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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9)

자치통감강목(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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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申年(144)
갑신년甲申年(144)
建康元年이라 趙沖 討羌이라가 戰沒하다
나라 효순황제 건강孝順皇帝 建康 원년元年이다. 봄에 조충趙沖강족羌族을 토벌하다가 전몰戰沒하였다.
追叛羌이라가 遇伏戰死 而前後多所斬獲이라 由是亦衰耗하다
조충趙沖이 배반한 강족羌族을 추격하다가 복병을 만나 전사戰死하였으나 전후前後에 참수하고 생포한 자가 많았다. 강족도 이로 말미암아 쇠약해졌다.
夏四月 馬寔 擊南匈奴左部破之하니 胡, 羌, 烏桓 悉降注+左部, 卽吾斯之黨.하다
】 여름 4월에 마식馬寔남흉노南匈奴좌부左部를 격파하니, 호족胡族강족羌族, 오환烏桓이 모두 항복하였다.注+좌부左部는 바로 오사吾斯이다.
◑立皇子炳하여 하다
황자 유병皇子 劉炳을 세워 태자太子로 삼았다.
太子居承光宮하니 帝使侍御史种暠 監其家注+謂監護太子之家也 中常侍高梵 從中單駕出迎太子注+從中, 謂從宮中也.러니 太傅杜喬等 疑不欲從而未決이러니
태자太子승광궁承光宮에 거처하니, 황제가 시어사 충고侍御史 种暠(충고)로 하여금 그 집을 감호監護하게 하였다.注+〈“감기가監其家”는〉 태자太子의 집안을 감호監護함을 이른다. 중상시 고범中常侍 高梵이 궁중에서 한 대의 수레로 나가 태자를 맞이하였는데注+종중從中”은 궁중으로부터 나감을 이른다., 이때 태부 두교太傅 杜喬 등은 의심하여 따르려 하지 않으면서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暠乃手劍當車曰 太子 國之儲副 人命所係 今常侍來 無詔信하니 何以知非姦邪 今日 有死而已니라
충고는 손에 검을 들고 수레를 가로막으며 말하기를 “태자는 나라의 저부儲副(다음 대를 이을 임금)로, 백성들의 목숨이 달려 있는 분이다. 지금 상시常侍가 옴에 조서詔書부신符信이 없으니, 간악한 자가 아니라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이를 따르지 않을 것이니〉 오늘 나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 하였다.
辭屈하여 不敢對하고 馳還奏之한대 詔報太子하니 乃得去
고범이 말이 궁하여 감히 대답하지 못하고 급히 달려 돌아가 아뢰자 조령詔令을 내려서 태자에게 알리니, 태자가 그제야 떠날 수 있었다.
喬退而歎息하여 愧暠臨事不惑注+愧者, 愧己之不能然也.하고 帝亦嘉其持重하여 稱善者良久러라
두교는 물러가 탄식하면서 충고는 일에 임하여 의혹하지 않는데 〈자기는 그렇지 못함을〉 부끄러워하였고注+는 자기는 그렇지 못함을 부끄러워한 것이다., 황제 또한 충고의 신중함을 가상히 여겨서 오랫동안 잘했다고 칭찬하였다.
秋八月 揚, 徐群盜范容等 作亂이어늘 遣御史中丞馮緄하여 督州兵討之하다
】 가을 8월에 양주揚州서주徐州의 도적 떼인 범용范容 등이 을 일으키자, 어사중승 풍곤御史中丞 馮緄을 보내 의 군대를 감독해서 토벌하게 하였다.
注+壽, 三十.하니 太子炳 卽位하다
】 황제가 하니注+향년이 30세였다., 태자 유병太子 劉炳즉위卽位하였다.
年二歲
】 황제(충제沖帝)의 나이가 2세였다.
尊皇后曰皇太后라하고 太后臨朝하다
황후皇后(양후梁后)를 높여 황태후皇太后라 하고, 황태후皇太后임조臨朝하였다.
◑以李固爲太尉, 錄尙書事하다
이고李固태위太尉 로 삼았다.
◑九月 葬憲陵注+陵, 在雒陽西十五里.하다
】 9월에 순제順帝헌릉憲陵에 장례하였다.注+헌릉憲陵낙양雒陽의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地震하니 詔擧賢良方正之士하여 策問之하다
】 지진이 나자, 조령詔令을 내려 현량賢良하고 방정方正한 선비를 천거하여 책문策問하게 하였다.
皇甫規對曰 陛下攝政之初 拔用忠貞하시니 遠近翕然하여 望見太平이러니
황보규皇甫規가 다음과 같이 책문策問에 대답하였다. “폐하陛下께서 섭정攝政하시던 초기에 충성스럽고 정직한 인물을 발탁하여 등용하시니, 원근遠近이 모두 화합하여 태평성세太平盛世를 바랐습니다.
     皇甫規 皇甫規
而災異不息하고 寇賊縱橫하니 殆以姦臣權重之所致也 其常侍尤無狀者 宜亟黜遣하여 以答天誡니이다
그런데 재이災異가 그치지 않고 도적들이 횡행橫行하니, 이는 아마도 간신姦臣의 권세가 중하기 때문인 듯합니다. 상시常侍 중에 특히 형편없는 자를 마땅히 빨리 내쳐 궁에서 내보내서 하늘의 경계에 답해야 합니다.
大將軍冀 河南尹不疑 亦宜增修謙節하고 輔以儒術하여 省去遊娛不急之務하고 割減廬第無益之飾이니이다
대장군 양기大將軍 梁冀하남윤 양불의河南尹 梁不疑 또한 마땅히 겸손한 예절을 더 닦고 유학으로 보필하여, 놀며 즐기는 등의 급하지 않은 일을 줄이고 집안의 무익無益한 꾸밈을 줄여야 할 것입니다.
夫君者 舟也 民者 水也 群臣 乘舟者也 將軍兄弟 操檝者也注+檝, 與楫同.
비유하면 군주는 배이고 백성은 물이고 여러 신하들은 배를 탄 자이며 장군將軍형제兄弟는 노를 잡은 자이니注+(노)은 과 같다.,
若其平志畢力하여 以度元元이면 所謂福也注+度, 通作渡.어니와 如其怠弛 將淪波濤리니 可不愼乎잇가
만약 노를 잡은 자가 마음을 화평하게 하여 힘을 다해서 원원元元(백성)을 구제하면 이른바 이라는 것이지만注+(건너다)는 와 통한다., 만일 태만하고 해이하면 장차 파도에 빠질 것이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夫德不稱祿이면 猶鑿墉之趾하여 以益其高 豈安固之道哉리오 凡諸宿猾, 酒徒, 戲客 皆宜貶斥하여 以懲不軌니이다
祿에 걸맞지 못하면 담 밑을 파서 그 높이를 더하는 것과 같으니, 어찌 편안하고 견고한 방도이겠습니까. 간악한 자와 술꾼과 희롱하는 자들을 다 배척하여 불궤不軌(불법不法)를 징계해야 합니다.”
冀忿之하여 以規爲下第하고 拜郞中하니 託疾免歸하다
양기가 이에 忿을 내어 황보규를 하제下第(최하위)로 삼고 낭중郞中에 제수하니, 황보규는 병을 칭탁하여 면직하고 돌아갔다.
揚州刺史尹耀 討范容이라가 敗沒하다
양주자사 윤요揚州刺史 尹耀범용范容을 토벌하다가 패몰敗沒하였다.
◑冬十月 交阯蠻夷復反이어늘 刺史夏方 降之하다
】 겨울 10월에 교지交阯만이蠻夷가 다시 배반하자, 자사 하방刺史 夏方이 이들을 항복시켰다.
◑九江盜馬勉 稱帝於當塗注+當塗縣, 屬九江郡.하다
구강九江의 도적 마면馬勉당도當塗에서 황제를 칭하였다.注+당도현當塗縣구강군九江郡에 속하였다.
하다
李固李固
乙酉年(145)
】 도적 떼가 헌릉憲陵을 도굴하였다.
孝沖皇帝永嘉元年이라 春正月 帝崩注+壽, 三歲.하다
나라 효충황제 영가孝沖皇帝 永嘉 원년元年이다. 봄 정월에 황제가 하였다.注+향년이 3세였다.
梁太后以揚, 徐盜賊 方盛이라하여 欲須所徵諸王侯到하여 乃發喪이어늘
양태후梁太后양주揚州서주徐州의 도적이 한창 치성熾盛한다 하여, 불러들인 여러 왕후王侯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려서 국상國喪을 발표하고자 하였는데,
太尉李固曰 帝雖幼少 猶天下之父 今日崩亡 人神感動하니 豈有人子反共掩匿乎注+人子, 當作臣子.잇가
태위 이고太尉 李固가 말하기를 “황제가 비록 나이가 어리시지만 천하天下국부國父입니다. 오늘 함에 선조의 신령神靈이 놀라고 슬퍼하고 있는데, 어찌 신자臣子가 도리어 이것을 함께 가리고 숨긴단 말입니까.注+인자人子는 마땅히 신자臣子가 되어야 한다.
秦皇沙丘之謀 近日北鄕之事 皆天下大忌 不可之甚者也注+鄕, 北鄕, 卽北鄕侯也.니이다 太后從之하여 卽暮發喪하다
근일近日은 모두 천하天下 사람들이 크게 꺼리는 것이니, 매우 불가不可합니다.”注+은 본음대로 읽으니, 북향北鄕은 바로 북향후北鄕侯이다. 하였다. 태후太后가 그의 말을 따라 즉시 그날 저녁에 국상國喪을 발표하였다.
청하왕 유산淸河王 劉蒜(유산)과 발해효왕渤海孝王의 아들 유찬劉纘경사京師로 불러들이니, 대장군 양기大將軍 梁冀태후太后에게 아뢰어 유찬을 맞아들여 즉위卽位하게 하고, 유산을 돌려보내어 봉국封國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蒜, 纘 皆章帝曾孫注+蒜, 蘇貫切. 蒜, 淸河恭王延平之子. 纘, 渤海孝王鴻之子. 延平及鴻, 皆樂安夷王寵之子, 千乘貞王伉之孫也. 伉, 章帝之子.이라 爲人嚴重하고 動止有法度하니 公卿 皆歸心焉이요 而纘年八歲
유산劉蒜, 유찬劉纘은 모두 장제章帝증손曾孫이다.注+소관蘇貫이다. 유산劉蒜청하공왕 유연평淸河恭王 劉延平의 아들이고, 유찬劉纘발해효왕 유홍渤海孝王 劉鴻의 아들이다. 유연평과 유홍은 모두 낙안이왕 유총樂安夷王 劉寵의 아들이고 천승정왕 유항千乘貞王 劉伉의 손자이다. 유항은 장제章帝의 아들이다. 유산은 사람됨이 엄중嚴重하고 행동거지에 법도法度가 있으니 공경公卿들이 모두 그에게 마음을 두었고, 유찬은 나이가 8세였다.
李固謂梁冀曰 立帝 宜擇長年有德하여 任親政事者注+長, 知兩切. 任, 音壬. 願將軍 審詳大計하여 察周, 霍之立文, 宣하고 戒鄧, 閻之利幼弱注+周勃立文帝, 霍光立宣帝, 鄧騭立殤帝, 閻顯立北鄕侯.하라
이고李固양기梁冀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다. “황제를 세울 적에는 마땅히 나이가 많고 이 있어서 직접 정사政事를 맡아 처리할 수 있는 자를 선택해야 하니注+(나이가 많다)은 지량知兩이다. (맡다)은 이다., 원컨대 장군將軍은 큰 계책을 자세히 살펴서 주발周勃곽광霍光문제文帝선제宣帝를 세운 것을 살피고, 등즐鄧騭(등즐)과 염현閻顯유약幼弱한 군주를 세우는 것을 이롭게 여긴 것을 경계하라.”注+주발周勃문제文帝를 세웠고 곽광霍光선제宣帝를 세웠으며, 등즐鄧騭상제殤帝를 세웠고 염현閻顯북향후北鄕侯를 세웠다.
冀不從하고 與太后 定策禁中하여 迎纘入南宮하여 卽皇帝位하고 蒜罷歸國하다
그러나 양기는 그의 말을 따르지 않고 태후太后와 함께 궁중에서 은밀히 황제를 정하여[정책定策] 유찬을 남궁南宮으로 맞아들여 황제皇帝에 즉위하게 하고, 유산은 돌려보내져 봉국封國으로 돌아갔다.
葬懷陵하다
충제沖帝회릉懷陵에 장례하였다.
將卜山陵할새 李固曰 今處處寇賊이라 軍興費廣하고 新創憲陵하여 賦發非一注+賦發, 賦斂徵發也.이라
】 장차 산릉山陵을 정할 적에 이고李固가 말하기를 “지금 곳곳마다 도적이 있어서 군대가 일어나 비용이 많이 들고 새로 헌릉憲陵(순제順帝)을 만들어 부세를 거두고 인력을 징발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注+부발賦發”은 부세를 거두고 인력을 징발하는 것이다.
帝尙幼小하니 可起陵於憲陵塋內하여 如康陵制度니이다 太后從之注+康陵, 殤帝陵也, 亦在愼陵塋內.하다
황제(충제沖帝)의 나이가 아직 어리니, 헌릉憲陵의 능역 안에 황제의 을 일으켜서 강릉康陵의 제도와 같게 해야 합니다.” 하니, 태후太后가 그의 말을 따랐다.注+강릉康陵상제殤帝이니, 또한 신릉愼陵(화제和帝)의 능역 안에 있었다.
太后委政李固하니 宦官爲惡者 一皆斥遣한대 而梁冀尤疾之하다
태후가 이고에게 정권을 맡기니, 이고는 환관宦官 중에 악행을 하는 자들을 한결같이 모두 배척하여 쫓아냈다. 이에 양기梁冀는 더욱 이고를 미워하였다.
順帝時除官 多不以次러니 固奏免百餘人하니
】 처음에 순제順帝 때에는 관직을 차례에 따라 제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고李固가 아뢰어 100여 명을 면직시키니,
此等 遂作飛章하여 言固離間近戚하고 自隆支黨이라하여늘 冀以白太后한대 太后不聽하다
이들이 마침내 익명의 글을 만들어서, 이고가 황제의 가까운 친척을 이간하고 스스로 자기 지당支黨을 높인다고 말하였다. 양기梁冀가 이 사실을 태후太后에게 아뢰었으나 태후는 따르지 않았다.
廣陵張嬰 據郡反하다
광릉廣陵 사람 장영張嬰을 점거하고 배반하였다.
旣降이러니 至是하여 復反하다
이때 다시 배반하였다.
二月 叛羌 皆降하니 隴右復平하다
】 2월에 배반한 강족羌族들이 모두 항복하니, 농우隴右가 다시 평정되었다.
西羌 叛亂積年 費用 八十餘億이라 諸將 多盜牢稟하여 貨賂左右하고 不恤軍事하니 白骨 相望注+牢, 廩食也. 古者名廩爲牢. 一說 “牢, 價直也. 稟, 給也.”이러니
서강西羌들이 반란을 일으킨 지 여러 해에 사용한 비용이 80여억 이었다. 여러 장수들이 대부분 국고의 양식을 도둑질하여 군주의 좌우左右 측근들에게 뇌물을 주고 군사軍事를 돌보지 않으니, 백골白骨이 서로 이어졌다.注+는 창고의 식량이니, 옛날 라고 하였다. 일설一說에 “는 값이요, 은 공급함이다.” 하였다.
左馮翊梁幷 以恩信招誘叛羌하니 離湳, 狐奴等五萬餘戶 皆詣幷降하여 隴右復平注+離湳․狐奴, 羌種名. 湳, 乃感切.하다
좌풍익 양병左馮翊 梁幷이 은혜와 신의로써 배반한 강족羌族들을 불러 달래니, 이남離湳(이남)과 호노狐奴 등 5만여 가 모두 양병에게 와서 항복하여 농우隴右가 다시 평정되었다.注+이남離湳호노狐奴강족羌族 중의 종족種族 이름이다. 내감乃感이다.
三月 九江都尉滕撫 擊馬勉, 范容等하여 斬之하다
】 3월에 구강도위 등무九江都尉 滕撫마면馬勉범용范容 등을 공격하여 참수하였다.
太后 以徐, 揚盜賊 益熾라하여 博求將帥하니 三公 擧撫有文武才어늘
태후太后서주徐州양주揚州의 도적이 더욱 치성하다 하여 장수가 될 만한 인재人才를 널리 구하니, 삼공三公등무滕撫문무文武의 재주가 있다고 천거하였다.
詔拜九江都尉하여 助馮緄討之하고 廣開賞募호되 錢邑有差注+謂立賞格, 錢邑以功之高下爲差. 錢, 賜錢也. 邑, 封邑也.하니
조령詔令을 내려 등무를 구강도위九江都尉로 제수하여 풍곤馮緄을 도와 토벌하게 하고, 현상금을 걸어 널리 모집하되 하사하는 돈과 봉하는 에 차등을 두게 하였다.注+〈“광개상모 전읍유차廣開賞募 錢邑有差”는〉 현상금을 내걸되, 하사하는 과 봉하는 의 높고 낮음으로써 차등함을 말한 것이다. 은 하사하는 돈이고, 은 봉하는 이다.
撫等 破斬馬勉, 范容等이어늘 拜撫中郞將하여 督揚, 徐二州事하다
등무 등이 마면馬勉범용范容 등을 격파하여 참수하자 이에 등무를 중랑장中郞將으로 제수하여 양주揚州서주徐州의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詔康陵在恭陵上하다
조령詔令을 내려 강릉康陵공릉恭陵의 위에 있게 하였다.
詔曰 殤帝卽位踰年이요 安帝承襲統業注+通鑑, 踰年下, 有君臣禮成四字.이어늘 而前世令恭陵在康陵之上하니 失其次序 今其正之하노라
】 다음과 같이 조령詔令을 내렸다. “상제殤帝는 즉위하여 해를 넘겼고, 안제安帝대통大統을 이었는데注+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유년踰年’ 아래에 ‘군신예성君臣禮成(군신간의 가 이루어졌다.)’의 네 글자가 있다., 전대前代공릉恭陵(안제의 릉)을 강릉康陵(상제의 릉)의 위에 있게 하였으니, 올바른 차서次序를 잃었다. 지금 이것을 바로잡노라.”
冬十一月 歷陽盜華孟 稱帝어늘 滕撫進擊張嬰及孟하여 皆破斬之하니 東南 悉平하다
】 겨울 11월에 역양歷陽의 도적인 화맹華孟이 황제를 칭하자 등무滕撫가 나아가 장영張嬰화맹華孟을 공격하여 모두 궤멸시키고 참수하니, 동남 지방이 모두 평정되었다.
撫性方直하여 不交權勢하니 爲宦官所惡 論功當封이러니 太尉胡廣 承旨奏黜之하니 遂卒於家하다
등무滕撫는 성품이 방정하고 정직하여 권세 있는 자와 사귀지 않으니, 환관宦官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뒤에 을 논할 적에 마땅히 봉읍封邑을 받아야 했는데, 태위 호광太尉 胡廣이 〈양기梁冀의〉 뜻을 받들어 아뢰어서 내치니, 마침내 집에서 하였다.
역주
역주1 爲太子 : “漢나라는 이로부터 5代 동안 ‘太子를 세웠다.’라고 쓴 경우가 없으니, 태자가 없는 경우가 아니면 일찍 세우지 않은 것이다.[漢自是五世無書立太子者 非無子 則不早建者也]다” ≪書法≫
역주2 帝崩 : “賀善의 贊에 말하였다. ‘順帝의 篇에 첫 번째로는 楊震을 改葬한 일을 썼고, 뒤이어 太后를 알현한 일을 썼고, 또 虞詡와 左雄을 사면한 일을 썼고, 바친 진주를 퇴각한 일을 썼고, 太學을 일으킨 일을 썼고, 張逵를 주살한 일을 썼고, 周擧를 발탁한 일을 썼으니, 모두 기록할 만한 내용이다. 그렇다면 順帝 또한 후대의 어진 군주일 것이다.’[賀善贊曰 順帝之篇 首書改葬楊震 繼書朝太后 又書赦虞詡左雄 書郤貢珠 書起太學 書誅張逵 書擢周擧 皆可紀者也 帝亦後來之賢主歟]” ≪書法≫
역주3 錄尙書事 : 尙書는 문서의 출납을 관장한 직책으로 정책을 입안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특히 漢 武帝가 황권을 강화하고 자신의 측근을 통한 정치를 펼치면서 三公九卿(外朝)에 상대되는 內朝가 형성되는데, 상서는 내조 정치의 핵심이었다. 霍光과 같은 황제의 측근이 將軍의 직책을 받고 동시에 상서의 직책을 겸하여 군권과 정책입안의 권한을 장악하였다. 前漢 때까지 상서는 겸직으로 領尙書事의 형태로 임명하였다. 後漢 때에는 상서가 정식 관직이 되어 尙書令을 두고 속관을 두면서 尙書臺가 형성이 되는데, 이들이 정책의 입안을 장악하였다. 또한 太傅나 三公에게 尙書의 직을 겸임시켜 주요 정책 결정에 참여하게 하였는데, 錄尙書事의 형태로 임명하였다.
역주4 群盜發憲陵 : “이때 장례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資治通鑑綱目≫에서 陵寢의 변고를 쓴 것이 7번인데 이보다 더 빠른 적이 없었다.[於是 葬無幾時耳 綱目書陵寢之變七 未有亟於此者矣]” ≪書法≫ “東漢이 멸망할 적에 사람들은 모두 桓帝와 靈帝가 임금답지 못한 것만을 허물하고, 멸망할 조짐이 이미 安帝와 順帝 때에 나타난 것은 알지 못하였다. 지금 ≪資治通鑑綱目≫에서 쓴 것을 보면, 환관들을 총애하여 믿고 소인들을 임용하고 外戚을 높이고 장려하여 漢나라를 亡하게 한 禍를 자아낸 것이 실로 여기에 있었다. 그러므로 日食과 地震이 일어나고 山이 무너지고 우박이 내리며 도적과 災異가 발생한 것이 史冊에 끊이지 않고 쓰여 있는데도, 두 군주는 이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에 安帝는 남쪽으로 놀러갔다가 죽었는데 ≪자치통감강목≫에서는 ‘황제가 葉縣에서 崩했다.’라고 썼고, 順帝는 겨우 葬禮를 마치자마자 ≪자치통감강목≫에서 ‘도적 떼가 憲陵을 도굴했다.’라고 썼다. 두 군주의 不善이 쌓였는데도 즉시 멸망하지 않은 것은, 祖宗의 德澤이 인민에게 남아 없어지지 않아서 하늘의 뜻이 대번에 끊지 않았기 때문일 뿐이다. 그러나 나쁜 징조가 나타나는 것 또한 엄폐할 수 없으므로 그 장례한 일에 이것을 나타낸 것이다. ≪자치통감강목≫은 사실에 근거하여 곧바로 써서 天理가 절로 분명하니, 이는 후세 人君이 하늘과 사람에게 罪를 얻어서는 안 됨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다. 그 드러난 응험이 이와 같으니, 어찌 간절하고도 분명하지 않은가.[東漢之亡 人皆咎桓靈之不君 而不知滅亡之兆已著於安順之時 今觀綱目所書 如寵信宦者 任用群小 崇獎外戚 所以稔亡漢之禍者 實在於此 故夫日食地震山崩雨雹寇盜災異 史不絶書 二君旣不之悟 於是安帝終於南遊 而綱目書帝崩于葉矣 順帝甫成葬禮 而綱目書盜發憲陵矣 夫以二君不善之積 而未卽滅亡者 祖宗德澤 在人未泯 天意未遽絶之爾 然咎證之形 亦不可掩 故於其終事見之 綱目據事直書 而天理自明 所以戒後世人君不可得罪於天人 其顯然之應若此 豈不深切著明也哉]” ≪發明≫
역주5 秦나라……음모 : 秦나라 始皇帝 37년(B.C.37)에 시황제가 동쪽을 순행하다가 沙丘의 平臺에서 죽었는데, 趙高는 長子 扶蘇를 불러오라는 시황제의 유언을 감추고, 승상 李斯를 설득하여 부소를 죽이고 시황제의 작은아들인 胡亥를 세우기로 음모를 꾸며 시황제의 죽음을 비밀에 붙인 채, 轀輬車에 시체를 안치하고 썩는 냄새를 감추기 위하여 소금에 절인 어물을 함께 실어서 도성인 咸陽으로 운구하였다. 이후 맏아들 부소와 장군 蒙恬을 함께 賜死하고, 호해를 세워 二世皇帝로 옹립한 일을 이른다.
역주6 北鄕侯의 일 : 北鄕侯 劉懿는 後漢의 7대 임금으로, 125년 3월에 등극하여 10월에 죽었다. 安帝의 후비인 閻后는 투기가 많아서, 안제가 李氏를 총애하여 保를 낳자 아우 閻顯과 모의하여 이씨를 독살하고 태자 보를 참소하여 濟陰王으로 폐하였다. 안제가 죽자 북향후를 세웠으나 얼마 안 있어 북향후도 죽었다. 이에 환관 孫程 등이 염현을 죽이고 염후를 별궁으로 옮기고서 폐위된 태자를 다시 불러와 세우니, 바로 順帝이다.
역주7 如字 : 한 글자에 여러 독음이 있는 경우 본음대로 읽으라는 것이다.
역주8 徵淸河王蒜及渤海孝王子纘……罷蒜歸國 : “劉纘과 劉蒜을 함께 불렀으니, 한 사람은 迎立하고 한 사람은 돌려보내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므로 史書에서는 ‘유산이 돌려보내져 봉국으로 돌아갔다.’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유산을 돌려보냈다.’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주벌하는 뜻이다. 이때 梁冀가 유산의 嚴重함을 꺼려서 여러 사람들의 뜻을 어기고 돌려보냈으니, ‘유산을 돌려보냈다.’라고 쓴 것은 그 영립하고 돌려보낸 것이, 모두 양기의 뜻이라고 말한 것과 같다. 漢代에 영립했다고 쓴 것이 10명의 군주인데, 昌邑王은 ‘霍光이 皇后의 詔令을 받들었다.’라고 썼고, 宣帝는 ‘곽광이 太后에게 아뢰었다.’라고 썼으니, 이는 공적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양기가 사사롭게 한 것인데 또한 ‘太后에게 아뢰었다.’라고 썼으니, 이는 어째서인가. 太后는 梁氏의 딸이니, 太后에게 아뢰었다고 쓴 것은 太后와 양기를 모두 책망한 것이다. 좋은 일과 나쁜 일에 똑같은 글을 혐의하지 않으니, 아래에 ‘太后에게 아뢰어 太尉 李固를 策免하고, 蠡吾侯 劉志를 맞아들여 卽位하게 했다.’라고 쓴 것도 뜻이 같다.[纘蒜幷徵 一迎一罷宜矣 故史稱蒜罷歸國 此其書罷蒜 何 誅意也 於是梁冀憚蒜嚴重 違衆罷之 書曰罷蒜 若曰其迎其罷 冀皆有意云耳 漢世書迎立者十君 昌邑書霍光承皇后詔 宣帝書光奏太后 公也 此冀 私也 亦書白太后 何 太后梁氏女 書白太后 交責之也 美惡不嫌同辭 下書白太后策免固 迎蠡吾侯志入卽位義同]” ≪書法≫ “군주를 세우는 것은 큰일이니, 반드시 널리 상의하여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른 뒤에야 皇極과 神器가 의탁할 곳을 얻게 된다. 지금 淸河王과 渤海王의 아들이 함께 京師에 왔는데, 公卿들이 모두 劉蒜에게 마음을 두었으나 양기가 마침내 어린 군주를 세우고자 하여 여러 사람의 의견을 어기고 독단적으로 행하였으니, 이는 九五 大寶(황제의 지위)가 마침내 사사로운 가문의 물건일 뿐인 것이다. ‘大將軍 양기가 太后에게 아뢰어 劉纘을 맞아들여 즉위하게 하고 유산을 돌려보내어 封國으로 돌아가게 했다.’라고 썼으니, 그렇다면 양기의 당시 두려워할 만한 권세의 氣焰이 이와 같은 것이다. 사납고 고집스레 자신의 의견을 내세워 제 마음대로 곧장 행한 뜻이 은연중 書法의 사이에 나타나니, 漢나라 조정의 公卿들이 그와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조정에 함께 설 수 있었겠는가.[置君 大事也 必廣謀從衆 然後皇極神器得所付託 今淸河渤海同至京師 公卿旣皆歸心於蒜 而冀乃貪立幼穉 違衆獨行 是九五大寶 乃私門之物爾 書大將軍冀白太后迎纘入卽位 罷蒜歸國 則冀一時勢熖可畏 若此 其狠愎自用直情徑行之意 隱然見於書法之間 漢朝公卿 尙可與之比肩幷列乎]” ≪發明≫
역주9 張嬰이……항복했었는데 : 본서 15쪽에 보인다.

자치통감강목(9) 책은 2019.09.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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