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資治通鑑綱目(13)

자치통감강목(13)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자치통감강목(1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辛未年(311)
五年이라
漢嘉平元年이라 ◑成玉衡元年이라
春正月 漢曹嶷 寇靑州하니 苟晞敗走하다
◑石勒 寇江夏하여 陷之하다
謀保據江, 漢이어늘 張賓 以爲不可러니 軍中飢疫하여 死者太半이라 乃渡沔하여 寇江夏하다
寇陷涪하니 하다
譙周之子 居巴西라가 爲成太守馬脫所殺하니 其子登 詣劉弘하여 請兵復讐한대
表登爲梓潼內史하여 使自募巴, 蜀流民하여 得二千人하고 西上하여 攻宕渠斬脫하다 食其肝하고 遂據涪城注+宕渠縣, 漢屬巴郡, 自蜀以來, 屬巴西.하니
成人 攻之 屢爲所敗 至是三年 食盡援絶하니 士民 熏鼠食之하여 餓死甚衆이로되 無一人離叛者러라
城陷 見獲하니 成主雄 欲宥之로되 詞氣不屈하니 乃殺之하다
湘州流民 作亂하여 推杜弢하여 爲刺史하다
巴, 蜀流民 布在荊, 湘間하여 爲土民所困苦러니 湘州參軍馮素 與蜀人汝班有隙注+汝, 姓也.이라
言於刺史苟眺하여 欲盡誅流民하니 流民 大懼하여 四五萬家 一時俱反注+苟眺, 通鑑作荀眺.하고 以醴陵令杜弢 爲湘州刺史注+醴陵縣, 屬長沙郡. 弢, 他刀切.하다
하고 以王敦爲刺史, 都督征討諸軍事하다
馥以洛陽孤危라하여 表請遷都壽春注+馥, 浚之從父弟也.하다 太傅越 以馥不先白己라하여 大怒召之하니 不行이라
睿遂攻之하니 敗走死어늘 睿以敦爲揚州刺史 督征討諸軍하다
三月 하니 以苟晞爲大將軍하여 督六州하다
苟晞移檄諸州하여 陳越罪狀하니 帝亦惡越專權違命하고
所留何倫等 抄掠公卿하고 逼辱公主하여 密賜晞詔하여 使討之러니
越亦下檄하여 罪狀晞하고 遣兵攻之하다 晞遣騎하여 收越黨尙書劉曾 侍中程延하여 斬之하니
憂憤成疾하여 以後事付王衍而卒하다 共推衍爲元帥하니 不敢當하여 奉越喪하여 還葬東海하다
倫等 以裴妃及世子毗 自洛陽東走하니 城中士民 爭隨之러라
帝追貶越爲縣王하고 以晞爲大將軍하여 都督靑徐兗豫荊揚諸軍事하다
帥輕騎하고 追太傅越之喪하여 及於苦縣注+苦縣, 屬陳郡.하여 大敗晉兵하고 縱騎圍而射之하니 將士十餘萬人 無一免者
執太尉衍等하여 問以晉故하니 具陳禍敗之由하고 云 計不在己라하고
且自言 少無宦情하여 不豫世事라하고 因勸勒稱尊號하여 冀以自免이러니
勒曰 君少壯登朝하여 名蓋四海하고 身居重任하니 何得言無宦情邪 破壞天下 非君而誰
衆人 畏死하여 多自陳述호되 獨襄陽王範 神色儼然하여 顧呵之曰 今日之事 何復紛紜注+範, 瑋之子也, 永寧元年受封.
謂孔萇曰 吾行天下多矣로되 未嘗見此輩人하니 當可存乎 萇曰 彼皆晉之王公이니 終不爲吾用이니이다
勒曰 雖然이나 要不可加以鋒刃이라하고 使人排牆殺之하다
剖越柩하여 焚其尸하고 曰 亂天下者 此人也 吾爲天下報之라하다
世子毗及宗室四十八王 皆沒於勒하고 裴妃爲人所掠賣라가 久之 渡江하다
琅邪王睿之鎭建業 裴妃意也 故睿德之하여 厚加存撫하고 以其子沖으로 繼越後하다
五月 杜弢陷長沙하다
弢自是 南破零, 桂하고 東掠武昌하여 殺長吏甚衆注+吳孫權改鄂曰武昌, 晉武帝太康元年, 復立鄂縣, 而武昌如故. 改吳之江夏曰武昌郡.이러라
漢人 入寇하여 六月 陷洛陽하고 殺太子詮하고 遷帝于平陽하여 封平阿公하다
苟晞表請遷都倉垣注+倉垣城, 在陳留浚儀縣.하니 帝將從之러니 公卿 猶豫不果行하다
旣而 洛陽飢困하여 人相食하니 百官流亡者 什八九 帝將行 而衛從不備하여 無車輿注+從, 才用切.
乃步出西掖門하여 至銅駝街하여 爲盜所掠하여 不得進注+水經註 “洛陽城中太尉‧司徒兩坊間, 謂之銅駝街, 魏明帝置銅駝於閶闔南街, 卽此.”하다
度支魏浚 帥流民數百家하여 保河陰之하고 時掠得穀麥하여 獻之注+水經註 “河南新安縣, 東有千秋亭, 亭東有雍谷溪, 回岫縈紆, 石路阻峽, 故亦有峽石之稱.”하다
漢主聰 使呼延晏으로 將兵二萬七千하고 寇洛陽하니 比及河南 晉兵 前後十二敗注+河南縣, 屬河南尹.러라
劉曜, 王彌, 石勒 皆引兵會之러니 先至하여 攻平昌門하여 克之하고 遂焚府寺注+平昌門, 洛城南面東頭第一門.하다
六月 司空 及弟光祿大夫組 奔轘轅하니 彌, 晏 克宣陽門하고 入宮하여 大掠注+宣陽門, 洛城南面東第四門.하다
帝欲奔長安이러니 漢兵 追執之하고 曜自西明門入하여 殺太子詮等하니 士民死者 三萬餘人이라
遂發掘諸陵하고 焚宮廟하다 曜納羊后하고 遷帝及六璽於平陽하고 引兵하여 出屯許昌하다
漢以帝爲左光祿大夫하여 封平阿公하고 以侍中庾珉, 王儁으로 爲光祿大夫注+珉, 敱之兄也.하다
曜以彌不待己至하고 先入洛陽이라하여 怨之
彌說曜曰 洛陽 天下之中이라 山河四塞하고 城池宮室 不假修營이니 宜白主上하여 自平陽徙都之니이다
曜以天下未定하고 洛陽 四面受敵하니 不可守라하여 不用彌策而焚之하니
彌罵曰 屠各子豈有帝王之意邪注+屠, 直於切. 晉書曰 “北狄以部落爲類, 其入居塞內者, 有屠各等十九種, 皆有部落, 不相雜錯. 屠各最豪貴, 故得爲單于, 統理諸種.”아하고 遂與曜有隙하여 引兵東屯項關注+陳郡項縣, 有項關.하니
劉暾 說彌曰 將軍 建不世之功하고 又與始安王相失하니 將何以自容
不如東據本州하고 徐觀天下之勢注+彌, 靑州東萊人. 上可以混一四海 下不失鼎峙之業이니라 彌心然之러라
司空苟晞 奉豫章王端하여 建行臺於蒙城하고 荀藩 奉秦王業하여 趣許昌하다
荀藩 在陽城이러니 汝陰太守李矩 輸給之注+陽城縣, 漢屬潁川郡, 晉屬河南郡. 汝陰縣, 漢屬汝南郡, 魏分置汝陰郡, 後廢, 武帝泰始二年, 復爲郡.하니
建行臺於密하고 傳檄四方하여 推琅邪王睿하여 爲盟主하고 以矩爲滎陽太守注+密縣, 漢屬河南郡, 晉屬滎陽郡.하다
豫章王端 太子詮弟也 東奔倉垣하니 苟晞奉爲皇太子하여 置行臺하고 屯蒙城注+端, 初封廣川王, 後封豫章. 蒙縣, 屬梁國.하다
秦王業 吳孝王晏之子 藩甥也 年十二 南奔密하니 藩等 奉之하여 以趣許昌注+業, 出繼後伯父秦獻王東, 襲封秦王.하다
天水閻鼎 聚西州流民數千於密하여 欲還鄕里러니 藩以鼎有才而擁衆이라하여 用爲豫州刺史하고 以周顗等爲參佐注+顗, 浚之子也.하다
琅邪王睿 遣兵하여 擊江州刺史華軼하여 斬之하다
海內大亂호되 獨江東差安하니 中國士民避亂者 多南渡江이라
王導說睿하여 收其賢俊하여 辟掾屬刁協, 王承, 卞壼, 諸葛恢, 陳頵, 庾亮等百餘人하니 時人 謂之百六掾注+承, 渾之弟子. 恢, 靚之子. 頵, 居筠切. 亮, 袞之弟子也. 掾, 官屬也, 言置掾屬一百六人.이러라
及承荀藩檄 承制署置하니 江州刺史華軼 及豫州刺史裴憲 皆不從命注+軼, 歆之曾孫. 憲, 楷之子也.이어늘
睿遣王敦, 甘卓, 周訪하여 合兵擊軼하여 斬之하니 奔幽州하다
睿以卓爲湘州刺史하고 訪爲尋陽太守하고 陶侃爲武昌太守注+漢尋陽縣, 屬廬江郡, 其地在江北, 惠帝永興元年, 分廬江‧ 武昌, 立尋陽郡, 治豫章之柴桑, 尋陽遂在江南.하다
秋七月 大司馬王浚 自領尙書令하다
設壇告類하고 立皇太子하고 稱受中詔하고 承制封拜하여 備置百官하고 列置征, 鎭注+非時祭天, 謂之類, 言以事類告也.하다
漢劉曜寇長安하니 南陽王模出降한대 曜殺之하고 遂據長安하니 模世子保 保上邽하다
南陽王模 使牙門趙染으로 戍蒲坂注+劉聰在平陽, 欲窺關中. 蒲坂, 兵衝也.이러니 帥衆降漢하니
遣染與將軍劉雅하여 攻模于長安하고 劉曜, 劉粲 繼之하다
敗模兵於潼關하고 長驅至下邽注+下邽縣, 前漢屬京兆, 後漢省, 倂入鄭縣, 桓帝復置, 晉屬馮翊郡. 應曰 “有上邽, 故稱下, 秦武公伐邽戎置.”한대 涼州將北宮純 自長安으로 帥衆降漢이어늘
漢兵 圍長安하니 模倉庫虛竭하고 士卒離散이라 遂降于漢하니 殺之하다
關西饑饉하여 白骨 蔽野하고 士民存者 百無一二 漢主聰 以曜爲雍州牧하여 封中山王하고 守長安하다
模都尉陳安 帥衆하고 歸世子保於上邽하니 保遂據有秦州러니
尋稱大司馬하고 承制署하니 隴右氐, 羌 皆從之하다
漢石勒 陷蒙城하고 執苟晞及豫章王端하다
晞驕奢苛暴하니 前遼西太守閻亨 數諫한대 殺之注+亨, 纘之子也.하다
從事明預有疾이러니 自轝入諫注+明, 姓也.한대 晞怒曰 我殺閻亨 何關人事완대 而轝病罵我
預曰 明公 以禮待預 故預以禮自盡하노니 今明公 怒預 其如遠近怒明公何
桀爲天子로되 猶以驕暴而亡이어든 況人臣乎 願明公 且置是怒하고 思預之言하라
晞不從하니 由是 衆心離怨하고 加以疾疫, 饑饉하다
襲蒙城하여 執晞及豫章王하여 鎖晞頸하여 以爲左司馬하다
冬十月 漢石勒 誘王彌하여 殺之하다
漢大將軍王彌 與勒外相親而內相忌 其將徐邈 叛去하니 彌兵 漸衰러니
聞勒擒苟晞하고 心惡之하여 以書賀勒曰 公 獲苟晞而用之하니 何其神也 使晞爲公하고 彌爲公右 天下不足定也리라
謂張賓曰 王公 位重而言卑하니 其圖我必矣로다 因勸勒하여 乘彌小衰하여 誘而取之하다
彌與劉瑞 相持甚急이라 請救於勒이어늘 勒未之許러니
賓曰 公 常恨不得王公之便이러니 今天以王公授我矣니이다 乃引兵擊瑞하여 斬之하니
彌大喜하여 謂勒實親己라하여 不復疑也러라 請彌燕이라가 酒酣而斬之하고 幷其衆하다
漢主聰 大怒하여 遣使讓勒專害公輔하여 有無君之心이라 然猶加勒鎭東大將軍하여 以慰其心이러라
苟晞漸謀叛勒이어늘 殺之하고 引兵掠豫州諸郡이라가 臨江而還하여 屯于葛陂注+續漢書郡國志 “汝南郡鮦陽縣, 有葛陂.”하다
勒之爲人所掠賣也 與其母王氏相失이러니 劉琨 得之하여 遣使하고 幷其從子虎하여 送於勒하고
因遺書曰 將軍 用兵如神이로되 所以周流天下而無容足之地者 蓋得主則爲義兵이요 附逆則爲賊衆故也
成敗之數 有似呼吸하니 吹之則寒하고 噓之則溫注+出氣急曰吹, 緩曰噓.이라 今相授侍中하고 領護匈奴中郞將하노니 將軍 其受之하라
報書曰 事功殊途하니 非腐儒所知注+腐者, 爛敗貌. 腐儒, 言儒者但能守陳腐之見, 不達時宜. 君當逞節本朝 吾自夷難爲効注+夷, 平. 難, 患也. 爲効, 展其勤効也. 我當以平難之事自効.라하고
遺琨名馬珍寳하고 厚禮其使로되 謝而絶之하다
虎年十七이라 殘忍無度하니 白母除之러니 母曰 快牛爲犢 多能破車하나니 汝小忍之注+破車, 謂破毁輿輪也.하라
及長 便弓馬하고 勇冠當時注+便弓馬, 謂弓馬間便疾也.하니 每屠城邑 鮮有遺類
이나 御衆 嚴而不煩이로되 莫敢犯者 指授攻討 所向無前하니 遂寵任之러라
馮翊太守索綝等 擊敗漢兵於長安하고 十二月 迎秦王業하여 入雍城하다
索綝 爲馮翊太守하여 與安夷護軍麴允 安定太守賈疋 謀復晉室하고 帥衆五萬하여 向長安注+綝, 靖之子. 疋, 詡之曾孫也. 疋, 古雅字.이러니
雍州刺史麴特等 帥衆十萬하고 會之하여 大敗劉曜於黃丘하고 又破劉粲於新豐하니 兵勢大振이라
關西胡, 晉 翕然響應注+黃丘, 在馮翊雲陽縣黃嶔山下.이러라 閻鼎 欲奉秦王業하고 入關據長安하여 以號令四方이러니
荀藩, 周顗等 皆山東人이라 不欲西行하여 中途逃散하여 顗奔江東하다
鼎與業 至藍田하여 遣人告疋한대 疋遣兵迎之하여 入于雍城하고 使梁綜으로 以兵衛之注+雍城, 扶風雍縣城也.하다
琅邪王睿 以周顗爲軍諮祭酒하다
前騎都尉桓彛 避亂過江이러니 見睿微弱하고 謂顗曰 我以中州多故라하여 來此求全이러니 而單弱如此하니 將何以濟오하더니
旣而 見王導하여 共論世事하고 退하여 謂顗曰 向見管夷吾하니 無復憂矣注+以王導比管仲也.라하니라
諸名士遊宴新亭注+金陵覽古曰 “新亭在江寧縣十里, 近臨江渚.”이러니 顗中坐歎曰 風景 不殊 擧目 有江河之異라하고 因相視流涕注+坐, 徂臥切. 江河之異, 言洛都遊宴, 多在河濱, 而新亭臨江渚也.한대
導愀然變色曰注+愀, 七小切. 當共戮力王室하여 克復神州注+戰國時, 騶衍以爲 “中國者, 於天下, 乃八十一分居其一分耳. 中國名曰赤縣神州, 赤縣神州內, 自有九州. 禹之所序九州是也.” 何至作楚囚對泣邪아하니 衆皆收淚謝之注+左傳成九年 “晉侯觀于軍府, 見鍾儀, 問之曰 ‘南冠而縶者誰也.’ 有司對曰 ‘鄭人所獻楚囚也.’”하니라
陳頵 遺導書曰 中華所以傾弊者 正以取才失所하여 先白望而後實事하여 浮競驅馳하여 互相貢薦注+白望, 猶言虛名.하고
加有莊老之俗 傾惑朝廷하여 養望者爲弘雅하고 政事者爲俗人이라
夫欲制遠인댄 先由近始 今宜改張하여 明賞信罰注+漢董仲舒論政曰 “譬猶琴瑟, 必改而更張之, 乃可鼓也.”하여 拔卓茂於密縣하고 顯朱邑於桐鄕注+朱邑爲舒桐鄕嗇夫, 廉平不苛, 以愛利爲行. 漢宣帝擧而用之, 官至大司農.이니
然後 大業可擧 中興可冀耳니이다 導不能從하다
劉琨 遣劉希하여 合衆於中山이러니 王浚 殺之하다
劉琨 長於招懷 而短於撫御하니 一日之中 雖歸者數千이나 而去者亦相繼
遣劉希하여 合衆於中山하니 幽州所統代郡, 上谷, 廣寗之民 多歸之하여 衆至三萬注+廣寗縣, 漢屬上谷郡, 晉武帝太康中, 分立廣寗郡, 唐屬嬀州界.이라
王浚하여 遣胡矩與段疾陸眷하여 共攻希하여 殺之하고 驅掠三郡士女而去注+疾陸眷, 務勿塵之子也.하다
慕容廆擊破鮮卑素喜, 木丸部하다
遼東附塞鮮卑素喜連, 木丸津 攻陷諸縣하여 屢敗郡兵이로되 東夷校尉封釋 不能討
失業하고 歸慕容廆者甚衆이러라 廆少子翰 言於廆曰注+據載記, 翰於皝爲庶兄, 皝, 廆第三子, 則翰, 非少子也. 自古有爲之君 莫不尊天子以從民望, 成大業하니이다
今連, 津 寇暴不已하니 不若數其罪而討之
上則興復遼東하고 下則幷呑二部 忠義彰於本朝하고 私利歸於我國이니 此霸王之基也注+二部, 謂素喜連及木丸津也.니이다
廆笑曰 孺子乃能及此乎아하고 遂擊連, 津할새 以翰爲前鋒하여 破斬之하고 盡併二部之衆하다
封釋 疾病 屬其孫於廆러니
廆召(弈)[奕]與語하고 說之曰 奇士也라하고 補小都督注+說, 讀曰悅.하다
釋子悛, 抽來奔喪이어늘 廆見之하고 曰 此家抎抎千斤犍也라하니라
以道不通으로 皆留仕廆하여 抽爲長史하고 悛爲參軍注+抎, 羽敏切, 從高而下也. 犍, 居言切, 犗牛也. 言千斤之犍, 人間不可多得, 若從天而下也. 一說 “抎抎者, 強健有力之貌, 犍乃犗牛, 健強而馴, 此但言其重大耳.”하니라


辛未年(311)
[] 나라 孝懷皇帝 永嘉 5년이다.
[] 나라(前趙) 烈宗 劉聰 嘉平 원년이고 나라 太宗 李雄 玉衡 원년이다.
[] 봄 정월에 나라(前趙) 曹嶷(조억)이 靑州를 침략하니, 苟晞가 패주하였다.
[] 石勒江夏를 침략하여 함락시켰다.
[] 石勒, 지역을 점거할 것을 계획하였는데 張賓이 불가하다고 하였다. 이때 마침 軍中에 기근이 들고 역병이 유행하여 죽은 자가 태반이었으므로 마침내 沔水를 건너 江夏를 침략하였다.
[] 나라가 涪城(부성)을 침략하여 함락시키니, 梓潼內史 譙登이 죽었다.
[] 처음에 譙周의 아들이 巴西에 거주하다가 나라 太守 馬脫에게 살해를 당하니, 그의 아들 譙登이 복수하기 위해 劉弘을 찾아가서 병력을 청하였다.
유홍이 표문을 올려 초등을 梓潼內史로 삼고 그로 하여금 직접 , 流民들을 모집하게 하여 2천 명을 얻자 서쪽으로 올라가 宕渠縣을 공격하게 하였다. 초등이 마탈을 참수하여 그의 을 먹고 마침내 涪城을 점거하니,注+宕渠縣나라 때에는 巴郡에 속하였는데, 蜀漢 이래로 巴西에 속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부성을 공격하였으나 여러 번 그에게 패하였다. 3년이 지난 이때에 양식이 다하고 후원이 끊기니, 백성들이 쥐를 잡아 구워먹고 굶어 죽는 자가 매우 많았으나 한 사람도 이반하는 자가 없었다.
이 함락되자 초등이 사로잡혔는데, 成主 李雄이 용서하고자 하였으나, 초등이 어조를 굽히지 않자 마침내 그를 죽였다.
[] 湘州流民을 일으켜 杜弢(두도)를 추대하여 刺史로 삼았다.
[] , 流民들이 荊州湘州 사이에 흩어져 살면서 원래부터 거주하던 백성들에게 고통을 당하였다. 湘州參軍 馮素 지역 사람 汝班과 원한이 있었다.注+이다.
刺史 苟眺에게 말하여 유민들을 다 죽이고자 하니, 유민들이 크게 두려워하여 4, 5만 가호가 일시에 모두 배반하고注+苟眺는 ≪資治通鑑≫에는 荀眺로 되어 있다. 醴陵令 杜弢를 추대하여 湘州刺史로 삼았다.注+醴陵縣長沙郡에 속하였다. 他刀이다.
[] 琅邪王 司馬睿揚州都督 周馥을 축출하고 王敦揚州刺史 都督征討諸軍事로 삼았다.
[] 周馥洛陽이 위태롭게 고립되었다 하여 표문을 올려서 壽春으로 遷都할 것을 청하였다.注+周馥周浚從弟이다. 太傅 司馬越은 주복이 먼저 자기에게 아뢰지 않았다 하여 크게 노여워해서 불렀으나, 주복이 가지 않았다.
司馬睿가 마침내 그를 공격하니, 주복이 패주하다가 죽었다. 사마예는 王敦揚州刺史 都督征討諸軍事로 삼았다.
[] 3월에 太傅 司馬越 지역에서 하니, 苟晞大將軍으로 삼아 六州를 도독하게 하였다.
[] 苟晞가 여러 에 격문을 보내어 司馬越의 죄상을 열거하니, 황제 또한 사마월이 권력을 독단하고 명령을 어기고
그가 도성에 남겨놓은 何倫 등이 公卿의 재물을 노략질하고 公主를 핍박하여 욕보인 것을 미워하여 은밀히 구희에게 詔書를 내려 사마월을 토벌하게 하였다.
이에 사마월도 격문을 내려서 구희의 죄상을 나열하고 군대를 보내어 그를 공격하였다. 구희가 기병을 보내어 사마월의 도당인 尙書 劉曾侍中 程延을 체포하여 참수하니,
사마월은 근심하고 분노하던 끝에 병이 나서 死後의 일을 王衍에게 부탁하고 하였다. 사람들이 함께 왕연을 추대하여 元帥로 삼으려 하니, 왕연은 감히 감당할 수 없다 하여 사마월의 영구를 받들고 東海로 돌아가 장례하였다.
하륜 등이 裴妃世子 司馬毗를 데리고 洛陽에서 동쪽으로 달아나니, 성안에 있던 선비와 백성들이 다투어 따라갔다.
황제는 사마월을 追貶하여 縣王으로 삼고, 구희를 大將軍 都督靑徐兗豫荊揚州諸軍事로 삼았다.
[] 여름 4월에 나라(前趙) 石勒司馬越의 군대를 추격하여 苦縣에서 패퇴시키고 王衍 등을 사로잡아 죽였다.
[] 石勒이 경무장한 기병을 거느리고 太傅 司馬越의 영구를 뒤쫓아 苦縣에서 따라잡아注+苦縣陳郡에 속하였다. 나라 군대를 대파하고 기병을 풀어놓아 포위하고 활을 쏘니, 나라 장병 10여만 명 중에 한 사람도 죽음을 면한 자가 없었다.
太尉 王衍 등을 사로잡아 나라의 연고를 물으니, 왕연은 나라가 禍亂을 당하여 실패하게 된 연유를 자세히 말하고는 그 책임이 자신에게 있지 않다고 하였다.
또 스스로 말하기를 “젊어서부터 벼슬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하고, 인하여 석륵에게 황제의 尊號를 칭할 것을 권하여 스스로 죽음을 면하고자 하였다.
석륵이 말하기를 “은 젊었을 때 조정에 올라서 명성이 四海를 뒤덮고 몸이 막중한 임무를 맡았는데, 그러고도 어찌하여 벼슬할 마음이 없었다고 말하는가. 천하를 파괴한 것이 그대가 아니고 누구란 말인가.” 하고 질책하였다.
石勒이 王衍이 천하를 어지럽힌 것을 책망하다石勒이 王衍이 천하를 어지럽힌 것을 책망하다
[]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여 대부분 스스로 나라가 패망하게 된 이유를 진술하였으나, 유독 襄陽王 司馬範은 정신과 기색을 엄숙히 하고서 사람들을 돌아보며 꾸짖기를 “오늘의 일을 어찌 다시 분분하게 말하는가.”注+司馬範司馬瑋의 아들이니, 永寧 원년(301)에 봉지를 받았다. 하였다.
石勒孔萇에게 이르기를 “내가 천하를 많이 다녀보았으나, 일찍이 이런 사람을 보지 못했으니, 마땅히 살려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니, 공장이 말하기를 “저들은 모두 나라의 王公이니 끝내 우리에게 쓰이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석륵이 말하기를 “그렇지만 그에게 칼날을 가해서는 안 된다.” 하고는 밤에 사람을 시켜서 담장을 떠밀어 압사하게 하였다.
그리고 司馬越의 관을 깨서 그의 시신을 불태우고 말하기를 “천하를 어지럽힌 자는 바로 이 사람이니, 내가 천하 사람들을 위하여 원수를 갚는다.” 하였다.
世子 司馬毗宗室 48명의 왕이 모두 석륵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裴妃는 남에게 붙들려 팔려갔다가 오랜 뒤에야 長江을 건너왔다.
처음에 琅邪王 司馬睿建業에 진주한 것은 裴妃의 뜻이었다. 그러므로 사마예는 그 일을 고맙게 여겨서 그녀를 극진하게 위문하고, 자기의 아들 司馬沖으로 하여금 사마월의 뒤를 잇게 하였다.
[] 5월에 杜弢長沙를 함락시켰다.
[] 杜弢가 이로부터 남쪽으로는 零陵桂陽을 격파하고 동쪽으로는 武昌을 노략질하고서 長吏들을 매우 많이 죽였다.注+나라 孫權鄂縣을 고쳐 武昌이라고 하였는데, 武帝 太康 원년(280)에 다시 악현을 세웠으나, 무창을 그대로 두고 나라의 江夏郡을 고쳐 武昌郡이라 하였다.
[] 나라(前趙) 사람들이 쳐들어와서 6월에 洛陽을 함락시키고, 太子 司馬詮을 죽이고, 황제를 平陽으로 옮기고서 平阿公에 봉하였다.
[] 苟晞가 표문을 올려서 倉垣으로 천도할 것을 청하자,注+倉垣城陳留 浚儀縣에 있다. 황제가 장차 그의 말을 따르려 하였는데, 公卿들이 머뭇거리고 결행하지 못하였다.
얼마 후 洛陽에 기근이 들어 곤궁하여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기까지 하니, 百官 중에 흩어져 도망한 자가 10명 중에 8, 9명이었다. 황제가 길을 떠나려고 하였는데, 侍偉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서 타고 갈 수레조차 없었다.注+(따르다)은 才用이다.
마침내 도보로 西掖門을 나가 銅駝街에 이르렀는데, 도적에게 노략질을 당하여 더 이상 전진할 수가 없었다.注+水經註≫에 “洛陽城 가운데 太尉司徒의 두 관서 사이를 銅駝街라고 하니, 나라 明帝가 구리로 만든 낙타를 閶闔門 남쪽 거리에 세운 곳이 바로 여기이다.” 하였다.
度支 魏浚이 수백 가호의 流民을 거느리고 河陰峽石을 지키면서 때때로 곡식과 보리를 노략질하여 황제에게 올렸다.注+水經註≫에 “河南 新安縣은 동쪽에 千秋亭이 있고 천추정 동쪽에 雍谷溪가 있는데, 물줄기가 산을 굽이돌아 흐르고 돌길이 협곡에 막혔으므로 峽石이라는 칭호도 갖게 되었다.” 하였다.
漢主 劉聰呼延晏으로 하여금 2만 7천의 병력을 거느리고 낙양을 침략하게 하니, 〈호연안의 군대가〉 河南 지역에 도착할 때까지 나라 군대가 전후로 모두 12번을 패하였다.注+河南縣河南尹에 속하였다.
劉曜, 王彌, 石勒이 모두 병력을 인솔하고 호연안과 회합하기로 하였는데, 호연안이 먼저 도착해서 平昌門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마침내 관사를 불태웠다.注+平昌門洛陽城 남쪽 방면의 동쪽 가장자리 첫 번째 문이다.
[] 6월에 司空 荀藩과 그의 아우 光祿大夫 荀組轘轅으로 달아나니, 王彌呼延晏宣陽門을 부수고 궁중으로 들어와서 크게 노략질하였다.注+宣陽門洛陽城 남쪽 방면 동쪽 가장자리의 네 번째 문이다.
황제가 長安으로 달아나려고 하였는데, 나라(前趙) 군대가 뒤쫓아와서 사로잡고, 劉曜西明門으로 들어와 太子 司馬詮 등을 죽이니, 선비와 백성들 중에 죽은 자가 3만여 명이었다.
마침내 여러 을 도굴하고 궁궐과 종묘를 불태웠다. 유요가 羊后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황제와 6개의 옥새를 平陽으로 옮겼으며, 石勒은 병력을 인솔하고 나가 許昌에 주둔하였다.
나라는 황제를 左光祿大夫로 삼아 平阿公에 봉하고, 侍中 庾珉王儁(왕준)을 光祿大夫로 삼았다.注+劉珉劉敱의 형이다.
[] 처음에 劉曜王彌가 자신이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洛陽에 들어갔다 하여 그를 원망하였다.
왕미가 유요를 설득하기를 “낙양은 천하의 중앙입니다. 산과 江河가 사방으로 둘려 있고 城池宮室은 굳이 수리하고 경영할 필요가 없으니, 主上에게 아뢰어서 平陽에서 이곳 낙양으로 천도하여야 합니다.” 하였으나,
유요는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못하였고 낙양이 四面으로 적의 침공을 받으므로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여 왕미의 계책을 따르지 않고 불을 질렀다.
왕미가 유요를 꾸짖기를 “屠各(저각)의 자식에게 어찌 제왕의 뜻이 있겠는가.”注+直於이다. ≪晉書≫에 “北狄部落族類로 삼는바, 변방 안에 들어와 산 자 중에 屠各 등 19종류의 족속이 있는데 모두 部落이 따로 있어서 서로 뒤섞이지 않았다. 그중 屠各이 가장 호걸스럽고 귀하였으므로 單于가 되어 여러 종족들을 다스릴 수 있었다.” 하였다. 하고는, 마침내 유요와 틈이 생겨서 병력을 인솔하고 동쪽으로 가서 項關에 주둔하였다.注+陳郡 項縣項關이 있다.
劉暾이 왕미를 설득하기를 “장군은 不世出의 공을 세우고 또 始安王(유요)과 사이가 좋지 못하니, 장차 어떻게 자신을 보전하려 합니까.
동쪽으로 本州(靑州)를 점거하고 서서히 천하의 형세를 관망하는 것만 못하니,注+王彌靑州 東萊 사람이다. 〈그리하여 靑州本州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잘 되면 천하를 통일할 수 있고 잘못되더라도 솥발의 형세를 이루어 三分天下功業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왕미가 내심 그 말을 옳게 여겼다.
[] 司空 苟晞豫章王 司馬端을 받들어 蒙城行臺를 세웠고, 荀藩秦王 司馬業을 받들고서 許昌으로 갔다.
[] 荀藩陽城縣에 있었는데 汝陰太守 李矩가 식량을 공급하니,注+陽城縣나라 때에는 潁川郡에 속하였고, 나라 때에는 河南郡에 속하였다. 汝陰縣나라 때에는 汝南郡에 속하였고, 나라 때에는 땅을 나누어 汝陰郡을 설치했다가 뒤에 폐지하였으며, 武帝 泰始 2년(266)에 다시 으로 만들었다.
순번이 密縣行臺를 세우고 사방에 격문을 돌려서 琅邪王 司馬睿盟主로 추대하고 이구를 滎陽太守로 삼았다.注+密縣나라 때에는 河南郡에 속하였고, 나라 때에는 滎陽郡에 속하였다.
豫章王 司馬端은 태자 司馬詮의 아우이다. 동쪽 倉垣으로 달아나니, 苟晞가 그를 받들어 황태자로 삼고서 행대를 설치하고 蒙城으로 옮겨 주둔하였다.注+司馬端은 처음에 廣川王에 봉해졌다가 뒤에 豫章王에 봉해졌다. 蒙縣梁國에 속하였다.
秦王 司馬業吳孝王 司馬晏의 아들이고, 순번의 생질이다. 나이가 12세였는데 남쪽 밀현으로 달아나니, 순번 등이 그를 받들고서 許昌으로 갔다.注+司馬業伯父秦獻王 司馬東에게 양자로 나가 세습하여 秦王에 봉해졌다.
天水 사람 閻鼎은 밀현에서 西州의 유민 수천 명을 모아 鄕里로 돌아가고자 하였는데, 순번은 염정이 재주가 있고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해서 등용하여 豫州刺史로 삼고, 周顗 등을 參佐로 삼아 보좌하게 하였다.注+周顗周浚의 아들이다.
[] 琅邪王 司馬睿가 군대를 보내어 江州刺史 華軼(화일)을 공격하여 참수하였다.
[] 이때 천하가 크게 혼란하였으나 유독 江東 지역만 다소 편안하니, 中國(中原)에서 피난한 선비와 백성들 중에 남쪽으로 長江을 건너가는 자가 많았다.
王導司馬睿를 설득하여 그중에 어질고 준걸스러운 사람을 거두어 刁協(조협), 王承, 卞壼, 諸葛恢, 陳頵(진균), 庾亮 등 100여 명을 掾屬으로 辟召하니, 당시 사람들이 이들을 일러 ‘百六掾’이라 하였다.注+王承王渾의 아우의 아들이고, 諸葛恢諸葛靚의 아들이다. 居筠이다. 庾亮庾袞의 아우의 아들이다. 官屬이니, 〈“百六掾”은〉 掾屬 106명을 둔 것을 말한 것이다.
司馬睿가 106명의 掾屬을 辟召하다司馬睿가 106명의 掾屬을 辟召하다
사마예가 荀藩의 격문을 받고는 江州刺史 華軼豫州刺史 裴憲이 모두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注+華軼華歆의 증손이고, 裴憲裴楷의 아들이다.
사마예가 王敦, 甘卓, 周訪을 보내어 병력을 규합하여 화일을 공격해서 참수하니, 배헌은 幽州로 달아났다.
사마예는 감탁을 湘州刺史로, 周訪尋陽太守로, 陶侃武昌太守로 삼았다.注+나라 때 尋陽縣廬江郡에 속하여 그 지역이 江北에 있었는데, 惠帝 永興 원년(304)에 廬江武昌을 나누어 尋陽郡을 세우고 豫章柴桑治所로 삼으니, 마침내 尋陽江南에 있게 되었다.
[] 가을 7월에 大司馬 王浚이 스스로 尙書令을 겸하였다.
[] 王浚을 세워 하고 황태자를 세우고 황제의 조서를 받고 制命을 받들어 관작을 제수한다고 하고는 百官을 갖추어 설치하고 四征四鎭을 설치하였다.注+제사 지낼 때가 아닌데 하늘에 제사하는 것을 라 이르니, 하늘에 제사하여 일을 告由하는 것을 이른다.
[] 나라(前趙) 劉曜長安을 침략하니, 南陽王 司馬模가 나와 항복하였다. 유요가 그를 죽이고 마침내 長安을 점거하니, 사마모의 世子 司馬保上邽를 지켰다.
[] 南陽王 司馬模牙門 趙染蒲坂에 주둔시켜 지키게 하였는데,注+劉聰平陽에 있으면서 關中 지역을 엿보려 하였다. 蒲坂은 군대의 요충지이다. 조염이 병력을 거느리고 나라(前趙)에 항복하니,
나라는 조염과 將軍 劉雅를 보내 長安에서 사마모를 공격하게 하고 劉曜劉粲으로 하여금 뒤를 잇게 하였다.
조염이 사마모의 군대를 潼關에서 패퇴시키고 승승장구하여 下邽까지 이르자,注+下邽縣前漢 때에는 京兆에 속하였는데, 後漢 때에는 없애고 鄭縣으로 합병하였다가 桓帝 때에 다시 설치하였으며, 나라 때에는 馮翊郡에 속하였다. 應劭가 말하기를 “上邽가 있기 때문에 下邽라고 칭하였으니, 나라 武公 지역의 戎族을 정벌하고 설치했다.” 하였다. 涼州의 장수 北宮純이 장안에서 병력을 거느리고 와서 나라에 항복하였다.
나라 군대가 장안을 포위하자, 사마모가 창고가 텅 비고 병졸들이 뿔뿔이 흩어져 마침내 나라에 항복하니, 劉粲이 그를 죽였다.
關西 지역에 기근이 들어서 白骨이 들판을 뒤덮고, 병사와 백성 중에 살아남은 자가 백 명 중에 한두 명 밖에 없었다. 漢主 劉聰劉曜雍州牧으로 삼아 中山王을 봉하고 장안을 지키게 하였다.
사마모의 都尉 陳安이 병력을 거느리고 上邽에 있는 세자 司馬保에게 돌아가니, 사마보가 마침내 秦州를 점거하였다.
얼마 후 사마보가 大司馬를 칭하고 制命을 받들어 부서를 설치하니, 隴右 지역의 氐族羌族이 모두 따랐다.
[] 나라(前趙) 石勒蒙城을 함락시키고 苟晞豫章王 司馬端을 사로잡았다.
[] 苟晞가 교만하고 사치하고 가혹하고 포악하니, 遼西太守 閻亨이 여러 번 하자, 그를 죽였다.注+閻亨閻纘의 아들이다.
從事 明預가 병이 있었는데도 직접 수레를 타고 들어가서 간하자,注+이다. 구희가 노하여 말하기를 “내가 閻亨을 죽인 것이 그대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병든 몸으로 수레를 타고 와서 나를 꾸짖는가.” 하니,
명예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明公이 나를 로 대우하였기 때문에 나도 를 다하는 것입니다. 이제 明公이 나를 노여워하면 遠近에서 명공을 원망하고 노여워하는 사람들에게는 어찌하시겠습니까.
桀王天子인데도 교만함과 포악함으로 망하였는데 하물며 남의 신하된 자의 경우이겠습니까. 원컨대 명공은 우선 이 노여움을 가라앉히고 저의 말을 생각해보십시오.”
구희가 그의 말을 따르지 않으니, 이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離反하고 원망하였으며, 게다가 역병과 기근이 들었다.
石勒蒙城을 습격하여 구희와 豫章王을 사로잡고는 구희의 목에 쇠사슬을 채워 左司馬로 삼았다.
[] 겨울 10월에 나라(前趙) 石勒王彌를 유인하여 죽였다.
[] 나라(前趙) 大將軍 王彌石勒과 겉으로는 서로 친하였으나 속으로는 시기하였다. 마침 왕미의 장수 徐邈이 배반하고 떠나가니, 왕미의 군대가 점점 쇠약해졌다.
왕미는 석륵이 苟晞를 사로잡았다는 말을 듣고 내심 언짢아하면서도 편지로 석륵에게 축하하기를 “이 구희를 사로잡아 등용하였으니, 어쩌면 그리도 신묘합니까. 만일 구희가 공의 왼손이 되고 제가 공의 오른손이 되면 천하를 평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석륵이 張賓에게 이르기를 “王公이 지위가 높은데 말을 겸손하게 하니, 틀림없이 나를 도모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장빈이 인하여 석륵에게 왕미의 군대가 다소 쇠약한 틈을 타서 그를 유인하여 죽일 것을 권하였다.
[] 이때에 王彌劉瑞와 서로 대치하여 형세가 매우 위급하였다. 왕미가 石勒에게 구원을 청하였으나 석륵이 허락하지 않았다.
張賓이 말하기를 “이 항상 王公을 제거할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였는데, 지금 하늘이 왕공을 우리에게 넘겨주었습니다.” 하니, 석륵이 마침내 군대를 인솔하고 유서를 공격하여 참수하였다.
왕미는 크게 기뻐하여 석륵이 실제로 자기와 친하다고 생각해서 다시는 의심하지 않았다. 석륵이 왕미를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었는데, 왕미가 술에 취하자 그의 목을 베고 그 병력을 자기 휘하에 병합하였다.
漢主 劉聰은 〈이 일을 알고〉 크게 노하고 사자를 보내어 ‘마음대로 公輔(大臣)를 살해하여 君主를 무시하는 마음이 있다.’고 석륵을 책망하였으나, 또 한편으로는 석륵에게 鎭東大將軍하여 그의 마음을 위로해주었다.
苟晞가 점차 석륵을 배반할 것을 모의하자, 석륵이 그를 죽이고, 군대를 이끌고서 豫州의 여러 을 노략질하다가 장강에 이르러 군대를 되돌려 葛陂에 주둔하였다.注+續漢書≫ 〈郡國志〉에 “汝南郡 鮦陽縣葛陂가 있다.” 하였다.
[] 처음에 石勒이 남에게 붙잡혀 팔려갈 적에 그 어머니 王氏와 헤어졌다. 劉琨이 그녀를 찾아내고는 사자를 보내어 그 從子 石虎와 함께 석륵에게 보내고,
인하여 편지를 보내기를 “將軍의 용병술이 귀신과 같으나, 천하를 두루 떠돌아다녀도 발을 용납할 땅이 없으니, 이는 훌륭한 군주를 얻으면 의로운 군대가 되고, 역적에게 붙으면 역적의 무리가 되기 때문이다.
성공과 실패가 나뉘는 이치는 마치 호흡과 같으니, 급히 숨을 내쉬면 차갑게 느껴지고 서서히 내쉬면 따뜻하게 느껴지는 법이다.注+숨을 급히 내쉬는 것을 라 하고, 천천히 내쉬는 것을 라 한다. 지금 내가 그대에게 侍中을 제수하고 護匈奴中郞將을 겸하게 하니, 장군은 이것을 받으라.” 하였다.
석륵이 답장을 보내기를 “을 세우는 것은 길이 다르니, 이는 진부한 儒者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注+는 썩어 문드러진 모양이니, “腐儒”는 儒者가 진부한 견해만을 지키면서 時宜를 알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그대는 마땅히 그대의 조정(나라)에 충절을 다할 것이요, 나는 직접 난을 평정하여 功效를 바치겠다.”注+는 평정함이고, 은 환란이고, “爲効”는 그 수고한 공효를 바치는 것이니, 〈“吾自夷難爲効”는〉 내(석륵)가 난을 평정하는 일로 스스로 공효를 바치겠다는 것이다. 하고는,
유곤에게 名馬와 진귀한 보물을 보내고 사자를 후하게 예우였으나, 그의 제의는 사절하였다.
[] 이때 石虎의 나이가 17세였는데 끝없이 잔인하니, 石勒이 어머니에게 아뢰어 그를 제거하려 하였으나, 어머니가 말하기를 “잘 달리는 소는 송아지 시절에 수레바퀴를 망가뜨리는 경우가 많으니, 너는 조금 참고 두고 보아라.”注+破車”는 수레바퀴를 망가뜨림을 이른다. 하였다.
석호는 장성한 뒤에 활쏘기와 말 타기에 능하고 용맹이 당세에 으뜸이니,注+便弓馬”는 활을 쏘고 말을 타는 사이에 재빠르고 신속함을 이른다. 매번 城邑을 공격하여 도륙할 때마다 살아남는 무리가 적었다.
그러나 병사들을 다스릴 적에 엄하면서도 번거롭지 않아서 감히 명령을 범하는 자가 없고, 그에게 공격할 임무를 지시해주면 그가 가는 곳마다 앞을 가로막는 자가 없으니, 석륵이 마침내 그를 총애하고 신임하였다.
[] 馮翊太守 索綝(삭침) 등이 나라(前趙) 군대를 長安에서 격파하고, 12월에 秦王 司馬業을 맞이하여 雍城으로 들어갔다.
[] 처음에 索綝馮翊太守가 되어서 安夷護軍 麴允, 安定太守 賈疋(가아)와 함께 나라를 회복할 것을 도모하고, 5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長安으로 향하였다.注+索綝索靖의 아들이고, 賈疋賈詡의 증손이다. 古字이다.
雍州刺史 麴特 등이 10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와서 회합하여, 黃丘에서 劉曜를 대파하고 또다시 新豐에서 劉粲을 격파하니, 나라 군대의 기세가 크게 진동하였다.
關西 지역의 胡族나라 사람들이 모두 일제히 호응하였다.注+黃丘馮翊雲陽縣 黃嶔山 아래에 있다. 閻鼎秦王 司馬業을 받들고 關中에 들어가서 장안을 점거하여 사방을 호령하고자 하였는데,
荀藩周顗 등은 모두 山東 사람이라서 서쪽 장안으로 가려 하지 아니하여, 중도에 도망하여 흩어져서 주의는 江東으로 달아났다.
염정과 사마업이 藍田에 이르러서 사람을 보내어 가아에게 알리자, 가아가 군대를 보내어 그들을 맞이해서 雍城으로 들어가게 하고 梁綜으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호위하게 하였다.注+雍城扶風 雍縣이다.
[] 琅邪王 司馬睿周顗軍諮祭酒로 삼았다.
[] 前騎都尉桓彛을 피하여 長江을 건너왔는데, 司馬睿의 세력이 미약한 것을 보고 周顗에게 이르기를 “나는 중원에 변고가 많으므로 이곳에 와서 일신의 안전을 바랐는데, 이와 같이 세력이 고립되고 약하니, 장차 어떻게 中原을 구제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얼마 후 王導를 만나서 함께 세상일을 논하고는 물러나와 주의에게 이르기를 “지금 막 管夷吾를 만나보았으니, 더 이상 근심할 것이 없다.”注+〈“向見管夷吾”는〉 王導를 〈桓公을 도와 霸者가 되게 한〉 管仲(管夷吾)에게 견준 것이다. 하였다.
名士들이 新亭에서 놀며 잔치를 하였는데,注+金陵覽古≫에 “新亭江寧縣 10리에 있으니, 長江 가에 임해 있다.” 하였다. 주의가 座中에서 한탄하기를 “풍경은 다르지 않으나 눈을 들어 바라봄에 황하가 장강으로 바뀌었구나.” 하고는 인하여 서로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注+(자리)는 徂臥이다. “江河之異”는 도성인 낙양에서는 대부분 黃河 가에서 노닐며 잔치하였는데, 新亭長江 가에 임해 있음을 말한 것이다.
왕도가 엄정하게 얼굴빛을 바꾸며 말하기를注+七小이다. “우리는 마땅히 황실을 위하여 함께 힘을 다해서 를 회복하여야 하는데,注+전국시대에 騶衍이 말하기를 “中國은 천하에서 바로 81 중에 그 1을 차지할 뿐이다. 중국을 이름하여 ‘赤縣神州’라 하니, 적현신주의 안에 본래 九州가 있는데, 임금이 차례한 九州가 이것이다.” 하였다. 어찌 나라 죄수가 되어 마주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가.” 하였다. 이에 여러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거두고 사과하였다.注+春秋左氏傳成公 9년에 “晉侯軍府를 관찰하다가 鍾儀를 보고 묻기를 ‘남쪽 지역의 을 쓰고 구속되어 있는 자가 누구인가?’ 하니, 有司가 대답하기를 ‘나라 사람이 바친 나라의 죄수입니다.’ 했다.” 하였다.
[] 陳頵(진균)이 王導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내었다. “中華가 기울고 피폐한 이유는 바로 인재를 선발하는 것이 마땅함을 잃어서 헛된 명성이 있는 자를 먼저 등용하고 실제의 일을 잘 처리하는 자를 뒤로 하여 실속이 없이 다투고 치달려 서로 인물을 천거하며,注+白望”은 헛된 명성이라는 말과 같다.
게다가 老莊의 풍속이 조정을 미혹시켜서 헛된 명성을 기르는 자를 高雅한 사람이라 하고 政事를 잘 다스리는 자를 속된 사람이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먼 곳을 다스리고자 한다면 먼저 가까운 데에서 시작하여야 하니, 이제 마땅히 다시 개혁해서 信賞必罰을 명확히 하여注+나라 董仲舒가 정사를 논하기를 “비유하건대 거문고와 비파를 반드시 줄을 풀어 다시 조율해야 비로소 탈 수 있는 것과 같다.” 하였다. 桐鄕에서 朱邑을 드러나게 하여야 하니,注+朱邑舒縣桐鄕 嗇夫가 되었는데, 청렴하고 공평하며 까다롭지 아니하여 백성을 사랑하고 이롭게 하는 정사를 행하였다. 이에 나라 宣帝가 그를 등용하여, 벼슬이 大司農에 이르렀다.
그런 뒤에야 大業을 이룰 수 있고 中興을 바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도는 그의 말을 따르지 못하였다.
[] 劉琨劉希를 보내어 中山에서 병력을 규합하게 하였는데, 王浚이 유희를 죽였다.
[] 劉琨이 사람들을 불러 회유하는 데에는 능숙하였으나 어루만지고 통솔하는 데에는 능숙하지 못하니, 하루 동안에 비록 귀의한 자가 수천 명이었으나 떠나가는 자도 계속 이어졌다.
유곤이 劉希를 보내어 中山에서 병력을 규합하게 하니, 幽州에서 관할하고 있는 代郡, 上谷, 廣寗의 백성들이 대부분 그에게 귀의해서 병력이 3만에 이르렀다.注+廣寗縣나라 때에는 上谷郡에 속하였고, 나라 武帝 太康 연간(280~289)에 나누어 廣寗郡을 세웠고, 나라 때에는 嬀州의 경계에 속하였다.
王浚이 이에 노하여 胡矩段疾陸眷을 보내어 함께 유희를 공격하게 해서 죽이고 대군, 상곡, 광녕 세 의 남녀를 위협하여 노략질하고서 떠나갔다.注+段疾陸眷段務勿塵의 아들이다.
[] 慕容廆鮮卑族素喜連木丸津를 격파하였다.
[] 遼東의 변방에 사는 鮮卑族素喜連木丸津이 요동의 여러 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의 군대를 여러 번 격파하였으나, 東夷校尉 封釋이 이들을 토벌하지 못하였다.
백성들 중에 생업을 잃고 慕容廆에게 귀의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모용외의 작은아들 慕容翰이 모용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注+晉書≫ 〈載記〉에 근거해보면, 慕容翰慕容皝에게 庶兄이 되고 모용황은 慕容廆의 셋째아들이니, 그렇다면 모용한은 작은아들이 아니다. “예로부터 훌륭한 일을 한 군주는 모두 天子를 높여 백성들의 바람을 따르고서 대업을 이루었습니다.
지금 소희연과 목환진이 끊임없이 포악하게 도둑질을 하니, 그들의 죄를 열거하여 토벌하는 것만 못합니다.
이렇게 하면 위로는 어지러운 요동을 다시 회복하고 아래로는 소희연과 목환진 두 를 병탄할 수가 있으니, 그리되면 우리의 忠義나라 조정에 드러나고 사사로운 이익이 우리나라로 돌아옵니다. 이는 霸王의 기반이 될 것입니다.”注+2素喜連木丸津을 이른다.
모용외가 웃으며 말하기를 “어린아이의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친단 말인가.” 하고는 마침내 소희연과 목환진을 공격할 적에 모용한을 선봉으로 삼아서 이들을 격파하여 참수하고, 소희연과 목환진 두 의 무리를 모두 병합하였다.
봉석이 병이 위독해지자, 손자인 封奕을 모용외에게 부탁하였다.
봉석이 하자 모용외가 봉혁을 불러 함께 말해보고는 매우 기뻐하여 말하기를 “기이한 선비이다.”라 하고 小都督으로 임용하였다.注+(기뻐하다)은 로 읽는다.
봉석의 아들 封悛(봉전)과 封抽에 달려왔는데, 모용외는 이들을 만나보고 말하기를 “이 집안사람들은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千斤의 거세한 황소이다.” 하였다.
봉석의 아들들은 길이 통하지 않아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모두 머물러 모용외에게 벼슬해서, 봉추는 長史가 되고 봉전은 參軍이 되었다.注+羽敏이니, 높은 곳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다. 居言이니, 거세한 황소이다. 千斤의 거세한 황소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것처럼 인간 세상에서 많이 얻을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一說에 “‘抎抎’은 강건하여 힘이 있는 모양이니, 은 바로 거세한 소로 강건하고 온순한데, 여기서는 다만 그 무겁고 큰 것만을 말했을 뿐이다.” 하였다.


역주
역주1 梓潼內史譙登死之 : “〈譙登이〉 원수의 손에 죽었는데, ‘死之’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초등의 의리를 인정한 것이다. 처음에 초등의 아버지가 成나라 태수에게 살해당했는데, 초등이 마침내 晉나라에 병력을 요청하여 태수를 죽이고 涪城을 점거하였다가, 이때 성이 함락되자 굽히지 않고 죽임을 당하였다. ≪資治通鑑綱目≫에서는 그의 의리를 인정하였으므로 특별히 ‘死之’라고 쓴 것이다.[死讐也 書死之 何 予義也 初登父爲成太守所害 登遂請兵於晉 殺守據涪 及是城陷 不屈見殺 綱目予義 故特書死之]” ≪書法≫
역주2 琅邪王睿逐揚州都督周馥 : “周馥은 황제가 임명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司馬睿라 하더라도 축출했다고 썼으니, ≪資治通鑑綱目≫을 편수한 것은 군주와 신하의 분별을 밝히기 위한 것일 뿐이다.[馥 帝命也 故雖睿書逐 綱目之修 君臣之分而已矣]” ≪書法≫
역주3 太傅越卒于項 : “이때에 司馬越이 石勒을 토벌하다가 卒하였는데 ‘군대에서 卒했다.’라고 쓰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사마월을 죄책한 것이다. 지난해에 사마월이 군대를 거느리고 석륵을 토벌할 적에 ‘次于項(項 지역에 주둔했다.)’라고 썼는데, 이때 5개월이 지났으나 일찍이 군대를 전진하지 않았고 ≪資治通鑑綱目≫에서 다시 ‘卒于項(項 지역에서 卒하였다.)’라고 썼으니, 사마월이 적을 두려워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용감히 전진하지 못한 것을 나타낸 것이다.[於是 越討石勒而卒 不書卒于師 何 罪越也 自往歲 率兵討勒 書次于項 於是五閱月矣 未嘗進兵 綱目復書卒于項 見越之畏敵 至死而不敢前也]” ≪書法≫
“晉나라의 혼란은 惠帝가 용렬하고 어리석은 데에서 근원하였고 요망한 황후(賈后)가 화를 부른 데에서 비롯되었고 諸王들이 서로 공격하는 데에서 이루어졌는데, 太傅 司馬越의 때에 이르러 또한 이미 지극하였다. 앞에서는 ‘漢나라(前趙)가 洛陽을 침략했다.’라고 썼으니 그렇다면 오랑캐가 이미 京師에 가까이 다가온 것이요, 뒤이어 ‘천하의 병사를 불러 들어와 구원하게 했다.’라고 썼으니 그렇다면 國勢가 이미 매우 위급한 것이요, 또 더구나 끝내 한 사람도 구원하러 온 자가 없었는데, 사마월은 이때에 근본인 도성을 지켜 호위할 마음이 전혀 없어서 마침내 군대를 거느리고 나갔으니, 이는 군주를 버려 적에게 준 것이다. 그러므로 ‘項 지역에 군대를 주둔했다.’라고 썼으니 그가 밖에 군대를 주둔하려는 뜻을 나타낸 것이요, ‘군대에서 卒하였다.’고 쓰지 않고 ‘項 지역에서 卒하였다.’라고 썼으니 그가 王事에 죽지 않으려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그렇다면 ≪資治通鑑綱目≫에서 사마월을 질책한 것이 어떠한가. 社稷이 폐허가 되고 中原이 도탄에 빠진 것은 진실로 백성들의 불행일 뿐이니, 사마월에게 무엇을 꾸짖을 것이 있겠는가.[晉室之亂 原於惠帝之庸愚 肇於孽后之唱禍 成於諸王之交攻 蓋至於太傅越之時 亦已極矣 前書漢寇洛陽 則是賊虜已逼京師 繼書召天下兵入援 則是國勢已甚危急 又況竟無一人至者 越於是時 曾無守衛根本之心 乃率兵而出 則是棄主與賊耳 故書次于項 則見其頓兵于外之意 不書卒于軍而書卒于項 則見其不沒於王事之意 然則綱目之所以罪越者 爲如何哉 社稷爲墟 中原塗炭 是固生靈之不幸耳 於越乎何誅]” ≪發明≫
역주4 漢石勒……殺之 : “石勒을 토벌한 것은 晉나라의 군대였는데 ‘司馬越의 군대’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추후에 사마월을 죄책한 것이다. 사마월에게는 적을 토벌할 뜻이 없었으니, 이 군대로는 자신을 호위했을 뿐이다. 王衍이 大臣으로서 사마월의 도당이 되어 나라를 그르쳤고, 석륵에게 사로잡히자 尊號를 칭할 것을 권하여 구차히 禍를 면하기를 바랐으니, 참으로 천하게 여길 만하다. 그의 관직인 太尉를 쓰지 않은 것은 그를 죄책한 것이다.[討勒 晉兵也 書越軍 何 追罪越也 越無討志 是軍也 自衛而已 衍爲大臣 黨越誤國 及爲勒所執 勸稱尊號 冀以苟免 可賤甚矣 不書太尉 罪之也]” ≪書法≫
“王衍은 풍류를 높이고 깨끗한 이름이 세상을 뒤덮었으며, 또 맨 먼저 교활한 토끼가 3개의 굴을 만든다는 계책을 내었는데, 이제 羯奴(石勒)에게 개, 돼지처럼 죽임을 당하였다. 그런데도 머리를 구부리고 애걸하기에 겨를이 없었으니, 한 시대의 인물이라는 것을 과연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는가. 그러나 襄陽王 司馬範이 의연하게 얼굴빛을 바로잡은 것에 대해서는 어찌하여 절개에 죽었다고 쓰지 않았는가. 司馬越이 천하를 패망하게 하고 혼란하게 할 적에 사마범 등이 그를 따라 도와서 황실을 망하게 하고 乘輿(황제)를 버렸다. 큰일이 이와 같았으니, 다른 것을 어찌 굳이 따질 것이 있겠는가. 살펴보건대 이번 걸음에 왕연과 사마범 이하로 여러 왕과 貴臣 중에 죽은 자가 매우 많았는데, ≪資治通鑑綱目≫에서 모두 생략하여 기록하지 않고, 겨우 ‘왕연 등을 사로잡아 죽였다.’라고 쓰고 또 그의 관직을 삭제해버렸으니, 그렇다면 그를 천시한 뜻을 알 만하다. 생략하여 기록하지 않은 것은 애당초 지나친 것이 아니다.[王衍風流相尙 淸名蓋世 且首爲三窟之計 今乃爲羯奴所殺 如斃犬豕 方且俯首乞憐之不暇 一代人物 果安在哉 然襄陽王範 毅然正色 何以不得書死節 司馬越敗亂天下 範等從而和之 斵喪帝室 委棄乘輿 大節若此 他何足數 按此行 自衍範而下諸王及貴臣 死者甚衆 綱目皆棄而不錄 僅書執衍等殺之 且削去其官 則其賤之之意 爲可知矣 略而不書 初非過也]” ≪發明≫
역주5 (硤)[峽] : 저본에는 ‘硤’으로 되어 있으나, ≪水經註≫에 의거하여 ‘峽’으로 바로잡았다.
역주6 (苟)[荀] : 저본에는 ‘苟’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綱目≫(≪朱子全書≫ 9, 上海古籍出版社)에 의거하여 ‘荀’으로 바로잡았다.
역주7 (來)[頭] : 저본에는 ‘來’로 되어 있으나, 문맥에 따라 ‘頭’로 바로잡았다.
역주8 (徒)[徙] : 저본에는 ‘徒’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徙’로 바로잡았다.
역주9 制命을……설치하였는데 : ≪資治通鑑≫에는 “承制署置官司”로 되어 있다.
역주10 告類 : 하늘에 제사하여 告由하는 예로, 특별히 황제가 즉위하거나 황태자를 세우는 등 중대한 일이 있을 때에 행하던 의식이다.
역주11 (邵)[劭] : 저본에는 ‘邵’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劭’로 바로잡았다.
역주12 (王)[左] : 저본에는 ‘王’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左’로 바로잡았다.
역주13 神州 : 중국의 美稱인 ‘赤縣神州’를 줄인 말인데, ≪史記≫ 〈孟子荀卿列傳〉에 “중국 이름을 적현신주라 하는데 적현신주의 안에 九州가 있으니, 夏나라 禹王이 만든 九州가 바로 이것이다.”라고 보인다.
역주14 密縣에서……발탁하고 : 後漢의 光武帝는 王莽을 멸하고서 漢나라를 중흥시키고 덕이 높은 사람에게 높은 관작으로 보답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맨 먼저 卓茂에게 太傅의 높은 벼슬을 주고 褒德侯에 봉하였다. 탁무는 南陽 사람으로 자가 子康이다. 前漢 元帝 때에 侍郞에 천거되었고, 密縣令이 되어서 선정을 베풀었다.
역주15 (弈)[奕] : 저본에는 ‘弈’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奕’으로 바로잡았다. 아래도 같다.

자치통감강목(13) 책은 2020.12.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19 By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