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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3)

자치통감강목(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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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巳年(309)
三年이라
漢河瑞元年注+時, 汾水得玉璽, 淵改元河瑞.이라
◑漢 徙都平陽하다
漢太史令宣于修之 以星變으로 言於其主淵曰注+姓氏諸書, 有鮮于而無宣于. 不出三年하여 必克洛陽이라
蒲子 崎嶇하여 難以久安이요 平陽 氣象方昌하니 請徙都之하노이다 從之하다
三月 以山簡都督荊湘等州軍事注+元年, 分荊州‧江州八郡, 爲湘州.하다
濤之子也 嗜酒하여 不恤政事 荊州寇盜不禁이어늘 詔起劉弘子璠하여 爲順陽內史하니 江, 漢間 翕然歸之注+璠父弘之喪未終, 起之於苫塊, 荊州之民, 懷其父, 故翕然歸其子.
表璠得衆心하니 恐百姓劫以爲主라한대 詔徵璠爲越騎校尉하다 南州由是遂亂하니 父老莫不追思劉弘이러라
入京師하니 中書監王敦 謂所親曰 太傅專執威權이어늘 而選用表請 尙書猶以舊制裁之하니 今來 必有所誅리라
帝之爲太弟也 與繆播善이러니 及卽位 委以心膂하고 帝舅散騎常侍王延 尙書何綏 太史令高堂沖 竝參機密이러니
劉輿, 潘滔勸越誅之하니 乃誣播等欲爲亂이라하여 遣甲士三千入宮하여 執播等十餘人於帝側하여 付廷尉殺之하니
歎息流涕而已러라 曾之孫也
◯初 何曾 侍武帝宴이라가 退하여 謂諸子曰 主上 開創大業호되 吾每宴見 未嘗聞經國遠圖하고
唯說平生常事하니 非貽厥孫謀之道也 及身而已 後嗣其殆乎인저 汝輩 猶可以免이어니와
指諸孫曰 此屬 必死於難하리라 及綏死 兄嵩 哭之曰 我祖其殆聖乎인저하니라
日食萬錢호되 猶云 無下箸處하고 子劭日食二萬하고 綏及弟機, 羨 汰侈尤甚하여 與人書疏 詞禮簡傲
王尼見綏書하고 謂人曰 伯蔚 居亂世하여 而矜豪乃爾하니 其能免乎注+伯蔚, 綏字.
人曰 伯蔚 聞卿言이면 必相危害리라 尼曰 伯蔚 比聞我言이면 自已死矣注+比, 及也.리라 及永嘉之末 何氏無遺種하니라
司馬公曰 何曾 譏武帝偷惰하여 取過目前하고 不爲遠慮하고
知天下將亂하여 子孫必與其憂하니 何其明也注+與, 讀曰預.
이나 身爲僭侈하여 使子孫承流하여 卒以驕奢亡族하니 其明 安在哉
且身爲宰相하여 知其君之過 不以告而私語於家하니 非忠臣也니라
太尉劉寔 罷就第하다
連年請老호되 朝廷 不許러니 劉坦 言 古之養老 以不事爲優하고
不以吏之爲重하니 宜聽寔所守라한대 詔寔以侯就第注+不事, 謂不使任事也.하다
以王衍爲太尉하다
以頃來興事 多由殿省注+謂誅楊駿, 廢賈后, 誅趙王倫‧齊王冏及討成都王穎, 及羊后‧太子覃屢廢屢立, 皆殿中人爲之.이라하여 乃奏宿衛有侯爵者 皆罷之하고
更使將軍何倫, 王秉으로 領東海國兵數百人하여 宿衛注+自是, 帝左右皆越私人.하다
寇黎陽하여 陷之하다
漢主淵 遣劉景하여 將兵攻黎陽하여 克之하고 又敗王堪於延津하여 沈男女三萬餘人於河하다
聞之하고 怒曰 景 何面復見朕이리오 且天道豈能容之리오
吾所欲除者 司馬氏耳 細民何罪오하고 黜之하다
大旱하다
江, 漢, 河, 洛 可涉하다
漢石勒 寇鉅鹿, 常山하다
勒衆 至十餘萬이라 集衣冠人物하여 別爲君子營하여 以張賓爲謀主하고 刁膺爲股肱하고
夔安, 孔萇, 支雄, 桃豹, 逯明爲爪牙하니 幷州諸胡, 羯 多從之注+夔安‧孔萇‧支雄‧桃豹‧逯明, 五人姓名. 萇, 直良切. 逯, 盧谷切.러라
張賓 好讀書하고 闊達有大志하여 常自比張子房이러니
及勒徇山東 謂所親曰 吾歷觀諸將컨대 無如此胡將軍者하니 可與共成大業注+勒, 本胡也, 故謂之胡將軍.이라하고
乃提劍詣軍門하여 大呼請見하니 亦未之奇也러라
數以策干勒이러니 已而 皆如所言하니 由是 奇之하니라
寇壺關하여 陷之하다
漢主淵 使王彌與楚王聰으로 共攻壺關할새 以石勒爲前鋒都督하니 劉琨 遣軍救之호되 不克이라
遣河南內史王曠 將軍施融하여 拒之러니 濟河하여 欲長驅而前이어늘
融曰 彼乘險間出하니 且當阻水爲固하여 以量形勢注+間 古莧切니이다
怒曰 君欲沮衆邪아하고 遂踰太行하여 與聰戰於長平이라가 大敗하여 皆死하니 壺關 降漢하다
秋八月 寇洛陽이러니 弘農太守垣延 襲敗之하다
聰等 攻洛陽이어늘 將軍曹武等 拒之러니 皆爲所敗
長驅至宜陽하여 自恃驟勝하고 怠不設備러니 垣延 詐降하고 夜襲敗之注+垣延, 姓名.하다
冬十月 復寇洛陽이어늘 北宮純 擊敗之하다
漢主淵 復遣劉聰等하여 寇洛陽하여 屯西明門注+西明門, 洛城西面南頭第二門也.이어늘
北宮純等 夜帥勇士하고 出攻漢壁하여 斬其將軍呼延顥하다
南屯洛水러니 而大司空呼延翼 又爲其下所殺하니 衆遂潰歸注+洛水, 過洛城南.러라
宣于脩之言於淵曰 歲在辛未 乃得洛陽이니 今晉氣猶盛하니 大軍不歸 必敗하리이다
乃召聰等還하다 聰,曜歸平陽하고 彌南出轘轅하니
流民之在潁川, 襄城, 汝南, 南陽, 河南者 數萬家 素爲居民所苦 皆殺長吏하고 以應彌注+襄陽縣, 漢屬潁川郡, 武帝泰始二年, 分立襄城郡.하다


己巳年(309)
[] 나라 孝懷皇帝 永嘉 3년이다
[] 나라(前趙) 高祖 劉淵 河瑞 원년이다.注+이때 汾水 가에서 옥새를 얻고는, 劉淵河瑞改元하였다.
[] 봄 정월 초하루에 熒惑星紫微宮(紫微垣)을 침범하였다.
[] 나라(前趙)가 도읍을 平陽으로 옮겼다.
[] 나라(前趙) 太史令 宣于修之가 별의 변고로 인하여 그의 군주인 劉淵에게 말하기를注+姓氏에 관한 여러 책에 鮮于는 있으나 宣于는 없다. “3년이 못 되어서 반드시 〈나라의 도성인〉 洛陽을 함락할 수 있을 것입니다.
蒲子는 지형이 평탄하지 않아서 오랫동안 편안하게 살기가 어렵고 平陽氣象이 한창 왕성하니, 그곳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청합니다.” 하자, 유연이 그 말을 따랐다.
[] 3월에 山簡都督荊湘等州軍事로 삼았다.注+永嘉 원년(307)에 荊州江州의 8개 을 나누어 湘州로 만들었다.
[] 山簡山濤의 아들인데, 술을 좋아하여 政事를 돌보지 않았다. 처음에 荊州 지역의 도적을 금지하지 못하자, 詔令을 내려서 劉弘의 아들 劉璠(유번)을 을 마치기도 전에 불러 順陽內史로 삼으니, , 지역의 백성들이 모두 그에게 귀의하였었다.注+劉璠의 아버지 劉弘이 끝나지 않았는데 거적을 자리로 삼고 흙을 베개로 삼아 시묘살이하는 곳에서 유번을 불러내었으니, 荊州의 백성들이 그의 아버지 유홍을 그리워하였으므로 일제히 그 아들에게 귀의한 것이다.
이때에 산간이 표문을 올려 “유번이 사람들의 마음을 얻으니, 백성들이 억지로 그를 군주로 삼을까 두렵습니다.”라고 하자, 조령을 내려서 유번을 불러 越騎校尉로 삼았다. 남쪽 지역이 이 때문에 마침내 혼란해지니, 父老들 중에 유홍을 추모하여 그리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 太傅 司馬越京師에 들어와서 中書令 繆播(목파)와 황제의 외삼촌인 王延 등 10여 명을 죽였다.
[] 司馬越京師로 들어오자, 中書監 王敦이 친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太傅가 위엄과 권세를 전횡하는데, 인물을 선발하여 등용하고 표문을 올려 주청할 때마다 尙書에서 옛 제도를 가지고 제재하니, 태부가 이번에 반드시 몇 사람을 죽일 것이다.” 하였다.
황제가 太弟로 있을 적에 繆播와 친하였는데 즉위하자마자 그에게 심복의 임무를 맡기고, 황제의 외숙인 散騎常侍 王延尙書 何綏太史令 高堂沖은 모두 機密에 참여하였다.
劉輿潘滔가 사마월에게 권하여 이들을 주살하게 하니, 사마월은 마침내 목파 등이 을 일으키려고 한다고 모함하여 甲士 3천 명을 궁중으로 들여보내 황제의 곁에서 목파 등 10여 명을 붙잡아 廷尉에 회부하여 죽이니,
황제는 탄식하며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하수는 何曾의 손자이다.
[] 처음에 何曾武帝를 사사로이 모시고 있다가 물러 나와서 여러 아들들에게 이르기를 “主上이 국가의 큰 기업을 창건하였으나 매번 사사로이 뵐 적에 일찍이 나라를 경륜할 원대한 계책을 들은 적이 없고,
오직 平常의 일반적인 일만을 말씀하니, 이는 후손에게 좋은 계책을 물려주는 방도가 아니다. 〈창업의 영광이〉 자신에게만 미칠 뿐, 후손은 아마도 위태로울 것이다. 너희들은 그래도 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하고는
또 여러 손자들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 아이들은 반드시 에 죽을 것이다.” 하였다. 何綏가 죽자 형 何嵩(하숭)이 통곡하며 말하기를 “우리 할아버지는 아마도 聖人인가 보다.” 하였다.
하증은 하루에 1만 어치나 되는 식사를 하면서도 오히려 수저를 내려놓을 만한 찬이 없다고 음식 투정을 하였고, 아들 何劭는 하루에 2만 전 어치가 되는 식사를 하였으며, 하수와 그의 아우 何機, 何羨은 더욱 교만하고 사치하여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낼 적에 말하는 가 간략하고 오만하였다.
王尼는 하수의 편지를 보고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伯蔚亂世에 살면서 이와 같이 오만하고 豪氣를 부리니, 어찌 화를 면할 수 있겠는가.”注+伯蔚何綏이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백울이 의 이 말을 들으면 반드시 경을 해칠 것이다.” 하니, 왕니가 말하기를 “백울이 나의 말을 들을 때쯤이면, 그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注+는 미침이다. 하였다. 永嘉 말년에 이르러 何氏 집안에는 남은 후손이 없게 되었다.
[] 司馬溫公(司馬光)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何曾武帝가 구차하고 나태하여 당장 눈앞의 일에만 관심을 갖고 원대한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을 비판하였으며,
천하가 장차 혼란하여 자기의 자손이 반드시 그 우환을 겪게 될 줄을 알았으니, 어쩌면 그리도 현명한가.注+(참여하다)는 로 읽는다.
그러나 자신이 분수에 넘치고 사치한 짓을 하여 자식들로 하여금 그 유풍을 계승해서 끝내 교만과 사치로 집안을 망하게 했으니, 그 현명함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또 자신이 宰相이 되어서 군주의 잘못을 분명히 알면서도 직접 아뢰지 않고 집안에서 사사로이 말했으니, 그는 忠臣이 아니다.”
[] 太尉 劉寔이 벼슬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갔다.
[] 劉寔이 해마다 致仕를 청하였으나,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劉坦이 말하기를 “옛날에 조정에서 노인을 공양하는 것은 일을 맡기지 않는 것을 우대로 여겼고
벼슬을 시키는 것을 존중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으니, 마땅히 유식이 지키는 바를 따라야 합니다.” 하자, 詔令을 내려서 유식이 의 작위를 갖고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注+不事”는 일을 맡기지 않음을 이른다.
[] 王衍太尉로 삼았다.
[] 太傅 司馬越將軍 何倫으로 하여금 東海國의 군대를 거느리고 들어가 宿衛하게 하였다.
[] 司馬越은 그동안 일어난 일이 대부분 殿省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여注+〈“頃來興事 多由殿省”은〉 楊駿를 주살하고 賈后를 폐하고 趙王 司馬倫齊王 司馬冏을 주살한 것과 成都王 司馬穎을 토벌한 것과 羊后太子 司馬覃을 여러 번 폐했다가 다시 세운 것 모두를 殿中 사람이 했음을 이른다. 마침내 上奏하여 宿衛 중에 侯爵의 지위가 있는 자를 모두 파면하였다.
그리고 다시 장군 何倫王秉으로 하여금 東海國의 병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 궁중으로 들어와 宿衛하게 하였다.注+이로부터 황제 좌우는 모두 司馬越과 가까운 사람뿐이었다.
[] 나라(前趙)가 黎陽을 침략하여 함락시켰다.
[] 漢主 劉淵劉景을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黎陽을 공격하게 하여, 유경이 여양을 함락시키고 또 王堪延津에서 패퇴시켜 남녀 3만여 명을 황하에 빠뜨려 죽게 하였다.
유연은 이 말을 듣고 노하여 말하기를 “유경이 무슨 면목으로 다시 을 만나보겠는가. 또 天道가 어찌 이를 용납하겠는가.
내가 제거하고자 하는 자는 司馬氏뿐인데,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하고 그를 내쳤다.
[] 여름에 크게 가뭄이 들었다.
[] 長江漢水, 黃河洛水를 〈도보로〉 건널 수가 있었다.
[] 나라(前趙) 石勒鉅鹿常山을 침략하였다.
石勒이 鉅鹿과 常山을 침략하다石勒이 鉅鹿과 常山을 침략하다
[] 石勒의 병력이 10여만 명에 이르렀는데, 衣冠한 인물(사대부)들을 모아 따로 君子營을 만들어서 張賓謀主로 삼고 刁膺(조응)을 股肱(보좌)으로 삼고
夔安(기안), 孔萇(공장), 支雄, 桃豹, 逯明(녹명)을 爪牙(용사)로 삼으니, 幷州의 여러 胡族羯族이 많이 그를 따랐다.注+夔安孔萇, 支雄, 桃豹, 逯明은 다섯 사람의 성명이다. 直良이고, 盧谷이다.
[] 처음에 張賓은 독서하기를 좋아하였으며 성품이 활달하고 큰 뜻이 있어서 항상 자신을 張子房(張良)에게 견주었다.
石勒山東 지역을 경략하자, 장빈이 친한 사람에게 이르기를 “내가 여러 장수를 두루 살펴보았으나 이 오랑캐 장군 같은 자가 없으니, 그와 더불어 대업을 이룰 만하다.”注+石勒은 본래 胡族이다. 그러므로 胡將軍이라 한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검을 차고 석륵의 軍門에 나아가서 큰 소리로 만나보기를 청하였는데, 석륵은 그를 기특하게 여기지 않았다.
장빈이 자주 계책을 가지고 석륵에게 등용되기를 요구하였는데, 얼마 후 모든 일이 그가 말한 바와 같으니, 석륵이 이로부터 그를 기특히 여겼다.
[] 나라(前趙)가 壺關을 침략하여 함락시켰다.
[] 漢主 劉淵王彌楚王 劉聰으로 하여금 함께 壺關을 공격하게 할 적에 石勒前鋒都督으로 삼았다. 劉琨이 군대를 보내어 호관을 구원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司馬越河南內史王曠將軍 施融을 보내어 왕미 등을 막게 하였는데, 왕광이 황하를 건너고서 쉬지 않고 앞으로 전진하고자 하자,
시융이 말하기를 “저들이 험한 지세를 의지하여 기회를 틈타 출동하니, 우리는 우선 강물을 사이에 두고 굳게 지키면서 형세를 살펴야 합니다.”注+(틈)은 古莧이다. 하였다.
왕광이 노하여 말하기를 “그대가 여러 사람의 사기를 꺾으려 하는가.” 하고는 마침내 太行山을 넘어 長平에서 유총과 싸우다가 크게 패하여 모두 죽으니, 호관이 나라(前趙)에 항복하였다.
[] 가을 8월에 나라(前趙)가 洛陽을 침략하였는데, 弘農太守 垣延이 기습하여 패퇴시켰다.
[] 劉聰 등이 洛陽을 공격하자 장군 曹武 등이 이들을 막았으나 모두 패하였다.
유총 등이 승승장구하여 宜陽에 이르러는 그 동안 승리한 것을 믿고 태만하여 대비를 갖추지 않았다. 垣延이 거짓으로 항복하고는 밤에 기습하여 유총을 패퇴시켰다.注+垣延은 사람의 성명이다.
[] 겨울 10월에 나라(前趙)가 다시 洛陽을 침략하자, 北宮純이 이들을 공격하여 패퇴시켰다.
[] 漢主 劉淵이 또다시 劉聰 등을 보내어 洛陽을 침략하여 西明門에 주둔하게 하자,注+西明門은 낙양성의 서쪽 방향 남쪽 가장자리에서 2번째 문이다.
北宮純 등이 밤에 勇士를 거느리고 나가 나라 성벽을 공격하여 장군 呼延顥(호연호)를 참수하였다.
유총이 남쪽으로 洛水에 주둔하였는데, 大司空 呼延翼이 또 그의 부하에게 살해를 당하니, 무리가 마침내 궤멸하여 돌아갔다.注+洛水는 낙양성 남쪽을 지나간다.
宣于脩之가 유연에게 말하기를 “辛未年이 되어야 마침내 낙양을 점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나라 기운이 아직도 왕성하니, 우리의 大軍이 돌아오지 않으면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하였다.
유연이 마침내 유총 등을 불러 돌아오게 하였다. 유총과 劉曜平陽으로 돌아오고 王彌가 남쪽으로 轘轅으로 출동하니,
潁川襄城, 汝南, 南陽, 河南에 있던 流民 수만 가호가 평소 이 지역에 원래부터 거주하던 백성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터라, 모두 長吏를 살해하고 왕미에게 호응하였다.注+襄陽縣나라 때에는 潁川郡에 속하였는데, 武帝 泰始 2년(266)에 나누어 襄城郡을 세웠다.


역주
역주1 春正月朔……犯紫微 : “일식이 아니면 그믐과 초하루를 쓰지 않는데, 여기에서 ‘朔(초하루)’이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큰 이변을 기록한 것이다. 熒惑星이 紫微宮을 침범한 것은 이변인데, 정월 초하루[三朝]에 나타났으니, 매우 큰 이변이다. 그러므로 자세히 썼는데 한 해를 사이하여 〈311년에〉 황제가 〈平陽으로〉 옮겼으니, 변고가 이유 없이 생기지 않는다는 말이 진실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별의 변고를 정월 초하루에 쓴 것은 이 한 번뿐이다.[非日食 不書晦朔 此其書朔 何 記大異也 熒惑犯紫微 異矣 而見於三朝 甚大異也 故詳之 間一歲而帝遷 變不虛生 信哉 終綱目 星變書正月朔者 一而已]” ≪書法≫
“지난해 정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는데 이번에 또다시 熒惑星이 紫微宮을 침범하였다. 이때 국가의 권력이 司馬越에게 있었는데 하늘의 변고가 이와 같았으니, 이것을 써서 天心이 군주를 仁愛하여 비록 亂世라 할지라도 일찍이 경계하는 뜻이 없지 않음을 나타내려 한 것이다. 그런데도 사마월 등은 여전히 禍를 좋아하여 두려워할 줄 몰랐단 말인가.[去年日食正旦 今玆熒惑又犯紫微 是時國柄在越 而天變如此 書之以見天心仁愛 雖亂世 亦未嘗無告戒之意耳 越等尙可樂禍而不知懼乎]” ≪發明≫
역주2 太傅越……帝舅王延等十餘人 : “‘入(들어왔다)’은 司馬越을 미워하는 말이요, ‘殺(죽이다)’은 제멋대로 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繆播에게 관직을 쓰고 王延에게 임금의 친척이라고 썼으니, 사마월이 몹시 군주를 무시한 것이다.[入 惡辭也 殺 專辭也 播以官書 延以親書 越之無君 甚矣]” ≪書法≫
“이때 海內가 크게 혼란하여 胡와 羯의 기세가 하늘을 찔렀으니, 上下가 서로 협력하여 나라를 부지해도 구제하지 못할까 두려운데, 司馬越의 소행이 마침내 이와 같았던 것은 어째서인가. 그러므로 ‘들어왔다’라고 썼으니 이로써 사마월이 군주를 무시한 것을 볼 수 있고, ‘죽였다’라고 썼으니 이로써 繆播 등이 죄가 없음을 볼 수 있고, 中書令이라고 쓰고 황제의 외삼촌이라고 썼으니 이로써 大臣과 貴戚이 스스로 몸을 보존하지 못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사마월의 죄가 어떠한가. 관을 쪼개어 시신을 태워도 다행일 것이다.[是時海內大亂 胡羯滔天 上下相與協力扶持 猶懼弗濟 而越之所爲乃爾 何哉 故書入 則見越之無君 書殺 則見播等之無罪 書中書令 書帝舅 則見大臣貴戚之不克自保 然則越之罪爲何如耶 剖棺焚尸猶爲幸也]” ≪發明≫
역주3 太傅越……入宿衛 : “北宮純에게는 ‘入衛(들어와 호위했다.)’라고 썼으나 누구를 거느렸는지를 쓰지 않았는데, 여기서는 ‘領國兵(東海國의 군대를 거느렸다.)’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司馬越의 마음을 주벌한 것이다. 이때 황제의 처소에는 사마월의 무리 아닌 자가 없었으니, 황제의 처지가 매우 위태로웠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入宿衛’라고 쓴 것이 3번인데(漢나라 高后 2년(B.C.186), 武帝 建元 6년(B.C.135), 이해(309)), 오직 何倫에 대해서는 인정한 말이 아니다.[北宮純書入衛矣 不書所領 此其書領國兵 何 誅心也 於是帝所無非越黨者矣 危哉 終綱目 書入[宿]衛三(漢高后二年 武帝建元六年 是年) 惟何倫非予辭]” ≪書法≫

자치통감강목(13) 책은 2020.12.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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