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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2)

자치통감강목(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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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巳年(B.C. 244)
秦三 楚十九 燕十一 魏三十三 趙悼襄王偃元 韓二十九 齊二十一年이라
大饑注+五穀皆不熟爲大饑.하다
◑ 秦 伐韓하야 取十二城하다
◑ 趙李牧 伐燕하야 取武遂方城注+班志 “武遂縣屬河間國, 方成縣屬廣陽國.” 後漢志, 作方城.하다
李牧者 趙北邊之良將也
嘗居代雁門하야 備匈奴注+秦置雁門郡, 在代郡西南. 匈奴居北邊, 逐水草遷徙. 無城郭, 然亦各有分地. 無文書, 以言語相爲約束. 唐虞以上曰山戎‧獫狁‧獯鬻, 夏曰淳維, 殷曰鬼方, 周亦曰獫狁, 秦漢曰匈奴, 魏隋唐皆曰突厥.러니 以便宜置吏하고 市租 皆輸莫府하야 爲士卒費注+市租, 軍中立市, 市有稅. 稅, 卽租也. 莫, 與幕通. 師出無常處, 所在張幕居之, 以將帥得稱府, 故曰莫府.하고 日擊數牛하야 饗士하고 習騎射하며 謹烽火하며 多間諜注+烽火, 卽烽燧也. 塞上置候望之地, 邊有警, 夜則擧烽, 晝則燔燧. 間, 古莧切. 諜, 達協切. 間諜者, 使之間行以伺敵, 觀其變動也.하고
爲約曰 匈奴入盜어든 則急收保하라
有敢捕虜者注+收保, 收畜産而自保也.호리라
如是數歲 無所亡失이라
匈奴 皆以爲怯이라하고 雖趙邊兵이라도 亦以爲吾將이라하더라
趙王 使人讓之한대 如故어늘하야 使人代之하니
屢出戰不利하고 邊不得田畜注+畜, 許六切, 養牲也.이라
復請李牧한대 稱病不出이어늘 彊起之한대
李牧이 雁門에서 방목하다李牧이 雁門에서 방목하다
曰 必用臣인대 臣如前이라사 乃敢奉令이로소이다 許之한대
至邊如約하니
匈奴數歲 無所得하야 終以爲怯이라하고
士日得賞賜而不用하니 皆願一戰注+不用, 謂不用之以戰也.이어늘
乃選車騎習戰하고 大縱畜牧하고 人民 滿野러니
匈奴小入이어늘 佯北하고 以數十人委之注+委, 弃也, 謂弃之於敵也.한대單于聞之하고 大率衆入注+單, 音禪. 單于, 匈奴天子之號也. 單于者, 廣大之貌, 言其象天單于然也.이어늘
乃多爲奇陳하고 張左右翼擊之注+陳, 讀曰陣. 翼, 謂左右舒引其兵, 如鳥之振翼.하야 大破殺匈奴十餘萬騎하고
滅襜襤 破東胡 降林胡注+襜, 都甘切. 襤, 音藍. 襜襤, 胡名, 在代地. 林胡, 西胡國名.한대 單于犇走하야 十餘歲 不敢近趙邊하다
先是時하야 天下冠帶之國注+先, 悉薦切. 而秦趙燕 邊於夷狄하고
諸戎 亦各分散하야 自有君長하야 莫能相一이러니
其後義渠 築城郭以自守어늘 而秦 滅之하고 始於隴西北地上郡하야 築長城以拒胡注+隴西, 唐渭州‧洮州‧河州之地. 北地, 唐慶州‧寧州‧鄜州‧靈州‧鹽州之地. 上郡, 唐延州‧綏州‧銀州之地.하고
破林胡樓煩하고 築長城호대 自代竝陰山하야 下至高闕爲塞而置雲中雁門代郡注+括地志 “陰山, 北戎地, 在朔州北塞外.” 東西千餘里, 草木茂盛, 匈奴依阻其中. 朔方郡臨戎縣北有連山, 險於長城, 其山中斷, 兩峯俱峻, 名曰高闕.하고
破東胡하야 却地千里하고 亦築長城호대 自造陽至襄平하야 置上谷漁陽右北平遼東郡注+造陽, 地名, 在上谷. 班志 “襄平縣, 遼東郡治所.” 羅璧識遺曰 “燕北百里外有居庸關, 關東二百里外有虎北口, 卽上谷郡.” 胡三省曰 “漁陽, 唐薊州‧檀州, 北平, 唐平州. 遼東, 其地在大遼水之東, 唐嘗置遼州, 又嘗爲安東都護府治所.”이러니
及戰國之末而匈奴始大하다
魏公子無忌卒하다
旣敗於河外 使人行萬金하야 以間信陵君注+間, 去聲, 離間也.할새
求得晉鄙客하야 令說魏王曰 公子亡在外 十年矣
今復爲將하야 諸侯皆屬하니 天下徒聞信陵君이요 不聞魏王矣라하고
秦王 又數使人賀信陵君得爲魏王未也아한대
魏王 信之하야 使人代將이어늘
於是 信陵君 謝病不朝하고 日夜 以酒色自娛러니 四歲而卒하다
韓王 往弔어늘 其子榮之하야 以告子順한대
子順 曰 禮 隣國君어든 爲之主하나니 今君 不命子 則子無所受韓王矣라한대 其子辭之하다


정사년(B.C. 244)
나라 왕 3년, 나라 고열왕考烈王 19년, 나라 왕 11년, 나라 안희왕安釐王 33년, 나라 도양왕悼襄王 원년, 나라 환혜왕桓惠王 29년, 나라 왕 21년이다.
[綱] 나라가 큰 기근을 겪었다.注+오곡五穀이 모두 익지 않는 것이 큰 기근이다.
[綱] 나라가 나라를 정벌하여 성 12개를 탈취하였다.
[綱] 나라 이목李牧나라를 정벌하여 무수武遂방성方城을 탈취하였다.注+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무수현武遂縣하간국河間國에 속하고, 방성현方成縣광양국廣陽國에 속한다.”고 하였다. 《후한서後漢書》 〈군국지郡國志〉에 방성方城이라고 되어 있다.
[目] 이목李牧나라 북쪽 변경의 훌륭한 장수였다.
일찍이 안문雁門에 머물면서 흉노匈奴를 방비하였는데,注+나라가 안문군雁門郡을 설치했는데, 대군代郡의 서남쪽에 있었다. 흉노匈奴는 북쪽 변방에 살면서 물과 풀을 따라 이동하였다. 성곽이 없었으나 각자 분할된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문서가 없어서 말로써 서로 약속하였다. 당우唐虞 이전의 시대에는 산융山戎, 험윤獫狁, 훈육獯鬻이라고 불렀고, 나라 때에는 순유淳維라고 불렀고, 나라 때에는 귀방鬼方이라고 불렀고, 나라 때에는 다시 험윤獫狁이라고 불렀고, 진한秦漢 때에는 흉노匈奴라고 불렀고, 나라, 나라, 나라 때에는 모두 돌궐突厥이라고 불렀다. 상황에 따라 관리를 두고, 시장의 조세를 모두 막부로 들여와 사졸의 경비로 삼고,注+시조市租”는 군중에 시장을 세워 시장에서 세를 두는 것이다. 는 곧 세금이다. 과 통한다. 군대가 출동하면 일정한 장소가 없이 군막을 치고 사는데, 장수는 라고 부를 수 있으므로 막부莫府라고 한 것이다. 날마다 몇 마리의 소를 잡아 사졸들을 먹이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히게 하고, 봉화烽火를 엄격하게 운용하고, 간첩을 많이 보내었다.注+봉화烽火”는 곧 봉수이다. 변방에 관측하는 곳을 설치하여 변방에 경보가 있으면, 밤에는 불을 피우고 낮에는 연기를 피운다. (몰래)은 고현古莧이고, (염탐하다)은 달협達協이다. 간첩間諜은 몰래 가서 적을 엿보아 변동을 살피게 하는 것이다.
그러고는 약속하기를 “흉노가 들어와 노략질하거든 급히 가축을 거두고 들어와 수비하라.
감히 흉노 사람을 사로잡는 자가 있으면 목을 베리라.”注+수보收保”는 가축을 거두고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하였다.
이렇게 하는 몇 해 동안 손실을 입은 것이 없었다.
흉노가 모두 이목李牧이 겁을 낸다고 여겼고, 비록 나라 변경의 병사라 하더라도 또한 자신들의 장수가 겁을 낸다고 생각하였다.
나라 왕이 사람을 보내 꾸짖었으나, 이목이 이전과 다름이 없자, 왕이 노하여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이목을 대신하게 하였다.
하지만 여러 번 출전하여 승리하지 못하였고, 변경에서 경작과 목축을 할 수 없었다.注+허륙許六이니, 희생을 기르는 것이다.
[目] 왕이 다시 이목李牧에게 장수를 맡아주기를 청하였는데, 이목이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자 왕이 억지로 기용하였다.
이목이 아뢰기를 “반드시 신을 기용하려고 하신다면, 신이 이전처럼 할 수 있어야 감히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이목이 변경에 이르러 약속한 대로 하였다.
흉노匈奴는 여러 해 동안 소득이 없자 끝내 이목이 겁을 낸다고 여겼다.
사졸들이 날마다 상을 받을 뿐 전투에 쓰이지 않으니, 모두들 한번 싸우기를 원하였다.注+불용不用”은 그들을 써서 싸우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이에 전차와 기병을 선발하여 전투를 연습시키고, 가축을 대규모로 방목하여 백성들이 들에 가득하게 하였다.
흉노가 조금 침입하자 거짓으로 달아나면서 수십 명의 사람을 버리니,注+는 버린다는 뜻이니, 적에게 그들을 버림을 말한 것이다.가 듣고서 대규모로 무리를 이끌고 침입하였다.注+은 음이 이다. 선우單于는 흉노 천자의 호칭이다. 선우는 광대한 모양이니, 하늘의 광대한 모양을 본뜬 것임을 말한다.
이목이 이에 많은 복병을 설치하고 좌익과 우익으로 진형陣形을 갖추어 공격하여注+(진을 치다)은 으로 읽는다. 은 군대를 좌우로 포진하고 이끄는 것이 마치 새가 날개를 펼치는 것과 같음을 말한다. 흉노의 10여만 기병을 크게 무찔러 죽였다.
그리고 을 멸망시키고 를 격파하고 를 항복시키니,注+도감都甘이다. 은 음이 이다. 첨람襜襤은 오랑캐의 이름이니, 지역에 살았다. 임호林胡는 서쪽 오랑캐의 나라 이름이다. 선우가 달아나 10여 년 동안 감히 나라의 변경에 다가오지 못하였다.
[目] 이에 앞서 천하에 관을 쓰고 띠를 매는 예의의 나라가 일곱이었는데,注+(앞서다)은 실천悉薦이다.나라, 나라, 나라가 이적夷狄과 변경을 접하고 있었다.
여러 융적戎狄이 또한 각자 분산하여 자신들의 군장君長을 두니, 서로 통일하지 못하였다.
그 뒤에 가 성곽을 쌓아 자신들을 지키자 나라가 멸망시키고 농서군隴西郡, 북지군北地郡, 상군上郡에서 시작하여 장성長城을 쌓아 오랑캐를 막았다.注+농서隴西나라 때의 위주渭州, 조주洮州, 하주河州 지역이다. 북지北地나라 때의 경주慶州, 영주寧州, 부주鄜州, 영주靈州, 염주鹽州 지역이다. 상군上郡나라 때의 연주延州, 수주綏州, 은주銀州 지역이다.
나라는 임호林胡을 격파하고 장성을 쌓았는데, 대군代郡에서부터 을 따라 아래로 에 이르러 요새를 만들고 운중군雲中郡, 안문군雁門郡, 대군代郡을 설치하였다.注+에 “음산陰山북융北戎의 땅으로, 삭주朔州 북쪽 변방의 바깥에 있다.”고 하였다. 동서로 1,000여 리이고 초목이 무성하니, 흉노匈奴가 그 안에 의지하여 살았다. 삭방군朔方郡 임융현臨戎縣 북쪽에 연산連山이 있는데, 장성長城보다 험하며, 산 중간이 끊어져 두 봉우리가 모두 험준하여 고궐高闕이라 부른다.
나라는 동호東胡를 격파하여 천 리 밖으로 물리치고 또한 장성을 쌓았는데, 조양造陽에서부터 양평襄平까지 이르렀고, 상곡군上谷郡, 어양군漁陽郡, 우북평군右北平郡, 요동군遼東郡을 설치하였다.注+조양造陽은 지명으로, 상곡上谷에 있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양평현襄平縣요동군遼東郡치소治所이다.”라고 하였다. 에 “나라 북쪽 100리 밖에 거용관居庸關이 있다. 관의 동쪽 200리 밖에 호북구虎北口가 있으니, 바로 옛 상곡군上谷郡이다.” 하였다. 이 말하기를 “어양漁陽나라 때의 계주薊州, 단주檀州이고, 북평北平나라 때의 평주平州이다. 요동遼東은 그 땅이 대료수大遼水의 동쪽에 있는데, 나라가 일찍이 요주遼州를 설치하였고, 또 일찍이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치소治所가 되었다.” 하였다.
전국 말기에 이르러 흉노가 비로소 커졌다.
[綱] 나라의 공자 무기無忌(신릉군信陵君)가 하였다.
[目] 나라가 하외河外에서 패한 뒤에 사람을 보내 만금을 써서 신릉군信陵君을 이간질하였다.注+거성去聲이니, 이간질한다는 뜻이다.
의 문객이었던 사람을 찾아내 그로 하여금 나라 왕을 설득하게 하기를 “공자 무기無忌가 외국에 망명해 있던 것이 10년이었습니다.
지금 다시 장수가 되자 제후들이 모두 따르니, 천하가 신릉군의 말만 들을 뿐이고 나라 왕의 말은 듣지 않습니다.” 하였고,
나라 왕이 또한 자주 사람을 보내 신릉군을 축하하기를 “나라 왕이 될 수 있지 않은가?”라고 하니,
나라 왕이 이러한 비방을 믿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장수의 직책을 대신하게 하였다.
이에 신릉군이 병을 핑계로 조회하지 않고 밤낮으로 술과 여색을 즐기더니 4년 만에 하였다.
나라 왕이 가서 조문하자 신릉군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여겨 자순子順에게 알렸는데,
자순이 말하기를 “예에 ‘.’라고 하였으니, 지금 임금이 그대에게 명을 내리지 않았다면 그대가 나라 왕의 조문을 받을 수가 없다.” 하니, 그 아들이 조문을 사양하였다.


역주
역주1 單于(선우) : 匈奴의 우두머리에 대한 호칭이다.
역주2 襜襤(담람) : 고대 유목 부족의 이름이다. 澹林, 儋林, 林胡라고도 불렸다.
역주3 東胡 : 고대 유목 부족의 이름이다. 匈奴의 동쪽에 살아 東胡라고 불렸다. 처음에 燕나라 변경에 살다가 燕나라에 패해 西遼河 상류로 옮겨 살았다. 나중에 흉노에게 패하여 鮮卑山과 烏桓山으로 이주하였는데, 이들을 각각 鮮卑, 烏桓이라고 불렀다.
역주4 林胡 : 고대 유목 부족으로 앞의 襜襤과 혼용되어 지칭하기도 하지만 《資治通鑑》에서는 구분한 듯하다. 임호는 東胡, 樓煩과 함께 三胡로 지칭되었다. 李牧이 흉노를 격파한 뒤로 趙나라에 복속되었다가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資治通鑑》, 《史記 外國傳 譯註》(동북아역사재단, 2009)
역주5 義渠 : 고대 部族의 이름이다. 西戎의 一族이다. 秦나라가 義渠를 멸망시킨 기사가 《資治通鑑綱目》 제1하 周 赧王 45년조에 보인다.
역주6 樓煩 : 고대 유목 部族의 이름이다. 林胡의 서쪽에 거주하였으며, 秦나라 말기 匈奴에 복속되었다가 지금의 내몽골 오르도스(河套)로 이주하였다. 漢나라 武帝 元朔 2년(B.C. 127) 衛靑에 의해 정복되었다. 《史記 外國傳 譯註》(동북아역사재단, 2009)
역주7 陰山 : 내몽골 고비사막 남부 일대의 산맥을 지칭한다. 유목민의 주요 거점의 하나로 중국과 유목민이 서로 이 지역을 차지하고자 하였다. 《史記 外國傳 譯註》(동북아역사재단, 2009)
역주8 高闕 : 내몽골에 위치한 험준한 계곡의 명칭이다. 음산산맥이 여기서 끊어졌는데, 그 사이에 생긴 협곡으로 그 입구가 마치 대궐문을 바라보는 것 같다고 하여 이렇게 이름 붙여졌다. 《史記 外國傳 譯註》(동북아역사재단, 2009)
역주9 括地志 : 唐나라 貞觀 연간에 濮王 李泰 등이 편찬한 것인데, 《新唐書》 〈藝文志〉를 보면 《括地志》 550권 및 《序略》 5권으로 되어 있으나, 모두 산일되고, 현행본은 淸나라의 孫星衍이 여러 책에 인용된 逸文을 모아 편찬한 것으로, 모두 8권으로 되어 있다.
역주10 羅璧의 識遺(지유) : 羅璧은 南宋 때 사람이다. 《識遺》는 나벽이 지은 10권으로 된 筆記로 《羅氏識遺》라고도 한다.
역주11 胡三省 : 1230~1302. 宋元 교체기 때 史學者이다. 자는 元魯, 身之이고 호는 梅磵이다. 元나라 世祖 至元 22년(1285)에 《資治通鑑音注》 294권을 완성하였는데, 이를 胡注라고도 한다.
역주12 (舌)[古] : 저본에는 ‘舌’로 되어 있으나, 思政殿訓義 《資治通鑑》에 근거하여 ‘古’로 바로잡았다.
역주13 晉鄙 : 魏나라의 장수이다. 秦나라의 군대가 趙나라 邯鄲을 포위하자, 魏나라 安釐王(안희왕)이 晉鄙를 파견하여 구원하게 하였으나, 秦나라가 두려워 진군을 중지하게 하였다. 그러자 魏나라의 공자 信陵君이 兵符를 훔쳐 진비의 진영으로 가서 문객인 朱亥를 시켜 진비를 죽이고 그 군대를 인솔하여 趙나라를 구원하였다. 《資治通鑑綱目 제1권 하 周 赧王 57년조》
역주14 이웃……된다 : 《禮記》 〈喪服小記〉에 “제후가 다른 나라의 신하를 조문할 때에는 그 신하의 임금이 상주가 된다.[諸侯弔於異國之臣則其君爲主]”라 하였다.

자치통감강목(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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