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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1)

자치통감강목(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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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寅年(234)
十二年이라
魏靑龍二年이요 吳嘉禾三年이라
春二月 丞相亮 伐魏하다
丞相亮 勸農講武하고 作木牛流馬하여 運米集斜谷口하고 治邸閣하여 息民休士하여 三年而後 用之注+木牛者, 方腹曲頭, 一腳四足, 頭入領中, 舌著於腹, 載多而行少, 宜可大用, 不可小使. 特行者數十里, 群行者二十里也. 曲者爲牛頭, 雙者爲牛腳, 橫者爲牛領, 轉者爲牛足, 覆者爲牛背, 方者爲牛腹, 垂者爲牛舌, 曲者爲牛肋, 刻者爲牛齒, 立者爲牛角, 細者爲牛鞅, 攝者爲牛鞦軸. 牛仰雙轅, 人行六尺, 牛行四步, 載一歲糧, 日行二十里, 而人不大勞. 流馬尺寸之數, 肋長三尺五寸, 廣三寸, 厚二寸二分, 左右同. 前軸孔, 分墨去頭四寸, 徑中二寸. 前腳孔, 分墨去前軸孔四寸五分, 廣一寸. 前杠孔, 分墨去前腳孔三寸七分, 孔長二寸 廣一寸. 後軸孔, 去前杠孔, 分墨一尺五分, 大小與前同. 後腳孔, 分墨去後軸孔三寸五分, 大小與前同. 後杠孔, 去後腳孔, 分墨二寸七分, 後載剋, 去後杠孔, 分墨四寸五分. 前杠, 長一尺八寸, 廣二寸, 厚一寸五分, 後杠與等. 板方, 囊二枚, 厚八分, 長二尺七寸, 高一尺六寸五分, 廣一尺六寸, 每枚, 受米二斛三斗. 從上杠孔, 去肋下七寸, 前後同. 上杠孔, 去下杠孔, 分墨一尺三寸, 孔長一寸五分, 廣七分, 八孔同. 前後四腳, 廣二寸, 厚一寸五分, 形制如象, 靬長四寸, 徑面四寸三分, 孔徑中二腳杠, 長二尺一寸, 廣二寸五分, 厚一寸四分, 同杠耳. 靬, 居言切.하다
至是 悉衆十萬하여 由斜谷伐魏할새 遣使約吳하여 同時大擧하다
三月 注+獻帝自禪位至卒, 凡十有四年, 年五十四.하다
魏主叡素服發喪하다 山陽 傳國하여 至晉永嘉中하여 乃爲胡寇所滅注+永嘉, 晉懷帝年號하니라
夏四月 魏大疫하고 崇華殿하다
◑丞相亮 進軍渭南하니 魏大將軍司馬懿 引兵拒守어늘 始分兵屯田하다
丞相諸葛亮 至郿하여 軍於渭水之南하다 司馬懿引軍渡渭하여 背水爲壘하여 以拒之러니
謂諸將曰 亮 若出武功하여 依山而東이면 誠爲可憂注+武功, 縣名, 屬右扶風.어니와 若西上五丈原이면 諸將 無事矣注+懿已料亮之必屯五丈原, 而力不能制, 姑爲此言, 以安諸將之心耳. 水經注 “五丈原, 在郿縣西, 渭水逕其北.” 又亮與步騭書曰 “原在武功西十里.”라하더니 果屯五丈原하다
郭淮曰 亮 若跨渭登原하여 連兵北山하여 隔絶隴道하고 搖蕩民夷하면 非國之利也니이다
懿乃使淮先據北原이러니 塹壘未成 漢兵 大至 淮逆擊却之하다
以前者數出 皆以運糧不繼하여 使己志不伸이라하여 乃分兵屯田하여 爲久駐之基하니
耕者雜於渭濵居民之間이로되 而百姓安堵하고 軍無私焉이러라
五月 吳主權 擊魏하니 秋七月 魏主叡 自將擊却之하다
吳主權 入居巢湖口하여 向合肥新城하니 衆號十萬注+居巢湖, 卽巢湖. 集覽 “巢湖在無爲軍巢縣東南, 周圍四百里. 與合肥‧舒城‧廬江‧巢縣四邑接境.” 新城, 卽滿寵所築新城也.이요
又遣陸遜, 諸葛瑾하여 入江夏, 沔口하여 向襄陽하고 孫韶, 張承 入淮하여 向廣陵, 淮陰注+承, 昭之子也.하다
魏滿寵 欲率兵救新城이어늘 將軍田豫曰 賊 欲質新城하여 以致大軍耳注+質, 音致.
宜聽使攻城하여 挫其銳氣하여 俟其疲怠然後 擊之 可大克也 若便進兵이면 適入其計矣리이다
散騎常侍劉劭曰 可先遣步騎數千하여 揚聲進道하고 引出賊後하여 擬其歸路하고 要其糧道하면 賊必震怖遁走하여 不戰自屈矣리이다
又欲拔新城守하여 致賊壽春이어늘 魏主叡不聽하고 曰 先帝東置合肥하고 南守襄陽하고 西固祁山하사 賊來 輒破於三城之下者 地有所必爭也注+合肥‧襄陽以備吳, 祁山以備蜀也.일새라
縱權攻新城이라도 必不能拔이니 勅諸將堅守하라 吾將自往攻之호리라 比至 度權已走矣리라
乃使秦朗督步騎二萬하여 助司馬懿拒漢하고 勅懿호되 但堅守하여 以挫其鋒하라 彼進不得志하고 退無與戰이라
久停則糧盡이요 虜略無所獲이면 則必走하리니 走而追之 全勝之道也라하고
乃御龍舟而東이러니 滿寵 募壯士하여 焚吳攻具하다 吳吏士多病하고 又聞叡至하고 遂退하다
陸遜 遣人奉表於權이러니 爲魏邏者所得하니 諸葛瑾 聞之하고 甚懼하여 與遜書하여 速其去러니
未答 方催人種葑豆하고 與諸將奕棊射戲如常注+葑, 音封, 菜也, 亦謂之蔓菁. 豆, 菽也. 奕, 音亦, 圍棊也.이라
來見遜한대 遜曰 今兵將意動注+謂敵旣知權還, 料遜兵當退, 已分守要害之處, 欲以遮截遜所部兵, 旣無進取之氣, 而有遮截之慮, 則其意恐動, 將至於或降或潰也.하니 且當自定以安之하고 施設變術然後 出耳 今若便退 賊謂吾怖라하여 而來相蹙하리니 必敗之勢也니라
乃密與瑾立計하여 令瑾督舟船하고 悉上兵馬하여 以向襄陽城하니 魏人 素憚遜名하여 遽還赴城이러라
便引船出하니 徐整部伍하여 張拓聲勢하고 步趨船하니 魏人 不敢逼注+張, 之亮切.이러라
行到白圍하여 託言往獵注+白圍, 蓋立圍屯於白河口, 因以爲名.하고 遣周峻等하여 擊江夏, 新市, 安陸, 石陽하여 斬獲千餘人而還注+新市‧安陸‧石陽三縣, 皆屬江夏郡.하다


甲寅年(234)
나라(蜀漢) 後主 建興 12년이다.
나라 明帝 曹叡 靑龍 2년이고, 나라 大帝 孫權 嘉禾 3년이다.
】 봄 2월에 丞相 諸葛亮나라를 정벌하였다.
】 처음에 丞相 諸葛亮이 농업을 권장하고 무예를 강습하고 木牛流馬를 만들어서 쌀을 운반하여 斜谷의 어귀로 집결하고 邸閣(창고의 이름)을 수리하여 백성들과 병사들을 휴식시키고는, 3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전쟁에 사용하였다.注+木牛는, 배 부분은 네모지고 머리는 굽게 만들었으며, 다리 하나에 네 개의 발이 있는데 머리는 목 속으로 들어가 있고 혀는 배에 붙어 있으니, 짐은 많이 실을 수 있으나 속도는 느리다.
諸葛亮이 木牛와 流馬를 만들다諸葛亮이 木牛와 流馬를 만들다
많은 짐을 싣기에는 좋고 적은 것을 사용하기에는 좋지 못하였다. 혼자 갈 때에는 하루에 수십 리를 가고 무리 지어 갈 때에는 20리를 간다. 굽어 있는 것은 목우의 머리가 되고, 한 쌍인 것은 목우의 다리가 되며, 가로로 된 것은 목우의 목이 되고, 회전하는 것은 목우의 발이 되며, 덮여 있는 것은 목우의 등이 되고, 네모진 것은 목우의 배가 되며, 드리워져 있는 것은 목우의 혀가 되고, 굽은 것은 목우의 갈빗대가 되며, 뾰족한 것은 목우의 이빨이 되고, 서 있는 것은 목우의 뿔이 되며, 가는 것은 목우의 고삐가 되고, 쥐는 것은 목우의 鞦軸(소의 꼬리에 거는 끈)이 된다. 를 가는데, 1년의 양식을 싣고 하루에 20리를 가니, 사람은 크게 수고롭지 않았다.
流馬는 치수가 다음과 같다. 갈빗대는 길이가 3 5, 너비가 3, 두께가 2 2으로 좌우가 똑같다. 앞 (수레바퀴의 한 가운데 끼는 굴대)의 구멍은 分墨(거리)이 머리까지 4, 지름이 2이다. 앞다리의 구멍은 분묵이 앞 의 구멍까지 4 5이며 너비는 1이다. 앞부분의 (가로대)의 구멍은 분묵이 앞다리의 구멍과 3 7이고 구멍의 크기가 2, 너비가 1이다. 뒷 의 구멍은 앞부분의 의 구멍과 분묵이 1 5이며 크기는 앞부분과 똑같다. 뒷다리의 구멍은 분묵이 뒷 의 구멍과는 3 5이며 크기는 앞부분과 똑같다. 뒷부분의 의 구멍은 뒷다리의 구멍과 분묵이 2 7이고, 뒷부분의 물건 싣는 곳에서 뒷부분의 의 구멍과는 분묵이 4 5이다. 앞부분의 은 길이가 1 8, 너비가 2, 두께가 1 5이다. 뒷부분의 도 이와 똑같다. 나무 적재함 2칸은 두께가 8, 길이가 2 7, 높이가 1 6 5, 너비가 1 6이니, 나무 적재함마다 쌀 2 3를 실을 수 있다. 뒷부분의 에 난 구멍에서 갈빗대 아래까지는 7이니, 앞뒤가 모두 똑같다. 윗부분의 의 구멍에서 아랫부분에 난 2개의 의 구멍까지는 분묵이 1 3이고 구멍의 길이는 1 5이며 너비는 7인데, 8개의 구멍이 똑같다. 앞뒤로 4개의 다리가 있는데 너비는 2, 두께는 1 5이니 그 모양은 코끼리와 같으며, 활집(전대)의 길이는 4이고 지름은 4 3이며 구멍의 지름에는 2개의 이 있는데 길이는 2 1, 너비는 2 5, 두께는 1 4이어서 과 같다. (流馬의 부속품)은 居言이다.
이때 10만 명의 병력을 총동원해서 斜谷을 경유하여 나라를 정벌할 적에 사신을 보내어 나라와 동시에 군대를 크게 일으키기로 약속하였다.
】 3월에 나라 山陽公( 獻帝)이 하였다.注+ 獻帝禪位한 뒤로부터 하기까지 모두 14년이니, 나이가 54세이다.
魏主 曹叡素服을 입고 을 발표하였다. 山陽公이 나라를 하여 나라 永嘉 연간에 이르러 마침내 오랑캐들에게 멸망을 당하였다.注+永嘉나라 懷帝의 연호이다.
】 여름 4월에 나라에 疫病이 크게 돌고, 崇華殿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丞相 諸葛亮渭水 남쪽으로 進軍하니, 나라 大將軍 司馬懿가 군대를 이끌고 굳게 수비하였다. 이에 제갈량이 비로소 군대를 나누어 屯田을 하였다.
丞相 諸葛亮郿縣에 이르러 渭水의 남쪽에 군대를 주둔하였다. 司馬懿가 군대를 이끌고 위수를 건너와서 강물을 등지고 堡壘를 만들어 막고는
장수들에게 말하기를 “제갈량이 만약 武功縣을 나와 산을 따라 동쪽으로 오면 진실로 걱정스럽지만,注+武功의 이름이니, 右扶風에 속하였다. 만약 서쪽으로 五丈原으로 올라온다면 장수들은 무사할 것이다.”注+司馬懿가 이미 諸葛亮이 틀림없이 五丈原에 군대를 주둔할 것이라고 짐작하였으나 힘으로 저지할 수 없기에 일부러 이런 말을 해서 장수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 것이다. ≪水經注≫에 “오장원은 郿縣의 서쪽에 있으니, 渭水가 그 북쪽을 지나간다.” 하였고, 또 제갈량이 步騭(보즐)에게 준 편지에 이르기를 “오장원은 武功縣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하였다. 하였는데, 제갈량이 과연 오장원에 주둔하였다.
郭淮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諸葛亮이 만약 渭水를 건너 北原(五丈原渭水 북쪽의 지명)으로 올라와서 北山에 군대를 연결하여 隴道를 차단하고 백성과 오랑캐들을 동요시킨다면, 나라의 이로움이 아닙니다.”
司馬懿가 이에 곽회를 보내 북원을 먼저 점거하게 하였는데, 참호와 보루가 완성되기 전에 蜀漢의 군대가 크게 몰려오니, 곽회가 맞이하여 공격해서 물리쳤다.
諸葛亮은 예전에 여러 번 출병했을 적에 모두 군량의 수송이 계속되지 못하여 자신의 뜻을 펴지 못했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군대를 나누어 屯田을 해서 오랫동안 주둔할 기반으로 삼았다.
밭을 경작하는 병사들이 渭水 가에 거주하는 백성들 사이에 섞여 지냈으나, 백성들은 安堵하고 병사들은 사사로이 침탈하는 일이 없었다.
】 5월에 吳主 孫權나라를 공격하니, 가을 7월에 魏主 曹叡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공격하여 물리쳤다.
吳王 孫權居巢湖의 어귀로 쳐들어가서 合肥新城으로 향하였는데, 10만 대군이라고 칭하였다.注+居巢湖는 바로 巢湖이다. ≪資治通鑑綱目集覽≫에 “巢湖無爲軍 巢縣 동남쪽에 있으니, 周圍가 4백 리이다. 合肥, 舒城, 廬江, 巢縣과 접경이 되었다.” 하였다. 新城은 바로 滿寵이 축조한 新城이다.
陸遜諸葛瑾江夏沔口로 들여보내 襄陽으로 향하게 하고, 孫韶張承淮水로 들여보내 廣陵淮陰으로 향하게 하였다.注+張承張昭의 아들이다.
나라 滿寵이 군대를 거느리고 新城을 구원하고자 하였는데, 장군 田豫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은 신성을 담보로 하여 우리의 대군을 오게 하려는 것입니다.注+(담보)는 음이 이다.
마땅히 적이 을 공격하도록 내버려두어서 적의 銳氣를 꺾어 피로하고 태만하기를 기다려야 하니, 그런 뒤에 공격하면 大勝을 거둘 수 있습니다. 만약 곧바로 진군을 하면 다만 그들의 계책에 빠져들 뿐입니다.”
散騎常侍 劉劭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먼저 보병과 기병 수천 명을 내보내어서 큰길로 출동한다고 소문을 퍼뜨리고는 군대를 이끌고 적의 후미로 나아가서 적의 돌아갈 길을 미리 헤아리고 적의 군량 수송로를 차단하면 적이 반드시 두려워하여 도망가서 싸우지 않아도 스스로 굴복할 것입니다.”
滿寵이 또 新城의 수비군을 뽑아 壽春으로 불러들이고자 하자, 魏主 曹叡가 듣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先帝가 동쪽으로 合肥를 설치하고 남쪽으로 襄陽을 지키고 서쪽으로 祁山을 견고히 수비하시어 적이 쳐들어올 적에 번번이 세 의 아래에서 격파했던 것은, 이 지역은 반드시 다툴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注+合肥襄陽으로써 나라를 대비하고, 祁山으로써 蜀漢을 대비한 것이다.
비록 孫權이 신성을 공격하더라도 반드시 함락시키지 못할 것이니, 장수들에게 명하여 견고히 수비하게 하라, 내 장차 직접 가서 공격하겠다. 내가 도착하게 되면 짐작컨대 손권이 이미 달아났을 것이다.”
曹叡는 마침내 秦朗으로 하여금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감독하여 司馬懿를 도와 蜀漢을 막게 하고, 사마의에게 명하기를 “다만 굳게 지켜서 그 銳鋒을 꺾도록 하라. 저들이 전진하여도 뜻을 얻지 못하고 후퇴하여도 더불어 싸울 상대가 없다.
오래 머물 경우 군량이 다하고 노략질하여도 얻을 것이 없게 되면 반드시 달아날 것이다. 적이 달아날 때 추격하는 것이 바로 완전히 승리하는 방도이다.”
조예는 마침내 龍舟를 타고 동쪽으로 진출하였는데, 滿寵壯士를 모집하여 吳軍의 공격하는 기구들을 불태웠다. 나라는 관리와 병사들 중에 병자가 많았고 또 조예가 온다는 말을 듣고는 마침내 후퇴하였다.
陸遜이 사람을 보내어 孫權에게 表文을 올렸는데 나라의 정탐하는 자에게 표문을 빼앗겼다. 諸葛瑾은 이 말을 듣고 매우 두려워해서 육손에게 편지를 보내어 속히 떠날 것을 권하였다.
육손은 답하지 않고 막 병사들을 재촉하여 무와 콩을 심고 장수들과 평상시처럼 바둑을 두고 활쏘기 놀이를 하였다.注+은 음이 으로 채소이니, 蔓菁이라고도 한다. (콩)는 이다. 은 음이 이니, 바둑알로 에워싸는 것이다.
제갈근이 육손을 만나러 오자, 육손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장수와 병사들의 마음이 동요하려 하니,注+〈“今兵將意動”은〉 이 이미 孫權이 돌아간 것을 알고 陸遜의 군대가 마땅히 후퇴할 것이라고 헤아리면, 이미 要害處를 나누어 지켜서 육손이 거느린 군대를 차단하고자 할 것이니, 이미 進取할 기세가 없는데 차단을 당할 우려가 있으면 장수와 병사들의 마음이 두려워하고 동요되어 장차 혹 항복하거나 혹 궤멸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우선 직접 안정시켜 그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변통하는 방법을 시행한 뒤에 撤軍할 것입니다. 만약 지금 곧바로 후퇴하면 적들은 내가 두려워한다고 생각하고 쳐들어와서 우리를 압박할 것이니, 이는 반드시 패하는 형세입니다.”
陸遜은 마침내 은밀히 諸葛瑾과 계책을 세워 제갈근으로 하여금 선박을 감독하게 하고, 자신은 군대와 말을 모두 출동시켜 위로 襄陽城을 향하니, 나라 사람들은 평소 육손의 명성을 두려워하여 급히 돌아가 양양성으로 달려갔다.
제갈근이 곧 선박을 이끌고 나오자, 육손이 서서히 부대를 정돈하여 聲勢를 키우고 빠른 걸음으로 배에 오르니, 나라 사람들이 감히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였다.注+(키우다)은 之亮이다.
육손은 행군하여 白圍에 이르러서 사냥하러 간다고 칭탁하고는注+白圍는 포위하는 진영을 白河口에 세우고는 이로 인하여 이름한 것이다. 周峻 등을 보내어 江夏新市, 安陸石陽을 공격하게 해서 천여 명을 참수하거나 사로잡고서 돌아왔다.注+新市, 安陸, 石陽은 모두 江夏郡에 속하였다.


역주
역주1 木牛는……같다 : 이 내용은 ≪三國志≫ 〈蜀書 諸葛亮傳〉과 ≪資治通鑑≫ 魏 明帝 靑龍 원년 조와 ≪通鑑節要≫에 각각 실려 있는데, 글자에 異同이 있고 치수도 약간씩 다르며 내용 역시 자세히 알 수 없다.
역주2 : 길이를 재는 단위로, 시대별로 차이가 있어서 周代에는 8尺, 秦代에는 6尺, 唐代 이후에는 營造尺(목수가 工事에 사용하던 자)으로 5尺을 1步라고 하였다.
역주3 魏山陽公卒 : “山陽公이 스스로 폐위된 지 이때 15년이 되었다. 이때에 ‘卒’이라고 쓰고 ‘魏나라 山陽公’이라고 쓴 것은 魏나라가 厚德함을 보존한 것을 찬미한 것이다. 陳留王(魏나라 曹奐)이 卒했을 때에 姓名을 썼는데 산양공은 어찌하여 성명을 쓰지 않았는가. 漢나라 황제이기 때문에 차마 쓰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安樂公(蜀漢 劉禪)은 황제가 아닌가. 안락공은 세대가 달라서 漢나라에 비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산양공은 성명을 쓰지 않았고 唐나라 酅公도 성명을 쓰지 않은 것이다. 魏나라 산양공이 15년 만에 卒한 것을 시작으로 그 뒤 晉나라 안락공 劉禪이 8년 만에 卒하였고, 歸命侯 孫皓가 4년 만에 卒하였고, 陳留王 曹奐이 38년 만에 卒하였으니, 이는 魏나라가 啓導를 잘한 것이다. 산양공은 나라를 傳하여 晉나라 永嘉 연간에 이르러 비로소 오랑캐에게 멸망당하였으니, 魏나라는 前代보다 후덕하다고 이를 만하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나라를 멸망한 군주에게 ‘卒’이라고 쓴 것이 6번이요(山陽公, 晉나라 安樂公, 歸命侯, 陳留王, 陳나라 陳叔寶, 後唐 楊溥), ‘薨’이라고 쓴 것이 1번이다(唐나라 酅公).[山陽公自廢 至是十五年矣 於是書卒 書魏山陽公 美存厚也 陳留卒 書姓名 山陽則曷爲不書 漢帝故 不忍書也 然則安樂公 非帝乎 安樂異世 非漢比也 是故山陽公不書姓名 唐酅公不書姓名 自魏山陽公十五年卒 其後晉安樂公劉禪八年卒 歸命侯孫皓四年卒 陳留王曹奐三十八年卒 魏啓之也 山陽傳國 至晉永嘉 始爲胡寇所滅 魏於前代 可謂厚矣 終綱目 滅國之君書卒六(山陽 晉安樂 歸命 陳留 陳叔寶 後唐楊溥) 書薨一(唐酅公)]” ≪書法≫

자치통감강목(11) 책은 2020.12.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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