍中立市, 市有稅. 稅, 卽租也. 莫, 與幕通. 師出無常處, 所在張幕居之, 以將帥得稱府, 故曰莫府.하고 日擊數牛
하야 饗士
하고 習騎射
하며 謹烽火
하며 多間諜
注+烽火, 卽烽燧也. 塞上置候望之地, 邊有警, 夜則擧烽, 晝則燔燧. 間, 古莧切. 諜, 達協切. 間諜者, 使之間行以伺敵, 觀其變動也.하고
有敢捕虜者
면 斬
注+收保, 收畜産而自保也.호리라
匈奴가 皆以爲怯이라하고 雖趙邊兵이라도 亦以爲吾將이 怯이라하더라
趙王이 使人讓之한대 牧이 如故어늘 王이 怒하야 使人代之하니
屢出戰不利
하고 邊不得田畜
注+畜, 許六切, 養牲也.이라
目
王
이 復請李牧
한대 牧
이 稱病不出
이어늘 王
이 彊起之
한대李牧이 雁門에서 방목하다
牧이 曰 必用臣인대 臣如前이라사 乃敢奉令이로소이다 王이 許之한대
士日得賞賜而不用
하니 皆願一戰
注+不用, 謂不用之以戰也.이어늘
匈奴小入
이어늘 佯北
하고 以數十人委之
注+委, 弃也, 謂弃之於敵也.한대單于聞之
하고 大率衆入
注+單, 音禪. 單于, 匈奴天子之號也. 單于者, 廣大之貌, 言其象天單于然也.이어늘
牧
이 乃多爲奇陳
하고 張左右翼擊之
注+陳, 讀曰陣. 翼, 謂左右舒引其兵, 如鳥之振翼.하야 大破殺匈奴十餘萬騎
하고
滅襜襤 破東胡 降林胡
注+襜, 都甘切. 襤, 音藍. 襜襤, 胡名, 在代地. 林胡, 西胡國名.한대 單于犇走
하야 十餘歲
를 不敢近趙邊
하다
目
先是時
하야 天下冠帶之國
이 七
注+先, 悉薦切.에 而秦趙燕
이 邊於夷狄
하고
諸戎이 亦各分散하야 自有君長하야 莫能相一이러니
其後義渠
가 築城郭以自守
어늘 而秦
이 滅之
하고 始於隴西北地上郡
하야 築長城以拒胡
注+隴西, 唐渭州‧洮州‧河州之地. 北地, 唐慶州‧寧州‧鄜州‧靈州‧鹽州之地. 上郡, 唐延州‧綏州‧銀州之地.하고
趙
는 破林胡樓煩
하고 築長城
호대 自代竝陰山
하야 下至高闕爲塞而置雲中雁門代郡
注+括地志 “陰山, 北戎地, 在朔州北塞外.” 東西千餘里, 草木茂盛, 匈奴依阻其中. 朔方郡臨戎縣北有連山, 險於長城, 其山中斷, 兩峯俱峻, 名曰高闕.하고
燕
은 破東胡
하야 却地千里
하고 亦築長城
호대 自造陽至襄平
하야 置上谷漁陽右北平遼東郡
注+造陽, 地名, 在上谷. 班志 “襄平縣, 遼東郡治所.” 羅璧識遺曰 “燕北百里外有居庸關, 關東二百里外有虎北口, 卽上谷郡.” 胡三省曰 “漁陽, 唐薊州‧檀州, 北平, 唐平州. 遼東, 其地在大遼水之東, 唐嘗置遼州, 又嘗爲安東都護府治所.”이러니
目
秦
이 旣敗於河外
에 使人行萬金
하야 以間信陵君
注+間, 去聲, 離間也.할새
求得晉鄙客하야 令說魏王曰 公子亡在外가 十年矣라
今復爲將하야 諸侯皆屬하니 天下徒聞信陵君이요 不聞魏王矣라하고
於是에 信陵君이 謝病不朝하고 日夜에 以酒色自娛러니 四歲而卒하다
子順이 曰 禮에 隣國君이 弔어든 君이 爲之主하나니 今君이 不命子면 則子無所受韓王矣라한대 其子辭之하다
진秦나라 왕 정政 3년, 초楚나라 고열왕考烈王 19년, 연燕나라 왕 희喜 11년, 위魏나라 안희왕安釐王 33년, 조趙나라 도양왕悼襄王 언偃 원년, 한韓나라 환혜왕桓惠王 29년, 제齊나라 왕 건建 21년이다.
綱
[綱]
진秦나라가 큰 기근을 겪었다.
注+오곡五穀이 모두 익지 않는 것이 큰 기근이다.
綱
[綱] 진秦나라가 한韓나라를 정벌하여 성 12개를 탈취하였다.
綱
[綱]
조趙나라
이목李牧이
연燕나라를 정벌하여
무수武遂와
방성方城을 탈취하였다.
注+《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무수현武遂縣은 하간국河間國에 속하고, 방성현方成縣은 광양국廣陽國에 속한다.”고 하였다. 《후한서後漢書》 〈군국지郡國志〉에 방성方城이라고 되어 있다.
目
[目] 이목李牧은 조趙나라 북쪽 변경의 훌륭한 장수였다.
일찍이
대代와
안문雁門에 머물면서
흉노匈奴를 방비하였는데,
注+진秦나라가 안문군雁門郡을 설치했는데, 대군代郡의 서남쪽에 있었다. 흉노匈奴는 북쪽 변방에 살면서 물과 풀을 따라 이동하였다. 성곽이 없었으나 각자 분할된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문서가 없어서 말로써 서로 약속하였다. 당우唐虞 이전의 시대에는 산융山戎, 험윤獫狁, 훈육獯鬻이라고 불렀고, 하夏나라 때에는 순유淳維라고 불렀고, 은殷나라 때에는 귀방鬼方이라고 불렀고, 주周나라 때에는 다시 험윤獫狁이라고 불렀고, 진한秦漢 때에는 흉노匈奴라고 불렀고, 위魏나라, 수隋나라, 당唐나라 때에는 모두 돌궐突厥이라고 불렀다. 상황에 따라 관리를 두고, 시장의 조세를 모두 막부로 들여와 사졸의 경비로 삼고,
注+“시조市租”는 군중에 시장을 세워 시장에서 세를 두는 것이다. 세稅는 곧 세금이다. 막莫은 막幕과 통한다. 군대가 출동하면 일정한 장소가 없이 군막을 치고 사는데, 장수는 부府라고 부를 수 있으므로 막부莫府라고 한 것이다. 날마다 몇 마리의 소를 잡아 사졸들을 먹이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히게 하고,
봉화烽火를 엄격하게 운용하고, 간첩을 많이 보내었다.
注+“봉화烽火”는 곧 봉수이다. 변방에 관측하는 곳을 설치하여 변방에 경보가 있으면, 밤에는 불을 피우고 낮에는 연기를 피운다. 간間(몰래)은 고현古莧의 절切이고, 첩諜(염탐하다)은 달협達協의 절切이다. 간첩間諜은 몰래 가서 적을 엿보아 변동을 살피게 하는 것이다.
그러고는 약속하기를 “흉노가 들어와 노략질하거든 급히 가축을 거두고 들어와 수비하라.
감히 흉노 사람을 사로잡는 자가 있으면 목을 베리라.”
注+“수보收保”는 가축을 거두고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하였다.
이렇게 하는 몇 해 동안 손실을 입은 것이 없었다.
흉노가 모두 이목李牧이 겁을 낸다고 여겼고, 비록 조趙나라 변경의 병사라 하더라도 또한 자신들의 장수가 겁을 낸다고 생각하였다.
조趙나라 왕이 사람을 보내 꾸짖었으나, 이목이 이전과 다름이 없자, 왕이 노하여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이목을 대신하게 하였다.
하지만 여러 번 출전하여 승리하지 못하였고, 변경에서 경작과 목축을 할 수 없었다.
注+휵畜은 허륙許六의 절切이니, 희생을 기르는 것이다.
目
[目] 왕이 다시 이목李牧에게 장수를 맡아주기를 청하였는데, 이목이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자 왕이 억지로 기용하였다.
이목이 아뢰기를 “반드시 신을 기용하려고 하신다면, 신이 이전처럼 할 수 있어야 감히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흉노匈奴는 여러 해 동안 소득이 없자 끝내 이목이 겁을 낸다고 여겼다.
사졸들이 날마다 상을 받을 뿐 전투에 쓰이지 않으니, 모두들 한번 싸우기를 원하였다.
注+“불용不用”은 그들을 써서 싸우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이에 전차와 기병을 선발하여 전투를 연습시키고, 가축을 대규모로 방목하여 백성들이 들에 가득하게 하였다.
흉노가 조금 침입하자 거짓으로 달아나면서 수십 명의 사람을 버리니,
注+위委는 버린다는 뜻이니, 적에게 그들을 버림을 말한 것이다.가 듣고서 대규모로 무리를 이끌고 침입하였다.
注+선單은 음이 선禪이다. 선우單于는 흉노 천자의 호칭이다. 선우는 광대한 모양이니, 하늘의 광대한 모양을 본뜬 것임을 말한다.
이목이 이에 많은 복병을 설치하고 좌익과 우익으로
진형陣形을 갖추어 공격하여
注+진陳(진을 치다)은 진陣으로 읽는다. 익翼은 군대를 좌우로 포진하고 이끄는 것이 마치 새가 날개를 펼치는 것과 같음을 말한다. 흉노의 10여만 기병을 크게 무찔러 죽였다.
그리고
을 멸망시키고
를 격파하고
를 항복시키니,
注+첨襜은 도감都甘의 절切이다. 남襤은 음이 남藍이다. 첨람襜襤은 오랑캐의 이름이니, 대代 지역에 살았다. 임호林胡는 서쪽 오랑캐의 나라 이름이다. 선우가 달아나 10여 년 동안 감히
조趙나라의 변경에 다가오지 못하였다.
目
[目] 이에 앞서 천하에 관을 쓰고 띠를 매는 예의의 나라가 일곱이었는데,
注+선先(앞서다)은 실천悉薦의 절切이다.진秦나라,
조趙나라,
연燕나라가
이적夷狄과 변경을 접하고 있었다.
여러 융적戎狄이 또한 각자 분산하여 자신들의 군장君長을 두니, 서로 통일하지 못하였다.
그 뒤에
가 성곽을 쌓아 자신들을 지키자
진秦나라가 멸망시키고
농서군隴西郡,
북지군北地郡,
상군上郡에서 시작하여
장성長城을 쌓아 오랑캐를 막았다.
注+농서隴西는 당唐나라 때의 위주渭州, 조주洮州, 하주河州 지역이다. 북지北地는 당唐나라 때의 경주慶州, 영주寧州, 부주鄜州, 영주靈州, 염주鹽州 지역이다. 상군上郡은 당唐나라 때의 연주延州, 수주綏州, 은주銀州 지역이다.
조趙나라는
임호林胡와
을 격파하고 장성을 쌓았는데,
대군代郡에서부터
을 따라 아래로
에 이르러 요새를 만들고
운중군雲中郡,
안문군雁門郡,
대군代郡을 설치하였다.
注+에 “음산陰山은 북융北戎의 땅으로, 삭주朔州 북쪽 변방의 바깥에 있다.”고 하였다. 동서로 1,000여 리이고 초목이 무성하니, 흉노匈奴가 그 안에 의지하여 살았다. 삭방군朔方郡 임융현臨戎縣 북쪽에 연산連山이 있는데, 장성長城보다 험하며, 산 중간이 끊어져 두 봉우리가 모두 험준하여 고궐高闕이라 부른다.
연燕나라는
동호東胡를 격파하여 천 리 밖으로 물리치고 또한 장성을 쌓았는데,
조양造陽에서부터
양평襄平까지 이르렀고,
상곡군上谷郡,
어양군漁陽郡,
우북평군右北平郡,
요동군遼東郡을 설치하였다.
注+조양造陽은 지명으로, 상곡上谷에 있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양평현襄平縣은 요동군遼東郡의 치소治所이다.”라고 하였다. 에 “연燕나라 북쪽 100리 밖에 거용관居庸關이 있다. 관의 동쪽 200리 밖에 호북구虎北口가 있으니, 바로 옛 상곡군上谷郡이다.” 하였다. 이 말하기를 “어양漁陽은 당唐나라 때의 계주薊州, 단주檀州이고, 북평北平은 당唐나라 때의 평주平州이다. 요동遼東은 그 땅이 대료수大遼水의 동쪽에 있는데, 당唐나라가 일찍이 요주遼州를 설치하였고, 또 일찍이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의 치소治所가 되었다.” 하였다.
綱
[綱] 위魏나라의 공자 무기無忌(신릉군信陵君)가 졸卒하였다.
目
[目]
진秦나라가
하외河外에서 패한 뒤에 사람을 보내 만금을 써서
신릉군信陵君을 이간질하였다.
注+간間은 거성去聲이니, 이간질한다는 뜻이다.
의 문객이었던 사람을 찾아내 그로 하여금
위魏나라 왕을 설득하게 하기를 “공자
무기無忌가 외국에 망명해 있던 것이 10년이었습니다.
지금 다시 장수가 되자 제후들이 모두 따르니, 천하가 신릉군의 말만 들을 뿐이고 위魏나라 왕의 말은 듣지 않습니다.” 하였고,
진秦나라 왕이 또한 자주 사람을 보내 신릉군을 축하하기를 “위魏나라 왕이 될 수 있지 않은가?”라고 하니,
위魏나라 왕이 이러한 비방을 믿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장수의 직책을 대신하게 하였다.
이에 신릉군이 병을 핑계로 조회하지 않고 밤낮으로 술과 여색을 즐기더니 4년 만에 졸卒하였다.
한韓나라 왕이 가서 조문하자 신릉군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여겨 자순子順에게 알렸는데,
자순이 말하기를 “예에 ‘
.’라고 하였으니, 지금 임금이 그대에게 명을 내리지 않았다면 그대가
한韓나라 왕의 조문을 받을 수가 없다.” 하니, 그 아들이 조문을 사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