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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7)

자치통감강목(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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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年이라
宋高祖武帝劉裕永初元年이요 魏太宗明元帝拓跋嗣泰常五年이라
◑西秦文昭王乞伏熾磐建弘元年이요 夏世祖赫連勃勃眞興二年이요 燕太祖馮跋太平十一年이요 北涼武宣王沮渠蒙遜玄始八年이요 西涼公李恂永建元年이라
◑是歲 晉亡宋代하니 凡七國이라
宋王裕欲受禪而難於發言하여 乃集朝臣宴飲注+此宋朝之臣也.하고 從容言曰
桓玄簒位 鼎命已移어늘 我唱義興復하고 平定四海하여 功成業著 遂荷九錫이러니
今年將衰暮 崇極如此하니 物忌盛滿이라 非可久安이니 今欲奉還爵位하고 歸老京師하노라 群臣莫喻其意러니
日晚坐散 中書令傅亮 乃悟하고 叩扉請見曰 臣暫宜還都로다 裕解其意하고 無復他言이러니
亮出見長星竟天하고 拊髀歎曰 我常不信天文이러니 今始驗矣注+長星所以除舊布新, 故云然.로라
亮至建康하여 四月 徴裕入輔하니 裕留子義康鎭壽陽하고 以參軍劉湛爲長史하여 決府事하다
湛自幼年으로 即有宰物之志하여 常自比管葛하고 博涉書史호되 不爲文章하고 不喜談議하니 裕甚重之러라
六月 裕至建康하니 亮具詔草하여 使帝書之하니 帝欣然操筆하고 謂左右曰
桓玄之時 晉氏已無天下러니 重爲劉公所延하여 將二十載 今日之事 本所甘心注+重, 直龍切.이라하고 遂書赤紙爲詔하고
遜于琅邪第하니 百官拜辭할새 秘書監徐廣流涕哀慟注+廣, 邈之弟也.이러라
裕爲壇於南郊하고 即位 廣又悲感流涕하니 侍中謝晦謂之曰 徐公得無小過 廣曰 君爲宋朝佐命이요 身是晉室遺老 悲歡之事 固不可同이니라
宋主臨太極殿하여 大赦改元하다 其犯鄉論清議 一皆蕩滌하여 與之更始注+犯鄕論淸議, 蓋得罪於名敎者.하다
奉晉恭帝爲零陵王하여 即宮于故秣陵縣하고 使將軍劉遵考將兵防衛하다
裴子野曰注+子野, 齊武帝時人. 宋元嘉中, 曾祖松之受詔, 修宋史未成而卒. 齊永明末, 子野撰宋略二十卷. 昔重華受終 四凶流放하고 武王克殷 頑民遷洛하니 天下之惡一也어늘 鄉論清議 除之過矣로다
宋尊王太后爲皇太后하다
宋主事蕭太后素謹이러니 及即位 春秋已高로되 每旦入朝 未嘗失時刻이러라
宋改晉封爵하고 封拜功臣子弟有差하다
宋以晉氏封爵으로 當隨運改라하고 獨置始興廬陵始安長沙康樂五公하고 奉王道謝安溫嶠陶侃謝玄之祀注+始興․廬陵․始安․長沙皆郡公, 獨康樂, 縣公耳. 據南史, 降始興郡公爲華容縣公, 廬陵公爲柴桑縣公, 始安公爲荔浦縣侯, 長沙公爲醴陵縣侯.하다
以道憐爲太尉하여 封長沙王하고 徐羨之等 增位進爵 各有差하다
宋交州刺史杜慧度擊林邑하여 大破降之注+林邑屢爲寇, 故慧度擊之.하다
慧度爲政纖密하여 一如治家하니 吏民畏而愛之 城門夜開하고 道不拾遺러라
北涼王蒙遜 誘西涼公歆與戰殺之하고 遂滅西涼하다
北涼王蒙遜 欲伐西涼할새 先引兵攻秦浩亹이라가 旣至 潜師還屯川巖이러니 涼公歆 欲乘虛襲張掖하니 宋繇張體順切諫不聽이어늘
太后尹氏謂曰 汝新造之國 地狹民希하여 自守猶懼不足이어든 何暇伐人이리오 先王臨終 殷勤戒汝하여 深慎用兵하라하니 蒙遜非汝之敵이라
汝國雖小 足爲善政하니 修德養民하여 靜以待之 彼若昬暴 民將歸汝 若其休明이면 汝將事之 豈得輕爲擧動하여 僥冀非望注+休明, 謂有休美無昏德也. 僥, 幸也. 冀, 望也.이리오
以吾觀之컨대 非但喪師 殆將亡國일까하노라 亦不聽하니 繇歎曰 大事去矣로다
歆將步騎三萬東出하니 蒙遜聞之曰 歆已入吾術中이로다 然聞吾旋師 必不敢前이리라
乃露布西境하여호되 已克浩亹하고 將進攻黃谷注+此露布非必建之漆竿, 如魏․晉告捷之制, 但露檄布言其事耳.이라하니 歆聞之喜하여 進入都瀆澗이러니
蒙遜引兵擊之하여 戰於懷城한대 歆大敗하다
或勸歆還保酒泉한대 歆曰 吾違老母之言하여 以取敗하니 不殺此胡 何面目復見我母리오 遂勒兵戰於蓼泉이라가 爲蒙遜所殺注+蓼泉, 地名. 新唐書地理志 “甘州張掖郡西北百九十里, 有祁連山, 山北有建康軍, 軍西百二十里, 有蓼泉守捉城.”하다
歆弟酒泉太守翻敦煌太守恂 奔北山이러라
蒙遜入酒泉하여 禁侵掠하니 士民安堵러라 以宋繇爲吏部郎中하여 委之選擧하고 涼舊臣有才望者 咸禮而用之하고
以其子牧犍爲酒泉太守하고 索元緒行敦煌太守注+元緒, 嗣之子也.하다
蒙遜還姑臧하여 見尹氏而勞之하니 尹氏曰 吾老婦人이라 國亡家破하니 豈復惜生하여 爲人臣妾이리오 惟速死爲幸耳라하다
蒙遜嘉而赦之하고 娶其女爲牧犍婦하다
◑冬 涼李恂入敦煌하여 稱刺史하다
恂在敦煌 有惠政이러니 索元緒麤險好殺하여 大失人和 郡人宋承張弘密信招恂하니
恂帥數十騎入敦煌한대 元緒東奔涼興注+涼興郡, 在唐瓜州常樂縣界.이어늘 承等推恂爲刺史하니 蒙遜遣世子政德攻之하다


[綱] 晉나라 恭皇帝 元熙 2년이다.
[目] 宋나라 高祖 武帝 劉裕 永初 원년이고, 北魏 太宗 明元帝 拓跋嗣 泰常 5년이다.
西秦 文昭王 乞伏熾磐 建弘 원년이고, 夏나라 世祖 赫連勃勃 眞興 2년이며, 北燕 太祖 馮跋 太平 11년이고, 北涼 武宣王 沮渠蒙遜 玄始 8년이며, 西涼公 李恂 永建 원년이다.
이해에 晉나라가 망하고 宋나라가 대신하니, 모두 일곱 나라이다.
[綱] 여름 4월에 長星(彗星)이 나와 양쪽 하늘에 닿았다.
6월에 宋王 劉裕가 建康으로 돌아와 皇帝라 칭하고, 廢主(恭帝)를 零陵王으로 삼아 병사들에게 지키도록 하였다.
[目] 宋王 劉裕가 禪讓을 받으려고 하였으나, 말을 꺼내기가 어려워 마침내 조정의 신하를注+① 여기의 朝臣은 宋나라 조정의 신하이다. 모아 잔치를 열고 술을 마시며 조용히 말하기를
宋 武帝宋 武帝
국가의 운명은 이미 옮겨졌다.나는 大義를 주창하여 황실을 부흥시키고 四海를 평정하여 공로가 이루어지고 업적이 드러나 마침내 九錫을 받았다.
지금 나이가 들어 쇠약해지려는 때에 이처럼 매우 높아졌으니, 만물은 꽉 차는 것을 꺼리기 때문에 오래도록 태평할 수가 없는 것이다.지금 작위를 도로 돌려주고 서울로 돌아가서 노년을 보내려고 한다.”라고 하였다. 여러 신하들은 그 뜻을 깨닫지 못하였다.
날이 저물어 자리가 파하자 中書令 傅亮이 마침내 깨닫고는 문을 두드리며 뵙기를 청하여 말하기를 “臣이 잠시 도읍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라고 하니, 유유는 그 뜻을 알아차리고 더 이상 다른 말이 없었다.
부량이 나와서 長星의 길이가 양쪽 하늘에 닿은 것을 보고 허벅지를 치고 한탄하며 말하기를 “나는 늘 천문을 믿지 않았는데, 이제야 비로소 징험하였다.”注+② 〈“我常不信天文 今始驗矣”는〉 長星은 옛것을 제거하고 새것을 펼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目] 傅亮이 建康에 도착하였다. 4월에 〈晉 恭帝가〉 劉裕를 불러 조정에 들어와 보필하게 하였다. 유유가 아들 劉義康을 남겨 壽陽에 진수하게 하고 을 결정하게 하였다.
유담은 어려서부터 정사하는 데 뜻을 두어서 항상 자신을 管仲․諸葛亮에 견주었고, 널리 典籍을 섭렵하였으나 문장을 짓지 않고 談論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유유가 그를 매우 중시하였다.
[目] 6월에 劉裕가 建康에 도착하였다. 傅亮이 詔書의 초안을 갖추어 황제에게 쓰도록 하였다. 황제가 기쁘게 붓을 잡고 측근들에게 말하기를
“桓玄이 있을 때에 晉나라는 이미 천하를 소유하지 못하였는데注+① 重(거듭)은 直龍의 이다. 거듭 劉公에게 연장을 받아 거의 20년이 되었으니, 오늘의 일은 본래 마음에 달갑게 여기던 일이다.”라고 하고, 마침내 붉은 종이에 써서 조서를 작성하였다.
그리고 琅邪(낭야)에 있는 저택으로 물러나니, 모든 관리가 절하고 인사를 할 때에 秘書監 徐廣이注+② 徐廣은 의 아우이다.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하였다.
[目] 劉裕가 南郊에 壇을 만들고 황제에 즉위하자 徐廣이 또 슬픔에 눈물을 흘리니 侍中 謝晦가 그에게 말하기를 “徐公께서 조금 지나치지 않습니까?”라고 하니, 서광이 말하기를 “그대는 宋나라의 開國功臣이고, 이 몸은 晉나라의 遺老이니, 슬퍼하고 기뻐하는 일이 진실로 같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宋主(劉裕)가 太極殿에 나아가 크게 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고쳤다. 鄉論과 清議를 저촉한 사람도注+① “犯鄕論淸議”는 名教(儒敎)에 죄를 지은 것이다. 한결같이 모두 罪名을 씻어주어 새롭게 시작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晉나라 恭帝를 받들어 零陵王으로 삼아 옛 秣陵縣의 궁궐로 나아가게 하고 장군 劉遵考를 시켜서 군사를 거느리고 지키도록 하였다.
[目] 裵子野가注+① 裵子野는 南朝 齊 武帝 때 사람이다. 宋나라 元嘉 연간에 曾祖 裵松이 조서를 받고 ≪宋史≫를 찬수하다가 완성하지 못하고 卒하였다. 南齊 永明 말에 배자야가 ≪宋略≫ 20권을 찬수하였다. 말하였다. “옛날에 천하에 악한 자는 모두 마찬가지인데, 鄉論과 清議를 저촉한 죄를 없애준 것은 지나치다.”
[綱] 宋나라가 王太后를 높여 皇太后로 삼았다.
[目] 평소 宋主가 蕭太后를 섬길 적에 〈행실을〉 삼갔는데, 즉위하였을 때에 자신의 나이가 이미 많았지만 매일 아침 太后를 문안할 적에 시각을 어긴 적이 없었다.
[綱] 宋나라가 晉나라의 封爵을 고치고, 功臣들과 〈황제의〉 子弟들에게 차등에 따라 封爵을 내렸다.
[目] 宋나라가 晉나라의 封爵을 국운에 따라 고쳐야 한다고 하고, 오직 注+① 始興․廬陵․始安․長沙는 모두 郡公이고 오직 康樂은 縣公이다. ≪南史≫에 의거하면 始興郡公을 강등시켜 華容縣公으로 삼고, 廬陵公을 강등시켜 柴桑縣公으로 삼았으며, 始安公을 강등시켜 荔浦縣侯로 삼고, 長沙公을 강등시켜 醴陵縣侯로 삼았다.
劉道憐을 太尉로 삼아 長沙王에 봉하고, 徐羨之 등은 각기 차등에 따라 지위를 더하고 작위를 올려주었다.
[綱] 가을에 宋나라 交州刺史 杜慧度가 林邑을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항복시켰다.注+① 林邑이 자주 침입하였기 때문에 杜慧度가 공격한 것이다.
[目] 杜慧度가 정사를 하는 데 치밀하여 집안을 다스리는 것과 같이 하니 관리와 백성들이 두려워하면서 아꼈다. 밤에도 城門을 열어두었고 길에서는 백성들이 떨어진 물건을 줍지 않았다.
[綱] 北涼王 沮渠蒙遜이 西涼公 李歆을 유인하여 싸워서 그를 죽이고 마침내 西涼을 멸망시켰다.
[目] 北涼王 沮渠蒙遜이 西涼을 정벌하려 할 적에 먼저 군사를 거느리고 西秦의 浩亹(고문)을 공격하려 하였는데, 고문에 도착하고 나서는 몰래 군사를 되돌려 川巖으로 돌아와 주둔하였다. 西涼公 李歆이 빈틈을 타고 張掖을 습격하려고 하니, 宋繇․張體順이 간절히 간언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그러자 太后 尹氏가 말하기를 “새로 건국된 그대의 나라는 땅이 좁고 백성이 드물어서 스스로 지키기에 오히려 충분하지 못할까 두려운데, 어느 겨를에 남을 공격하겠는가. 선왕(李暠)께서 임종할 때 간절하게 그대에게 훈계하기를 ‘군대를 출동하는 일을 매우 삼가라.’라고 하였다. 저거몽손은 그대가 맞설 상대가 아니다.
그대의 나라는 비록 작지만 충분히 선한 정치를 시행할 만하니, 덕을 닦고 백성을 양성하여 조용히 기다려야 한다.그리하여 그가 만약 어리석고 사나우면 백성들은 그대에게 귀의할 것이고, 만약 그가 훌륭하고 밝게 한다면 그대는 장차 그를 섬기면 될 것이니, 어찌 경솔히 거동을 하여 바라지 않아야 할 것을 요행으로 바라는 것인가.注+① “休明”은 아름다워서 어두운 덕이 없음을 말한다. 僥는 요행이라는 뜻이다. 冀는 바란다는 뜻이다.
내가 보건대, 군사를 잃을 뿐만 아니라 거의 나라를 망치게 될 것이다.”라고 하니, 역시 따르지 않았다. 송요가 말하기를 “큰일이 틀어져버렸구나.”라고 하였다.
[目] 李歆이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나갔다. 沮渠蒙遜이 그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이흠이 이미 나의 계략 안으로 들어왔구나. 그러나 내가 군대를 돌렸다는 소문을 들으면 반드시 감히 앞으로 나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고,
마침내 서쪽 변경 지역에서 露布로注+① 여기의 露布는 반드시 〈그 내용을 帛書에 써서〉 옻칠한 장대 위에 건 것이 아니라, 魏나라와 晉나라에서 捷報를 문서로 알리는 제도처럼 다만 격문을 드러내어 그 일을 널리 알린 것일 뿐이다. 이르기를 “이미 浩亹(고문)에서 승리하였고, 장차 黃谷으로 진격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흠은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여 都瀆澗으로 진입하였다.
저거몽손이 군사를 거느리고서 그를 공격하여 懷城에서 싸웠는데, 이흠이 대패하였다.
어떤 사람이 이흠에게 돌아가서 酒泉을 지키도록 권하였는데, 이흠이 말하기를 “나는 老母의 말씀을 어겨서 패배를 당하였으니, 이 오랑캐를 죽이지 않으면 무슨 면목으로 다시 우리 어머니를 뵙겠는가.”라고 하고, 드디어 군사를 정비하여 蓼泉에서注+② 蓼泉은 地名이다. ≪新唐書≫ 〈地理志〉에 “甘州 張掖郡 서북쪽 190리에 祁連山이 있고, 산의 북쪽에 建康軍이 있고, 建康軍 서쪽 120리에 蓼泉 이 있다.”라고 하였다. 싸우다가 저거몽손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흠의 동생 酒泉太守 李翻과 敦煌太守 李恂은 北山으로 달아났다.
[目] 沮渠蒙遜이 酒泉에 들어가서 노략질을 금지시키니, 병사와 백성들이 편안해 하였다. 宋繇를 吏部郎中으로 삼아 그에게 인물의 선발을 맡기고, 西涼의 옛 신하 중에 재주와 명망이 있는 사람을 모두 예우하여 채용하였다.
자신의 아들 沮渠牧犍을 酒泉太守로 삼고, 索元緒(삭원서)에게注+① 索元緒는 索嗣의 아들이다. 敦煌太守를 대행하도록 하였다.
저거몽손이 姑臧으로 돌아가서 尹氏를 보고 위로하자, 윤씨가 말하기를 “나는 늙은 부녀자라 나라가 망하고 가정은 파괴되었으니, 어찌 다시 남은 삶을 아까워하여 남의 신첩이 될 수 있겠는가. 오직 빨리 죽는 것을 다행으로 여길 뿐이다.”라고 하였다.
저거몽손이 가상히 여겨 그녀를 풀어주고, 그녀의 딸을 맞이하여 저거목건의 아내로 삼도록 하였다.
[綱] 8월에 宋나라가 아들 劉義符를 세워 皇太子로 삼았다.
[綱] 宋나라가 晉나라의 여러 陵墓를 위해서 守衛를 두었다.
[綱] 겨울에 西涼의 李恂이 敦煌에 들어가서 刺史라 칭하였다.
[目] 李恂이 敦煌太守로 있을 때에 은혜로운 정사를 펼쳤는데, 索元緒는 포학하고 음험하며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여 크게 인심을 잃었다. 敦煌郡 사람 宋承․張弘이 은밀하게 편지를 보내 이순을 불렀다.
이순이 기병 수십 명을 거느리고 돈황군에 들어가자 삭원서가 동쪽을 향해 涼興으로注+① 涼興郡은 唐나라 때 瓜州 常樂縣의 경계에 있다. 도망하였는데, 송승 등이 이순을 추대하여 刺史로 삼았다. 沮渠蒙遜이 世子 沮渠政德을 보내 돈황군을 공격하였다,


역주
역주1 長星出竟天……以兵守之 : “‘長星’을 기록한 것이 많으나 ‘竟天’이라고 기록한 것은 아직 없었으니, 長星이 양쪽 하늘에 닿은 것은 큰 변고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長星’을 기록한 것이 여섯 번인데(漢나라 文帝 8년(B.C.172)에 자세하다.) ‘竟天’을 기록한 것은 한 번뿐이다.[書長星多矣 未有書竟天者 長星竟天 大變也 終綱目 書長星六(詳漢文帝八年) 而竟天者一而已矣]” ≪書法≫書法은 ‘筆法’이란 말과 같다. 朱子는 ≪자치통감강목≫을 편찬할 적에 孔子의 ≪春秋≫ 筆法을 따라 綱과 目으로 나누었는바, 綱은 ≪春秋≫의 經文을, 目은 ≪春秋左氏傳≫의 傳文을 따랐다. ≪資治通鑑綱目≫의 筆法을 밝힌 것으로는 劉友益(宋)의 ≪綱目書法≫, 尹起莘(宋)의 ≪綱目發明≫이 그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두 책은 현재 淸나라 聖祖(康熙帝)가 엮은 ≪御批資治通鑑綱目≫에 모두 수록되어 있다. 이 필법은 綱에 주안점이 맞춰져 있는데, 우리나라 학자들이 특별히 이 ≪자치통감강목≫을 愛讀한 이유는 바로 이 필법에 있다. ≪어비자치통감강목≫에는 이외에도 汪克寬(元)의 ≪綱目凡例考異≫ 등 많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으나, 본서에서 다 소개하지 못하고 ≪강목서법≫과 ≪강목발명≫의 중요한 것만을 발췌하여 수록하였다. 또한 陳濟(明)의 ≪資治通鑑綱目集覽正誤≫를 인용하여 오류를 바로잡기도 하였다. 본고에서는 각각 ≪書法≫, ≪發明≫, ≪正誤≫로 요약하여 표기하였다.“‘병사들에게 지키도록 하였다.’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宋나라를 심하게 여긴 것이다. 흥망의 즘에 晉나라 이전에는 오히려 〈前朝의 황제에게〉 후덕하게 대하여 魏나라의 山陽公(後漢 獻帝)과 晉나라의 陳留王(魏 元帝)은 모두 잘 살다가 죽었고, 비록 王莽 때 定安公(漢 孺子 劉嬰)의 경우에도 감히 죽이지 못했다. 그런데 宋나라는 병사들에게 지키도록 하고 끝내 시해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 이후로는 廢主 중에 시해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宋나라가 그 길을 열어준 것이다. 뒷날 齊나라가 汝陰王(宋 順帝)을 시해하고 또 그 족속을 멸하였으니, 다시 무엇을 괴이하게 여길 것인가. ≪자치통감강목≫이 끝날 때까지 廢主와 廢帝를 기록한 것이 34번인데, 晉나라 이전에 ‘廢’를 기록한 것이 11번이고, 弑殺을 당한 것이 2번이며, 自殺한 것이 1번이요, 宋나라 이후로 ‘廢’를 기록한 것이 23번이고, 弑殺을 당한 것이 18번이니, 風俗의 각박함은 유래가 있는 것이다.[◯以兵守之 何 甚宋也 廢興之際 自晉以前 猶厚也 魏之山陽 晉之陳留 皆以善終 雖莽於定安不敢殺也 宋則以兵守之 卒至行弑 自是以後 廢主無不弑者 宋啓之也 他日齊弑汝陰 且滅其族 復何恠哉 終綱目 書廢主廢帝者三十四 晉以前書廢十一 而遇弑殺者二 自殺者一 宋以後書廢二十三 而遇弑殺者十有八 風俗之薄 有自來矣]” ≪書法≫“曹操와 曹丕가 漢나라를 찬탈하고 司馬懿 父子가 이어서 〈魏나라를〉 찬탈을 한 뒤로 劉裕에 이르러서는 더욱 극심해졌다. 그러므로 山陽公과 陳留王은 비록 폐위되어 쫓겨난 이후에도 여전히 여유롭게 천수를 누릴 수 있었으나, 零陵王의 경우에는 유유가 너무 급박하게 하였다. ‘병사들에게 지키도록 하였다.’고 특별히 册에 기록하였으니 世道가 더욱 실추된 것이다. 아! 두려워할 만하구나.[自操丕簒漢 司馬懿父子踵而行之 至劉裕 又益甚焉 故山陽陳留 雖已廢放 猶得以優游卒歳 而零陵則裕之爲已蹙矣 以兵守之 特書于册 世道愈降 吁 可畏也哉]” ≪發明≫
역주2 桓玄이……때 : 桓玄은 桓溫의 아들이다. 東晉 말기에 정권을 장악하여 元興 2년(403)에 安帝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천자를 칭하며 국호를 楚라고 하였으나, 劉裕에게 죽임을 당했다.(≪晉書≫ 권99 〈桓玄列傳〉)
역주3 參軍……일 : 劉裕는 建康에 돌아갈 적에 劉義康을 都督豫司雍幷四州諸軍事 및 豫州刺史에 임명하였는데, 여기서 ‘府의 일’이란 都督府와 豫州刺史의 일을 말한다. ≪資治通鑑≫에는 參軍이 相國參軍으로 되어 있다. 參相國軍事라고도 하였으며, 後漢 말 曹操가 丞相으로 있었을 때에 軍政을 총람하게 하였다. 晉나라 이후 公 이상의 都督은 參軍을 막료로 두었다.
역주4 : 反切音을 표시한 것이다. ‘反(번)’은 뒤집는다(되치다)는 뜻으로 번역을 의미하고, ‘切’은 자른다는 의미이다. 앞 글자의 初聲을 따고 뒷글자의 中聲과 終聲을 따서 읽는다.
역주5 徐邈 : 343~397. 東晉의 학자로 휘장을 드리우고 글을 읽으면서 城邑에 들어가지 않다가, 謝安이 천거하여 中書舍人이 되었다. 저술에 ≪正五經音訓≫, ≪穀梁傳注≫, ≪五經同異評≫ 등이 있다.(≪晉書≫ 〈徐邈傳〉)
역주6 重華(舜)가……이주시켰다 : 四凶은 堯임금 때 네 사람의 흉인으로, 共工․驩兜․三苗․鯀을 말한다. 舜임금이 공공을 幽州에 귀양 보내고, 환도를 崇山에 내치고, 삼묘를 三危로 쫓아내고, 곤을 羽山에서 죽이자 천하가 모두 복종하였다.(≪書經≫ 〈虞書 舜典〉)周 武王이 殷나라를 이기고서 九鼎(아홉 개의 솥으로 국가를 상징하는 보물)을 洛邑으로 옮겼는데, 周公과 成王이 武王의 遺志를 받들어 낙읍에 都邑(제2 수도)을 새로 만들기 위해 召公을 시켜 그곳을 조사하게 하였고, 낙읍에 도읍을 정하고 주공이 머물러 거처하면서 殷나라 백성들을 낙읍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書經≫ 〈周書 召誥․洛誥〉)
역주7 始興公……하였다 : 始興郡公은 王道, 廬陵郡公은 謝安, 始安郡公은 溫嶠, 長沙郡公은 陶侃, 康樂縣公은 謝玄이니 모두 封爵이나 追封이다. 王道는 王導로 琅邪 王氏의 중심인물이다. 晉 元帝가 琅邪王으로 있을 때 천하가 어지러울 것을 미리 알고 인재들을 모을 것을 권유하였으며, 東晉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웠다. 元帝, 明帝, 成帝 3대에 걸쳐 재상으로 있으면서 국정을 운영하였다. 왕도는 書法에도 능하였는데, 王羲之가 바로 그 조카이다. 謝安 역시 명문 陳郡 謝氏의 일족으로 오랫동안 會稽에서 은둔하면서 왕희지 등과 교류하였다. 40세가 넘어 관직에 올라 桓溫의 찬탈을 저지하고 재상이 되어 강남으로 침입해온 前秦 苻堅의 대군을 격파하였다. 溫嶠는 東晉의 재상이자 名將으로 明帝 때 王敦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陶侃은 東晉 때 명장으로 王敦과 蘇峻의 난을 진압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다. 謝玄은 謝安의 조카로 淝水에서 前秦 부견의 100만 대군을 격파하였다.
역주8 守捉의 城 : 把守하는 城이다.
역주9 宋立子義符 爲皇太子 : “宋나라 太子에게는 ‘皇’을 기록하지 않다가 여기에서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처음을 기록한 것이니, 이 뒤로 ‘皇’을 삭제하였다.[宋太子不書皇 此其書 何 志始也 後削之矣]” ≪書法≫
역주10 宋爲晉諸陵 置守衛 : “‘置守衛’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나무란 것이다. ‘置守衛’가 어찌하여 나무라는 것인가. 나라가 흥망하는 때가 많았는데, 이에 앞서 滅國의 주군은 ‘卒’로 기록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나, 宋나라에 와서 零陵王은 ‘弑’로 기록하였다. 죽은 임금에게 禮를 더하면서 廢主에게 無禮하였으니 欺瞞일 뿐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이전 시대 陵墓의 예우를 기록한 것이 세 번인데(이해(420)에 宋나라가 晉나라를 위해서 했고, 乙亥年(495)에 南朝 齊나라가 晉나라를 위해서 했고, 丙子年(496)에 元魏(北魏)가 漢․魏․晉나라를 위해 하였다.) 오직 宋나라의 경우만 나무라는 말이 된다.[書置守衛 何 譏也 置守衛則何譏 廢興之際 多矣 先是滅國之主 未有不書卒者 至宋 零陵王則以弑書 加禮於死君 而無禮於廢主 則爲欺而已矣 終綱目 書禮先代陵墓者三(是年宋爲晉 乙亥年齊爲晉 丙子年元魏爲漢魏晉)惟宋爲譏辭也]” ≪書法≫

자치통감강목(17) 책은 2021.11.0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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