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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9)

자치통감강목(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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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卯年(187)
정묘년丁卯年(187)
四年이라 春二月 滎陽 盜起어늘 河南尹何苗 討破之하니 以苗爲車騎將軍하다
나라 효령황제 중평孝靈皇帝 中平 4년이다. 봄 2월에 형양滎陽에 도적이 일어나자 하남윤 하묘河南尹 何苗(하묘)가 토벌하여 격파하니, 하묘를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삼았다.
進之弟也
하묘何苗하진何進의 아우이다.
韓遂圍隴西한대 涼州殺刺史以應之하니 遂圍漢陽이어늘 太守傅爕 하다
한수韓遂농서隴西를 포위하자 양주涼州에서 자사刺史를 죽이고 호응하니, 적이 마침내 한양漢陽을 포위하였다. 한양태수 부섭漢陽太守 傅爕이 이들과 싸우다가 죽었다.
韓遂殺邊章及北宮伯玉하고 擁兵十餘萬하여 進圍隴西하다
한수韓遂변장邊章북궁백옥北宮伯玉을 살해하고 10여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서 전진하여 농서隴西를 포위하였다.
涼州刺史耿鄙率兵討遂할새 鄙任治中程球注+百官志 “州刺史置從事史, 員職, 略與司隷同, 無都官從事, 其功曹從事爲治中從事, 主州選署及衆事.”러니 球通姦利하니 士民 怨之
양주자사 경비涼州刺史 耿鄙가 군대를 거느리고 한수를 토벌할 적에 경비가 정구程球를 신임하였는데注+후한서後漢書≫ 〈백관지百官志〉에 “자사刺史종사사從事史를 설치하였으니, 종사사從事史의 정원과 직책이 대략 사례교위司隷校尉종사사從事史와 같다. 그러나 〈자사刺史는〉 도관종사都官從事는 없고 공조종사功曹從事치중종사治中從事가 되어서 ” 하였다., 정구가 불법으로 이익을 취하는 데 밝으니, 병사와 백성들이 원망하였다.
傅爕 謂鄙曰 使君 統政日淺하여 民未知敎 賊聞大軍將至하면 必萬人一心하리니 不若息軍養德하고 明賞必罰이라
부섭傅爕이 경비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군使君이 정사를 다스린 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 백성들이 가르침을 알지 못합니다. 은 우리의 대군大軍이 장차 도착할 것이라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만 명이 한마음이 될 것이니, 군대를 휴식시키고 덕을 기르며 상을 분명히 하고 형벌을 반드시 내리는 것만 못합니다.
賊謂我怯하여 群爭勢離하리니 然後 率已敎之民하여 討成離之賊이면 其功 可坐而待也리라 不從하다
이렇게 하면 적들은 우리가 겁을 낸다고 생각하여 서로 다투어 형세가 이산離散될 것입니다. 그런 뒤에 이미 교화된 백성을 거느리고 이산된 적을 토벌하면, 그 공을 앉아서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경비는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行至狄道 別駕反應賊하여 殺球及鄙注+別駕從事, 刺史行部, 則奉引錄衆事, 別乘一乘傳車, 故謂之別駕.한대 遂進圍漢陽하니
경비耿鄙가 행군하여 적도狄道에 이르렀는데, 양주별가涼州別駕가 배반하고 적에게 호응하여 정구程球경비耿鄙를 살해하자注+별가종사別駕從事자사刺史를 순행하게 되면 앞에서 인도하며 여러 일을 기록하고 별도로 1대의 전거傳車(역참驛站의 전용수레)를 탔다. 그러므로 별가別駕라 하였다., 적이 나아가 한양漢陽을 포위하였다.
城中 兵少糧盡이라 爕子幹 年十三이러니 言於爕曰 國家昏亂하여 遂令大人不容於朝하니 今兵不足以自守
한양성 안은 병력이 적고 양식이 다하였는데, 이때 나이 13살인 부섭傅爕의 아들 부간傅幹이 부섭에게 말하기를 “국가(황제)가 용렬하고 무도하여 마침내 대인大人(부친)으로 하여금 조정에 용납되지 못하게 하니, 지금의 병력으로는 스스로 지킬 수가 없습니다.
宜還鄕里하여 徐俟有道而輔之注+爕, 北地靈州人.니이다 言未終 慨然歎曰 汝知吾必死邪 達節이요 守節注+左傳 “曹公子臧曰 ‘聖達節, 次守節, 下失節.’”이라
마땅히 향리鄕里로 돌아가서 서서히 가 있는 군주를 기다렸다가 보필하여야 합니다.”注+부섭傅爕북지北地영주靈州 사람이다. 하였다. 부섭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글피 탄식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너는 내가 반드시 죽으리라는 것을 아는구나. 성인聖人절의節義에 통달하고 그 다음의 사람은 절의를 지킨다.注+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나라 공자 장公子 臧이 말하였다. ‘성인은 절의에 통달하고, 그 다음은 절의를 지키고, 맨 아래는 절의를 잃는다.’” 하였다.
殷紂暴虐호되 伯夷不食周粟而死 吾遭世亂하여 不能養浩然之志하고 食人之祿이어늘 又欲避其難乎注+左傳 “子路曰 ‘食焉, 不避其難.’”
나라의 주왕紂王이 포악하였으나 백이伯夷가 〈나라에 절의를 지켜〉 나라의 녹봉을 먹지 않고 죽었다. 내 혼란한 세상을 만나서 능히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지 못하고 남의 녹봉을 먹었는데, 또다시 그 난을 피하고자 하겠느냐.注+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자로子路가 말하였다. ‘녹봉을 먹었으면 그 난을 피하지 않는다.’” 하였다.
吾行何之 必死於此 汝有才智하니 勉之勉之하라 主簿楊會 吾之程嬰也注+史記 “趙朔娶晉成公姊爲夫人, 晉景公三年, 屠岸賈殺趙朔, 滅其族. 朔妻有遺腹, 走公宮, 朔客公孫杵臼謂客程嬰曰 ‘胡不死.’ 嬰曰 ‘朔之婦有遺腹, 卽幸而生男, 吾奉之, 卽女也, 吾徐死耳.’ 居無何, 朔妻生男, 屠岸賈聞之, 乃索於公宮. 朔妻置兒於袴中, 祝曰 ‘趙宗滅乎, 若啼. 卽不滅, 若無聲.’ 及索兒, 竟無聲. 程嬰曰 ‘今一索不得, 後必復索之.’ 杵臼乃取他嬰兒, 負之, 匿山中, 諸將攻殺杵臼幷兒. 然趙孤兒乃在程嬰所, 卽趙武也. 居十五年, 景公乃立趙武爲卿, 而復其田邑.”니라
내가 가면 어디를 가겠느냐. 내 반드시 여기서 죽겠다. 너는 재주와 지혜가 있으니, 부디 노력하고 노력하라. 주부 양회主簿 楊會는 나의 정영程嬰이니, 〈반드시 너를 구원해줄 것이다.〉”注+사기史記≫ 〈조세가趙世家〉에 “조삭趙朔진 성공晉 成公의 누이를 얻어 부인夫人으로 삼았는데, 진 경공晉 景公 3년에 도안가屠岸賈가 조삭을 죽이고는 그 일족을 멸하였다. 조삭의 아내가 뱃속의 아이를 가진 채 공궁公宮으로 달아나니, 조삭의 문객인 공손저구公孫杵臼가 문객인 정영程嬰에게 이르기를 ‘어찌 죽지 않는가?’ 하자, 정영이 대답하기를 ‘조삭의 부인에게 뱃속의 아이가 있으니, 만일 다행히 아들을 낳으면 내 그를 받들 것이요, 딸을 낳으면 내 그때 죽어도 늦지 않다.’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조삭의 아내가 아들을 낳으니, 도안가가 이 말을 듣고 공궁公宮을 수색하였다. 조삭의 아내가 아이를 바지 속에 숨기고 축원하기를 ‘조씨趙氏 집안이 멸망하려면 네가 울 것이요, 만일 멸망하지 않으려면 네가 우는 소리가 없을 것이다.’ 하였는데, 아이를 찾을 때 끝내 우는 소리가 없었다. 정영이 말하기를 ‘지금 한 번에 찾아내지 못했으니 뒤에 반드시 다시 찾으러 올 것이다.’ 하니, 공손저구가 다른 어린아이를 데려다가 업고 산중에 숨었는데, 여러 장수들이 공격하여 공손저구와 함께 아이를 죽였다. 그러나 조씨趙氏고아孤兒는 정영의 처소에 남아 있었으니, 이 아이가 바로 조무趙武이다. 15년 있다가 경공景公이 마침내 조무趙武를 세워 으로 삼고 전지와 식읍을 회복시켜주었다.” 하였다.
狄道人王國 使人說爕曰 天下已非漢有 府君 寧有意爲吾屬帥乎
적도狄道 사람 왕국王國이 사람을 보내 부섭傅爕을 설득하기를 “천하天下는 이미 나라의 소유가 아닙니다. 부군府君께서는 혹 우리들의 장수가 되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하였다.
按劍叱之하고 遂麾左右進兵하여 臨陳戰殁하니 諡曰壯節侯라하다
부섭이 을 어루만지며 꾸짖고는, 마침내 좌우左右를 지휘하여 진군해서 적진을 마주하여 싸우다가 죽으니, 시호를 장절후壯節侯라 하였다.
耿鄙司馬馬騰 亦擁兵反하여 與韓遂合하고 共推王國爲主하여 寇掠三輔하다
경비耿鄙사마司馬마등馬騰 또한 병력을 보유하고 배반하여 한수韓遂와 연합하고 함께 왕국을 군주로 추대하고서 삼보三輔 지방을 침략하였다.
漁陽張擧, 張純하다
어양漁陽장거張擧장순張純이 반란을 일으켰다.
故中山相張純 與故泰山太守張擧及烏桓大人丘力居等으로 連盟하여 劫略薊中하여 殺校尉, 太守하니 衆至十餘萬이라
】 옛날 중산국中山國이었던 장순張純이 예전의 태산태수泰山太守장거張擧오환烏桓대인大人구력거丘力居 등과 연맹하여 계중薊中(계중)을 위협하고 공략하여 교위校尉태수太守를 살해하니, 무리가 10여만 명에 이르렀다.
屯肥如注+薊, 卽漁陽郡. 肥如縣, 屬遼西郡.하여 擧稱天子하고 純稱彌天將軍하고 移書州郡하여 告天子避位하고 勅公卿奉迎하다
비여肥如에 군대를 주둔하여注+는 바로 어양군漁陽郡이다. 비여현肥如縣요서군遼西郡에 속하였다. 장거는 천자天子, 장순은 미천장군彌天將軍이라 칭하고, 주군州郡에 글을 돌려서 천자天子피위避位(퇴위)하라고 통고하고 공경公卿들에게 명하여 장거를 받들어 맞이하게 하였다.
冬十月 長沙區星이어늘 以孫堅爲太守하여 討平之하니 封堅烏程侯注+區, 烏侯切, 又如字. 區星, 姓名. 烏程縣, 屬吳郡.하다
】 겨울 10월에 장사長沙구성區星이 반란을 일으키자, 손견孫堅태수太守로 삼아 토벌하여 평정하였다.注+오후烏侯이요, 또 본음本音대로 읽는다. 구성區星은 사람의 성명이다. 오정현烏程縣오군吳郡에 속하였다. 손견을 오정후烏程侯로 봉하였다.
전 태구장前 太丘長진식陳寔하였다.
在鄕閭하여 平心率物하니 其有爭訟 輒求判正注+判, 分也, 剖也. 謂剖析而見正理也.이어든 曉譬曲直하니
진식陳寔은 시골에 있으면서 마음이 공평하고 남에게 모범이 되었다. 분쟁과 송사가 있을 적에 사람들이 번번이 진식에게 찾아가서 판별하여 바로잡아주기를 구하면注+은 나눔이요, 분석함이다. 〈“판정判正”은〉 분석하여 바른 이치를 나타냄을 이른다., 진식이 잘잘못을 분명하게 일깨워 가르쳐주니,
退無怨者하고 至乃歎曰 寧爲刑罰所加언정 不爲陳君所短이라하니라
물러가서 원망하는 자가 없었고 심지어는 탄식하기를 “차라리 형벌을 받을지언정 진군陳君에게 잘못을 지적받지 않겠다.” 하였다.
楊賜, 陳耽 每拜公卿 群僚畢賀어든 輒歎寔未登大位하여 愧於先之注+先, 悉薦切.라하니라 及卒 海內赴弔者 三萬餘人이러라
양사楊賜진탐陳耽은, 공경公卿에 제수될 때마다 여러 동료들이 모두 축하하면 번번이 탄식하기를 “진식이 아직 큰 지위에 오르지 못해서, 내가 진식보다 먼저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이 부끄럽다.”注+(먼저하다)은 실천悉薦이다. 하였다. 진식이 하자 해내海內에서 달려와 조문한 자가 3만여 명이었다.
역주
역주1 與戰死之 : “殤帝의 篇에 張顯이 戰沒했다고 썼고, 安帝의 篇에 鄭勤이 전사한 것과 蔡諷이 戰沒한 것을 썼으나, 적과 싸우다가 죽었다고 쓴 경우가 있지 않았다. 그런데 傅爕은 적과 싸우다가 죽었다고 썼으니, 劉快 이래로 179년 동안 이런 경우가 일찍이 있지 않았다. 殤帝로부터 이때까지 太守를 쓴 것이 20번인데, 능히 羌族을 격파했다고 쓴 것이 아니면 능히 도둑을 평정했다고 썼고, 그중에 훌륭한 자는 충절에 죽었다고 써서 〈훌륭한 태수가 별로 없으니,〉 世道가 더욱 서글퍼할 만하다.[殤帝之篇 書張顯戰沒矣 安帝之篇 書鄭勤戰死 蔡諷戰沒矣 未有書與戰死之者 爕書死之 自劉快以來百七十九年 未之有也 自殤帝至是 書太守二十 非以能破羌書 則以能平盜書 其盛者以死節書 而世道益可悲矣]” ≪書法≫ 劉快는 王莽을 토벌하다가 죽었다. ≪資治通鑑綱目≫ 제8권 상 王莽 始建國 원년(9)에 보인다.
역주2 治中 : 前漢 元帝 때 설치되었는데, 治中從事史 또는 治中從事라 한다. 刺史의 주요 보좌이다.
역주3 州의……주관했다 : 司隷校尉는 漢 武帝 때 설치되었다. 조정의 백관을 감찰하고 京兆, 左馮翊, 右扶風의 三輔 지역과 京師인 雒陽, 河東尹, 河南郡, 河內郡, 弘農郡을 관장하였다. 그 속관에는 從事와 假佐가 있었다. 특히 從事史는 12명인데, 백관의 범법 행위를 감찰하는 都官從事와 해당 지역의 관원의 선임과 여러 일을 주관하는 功曹從事 등이 있었다. 州刺史 역시 從事를 두는데, 다만 사예교위의 도관종사는 없고 治中從事가 사예교위의 공조종사의 역할을 하였다. 주자사의 경우 別駕從事와 치중종사가 속관들의 우두머리 역할을 하였다.(安作璋․熊鐵基, ≪秦漢官制史稿≫, 齊魯書社, 1984)
역주4 前太丘長陳寔卒 : “邑長(縣長)에게 ‘卒’이라고 쓰지 않는데 陳寔에게 ‘卒’이라고 쓴 것은 그의 어짊을 기록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令長에게 ‘卒’이라고 쓴 것이 두 번이니(王渙과 陳寔) 진식에게 ‘前長’이라고 쓴 것은 그를 매우 어질게 여긴 것이다.[邑長不卒 卒陳寔 錄賢也 終綱目 令長書卒二(王渙 陳寔) 寔以前長書 甚賢之也]다” ≪書法≫

자치통감강목(9) 책은 2019.09.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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